2019. 8. 24. 큐티
사사기 11:29 ~ 40
사사 입다(3) - 입다의 승리와 서원
관찰 :
1)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여 승리를 주시다
- 29절. “이에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의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의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 입다는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상세히 고했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입다에게 부으셔서, 성령께서 입다에게 임하셨다. 그렇게 되자 입다가 가는 길의 사람들이 입다와 함께 하고, 암몬 자손과의 싸움에 대단한 용기를 얻게 되었던 것 같다. 암몬 자손이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가까이 갈수록 입다와 그와 함께 하는 무리들은 용기백배하게 되었다.
- 30절.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 입다는 암몬 자손과의 싸움에 임하면서 서원을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시게 되면, 자신도 하나님께 소중한 것을 드리겠다는 서원이었다.
- 31절.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 입다는 이 싸움이 이스라엘에게 매우 중요한 전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객관적인 전력으로는 싸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증거를 구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을 신뢰했다. 그리고 그가 암몬 족속의 왕과 변증을 할 때의 상황을 돌이켜 보면, 입다가 하나님의 역사와 율법에 대해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한 서원이,여기서 언급한 “번제물”이라는 것이 “인신공양”의 의미로서의 제물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율법에는 사람을 번제물로 드리는 것에 대해서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입다가 율법에서 금하는 인신제사로 사람을 불에 살라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서원한 것으로 보는 것은 큰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히브리서에서도 입다는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다(히 11:32). 여기서 “번제물”이라는 것은 꼭 사람을 죽여 불에 태워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하나님의 전에서 봉사하는 삶을 온전히 살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 입다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집안에서 누구던지 간에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를 영원히 기억하는 존재로 내놓겠다고 그렇게 서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서원이 지나친면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입다의 중심은 그렇게 이 전쟁의 승리를 간구하고 있던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 32절.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 주시매” => 입다와 그의 군대는 암몬 자손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길르앗의 장로들은 사실 입다가 자살특공대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렇기에 승리하고 돌아오면 자신들의 우두머리로 섬기겠다는 맹세까지 하게 된 것이다. 기생의 아들인 입다에게 머리를 숙이게 된데에는 그만치 불가능한 미션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입다가 암몬 자손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이 승리는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였다. 입다는 그것을 분명히 알았다.
- 33절.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매우 크게 무찌르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 입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20개의 성읍을 치고 또 암몬 자손의 큰 성읍 아벨 그라밈까지 박살을 내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도리어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에게 항복을 선언하고, 자신들의 패배를 인정하게 되었다. 입다는 그렇게 된 정황에서 전쟁을 그친다. 자칫 암몬 자손을 끝까지 진멸하겠다고 한다면 그들의 목숨을 건 반격에 이스라엘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멈추라고 한 시점에서 입다는 싸움을 멈추었다.
2) 입다의 딸이 맨 먼저 영접하다
- 34절.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 입다는 개선장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미스바의 자기 집에 들어가면서, 누가 자신을 맨 먼저 영접하게 될까 궁금해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했기 때문이다. 그 때 입다는 제발 자신의 무남독녀 딸이 나오지 않기를 빌었을 것이다. 그러나 맨 앞에서 소고를 치며 춤을 추며 자신을 반기는 사랑하는 딸을 보면서 가슴이 턱하고 막혔을 것이다.
- 35절.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 => 입다는 맨 앞에서 자신을 영접하는 딸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옷을 찢고 슬픔을 표현한다. 그러나 이것이 그 딸을 죽여서 번제물로 드리기 때문에 하는 행위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딸이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서 혼인하지 못하고 자신의 대가 끊어지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표현이다. 입다는 하나님께 서원을 했고, 하나님께서 전쟁에서 큰 승리를 주셨기 때문에 이 서원을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입다 차원에서의 신앙이었다.
- 36절.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 => 입다의 삶을 잘 알고 있는 입다의 딸은 아버지가 하나님께 서원한 내용을 들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는다. 입다의 딸은 아버지의 서원이 자신을 통해서 성취되어야 한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은 입다의 신앙의 됨됨이가 어떠했는지를 알게 되는 대목이다. 아버지가 서원했다고 딸이 순순히 따르는 것은 아버지의 신앙인격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다. 입다의 딸은 하나님께서 아버지 입다를 통행서 암몬 자손과의 싸움에 주신 승리를 기뻐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버지 입다의 서원대로 행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
- 37절. “또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버려 두소서 내가 내 여자 친구들과 산에 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겠나이다 하니” => 입다의 딸은 두 달의 말미를 요구하고 있다. 이제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져서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끊고 하나님만 섬기는 삶을 살게 된 것에 대해서 여자 친구들과 슬픔을 나누겠다는 것이었다. 입다의 딸은 자신이 요구할 것을 요구하는 용기를 가진 여성이었고, 진정 자신이 따르고자 하지 않았다면 하지 않을 수도 있는 반응을 보였을 여성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입다의 딸은 아버지의 서원에 응하기 위해서 자신도 자발적 순종을 위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자 한다.
- 38절. “그가 이르되 가라 하고 두 달을 기한하고 그를 보내니 그가 그 여자 친구들과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 입다는 딸의 요구에 응해주고 있다. 입다는 자신을 암몬 자손들과의 싸움을 위해서 데리러온 길르앗의 장로들에게도 매우 인격적이고 신앙적으로 그들을 대했던 존재이다. 그리고 당대의 마이너 그룹들이 입다에게 와서 위로를 얻고, 그의 인격과 신앙의 테두리 안에 거하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입다는 자신의 딸을 대함에 있어서도 상당히 인격적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또, 입다가 딸이 하나 뿐이었다는 것이 그가 여러 부인을 거느리고, 성적으로 문란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자신의 대를 위해서 아들을 얻고자 여러 아내를 얻는 비신앙적 행위를 하지 않은 성결한 사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 입다이기에 자신의 딸을 자신의 서원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부분에 있어서 입다의 딸의 의견을 존중해 주고 있다.
- 39절. “두 달 만에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아온지라 그는 자기가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이스라엘에 관습이 되어” => 입다의 딸은 두 달의 말미 중에 도망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약속한 두 달의 시간 뒤에 아버지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아버지의 서원대로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져서 죽기까지 결혼하지 않고, 남자와 동침하지 않고, 하나님만 수종드는 삶을 살았다. 이렇게 하나님께 드려지는 일이 이스라엘에 관습으로 남게 되었다. 입다 역시 두 달의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고, 지신의 대가 이렇게 완전히 끊어지는 것에 대해서 속이 상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서원한 바를 온전히 이루는 것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의 딸 역시 그 선택에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있다. 입다는 신앙의 진실성을 드러냈고, 용단을 내린 것이다. 그런 그의 신앙은 이스라엘에게 유익한 신앙의 모범이 된 것이다. 만약 이것이 그의 딸을 불에 태워 제사를 드린 것이라면 이스라엘에 관습으로 남았다는 표현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사적을 기록한 것이 사사기의 기자이다. 사사기의 기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승대로 사무엘이 맞다면, “이스라엘의 관습”이라는 표현이 사람을 산 채로 불에 태우는 번제 행위를 “이스라엘의 관습”이라고 표현했을 리가 없다. 하나님께 드린 믿음의 용단과 결단을 이스라엘의 관습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 40절.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 => 여기서 혹자는 “애곡하더라”라는 표현을 “찬송하더라”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입다의 딸이 하나님께 드린 헌신에 대해서 사람들이 나흘 씩 위로하고 축복하고 기념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만일 입다의 딸이 불에 태워 번제물로 드려진 것이라면 이렇듯 해마다 나흘씩 인신공양을 기념하며 시간을 갖는 것은, 그것도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매우 비상식적인 행위가 될 것이다. 더구나 입다가 계속 살아있으며 사사로 다스리는 과정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 된다. 입다의 딸의 희생과 헌신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승리에 감사를 잊지 않는 시간을 가졌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가르침 :
1) 입다는 암몬 자손의 침공이 이스라엘에 매우 심각한 위협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싸우는 싸움이 얼마나 불가능한 싸움이라는 것도 잘 알았다. 그렇기에 가능한 외교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했다. 그러나 암몬 자손의 왕이 도대체 듣지 않았다. 암몬 자손의 왕의 입장에서 보자면, 18년간이나 조공을 바치고 자신들을 섬기던 이스라엘이 하루 아침에 배반한 것에 대해서 내버려 둘 수 없는 것이었다. 더구나 큰 군대를 동원해서 이스라엘을 침공한 것이기에 아무런 전과가 없이 돌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통치 행위를 위해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이 연약해진 상황이고, 주변 국가들도 어찌 하지 못하는 무주공산의 상황에서 이스라엘을 거저 먹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암몬 자손의 왕은 단숨에 이스라엘을 점령하고자 했다. 자신들의 전력이 이스라엘과 비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승리는 자신들의 것이라 분명하게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입다는 관점이 달랐다. 그는 평생 하나님을 섬겼다. 비록 기생의 자식이라는 꼬리표로 인해서 많은 억울함이 있었지만 그것을 신앙으로 이긴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의 지도력에 감화해서 스스로 찾아와 함께 하는 무리들을 이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승리를 주실 것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되었다. 더구나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로 그 확신에 확신을 더했다. 입다는 거기에 자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서원을 하게 된 것이다.
2) 이 서원에서 입다가 생각한 맨 처음으로 자신을 맞이하러 올 것이라 생각한 사람이 누구일까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자신의 아내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입다는 자신이 평생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고 살겠다는 서원을 한 것일수도 있다. 입다가 자손이 오직 딸 하나 뿐이었다는 것은 그가 최소한 여러 여성과 혼인을 한 것은 아닐 것이라는 합리적 추측을 하게 된다. 더구나 여러 정황 속에서 입다의 신앙을 생각해 볼 때, 이제 와서 새로운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거나 할 사람은 아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기에 입다의 서원은 사실은 자신의 서원이었을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철저히 나 자신의 사견이다. 입다의 예상과 달리 자신의 무남독녀가 자신의 서원을 이행해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이 때 입다는 하나님께 따지거나 서원을 무를 수 있는 길을 모색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입다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입다의 딸 역시 꼼수를 부리지 않는다. 아버지의 신앙 인격을 믿고 입다의 딸 역시 자발적 순종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에서는 입다를 믿음의 선조의 반열에 언급을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입다를 귀한 신앙의 모범으로 여기게 된 것이다.
3) 입다가 입다의 딸을 산 채로 불에 태워드리는 번제로 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 정황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자칫 당시의 상황과 다르게, 문자적인 해석만으로 신앙의 모범이 뒤틀리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사사기에서 입다의 기사가 짧지 않게 소개되는 것은 성령께서 의도하신 바가 있기 때문인 것이며, 그것이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전제해서 말씀을 보아야 할 것이다.
적용 :
1) 입다는 입다의 차원에서 최선의 서원을 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막대한 희생이 따름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이행했다. 그리고 그 대상이 되는 입다의 딸이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모범을 보이고 있다. 이렇듯 대를 이어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모습을 보이는 예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사사기의 영적으로 매우 어두웠던 시기에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자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함께 믿음의 길로 인도했던 입다의 신앙은 “번제물”이라는 용어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너무 다른 결론이 내려지게 된다. 성령의 임재로 큰 승리를 거둔 입다가 이교도적인 판단과 행위를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발견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입다는 하나님께 서원을 드리고 자신의 가장 아끼는 딸을 하나님께 드리게 되었다. 그러한 믿음의 모범을 귀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할 것이다.
2) 나는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가? 하나님께 드리는 소중한 것을 무식한 결정이라 함부로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의 신앙 인격이다. 더구나 받으시는 하나님은 인격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말 중요한 것을 드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나의 헌신에 대해서 그 중심을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