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미움과 사랑
구활
수필 미워
나는 수필이란 낱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수필가란 직함까지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인이나 작가란 단어 뒤엔 베레모를 쓴 근사한 예술가의 이미지가 그림자처럼 따라 붙는다. 베레모야 화가도 쓰고 산악인들도 즐겨 쓰는 모자지만 아무래도 시인이 좀 더 어울릴 것 같다. 시골길을 가다 ‘시인과 농부’ 또는 ‘시인의 원두막’같은 막걸리 집이나 찻집을 보면 이름 자체에 운치가 묻어있다. 하얀 사발에 출출 넘치도록 막걸리를 따라 한 잔 마시면 시인이 된 듯한 기분에 젖는다.
요즘 텔레비전에는 ‘영상 포엠’ 이나 ‘포토 에세이’ 같은 프로그램이 사랑을 받고 있다. ‘영상 포엠’에는 풍경 속에 시 한 편이 줄줄이 내려 왔다 짧게 사라진다. 그러나 ‘포토 에세이’에는 아름다운 농어촌 배경과 함께 고단한 삶의 이야기가 물 흐르듯 흘러간다.
인생은 시가 아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를 인생이라 한다면 그건 산문, 즉 수필이지 시가 아니다. 그 산문 속에 생일, 입학, 결혼, 출산 등 시적요소가 다문다문 한 편씩 실릴 뿐이다. 그런데도 왜 시인과 작가들은 폼 재며 우쭐대고 수필가들은 명함 한 장 내미는데도 부끄러워하는가.
나는 늦깍이 행자 신세로 수필을 써오고 있다. 추천이니 신인상이니 그런 구차스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 그냥 글을 쓰는 문학인이다. 문학잡지를 통한 본격적 수필쓰기가 벌써 30년이 됐다. 그동안 이 세상 밖에 존재하는 모든 신들의 가호로 두 권의 수필 선집을 포함해서 모두 10권의 책을 냈다. 문학상이란 것도 받아 봤으며 ‘책을 내겠다.’고 신청하여 저술지원금도 여러 번 받았다. 깜냥에 비해 너무 과분한 일이다.
트라우마
나는 ‘수필가 구활’이란 명함을 찍어 본 적이 없다. 남들 앞에 드러내기를 싫어하는 성품 탓도 있겠지만 수필가라는 칭호가 별로 맘에 들지 않은 것이 더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나는 수필 또는 수필가에 대한 오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수필을 처음 쓰기 시작한 초창기에 문인들을 만나면 “이제 문학 쪽에 발을 들여 놓았다며.”라고 격려해 주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간 내 소식을 모르고 있던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는 친구가 “무슨 글을 쓰는데.”라고 물었다. “첫 수필을 발표한 후에 요즘 여러 문학잡지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지.”라고 내 옆의 친구가 대답했다. 그 말끝을 받아 “수필도 문학이가. 아무나 쓰면 되지.”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해머로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신혼 초에 아내에게 바이올린 한 곡조를 들려준 신랑이 “당신은 아마추어군요, 리듬이 세련되지 못해요.”란 핀잔을 들었다. 신랑은 그 후론 바이올린을 손에 쥐지 않았다. 그는 아내가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 말이 바이올린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 동안 상처를 안고 살아야 했다.
수필에 대한 정신적 외상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나에게 깊은 상처를 심어준 그 친구는 제대로 된 시 한 편 남기지 못하고 일찍 죽었다. 문단 행사에 나가 보면 시인 작가 등 타 장르의 문인들이 수필을 깔보는 눈빛은 여전하다. 그런 부류들은 ‘잘 익은 벼 이삭’이 아니라 ‘고개 숙일 줄 모르는 조 이삭’ 같은 사람들이다. 내 선배 중에도 있고 후배 중에도 있다. 그들은 좋은 시는커녕 시 답지 않은 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시를 쓰며 우쭐대고 있다. 나는 그들을 때 시(時)자 사람 인(人) 자를 써 시인((時人)이라 부른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되기 까진 수필가들의 책임이 크다. 수필계 내부에 독버섯처럼 도사리고 있는 근원적인 부조리가 수필의 발육부진을 재촉한 한 원인이기도 하다. 수필 잡지의 신인상 제도를 통한 책값 떠안기기, 상장만주고 상금은 돌려받는 비열한 수작들, 비평 정신없는 평론가들의 주례사 같은 평론, 잡지 일이백 권쯤 사주고 얻은 수필가란 타이틀에 취해 등단 이후엔 글을 쓰지 않는 부류들도 수필 발전의 저해 요소임은 분명하다. 내부가 썩어가고 있는 이런 수필계가 나는 싫다.
탈출 실패
수필을 처음 쓰기 시작하면 고향산천과 부모와 유년의 추억들이 먼저 튀어 나온다. 더욱이 ‘수필은 허구가 가미되면 안 된다.’는 소리를 주워들은 터라 생살을 잘라 도마 위에 올리듯 곧이곧대로 쓴다. 쓴 글이 활자화 되면 신기하고 자랑스럽다. 때론 눈물이 난다.
첫 수필을 발표한 후 글쓰기가 너무 재미있어 술을 끊어버렸다. 하루 저녁에 한 편도 쓰고 두 편도 썼다. 고향 동네 전체가 소재였고 얼굴도 본 적 없는 아버지와 가난이란 샅바를 잡고 평생 씨름을 하고 계셨던 어머니는 이야기의 보물창고였다. 이런 서정 수필을 모아 두 권의 수필집을 내고 나니 회의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즈음이 고물전을 돌아다니며 서화 나부랭이를 수집하면서 옛 선비들의 우화를 읽는데 심취해 있을 때다. 호생관 또는 칠칠이란 호를 가진 괴짜인생 최북의 이야기를 읽고 느낀 게 많았다. 그는 가난했지만 자존심이 강했다. 아침에 그린 그림을 팔아 점심을 때우고 오후에 그린 그림으로 술을 사 저녁을 대신하곤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돈을 많이 준대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허투루 그림을 내 주는 일이 없었다.
하루는 그림이나 팔아 볼 요량으로 동네의 지체 높은 양반집을 찾아갔다. 하인이 그를 보자 “최직장(낮은 벼슬) 오셨습니까.”하자 화가는 “왜 정승이라 부르지 않느냐.”하고 화를 냈다. “언제 정승이 되셨습니까.” “그러면 내가 직장 된지는 언제인가. 가짜 벼슬로 부를 바에야 직장보다는 정승으로 불러야지”하고는 주인을 만나지 않고 돌아서 버렸다. 나는 이 글을 읽고 몹시 부끄러웠다. ‘수필도 문학인가’란 한 마디에 주눅이 들어 안절부절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화가들은 비교적 변신을 잘 한다. 하나의 화풍이나 똑 같은 소재에 오래 매달리지 않는다. 도자기를 그리다가 춤사위로 옮겨 가기도 하고 산을 그리다가 사막으로 넘어 가기도 한다. 이중섭도 대구 시대, 서귀포 시대, 충무 시대가 있었고 지역 따라 화풍이 달랐다. 실험과 변신은 그 자체가 도약이자 발전이다.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그대로 서정수필 쓰기에 안주하고 있을 것인가.
명찰을 바꿔 달고 싶었다. 수필가 대신 문화유산답사가, 풍류학 연구가, 여행작가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최북의 야멸찬 자존심과 당돌함을 아무리 본받고 싶어도 ’나는 수필인이다.‘하고 번듯하게 나설 자신이 없었다.
역사 탐방
테마 수필을 쓰기 시작했다. 맘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서정 수필은 돌림 마개를 꼭 닫아 냄새조차 피우지 못하게 만들었다. ‘나는 이제 이 길로 가는 거야.’ ‘아이 아이 써어.’ 내가 내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문화유산 답사 길에 올랐다. 수필을 쓰기 시작한 이래 첫 변신이었다.
수필은 앉아서 기억을 더듬어 추억을 풀어쓴다. 그러나 답사기는 발로 써야 한다. 32년 7개월간의 기자생활이 발로 글을 쓴 긴 세월이 아니던가. 답사기를 르뽀르따쥬 형식으로 쓸 것인가 수필 식으로 쓰느냐로 한참 고민하다가 내 방식인 ‘되는 대로’ 쓰기로 했다. 마침 문화관광부에서 문화유산답사 전문강사 3개월 보름간의 양성코스가 공고된 것은 가뭄 속의 단비였다.
일주일에 나흘 동안 전국의 유적지를 헤집고 다녔다. 대학 때부터 산악활동을 하면서 전국의 유명산들을 섭렵한 터여서 역사탐방이 만만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내가 아는 산과 절은 수박의 겉껍데기에 불과했다. ‘껍데기는 가라’고 외치며 문화유산에 대한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일주일 동안의 답사가 끝나면 반드시 글 한 편을 썼다. 그걸 모아 ‘시간이 머문 풍경’이란 답사기를 책으로 묶었다. 그 뒤에도 혼자 절집 탐방을 계속하여 ‘하안거 다음날’이란 절집 순례기를 상재했다.
풍류 입문
내 피 속에는 풍류라는 유전자가 게놈이란 줄기세포에 꼭꼭 박혀있는 것 같다. 문둥이가 문둥이를 만나면 반갑듯이 풍류꾼은 풍류꾼 끼리 만나면 단번에 알아보는 법이다. 걸레 중광스님은 나를 처음 보는 순간 “너는 내꺼야.”라고 했다. 속리산 에밀레박물관 고 조자용 선생님은 나를 소개한 선배를 제쳐두고 제자 대접을 하며 ‘구 두목’이라 불렀다. 일 년에 적어도 서너 번씩은 찾아가 뵙고 밤샘 술을 마셨다.
나는 그동안 5~10년 단위로 허물을 벗든지 털갈이 작업을 해왔다. 그러나 그 결실은 아직 미미하다. 하나님께서 “사과나무 한 그루 심고 빨리 올라오라‘는 기별이 올 때까지 그렇게 할 작정이다. 그래도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어영부영하다 결국 내 이럴 줄 알았다.”(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는 문구를 새기거나 중광스님의 빗돌처럼 “괜히 왔다 간다.”고 쓸지 그건 장담하지 못한다.
10여 년 동안 풍류에 깊이 천착해 왔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면서 옛 선비들의 시, 시조, 가사, 서간문을 닥치는 대로 사다 읽었다. 느낌이 오는 문장과 내용이 있으면 밑줄을 긋고 책장을 접어 두었다. 마음에 와 닿는 것부터 끄집어 내 윤색을 하고 스토리를 만들어 새 옷으로 갈아 입혔다. 시조 한 편이 수필 한 편으로 태어나고 한시 한 구절과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한 폭 본 소감이 맛있는 송편 같은 산문으로 빚어졌다.
옛 선비들은 가난 속에서도 풍류를 즐기며 살았다. 다 같이 벼슬을 해도 매관매직으로 돈을 챙긴 오리들은 부유하게 살았지만 한 끼 밥과 한 잔의 술이 고팠던 올곧은 선비들은 양심을 팔지 않고 비가 새는 띄집에서 살았다. 풍류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자 방구들 사색이 바깥으로 뛰쳐나와 산천으로 내 달렸다.
지리산 종주할 때는 내 앞서 오른 선비를 기억해 낸다. 유두류록(遊頭流錄)을 쓴 김종직과 조식을 상기하곤 돌아와선 산행기를 나의 곡조에 맞춰 재즈나 헤비메탈로 편곡하기도 한다. 강원도 삼척의 두타산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길에 삼화사 밑 무릉계곡 너럭바위 위에 새겨져 있는 양사언과 김시습이 쓴 글씨를 만난 적이 있다. 나는 그 곳에서 선비들의 노는 모습을 혼자 그려보고 풍류의 정의를 ‘시주색 풍월수’(詩酒色 風月水)로 결론을 내렸다.
풍류는 노는 것이다. 시를 지으면서 여인들과 둘러앉아 술을 마시며 즐기는 것이다. 즐길 장소로는 바람 선선한 정자, 달 밝은 강, 맑은 물이 흘러가는 계곡이 제격이다. 여기에 시가 빠지면 시정잡배들의 짓거리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그래서 풍류는 점잔과 난봉 사이에 매달려 있는 붉은 과일이라 해도 무방하다.
“흰 너럭바위 위에는 풍류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선인들의 일필휘지 명필들이 흘러가는 계류수를 베개처럼 베고 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설잠선사 매월당 김시습의 글씨도 있고, 조선 명필 봉래 양사언의 '무릉선경 중대천석 두타동천'(武陵仙境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란 달필이 붓끝에서 방금 떨어져 나온 듯 싱싱하다. 풍류(風流)라는 낱말 만치 멋스럽고 넉넉한 것이 또 있으랴. 풍류는 '점잔'을 벗어나 '난봉'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속되지 않고 그렇다고 성스럽지도 않다. 그것은 어쩌면 '피의 소리'이기도 하고 '끼의 맥박'이기도 하고 나아가서 '기질의 숨결'이기도 하다. 풍류의 매체는 술이다. 술 없이는 풍류를 논할 수가 없다. 술은 시며 소설이며 수필이다.”(‘풍류별곡’의 부분)
풍류학을 공부하면서 ‘바람에 부치는 편지’와 ‘풍류의 샅바’라는 두 권의 책을 냈다. 그러나 풍류공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마 죽을 때까지 씨름을 해도 풍류란 장사는 나의 바깥다리 후리기나 호미걸이에는 좀처럼 넘어가지 않을 것 같다.
고향의 맛
서점에 가면 출판계의 추세를 짚어 볼 수 있다. 몇 년 사이에 음식에 관한 책들이 부쩍 많이 눈에 띄었다. ‘옳다, 이것이로 구나’. 음식을 새로운 화두로 삼았다. 나는 어머니가 해 주신 시골 음식 쪽으로 파고들기로 했다. 스무 편 쯤 써서 각 편마다 직접 그린 스케치 한 장씩을 붙여 내가 봉직했던 매일신문으로 찾아갔다. “연재를 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비쳤다.
연재는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연재 글은 NAVER에서 받아 ‘구활의 고향의 맛’이란 제목으로 체계적으로 게재되고 있다. 시작한 지 일 년이 지나자 출판사에서 ‘책을 냈으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 ‘어머니의 손맛’이란 제목으로 책을 내고 나니 또 다시 변신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에 이르렀다. 시골음식을 너무 퍼먹었더니 재료가 바닥이 난 것이다. 이럴 바엔 방향타를 여행과 음식으로 돌려 전국을 돌아다니며 산천과 바다 구경이나 실컷하며 맛있는 지역음식을 먹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요즘도 한 달에 한두 번 1박2일 또는 2박3일 정도의 여행을 떠난다. 벌써 만 4년이 지났다. 연재는 현재 208회째 진행 중이며 매주 한 번씩 이백 자 원고지 11매 분량을 쓰고 있다. 내 주변에는 함께 떠날 여행도반들이 기다리고 있다. 배낭을 둘러매고 집을 나서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산천으로 들어가면 나는 풍경의 일부가 되고 돌아와선 자연 속에서 만난 경치와 음식을 글로 적고 그림으로 그린다.
나의 인생 자체는 자연에 가깝다. 자연은 나의 스승이며 친구이자 교과서다. 내가 어릴 적부터 해온 낚시, 등산, 사냥, 답사, 여행의 기억들이 풍류 속에 녹아나더니 요즘은 나의 여행인생에 물 묻은 화선지 위의 수묵처럼 번지고 있다.
수필 사랑
나는 수필을 사랑한다. 나와 수필과의 관계를 줄탁동시(啐啄同時)라고 생각한다. 계란 속의 병아리는 부화 시기가 되면 껍질을 깨려고 온 힘을 다해 쪼아댄다. 이 때 어미 닭이 그 신호를 알고 바깥에서 부리로 껍질을 쪼아 부화를 돕는 것을 줄탁동시라고 한다. 내 안에 들어 있는 수필이란 병아리가 나오겠다는 ‘뺙뺙!’하고 소리를 지르면 싫든 좋든 내가 쪼아 끄집어내야 한다.
한국 화단의 모더니즘 1세대인 김환기는 뉴욕 생활에 권태가 깃들 무렵 시인 김광섭의 ‘저녁에’란 시를 읽고 화들짝 놀란다. 잊고 있었던 자아를 찾은 것이다. 그는 큰 캔버스를 끄집어내 점을 찍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점이지만 화가는 점 속에 바다를 그린 것이다. 화가가 찍은 점은 바로 전라도 신안의 안좌도 고향이었다. 그것이 바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작품이다. 그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끝에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이다. 불원 나도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