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사
“이건 또 웬 다 죽어가는 폐물인가?”
혼세마왕등과 함께 폐허가 된 수라검문에서 기다리고 있던 만독혈왕은 수라마왕이 자신 앞에 던져놓은 다 죽어가는 늙은 거지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말하는 도중에 정신을 잃을까 그러네. 고통만 느끼지 않도록 조치해주게.”
만독혈왕이 삼족개의 덜렁거리는 사지를 보더니 말했다.
“모조리 부러졌군. 혹시 이놈이 흉수인가?”
“개방의 인물일세.”
수라마왕의 대답에 만독혈왕은 즉시 상황을 이해했다. 그는 우선 부러진 팔, 다리 부근의 혈도를 점한 후, 두 손으로 뼈를 간단히 맞추었다. 부목을 대지는 않았지만 혈도를 점해 움직이지 못하도록 했으니 당분간 고통은 느끼지 않을 터였다.
만독혈왕이 그의 뼈를 모두 맞추는데 촌각밖에 걸리지 않았으니 보통의 의원들이 보았으면 화타나 편작이 살아 돌아왔다고 감탄을 할 만한 솜씨다.
“자, 되었네. 반 시진 정도는 끄떡없을 걸세.”
수라마왕은 고맙다는 뜻으로 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 후 삼족개 진용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그러자 삼족개는 신음성과 함께 즉시 깨어났다.
“으으…….”
그는 힘겹게 눈을 뜨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 여기는…?”
삼족개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죽을 것만 같았던 고통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불현듯 깨달았기 때문이다.
“내, 내가 죽어 저승에 왔나…….”
그때 수라마왕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부러진 뼈는 모두 맞추어 놓았다. 제대로 이야기만 해 준다면 무사히 분타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삼족개는 뼈를 모두 맞추어 놓았다는 수라마왕의 말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사지에 힘이 없을 뿐 별다른 통증은 느껴지지 않아, 그의 말이 사실임을 이내 알 수 있었다.
그는 즉시 고개를 조금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자신이 있는 곳이 바로 폐허가 된 수라검문임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혹시 수라검문과 관련이 있는 분이시오?”
그의 물음에 수라마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의 신분을 알게 되면 너를 살려줄 수가 없다. 그러니 너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수라검문이 멸문하게 되었는지만 이야기 하라.”
삼족개 진용은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쉰 후 입을 열었다.
“우선 수라검문이 진주 언가와 세력다툼에서 지는 바람에 멸문하게 되었다는 것에는 조금의 이견이 있을 수 없소. 물론 그 원인은 당시 수라검문주의 갑작스러운 행방불명으로 인한 검법의 절전때문이었소. 수라검문주였던 사인후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수라마왕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 이야기는 아는 것이다. 그 후를 이야기해보라.”
삼족개 진용은 수라마왕의 아들이자 당시 수라검문주가 된 사무정이 치열한 싸움 끝에 진주언가의 정예인 언가 십팔위의 포위망에 갇힌 상황과 그들의 연수합격에 장렬히 산화하기까지의 과정을 모두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사무정이 죽자 대부분의 수라검문 고수들도 죽음을 당했고, 살아남은 가솔들은 장원 내에 유폐를 당했다고 말해 주었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수라마왕의 표정은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자만이 살아남는 곳이 바로 강호가 아닌가.
힘이 모자라 적에게 패했다면 상대보다 강하지 못했던 자신 말고 누구를 탓하겠는가. 비록 수라검문이 자신의 가문이기는 했으나 이러한 도리를 잘 알고 있는 수라마왕이었기에 그다지 원통해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뒤의 이야기를 듣게 되자 그로서도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라마왕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저, 정말 언가 놈들이 수라검문의 무공을 빼내려 했느냐? 그 과정에서 후손들이 모두 죽음을 당했고?”
삼족개 진용은 수라마왕의 눈에서 불길이 뿜어지는 듯 느껴졌다. 벌겋게 충혈된 두 눈이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삼족개는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건 확실하지는 않소. 다, 단지 정황을 미루어보아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는 거외다.”
수라마왕은 개방의 정보력을 믿었다. 그들이 그랬다면 정말 그런 것이다. 그는 주먹을 으스러져라 불끈 쥐었다.
“쳐 죽일 놈들…….”
삼족개는 수라검문의 마지막 후예인 사강룡이 살아있다는 것, 그리고 마대위와 함께 다니고 있다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다그치는 이 노인이 수라검문과 친분이 있어 사강룡에 대해 이야기해 주어도 상관이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는 잠시 갈등했지만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굳이 자청해서 그까지 알려줄 필요도 없었거니와 마대위에 관한 정보는 소방주인 홍소미가 직접 관장하기에 기밀에 속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결정이 얼마나 처참한 참극을 가져올지에 대해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만약 수라마왕이 사강룡의 존재에 대해 알았다면, 복수를 하기에 앞서 그를 먼저 찾으려 했을 것이다.
물론 복수는 그 후에 어떤 방식으로든 이루어졌겠지만, 진주 혈사라 불리는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수라마왕은 한동안 넋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혼세마왕등이 그를 불러보았지만 수라마왕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일각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후, 멍하니 앉아있던 수라마왕의 표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마치 서리가 내린 듯 차가운 기운이 그의 얼굴 전체를 감싸고 있는 듯 했던 것이다.
이 모습을 본 혼세마왕 등은 미간을 찌푸리며 신음성을 흘렸다. 적어도 자신들이 아는 한, 수라마왕이 저러한 표정을 지으면 그야말로 피의 축제가 벌어지곤 했던 것이다.
수라마왕은 갑자기 대종사와 북해성모를 태우고 있는 가마 앞으로 가더니 일배(一拜)를 올렸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않은 채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혼세마왕등은 수라마왕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그가 살기를 풀풀 날리며 갈 곳이라고는 진주 언가밖에 없을 테니 말이다.
점차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비천마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혼자만 보낼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나머지 마왕들도 모두 일어섰다. 그러자 비천마왕이 안색을 찌푸렸다.
“모두 다 가버리면 어떻게 하는가? 대종사님은 누가 지키지?”
순간 혼세마왕 등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자청해서 나서는 사람이 없는 것으로 보아 모두 수라마왕을 도와주기위해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작은 한숨소리와 함께 혈영마왕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가 대종사를 지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혼세마왕 등은 혈영마왕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 후, 수라마왕이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으…, 게 누구…, 누구 없느냐? 누구…? 헉!”
지독한 악몽이었다. 이미 수 년 전에 죽어 땅 속에 파묻혀 있는 시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유령이 되어 무덤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꿈이었다.
게다가 유령들은 원한에 가득 찬 눈빛으로 자신에게 다가오기까지 했으니 기겁을 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폭풍신권 언철심은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소매로 대충 훔치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마치 고수와 밤새 용호상박(龍虎相搏)의 혈투라도 벌린 듯 하다.
“하아! 하아!”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가슴을 쓰다듬었다.
‘내공이 경지에 올라 내식이 균형을 찾고, 안정을 이룬 후에는 악몽 따위는 꾸어본 적이 없었다. 헌데 이 무슨 불길한 꿈이란 말인가…….’
언철심은 손을 뻗어 침상 머리맡에 놓여진 주전자를 들고는 입에다 쏟아 부었다. 소매로 입을 대충 닦은 그는 침상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유쾌하지 않은 기억들이 다시 떠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지독한 놈들…….’
참혹한 고문에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지르던 수라검문도들의 목소리가 뇌리에 울리는 듯 하다. 그들은 고통에 못 이겨 자신들이 알고 있던 수라검문의 무공비결들을 모두 실토했다.
그 무공들은 언가 고수들의 손에서 다시 정리되고 재구성되어 전혀 새롭다시피 한 언가의 절기로 탄생했다.
하지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수라검문 최고의 절기를 익힌 고수들은 그만큼 사로잡기가 어려워 대부분 죽음을 당했다.
그나마 사로잡힌 몇몇은 무공의 성취만큼 정신력도 대단해 끝내 입을 열지 않고 무공들을 무덤 속까지 가져가벼렸던 것이다.
폭풍신권 언철심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여명(黎明)을 뚫고 언철심의 얼굴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흐읍! 하아!”
그는 폐부 깊숙이 공기를 빨아들였다가 다시 내쉬었다. 서늘한 느낌이 등골을 타고 머리까지 뻗치는 듯 하다.
하지만 조금도 상쾌해지지 않았다.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바닷바람에 실린 염분처럼 새벽공기에 섞여 있는 듯 했던 것이다.
“저기로군.”
나지막한 언덕 위에서, 음산한 느낌을 주는 회갈색의 거대한 장원을 바라보며 수라마왕이 중얼거렸다.
휘익!
그때, 한 줄기 바람이 스치는 듯 하더니 세 개의 인영이 더 나타났다. 바로 수라마왕과 함께 태현을 떠나 밤새 달려온 혼세마왕 등이었다.
그들은 굳은 표정으로 진주언가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특히 수라마왕의 얼굴은 지극히 차가워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제 아무리 초절정고수가 네 명이나 있다고 할지라도, 진주언가 전체를 상대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인 이상 진력에는 한계가 있으니 말이다.
비천마왕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일단 먼저들 가게. 금방 정리하고 따라가지.”
그의 말에 수라마왕이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인 후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혼세마왕과 만독혈왕도 그의 뒤를 따라 움직였고, 동시에 비천마왕의 신형이 꺼지듯 사라졌다.
희미한 잔영을 남긴 채 언덕 주변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원래의 위치에 도착하기까지 숨 몇 번 쉬었을 정도의 짧은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10여리 전부터 그들의 뒤에 따라붙어 은밀히 미행해 온 무사들을 모조리 제압해버린 것이다.
비천마왕은 즉시 신형을 날려 혼세마왕 등을 따라잡았다.
잠시 후, 그들은 언가장이라는 거대한 현판이 달려있는 정문 앞에 도착했다. 그들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정문을 바라보자 좌우에 서 있던 호원무사들이 다가왔다.
그들 모두 새하얀 백의를 입은 사내들이었는데 이마에 검은색의 영웅건을 질끈 둘러맨 것이 무척 깔끔하고 멋있어 보였다.
다소 나이가 들어 보이는, 수뇌인 듯한 자가 나서서 포권을 하며 말했다.
“본가를 방문하신 듯한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깍듯이 예의를 갖추되 결코 비굴해보이지 않는 적당한 선에서 인사를 하는 것이 과연 세가의 인물다웠다.
수라마왕은 그의 입에서 조금이라도 불손한 언사가 나왔다면 곧바로 베어버릴 생각이었지만 상대가 예의를 갖추니 검을 뽑지는 않았다.
하지만 피의 복수를 하러 온 그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리가 없었다.
“산서성에서는 진주언가가 가장 강하다는 헛소문이 강호에 만연하고 있더구나. 그래서 노부는 이 소문이 사실인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찾아왔느니라.”
대놓고 도전을 하겠다는 말에도 호원무사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살짝 숙이며 여유롭게 말했다.
“본가는 단 한 번도 그러한 소문을 강호에 퍼뜨린 적이 없습니다. 단지 하늘을 우러러 단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이 살라는 본가의 가훈을 충실히 따른 결과, 몇몇 강호인들이 이에 감복하여 그런 소리를 지껄인 모양입니다.”
수라마왕이 그가 한 말을 다시 한 번 되뇌었다.
“뭐라, 하늘을 우러러 단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어? 허허허…….”
그가 기가 찬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자 곁에 있던 비천마왕이 비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대단한 가훈이로군, 그래.”
순간 호원무사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처음 그들을 보았을 때, 무공을 익힌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고, 종복들이나 입는 허름한 마의를 입고 있었기에 노망이 난 노인네들이 단체로 유람이라도 다니는 줄 알았다.
반경 십여 리 이내에는 이미 세가의 눈과 귀가 깔려있기에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있었으면 벌써 기별이 왔으리라.
즉, 외곽 경비무사들이 이들을 통과시킨걸 보면 별다른 위험요소가 없다는 판단을 했다는 뜻이 된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갑자기 나타난 이 노인들을 살펴보았다. 햇빛을 많이 보지 못했는지 피부가 다소 하얗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특이한 점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자신에게 처음 말을 건넨 노인의 허리에는 검도, 도도 아닌 괴상한 형태의 쇠몽둥이가 걸려있지 않은가.
‘강호에는 여자와 어린아이, 그리고 노인을 조심하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함부로 판다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가 관도를 가리키며 더욱 조심스럽게 말했다.
“어르신들께서 가셔야 할 길은 저쪽인 듯 합니다. 살펴가도록 하십시오.”
수라마왕이 그와 곁에 있는 그의 동료들을 쭉 둘러보더니 말했다.
“네놈들의 나이를 보니 그때에는 한창 무공을 익히느라 강호에는 나오지도 못했겠구나. 비켜서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말을 마친 수라마왕이 성큼 앞으로 다가섰다.
순간 호원무사들 모두 흠칫 하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는데, 한결같이 경악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쇠몽둥이로만 보았던 그것에서 붉은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았는데, 그건 검강의 초기단계라는 검사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게다가 나머지 노인들의 몸에서도 무서운 기세가 뿜어져 나와 온 몸을 꽁꽁 얼리는 듯 느껴졌다. 이는 절정고수들만이 뿜어낼 수 있다는 무형지세임이 분명했다.
“머, 멈추시오.”
예의 그 수뇌인 듯한 사내가 다시 수라마왕의 앞을 가로막았다.
순간 붉은 빛이 번뜩이는 듯 하더니 그의 목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동시에 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뿌려졌지만, 마치 무형의 장벽이 쳐져 있기라도 하듯 수라마왕의 옷에는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수라마왕의 으스스한 목소리가 들렸다.
“노부는 두 번 말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가 다시 전진하자 호원무사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사실 그들의 실력이나 가문에 대한 충성심으로 보아, 차라리 수라마왕의 검에 죽는 한이 있어도 이렇게 물러설 인물들은 아니다. 하지만 수라마왕 등의 기세가 워낙 대단했기에, 자신들이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본능적으로 물러서기만 했던 것이다.
수라마왕이 정문을 열고 문턱을 넘어서려다 멈추었다. 그리고는 갑자기 신형을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는 언가장이라는 현판을 단칼에 베어버리고는 냉소를 쳤다.
“흥, 곧 망할 가문에서 이런 게 왜 필요해!”
현판은 두 조각이 즉시 바닥에 떨어졌다.
이 모습을 본 호원무사들은 이성을 되찾았다.
“이, 이게 무슨 짓…?”
“쳐, 쳐라!”
그들은 일제히 주먹을 휘두르며 수라마왕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제법 사나운 권풍이 일어나 수라마왕에게 몰려갔는데, 그들의 두 팔은 거무튀튀하게 변해 있었다. 바로 도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강시권이 펼쳐진 것이다.
수라마왕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검을 한 차례 휘둘렀다.
순간 검의 궤적에 걸려든 다섯 개의 손이 그대로 잘려나가 땅에 떨어졌다. 비명은 그 다음이었다.
“크아아악!”
모골이 송연힌 비명이 장원 전체를 울렸다.
그러자 장원 곳곳에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내 장원내의 연무장에는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되었는데, 대부분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상태였다.
아마도 이들 중 태반은 잠을 자다가 비명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모양이다.
그들은 붉은 검사가 꿈틀거리는 검을 들고 있는 수라마왕과, 그에 못지않은 기세를 가진 세 명의 노인들을 보고는 경악했다.
하지만 손이 잘려 피를 뿌리고 있는 제자들을 발견하자, 이내 분노로 몸을 떨었다.
“가, 감히 본가 안에서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웬 놈들이냐? 정체를 밝혀라.”
언가의 고수들이 제각기 소리치며 소란을 떨었지만 수라마왕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그가 내공을 실어 소리쳤다.
“언가의 가주는 지금 당장 나서도록 하라!”
장원 전체가 떠들썩할 정도의 진력이 실린 목소리에 언가의 무인들은 저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그들 중, 단정한 문사풍의 중년인이 나섰다. 바로 언가의 총관인 운중신룡(雲中神龍) 언연심이다. 그가 준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이오?”
수라마왕이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네놈은 누구냐?”
운중신룡 언연심은 상대가 대답은커녕 자신의 정체를 묻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냉소를 친 후 다시 말했다.
“흥, 본가를 찾아와 사람을 상하게 하고서도 살아남을 듯 싶었더냐? 좋다. 오늘 본가에도 검이 있음을 보여주리라. 용검대는 즉시 나서라!”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십여 명의 중년인들이 수라마왕 앞으로 다가섰는데 그들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이 모습을 본 수라마왕이 다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비천마왕 또한 이를 이상하게 여겼는지 수라마왕에게 말했다.
“언가에 검법도 있었는가? 내가 알기에는 주먹질 하는 것 외에는 변변한 절기가 없다고 들었는데…….”
비천마왕의 모욕적인 말에 언가의 무인들 모두 분노에 찬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수라마왕 앞으로 나선 십여 명의 검수들은 차가운 표정으로 그들을 노려보고만 있을 뿐 감정의 기복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그야말로 검을 쓰는 무인이 갖추어야 할 첫 번째 덕목인 냉정함을 제대로 체득한 듯 했다.
검수들 중 먼저 세 명이 나섰다.
수라마왕 또한 관심 어린 표정으로 그들을 주시했는데, 언가의 검법은 그로서도 처음 접하는 것이라 무인으로서의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이다.
챵!
맑은 쇳소리와 함께 세 개의 검이 뽑혀져 나왔고, 매서운 검광을 뿌리기 시작했다.
피빗! 핏!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 그들의 검은 은밀한 검망을 형성한 채 수라마왕을 향해 다가왔다.
합벽검진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형태가 바로 검망이다. 주로 강한 상대 한명을 다수가 합공할 때 쓰는 수법으로, 적극적으로 상대를 공격해 제압하기 보다는 수비를 철저히 함으로서 제풀에 지쳐 포기하도록 만들 때 사용한다.
그리고 이것은 가장 기본적인 수비초식이니만큼 검법의 근간을 이루는 검의가 가장 잘 나타나 있기도 하다.
즉 이 초식만 자세히 살펴본다면, 그 무공의 뿌리가 어디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검이든 사람이든 검강으로 사그리 쓸어버리려던 수라마왕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왠지 모르지만 이들이 펼치는 검법이 눈에 익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수라마왕은 시선이 그들의 발을 향했다.
‘안쪽부터 밟으며 발끝을 살짝 벌려 사선으로 밟아간다? 게다가 앞쪽 무릎을 살짝 굽혀 언제든 치고 나갈 수 있는 공세를 형성하며…….’
검법의 칠할은 보법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다. 자신과 상대를 놓는 각도, 그리고 운신은 전적으로 보법에 의지하니 말이다.
수라마왕은 이들의 밟아가는 족적을 바라보다가 한 가지 보법을 떠올렸다.
‘수라탄영보(修羅彈影步). 설마 놈들이…….’
그는 수비에 치중하는 듯 하던 검망이 일순간에 풀리더니 자신을 뒤집어씌울 듯 덮쳐오는 것을 보고는 확신했다.
‘탄망추혼까지…, 쳐 죽일 놈들…….’
두 가지 무공 모두 수라검문의 독문절기다. 초식의 형태를 다듬는다고 해서 그 근간까지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다.
수라마왕은 이 무공들을 어려서부터 익혀왔고, 따라서 형태가 조금 바뀌었다고 해서 알아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수라마왕은 단번에 그들을 쓸어버리려다 마음을 바꾸었다. 그는 우선 사위에서 덮쳐오는 검망을 향해 검을 횡으로 휘둘렀는데, 수라마왕의 신형은 검로를 따라 자연스럽게 한바퀴 회전하게 되었다.
츄아악!
검망은 수라마왕의 단 일검에 중단이 길게 갈라지더니 소멸해버렸다.
언가의 검수들은 그가 이처럼 간단히 검망을 파훼할 줄 몰랐는지 무척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들의 귀에 수라마왕의 비웃음이 가득실린 목소리가 들렸다.
“진정한 탄망추혼은 이런 것이다. 언가의 개들아!”
수라마왕은 갑자기 신형을 다시 한 번 빙글 돌렸는데, 그 와중에 검을 얼마나 빨리 움직이는지 아예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였다.
동시에 검의 궤적을 따라 새끼손가락조차 빠져나가기 어려운 촘촘하고 붉은 색의 검망이 나타났다.
언가의 검수들이 만들어낸 것과 거의 비슷했지만 수라마왕의 것은 더욱 촘촘하며, 세상을 삼켜버릴 것 같은 붉은 광망을 뿌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달랐다.
붉은 검망은 삽시간에 퍼져 나가더니 검수 세 명의 온몸에 감겨들었다. 그리고는 이내 그들의 몸속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세 명의 검수들은 두 눈을 부릎 뜨고 있을 뿐 움직이지 않았다, 주위에 있던 동문들도, 그리고 수라마왕을 비롯한 마왕들도 석상이 된 듯 서 있을 뿐이었다.
어느 순간, 붉은 검망에 감싸였던 검수 세 명의 얼굴, 손에 가느다란 붉은 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옷에서 피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투두두둑!
곧이어 그들의 몸은 수백조각이 되어 허물어져 내렸고, 잘게 썰어진 육편조각에서는 더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우웩!
어디선가 구역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언가의 고수들 몇이 끔직한 장면을 보다 못해 고개를 돌리고는 새우처럼 등을 구부리고 있었다.
도산검림(刀山劍林)을 제집처럼 드나들 듯 하던 그들로서도 이렇게 처참한 광경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언가의 무인들을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동문 세 명이 순식간에 어육으로 변해버린 충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들을 참살해버린 검법이 붉은 혈광을 발한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가문의 검법과 무척 비슷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그들은 운중신룡 언연심과 몇몇 가문의 수장들을 힐끔거렸다. 10여년 전 가문의 수뇌부들이 오랜 기간 동안 고심하여 몇 가지 무공을 창안해서 제자들에게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위력이 강한 것이 바로 검법인데, 머지않아 경지에 이르게 되면 언가가 천하로 눈을 돌리게 되리라고 자못 기대가 컸었다.
따라서 이 검법은 세가에서 가장 자질이 출중하고 기초가 잘 닦인 제자들에게 전수했는데, 지금은 팔성 이상의 성취를 보아 웬만한 검법의 명가와 대결해도 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한 노인의 손에 너무도 간단히 파훼되었을 뿐 아니라 상대 또한 이 검법과 비슷한 무공을 익힌 듯 하니 어찌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운중신룡 언연심과 가문의 수장들은 겉으로는 별다를 표를 내지 않았지만 내심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과거 수라검문과의 혈전에 직접 참여했고, 또 그들의 무공을 훔쳐다 새롭게 개정하여 언가의 무공으로 재편성한 장본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앞의 이 허름한 마의를 입은 노인이 펼친 검법이 바로 수라검문의 독문검법중 하나인 수라단심인(修羅斷心刃)임을 즉시 알아차렸다. 물론 이 노인이 수라검문의 전대기인이거나 아니면 깊은 관계가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그가 짐짓 치가 떨린다는 듯 이를 갈며 말했다.
“으드득! 지독하게 잔인한 손속이로구나.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마검공으로 본가의 제자들을 죽이다니…….”
언연심은 ‘천인공노할 마검공’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그렇게 해서 이 노인의 검법이 대라검법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인식시키려 했던 것이다.
언가 무인들의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많이 누그러졌다. 천하에는 수 없이 많은 검법이 있으며, 그 중에는 비슷한 것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수라마왕은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가문의 무공을 훔쳐가 그럴 듯 하게 꾸민 후, 자파의 절기라 우기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그 검법의 모태가 되는 수라단심인을 마검공이라 모욕하지 않는가.
그의 입에서 분노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놈들! 그러고도 네놈들이 정파라 자청한단 말이냐? 네놈들이 펼친 그 검법은 바로 본문의 수라단심인(修羅斷心刃)임을 부정하겠다는 것이냐?”
순간 언가의 제자들에게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라단심인은 수십 년 전 세가의 손에 멸문한 마도 문파인 수라검문의 독문절기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수라마왕은 이들의 반응을 보고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수라검문의 무공을 빼내어서 언가의 절기로 둔갑시키는 행위는 몇몇 수뇌부들의 손에 은밀하게 진행되었음을. 사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자파의 절기에 대한 자부심은 물론, 협의심도 강한 정파의 혈기왕성한 젊은 기재들에게 그 무공을 전수할 수 있었겠는가.
아마도 이 무공의 근본이 수라검문의 수라단심인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언가의 제자들은 익히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운중신룡 언연심은 내심 당황했지만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본문이라고? 네놈은 지금 수라검문을 본문이라 칭했느냐? 흥! 삼십년 전에 깨끗이 쓸어버린 줄 알았더니 마도의 잡졸 하나가 더 남아있었구나. 뭣들 하느냐? 어서 이놈들을 모조리 제압하지 않고.”
그로서는 빨리 수라마왕등을 제압하는 게 급선무였다. 일단 그들을 제압하거나 죽여 버리고 난 후에 정신 나간 마두들이 객쩍은 소리를 지껄였다고 둘러대기 위해서다. 하지만 그는 이 두서 없는 명령이 얼마나 큰 희생을 가져오게 될지에 대해서는 전혀 짐작도 하지 못했다.
언가의 무인들은 총관의 명령에 따라 일제히 수라마왕등을 향해 다가왔다. 한편, 이 모습을 본 만독혈왕이 수라마왕에게 말했다.
“어떻게 할 텐가? 모두 죽여야 하나?”
그의 말에 수라마왕은 순간 고민했다. 예전의 그였더라면 이미 피바다로 만들어 버렸겠지만, 금마동에서 수십 년 간 참오하며 무학의 깊은 경지를 엿본 다음부터는 살기가 많이 누그러졌던 것이다.
수라마왕이 머뭇거리자 혼세마왕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나섰다. 그는 다짜고짜 언가의 무인들을 향해 적양멸천장을 날리며 말했다.
“뭘 고민해? 일단 몇 놈 쳐 죽이고 나면 함부로 달려들지 않겠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명과 함께 살이 타는 듯한 노린내가 피어났다. 선두에 있던 언가 무인 둘의 가슴이 적양멸천장에 적중되어 그대로 녹아버린 것이다.
동시에 만독혈왕의 두 손에서 지독한 비린내와 함께 진녹색의 경력이 퍼져나갔고, 비천마왕의 신형은 그 자리에서 꺼지듯 사라졌다.
크아악! 악!
모골이 송연한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언가의 강시권은 강맹하기로 치자면 천하에서 손꼽힐 만큼 대단한 무공이었지만 이미 탈마의 경지에 들어선 오마왕들을 막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그들이 각자 일초씩 펼쳐낼 때마다 한두 명의 목숨은 꼭 사라지고 말았다.
숨 몇 번 쉴 사이에 언가의 연무장은 시신으로 뒤덮였다. 적어도 삼십 여명이 일순간에 죽어버린 것이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심후한 내공이 실린 고수의 일갈이 터져 나온 것은.
“멈추어라!”
오마왕들과 언가의 무인들은 기다렸다는 듯 그 소리에 맞추어 물러섰다. 오마왕들로서도 무의미한 살생을 계속 할 생각이 없었고, 언가의 무인들도 인간을 초월한 듯한 무위를 보이는 그들에게 달려들다 죽을 생각은 없었던 것이다.
“이, 이럴 수가…….”
언가의 가주인 폭풍신권 언철심은 연무장에 드러난 참상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연무장에 깔린 단단하기 그지없는 청석이 처참하게 파여 작은 피 웅덩이를 이루고 있었고, 형체를 제대로 갖추지도 못한 시신들이 즐비했다.
바로 적양멸천장과 지존독황공의 가공할 위력이 만들어놓은 결과였다.
가주의 등장에 때맞추기라도 하듯, 머리가 허연 원로고수들까지 모습을 드러내었다.
총관인 운중신룡 언연심이 즉시 그들에게 상황을 이야기하자 언철심은 다소 놀란 듯한 표정으로 수라마왕을 바라보았다.
그가 쓰는 검법이 수라검문의 검법이라는 사실을 들었기 때문이다.
백발이 성성한 원로고수들이 상기된 표정으로 수라마왕과 가주를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가주인 폭풍신권 언철심을 향한 그들의 눈빛에는 질책의 빛이 가득 들어있었지만 이내 서로를 바라보며 자조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수라마왕의 차가운 목소리가 장내를 울렸다.
“애꿎은 아이들의 목숨은 필요가 없다. 과거 본문을 멸문시키고 무공을 빼앗느라 후손들의 목숨까지 앗아간 자들만 나서라.”
순간 연무장은 바늘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듯 침묵에 휩싸였다. 언가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가주인 폭풍신권 언철심을 향했다.
언가의 수뇌부들이 모두 그의 곁으로 모여들었는데 모두 침울한 표정이었다.
원로들 중 한 사람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휴! 가주. 이 모두가 자업자득(自業自得)이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모든 사실을 밝히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언철심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숙부. 도대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본가가 밝힐 것이 무어가 있다고 그러시는 겁니까? 제발 입 좀 다물고 계세요.”
짜증이 잔뜩 묻어나는 그의 노갈에 언가의 호법원주이자 한때 단장신권(斷腸神拳)이라는 협명을 떨쳤던 노고수는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정의를 근본으로 삼아 협의를 실천해 왔던 진주 언가의 수백년 전통이 지금 와서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호법원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탄했다.
“가주. 태상호법께서 삼년 전 세가를 떠나 돌아오지 않은 것도 결국 이 때문이 아니었소이까. 아! 이 숙부도 진작 세가를 떠났어야 했나 보오.”
폭풍신권 언철심이 인상을 확 구겼다.
“그만 좀 주절거리세요. 그리고 세가를 떠나고 싶으면 당장 떠나세요. 말리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호법원주를 비롯한 원로들을 향해 냉소를 친 후, 찬바람이 나도록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수라마왕을 노려보며 말했다.
“마도의 잔당 주제에 무슨 객쩍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것이냐? 긴 말 필요 없다. 네놈들의 질긴 목숨을 모조리 거두어 정도가 살아있음을 만 천하에 알리리라. 뭣들 하느냐? 모두 쳐라!”
가주의 명령은 곧 법, 언가의 무인들은 일제히 생사를 도외시한 채 오마왕들을 향해 다가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언철심과 측근 몇 사람을 제외한 수뇌부들까지 모두 나섰기에 그 기세가 조금 전과는 사뭇 달랐다.
폭풍신권 언철심이 원로들을 슬쩍 바라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원로들이 자신의 명에 따르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서있기만 했던 것이다.
“가문을 위해 싸우지 않으려거든 들어가셔서들 쉬세요.”
호법원주가 다시 나서서 설득하듯 말했다.
“가주, 불가하오. 본가는 지금까지 불의(不義)한 주먹을 사용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소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소이다. 진상을 모두 밝힌 후 용서를 구할 것은 구하고, 힘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정당한 비무를 통하면 될 것이외다.
자고로 잘못을 저지른 후에도 이를 반성하고 올바르게 고치기만 한다면 그건 죄가 아니라는 말도 있소이다. 그러니 가주께서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언철심이 또다시 소리쳤다.
“닥치시오! 그따위 망발이나 할 요량이거든 썩 물러들 가시오!”
아무리 가주라고는 하나 명색이 숙부인 자신에게 이처럼 막돼먹은 말을 퍼붓는 언철심에게 호법원주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터져 나오는 비명이 언가를 울린 것은.
크악! 크아악!
연무장을 향해 시선을 돌린 폭풍신권 언철심의 두 눈이 경악으로 부릅뜨였다.
타오르는 듯한 붉은 장력을 용암처럼 쏟아내는 혼세마왕, 일장 내에 다가서기만 해도 픽픽 쓰러져버리는 지독한 독장을 퍼붓는 만독혈왕, 그리고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빠르기로 신형을 옮기며 언가의 고수들을 폭풍처럼 몰아치는 비천마왕.
이들 모두 평생 한번 만날까 말까 할 정도의 고수였지만 그가 가장 놀란 것은 바로 수라마왕의 검에서 솟구친 석자 길이의 붉은 검강이었다.
“저, 저건…….”
자신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건 분명 수라혈검법에서 발휘되는 검강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이토록 몸서리쳐지는 지독한 살기를 뿜어낼 수 있겠는가.
“그, 그때와 또…, 똑같아…….”
그는 과거 수라검문과 일대 혈전을 벌이다가 당시 수라검문주를 포위 속에 몰아넣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 그의 검에서도 저러한 붉은 검강이 솟구쳐 있었다. 물론 지금의 것과 비교한다면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지만, 붉은 혈광을 동반한 지독한 살기는 당시의 그 검법과 동일함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언철심은 주변에 있던 여덟 명의 검수들에게 모두 피하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가 ‘어어’하는 사이에 붉은 검강이 가느다란 실처럼 풀려나오며 사방을 휩쓸었다.
피를 토할 듯한 언철심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도 그때였다.
“머, 멈춰!”
번쩍! 슈아아악!
비명도 없었다. 붉은 검사(劍絲)가 한바탕 휘몰아치고 난 뒤, 남은 것은 죽음밖에 없었다. 언가에서 십여 년 넘게 공들여 키워온 승천검대(昇天劍隊) 소속 열 한명 검수 전원이 수라마왕의 손에 검하고혼으로 사라져버린 것이다.
짙은 혈향과 함께 죽음의 기운이 연무장 전체를 감도는 듯했다.
“모두 물러서라!”
가주의 명에 따라 언가의 고수들은 일제히 물러섰고, 연무장에는 또다시 스무 구의 시신이 더 쌓였다.
언가 고수들은 두려움 반, 분노 반이 섞인 눈빛으로 수라마왕 등을 바라보았다. 숨결조차 흐트러지지 않은 마왕들은 그들의 눈에 괴물로 비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수라마왕이 언철심을 노려보며 으스스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 놈을 더 죽여줄까? 이미 멸문한 수라검문처럼 개, 돼지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몰살시켜야 네놈이 나서겠느냐?”
언철심은 분노로 몸을 떨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려 원로고수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그들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인간 같지 않은 이 괴물들을 상대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참담한 표정을 짓고 있던 원로들도 사태를 더 이상 좌시할 수만은 없음을 느꼈다. 이대로 가다가는 자칫 세가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원로고수들이 침묵을 깨고 나서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폭풍신권 언철심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원로고수들을 이끌고 수라마왕의 앞으로 다가왔다.
진주 언가의 진정한 힘과, 네 명의 마왕들간의 생사를 가르는 혈전이 막 벌어지려는 참이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