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벌은? 예를 들면, 여기 이집트에서처럼 징벌이 떨어진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 징벌은 언뜻 봐도 도덕적인 세상에 영광을 돌리려고 속은 타면서도 마지못해 내린 게 분명했다.
여하튼 그분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거들먹거리던 악동 하나가 구덩이에 빠진 건 사실이었다.
꿈이나 꿔대는 이 악동은 스스로 그분의 자기 인식 수단이 되려 한 자의 후손이었는데, 구덩이, 곧 지하 감옥에 떨어진 게 벌써 두번째였다.
모두 어리석음 탓이었다.
얼마나 어리석었던 지, 이전에는 증오의 잡초가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사랑의 잡초가 무성하여 머리 꼭대기 위로 뻗쳤던 것이다.
여하튼 이 악동이 당하는 꼴을 보자니 속이 시원했다. 한마디 로 보기 좋았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유황비에 만족하느라, 혹시라도 우리가 주변상황을 착각했던 건 아닐까?
우리끼리 하는 말이지만, 결코 착각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착각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아니, 확실하게 추측하고 있었다.
그분은 준엄한 자들의 나라에 영광을 돌리는 척 준엄한 칼자루를 들어 올렸으나, 도덕적 세상에 속한 이 벌을 이용하여, 막다른 골목에 오히려 문을 열어젖혀, 다시 말해서 땅 아래의 출입구를 열어 빛으로 나아가게 했다는 것을.
실례지만 그분께서는 또 다시 호의를 베풀어 더 높은 곳으로 올려주기 위한 수단으로 벌을 악용한 것이다.
우리가 서로 옆으로 지나치면서 눈썹을 내리깔고 둥근 입을 비죽이면서 눈빛을 주고받을 때는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더 크게 만들어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벌!
이보다 더 큰 농담이 있겠는가?
이는 이 벌을 받도록 '강요' 한 뻔뻔스러운 과오의 실체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도록 한 줄기 빛을 던져 주는 것이었다.
물론 이 빛은 도덕적 세상의 빛이 아니다.
이 뻔뻔스러운 과오는 글쎄, 신이나 아실까, 누가 그런 짓을 하도록 씨를 뿌렸든지 간에, 여하튼 당사자를 터무니없이 높은 곳으로 올려 주는 수단이요 들것이었기 때문이다.
==
여기서 어떤 일이 진행 중이었는지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 이야기의 전제가 되었던 서곡에서 이미 다룬 자료와 보고를 상기해야 한다.
다른 게 아니고 서곡에서 이와 관련된 사항을 한마디로 요약한 '영혼의 모험소설'을 되새길 필요 가 있다는 뜻이다.
무형상태의 물질과 마찬가지로 태초의 원리 중의 하나였던, 태초의 인간 영혼이 타락하여, 이야 기로 들려줄 수 있는 모든 사건의 토대가 되었다는 소설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오히려 창조를 말할 수 있다. 왜?
무형의 물질이 있는 아래로 내려간 영혼의 타락은 결과적으로 형체의 창조를 가져왔으니까.
영혼은 일종의 우수에 젖은 관능 때문에 높은 세상에 속하는 태초의 원리 중 하나인 무형상태의 물질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서 어떻게 하든지 물질과 결합하여 형체를 만들어 육체적인 쾌락을 느끼고 싶어서 물질 안으로 침투했다.
그러나 물질은 끝까지 무형의 상태로 있으려고 버텼다.
이렇게 물질을 사랑하는 영혼이 물질과 싸우다 지쳤을 때 영혼을 도와주러 나선 것이 바로 지고한 분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야기로 들려 줄 수 있는 사건의 세상, 형체와 죽음의 세상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분이 그렇게 한 것은 정도를 벗어나는 과오를 범하여 곤경에 빠진 자신의 한 토막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었다.
이렇게 상대방을 잘 이해하는 것을 보면 둘은 구성 성분과 감정적인 면에서 유사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면, 결론을 내려야 마땅하다.
설령 그 결론이 너무 과격하고 무례한 불경죄처럼 보일 수 있다 해도. 여기서는 정도를 이탈한 과오를 이야기해야 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정말 과오라는 발상을 그분과 결합시킬 수 있는가?
턱없는 소리.
아니오! 이런 질문에는 이런 대답이 가능할 뿐이다.
그리고 주변에서도 모두 한 목소리로 그렇게 합창했을 것이다.
물론 남몰래 작은 입을 비죽 내민 후에.
과오를 저지른 존재가 가련해서 그분이 자비롭게도 형체를 창조함으로써 도와주었다 하여 그분 역시 과오를 범했다 해석하는 것은, 물론 너무 멀리 나간 성급한 해석일 것이다.
여기서 너무 이른 해석이라 하는 이유는, 유한한 형체의 세상을 창조했다 하여, 세상 전에 있으며
세상 바깥에 있는 신의 위엄과 그분의 정신과 권위와 절대성에 아직은 단 한군데도 금이 가지 않
았으므로, 정도를 벗어난 과오라는 말은 원래 의미에서 아직까지 입에 올릴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간이라는 피조물이 일반적으로 갖는 특징, 곧 신의 자기인식 수단이라는 특성은 바로 이 백성에게서 특별히 더 부각되었다.
신의 본성을 확인하려는 간절한 노력은 이 백성에게 타고난 특성이었다.
그리고 이 백성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세상 밖에 거하는 창조주의 보편성과 정신성을 꿰뚫어보는 통찰력의 씨앗이 심어져 있었다.
이는 창조주가 세상의 공간이지만 세상이 그의 공간은 아니라는 사실을(이는 화자의 경우와도 아주 유사하다. 화자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나름대로 설명할 수 있는 이유도, 그는 이야기의 공간이지만, 이야기는 그의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식할 수 있는 통찰력을 뜻한다.
그리고 이 통찰력의 씨앗은 성장을 앞둔 씨앗이어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신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온전한 인식으로 자라나게 된다.
그렇다면 충고를 받은 자나 충고한 자나 생물학적인 모험을 감행할 경우, 결국에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교훈을 얻게 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 백성을 '선택' 했다고 가정해도 될까?
어쩌면 그래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세마엘의 눈에는 여하튼 이 선택받은 백성이 처음부터 그들의 민족신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의식은 못해도 최소한 이러한 지식의 씨앗을 품고 있는 이 백성은 성숙해 가는 이성을 동원하여 있는 힘을 다해 적당치 않은 상태에 있는 그분을 원래 있던 저편의 보편적인 정신으로 되돌아 갈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세마엘은 통쾌했다.
이렇게 지옥의 주장에 따르면 물론 증명되지는 않았지만 - 지고한 분이 타락한 곳에서 다시 고향의 영예로운 신분으로 돌아오려면, 열심히 노력하는 인간들의 도움이 있어야지, 그분 혼자 힘으로는 결코 돌아올 수 없었다.
주변 천사들의 예지는 이렇게 먼 곳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간신히 세마엘과 지고한 분께서 남몰래 만나 밀담을 나누었다는 것과 그 내용에 이르렀을 뿐이다.
그러나 천사들이 지고한 분과 '가장 많이 닮은' 피조물 일반에 대한 불만의 강도를 높여서 선민으로 성장할 그 백성을 특히 더 미워하는데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이들은 그분이 이 백성 중에서 특별히 원대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한 명의 후손에게 하는 수 없이 작은 홍수와 유황불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되리라는 사실도 미리 알고는 은근히 고 소해 했다.
그 벌이 실은 다른 목적에 쓰이는 수단이라는 것은 은폐하려고 해도 뻔히 눈에 보였지만.
이 모든 것이 합창을 하는 주변의 천사들이 비죽 내미는 작은 입과 눈에 보일까 말까한 고갯짓에 담겨 있었다.
이들은 지금 막귀를 살짝 움직여 저 아래 그 백성의 어린 가지, 그 후손이 양팔을 뒤로 묶인 채, 노를 젓는 범선에 실려 이집트의 강물을 따라 감옥으로 내려가는 모습을 가리키고 있었다.
==
아니 사건 자체가 이미 하나의 암시로 슬픈 질서와 의 일치를 보여주지 않는가. 지금 가슴과 팔에
보석 장신구들을 걸고 목적지로 가고 있다면 오히려 잘못된 일일 것이다.
지금은 베일을 벗고 보석들을 떼놓고 저승순례를 떠나는 시간이 온 것이다.
주기가 짧은 순환 과정이 또 하나 끝났다.
그리고 드물게 똑같은 것을 가져오는 이보다 큰 순환 과정도 종착점에 이르렀다.
두 순환 과정이 서로 만난 것이 다.
작은 한 해, 즉 태양의 주기로 따진 1년이 한바퀴 돌고 제 자리로 되돌아갔다.
이는 진흙을 가라앉히는 물이 다시 다 흘러가(달력에서가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 파종기가 되었다는 의미에서다.
즉 갈퀴와 쟁기로 땅을 파헤치는 때가 온 것이다.
요셉은 이따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감시하는 서기 하아마아트의 허락을 받고는 역청을 발라 방수 처리를 한 갑판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뭐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서기와 마찬가지로 일부러 그런 척 허리에 뒷짐 을 지고(실은 포승줄에 묶여 있어서 그럴 수밖에 없는데도) 서성거리기도 하고 밧줄 꾸러미 위에 앉기도 했다.
그럴 때면 강가 결실의 땅에서 열심히 일하는 농부들이 보였다.
이렇게 땅을 파헤쳐 씨를 뿌리는 일은 진지하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파종기는 조심스럽게 희생양을 바치는 슬픔의 시간이었으니까.
다시 말해 곡식의 신 우시르를 땅에 묻으면서, 열매를 맺게 될 희망찬 그날을 기대하면서도, 지금 이 순간은 여하튼 우시르를 매장하는 시간이었으므로 눈물을 흘리는 때였던 것이다.
그래서 요셉도 씨앗을 땅에 묻는 농부들을 보면서 조금 울었다.
그 역시 암흑 속에 묻히고 희망은 아주 멀리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보다 큰 순환 과정이 끝나고 다시 시작되어 이제 같은 것을 재현 해 준다는 표시였다.
어떤 것? 생명을 다시 새롭게 하는 것, 즉 거듭나기 위한 심연으로, 지옥으로 떨어지기가 그것
이었다.
이 지옥은 진정한 아들이 내려간 땅 아래에 있는 양의 우리 에투라이며 죽은 자들의 나라 아랄라였다.
예전에 그는 우물 구덩이를 통해 아래 나라, 뻣뻣하게 굳어 있는 죽음의 나라로 들어갔었다.
이제 그는 또다시 뵈르, 곧 감옥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것도 아래, 하이집트로. 그러니 이보다 더 깊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검은 달의 날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 큰 날은 하루 이틀이 아니라, 한 해 두 해의 세월이 되리라.
그동안은 아랫세상의 권세가 아름다운 자를 지배할 것이다.
달은 줄어들어 죽지만, 사흘이 지나면 다시 커지기 시작하리라.
심연의, 지옥 우물 아래로 아타르-탐무즈는 저녁별로 가라앉지만, 그는 틀림없이 새벽별이 되어 다시 떠오를 것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희망이라 부른다.
그리고 이것은 달콤한 선물이다. 하지만 희망에는 금지된 것도 들어 있다.
거룩한 지금 이 순간의 품위를 손상시키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축제의 시간을 미리 맛보려 하기 때문이다.
명예롭지 않은 시간은 없다. 어떤 시간이든 나름대로 영광스럽다.
따라서 절망할 수 없는 자는 올바로 사는 자가 아니다. 요셉의 생각은 그랬다.
==
"그렇게 서럽게 울지 마십시오. 빵을 굽는 총 감독님.
그리고 화환의 마이스터 주인님도 기쁘다고 그렇게 울지 마십시오.
두 분 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든, 또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든 품위 있게 받아들이십시오!
세상은 하나의 둥근 공과 같습니다.
거기엔 위가 있고 아래가 있으며 선이 있고 악이 있지요.
그렇지만 인간은 이 두 가지를 가지고 지나치게 법석을 떨어선 안 됩니다.
따지고 보면 황소나 당나귀나 다를 바 없으며 서로 바꿔질 수 있습니다.
둘이 합쳐서 하나를 이루기 때문입니다.
두 분 모두 지금 눈물을 흘리시니, 그게 바로 두 분의 차이가 그다지 크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건배를 외치는 주인님이시여, 너무 거만하게 굴지 마십시오.
주인님께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마도 사람들이 주인님의 나쁜 점 때문에 아예 이 일에 끌어들이지 않았던 탓이었겠지요.
주인님은 수다스런 입을 지녀서 아무 비밀도 간직할 수 없다고 믿은 거지요.
그래서 주인님은 나쁜 일에 대해 전혀 알 수 없었던 겁니다.
그리고 미리 말씀 드리자면, 주인님은 주인님의 세상을 만나도 절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제게 철석같이 약속을 하고서도 말입니다.
혹은 절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이 코앞에 닥쳐서야 저를 생각하실 겁니다.
그때는 제가 이 말을 미리 했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렇지만 빵의 대가님, 절망하지 마십시오!
제 생각에 주인님께서는 그 일이 영예로운 일로 미리 기록되어 있다는 이유로 그것을 선으로 혼동 한 까닭에 악한 음모에 가담하셨던 것 같으니까요.
이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은 아래에 있는 신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주인님의 동료는 위에 있는 신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두 분 다 신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시르의 십자가에서 머리를 들어 올리는 것도 머리를 들어 올리는 겁니다.
어쩌면 인간들은 그 십자가에서 한번쯤 당나귀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세트와 오시리스가 동일한 존재라는 표시로 말입니다."
==
이런 일들이 있은 후 요셉은 2년을 더 감옥에 있었다.
그리고 이 두번째 구덩이에서 서른 살이 되었다.
그러다 숨돌 릴 틈도 없이 급하게 구덩이 밖으로 끌려나갔다.
이번에는 꿈을 꾼 파라오가 그를 불러들인 것이다.
그러니까 왕실 신하들의 꿈을 해몽해 주고 2년이 지난 후에 파라오가 꿈을 꾼 것이다.
그가 꾼 꿈은 둘이었지만, 실은 같은 내용이라 하나의 꿈이라 할 수 있었다.
여하튼 이건 별것이 아니고,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래서 가장 강조해야 할 것은 여기서 ‘파라오'
라 불리는 자가 더 이상한 개인으로 따진다면 같은 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곧 빵 굽는 자와 술 따르는 자가 진실을 말해 주는 꿈을 꾸었을 때 파라오였던 그 파라오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파라오는 항상 파라오라 불리고 늘 파라오이다.
그렇지만 태양이 늘 있지만 가고 다시 오는 것처럼, 파라오 또한 오고 간다.
==
그외에는 자위-레에서 벌을 받는 요셉의 생활은 견딜 만했다.
그리고 자신이 보좌하는 편안하고 유유자적한 대장의 말투만큼이나 단조롭긴 했어도, 기다림을 양식으로 삼는 생활이었다.
그에게는 기다릴 것이 많았으니까.
그 대상은 가까운 곳에도 있고, 먼 곳에도 있었다.
우선은 가까운 곳에 있는 것부터 다가오리라.
시간은 잘 알려진 방식대로 지나갔다.
이것을 가리켜 빠르다고도, 느리다고도 할 수 없다.
시간은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유독 느리게 흘러가지만, 뒤돌아보면 어느새 흘러갔기 때문이다.
요셉은 그곳에서 서른 살이 될 때까지 - 물론 그는 별로 의식하지도 않았다 - 살았다.
그러다 숨도 못 쉬어야 할 날이 왔다.
날개를 단 급사가 나타난 그날은, 마이-사흐메에게 거의 깜짝 놀란다는 게 무엇인지 가르쳐 줄 뻔한 날이었다. 요셉한테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길 날을 고대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라오에게나 나라에나 풍성한 결실을 약속하는 검은 것들이 각기 제 할 일을 바로하여, 그러 니까 혹시 실수를 하거나 빼먹는 법 없이 제때 제자리에 나타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만일 뭔가 잘못되면 그건 모두 파라오의 책임이었다.
백성이 신의 아들인 왕에게 매달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그냥 인간이 아니라 신의 아들이니만큼 거룩한 신답게, 거룩하며 필수적인 과정이 한군데도 막히지 않고 착착 진행될 수 있도록 보장해 줄 것 아닌가.
거기에는 파라오 외에는 다른 누구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검은 영역에서 뭔가 실수가 생겨 공동체에 손실을 안기면 이는 즉각 백성들의 왕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왕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예방되어야 할 일이 발생하면, 결과적으로 그에 대한 백성의 신망이 흔들리고, 또 파라오는 백성의 신망이 없으면 그렇게 하고 싶은 일도 할 수 없었다.
하늘에 있는 거룩한 빛의 존재 아톤의 가르침에 승리를 안겨 주는 일 말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족쇄였다.
그는 아래의 검은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오로지 위의 빛만을 사랑했다.
그러나 양식을 주는 검은 것과의 문제가 매끄럽게 해결되지 않으면 빛의 교사로서의 권위도 사라졌다.
젊은 파라오가 밤 같은 어머니의 보호막이 걷혀 온전히 왕권을 넘겨받았을 때 마음이 양 갈래로
나뉘어 착잡했던 이유도 그래서였다.
==
선택받은 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우선 자신을 비하하는 까닭에,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 나중에 높은 곳에 이르게 되면, 이런 유형의 사람은 오히려 화를 내고 분개하면서,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자신이 진작부터 그렇게 믿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에 원통해 한다.
또 자신이 선택받은 자라는 게 당연한 사람도 있다.
이런 종류의 선택받은 자는 자신이 신의 총아라는 사실을 분명히 의식하고 산다.
그래서 아무리 높은 곳에 올라 가도 또 아무리 멋진 생명의 왕관을 쓰게 되더라도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고 놀라워하지도 않는다.
자신이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시련을 겪는 자, 혹은 미리부터 믿어버리는 자, 이 둘 중에서 어느 쪽을 선호하느냐 하는 문제는 사람들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요셉은 여하튼 후자에 속했다.
그나마 세번째 종류에 속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이들은 신과 자신을 속이는 사람들로 자신은 선택을 받을 자격이 없는 것처럼 군다.
그런데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은혜' 라는 단어는, 축복을 당연하다고 여기는 자들보다 더 교만하게 들리는 법이다.
==
사실 우리들의 존재는 '존재하지 않는 것(무엇이 아니다) 과 '늘 존재하는 것(늘 무엇이다)’이 서로 만나는 지점일 뿐입니다.
그래서 시간 속에 잠깐 등장하는 우리들의 존재는 영원의 수단일 뿐이지요.
하지만 이것만이 아닙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제 아버지의 집 앞에서 사상가들 앞에서 한번쯤 제시해 보고 싶은 문제가 뭔가 하면 이런 것입니다.
과연 시간에 제한을 받는 유일하고 특수한 것이 영원한 것으로부터 더 많은 가치와 품위를 얻는 것인지, 아니면 거꾸로 영원한 것이 시간에 제한을 받는 유일하고 특수한 것으로부터 더 많은 가치와 품위를 얻는 것인지.
이는 참으로 아름다운 문제 중의 하나로 도무지 풀리질 않습니다.
저녁부터 아침에 여명이 찾아올 때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끝이 나지 않는…
==
축복의 때가 시작되는 첫날부터, 그 꿈이 해석을 얻은 그날부터 다가올 재앙을 생각하고 조언을 구해야 한다는 그분의 의견과 경고 또한 얼마나 지당한 말씀인가.
그 재앙을 막을 수는 없지만 - 신의 뜻을 막을 수는 없으므로 - 하지만 그분의 조언을 생각해 보고 앞날을 내다보고 대비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은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의 시간은 시련이 닥칠 그날까지 숨을 돌리라는 의미만 있는 게 아니라, 그 뒤에 닥칠 일을 준 비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공간이다.
그렇게 하면 재앙이라는 이름의 엄청나게 무거운 괴물 새가 다가오더라도, 단순히 그 새를 붙들어 가능하면 날개를 잘라 온 사방을 휘젓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재앙을 축복으로 돌려놓을 수도 있다.
아마도 저는 이와 비슷한 혼잣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소인이 크나크신 대인들의 대화에 끼어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손한 행동이니까요.
그래서 또 이렇게 나직하게 혼잣말을 할 것입니다.
저주를 축복으로 바꿔 놓을 수도 있으니 예방이란 얼마나 멋지고 위대한 일인가!
그리고 신께서는 또 얼마나 자비로우신가.
왕의 꿈에 나타나 이렇게 계시해 주시면서 멀리 내다볼 수 있도록 7년이 아니라 이렇게 한꺼번에 14년을 주시지 않았는가.
여기에 예방의 허락과 또 명령이 있지 아니한가!
그건 14년이라는 세월은 7년이 두번 겹치는 것이지만, 하나의 시간으로서 중간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즉 바로 오늘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이 바로 전 체를 바라 볼 수 있는 그날이다.
그러나 전체를 바라 본다는 것은 미리 알고 예방한다는 뜻이다.
==
“제가 하는 이야기는 믿음과 믿지 않는 것에 관련된 겁니다.
그리고 짐에게 주어진 재능은 제게 이렇게 말해 줍니다.
믿지 않는 것은 믿음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른다고.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믿지 않는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에는 몇몇 믿지 않는 것도 속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된 익살을 믿고 있다면, 어떻게 올바른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백성에게 올바른 것을 가르치려면, 어쩔 수 없이 백성에게서 그들이 애착을 걸고 있는 잘못된 믿음을 빼앗아야 합니다.
이것이 잔인한 일일 수도 있지만 사랑에서 나온 잔인함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제 아버지께서도 이 점을 용서해 주실 겁니다.
그래요. 도대체 믿음이 더 굉장합니까? 아니면 믿지 않는 것이 그러 합니까?
과연 어떤 것이 앞서야 합니까?
믿는다는 것은 더 없이 황홀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는 것이 믿는 것보다 어쩌면 더 행복한 겁니다.
짐은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짐이 직접 겪어보았습니다.
그래서 짐은 두려움의 깃털과 악령들 그리고 우시르와 그의 끔찍한 자들과 그 아래에 있는 잡아먹는 여자는 믿지 않아요! 그건 안 믿어요! 안 믿어!”
==
"저는 그분께 침묵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이름으로 저를 거룩하게 만들어 침묵에 성물로 바쳤습니다.
이렇게 거룩해진 자, 예비된 자는 바로 아래에 속한 자들입니다.
폐하께서는 거룩하게 성별된 자를 이 아래의 것과 분리하실 수 없습니다.
그는 아래에 속하니까요.
그의 머리에 위에서 내려온 후광이 있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제물을 아래의 것에 바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를 통해 위에 제물을 바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입니다.
왜냐하면 신께서는 아래와 위를 합친 전체시니까요.”
==
오. 주인님! 주인님의 역사는 얼마나 다 채로운지요!
당신은 계절을 만드셨고 공간과 시간을 수백 만 개의 형상으로 채우셨고, 그들이 주인님 안에서, 주인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시간 동안 도시에서, 마을에서, 촌락에서, 시골길에서 강가에서 살아가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께서는 그들을 구별하시고 그들에게 각기 다른 혀를 주셔서 그들이 특별한 말을 하게 하고 서로 다른 관습을 갖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주인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몇몇은 갈색이며 또 몇몇은 붉고 또 다른 자들은 검고 또 다른 자들은 마치 우유와 피 같습니다.
이렇게 주인님 안에서 각기 다른 색깔로 자신을 드러내는 이들이 바로 주인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모습, 즉 주인님의 현현입니다.
코가 흰 자들도 있고 평평한 코를 가 진 자, 아니면 쭉 뻗은 코도 있습니다.
또 울긋불긋한 옷을 입는 자도 있으며 하얀 옷을 입는 자도 있고, 면 옷을 입기도 하고 아마포 옷을 입기도 합니다. 각기 자신들에게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말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서로 놀려댈 이유가 아니며 서로 미워할 이유도 못 됩니다.
오히려 흥미를 가지고 서로 사랑해 주고 존중해 줘야 할 이유가 될 뿐입니다.
밑바닥부터 선하신 신이시여, 당신이 창조하시고 먹여 살리시는 것들 모두가 이처럼 기쁨으로 충만하고 건강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사랑받는 아들, 이 파라오에게 당신을 전하도록 가르침을 불어 넣으셔서 절 이처럼 황홀하게 만드셨습니다.
당신은 남자들에게 씨를 만드시어 여자의 몸 안에 있는 소년에게 호흡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이 울지 않도록 아이를 달래 주시는 당신은 훌륭한 유모십니다.
물론 바깥세상의 유모가 아니라 내면의 유모이시지요!
또 당신은 모기들이 먹고 살 수 있는 것들도 만드시고 벼룩과 벌레, 그리고 벌레의 새끼들의 먹이까지 만드셨습니다.
가축이 당신의 방목지에서 만족하며, 나무와 식물들이 생수를 먹고 살며 꽃들이 감사와 칭송으로 꽃을 피우고 수많은 새들이 당신을 숭배하며 늪지대 위로 퍼드덕거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은 충만해집니다.
아니, 벅차서 넘쳐납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필요한 것을 다 갖춰 주신 구멍에 앉아 있는 작은 생쥐가 진주 눈을 하고 두 개의 작은 손으로 코를 닦는 모습을 생각하면 제 눈에 눈물이 가득 고입니다.
그리고 껍질 안에서부터 벌써 삐악 거리는 병아리는 생각도 해서는 안 됩니다.
당신께서 그 모습을 온전히 만들어주시는 즉시 껍질을 깨고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삐악삐악하며
분주하게 오가는 그 병아리까지 생각했다가는, 당신을 향한 사랑의 눈물을 닦느라 이 삼베옷을 다 적셔야 할 테니까요.
==
"육신으로 따지면 한낱 땅 위의 벌레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아니, 그의 곁에 있는 것들과 위에 있는 것들보다 더 나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머리를 조아려 이러한 현상들 중의 하나를 숭배하는 것은 거부했습니다.
그들 모두 자신과 마찬가지로 만들어진 작품이요.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에게 말했습니다.
‘모든 존재는 작품이다.
그리고 작품 앞에 그 작품을 만든 정신이 있으며 작품은 그 정신을 증명하는 증거이다.
따라서 아무리 힘이 센 것이라 해도 하나의 작품 앞에 향을 피우는, 그런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는 없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내가 증인인 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것들은 증거물이면서도 그런 사실조차 모르지 않는가?
그렇다면, 내 안에는 모든 작품들이 증언하고 있는 그것이 혹시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존재의 존재, 그의 작품보다 더 큰 존재이며 그 작품 밖에 있는 그 존재가 혹시 내 안에 깃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것은 세상의 밖에 있으며 세상의 공간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공간이 아니다.
태양은 우리로부터 아주 먼 곳에 있다. 무려 36만 마일이나 떨어져 있다.
그래도 그 빛은 우리 곁에 가까이 있다.
그러나 태양에게 길을 지시하는 자는 먼 곳보다 더 멀리 있으며, 또 가까운 것보다 더 가까이 있다.
멀든 혹은 가깝든, 이것은 그분 앞에서는 같다.
그는 공간도 시간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안에는 세상이 들어 있지만, 그는 세상 안에 있지 않다.
오히려 하늘에 있다.’”
==
"그래, 맞아.
하늘에, 곧 '하늘 곁’에 가 아니라 하늘 안에 계신 분, 먼 곳보다 더 멀리, 그리고 가까운 곳보다 더 가까이 있는 분, 존재의 존재, 변천을 거쳐 죽는 것이 아니라 늘 현존하는 분, 위로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 서 있는 빛, 모든 생명과 빛과 아름다움과 진리가 샘솟는 변함없는 원천, 그것이 바로 아버지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신을 알려주고 계신다. 이 파라오에게.
그분은 자신이 사랑하는 아들에게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여주시지.
그분이 만물을 만드셨으니까.
그리고 그의 사랑은 세상 안에 있는데. 세상은 그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파라오는 그분을 증언하는 중인이며. 그분의 빛과 사랑의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를 통해 행복해 지기를 바란다.
여전히 빛보다는 암흑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람들은 이해를 못해서 악한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에게서 나온 아들은 이들에게 이렇게 가르칠 것이다.
빛은 황금빛 정신이며 그것이 곧 아버지의 정신이다.
그리고 어머니의 심연으로부터 힘이 올라가 아버지의 정신 안에서, 그 불꽃 안에서 정화되어 아버지 안에서 정신이 된다.
신은 물질이 아니다. 그분의 햇살이 그러하듯이. 그분은 정신이시다.
그리고 파라오는 너희에게 그분을 정신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숭배하라고 가르친다.
아들은 아버지가 아들을 알 듯이 아버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을 사랑하고 그를 믿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 모두에게 파라오는 상을 내리겠다.
그리하여 그들을 크게 만들어 궁궐로 불러 황금을 뿌려 주겠다.
왜냐하면 그들이 아버지에게서 나온 아들 안에서 아버지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말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나를 보내셔서 모든 사람들이 빛과 사랑 속에서 하나가 되도록 하셨다.
나와 아버지가 하나인 것처럼……”
그는 미소를 지었다.
행복에 겨운 미소, 언젠가는 저무는 태양의 후손답게 죽음을 바라보는 미소였다.
파라오는, 손은 뒷짐을 지고 그림이 그려진 벽에 등을 기댄 후 눈을 감았다.
그는 그 자리에 똑바로 서 있긴 했으나, 더 이상 그곳에 있지 않았다.
==
그러나 예언된 일곱은 실제 삶에서 거의 다섯처럼 보였다.
그러나 움직이는 삶은 확고한 다섯도 아니었고 일곱도 아니었다.
우선 기름진 풍년과 여원 흉년이 파라오의 꿈에 등장한 살찐 암소와 여원 암소처럼 분명히 구별되는 모습으로 모태에서 올라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름진 해와 여윈 해는 살아 있는 것이 그러하듯 똑같이 기름지고 여윈 것이 아니었다.
기름진 해 중에 한두 해는 여윈 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그저 적당히 풍요롭다고 할 수 있는 해였다.
한편 여원 해들은 모두 충분히 여위었다.
일곱까지는 안 되어도 다섯은 분명 그러했다.
그러나 그중 몇몇은 최악의 가련한 수준은 아니고 절반 정도의 가련한 수준이라 그럭저럭 견딜 만한 것에 가까웠고, 그래서 예언이 없었더라면 전혀 기근의 해라거나 저주의 해로 여기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워낙 선한 의지를 가진 터라 이 해들도 숫자를 헤아릴 때 함께 계산해 주었다.
그래서 예언이 실현되지 않았다는 말인가? 그건 아니다.
거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사실이 그러했으니까.
우리가 들려주는 사건의 사실이 그러했다.
그런 사실이 없었더 라면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도 없다.
또 그랬더라면 멀리 옮겨짐과 높이 들어 올림 그리고 데려오기도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집트를 비롯하여 그 주변까지 충분히 기름지고 여윈 해들이 지나갔다.
몇 년 내리 기름진 해가 이어지고 그 다음에는 적당히 여윈 해가 이어졌다.
요셉은 풍요를 절제하여 모아두었다가 이를 나눠 주어, 아우성치는 결핍의 입을 채워 주느라 무척 분주했다.
그는 이렇게 하여 자신이 바로 우트나피시팀-아트라하시스이며, 매우 영리한 자 노아임을 증명했다.
앞을 내다보고 대비한 남자, 방주를 만들어 대홍수의 재난을 무사히 넘겼던 남자.
요셉은 지고한 분의 종으로서, 그의 내무장관으로서 신의를 다 하여 이 일을 수행했고 그렇게 하여 파라오에게 계속해서 황금을 쏟아 부었다.
==
그러나 그녀의 영혼을 들여다보면 저기 저 밑바닥에 보물 하나가 편안히 쉬고 있었다.
그 어떤 정신적인 명예나, 세속의 명예보다 소중하며, 그녀가 시인하든 않든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바꾸지 않을 보물이었다.
그렇게 깊이 가라 앉았어도 그 보물은 여전히 위쪽으로 불빛을 선사하여 모든 것을 접고 체념하고 사는 우울한 나날을 환하게 비추었다.
그것은 그녀의 정신적인 자부심과 세속적인 자부심에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인간적인 삶의 자부심을 보충해 주는 보물이었다.
그 보물은 바로 기억이었다.
그 안에 패배와 좌절의 아픔이 묻어 있어도 상관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꼭 그에 대한 기억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그는 이집트 위에 우뚝 선 주인님이 되었다 했다.
그 또한 무트-엠-에네트가 그러했듯이 도구에 불과했다.
그녀의 기억은 오히려 그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거의 상관이 없었다.
그것은 그녀 자신이 꽃을 피우고, 불꽃을 살라 활활 타올랐으며 그녀가 사랑했고 고통받았노라는, 자신을 합리화하는 의식이었다.
==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지 결정하는 것은 각자의 취향과 호감과 기본 정서와 기본 체험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 본성에 물감을 들여 우리의 모든 행위에 색깔을 부여한다.
그리고 실은 이것이 우리가 다른 사람 앞에서뿐 만 아니라 우리 자신 앞에서도 변명으로 내세우는 이성적인 이유보다도 훨씬 진실하게 우리 자신을 설명해 준다.
==
진정한 교감은 죽음에 대한 감각이 삶에 대한 감각과 균형을 이룰 때 생겨난다.
죽음에 대한 감각만으로는 경직과 우울을 만들 뿐이며, 삶에 대한 감각만 있을 경우에는 지루한 일상을 만든다.
거기에 유머란 없다.
유머와 교감은 죽음을 바라보는 경건함이 생명을 바라보는 유쾌함으로 따뜻하게 데워질 때 생겨난다.
한편 후자는 전자 덕분에 보다 심오해지며 가치가 더해진다.
요셉의 경우가 그러했다. 그의 유머와 유쾌함이 그것이다.
이것이 그에게 선사된 이중 축복, 즉 위와 아래의 심연으로부터 올라온 축복이었다.
아버지 야곱은 나중에 임종을 맞아 아들 요셉에게 축복을 내리지만, 실은 아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이 축복을 확인해 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도덕적 세상을 조사하면 몇 가지 근본적인 가르침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야곱은 탐 하며. 곧 정직하며, 장막에 거한 사람이라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그러나 '탐'은 묘한 떨림을 가진 단어이므로 그저 '정직한' 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너무 약하다.
원래는 공정과 부정, 빛과 암흑, 생명과 죽음, 이 두 가지를 모두 아우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림과 밈이라는 묘한 공식에서 다시 발견된다.
이 공식은 밝은 긍정을 뜻하는 '우림' 과는 반대로 어둡고 죽음으로 그늘이 드리워진 세계관을 위해 쓰이는 것 같다.
탐 또는 밈은 밝은 것과 어두운 것, 위의 세상과 아랫세상을 동시에 뜻하며 또 두 가지를 서로 바꿔 표현하기도 한다.
우림만 있을 경우에는 유쾌한 것이며 거기서 떨어져 나온 순수 배양이다.
그리고 우림과 툼밈은 어떤 대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한 사실을 알게 해준다.
즉 도덕적 세상이라는 전체에서 한 부분을 떼어놓아도 전체는 항상 그 부분을 마주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도덕적인 세상을 이해하는 건 쉽지가 않다.
우선 화사한 햇살이 아랫세상의 것을 암시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사오는 붉은 사람에 사냥꾼이며 초원의 남자로서 철저한 태양의 남자인 동시에 아랫세상의 남자였다.
그러나 그의 쌍둥이 동생 야곱은 달의 남자이며 목자로서 에사오와 대비되지만, 그가 인생의 절정기를 아랫세상, 즉 라반 곁에서 보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황금과 은을 얻게 되었다.
그는 이때 어떤 수단을 사용했던가? ‘정직함' 이라고? 이 표현은 부정확한 정도가 아니다.
그는 결코 '우림' 하지 않았다. 오히려 룸 밈 했다.
즉 가련하면서도 유쾌한 인간이었다. 길가메쉬처럼.
그리고 요셉 역시 그러했다.
태양의 나라, 아랫세상 이 집트에 빨리 적응한 것은 단순히 그의 성격이 '우림' 해서가 아니었다. ‘
'우림과 틈밈', 이것은 '예 그리고 예와 아니오’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예 아니오'에 또 하나의 예'가 붙은 것이다. 순전히 계산으로 따진다면.
예 하나와 '아니오' 하나가 상대방을 없애면 또 하나의 ‘예'만 남게 된다.
그러나 순수한 계산에는 색깔이 없다.
최소한 이런 수학은 결과로 남은 '예'의 어두운 색감을 간과하게 된다.
이것은 계산상으로 없어진 '아니오' 가 남긴 여운이다.
이미 말했듯이 이 모든 것이 이처럼 복잡하게 꼬여 있으니, 가장 좋은 방법은, 다음과 같이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요셉에게서는 삶과 죽음이 만나 교감을 만들었고, 이 교감이야말로 요셉이 멘페, 즉 유머러스한
무덤의 대도시에 살게 해달라고 파라오에게 청원한 진짜 이유이며, 보다 깊은 이유였다라고.
==
그러나 신의 약혼녀로서 처녀로 있다가 이제 신랑이 된 그의 생각이 앞으로 태어날 자녀들, 곧 신과 세상이 함께 섞인 아이들에게 가 있지 않고, 지금까지 금지되어 있던 새로운 일, 물론 아이들의 출현에 이바지할 그 일에 가 있다 해서 화를 낼 이유는 없다.
그 일은 이전에는 악한 것이어서 일어나서는 안 되었지만, 이제는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만들어주는 그 실체를 바라보라.
곧 귀를 기울이는 듯한 눈과 그렇게 귀여운 호박색 형상을 지닌 아스나트, 즉 아가씨를 바라보면, 그대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
녀를 곧 사랑하게 되리라는 것을.
그렇다. 그대는 벌써 그녀를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
이렇게 모든 것이 엄청난 성장을 거듭하니 시원한 그늘 아래 앉아, 자신이 영혼을 다해 사랑하는 신을 전파하게 되었는데 더 이상 바랄 것이 어디 있는가.
그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누군가와 대화를 하든, 아니면 혼자서 고독을 즐길 때든 이 신을 보다 나은 모습으로 생각해 내는 것뿐이었다.
오로지 그 일에 그는 전력을 쏟았다.
그래서 요셉과 이야기를 나눌 경우에도 자신의 아버지 아톤의 고귀한 특성을 함께 정하기도 하고, 또 다른 신들과 비교하기도 했다.
어떤가? 뭔가 떠오르는 게 있지 않은가?
이런 식으로 신을 전파하는 외교관들이 서로 협상하는 장면은 어딘가 낯이지 않은가.
그렇다. 살렘에서 아브라함과 멜기세덱이 이런 대화를 나눴었다.
엘 엘리온, 곧 지고한 분 혹은 유일신의 사제였던 멜기세덱과 나눈 대화는 그가 섬긴 엘이 아브라함의 신과 같은 존재, 혹은 거의 흡사하다는 결론으로 끝을 맺었었다.
그러나 파라오와 나누는 대화가 이러한 합일에 다가갈 때면, 요셉은 유난히 더 뻣뻣하게 굴었다.
자기보다 높은 친구, 곧 파라오를 대할 때면 항상 신하로서 거리감을 유지하느라 깍듯하게 대했지만, 이 경우만은 지나칠 정도로 뻣뻣했던 것이다.
==
범죄는 그저 무딘 자들이나 저질러야 한다.
그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니까.
그래서 이들은 평생을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 잘만 산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쫓아다니지 않는다.
이렇듯 악은 무딘 자를 위한 것이다.
그러나 결코 무던 구석이라고는 없으며 조금이라도 부드러운 면이 있는 자라면, 가능하면 거기서 손을 떼야 한다. 나중에 뒤치다꺼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신이 거기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어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바로 이 양심 때문에 벌을 받으니까.
==
오히려 여주인의 강요로 마지못해 바친 제물이었다.
그의 정신은 쾌락과 다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전의 시녀를 안았던 팔을 풀 때면, 번번이 수치심으로 머리를 떨구고 가슴 아파하며 이런데도 과연 상속자로 선택될 자격이 있을까 절망하고 깊은 회의에 빠지곤 했다.
그런데 이 자격이 요셉에게 저지른 일로 말미암아 요셉과 함께 세상에서 사라지자, 유다는 아쉬타르티가 안겨다 주는 고난을 자신의 잘못에 대한 벌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 고난이 점점 더 커져 밖에서 에워싸고 안에서는 들쑤시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이 남자는 그 이후 지옥에 갇혀서 회개하고 있다고 말해도 될 정도였다.
지옥, 그렇다. 그런 지옥도 있다.
이것은 이른바 성의 지옥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게 뭐 그렇게 심각하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정결함에 대한 갈증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사실 이러한 갈증이 없다면 지옥 같은 것도 없다.
이런 지옥은 물론이거니와 다른 지옥도 없다.
지옥은 정결한 자들을 위한 것이다.
이것이 도덕적 세상의 법칙이다.
지옥은 죄인들을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죄를 짓는다는 것은 자신의 정결함을 거역한다는 뜻이다.
사람이 짐승이라면, 죄를 지을 수 없으며 지옥 같은 것은 느끼지도 못한다.
세상의 이치가 그러하다.
그러므로 지옥은 오로지 보다 나은 사람들만이 거하는 곳이다.
이는 공정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의 정의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
앞으로 올 것이 과거에 있던 것 보다 덜 엄숙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를 부인한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과거의 언젠가만 엄숙하며 미래의 언젠가는 보잘 것없다.
이들은 경건한 게 아니라 경건한 척하는 자들이다.
한마디로 어리석고 몽롱한 자들이다.
다행히 야곱은 이들의 교회 안에 앉아 있지 않았다.
미래의 언젠가를 존경하지 않는 자는 과거의 언젠가를 노래할 자격도 없으며, 오늘에도 잘못된 자세를 보인다.
이것이 야곱 벤 이사악이 다말에게 들려준 교훈에 삽입하고 싶은 우리의 의견이다.
그게 허락된다면 말이다.
야곱의 가르침에는 이 이중적인 ‘언젠가'가 온전히 들어 있다.
사실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그녀에게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는 중이었다.
이 경우 세상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선포할 때 사용 하는 단어가 ‘언젠가'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녀는 아마 그에게 감사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
"하하! 유다! 자네잖아! 유다 자네가 며느리를 자기 여자 로 만들었네! 우하하하!"
그러면 레아의 넷째 아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아우성치는 가운데 그는 나직이 말했다.
"그녀는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고개를 숙이고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되돌 아갔다.
그러다 반년이 지난 후 다말은 쌍둥이 형제를 낳았다.
이 아이들은 강건한 남자로 자랐다.
그녀는 아랫대로 내려가 서는 이스라엘의 두 아들을 없지만, 다시 윗대로 올라가 서는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아들을 두 명이나 낳았다.
처음 나온 아들은 페레쯔였는데 그 아이는 무척 강건한 남자로 장성했고, 대를 잇는 일에도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다.
그의 7대 손이 강건함 자체였던 보아즈였다.
그는 사랑스러운 여인의 남편이었다.
이들은 에프라타에서 번성 하였고 베들레헴에서 칭송을 받았다.
이들의 손자가 이새인데, 이 베들레헴 사람은 일곱 아들을 가진 아버지였고, 어린양을 치던 막내아들은 갈색 피부에 아름다운 눈을 지녔다.
그는 아마도 현악기를 연주할 줄도 알았던 것 같다.
또 창을 던질 줄도 알아서 거인을 쓰러뜨리기도 했다.
그리고 기름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다.
이 모든 것은 훨씬 훗날의 일로 아직은 멀리 놓여 있으며 더 큰 이야기에 속하는 것이다.
요셉의 이야기는 이 큰 이야기 중에 삽입된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요셉 이야기에 바로 여자의 이야기가 삽입된 것이며, 그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이야기에서 삭제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황당해 보일 정도로 단호한 태도로써 마침내 우리 이야기 안으로 들어온 그녀가 저기 우뚝 서 있다.
원래 키가 큰 그녀이다. 지금 그녀의 표정은 거의 무서워 보인다.
고향집의 언덕 기슭에 올라 선 그녀는, 한 손은 배 위에 올려놓고 다른 손으로 눈을 가리며 멀리 경작지를 바라보고 있다.
저 멀리 구름을 뚫고 빛이 솟아나 드넓은 하늘에 환희의 물결이 일렁이는 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