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4일 사순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 : 2열왕 5,1-15ㄷ
복 음 : 루카 4,24ㄴ-30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26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27 또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28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화가 잔뜩 났다.
29 그래서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다.
그 고을은 산 위에 지어져 있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30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면 두 가지 등급이 좋아야 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수능 시험 등급이고, 또 하나는 내신 등급입니다.
그런데 엄마들이 보는 자식의 등급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적어봅니다.
1등급: 공부를 잘한다.
2등급: 공부는 못하지만, 성격이 좋다.
3등급: 공부도 못하고 성격도 나쁘지만, 건강하다.
4등급: 지 아빠 닮았다.
공부 잘하는 것이 1등급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지만,
아이를 위한 엄마의 마음을 볼 수 있어서 뭐라 하기도 뭐합니다.
하지만 성적을 위해 학원 열심히 다니고, 각종 스펙을 쌓느라고,
성격도, 건강도, 또 가족 간의 사랑도 잃는다면
성적과 스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런데 하느님 나라는 오히려 4등급을 맞아야 갈 수 있습니다.
즉, ‘지 아빠’인 하느님을 닮아야 그 나라에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과는 다른 하느님 나라에 가는 기준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은 잊어버리고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고향 나자렛 회당에 가셔서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그런데 회당에 있던 고향 사람들은 이 말씀에 화가 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특히 사렙타의 과부 이야기, 시리아 사람 나아만의 이야기를 통해, 더 화가 납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이방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선택된 자기들만 당연히 구원받아야 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음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은총이 넘어감을 이야기했다고 화가 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4등급을 맞아야 갈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 아빠’인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히 얼굴만 닮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따라야 진정으로 닮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화를 불러일으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의 회개를 통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구원의 길에 들어가는 은총 그 자체입니다.
따라서 이를 거부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몹니다.
심지어 벼랑까지 끌고 가서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니지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갑니다.
그들은 구원의 은총을 걷어찼습니다.
겸손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루카 4, 29)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카 4,24)
예수님께서는 스스로를 ‘예언자’로 자처하시면서,
예언자가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배척하고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루카 4,29)
이는 예수님의 전 생애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받으실 배척을 예고해 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성문 밖으로 내몰리어 죽임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사실은 이스라엘 밖, 이방인 지역들에게로
당신 구원이 퍼져나가게 될 것을 예시해 줍니다.
곧 완고한 이스라엘 대신 장차 당신을 맞아들이게 될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미리 가리켜줍니다.
그러나 그분을 죽이려는 그들의 음모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 4,30)
(“한가운데”라는 부사는 우리를 하느님의 현존에로 데려다줍니다.
“너희 한가운데 계시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께서는 위대하시다.”(이사 22,6)
“정녕 이제 내가 가서, 너 한가운데 머무르리라.”(즈카 2,14))
이는 당신이 수난을 거절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이 고난을 받으실 때가 아직 오지 않은 까닭입니다.
때가 되면, 당신께서는 수난을 스스로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강제로 끌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당신을 내어주실 것입니다.
실로 당신은 원하시면 붙잡히시고, 나무에 달리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덕 위 벼랑에까지 그분을 떨어뜨리려 내몰아 갔지만,
그들 한가운데를 유유히 가로질러 가시는 그분을 그 누구도 어찌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직 수난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완고하여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거역하였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고집부리는 사울을 꾸짖을 때,
사무엘의 입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1사무 15,23)
사실, 우리는 이 우상을 벗어나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에게서 빠져나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지,
하느님을 자기의 좁은 지식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완고함이야말로 불신의 씨요, 믿음이야말로 하느님을 끌어당기는 자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완고함과 고집으로 형제를 불신하고,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루카 4,24)
주님!
스승을 곁에 두고도 존경하지 않은 저는
수술을 받아야 살 수 있는 데도, 의사를 믿지 않아 수술을 받지 않는
어리석은 환자입니다.
제 앎을 뛰어넘는 당신을 믿지 못함은
안다는 제 생각을 섬기고 따르는 우상 숭배자입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내려놓고 겸손함으로 존경하고,
응답으로 믿음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님은 나자렛을 당신의 공생활 초기에 방문하신다.
나자렛을 방문하셨지만 나자렛 사람들의 태도는 달랐다.
그들을 회당에서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 하시면서
하느님 앞에 회개하라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엘리야가 찾아간 사렙타 마을의 과부 이야기와
엘리사 시대에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을 고쳐주신 이야기(24-27절) 하시면서,
기적을 팔레스티나 밖에서 행하신 것은
바로 당신의 백성들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
사실 사렙타 마을의 그 과부(1열왕 17-18장)와 시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2열왕 5장)이
얼마나 큰 신앙을 입증해 보여주었다.
바로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께서 선포하신
새로운 것들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적개심을 갖게 되었고 그분을 배척하고 마침내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이 불편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는 어떤가? 그분은 어떤 면에서 불편한 분이시다.
이 불편한 분의 말씀에 부응하여 우리 자신을 변모시켜 나가고자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자렛 사람들과 같이 폭력은 행사하지 않았더라도
그분에게 어떤 제약을 가하려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결국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산벼랑으로 예수를 끌고 가 그곳에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한다.
우리의 마음 안에도 어떤 면에서 이러한 나자렛 사람들의 모습이 나타날 수도 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내가 가지고 있는 어떤 선입견으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지 못한다면,
그래서 우리 가운데 계시는 주님을
산벼랑으로 밀어내어 죽이려고 하지나 않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항상 주님의 자녀로서 어떠한 판단을 갖지 않고,
이웃에게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허물이 없는 사이일수록 더욱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말에는 그 사람의 심성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불씨가 큰 집을 태울 수 있듯이,
사소하게 나간 말 한마디가 큰 불화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농담처럼 사람의 신체에 대한 약점을 이야기하지만,
듣는 사람은 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예뻐만 보이는 장미의 정원에도 자세히 보면 잎이 찢어진 것도 있고,
벌레 먹은 것도 있고, 색이 바란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몸매가 균형 잡히고, 이목구비가 선명한 사람도 있겠지만,
선천적으로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고, 안타까운 사고로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고,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나와 다른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그래서 치우거나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면
세상은 더욱 삭막해 질 것입니다.
‘너 때문이야,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니 형의 반만 닮아봐라.’라는 말은
우리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독소가 됩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세상은 더욱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제가 할게요. 감사합니다.
그럴 수도 있지요.’라는 말을 자주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많은 전공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나병’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시리아의 왕은
이스라엘에 훌륭한 예언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예언자는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해 줄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시리아의 왕은 이스라엘 왕에게 많은 선물을 주면서
나아만의 나병을 고칠 수 있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은 사실 여부를 따지지 않고 이렇게 불평하였습니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느님이란 말인가?
그가 사람을 보내어 나에게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다니!
나와 싸울 기회를 그가 찾고 있다는 사실을 그대들은 분명히 알아 두시오.”
이스라엘 왕은 먼저 불평의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엘리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임금님께서는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를 저에게 보내십시오.
그러면 그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에게 가서 나병을 치유해 주기를 청했습니다.
엘리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요르단 강에 가서 일곱 번 몸을 씻으십시오.
그러면 새살이 돋아 깨끗해질 것입니다.”
나아만은 엘리사의 말을 믿지 않고 화를 내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다마스쿠스의 강 아바나와 파르파르는 이스라엘의 어떤 물보다 더 좋지 않으냐?
그렇다면 거기에서 씻어도 깨끗해질 수 있지 않겠느냐?”
나아만의 부하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버님, 만일 이 예언자가 어려운 일을 시켰다면 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아버님께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나아만은 부하의 말을 듣고 요르단강에서 몸을 씻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괴롭혔던 나병은 깨끗하게 나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삼 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 온 땅에 큰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때에,
이스라엘에 과부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아무에게도 파견되지 않고,
시돈 지방 사렙타의 과부에게만 파견되었다.
엘리사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에는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해지지 않고,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졌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닫혀서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음을 열고 복음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제게 위로를 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려 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첫발이 중요하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현대를 지식 정보화시대라고 합니다.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저도 많은 정보를 접하면서 긍정적인 것도 있지만, 마음이 흔들리기도 합니다.
특히 어떤 사람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데
난데없이 몰라도 되는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그 사람에 대한 인식을 다르게 할 때가 있습니다.
‘과거 없는 성인 없고, 미래 없는 죄인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좋지 않은 기억을 지우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마음을 넓혀서 모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가득 차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해 주시는 복음을 귀담아듣지 않았고,
그들은 마음이 딱딱하게 굳어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어떤 말씀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습니다.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듣고 싶은 만큼 듣고,
보고 싶은 만큼만 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자기의 틀이 너무 강해 자기 안에 갇혀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그러한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기보다는
오히려 나의 잣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선택하고 맞지 않으면 흘려버립니다.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고 능력이 넘치지만,
그 능력을 간과하고 사는 것이 현실입니다.
사실 하느님에 대한 알량한 지식과 편견이 그분과의 만남을 가로막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안다는 것이 장애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겸손을 청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부드러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돌같이 강한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희망합니다.
이웃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정보를 먼저 접하느냐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신뢰하지 않는 사람을 통해 얻게 된 정보는 흘려버릴 수 있지만
내가 신뢰하는 사람을 통해 정보를 얻으면 그만큼 선입견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진실과는 먼 정보에 상관없이 흔들리는 연약함을 지녔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품을 키워야 합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 주실 때
오히려 화를 내고 들고일어나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자기들의 기득권과 자존심을 지키려 취한 방법이 예수님을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기득권을 포기하고 진리를 받아들이면 더 큰 존경과 권위가 살아날 것인데
눈앞의 이익을 위해 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니 첫발이 중요합니다.
선을 택할 수 있는 첫발이 그의 미래를 열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셨습니다”(루카4,30).
결코, 어둠이 빛을 이길 수는 없는 법입니다(요한1,5-9).
우리는 살아가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충동을 받습니다.
그리하면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나만 바보처럼 손해를 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적당히 눈 감으면 편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과 배척,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넘어지시고 또 일어서시는 십자가 길의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 대한 사랑을 일깨웁니다.
진정 “사랑은 크면 클수록 행동치 않을 수 없고,
진실할수록 님의 사랑을 드러냅니다”(박병해 신부).
주님의 가르침뿐 아니라 이웃의 충고를 수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좋은 충고를 받아들여 현명하게 판단하고 수행하면
충고는 하느님의 소리요, 하느님의 뜻이 됩니다.
그러나 ‘꿀도 약이라면 쓰다.’고 합니다.
충고는 현명한 사람일수록 마음속 깊이 스며들지만,
우둔한 사람의 귀에는 스치고 지나갈 뿐입니다.
충고를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충고하려거든, 먼저 자신에게 충고해서 바꾸고 변화시키는 일부터 하기 바랍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혹시 우리도 과도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백성, 즉 선민의식으로 어깨에 힘 좀 주던
유다인들을 향한 예수님 말씀이 눈엣가시처럼 날카롭습니다.
그분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는 즉시 유다인들에게 폭풍 분노를 유발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민사상에 젖어 으스대는 유다인들에게
삼십 육개월이나 기근이 들었던 엘리야 예언자 시절, 이스라엘에도 과부가 많았지만,
엘리야는 시돈지방 사렙타 과부에게만 파견되어 도움을 준 사건을 상기시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엘리사 예언자 시절, 이스라엘에 나병 환자가 많이 있었는데,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깨끗해진 사건을 소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어깨에 힘을 빼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도 나는 선택받은 그리스도인, 나는 선별된 사제,
특별한 불림 받은 수도자라는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한 가르침입니다.
나자렛 회당에서 예수님의 날선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화가 잔뜩 났습니다.
집단으로 들고 일어나 폭력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설교하시던 예수님을 밀치고 밀쳐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마침내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군중은 작정하고 예수님을 추락사시키려고 합세했던 것입니다.
참으로 배은망덕한 일이고,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하고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주러 온 메시아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도 부족할 터인데,
그분을 살상하려고 발버둥 치는 나자렛 사람들의 악행은 정말이지 너무한 처사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처신을 보십시오. 저 같았으면,
즉시 분노로 이글거리면서 아버지께서 주신 능력과 힘을 발휘해서
그 고을 전체를 불바다로 만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고려할 때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일관되게 비폭력 노선을 고수하십니다.
하고 싶은 말씀은 속 시원하게 하신 다음, 지혜를 발휘하십니다.
벌써 떠나면 공생활과 인류 구원 사업에 큰 자질이 발생하니,
그들을 뒤로하고 홀연히 길을 떠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예수님의 태도입니다.
어떤 분 보면 마음속에 이는 분노를 차곡차곡 쌓아 둡니다.
한 달 두 달, 일년 이년, 그리고는 어느 순간 화산 폭발하듯 대폭발시킵니다.
순식간에 관계는 끝장나고, 서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맙니다.
마음속에 이는 분노를 너무 오래 쌓아두지 말아야겠습니다.
적정한 순간 적절한 언어로, 편안한 음성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내공을 키워나가야겠습니다.
무조건 참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렇다고 틈만 나면 대폭발을 시키면 주변에 남아있는 사람들 하나도 없습니다.
적정한 순간에, 균형 잡히고 성숙한 표현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한 가운데
해나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나가야겠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공생활의 시작 – 수난과 죽음의 전주곡
박상대 마르코 신부
루카 복음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예수께서는
40일간 광야 대피정을 마친 후 갈릴래아 지역에서 첫 활동을 하셨다.
그런 다음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고향과도 같은 나자렛으로 가셨다.
오늘 복음은 이곳 나자렛 회당에서의 활동(4,16-30) 그 후반부를 들려준다.
이곳 나자렛 호당에서의 설교가 사실상 루카 복음이 의도하는
예수님의 첫 활동이라 할 수 있다.
마침 안식일이었던 터라, 회당예배에 참석하신 예수님은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된 메시아 예언(이사 61,1-2)을 봉독하시고,
“이 성서의 말씀이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다.”(21절)라는
엄청난 비밀을 폭로하셨다.
이는 곧 예수께서 자기 사명을 계시하신 것이다.
고향 사람들은 우선 예수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칭찬과 탄복의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곧바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23절)하면서,
그저 그렇다는 냉랭한 태도를 취하였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 유다인들은 매일 “쉐마, 이스라엘”(신명 6,4-5)을 기도하고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율법과 예언서를 봉독하고 이에 대한 설교를 들었다.
따라서 예수를 그저 요셉의 아들로 생각하는 그들에게 예수의 입에서 나오는 비밀폭로(계시)는
잠시 놀라움의 대상은 되겠으나, 결코 새로운 것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예수께서 기원전 900년경 엘리야가 이방인 과부를 돌보고(1열왕 17,7-16),
그의 제자 엘리사가 이방인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준 일(2열왕 5,1-14)을 들먹거려 배척의 빌미를 제공 하신다.(25-27절)
이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오른 나자렛의 知人들이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내 벼랑으로 떠밀어 죽이려 들자,
예수님은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 ‘자신의 갈 길’을 가셨다.
오늘은 그냥 피해 가지만 ‘또 다른 벼랑’이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예수님의 길을 앞당기거나 막을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사순 제3주간 월요일뿐 아니라,
앞서간 16-23절을 합쳐서 연중 제22주간 월요일에 봉독된다.
같은 복음이라 할 지라도 시기에 따라 그 뉘앙스가 다르다.
예수님의 공생활을 두루 묵상하는 연중시기의 분위기와
수난과 죽음을 목전에 둔 사순시기의 분위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연중시기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개시와 사명의 선포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고,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24절)는 말씀도
그저 전통적인 속담의 인용으로 들릴 뿐,
막 개시된 공생활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순시기의 오늘 복음은 상당 부분,
공생활 시작부터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는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구약의 예언자들도 죽임을 당할 때면 늘 동네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것은 ‘율법을 어긴 죄인들을 동네나 진지 밖으로 끌어내 돌로 쳐 죽여라’는
율법 규정(민수 15,35; 신명 17,5)에 의한 것이다.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처럼 회개의 설교를 선포하였다면,
예수또한 요한과 비슷한 예언자로 취급받았을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메시아 예언(이사 61,1-2)과
‘하느님 은총의 해’의 선포가 성취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인정한다면,
예수는 자동적으로 하느님을 모독한 자로 처벌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예고된 메시아라면 유다백성을 위한 메시아여야 하는데,
이방인 과부와 나아만을 들먹거리는 태도는 마땅히 유다인들의 분노를 사고
그들의 배척을 초래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 달리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예수께는 어떤 타협도 없으며, 아버지의 뜻을 이 땅에 세우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이렇게 예수님의 공생활을 알리는 오늘 복음이 사순시기의 테두리 안에서는
수난과 죽음의 전주곡이 되고 마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으로 가시어 회당에 모여 있는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그 내용이 매우 훌륭하고 권위가 있어 모두 놀라는데,
오히려 그 경이로움이 예수님을 ‘환영받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예수님의 가정 환경과 성장 과정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고향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놀라운 가르침이 나오자, 이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알기 때문에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유다인들’의 모습과 대조되는
‘믿는 이방인들’의 모습이 제1독서에 제시됩니다.
존경받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불치병에 시달렸지만,
오랜 고통의 시간을 지나 결국 치유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처음에는 요르단강에서 일곱 번 씻으라는 말에 황당해하며 화를 내었지만,
놀랍게도 그의 부하들은 대범하게 권유합니다.
“몸을 씻기만 하면 깨끗이 낫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느님 말씀에 대한 단순한 믿음과 순명이 불가능한 치유를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우리의 앎이 과도한 확신으로 왜곡될 때 주변은 심각한 손상을 입게 됩니다.
더구나 그 앎이 비교나 질투, 열등감을 기반으로 할 때 그 앎은 극단의 폭력을 일으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에서 떨어뜨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믿지 못함’은 죽음으로 이어지고 ‘믿음’은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요르단 물은 나아만의 몸만 고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온 세상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에 대한 진정한 앎(인식)은
그의 의식과 마음까지 낫게 하여 준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