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喜 先生 影堂址(황희 선생 영당지)와 반구정 2007/12/12 12:0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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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草阿(초아) (http://blog.chosun.com/pts47) 2007/12/11 06:55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산 127
황희는 고려 말기부터 조선 전기의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의 정비에 노력했고 世宗年間(세종연간)에는 영의정이 되어 왕을 도와 훌륭한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청백리의 삶을 통한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文宗(문종2년, 1452) 황희가 89세로 세상을 떠나자 세종의 廟庭(묘정)에 배향하고, 世祖(세조원년, 1455)에 유림들이 그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伴鷗亭(반구정)영당을 짓고 영정을 봉안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약 500여 년 전의 일이다.
그 후 이 영당은 한국전쟁으로 전소된 것을 1962년에 후손들이 복원하였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에 전퇴(前退)는 개방되어 있으며 겹처마의 맞배지붕이다. 내부에는 중앙에 감실을 두고 그 안에 영정을 모셨으며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반자가 꾸며진 우물천장이다.
건물 주위엔 방형의 담장이 둘러쳐져 있으며 정면의 입구에는 솟을삼문이 있다. 호를 따라 尨村影堂(방촌영당) 이라고 한다. 그를 잉태했던 열 달 동안 송악산 용암 폭포에 물이 흐르지 않다가 그가 태어나자 비로소 전과 같이 물이 쏟아져 내렸다 한다.
1376년(우왕 2) 음덕으로 복안궁록사에 임명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간 후, 1383년 사마시에 오르고 1385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창왕1년(1398)년 별장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적성현(현 적성면)훈도, 고려조 때 성균관학관 등을 역임하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자 두문동에 은거하다가 1394년(태조 3) 성균관학관으로 등용되어 세자우정자를 겸임한 후 직예문춘추관,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1397년 11월 문하부우습유로 재임중 부모의 상기를 마치지 않은 선공감 정란의 직무가 기복시켜 관직 에 임명할 만큼 중요하지 않다고 직첩에 서경하지 않아 태조의 노여움을 사 파직되었다. 황희선생 영당지와 경모재 선생의 동상 반구정 앙지대를 보게 된다. 널찍한 마당에는 잘 정돈된 고택(古宅)과 방촌의 동상이 있고, 뒤쪽에는 경기도 기념물 제29호인 영당이 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서른살이 되던 해에 고려가 멸망하자, 선비는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70여명의 고려 遺臣(유신)들과 함께 杜門洞(두문동)으로 들어가 버렸다.
두문동의 고려 유신들은 외부와 일체 연락을 끊고 풀 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며 고려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었다. 太祖(태조) 李成桂(이성계)가 갖은 방법으로 이들을 설득했으나 끝까지 아무도 나오지 않았는데, 흔히 말하는 杜門不出(두문불출)이라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고려유신들은 충절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을 등지고 백성을 외면하는것 역시 배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린 황희가 조선 조정에 홀로 出仕(출사)하게되었던 것이다. 세종에게 가장 신임받는 재상으로 명성이 높았다. 시문에도 뛰어나 몇 수의 시조 작품도 전해진다. 1405년 12월 왕명의 출납을총괄하는 승정원지신사가 되면서부터이다.
그 당시 태종의 총애을 받던 박석명이 5년간 재직하던 지신사를 사임하면서 그 후임자로 좌부대언인 그를 추천하여 임명하였는데, 좌부대언에서 지신사로 승진된것은 당시의 인사 관행상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특히 1406년 박석명이 죽은 후 그에 대한 태종의 신임은 각별하였다. 포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신 출신이 아닌 그가 정계의 실력자로 부상된 것은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태종은 하루라도 접견하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서 만나 볼 정도로 그를 신임하였다. 태종의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던가는 태종이 그에게 통해서도단적으로 알 수 있다. 멋진 풍광을 보여준다. 제법 높은 언덕이 성곽처럼 서 있다.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내던 곳으로, 예로부터 갈매기가 많이 모여들어 지정되어 있는데,본래의 이름은 임진강 낙하진에 가까이 있다고 해서 '낙하정'(洛河亭)'이라 불리다가 이후 언제부터인가 반구정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푸른 물이 아래로 굽이쳐 흐르고 송림이 울창하여 좋은 풍경을 이루고 있다. 또 하나의 정자가멋드러지게 서 있는데, 그 곳까지 층계가 나 있다. 앙지대는 원래 반구정이 있던 자리라한다. 유덕을 기리기 위해 육각정을 짓고 '앙지대'라 하였다.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이 앙지대란 이름은 시경(시경)의 호인(호인)이라는 뜻을 취했다'고 적고 있다. 그 옆에는 후손이 쓴 현판시가 하나 걸려 있다. 이 곳이 5백여 년 전에 방촌선생이 소일하던 곳이라 생각하니 더욱 감회가 깊었다. 지금보다도 더 좋았던 것 같다. 하얀 갈매기가 모래톱 가득 내려앉고 지금처럼 남북이 가로막혀있지도 않아서 틈나면 임진강에 배 띄워놓고 한가로이노닐 수도 있었을 테니까... 지금보다 훨신 자연과 벗하며 지내기가 좋았으리라.. 관직생활을 통해 법률과 제도를 정비하고 세종대왕의 한글창제를 돕는 등 태평성대를 이룩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갈매기를 벗 한다는 또 다른 정자인 狎鷗亭(압구정)은 세조때의 韓明澮(한명회)가자신의 호를 따서 한강변에 지은 정자였으나 정자는 없어지고 이름만 남아 압구정동이 되었고 지금의 현대아파트 11동 뒤편이 그자리였다고 한다. 황희정승의 반구정에는 드문드문 찾아드는 객들이 오고 갈 뿐 조금은 쓸쓸하다고 할까. 노닐 무렵 그가 지은 시 한편이 있다. 그의 나이 90이었으니 천수를 누리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 헌신한 일생이었다. 계셨다는 것은 후대의 우리들에게도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다.
종복의 아이들이 달려들어 밥을 빼앗아 먹고 떠들어대며 수염을 잡아당기고 뺨까지 때려도 그저 '아프다 아파'할 뿐 노여워하지 않는 호호야-마음씨 좋은 할아버지 였다.
"나는 너를 자식으로 대하는데 너는 나의 말을 듣지 않으니 "지금 병판의 앉은 자세가 바르지 않으니 의자의 다리를 고치도록 하라" "내가 육진을 개척할 당시 밤중에 적의 화살이 날아들어 책상머리에
천성이 검소하여 비록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집안은 늘 가난하여 방바닥에 멍석을 깔고 지내며 "이 자리가 참 좋구나. 까실까실하여 가려운데를 저절로 긁을 수 있으니"
창밖에 복숭아가 익자 동네 개구장이들이 이 녀석 저녀석 다 몰려들어 잔잔한 목소리로 일렀다. "얘 이놈들아, 다 따먹지는 말아. 이 할래비도 맛 좀 봐야지" 잠시후 나가보니 복숭아는 하나도 없고 빈 나무 뿐이었다. 스스럼없이 대하여 어떤 때는 지나칠 정도였으나 한번도 성내 꾸짖거나 매질하는 적이 없었다 한다.
보다 못한 부인이 보실 수 있을까" 하고 핀잔하자, 부리겠소" 했다고 하니, 그의 따뜻한 愛民精神(애민정신)과 투철한 人本思想(인본사상)은 시대를 훨씬 앞서 갔음을 알 수 있다. 月軒祠(월헌사)는 방촌선행의 고손인 소양공 월헌 황팽헌(1472~1535)선생의 정사룡과 함께 당대에 이름이 높았고, 그의 죽지사는 명나라에서 격찬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靑山臨黃河(청산임황하)
당촌(휘 위)께서 편찬한 '방촌 문집'에 등재되고, 문산읍 반구정에 세운 꿈과 희망과 바램을 의미하며, 궁벽진 곳, 시골을 말한다. 출세의 길을 뜻 하며, 明利人(명리인)은 명예를 쫓고, 이익만을 탐하는 사람들이라한다. 不知老(불지노)는 노인, 어른, 원숙한 사람, 도에 통한 어른들을 알아보지
이 노래는 우리 나라의 선비들이 즐겨 부르던 단가의 한 귀절이다. '껑쩡'이라는 말에는 익살끼까지 있어 더욱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자연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생생하게 나타내었고, 가장 신비롭게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이런 노래가 생긴 것이다. 그가 당대의 명재상이였던 것을 몰랐다. 말년에 갈매기와 노닌다는 압구정을 짓고 나중에 김시습이 그 글을 보고는 가가대소하면서 扶(부)를 亡(망)으로, 바꿔 버렸다. |
두문동 [杜門洞]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光德面) 광덕산(光德山) 서쪽에 고려왕조의 충신들이 모여 살던 곳. |
이성계(李成桂)의 조선건국(朝鮮建國)에 반대한 고려의 유신 신규(申珪) 등 72인은 개성 남동쪽에 있는 이른바 ‘부조현(不朝峴)’에 조복(朝服)을 벗어 던지고, 두문동에 들어가 끝까지 신왕조(新王朝)에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두문동을 포위하고 72명의 고려 충신들을 몰살하였는데, 후일 정조(正祖)때, 표절사(表節祠)를 그 자리에 세워 그들의 충절(忠節)을 기렸다. [두산백과사전] |
첫댓글 청빈한 것 보다는 능력과 업적을 강조했으면 합니다
이 글이 최고로 맘에 듭니다. < 5백년이 지난 요즘에도 김시습의 개작시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젊어서부터 세상을 망치기 시작해 늙어서도 악착같이 욕심을 부리는 공명에 탐한자들... 오늘날 황희정승 같은 분이 새삼 간절히 그립다. >
모든 건 뒤에 바로 잡히게 됩니다. 그건 시간의 속성상 그러하기도 한데 미완성에서 완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우주역사의 섭리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모두가 황희정승 같은 인격으로 도야하는 시대가 온다는 얘기입니다.
장닭님~ 이런 글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