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3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이사 49,8-15
복 음 : 요한 5,17-30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17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18 이 때문에 유다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1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20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21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22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23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도 공경하지 않는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26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
27 아버지께서는 또 그가 사람의 아들이므로 심판을 하는 권한도 주셨다.
28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29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30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정신과 의사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늦은 밤에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는 여성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여자는 이제 곧 자살할 것이라면서 자기의 지금 어려움을 이야기했습니다.
프랭클 박사는 새벽까지 이 여성과 대화를 나눴고,
그녀가 삶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들을 하나하나 제시했습니다.
긴 설득 끝에 이 여성은 목숨을 끊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중에 이 여인을 만난 빅터 프랭클 박사는 그가 제시한 여러 가지 근거 중에
어떤 것이 그녀의 결심을 번복하게 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그것 중에는 그 어떤 것도 제게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대신 결심을 번복하고 다시 힘을 내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녀를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오랫동안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프랭클 박사의 자세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자세가 마음을 바꾸게 했고 자기 삶을 살 가치가 있음을 이해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단순히 말로써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면서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자세에서
힘을 얻게 되어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결코 혼자가 아님을, 나의 말도 귀 기울여 주는 함께하는
누군가가 있음에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늘 함께하는 주님의 존재를 느끼는 삶이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말을 들어주시고, 당신의 따뜻함 품으로 안아 주십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을 어기셨던 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멈춰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시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지금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죽이려는 이유만을 찾습니다.
율법의 핵심이 사랑임에도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니,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합니다.
주님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 자체를, 즉 있는 그대로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 삶 안에서 늘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 사랑을 알아보는 사람만이 큰 힘을 얻을 수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에 38년 동안 누워 있는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문제를 삼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하신 일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5,19)
이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그 하시는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지상에서 하시는 당신의 일에,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5,24)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아들이 기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아들에게 재판권을 위임하시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십니다.
곧 사랑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요한 5,26)이며,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
이는 신적 생명이 사람의 행동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행동에서 온다는 말씀입니다.
곧 신적 생명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사람의 믿음이 온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 속에 생명을 넣으시기에 사람이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신적 생명은 믿음의 결과나 믿음의 보상으로가 아니라,
믿는 자가 이미 자기 속에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믿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하나 되어 일하십니다.
곧 벳자타의 병자를 고치신 일도 아버지와 하나 되어 함께 하신 정당한 일임을 밝히십니다.
이처럼 아들의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아버지와의 사랑의 연합에서 하셨듯이,
우리도 일할 때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
주님!
제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사랑의 연합으로 당신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고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이 당신 뜻 안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아멘.
아들도 살리고 싶은 사람들은 살릴 것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이나 고생한 병자를 고쳐주셨다고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17절) 하시면서
당신의 행위는 아들 안에서 일하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하신다.
이렇게 아버지를 언급함으로써 당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들었다고
분노한 이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셨다.
여태라는 말은 아들이 말씀으로서 아버지 안에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이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창조하신다면,
그분은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당신 아버지와 모든 면에서 같으시다.
안식일의 의미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은 불쾌해했다.
그런데 당신을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표현하시어 그들을 더욱 혼란에 빠뜨리셨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19절)
당신은 하느님의 모습이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고 하신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다시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21절)
죽은 이를 되살리는 것은 하느님의 속성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 역사하시지 않고,
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계시며,
아들 또한 하느님의 본성상 그 권능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그분을 믿는 사람은 이미 생명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하신다.
아들을 믿지 않는 것은 바로 아버지를 믿지 않는 것이며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신다.
또한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주셨기 때문이다.”(26절) 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말씀과 업적은 당신이 독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아드님께서 하시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말씀과 업적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30절) 하시며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는 분이심을 알고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987년 겨울입니다. 저는 제대를 5달 앞둔 병장이었습니다.
일석점호를 앞둔 시간 내무반이 조금 소란스러웠습니다.
일직사관이 조용히 점호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낮에 일직사관과 장기를 두기도 했고,
평소에 친하게 지냈기에 웃으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일직사관도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우연히 손을 휘둘렀는데 그만 저의 뺨에 맞았고,
그때 저는 이가 깨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의도 된 바도 아니고, 저도 조용히 마무리하였습니다.
그리고 깨진 이에 크라운을 씌었습니다. 어느덧 37년이 지난 먼 옛날의 기억입니다.
댈러스에 오기 전부터 이에 불편이 있었는데
별일 아닌 줄 알고 스케일링만 받고 댈러스로 왔습니다.
진통제를 먹어야 할 정도로 불편해서 치과엘 갔습니다.
검사결과 크라운을 씌운 이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고 합니다.
신경치료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발치를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맨 안쪽에 있는 어금니이기에 굳이 임플란트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동의하였고, 20분 정도 걸려서 발치를 끝냈습니다.
‘앓던 이 빠지는 기분’이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발치하고 나니 통증도 없었습니다.
친절하신 의사 선생님은 제게 발치 후에 지켜야 할 사항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먼저 거즈를 발치된 부분을 넣어주고 이를 꼭 닫아 압력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압력이 있으면 쉽게 지혈이 된다고 합니다.
사람의 몸은 자연 치유력이 있어서 곧 새살이 돋고, 아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탄산음료를 마시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탄산가스가 발치 부분과 만나면 아무는 데 지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발치 후에는 빨대를 사용하지 말고, 침도 자주 뱉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혈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음식도 죽이나 부드러운 것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죽을 먹었습니다.
음주와 흡연을 일주일 정도 금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것들은 다 지킬 수 있었는데 음주는 조금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댈러스에 부임해서 1주일도 안 되었기에 단체들과의 첫인사도 있었고,
자연스럽게 식사 자리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가볍게 한두 잔 마시면서 첫인사의 자리도 마칠 수 있었고,
댈러스에서의 발치는 그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모두 소중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心身不二’입니다.
현대인들은 마음이 없는 몸처럼 사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갈등과 분쟁은 그릇된 욕망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몸은 하나의 개체를 이루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모두 하나로 연결될 수 있음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몸을 위해서 다른 이들의 몸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은 어쩌면 인류라는 같은 영혼의 아픔과 고통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이 생명을 살리고, 이 사랑이 희망을 주고, 이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잊지 않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자비와 용서, 친절과 온화함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바람이십니다.
막힌 것은 뚫어 주시고, 얼어붙은 것은 녹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온몸을 바쳐서 우리들 구원을 위한 ‘숨구멍’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생각해 봅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속한 공동체를 얼리는 존재인가!
아니면 질식해서 숨이 멎을 것 같은 공동체에 사랑과 기쁨을 주는 ‘숨구멍’과 같은 존재인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주님을 첫 자리에 모셔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의 관심사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충실히 머물렀고 그래서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선언하시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8-4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따라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의 계획과 집착, 이기심과 낡은 생활 방식을 고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여야 하겠습니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이 편안하듯 우리가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매일이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하나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주님과 하나 되기를 희망합니다.
공자께서도
“일흔이 되었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을 쫓아 그대로 하되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당신의 뜻이 하늘의 뜻과 온전히 일치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물론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마음껏 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일입니까?
인간적인 욕심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우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원하는 바를
마음껏 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혹,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 있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걸었다해도
우리 마음을 둘 곳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역경에 처해 있을 때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하고
한 번 기도드리는 것이 좋은 일을 당했을 때 수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더 값집니다.”
성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생각에 우리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기도에 우리의 기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행위에 우리의 행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의 생명을 일치시킵시다.”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나길 기도드립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가시나무 새 - 시인과 촌장- 하덕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이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에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은 쉴 곳 없네.
@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으면,
이미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께 손을 내밀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을 통한 구원과 영생은
매일 우리 눈앞에 선물처럼 펼쳐지고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무상으로 베푸신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너무나 큰 것이어서, 믿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바로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놀랍게도 그 선물은 이 세상 그 누구도 제외되지 않는 공평한 선물입니다.
마치 눈이 그 어디든 골고루 내리듯, 아침 서광이 세상 방방곡곡을 고루 비추듯,
그렇게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선물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선물을 주고자 하는 쪽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끝까지 거부하고 도망가는 사람에게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침이 되어 밝은 태양 빛이 비칠 때, 온몸으로 만끽하지 않고,
두꺼운 커튼으로 창을 막아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동족 유다인들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유다인들이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로 고위층 인사들, 나름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
율법의 대가들로 자칭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이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려도 부족할 터인데,
그들은 예수님을 범법자로 몰고 갔습니다.
안식일 규정을 위반한 죄, 신성 모독죄를 들이대며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반면에 너무도 쉽게 선물을 받아안고 기뻐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가난하고 고통받던 백성이었습니다.
천대받고 무시당하기를 밥 먹듯이 하던 세리와 창녀, 죄인들이었습니다.
비록 많이 배우지는 못했지만, 단순하고 소박했던 그들은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분께서 선포하시는 말씀 앞에 의심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꺼이 수용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살아생전 하느님을 뵙는 지복직관의 은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오늘도 예수님을 통한 구원과 영생이 매일 우리 눈앞에 선물처럼 펼쳐지는데,
우리 스스로 눈을 막고 돌아서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수시로 주님 축복이 우리 머리 위로 폭포수처럼 내려오고 있는데,
그것을 피하려고 어둡고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안식일도 예수님의 사랑을 막을 수 없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의 첫머리에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5,17)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선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 어제 복음에서
안식일에 38년 동안 앓던 병자를 치유하여 요를 걷어들고 걸어가게 하심으로써
안식일 금지 규정을 어기신 것에 대한 예수님의 해명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버지는 유다인들이 유일신으로 섬기는 하느님 야훼이며,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아버지이시다.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내리신 아버지께서 안식일에도 일하시므로
아들인 예수께서도 일하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들도 자동적으로 안식일을 율법 위에 서게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근거를 아버지와 철저한 일치성에 두고 있다.
즉 예수님은 자신을 아들로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밝히고,
일치성으로 하느님과 같다는 주장을 하시는 것이다.
이에 대한 변호와 자세한 설명이 가르침으로 이어진다.(5,19-47)
우리는 요한복음이 공관복음과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안다.
공관복음서가 예수의 사건들을 연대기적으로 보도하는 방식을 통하여
지상 예수에서 메시아 그리스도로 향하는 신학(상향 그리스도론)을 전개하고 있는반면,
요한복음은 전승된 사료들을 심층적으로 분석, 명상, 해석하여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로 향하는 신학(하향 그리스도론)을 전개하고 있다.
물론 상향 그리스도론이나 하향 그리스도론이나
출발점만 다른 것이고, 실상은 같은 것이다.
나아가 요한복음은 예수가 肉化된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이 말씀은 이미 세상 창조 이전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先在 그리스도론을 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요한복음서는 그리스도교 신학에 있어서 둘도 없는 중요한 자료이다.
여기서 신학은 그리스도론, 삼위일체론(구원 경륜적 삼위일체론과 내재적 삼위일체론),
성령론, 교회론, 성사론 등 다양한 분야의 신비를 조명하게 된다.
물론 더 중요한 자료는 두말할 필요 없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세상은 예수께서 보여 주신 그만큼 하느님에 대하여 알고 있으며,
복음사가는 그만큼을 성령의 감도에 의하여 기록한 것이다.
예수님 스스로가 하느님과 같다는 발언은 유대인들에게 천지개벽할 일이었고,
이는 곧 신성모독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예수를 신앙하는 우리들에게는 참으로 중요한 언명이지만,
‘하느님은 오직 야훼 한 분 뿐이다.’는
철저한 유일신관을 가진 유다인들에게는 용납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외적 원인이 율법을 어긴 범법자로서가 아니라,
신성모독이라는 瀆聖罪였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우리는 이 자리에서 알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하느님 아버지의 위탁에 의한 것이었다.
아들은 하느님 아버지 스스로의 말씀이며 啓示이다.
이 말씀은 병자를 낫게 하고, 죽음을 살려 생명을 주는 말씀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이렇게 하느님께서 ‘일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은 ‘禁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하느님 말씀의 이 두 작용은 서로 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 말씀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順命, 아니면 抗命뿐이다.
하지만, ‘行하라는 말씀’이 항상 먼저이고,
그다음이 ‘禁하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말씀과 계명을 통하여, 비록 그것이 내용상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 한가지이다.
그것은 온전한 우리 자신이다.
이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에게 원하신 것과 같은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
극한의 절망 속에서 부르짖는 이스라엘에게 하느님께서 선언하십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어머니와 자녀는 같은 살과 피를 나눈 관계이므로
결코 서로 잊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보다 더 강한 유대가
바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임을 선언합니다.
특별히 복음에서는 이러한 유대가 아버지와 아들의 ‘동질성’으로 드러납니다.
아들이 이 세상에 온 이유는 아버지의 일을 하기 위해서이고,
따라서 아들의 일은 곧 아버지의 일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오늘 본문 내용 바로 전에 벳자타 못에서 일어난 치유 사건으로
유다인들이 분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하시면서
당신 자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하느님을 그렇게 친밀한 사이로 규정한 적이 없는데
감히 하느님과 자신을 ‘부자’ 사이로 이야기하고
심지어 ‘동질성’까지 선언하니 불쾌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것처럼 오늘 독서에는
‘어미와 젖먹이’의 관계보다 더 긴밀한 관계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가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맺는 관계 가운데 가장 치열하고도
에너지가 집중적으로 요구되는 관계가 부모와 자녀 관계입니다.
최고의 사랑과 희생, 기대와 희망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보다 더한 사랑을 우리에게 가지고 계시고,
그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완성됩니다.
무엇보다도 큰 사랑이기에 가장 큰 고통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