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역사 울산은 삼한시대 진한(辰韓)에 속했다. 지금의 웅촌면 일대에 성읍국가인 우시산국(于尸山國)이 있었는데 신라 제 4대 탈해왕때 벼슬이 간(干)이었던 거도(居道)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범서면 일대에는 굴아화촌(屈阿火村)이 형성되었다. 신라 제5대 파사왕때는 굴아화촌에 현이 설치되었으며, 울산지방에서도 삼한사회나 그 이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적지않은 읍락들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전국을 9주로 재편하게 되는데 울산은 양주에 속했다. 특히 경덕왕때 전국의 지명을 중국식으로 바꾸면서 굴아화현은 하곡현으로 불리게 된다. 고려초기에, 울산의 강력한 호족세력인 박윤웅은 그가 통치하고 있던 개지변(皆知邊:행정중심지, 반구동, 학성동일대)을 고려 태조왕건에게 바치게 되고 울산지역은 흥려부로 승격된다. 고려 성종14년(995년), 고을마다 별호를 붙이게 하였는데 이때 울산의 별호로 학성(鶴城)이란 이름이 지어졌다. 흥려부는 공화현(恭化縣)으로 격하되었다가 고려 현종9년(1018년),울주로 개칭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13년(1413년),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울주군은 울산군으로 개칭되고 비로소 울산이라는 명칭이 등장하게 되었다. 선조31년(1598년), 임진왜란때 울산사람들의 눈부신 의병활약이 높이 평가되어 울산도호부로 승격되었으나 고종32년(1895년), 다시 울산군으로 개칭되었다. 일제시대인 1914년 지방제도 개편때 언양군이 울산군으로 병합되면서 태화강 이남의 삼산,달동,신정,옥동지역은 울산면으로, 1931년 울산면이 울산읍으로, 1934년 동면이 방어진읍으로 승격되었다. 광복이후 1962년 2월 울산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되었으며 같은해 6월 1일 울산시로 승격되었다. 1995년 1월 통합 울산시가 발족되었고, 1997년 7월 15일, 경상남도의 그늘에서 벗어나 4구(중,남,동,북구), 1군(울주군)체제의 울산광역시로 승격되었다. <김영숙님 정리 -향토사보, 경상일보에서 발췌->
신라의 울산 지역 통합
삼국 시대 이전 우리나라 남부에는 마한, 변한, 진한이 있었습니다. 이를 삼한이라 합니다. 삼한 사회는 철제 농기구를 사용해서 농경이 발달했고, 벼농사도 지었습니다. 당시 울산은 진한에 속했습니다. 삼한에는 여러 작은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을 소국이라 합니다. 울산에도 이런 작은 나라들이 있었습니다. 울산의 웅촌 방면에는 우시산국이 있었습니다. ‘울산’이라는 이름도 이 우시산국에서 생겨났습니다. 웅촌 대대리에서 발굴된 중국제 청동솥은 강력한 권력자가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지금의 범서읍에는 굴아화촌이 있었습니다. 범서읍에 굴화리라는 마을이 있는 것으로 보아 굴아화촌은 범서읍과 태화강 건너편 다운동과 태화동에 걸쳐 있었던 나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강동 일대에는 율포현이 있었고, 서생면 일대에는 생서량군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언양읍과 상북면, 삼남면, 삼동면 일대에는 거지화촌이 있었습니다. 언양읍 송대리에 고인돌이 있는데, 그 크기로 보아 근처에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지화촌은 언양 일대에 있었던 소국이었던 것입니다. 이들 작은 나라들은 신라에 편입되어 갔습니다. 우시산국은 우풍현, 굴아화촌은 하곡현, 율포현은 동진현, 생서량군은 동안군, 거지화현은 헌양현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이 중 우풍현, 하곡현, 동진현은 후일 박윤웅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귀부하여 흥려부로 통합되었습니다. 헌양현은 이름이 바뀌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언양’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생겨났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7235F164BC263A26F)
왜구의 침입과 읍성 축조
우리나라 동남 해안에는 신라 이래 방어 시설이 거의 없어 왜구가 자주 침입했습니다. 왜구는 고을을 불 지르고 식량과 재산을 노략질했습니다. 고려 말기에 국력이 쇠약해지면서 왜구의 침입이 잦았는데, 울산 지역에도 여러 번 침입했습니다. 울산에서는 왜구의 침입이 계속되자 가난한 사람들은 집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고, 부유한 사람들은 재산을 지키려다가 죽거나 포로로 잡혀가기도 했습니다. 이를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모두 떠나버려 텅 빈 고을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왜구를 막을 읍성을 쌓아야 했습니다. 읍성은 관청과 민가를 둘러싸고 보호하는 성입니다. 울산에서는 우왕 때 돌로써 읍성을 쌓았습니다. 돌로 쌓은 성을 석성이라 합니다. 이 성은 박윤웅이 있었던 신학성과는 다른 곳에 더 넓게 쌓은 것입니다. 읍성을 크게 쌓은 것은 고려 말기에 울산의 관청과 인구가 늘어났음을 말해 줍니다. 울산의 읍성은 조선 초기에 더 크게 쌓았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울산의 도산에 주둔한 왜군이 이를 헐어 그 돌을 옮겨가 왜성을 쌓았습니다. 이 왜성이 학성공원에 있는 울산왜성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울산읍성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언양에도 고려 말기에 왜구가 자주 침입했습니다. 어떤 때는 왜구가 고을을 휩쓸어 남은 것이 하나도 없다 할 만큼 큰 피해를 입기도 했습니다. 이에 따라 언양에서도 왜구를 방어하기 위해 읍성을 쌓았습니다. 언양에서는 울산과 달리 흙으로 읍성을 쌓았습니다. 이를 토성이라 합니다. 언양읍성은 조선 초기에 더 넓혀 쌓았다가, 이후 다시 돌로 고쳐 쌓았습니다. 이 언양읍성은 오늘날에도 남아있습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920D1154BCF952C67)
언양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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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가 사는 마을의 명칭이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아는 것.... 우리문화 사랑의 기본자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