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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일초교4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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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언 짧은글 스크랩 문학동네 사람들
배나무꽃(희) 추천 0 조회 112 15.01.20 18:33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21 酒神 이현우

게재일 : 2003년 02월 04일 [24면] 기고자 : 시인 한국시인협회장 이근배


불행과 고독을 더불고 나의 생애는

참 아름답게 죽어가야 한다

-이현우



시인이 죽어서 사는 나라는 사시사철 꽃이 피고 새가 우는가. 오는 자취, 머무는 자취는 있어도 가는 자취는 남기지 않은 시인 이현우(李賢雨)가 있다. 당나라에 건너가 과거에 급제하고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으로 이름을 떨친 최치원은 신라가 기울어질 무렵 가야산 홍류동에 묻혀 살다 어느날 신발과 갓을 벗어놓고 홀연히 사라졌다. 생년은 있는데 몰년은 모르는 최치원을 두고 신선이 된 것이라 했다. 1천2백년 후에 시인 이현우가 이 티끌 세상의 저잣거리를 떠돌다 자취를 남기지 않고 어디론가 영원히 떠난 것이다.

나이 든 문학동네 사람들이야 이현우를 모르는 이가 없지만 동구 밖 사람들은 낯선 이름일 것이다. 서로 짝이 맞는 구슬을 쌍벽(雙壁)이라 하듯 이현우는 소문이 날대로 난 천상병과 더불어 술과 기행으로 용호상박의 맞수였다.

이현우는 부산의 재산가이며 무정부주의자이기도 했던 이종화의 아들로 1933년 태어난다. 네살 때 소설가 김말봉을 계모로 맞으니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이름을 날리던 소설가를 어머니로 남다른 독서와 감수성을 키우며 자라났다. 동국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55년 부친이 작고하자 학업을 중퇴하고 시 쓰기로 나서 58년 `자유문학`에 추천된다. 시인으로 명동에 나타났을 때 김관식은 "한국의 기욤 아폴리네르"라며 이현우를 높이 치켜세웠다.

파리에는 센강이 있고 서울에는 한강이 있다. 아폴리네르는 "미라보 다리 아래 센강이 흐르고 우리들의 사랑도 흐른다"고 노래했지만 이현우는 데뷔작 `끊어진 한강교에서`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는 나의 고뇌를 싣고/영원한 불멸의 그늘 그 피안으로/조용히 흘러가는 강"으로 전쟁이 남긴 상처를 한강에 띄운 것이다.

남들은 낡은 군복을 검게 물들인 옷을 입을 때 빨간 나비 넥타이를 매고 명동을 활보하던, 인기 신문연재작가 김말봉의 의붓아들이던 이현우는 61년 그 의붓어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풍찬노숙(風餐露宿)의 비틀거림으로 떠돌기 시작한다. 특히 김관식·천상병·하인두등과 날마다 붙어다니며 술과 시와 인생을 마구 휘젓던 그는 막강의 우군들을 잃고, 버리고 남대문 거지소굴에 들어가 뒹군다고도 했으며, 자해공갈단과 어울렸다고도 했다.

70년대 전반까지 그는 내가 근무하는 출판사로 작가 이규헌을 만나러 이른 아침부터 눈이 벌겋게 술에 익은 거지행색으로 찾아왔었다. 그는 80년 여름 부산에서 하인두·심우성에게 얼굴을 보인 후 여지껏 그의 안부를 아는 이가 없다.

95년 1월 26일, 인사동 카페 `귀천`에서 이현우 시문집 『끊어진 한강교에서』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아직도 친구들의 현우이야기 21편`의 부제가 붙은 이 책에는 그가 남긴 21편의 시와 소설 1편, 그리고 신봉승·전용태·신경림·강민 등 21인의 친구들이 부르는 초혼(招魂)의 글이 실려 있다.

"이현우는 1950년대의 신이야!" 황폐한 몰골로 출판사 문앞에 서있던 그를 두고 외치던 이규헌의 말이 가슴을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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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國手 박재삼


아. 사랑이여, 귀중한 울음을 바치고

이제는 바꿀 수 없는 노래를 찾는가 -박재삼



나라에서 으뜸의 기술을 가진 사람을 국수(國手)라고 한다. 문학동네에서는 이 명예로운 이름을 얻은 이가 오직 한 사람 있으니 시인 박재삼(朴在森)이다. 바둑을 잘 두어 오랫동안 국수 자리를 지켰던 조남철이 박재삼을 박국수로 불렀다. 당시만 해도 바둑이 3급 정도면 아마추어로서는 강자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박재삼이 1960년대 후반부터 서울신문이 주최한 `패왕전`의 관전평을 쓰면서 바둑동네의 큰 식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박국수라는 호칭만 듣고 모르는 이들은 문단바둑의 최고수인 줄 아나 바둑 서열로는 한참 아래였던 것이고 시의 서열로는 국수로 불릴 만하다는 것이 내 속마음이었다.

박재삼은 1933년 일본 도쿄(東京)에서 태어나 네 살 때 어머니의 고향인 삼천포로 돌아온다.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은 삼천포 중학에 입학하면서 국어선생 김상옥을 만나면서다. 김상옥은 가람·노산·조운 이후에 이 나라 시조의 새 물결을 일으킨 시인이다. 큰 스승을 만나 시조의 가락을 어려서 익힌 박재삼은 중학생 때 제1회 영남예술제(뒤에 개천예술제로 바뀜)에서 시조 `촉석루`가 차상으로 뽑혔고 53년에 `문예` 11월호에 시조 `강물에서`가 모윤숙에 의해 추천된다.

서울에 올라와 54년에 `현대문학`창간 사원으로 입사한다. 그는 시조에서 익힌 운율을 자유시로 철철 넘치게 튕기면서 미당이 해냈던 것, 그 다음의 시의 넝쿨을 치켜들고 있었다. "제삿날 큰 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겠네" 많은 사람들이 애송하는 시 `울음이 타는 가을강`도 뉘라 그 솜씨를 따를까마는 나는 아무래도 박재삼의 시조에 더 홀려있고 그 가운데서도 `내 사랑은`앞에서는 오금을 못펴고 있다.

"몸으로 사내 장부가 몸으로 우는 밤은/부연 들기름불이 지지지 지지지 앓고/달빛도 사립을 빠진 시름갈래 만갈래" 자유시로는 차마 다다르기 어려운 높은 음절이 여기서 터져나온다. 나는 당돌하게도 박재삼 앞에서 몇 번인가 "당신의 자유시집 열 권과 이 시조 `내 사랑은`을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

바둑에 마악 눈이 떠서 겁없이 문단고수들에 대들던 67년 나는 그가 일하는 대한일보사 숙직실에서 밤을 꼬박 새우며 바둑을 두기도 했다. 신춘문예심사도 둘이서 열번을 넘게 했었고, 시골 아저씨 생김의 마음씨 좋은 박국수는 시만 국수가 아니라 술과 노래도 국수급이어서 한 번은 청와대에서 박목월의 심판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짝사랑`노래 대결을 벌인 일도 있었다. 술탓이었을까. 마흔도 안되어 고혈압으로 쓰러졌다 일어나서 끄떡없이 시를 쓰고 큰 상도 많이 타더니 끝내 자리에 누워 97년 6월 혼자만의 아름다운 가락 못 다 푼 채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너갔다. 영결식에서 나는 그의 시에 어림도 없는 조시를 읽었다.

"당신이 들에 나가면 꽃들이 먼저 웃고/당신이 산에 오르면 새들이 먼저 노래하고/당신이 바다에 이르면 고기떼가 물장구를 치며 반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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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정공채의 `미8군의 차`


나와 백년의 열차를 타야할 그 여자는

그 사람이 운전하는 미8군의 차를 탔다 -정공채



짙은 화약 냄새와 피 냄새를 풍기며 전쟁이 지나간 1950년대의 이 땅에는 미8군의 차들이 `달콤한` 휘발유 냄새를 뿜으며 달리고 있었다. "헬로 기브 미 초콜릿!" 전쟁 고아들이 고사리손을 뻗칠 때 미군 병사들은 휘파람으로 화답해 주었다. 시인의 눈은 우주 밖까지 내다 볼 수 있는 망원 렌즈를 달고 있어서 그들이 사는 시대의 풍경들을 놓치지 않고 잡아낸다.

어린 날에 뜨던 물수제비나 고무줄 새총이 아니라 공산주의를 막아주려고 진주한 주둔군의 트럭을 보면서 자란 정공채는 오랫동안 화두처럼 익혀온 시 `미8군의 차`를 1963년 머리맡에서 사흘동안 신들린 듯 써내려 간다. 하나의 오브제를 놓고 1천5백행이나 써낼 수 있는 시인은 그리 많지 않다. 이 시는 그해 `현대문학`12월호에 전재 됐고 국내 시단의 스포트라이트는 물론 일본 문학계가 떠들썩하게 받아주었다.`신일본문학``신작가``현실과 문학`등에서 이 시를 일어로 번역.전재 또는 초역을 해 실었고,베스트셀러의 저널리스트 오다 마코도는 『제3세계의 문학』을 편집하면서 한국문학으로는 오직 이 작품만을 다뤘다.

이렇게 일본 문단에서 문제작으로 읽히는 것에 발단이 됐는지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몇 차례 찾아와 신원조서를 꾸미더니 64년 3월 드디어 "반공법 피의자로 유의지사가 유하오니 당소에 내사할사"의 통지서를 보낸다. `미8군의 차`는 이데올로기나 반미에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전쟁이 남긴 사회현상을 서정적으로 녹여낸,다만 힘 있는 시였다. 시에 대한 감별능력이 없는 중앙정보부는 이 시가 일본에서 주목받고 있는 점과 시의 제목이 시사하는 반미적 정서를 반공법의 저촉으로 보았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중앙정보부는 시인의 시를 문제삼아 반공법으로 옭아매는 필화사건을 꺼렸음인지 조지훈·김현승·김용호·조연현 등에게 시의 분석과 반미적 성향을 감정케 했다. 의뢰받은 시인과 평론가는 "역사의식에 바탕을 둔 민족주의 시" "자유민족정신을 살린 서사적 서정시"라고 평을 했고 이 문단 중진들의 보증서(?)를 받고 정공채는 풀려난다.

"바퀴는 나의 맨발이 못 따르는/휘발유를 타고/바퀴는 굴러갔다" "버드나무에 말을 맨 주둔/자본이/땅 위에서 황혼 때의 꽃밭같이 꽃으로 피었다" .시 `미8군의 차`는 연인과의 대화처럼 잔잔하게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를 이야기로 들려 준 것이었다.

정공채는 34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진주 농림중·고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재학 중인 57년 `현대문학`11월호에 시 `종이 운다`와 다음해 4월호에 `하늘과 아들`로 박두진의 추천을 받는다. `석탄``대리석`등 이땅의 식물성 체질의 시를 광물성으로 바꾼 정공채 형은 칠순 나이인데도 `미8군의 차`만 꺼내면 지금도 얼굴에 핏줄이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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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최인훈의 『광장』

광장에서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 최인훈



새벽이 오고 있었다. 피를 먹고 자란다는 자유의 나무가 4·19 혁명으로 잎을 피우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농촌에서 사람들은 낯빛을 새로 고치고 나섰고 문학동네에도 새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인 1926 잡지 `동광`을 펴냈던 주요한은 환도가 되자 54년 그 속간으로 `새벽`을 발행하기 시작했고, 4·19 혁명이 일어난 다음 김재순에 의해 `새벽`은 본격 종합잡지로 편집체제를 바꿔 젊은 지성들에게 바짝 다가선다.

혁명의 새 옷을 갈아입는 잡지를 만들겠다고 쿵쾅거리던 신동문은 장면 정부가 들어선 60년 9월 최인훈을 만나 그가 쓴 2백자 원고지 6백장 분량의 `광장`원고를 받아든다. "운명이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 합시다"로 시작되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신동문의 가슴은 사뭇 요동쳤고 단숨에 읽기를 끝낸 그는 자기의 심장이 뛰는 소리를 귀로 들어야 했다. "이제야 한국소설의 새벽을 만나는구나."

원고지 60,70장 안팎의 단편소설로 승부를 걸던 그 무렵에 `광장`은 길이로도 놀라운 것이었지만 어느 작가도 손대지 못한 분단상황의 핵심을 파고드는 주제의식은 섬뜩하기조차 했던 것이다. 여느 편집장이었으면 몇 날쯤은 망설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동문은 시퍼런 편집자의 안목 위에 소신을 밀고나가는 담력이 있었다.

편집이 끝난 `새벽` 11월호에 싣기 위해 원고보따리를 들고 인쇄소로 달려가 밤을 새워 조판을 지켜보고는 날이 밝아서야 OK를 놓고 집에 돌아와 잠에 들었다. 소설`광장`은 신동문의 예측대로 단번에 문단에 파문을 일으켰다. 서울신문 11월 7일자에 백철은 남북통일론에 대한 커다란 암시와 실험의 사실을 짚어내면서 "침체된 문학계에 하나의 돌을 던진 작품"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시대적 명제의 소설에 목말라하던 젊은 지성들은 오랜 가뭄 끝의 집중호우를 맞은 듯 흠뻑 젖고 있었다.

최인훈은 36년 함북 회령에서 태어나 원산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 6·25를 만나 그해 12월 원산항에서 LST해군함정을 타고 남하한다. 서울대 법대 졸업 한 학기를 앞두고 군에 입대,통역장교로 있던 59년 `자유문학`에 `그레이구락부 전말기`등으로 데뷔, 1년 만에 `광장`을 터뜨린 것이다.

먹구름이 잠깐 걷혔던 4·19와 5·16의 사이에 기습적(?)으로 `광장`은 햇빛을 본 것이다. 몇 달만 출산이 늦었더라도 시퍼런 군사정권의 칼날을 막지 못했을 것이었다. 5·16으로 `광장`에 대한 논의가 중단되었지만 그 생명력은 시대의 파고를 넘어 더 사납게 타고 오르며 오늘까지 1백36쇄를 찍어 우리 문학작품으로서는 신기록의 행진을 하고 있다.

그동안 작가는 이 작품을 고쳐쓰기 여섯 차례. 주인공 이명준이 남과 북 어느 쪽도 아닌 제3국 인도를 선택했다가 죽음에 이른 민족사의 화두는 오늘도 바람 부는 광장에서 절규가 되어 맴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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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기다리는 마음-김민부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김민부



노래는 죽지 않고 살아서 우리가 사는 마을 뒷동산에 해도 띄우고 달도 띄우지만 노래를 바친 시인은 해만큼, 달만큼 살지 못한다. 사람들은 제 슬픔, 제 기다림, 제 사랑을 한껏 목청에 실어 가곡 `기다리는 마음`을 부르지만 정작 그 시를 지은 이의 이름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 시를 쓴 김민부는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한 수 위의 천재였다.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시집 『항아리』를 들고 나온 소년시인이었고 고등학교 3학년, 만 열여섯 나이로 195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균열`이 당선되었다.

그는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바로 서라벌대학 문예창작과에 들어와 맞부딪혔으니 그가 별 네개 쯤의 장성이라면 나는 일등병쯤 되는 계급의 차이가 있었다.

신춘문예당선도 부럽기 그지없지만 그 보다도 나는 그의 `균열`에 기가 죽어 있었다. "달이 오르면 배가 고파/배 고픈 바위는 말이 없어/할일 없이 꽃 같은 거/처녀 같은 거나/남몰래 제 어깨에다 새기고들 있었다." 이렇게 첫 수를 여는 이 시조는 서정시를 잘 쓴다는 어느 기성시인의 솜씨도 넘어서는 것이어서 글재주로만 돌릴 수 없는 신운(神韻)같은 것이 팔딱거리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김민부는 깊숙한 눈과 이국적 마스크를 내세워 자신은 순국산품이 아닌 혼혈아라고 우리를 을러대기도 했다. 혼혈아가 천재라는 미신을 이용한 것이지만 한 반 친구들은 어느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일찍 피는 꽃은 일찍 시드는 것인가. 눈에 이상한 빛을 띠면서 "그것은 숱한 달빛이 착종하는 꽃밭이었다"고 시 `나부(裸婦)와 새`를 컴컴하게 읊어대고 쉬는 시간이면 잔디밭에서 미당의 시`입맞춤`을 "오락꼬 오락꼬 오락꼬만 그러면"하고 부산 사투리로 잘도 외던 그는 시 쓰기를 접고 MBC에서 방송작가로 열중한다.

한동안 서로 왕래가 끊겼던 68년 날씨가 추워질 무렵 뜻밖에도 김민부에게서 전화가 왔다. 차 한 잔을 하자고 북창동까지 찾아와서 마치 수줍은 소년처럼 풀잎 빛깔의 표지에 김상옥의 제자를 은박으로 찍은 시집 『나부(裸婦)와 새』를 슬며시 내민다. "친구들끼리 저녁이라도 먹자"고 해 저녁 먹고 헤어질 때 그가 MBC정동 방송국 쪽을 향하여 뒷짐을 지고 휘적휘적 가던 모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그가 시인의 길로 돌아온 것을 환영하는 어떤 짓도 우리는 못해주고 그는 72년 가을 방문을 잠그고 스스로 석유난로를 엎어 시를 위한 소신공양(燒身供養)을 했다. "나는 앞으로 더 많이 외롭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위대한 미아가 되리라"는 그의 시집 후기가 그의 시에 자주 나오는 `죽음`과 더불어 어떤 예감을 갖게 한다.

천재시인은 신의 영역을 침범해서 일찍 데려간다던가. 그의 `기다리는 마음`은 제주도 성산일출봉에 돌비로 서서 이 아침에도 뜨는 해를 기다리리라.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은 임인가, 시인가, 시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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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노산의 충무공사랑


한산섬 그림 한 폭 벽머리에 걸어두고

밤중만 듣노라며 파도소리 피리소리 -이은상



누가 우리네 산과 물을 다 울리는가. 누가 역사의 혼불을 지피는 노래를 부르는가. 나는 먼저 노산(鷺山) 이은상을 떠올리게 된다. 신문학의 지평이 열리면서 춘원·금동(김동인)등은 소설로 가고 소월·지용이 자유시를 쓸 때 노산은 가람·조운(曺雲)과 더불어 겨레의 가락인 시조의 계승에 그 타고난 시재를 쏟아부었다. 고전과 현대를 넘나들며 시조 부흥을 주창하는 평론과 시조 작법, 그리고 국토기행문을 철철 넘치게 쓰더니 어느새 충무공 이순신의 생애와 사상에 깊이 빠진다. 1951년 `이 충무공의 애국심,특히 공의 시가를 논함`을 발표하더니 60년에 와서는 충무공의 시와 후일 시에 대한 조선 명신들의 화답을 비롯해 `난중일기`, 그리고 관계 자료를 총망라한 『이충무공전서』를 완역 출판한다.

국난 극복의 성웅 충무공을 겨레의 가슴에 더 깊이 심고 싶어했던 노산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을 만나면서 그 뜻을 펴게 된다. 이병도·이선근·박종화와 함께 새 지도자 박정희의 학술·문화 쪽의 자문을 했던 노산은 박정희 정치이념의 상징인물로 충무공 이순신을 강력히 천거한다.

세계해전사에 가장 위대한 영웅이었고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충무공의 국난 극복 정신은 군인 출신 박정희의 이미지를 높이는 데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었다. 박정희 의장은 충무공을 받드는 일에 곧 착수하여 아산 현충사를 성역화하는 데 국고를 아낌없이 쓰도록 했고 해마다 4월 28일 충무공 탄신일에는 빠짐없이 이곳을 참배했다. 그때마다 노산은 헬리콥터에 동승, 해박한 지식과 능변에 박정희의 구릿빛 얼굴도 녹아들고 있었다.

지금 세종로 네거리에는 충무공 이순신의 동상이 청와대가 있는 북악을 등지고 위엄을 떨치며 서있다. 지나가는 이들이 왜 세종로에 세종대왕 동상이 서지 않고 충무공 동상이 있느냐고 더러 묻기도 할 것이다. 그 속내에는 노산이 있었고 68년 문공부는 조각가 김세중 교수에게 의뢰해서 국토의 한복판에 역사적 상징물을 세운 것이다.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역사는 모르고 시는 몰라도 이 충무공의 한산섬 시조는 어릴 적부터 배우고 외워왔던 것. 노산은 조선조의 명신들이 그랬듯이 70년 이 `한산섬` 에 대한 화답시집을 엮는다. 정일권·이효상 등 정치인, 박종화·김동리·박목월 등 문인, 그리고 이희승·이태극·김상옥 등이 쓴 1백96편의 화답시 속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육필 시가 있다. "한산섬 수루에 올라/우리님 얼마 애 타신고/그 충성, 그 마음 받아/겨레 사랑, 나라 살림/맹세코 통일과 번영 이루고야 말리라"는 이 시조는 그가 남긴 오직 한편의 작품으로 나는 알고 있다.

내가 근무하는 방에 오셔서 뒤를 이어달라고 당부까지 하시던 노산 선생. 화답집 편집을 내게 맡겨 나는 두 장이 없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육필 시 원고를 간직하고 있다. 노산은 지금 세상 밖의 어느 섬에서 한산섬 화답을 하고 계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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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반공법`의 칼날


태극의 무늬로 아롱진 이 러닝셔츠를 찢어

한 폭의 찬란한 깃발을 만들 것입니다 -남정현



"붓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이 있다.그러나 붓을 쥔 사람은 칼을 든 자들에게 자주 베이고 꺾인다. 금강산 단풍구경을 가고 휴전선 남쪽의 경기장에서 북한의 깃발이 올라가는 일은 상상도 못하던 때 반공법은 신문·잡지에 나오는 글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며 이 잡듯이 뒤졌다.

드디어 문학동네에도 반공법 저촉 제1호의 칼날이 떨어졌다. 1965년 `현대문학`3월호에 실린 남정현의 `분지(糞地)`가 걸려든 것이다. 이 소설이 발표될 무렵인 3월 4일에는 대전방송국 드라마 `송아지`가 문제돼 작가 김정욱이 구속되고 이어 3월 8일에는 구상의 희곡 `수치`가 공연 몇 시간을 앞두고 상연이 저지되는 등 심상찮은 기류가 있었지만 `분지`에 대해서는 못챙기고 있었다.

그런데 북한의 `통일전선`과 노동당 기관지 `조국통일`에 이 소설이 전재되었으니 중앙정보부의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남정현은 그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찾아온 사내들에게 `충일기업`이란 간판이 걸린 집으로 끌려간다. 다그치는 내용인즉 "이 소설은 북괴의 누군가가 써서 건네준 것일 터이니 그 접선 내용을 밝히라"는 것이었다.

`분지`를 우리 말로 쓰면 `똥땅`이다. 주인공 만수의 어머니는 미군에 성폭행당하고 미쳐서 죽고 누이동생은 미군병사의 현지처가 되어 학대를 받는다. 만수는 미군의 처 비취가 한국에 오자 유인해서 알몸을 보이라고 한다. 소리치며 비취는 달아나고 펜타곤 당국에 포위된 만수는 죽음을 앞두고 독백을 한다. "그 위대한 대륙에 누워 있는 우유빛 피부의 그 윤이 자르르 흐르는 여인의 배꼽 위에 제가 만든 한 폭의 황홀한 깃발을 성심껏 꽂아놓을 결심입니다"라고.

혹독한 조사를 받은 뒤 검찰에 송치된 남정현은 일단 석방되나 1년 뒤인 66년 7월 기소된다. "반미 사상을 부추겨 북괴의 대남적화 전략의 상투적 활동에 동조한"작품이라는 것이 검사의 기소요지였다. 문학동네에서 잠자코 있을 수 없었다. 문인 변호사 한승헌·이항녕 등이 무료변론에 나섰고 이어령 등이 법정에서 변호인측의 증언대에 섰다. "장미의 뿌리가 신사의 파이프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장미의 탓일 수는 없다"고 이어령은 북한의 기관지에 전재된 것이 작가의 책임이 아님을 주장했다.

검찰은 법정 최고형인 7년 징역에 7년 자격정지를 구형했으나 1심언도는 징역 6개월·자격정지 6개월로 낮추고 선고를 유예한다. 변론을 맡은 한승헌이 "민족을 사랑하고 불의를 미워했던 자를 좌절시켰다"고 한 것처럼 61년 `너는 뭐야?`로 제6회 동인문학상을 받으면서 입담과 해학, 풍자와 현실 고발로 소설의 새 바람을 일으켰던 남정현은 그 후 몇 편의 소설을 선뵈이고는 붓을 놓고 있다.

나와는 당진중학 4년 선배인 그는 신문당한 얘기를 들려 주면서 "이형이나 나나 웬수갚는 일은 오래 사는 것 뿐"이라고 했다. 남선배, 오래 사시오마는 오래 산다고 그 맺힌 것 풀 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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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송원의 문인 바둑


옥돌이 번갈아 날다 해가 지니

나무꾼의 도끼자루가 썩는구나

-이인로



시를 잘해서 시에 대한 이야기 책 『파한집(破閑集)』을 썼던 고려의 문장가 이인로(李仁老)가 읊었듯이 바둑은 예부터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신선놀음으로 여겨왔다. 문학동네 사람들이 틈만 나면 찾던 명동 한복판에 송원기원이 들어선 것은 1950년대 후반. 송원(松垣)은 당대 부동의 국수 조남철의 아호로 그가 주인이었으니 아직 한국기원이 제구실을 못할 때 송원기원은 한국바둑의 최고 도장이기도 했다.

명동대로 한 복판, 1층에 송옥양장이 있는 건물 2층 금문다방은 문인들의 사랑방이었고 3층에 자리잡은 송원기원에는 바둑지망생과 낯익은 문화예술계의 애기가들로 늘 붐볐다. 가로 세로 칸을 짠 원고지와 바둑판이 닮아서일까, 문인들 가운데 바둑을 잘 두거나 좋아하는 이들이 이 기원에 와서 도끼자루를 썩히고 있었다.

지금은 아마 4, 5단쯤으로는 명함을 못 내밀지만 15급만 돼도 기원에서 적수를 만나던 때 아마 바둑의 정상급인 1급(5단격)을 두는 문단고수들이 있었다. 신동문·이인석·조남사·최요안·민병산 등인데 조남사는 동아일보 국수전 관전평을 쓰고 있었으니 전문기사들에 버금가는 실력이었다. 이 밖에 단골 문인으로는 조연현·김윤성·정비석·천상병·이영일·이추림·최일수등이 있었고, 연극인 김동훈·이낙훈·김인태·오지명, 영화인 홍성기·김수용, 가수 금호동·김현진 등이 자주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고수를 자칭하는 대학 친구 이이화에게 아홉점을 놓고 바둑에 눈 떠 9급 실력으로 송원기원에 입장했는데 송원의 문하에서 수업한 김수영·고재희 같은 전문기사들의 지도와 특히 싸움바둑에 강한 신동문의 하수접기에 말려들며 하루가 다르게 힘이 붙어나갔다. 내가 5급까지 오른 때인 65년 7월 `현대문학`주최의 제1회 문인바둑대회가 송원기원에서 열렸다. 바둑잡지가 아닌 문학지에서 웬 바둑대회냐고 묻겠지만 까닭인 즉 `현대문학`주간 조연현은 급수는 5,6급 정도지만 문단 제일의 바둑매니어였다. 그는 `나와 바둑`이란 글에서 "단 하루도 바둑을 안두는 날은 거의 없다. 하루 세 군데의 사무실과 학교를 나가면서도 가는 곳마다 바둑판이 준비되어 있어 어느 곳에서나 한 두 판은 두게 된다"고 털어놓고 있다. 요즘 속기바둑이 유행인데 전광석화 같은 손놀림으로 한 판에 십분이면 족하다. 시골서 올라온 문인이 바둑이 끝나기를 기다리다 인사도 못하고 내려가는 일도 예사였다.

3급 이상은 갑조, 4급 이하는 을조로 나뉜 제1회 문인바둑대회에서 갑조 우승은 최요안이 했고 을조 우승은 조연현이 차지했다. 나는 을조 준우승을 해서 난생 처음 커다란 컵을 안아보았다. 문인바둑대회는 계속되지 않았으나 문화예술인 바둑대회 또는 신문사들의 명사바둑 대회 등에 나가서 나는 평생 꺾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조남사·이인석·신동문등 고수들을 평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로기사를 지망하던 김흥규·김성동 같은 후진들에게 밀리는 바 되었다. 송원기원에서 어울리던 신동문·민병산·박재삼·천상병은 어느 산 신선이되어 도끼자루를 썩히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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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대하작가 유주현


천년을 한가지로 흐르면서

세월을 셈하는 것은 오로지 강물뿐이다-유주현



글에도 작은 시내가 있고 큰 강이 있다. 보통 장편소설은 2백자 원고지 1천장 내외인데 그 몇배의 길이를 가진 소설에는 마땅치 않았던지 대하소설이란 이름이 생겨나게 된다. 홍명희의 `임거정`, 박종화의 `임진왜란` 등 신문 연재로 기왕에 긴 소설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묵사(默史) 유주현의 `조선총독부`에서 비로소 실록 대하소설이란 이름이 붙는다.

`조선총독부`는 1964년 `신동아` 창간호인 9월호에 연재를 시작해 3년이 걸렸는데 전 5권으로 출간되자 전집 출판의 붐을 타고 잠들었던 독서시장을 깨워 회오리바람을 일으켰다.

묵사는 잇따라 `대원군``대한제국``황녀`등 근대사를 다루는 대작들을 발표하더니 우리네 역사와 문화의 향기를 서재에 들여놓고 싶었던지 조선백자 등 골동품을 끌어안기 시작한다. 나는 벌이라고는 쥐꼬리만한 월급뿐이던 스물 몇살 적부터 동리댁이나 인사동 초정의 `아자방`을 드나들면서 옛것들에 마음을 뺏기기 시작했었다.

그 까닭으로 묵사댁에도 자주 갔었는데 신문연재·인세 등으로 여유가 있었던 묵사는 나로서는 넘겨다도 못 볼 도자기와 서화 등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책거리 병풍이나 단계벼루도 욕심이 나는 것이지만 살빛이 희디흰 백자 항아리에는 넋을 빼앗길 정도였다.

자랑거리 하나쯤 있어야겠다고 벼르던 내게 기회가 찾아왔다. 붓을 쥘줄도 모르면서 좋은 벼루를 구해 달라고 통문관에 부탁하자 이겸로옹이 천거한 구욕연(硯)은 과연 천하일품이었다. 추사가 그 이름에서 따서 완당(阮堂)이라고 흠모했던 청나라의 석학 완원(阮元)의 명(銘)이 갑에 새겨진 벼루는 석질이나 석안(石眼)에 있어서도 더는 짝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이중섭의 소머리 그림 유화 한점이 30만원 하던 때 일금 1백만원을 친구에게 빌려 샀으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는 벼루 잔치를 한답시고 묵사·구용·난정(어효선) 세 분을 불광동 누옥으로 모셨다. 세 분은 다투어 휘호를 했고, 그날 쳐 주신 묵사의 한 장 휘호를 나는 김주영이 유주현문학상을 받던 날 선물로 주었다.

내 `한국문학`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어려운 부탁도 선뜻 들어주시던 묵사는 붓끝이 달아올라 신문이며 문학지며 걷잡을 수 없이 역작을 쓰더니 97년 중앙일보에 `금환식`을 연재하던 중 자리에 누우셨다. 바깥 출입이 어려우리라던 묵사는 81년 가을 뜻밖에 나를 찾아오셨다. 이것이 첫 외출이라시면서,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보고 싶고 찾고 싶은 이들 많을 터인데 아마 `한국문학`살림이 걱정되셨나 보다 하고.

그것은 마지막 외출이었고 묵사는 62세로 끝내 떠났다. 94년 10월 2일, 여주문화원이 여주군 능서면 번도리 생가 마을에 `유주현 유허비`를 세울 때 글도 글씨도 안되는 내가 짓고 썼으니 묵사 선생 피안에서 내려다보시고 그 어진 웃음 띄우셨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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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한국문인협회


문학을 한다는 그 자체가

하나의 참여이다 -김은국



아무도 밟지 않은 땅, 누구도 가지 않았던 길을 혼자 밟고 혼자서 가는 것이 글을 쓰는 일이다. 농삿일처럼 여럿이 함께 땀을 흘리는 일도 아닌데 들어앉아 글만 쓰면 됐지 단체가 무슨 쓸데 있는 거냐고 문학단체 무용론을 내세우는 문인도 적지 않다. 그러나 사람은 국가사회라는 조직체의 일원이며 제도적·사회적 환경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에 세계 어느 나라에서건 문인들은 모여서 단체를 만들고 친목과 권익을 도모하며 나라 안팎의 교류와 행사를 갖고 있다.

나는 1961년 저무는 12월 30일 명동 근처의 수도여사대(지금 세종호텔)강당을 오르고 있었다. 5·16으로 해체된 기존의 문학단체 대신 새로 창립하는 단체 총회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다.그해 1월 1일이 내가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인 출생신고를 한 셈이니 문단 나이로 돌도 안되어 함부로 끼어드는 철부지였다. 강당에는 김광섭·모윤숙·이헌구·김동리·조연현·곽종원 등 문단의 맹주들을 비롯, 중견에서 신인에 이르는 만만찮은 얼굴들이 무언가 긴장된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6·25 때 부산으로 내려갔던 문인들이 반목하다 환도 후인 1955년 결국 자유문학가협회와 한국문학가협회로 갈라져 있었다. 그러다 5·16군부가 6월 17일자로 내린 포고령 제6호에 의해 모든 사회문화단체가 해산됐던 것을 문공부가 나서서 예술단체들을 통합, 재건하는 일환으로 모이게 된 것이다. 전국문화단체 총연합회(문총)회장을 맡았던 김광섭은 자유문협의 위원장도 겸해 모윤숙·백철·이무영 등과 `자유문학`을 펴내면서 문단의 한 축을 이뤘고, 한국문협은 박종화를 수석대표로 김동리·서정주·황순원·조연현·박두진·박목월 등이 `현대문학`을 발판으로 창작활동을 펴고 있었다.

서로 이해를 달리하던 두 단체를 봉합하는 일이니 회의는 순조롭지 않았다. 첫째 정관을 통과시키는 데 단체의 명칭이 문제였다. 이미 결성된 음악·미술·연극·영화·무용 등 8개 단체는 분야의 이름(예컨대 한국음악협회)만 끼워넣는 것으로 통일되어 있었다. 그에 따르면 마땅히 한국문학협회로 명칭을 정해야 한다. 그런데 자유문협측에서 반대하고 나섰다. 기존의 한국문학가협회에서 `가`자만 뺀 것이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문인`이 들어갔고 지금 예총산하의 단체들에서 오직 한국문인협회만 돌림자가 틀리게 된 것이다.

둘째 새 이사장의 선출이었다. 두 단체의 수장인 김광섭·박종화는 물론이고 양쪽의 중심이 되는 사람은 이사장으로 뽑을 수 없다는 것이다. 어부지리(漁父之利)란 이런 일을 두고 생긴 말인가. 전혀 무색무취의 목사 신분인 68세의 전영택을 이사장으로 뽑는다. 부이사장은 양측에서 김광섭·김동리로 나눠갖고 한 몫은 역시 빛깔도 욕심도 없는 이희승을 지목한다. 그러나 시분과위원장에 서정주, 소설분과 위원장에 황순원 등 결국 한국문협측이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전영택 이사장이 겨우 1년을 채우고 박종화 이사장 체제가 된 뒤 한국문인협회에선 자리다툼의 선거바람이 인다. 나같은 햇병아리도 어미닭의 싸움에 말려들게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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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규수시인 이영도


너는 가고 애모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그 달래임같은 물결소리 내소리

-이영도



글공부가 높고 재주가 빼어난 여자를 규수(閨秀)라고 한다. 규방에서 시와 글씨와 그림을 익혀 이름을 남긴 사임당이 있고 황진이·이옥봉·매창같은 규수시인들이 밤을 낮삼아 짜낸 사랑의 시들은 우리 문학사에 넘실대는 강이 되고 있다.

저 조선조에서 시조의 가락을 잘도 타던 황진이의 맥을 이을 규수시인을 기다리던 시조단에 정운(丁芸) 이영도가 조선여인의 정갈하고 아름다운 자태로 나타났다. 1945년 대구의 시인들이 중심이 되었던 동인지 `죽순`12월호에 시조 `제야`와 `바위`를 들고 나오면서 뜨겁고도 매운 여류시조의 한 폭을 그려낸다. 정운은 경북 청도의 한학하는 가정에서 16년 태어나 아버지가 지방군수로 밖을 나돌 때 할아버지의 훈도로 자란다.

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낙엽`과 40년 `문장`에 시조 `달밤`이 추천되어 등단한 오빠 이호우의 영향을 받아 시조에 눈을 뜬다. 그는 재색을 고루 갖춘 규수로 대구의 솟을대문집 박씨댁으로 출가해 딸 하나를 낳고 홀로 되어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 교사로 부임한다.

한국의 나폴리라던가. 풍수지리가 예술가를 낳게 한 것인지 통영은 시인으로 청마 유치환, 초정 김상옥,대여 김춘수가 있고 극작가 유치진, 작곡가 윤이상, 소설가 박경리가 이 고장 태생이다. 정운이 부임하자 통영의 멋스러운 남정네들은 자못 긴장하기 시작한다. 박재삼 시인은 "정운을 만날 때는 내 몸에서 먼지라도 떨어질까 걱정"이라고 했다. 고운 얼굴에 티없는 옥처럼 깎고 다듬는 옷매무새까지 갖췄으니 길을 가는 이들이 어찌 눈을 뺏기지 않으랴.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정운과 같은 때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된 청마의 첫눈에 정운은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잡기 시작했다."파도야 어쩌란 말이냐/파도야 어쩌란 말이냐/임은 물같이 까딱않는데/파도야 어쩌란 말이냐/날 어쩌란 말이냐" 오늘도 통영 앞바다에서 바위를 때리고 있는 청마의 시 `그리움`은 `물같이 까딱않는`정운에게 바친 사랑의 절규였다.일제하의 방황과 고독으로 지쳐 돌아온, 남보다 피가 뜨거운 서른 여덟살의 청마는 스물아홉의 청상 정운을 만나면서 걷잡을 수 없는 불길이 치솟기 시작한다.

유교적 가풍의 전통적 규범을 깨뜨릴 수 없는 정운이기에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고 청마의 사랑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는다.청마는 하루가 멀다하고 편지를 쓰고 시를 썼다. 학교 교무실에서 하루에도 몇번씩 보는 얼굴이지만 닿지 않는 그리움을 편지로 쓰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은/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이 시 `행복`은 지금 통영우체국 앞 시비로 남아 안타까운 사랑을 배달하고 있다.

날마다 배달되는 편지와 청마의 사랑 시편들에 마침내 빙산처럼 까딱않던 정운의 마음이 녹기 시작한다.가장 아름답고 가장 길었던 두 시인의 사랑은 세상 사람들에게 지금도 시로 배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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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유치환의 서간집


이렇게 고운 보배를 나는 가지고 사는 것이다

마지막 내가 죽는 날은 이 보배를 밝혀 남기리라 -유치환



끝이 보이지 않던 유치환과 이영도의 사랑은 갑자기 몰아닥친 신의 시샘으로 종점을 맞는다. 1967년 2월 13일 오후 9시30분 부산 미성극장 앞길에서 교통사고로 청마는 시 쓰기와 편지 쓰기에 들었던 붓을 영영 놓게 된다.

1908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난 청마는 통영·부산·경주 등 지방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도 46년에는 창립 조선청년문학가 회장으로, 57년에는 초대 한국시인협회장으로 피선되는 등 그의 영향력은 중앙문단도 휘어잡는 위력이 있었다. 유치환의 부음을 듣자 시인 박성룡은 기자로 일하는 `주간한국`에 "사랑하였으므로 행복 하였네라"의 청마와 이영도의 사랑과, 주고 받은 편지를 두 쪽에 걸쳐 가득 실었다. 이름 있는 출판사들은 다투어 이영도에게 청마의 편지를 내자고 달려든다. 그러나 이영도는 `뭍`같이 까딱 않는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유치환을 여읜 슬픔도 슬픔이지만 보배 같은 그의 편지를 세상에 까발릴 만큼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유치환이 간 지 두 달 뒤쯤인 4월 어느날 "근배, 니 부산좀 내려오거래이" 뜻밖에도 부산에서 걸려온 이영도의 전화를 받았다. 새로 생긴 중앙출판공사 편집장에 취직한 나는 책 한 권은 커녕 문패의 먹도 마르기 전인데 큰 시인들을 앞세운 대형 출판사들의 틈바구니에서 어림없는 줄 알면서 "저도 출판을 하고 싶은데요"하고 응석을 부려두었던 터였다.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 지은 이영도의 집은 동래 금정산 기슭 양지바른 터에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규방에는 유치환이 준 사랑의 시를 손수 수 놓은 열 폭 병풍이 둘러 있었다. 사실 나는 그때까지 이영도를 두 세 번 밖에 만난 일이 없었다. 충청도 촌뜨기라 부산 쪽과는 길이 닿지 않았고 이영도도 서울 오는 편이 뜨악했었던 까닭이다.

그렇게 어쩐일인지 62년엔가 이영도의 서울 나들이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를 아주 예뻐해주었다. 또랑또랑한 시인 세 사람에 이형기·박재삼을 쳐들면서 그 밑에 내 이름을 달아주기도 했다. 내가 부산에 내려간 날은 바로 부산의 문인들이 청마추모문학제를 올리는 날이었다. 나는 소복 입은 이영도와 맨 앞줄에 앉아 있었는데 이영도 말고도 소복 입은 젊은 여인이 다섯이나 내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영도는 그 많은 편지 보따리를 선뜻 내게 내주었고 국제신문 문화부장이면서 아동문학가인 최계락과 나는 동래 금호장 호텔에서 그 편지들을 대충 추려 서울로 올라와 `청마 유치환시인이 규수시인 이영도 여사에게 20년간 보낸 사랑의 서한집`을 책으로 묶어냈다.

이 청마의 사랑 편지가 책으로 나오자 그날로 서점들의 주문이 밀어닥쳤고 베스트셀러가 돼, 무명 중앙출판출사는 대번에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이 일로 해서 이영도와 나는 어머니와 아들만큼이나 살가운 사이가 되었고 편집장에서 주간으로 일자리도 튼튼하게 되었다. 그러면 왜? 이영도 그 깔끔한 성격이 편지 보따리를 풀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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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이영도의 사랑지키기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서 있는데

손 한 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는 사리로 맺혀 푸른 돌로 굳어라 -이영도



평소 청마 유치환과 친분이 두터웠던 큰 시인들이 잘 나가는 출판사를 앞세워 정운 이영도를 설득했는데도 한 마디로 잘랐던 정운은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을까? 모르는 사람들은 서한집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가 나오자 잘못한 일로 생각하기 십상이었다.

정운은 시조시인으로 문단의 중심에 높게 자리 잡았거니와 사리분별이나 현실감각에 있어서도 잘났다는 사내 열 몫쯤은 하는 재덕(才德)이 있었다. 정운이 서한집 출판 제의를 모두 자르고 부산으로 내려간 뒤 우려했던 일들이 터져나왔다. 여성지들이 다투어 청마의 사랑을 취재하면서 정운에게 보낸 편지는 한 장도 못 싣고 엉뚱하게도 대구 등 이곳저곳의 여인들이 받았다는 청마의 편지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청마를 만난후 10년간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청하라는 여인이 나선 상황에서 정운이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청마가 정운에게 보낸 편지들은 모두 그대로 시였다. 아니 직접 시를 써서 편지를 대신하기도 했다.정운을 만난 지 두달쯤 되는 1946년 12월 1일 청마는 `정향(丁香)에게 주는 시`를 처음 쓴다. 정향은 정운 이전에 쓰던 이영도의 아호다. "내가 언제 그대를 사랑한다던?/그러나 얼굴을 부벼들고만 싶은 알뜰함이/아아 병인 양 오슬오슬드는지고". 두번째 시는 47년 7월 9일에 보인다. "덧없는 목숨이여/소망일랑 아예 갖지 않으매/요지경같이 요지경같이 높게 낮게 불타는 나의/-노래여, 뉘우침이여". 다음은 편지를 보자

"나의 구원인 정향! 절망인 정향! 나의 영혼의 전부가 당신에게만 있는 나의 정향! 오늘 이 날이 나의 낙명(落命)의 날이 된달지라도 아깝지 않을 정향 -52년 6월 2일 당신의 마(馬)". 편지로 사랑을 낚던 시절, 누구라도 이 서한집에서 몇 줄만 훔쳐 써먹었으면 돌부처라도 옷고름을 풀리라. 서한집의 출간으로 여성지들도 잠잠해졌고 청마의 뒷이야기도 뚝 그쳤으니 비난을 무릅쓰고 결행한 정운의 사랑 지키기는 적중한 셈이었다.

마땅히 서한집의 인세는 청마의 유족에게 돌아가야할 것이나 정운은 시전문지`현대시학`에 `작품상`기금으로 기탁운영해오다 끝을 맺지 못하고 76년 3월 6일 예순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뜬다. 바로 그날 오전 정운은 11시쯤 내가 근무하는 북창동 5층까지 오셨었다. "근배야 잘 있거레이". 12시 노산 이은상과 점심약속이 있다면서 층계를 밟고 내려가시더니 오후 2시쯤 망원동 자택에서 부음이 날아든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갔고 내 몫으로 온 조사를 울면서 쓰고 영결식장에서 울면서 읽었다.

더 크게 만들겠다던 문학상 기금은 정운의 타계로 붇지 않고 구상·김준석·임인규 등 문학상 운영 위원들의 합의로 `정운시조상`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유서에까지 내 이름을 적어두었던 정운! 없는 글재주 예뻐하시던 그 사랑 뉘에게 다시 받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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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구상과 응향사건


붉은 피로 꽃 한 떨기 피우는 날엔

비린내 나는 운명도 향내를 풍기오리니-구상



38선은 국토만 두 동강이로 자른 것이 아니었다. 문학동네에 오른 깃발이 틀리고 글쓰기에 대한 잣대가 사뭇 달랐다. 북녘땅에서도 문향(文鄕)으로 앞서가는 원산에서 문학가동맹이 발족한 것은 1946년 초봄이었다. 19년 함남 문천에서 태어난 운성(雲城)구상은 41년 도쿄 니혼대학을 졸업하고 원산에 와서 북선매일 기자를 하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해방이 되면서 원산여자사범의 교사로 있었다.

민족진영에 섰던 운성에게 해방기념시집에 실릴 원고를 청탁한 것은 원산문예총 위원장 박경수였다. 신문이나 방송같은 데 어용으로 동원하지 않겠다는 제의에 운성은 `길``여명도`등 다섯편의 시를 주었고 이 시는 시집 『응향(凝香)』의 앞머리에 실렸다.이중섭 표지화로 호화장정의 이 시집이 출간된 지 한달쯤 지난 46년 10월 『응향』은 북한의 중앙문단인 평양 문단으로부터 철퇴를 맞는다.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상임위원회가 내놓은 『응향』에 대한 결정서가 북한의 모든 신문과 방송에 톱기사와 뉴스로 터져나온 것이다. 이를 계기로 각 지방의 문학활동에 대한 검열사업을 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결정서의 요지는 『응향』은 북조선 현실에 대한 회의적·공상적·퇴폐적·도피적·반동적 경향을 가졌으며 원산문학가동맹은 인민대중에게 악기류를 유포하고 있다고 못박고 『응향』의 판매금지와 검열원의 전국파견 등을 공포한 것이었다. 『응향』에 실린 운성의 시를 보자.

"이름 모를 귀향길에/운명의 청춘이/눈물 겨웁다/보행의 산술도/통곡에도/피곤하고/역우(役牛)의/줄기찬 고행만이/슬프게/좋다"(길)

"말굽소리/말굽소리/창칼 부닥치어/살기를 띠고/백성들의 아우성/또한 처연한데/떠오는 태양 함께/피 토하고/죽어가는 사나이의 미소가/고웁다"(여명도1)

평론가 백인준은 운성의 시편들에 대해 악의적 해석과 공격을 퍼부었는데 퇴폐주의·악마주의·부르주아·반역사·반인민등 저들이 적으로 삼은 낱말을 총동원해 몰아세운다.

남한의 문단에서도 즉각 반격에 나섰다. 김동리의 `문학과 자유를 옹호함`을 비롯, 조연현·곽종원 등이 나서서 반론을 편다. 운성은 문학으로나 삶으로나 북녘 체제에는 발붙일 수 없음을 깨닫고 목숨 걸고 남행을 결행,47년 2월 서울 땅을 밟는다. 곧 연합신문 문화부장으로 일하면서 시작활동을 펼친다. 6·25를 만나 국방부 기관지 승리일보의 주간을 맡던 51년 6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집 구상』을 공초 오상순의 제자로 펴낸다.

"북한의 공산당들이 2년 전에 납치해다가 이제는 그만 순교하였을 나의 오직 하나인 형 대준 신부의 이름으로 이 시집을 올리나이다"고 첫장에 밝혔듯이 공산당에 희생된 신부를 형으로 두었던 운성은 가톨릭 정신을 바탕으로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시로 승화시키는 넓은 시세계를 펼치고 있다. 더욱 공초에게 바치는 운성의 하늘 닿는 치성은 우리 어린 후배들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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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빨래골 공초제


산아 무너져라 그 밖좀 내다 보자

바다야 넘쳐라 심심허도 않으냐

-공초



산 같은 사람, 바다 같은 사람이 세상에는 있다. 운성(雲城) 구상은 공초(空超) 오상순을 `우리 시대의 구도자(求道者)`로 받든다. 운성의 공초 추앙은 거의 종교적이었다. 해방 이후 동시대의 문인들이 탐나는 일자리에 앞다퉈 앉을 때 공초는 홀로 `무소유 무정처(無所有 無定處)`로 돌아앉아 한쪽으로 기우는 배를 바로 잡았다고 운성은 가르쳐 주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공초의 파이프에서 줄줄이 오르던 담배연기, 그 자연(紫煙)의 향기를 이제는 흉내낼 이도 없다. 1963년 2월 명동과 조계사를 왕래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공초는 자리에 눕는다. 운성은 서둘러 메디컬센터에 입원토록 했고 병세가 악화돼 5월 적십자 병원으로 옮겼으나 6월 3일 밤 69세로 영원한 무소유·무정처가 기다리는 산의 밖, 바다의 밖으로 떠나셨다.

통금이 없어 명동이 들끓던 60년 섣달 그믐 밤,향지원다방에서 1월 1일자 신문을 들고 나의 신춘문예당선 소식을 공초께 맨 먼저 드렸을 때 큰 손으로 덥석 잡으시며 기뻐하셨고, 나를 데리고 경향신문 김팔봉 주간, 서울신문 오종식 사장에게 취직 부탁까지 해주시던 공초. 5월에 발표되는 문공부신인예술상에서 시 `노래여 노래여`가 특상을 타게 돼 병실에 찾아뵈었더니 "아암 그래야지"를 연발하던 공초는 가신 것이다.

1894년 서울에서 태어난 공초는 20년 김억·남궁벽·염상섭·황석우 등과 `폐허` 동인을 하면서 22년 시 `아시아의 마지막 밤 풍경`으로 한국시의 새 지평을 연다. 웅혼한 시혼의 점화로 암흑기를 노래한 큰 시인이었고 사상가였다.

빈소는 조계사에 차렸고 문단장으로 거행됐다. 장례위원장에는 박종화, 위원으로는 구상·김광섭·이은상 등이었다.

5일장을 치르는 동안 나는 조계사에서 잔 심부름을 했다. 노산이 조시 `공초 먼 길을 가다`를 썼다. "고독은 그의 지기/공허는 그의 동반자/조용히 입을 다물고/침묵의 법문 외우면서/영원한 미소를 띠고/공초 먼 길을 가다"공초가 수유리에 놀러갔다가 "죽어서 이런 곳에 묻히면 좋겠다"고 했단다. 운성은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에게 부탁해 수유리 빨래골에 묏자리 1백평을 얻어냈다.

내가 62년 1월 운성 댁을 찾았을 때 운성은 "바로 이 방에서 박첨지가 한 달 숨어 있었네"하고 5·16전야의 비화를 들려주었다. 박첨지란 박정희를 가리키는 운성식 칭호였다. 케네디를 만나러 갔다 온 박첨지가 김포공항에서 곧바로 조계사로 가 운성을 찾을 만큼 두 사람의 친분은 두터웠고, 그로 인해 공초의 장례는 어느 국민장보다도 장엄했다.

5·16으로 문을 굳게 닫았던 국회의사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했다. 1백호가 넘는 영정을 앞세우고 60여개의 만장이 빨래골까지 이어졌다. 한 해도 거른 일 없이 큰 문인들이 공초문학상 시상식을 끝내고 모였던 `공초제`.구상·이원섭에 이어 숭모회 회장을 맡고 있는 내가 40주기의 헌화를 어떻게 올릴지 가난한 마음만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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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민족시인 설창수

짓밟음. 바람 비. 수레바퀴 침뱉음을

오랫동안 말 없이 참아온 나다.

-설창수



하늘이 처음 열린 날이 있다. 단군왕검 신시에 내리시어 나라 세우신 날을 개천절로 정하고 겨레는 정성을 바쳐 제사를 올린다. 이 민족의 성스러운 경축일에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민족혼을 신명 나는 예술 한마당으로 일깨워야 한다고 횃불을 들고 일어선 선각자가 있으니 파성(巴城)설창수 시인이다.

파성은 1916년 경남 창원에서 태어나 니혼(日本)대학 예술학원 창작과를 중퇴하고 일제하에서 사상범으로 체포돼 2년간 복역한다. 광복 다음 해인 46년 경남일보 주필겸 사장을 맡아 필봉을 휘두르면서 동인지 `등불`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 파성은 49년 서른 세살의 나이로 영남예술제를 창안하고 집행한다. 진주가 영남권의 역사·문화의 발상지며 중심지라고 믿는 파성은 개천절인 음력 10월3일, 진주에서 문화민족의 역량에 불붙이는 향불을 개국의 제단에 성대하게 올린다.

제1회 영남예술제에서 이형기·박재삼이 고등학생으로 나란히 시부 장원, 차상에 뽑혔으니 이 예술제가 영남권의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디딤돌이 되었음을 읽을 만하다. 제 10회부터 이름을 개천예술제로 바꿔 개국의 정신을 받들고 영남권만이 아닌 전국 규모의 민족제전으로 자리를 잡는다.

이 민족축전의 제사장으로, 언론인으로, 시인으로 폭넓은 인지도를 갖게된 파성은 4·19혁명 직후 치러진 총선에서 6년제 참의원으로 당선, 중앙정치 무대로 나아간다. 그러나 5·16을 만나 짧은 의정활동은 마감된다.

군복을 벗고 대통령에 출마하는 박정희 의장은 대구 시절부터 친구였고 5·16 때 몸을 숨겨준 은인이기도 했던 구상에게 때묻지 않은 새 인물의 추천을 의뢰한다. 구상은 친형 처럼 위하는 파성을 천거하고 설득하지만 파성은 "일본군 육군 중위와는 손을 잡지 않는다"고 막무가내다. 문공장관·중앙언론사 사장 같은 자리를 박차고 나선 파성은 개천예술제 마저 군사정권의 어용으로 타락해가고 있다고 예술제가 열리는 기간은 진주 밖으로 나가서 떠돈다.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는 백이숙제를 본땄음인가, 파성은 전국을 돌며 시화전을 연다. 그 횟수가 무려 2백20여회, 심지어 면 단위까지고 돌아다녔으니 파성 특유의 서체로 만들어진 시화는 몇 천점 쯤 전국 방방곡곡에서 묵향을 뿌리고 있으리라.

개천예술제는 6·25 나던 해와 10·26이 나던 해만 거르고 오늘까지 49회째 민족제전으로 이어오고 있다. 파성은 구상과 함께 공초 오상순 모시기에도 정성을 바쳐 빨래골 공초제에도 천리길 마다 않고 오셨었다. 그때 추모사에서 "공초는 우주의 컨덕터(지휘자)"라고 하신 말씀을 나는 시로 썼다. 85년 문단 일각에서 새로운 문학단체 `한국문학협회`를 결성했을 때 몸 사리는 선배들과 달리 선뜻 회장직을 수락, 짧은 동안이지만 문단사의 한 장의 기록을 이끄셨다. 배달겨레의 옷차림인 한복 정장에 흰 두루마기를 언제나 입으시던 파성 선생. 시대와의 불화에 지친 걸음으로 98년 6월 26일 82세로 하늘 열리는 곳으로 가셨다. 불의를 꾸짖는 그 사자후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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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모윤숙 `렌의 애가`


사랑은 이마를 스쳐가는 향내음으로

두 가슴을 적시어 합치게 하리라

-모윤숙



소쩍새는 피울음을 운다고 한다. 짝을 부르는 새 소리를 사람들은 운다고도 하고 지저귄다고도 하고 노래한다고도 한다. 그 새가 되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밤낮으로 슬프게 노래한 영운(嶺雲) 모윤숙 시인이 있다.

영운은 1910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나 이화여전 문과를 졸업한 신여성으로 북간도의 명신여고에서 교편을 잡다가 31년 서울 배화여고로 옮기면서 월간 `삼천리`기자, 중앙방송국 기자로 일한다. 이해 12월 `동광`에 시 `피로 새긴 당신의 얼굴`을 발표하면서 그는 시단의 꽃으로 얼굴을 내밀었고, 33년 첫 시집 `빛나는 지역`을 내면서 눈부신 빛깔로 타오르기 시작한다.

문학으로나 사회적 영향력으로나 당대 가장 웃어른이었던 춘원(春園) 이광수는 `빛나는 지역`의 서문에서 "여사는 조선의 땅을 안으려 하는 시인이다. 검은 머리를 풀어 허리를 매고 조선의 제단에 횃불을 켜놓으려 한다고 외치는 시인이다"고 치켜세우면서 "조선의 시인인 것을 감사하려 한다"고 영운을 크게 반기고 있다.

그 영운이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한 남자를 만난다. 이미 아내가 있는 그 남자에 대한 사랑을 날마다 일기장에 쓰면서 건널 수 없는 강을 세상에 있는 온갖 아름다움, 슬픔, 외로움, 아픔의 말로 띄운다.

아프리카의 깊은 숲속에서 혼자 우는 `렌`이라는 새를 영운은 자기 이름으로 한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베드로의 옛 이름 `시몬`을 사랑하는 남자의 이름으로 한다. 빨리 뜨거워졌다가 쉽게 식어버리고 후회도 반성도 할 줄 아는 남자가 시몬이고 그것이 한국 남자의 특성이라는 것이다.

39년 어느날 조지훈이 영운을 찾아와서 일기와 서간문을 보여달라고 조른다. 영운은 남에게 보이려고 쓴 글이 아니라며 거절했으나 조지훈은 끝내 그 원고들을 뺏어다가 자신이 관계하는 안국동의 일월서점에서 39쪽짜리 `렌의 애가(哀歌)`를 출판한다.

`렌의 애가`는 닷새 만에 매진됐고 나머지 일기도 읽게 해달라는 독자들의 성화가 빗발쳤다. 유진오는 `렌의 애가`가 `한국판 좁은 문`이며 여자 쪽에서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고 찬사를 던졌다. 그러면 영운이 그토록 영혼을 태우고 몸을 태우며 부르는 시몬은 누구인가.

그는 "연령이 높은 스승격인 분에게서 신비로운 감흥을 받았다"고 한다. 36년 시몬과을 만나면서 일어나는 사건을 일기장에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 시몬이 혜명이란 남성을 소개해 주어 결혼하게 되는데, 렌은 시몬에게서 느끼는 감정을 혜명에게서는 느끼지 못하고 결혼을 파탄으로 이끈다. 바로 이 내용이 세간의 궁금증을 더하는 것이었다. 영운에게 남자를 소개한 것은 춘원이었고 영운 자신도 파경을 했기 때문이다. 영운은 "구구한 억측도 많지만 난 그대로 침묵할 뿐"이라면서 "시몬과 렌의 정신적 결합은 결코 부끄럽지 않고 떳떳하니 세상이 아는 그대로 자백해도 좋다"고 뒷날 밝히고 있다.

`렌의 애가`는 춘원의 `사랑`과 더불어 서구의 어떤 고전 못지않게 지난 시대 이 땅의 젊은이들 머리의 등잔불 심지를 높이던 필독서였다. 90년 팔순의 나이로 슬픈 노래를 못다 부르고 간 영운, 지금은 어느 숲에서 피울음을 울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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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영운의 추석잔치

어이 이리 멀고 먼 생각의 가지에서만

사랑은 방황하다 돌아서 버립니까

-모윤숙



조선조의 여류 시인 이옥봉은 "이불을 쓰고 우는 것은/얼음장 밑의 강물 같아서/밤도 낮도 없이 흐르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고 노래한다.그런데 현대 여성 영운(嶺雲) 모윤숙은 떵떵거리며 사랑타령을 일삼았다.1984년 추석 전날 김주영과 나는 현대 정주영 회장이 베푸는 모윤숙을 위한 추석잔치에 갔다. 잔치는 서울 근교 정회장의 별장에서 열렸다.

벌써 몇 해째 병석에 누워 있는 영운을 위해 정회장은 잔디밭에 천막을 치고 추석상을 한 상 가득히 차려놓고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영운은 휠체어를 타고 상석에 자리잡고 있었고 평소 영운과 가까운 전숙희·김자경·김남조·정영희 등도 와 있었다. 나는 `한국문학`이 어려울 때 정회장이 선뜻 도와준 고마움이 있었고 김주영은 동무따라 강남 간 셈이었다.

아직 음식이 다 차려지기 전인데 영운이 첫마디를 꺼낸다."나는 평생 사랑을 한번도 못했어!"그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전숙희·김자경이 달려든다."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는 언니 보따리만 들고 다니다 청춘을 다 보냈는데." 거기서부터 메논의 이름이 나오고 영운의 사랑이 꽃을 피운다.

영운이 렌을 자처하며 일편단심 시몬을 사랑한 일은 덮어두고라도 48년 이승만 정부가 탄생될 때 장면·조병욱등과 유엔 외교활동에도 큰 역할을 했고 더욱 유엔의 조사위원장으로 내한한 인도의 외무장관 메논과 사랑에 빠진 이야기는 자신도 숨기지 않았고 주위의 사람들도 익히 아는 터였다.

일제 하에서는 시 `조선의 딸`이 문제되어 구속당하기도 했고 창씨개명도 안하고 버텨냈으나 41년 12월 부민관에서 열린 `결전부인대회`에서 `여성도 전사다`의 제목으로 연설한 것이 흠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이호철이 "40여년 문단생활에서 남녀를 통틀어 내가 만나본 글쟁이라는 사람들 속에서 모윤숙만큼 인간적 부피가 있는 사람을 달리 본 일이 없다"고 술회했듯이 문학동네의 상머슴 노릇을 오래 했었다.

영운은 유엔 총회 한국대표로 54년 파리에 갔다가 `PEN`의 간판을 보고 찾아들어가 펜클럽 한국본부를 만드는 일에 착수했다. 그해 10월 24일, 영운의 활약으로 한국펜센터가 조직된다. 회장에 변영로, 부회장에 김광섭·모윤숙으로 첫 출범을 한 후 59년 펜회장으로 취임, 실질적인 펜맨으로 여생을 보냈다.

문학지를 창간하기 어렵던 49년 `문예`를 창간, 5년 동안이나 문인들이 글 농사를 지을 텃밭을 만들어 주었고 이동주·천상병·이형기 등 한국 문학의 맥을 잇는 시인·작가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어려서 춘원의 신문연재 소설을 읽기 위해 십리길 면장집을 다녔다는 정주영은 `렌의 애가`를 읽었던 것인지 영운과 가까웠고 추석 잔칫상까지 차리는 잔정을 보였다.

소파에 누운 영운은 나를 젊은 시몬이라 불러주며 응석을 부렸다. 79년인가, 펜클럽 선거에서 회장이 되던 날,내 손등에 입맞춤을 해주던 영운, 이영도가 청마에게서 받은 서한집을 출판했을 때 "나도 편지 보따리가 산같이 많은데"하고 은근히 내게 자랑하더니 사랑은 한번도 못했다면서 웬 보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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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조선의용군 김학철

빼앗긴 땅을 붓으로 되찾지 못한다면 총으로 찾자

-김학철



모국어의 지평은 넓다. 일제가 나라의 땅을 빼앗고 말과 글을 빼앗을 때 말보다는 총으로 되찾겠다고 싸움터로 달려간 젊은이가 있었다. 손에는 총을 들었으나 가슴에는 붓을 세워 모국어의 혼불을 쉬지 않고 밝혔으니 그가 조선의용군 소설가 김학철(金學鐵)이다.

김학철의 본명은 홍성걸(洪性杰)이지만 항일투쟁을 위해 가명을 썼던 것을 끝내 자기 이름으로 썼다. 그는 1916년 함남 원산에서 태어나 열세살 때 서울 외가의 도움으로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한다. 재학 시절 윤봉길 의사의 거사에 충격을 받았고,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읽고 빼앗긴 땅을 총으로 찾겠다고 결심한다.

보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열아홉살 나이로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하고 스무살에는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해 김원봉(金元鳳)의 부하가 된다. 이때 김구(金九)와도 만난다. 다음에 장제스(蔣介石)가 교장인 황포군관학교에 입학, 교관이던 김두봉·석정 등의 영향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빠진다.

무한 전투에서 사살한 적병의 배낭에서 한글 책자가 나왔는데 『발가락이 닮았다』는 단편이 들어있었다. 학병으로 강제 징집돼 비록 일본군으로 나갔지만 싸움터에서 모국어를 읽던 그 젊은이는 누구였을까? 김학철은 그 소설을 읽으며 엇갈리는 민족의 운명을 마음으로 아파한다.

싸움터에서 언제나 앞장서던 공산당원 의용군 김학철은 41년 태행산 전투에서 총탄을 맞고 쓰러져 일본군 포로가 된다. 일본 나가사키(長崎)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던 중 44년 상하이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언도를 받고 끌려온 송지영을 만나는 인연으로 문학에 대한 열정에 다시 기름을 붓는다. 총상 당한 다리를 치료받지 못해 수감 3년6개월 만에 왼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학처럼 외다리로 선다.

조국 광복과 함께 맥아더 사령부의 석방 명령으로 손지영과 함께 서울로 와서 건설주보에 단편 `지네`를 발표하면서 창작 활동을 하다가 47년 사회주의 이념을 실천코자 38선을 넘어 평양으로 간다.

노동신문 기자, 인민군신문 주필을 역임하면서 창작활동을 하던 김학철은 50년 10월 중국 베이징(北京)으로 갔다가 옌볜(延邊)에 정착, 장편 『해란강아 말하라』 등 소설 쓰기에 전념하던 중 반동분자로 숙청돼 24년간 강제노동에 종사했다. 60년대엔 홍위병에게 미발표 소설 `20세기의 신화`가 들켜 창춘(長春)에서 10년간 복역한다.

나는 94년 김학철옹이 KBS 해외동포상을 타러 서울에 왔을 때 처음 만났다. 이후 그가 서울에 오거나, 혹은 내가 옌볜에 갈 때마다 그를 꼭 찾아뵈었던 것은 눈덮인 백두산같은 차고 맑은 정신의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옹은 2001년 9월 5일부터 스무하루 동안 곡기를 끊은 끝에 `내땅 찾기 내 말 찾기`의 85년 대장정을 마감한다. 유언대로 화장해 두만강에 종이배를 띄웠다. 우편 주소는 `원산 앞바다 행, 김학철(홍성걸)의 고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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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윤후명의 수국결혼

나도 한 포기 곰취이고 싶다

누군가에게 뜯어먹혀 힘을 내줄 풀

-윤후명



한려수도란 이름만 들어도 다도해를 가르는 물길이 눈에 출렁인다. 한산섬이 떠있는 통영 앞바다의 `수국`이라는 작은 섬이 문인들의 발길이 잦은 작가촌으로 지정된 것은 1980년대의 끝이었다. 섬에서 태어나 섬 하나를 가꾸고 싶어했던 한 언론인이 글값 모은 돈으로 버려진 섬 하나를 사서 충무공의 `수국추광모(水國秋光暮)`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내가 `민족과 문학`주간을 맡고 있던 91년 여름 소설창작교실을 수국에서 열었다. 8월 9일에서 12일까지 3박4일 일정이었는데 강사진으로 이호철·정연희·유현종·송영·김주영·김용성·김원일·윤후명·이문열 등의 소설가와 평론의 김병익, 시의 황동규 등이 참가해 작은 섬 수국은 마치 한국문단의 임시정부가 들어선 것 같았다. 신문기사도 `스타군단의 총출동`또는 `별들의 전쟁`같은 눈부신 제목을 달고 있었다.

외딴 섬에는 문인들을 위한 선상 카페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남쪽 바다의 밤 정취와 함께 문학 이야기를 꽃 피우며 문인과 독자들은 선상 카페에서 바다 바람에 가슴을 달구고 있었다. 새벽 두시쯤 되었을까, 비좁은 잠자리에 아무렇게나 누워 겨우 잠을 청하는 내 머리맡에서 이문열과 윤후명이 맘껏 취해서 들어와 이상한 손짓을 해가며 인생문답을 하고 있었다.

이문열이 곯아떨어지자 윤후명은 나를 깨웠다. 등산은 내가 앞서지만 나는 주인이고 그는 손님이니 졸리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했다. 골자인즉 어느 재벌가의 규수와 사랑을 하게 되었는데 어떡하면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글쎄 상담을 하는 건지 자랑을 하는 건지 나는 대충 축하한다는 대답을 해주었다.

이튿날 수강생들과 오전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천막을 쳐들고 이문열이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이선생님! 오늘 오후 2시에 윤후명씨 결혼식이 있다고 광고해주세요"라고 한마디 던지고 간다. 수강생들이 그 말을 함께 들은 터라 나는 복창을 하면서도 `아닌 밤중에 웬 홍두깨?`하고 속으로 웃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본부에 와서야 강사로 온 신랑 윤후명군과 수강생인 신부 허영숙양의 결혼식이 준비되고 있음을 알았다. 정연희는 수국을 온통 헤매며 산유화를 꺾어 신부의 부케를 만들고 있었다. 이호철의 주례로 결혼식은 거행되었다. 나는 사회를 보았고 유현종이 축가도 불렀다. 이른바 문단의 임시정부 요인들이 하객으로 참석했으니 어느 결혼식보다 화려했다.

설마하고 뒤늦게 달려온 몇몇 수강생들은 세기적 결혼식을 못보았노라고 발을 동동 굴렀다. 신랑·신부는 그 길로 국토 남단을 가로지르는 신혼여행을 떠났고 서울의 여성지들은 다투어 `눈물의 수국결혼식`을 지면 가득 메웠다. 46년 강릉에서 태어나 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빙하의 새`가 당선돼 70년대 뛰어난 시를 쓰던 윤상규는 79년 다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로 등단하면서 윤후명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지금 서울 평창동에 소슬한 둥지를 틀고 남부러운 `곰취의 사랑`을 하면서 소설대학을 운영, 올해에도 신춘문예에 넷이나 내보냈으니 수국의 그 산유화 약효 한번 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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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김소운의 목근통신

내 어머니가 문둥이일지라도

나는 클레오파트라와 바꾸지 않겠다

-김소운



현해탄의 검은 물결을 타고 일본의 문학이 우리의 모국어를 집어삼키려고 덤벼들 때 거꾸로 우리의 문학을 일본으로 역수출하여 저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 개척자가 있었다. 시인이자 아동문학가이며 수필가인 소운(素雲) 김교환이다.

소운은 1907년 부산 영도에서 구한국 탁지부(度支部-지금 재경부) 관리의 아들로 태어난다.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마저 러시아로 떠나보낸 소운은 4년제 소학교를 네 차례나 전전하다 졸업을 앞둔 열 한 살 때인 18년 일본을 왕래하던 사촌 형을 졸라 석탄배를 타고 일본으로 밀항한다. 신문배달을 하면서 다닌 가이세이(開成)중학을 23년 중퇴하고 일시 귀국, 시대일보에 시 `신조`등을 발표하고 24년에는 시집 『출범』으로 시인의 별자리에 앉는다.

열 아홉살에 다시 도일, 시잡지 `지조라쿠엔(地上樂園)`에 `조선농민가요`를 연재하면서 우리네 구전, 동·민요의 수집에 정열을 쏟는다. 이국에서 조국의 혼이 담긴 노래를 일본어로 옮기는 데 도깨비불처럼 외로운 싸움을 하던 소운은 스무살 나이로 『조선민요집』 원고를 싸들고 일본문단의 상징이던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를 찾아간다.

밤 아홉시가 넘어 문을 두드린 젊은 불청객에 대해 하쿠슈의 첫 마디는 "이런 기막힌 시심이 조선에 있었다니!"였다. 소운이 기다리는 동안 병석의 하쿠슈는 원고를 읽고 나온 것이었다. 하쿠슈는 서문을 써서 가이조샤(改造社)에 출판을 소개했고 당대 일본 시단의 대가 30명을 동경 명월관에 초청, 소운 소개의 밤을 열었다.

그런데 소운은 잔치 사흘 전에 인쇄소에서 판을 뒤엎어 선불 인세를 못받게 되어 비용 3백원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하쿠슈가 걱정 말라며 치러준 3백원은 뒷날 알고보니 아사히 신문 학예부에 청탁하지도 않은 단카(短歌)30편을 들고가 선불해 온 것이었다. 『조선민요집』은 두해 뒤인 29년에야 다이분칸(泰文館)에서 나왔고 이어서 『조선동요선』(33)『조선민요선』(39) 『젖빛구름』(40) 『조선시집』(43)등을 이와나미(岩波)문고 등에서 간행해 조선의 시심, 조선의 정서, 조선의 가락을 저들에게 심어주는 조선시가의 전도사로 현해탄 물살을 흠뻑 휘저었다.

패전국 일본이 경제동물로 이상발육을 할 때 우리는 동족상쟁의 피를 흘리고 국토는 잿더미가 되고 있었다. 전쟁이 한창인 51년 소운은 일본에 보내는 편지라는 부제의 `목근통신(木槿通信)`을 대한일보에 연재한다. 목근은 무궁화의 다른 이름. 어린 나이로 일본에 밀항해서 `일본인보다 일본말을 더 잘하는 조선인`으로 일본 문단을 종횡무진 누볐던 소운. 그는 누구보다도 일본을 잘 알고 조선을 잘 알기에 저들이 비웃을 조국의 현실을 감싸며 은원(恩怨)의 나라 일본, 그리고 일본인들을 참으로 통쾌하게 꾸짖고 있었다.

`목근통신`은 다시 소운이 일어로 번역, 그해 일본의 시사잡지 주오고론(中央公論)11월호에 전재된다. `문둥이 조국! 그러나 내게 있어서 어느 극락정토보다 더 그리운 어머니 품입니다` 이 끝 귀절을 현해탄은 지금도 읊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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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소운의 상화詩碑


아, 어린애 가슴처럼 세월 모르는

나의 침실로 가자

-이상화



국토와 함께 빼앗겼던 모국어를 되찾는 광복을 맞았다. 그러나 모국어의 광복을 위해 싸운 민족시인을 기리는 일에는 눈을 감고 있었다. 모국어의 시비(詩碑)하나 없는 나라, 여기에 생각이 먼저 부닥친 시인이 김소운이었다. 1947년 대구에 두 번째 발걸음을 한 소운은 박목월·이호우 등 시인들을 만나 이상화의 시비를 대구에 세우자는 의견을 불쑥 꺼낸다.

잡지사나 단체의 이름을 내세우지 말고 소운 혼자만의 일로 진행시키라고 후배 시인이 권고하고 모금운동을 벌이자 소운은 꼼짝없이 나서게 된다. 소운은 부산 동래 살림을 정리한 32만원, 책을 판 돈과 선불로 받은 인세 등 62만5천원을 부어넣는데도 "친일파의 누명을 벗으려는 꿍심이다""시비를 빙자로 정재(淨財)를 거두어 호유(豪遊)를 하고 다닌다"는 중상모략이 따라붙었다. 그래도 상화와 함께 백조 동인이었던 박종화가 1만원 내고 김광균·마해송·김동리·서정주·유치환등과 각계에서 십시일반으로 보태 모두 7만5백원이 들어왔다.

`상화시비(尙火詩碑)`전서는 당대의 서예가 위창(葦滄)오세창이 썼고, 비문의 시 `나의 침실로`는 열한살배기 상화의 셋째 아들 태희(太熙)가 썼다. 뒷면은 소운의 글에 죽농(竹農)소동균의 글씨였다. 4 8년 3월 14일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진 이 나라 첫 모국어 시비의 제막식에선 권태호 작곡 `나의 침실로`가 계성중학의 밴드와 신명여고생들의 합창으로 울려 퍼졌다.

소운은 52년 베네치아 국제예술회의에 참석하고 귀국하는 길에 도쿄에서 이승만을 비판하는 기자회견을 해 귀국을 금지당하고 타의로 13년간 일본에서 글을 쓰며 산다. 소운은 65년 그리운 어머니의 땅으로 아주 돌아온 뒤의 첫 수필집 『물 한 그릇의 행복』을 67년 내게 넘겨주었고, 다음해 그의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자전적 에세이 『하늘끝에 살아도』또한 내 손으로 편집케 하였다.

화가 이중섭이 현해탄을 두고 일본에 있는 아내 이남덕에게 보낸 일문 편지를 그의 엽서 그림과 묶어 내가 출판할 때 번역을 소운께 부탁드렸었다. 난로도 없는 방에서 손을 비비며 겨우내 번역한 원고를 들고 찾아오셨을 때 소운은 "이것은 내가 이근배씨께 드리는 서신입니다"하며, 내 깜냥으로는 가장 비싼 원고료를 준비했는데 한사코 거절하셨다.

일역 `현대한국문학선집`5권을 내가 주간으로 있는 동화출판사가 일본 출판사와 공동출판을 하게 돼 나는 자주 소운댁을 드나들었다. 소운이 한번은 동양방송에 출연차 서울 운현궁 스튜디오에 갔다가 새내기 여자 탤런트들을 만난다. 그런데 줄 책이 없어서 주소를 받아가지고 와서 붓글씨로 이름을 쓰고 도장까지 찍어서 등기로 보낸다.그런데 한 주일이 가고 두 주일이 가도 답장 편지는 커녕 전화 한 꼭지도 없다고 내게 역정을 내신다.

"글쎄 나는 이 나이가 돼도 여자 앞에만 앉으면 그만 딱 해파리가 되고 마네요." 고희를 넘기면서도 여자 앞에선 해파리가 되시던 소운은 81년 74세로 그리운 어머님의 품, 조국의 땅에 영원히 안기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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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청년문학가협회

이 세상 더러운 세상 까짓,

낫 한 자루 그것이라도 휘두르며 넘어가자

-김광협



남쪽 또 하나의 분단의 나라 베트남에서 미국은 힘겨운 전쟁을 하고 있었다. 한국전에서 흘린 피의 값을 갚으라는 것인가, 나와 동갑내기 젊은이들이 베트남 전선에 나가서 총알받이가 되고 있었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규탄하는 소리가 세계의 이곳저곳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20세기의 지성으로 꼽는 버트런드 러셀, 장 폴 사르트르 등이 나서서 초현대적 공업국가가 가난한 농민의 나라에 폭탄세례를 퍼붓는 일을 꾸짖었다.

생때같은 우리의 젊은 목숨을 탄우 속으로 내보낸 이 땅의 지성들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입을 떼기 시작했다. "아직도 식민의 바람이 부는 완충지대/먼 대륙에서 사육(謝肉)의 불비는 쏟아져오고/산 마다 강 마다의 항변은/가난한 눈물로 잠이 든다"고 나는 베트남 전쟁을 두고 쓴 시 `동남아시아`를 `신춘시`에 발표했었다.

겨울이 끝나면 개구리도 기지개를 펴는 것, 1967년 봄 숨막히는 기성문단의 껍질을 깨고 4·19세대가 시대정신을 바로 세워보겠다고 하나 둘 뜻을 모으기 시작했다. 시에 이탄·김광협, 소설에 김승옥·유현종, 평론에 염무웅·조동일·김현·임중빈 등이 주축이 됐고 60년대 전반에 등단한 역량 있는 시인·작가들이 참여했다.

단체 이름을 `청년문학가협회`로 지은 것은 임중빈의 제안이었는데 해방공간에서 `조선문학가동맹`에 맞서 김동리 등이 만들었던 `조선청년문학가협회`가 걸리기는 했으나 젊은 문학인들의 모임이라는 성격을 살리기 위한 것이었다. 가로 세로 끈이 잘 닿는다고 해서 내가 대표간사로 심부름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자주 모여 자장면을 먹으며 열띤 토론도 벌였는데,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것은 조동일만이 꼭 곱배기를 시켜먹는 것이었다. 소공동 미국공보원 강당 등을 빌려 월례 합평회도 열었다. 유현종의 소설 `거인`을 김주연이 짜게 비평했다고 유현종은 내게 거칠게 나무라기도 했다.

의욕이 너무 앞섰던 것일까, 섭외와 홍보 간사를 맡고 있던 임중빈은 주요 일간지에 성명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남정현의 소설 `분지` 재판부에 대한 항의성명은 기성문학단체가 침묵하고 있는 터에 마땅히 할 일이었지만 6·8선거가 부정선거라고 성명을 낸 것은 검은 안경 쓴 사람들에게 미움받기 좋은 일이었다.

겨우 청년문협이 자리를 잡아가던 68년 초여름이었다. 검정 승용차를 타고 온 낯선 사내들이 나를 찾는다. 다방에서 그들은 임중빈에 대해 물었다. 좋은 취직 자리가 있다고 했다. 두어 차례 그런 방문이 있은 지 얼마 뒤 나는 떨리는 음성의 김광협의 전화를 받는다. 아스토리아 호텔로 나간 나는 중앙정보부 지프에 실려 남산의 퀀셋으로 가 취조를 받았다.

중앙정보부에 따르면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통혁당 기관지가 청맥`이지만 그것조차 모르고 `청맥`에 글을 발표했던 김광협·조동일·임중빈 등은 남산에서 곤경을 치렀고 임중빈은 끝내 수의를 입어야 했다.

나는 남산 구경을 한 다음 김승옥·김현·이탄 등과 만나 청년문협의 해체를 결의했다. 나는 시대의 광풍에 꺼진 그 불꽃을 아직도 눈에서 지우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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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이병주의 `지리산`


지이산(智異山)이라고 쓰고

지리산으로 읽는다

-이병주



백두대간은 그 등뼈를 세워 뻗어내려 오다가 한반도의 아래 쯤에서 호남과 영남의 지평을 거머쥐고 우뚝 일어서니 그 산이 지리산이다. 묘향이나 금강과 키재기를 하던 우리의 명산 지리는 동족상쟁의 6·25를 만나 민족사에 또 다른 산으로 이름을 갖는다. 땅끝까지 쳐내려 왔다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막힌 인민군이 지리산으로 들어가 전선을 펴고 저항을 하고 있었다. 휴전협정으로 남북전쟁은 멈췄지만 지리산을 에워싼 이른바 공비토벌작전은 쉽게 끝나지 않고 있었다. 지리산의 패잔병들을 정부는 공비라고 했고 사람들은 `빨치산`으로 불렀다.

이 민족사의 깊은 상처를 대하소설로 쓰자고 붓을 든 이가 이병주였다. 이병주는 1921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43년 일본 메이지대학 문예과를 졸업하고 다시 와세다대학 불문과에 진학한 첨단 엘리트였다. 44년 학병으로 끌려간 그는 중국 일본군 수송대에 예속되었다가 해방을 맞아 46년 3월 미군 LST를 타고 귀국한다. 48년 진주농고 영어교사로 강단에 설 때 이형기 시인은 학생이었다.

이병주는 56년부터 국제신보 주필겸 편집국장을 하면서 4·19직후에는 `새벽`에 `조국은 없다. 산하가 있을 뿐이다`등 한반도의 중립화를 부르짖는 글을 쓴다. 그런 앞서가는 논조를 편 것과 경남교원노조 고문을 맡았던 것이 빌미가 되어 5·16후 10년형을 받는다. 2년 7개월의 복역 끝에 감형되어 출옥한 이병주는 감옥에서 생각을 짜두었던 『알렉산드리아』를 1주일 만에 탈고, 신동문 시인에게 준다. 신동문은 이 소설을 `세대`의 주간 이광훈에게 추천했고 이광훈은 40대 중반의 무명작가의 소설에 눈을 크게 뜨며 전재한다.

소설가로는 늦깎이로 등단한 이병주에게 문단은 파격적 찬사를 주었다. 한번 터진 그의 이야깃거리는 홍수처럼 마구 휘달리기 시작했다. `마술사``쥘부채`등 중편과 잇따라 장편을 써내던 이병주는 대하소설 『지리산』을 `세대`에 72년 9월부터 78년 8월까지 6년간에 걸쳐 연재한다.

주인공 박태영이 공산당원으로 빨치산이 되어 지리산에 들어가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의 대원이 되는 과정, 지리산 빨치산의 활동과 그 종말을 자기 체험인듯 이병주는 써내려간다. 뒤에 밝혀진 대로 소설에도 나오는 이태라는 실재 인물의 기록과 증언에다 그의 작가적 상상력이 역사의 큰 골짜기를 생생하게 그려낸 것이다.

나는 `한국문학`을 맡으면서 중편을 앞에 싣기 시작했다. 약속한 날짜에 중편이 들어오지 않으면 애를 태웠다. 그럴때 이병주는 어김 없었다. 단편이면 사흘, 중편이면 일주일이면 족했다. 그렇게 실은 중편 `국화와 삐에로`를 읽고 오탁번 시인은 "요즘 잘 쓴다는 젊은 작가가 몇 달 두고 쓴 소설 보다도 좋다"고 했다.

그의 고희 잔치가 부산에서 열렸을 때 서울에서는 이형기와 내가 참석했었다. "나는 이근배씨 계(系) 입니다"고 서슴없이 말하던 이병주. 한달 평균 원고지 1천장을 써내던 지리산만큼이나 깊은 이야기 골짜기를 숨기고 92년 4월 그는 이 산하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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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5.01.20 18:39

    첫댓글 봉선아 말없이 가꼬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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