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중호, 가겟방에 들어가더니
그는 시인이자 편집쟁이고 나는 곡절 많은 글쟁이 평교사로 긴 세월 함께 했다. 그는 도발적으로 시도 때도 없이 공주를 방문했고 나는 방학 때마다 서울 그의 작업실 근방에서 한잔 걸치는 것을 의례 행사로 삼았다. 작업실 문을 열면.
- 선생들 방학을 없애야 한다니깐.
일단 걀걀 웃어준 다음 다시 작업대에 엉덩이를 뭉개는 것이다. 문지방이 닳도록 날마다 출입하는 객들 관계로 그 나름대로 원고작업 관리를 체질화시키는 것이다. 방문객들은 일단 작업대에 앉은 그의 등허리를 안주 삼아 캔맥주나 쪽쪽 빨 수밖에 없다. 그는 전무용, 김광식 등 지인의 근황을 묻기 위해 잠깐 고개를 돌렸다가도 금세 원고지 글자수를 맞추는 프리렌서 근성이 배어있었다. 마침내 하루 작업을 정리한 후 비로소 우리들은 목로술집이나 점방 문을 열 수 있었다. 신촌 홍대입구. 창살로 파고드는 승용차 휘황한 불빛을 등진 채 우리들은 비지찌개나 손두부를 시켰다. 더러는 오징어 두루치기나 닭똥집으로 메뉴를 바꾸기도 했지만 대개 밑반찬 위주의 술상에 익숙한 사내들이다. 그는 단무지나 양파 멸치튀김 같은 것을 앞에 밀어 넣다가 다시 감자조림이나 새우젓으로 순서를 바꿔 밀어주면서 ‘아랫돌 빼서 윗돌 고이는’ 잔정을 보이곤 했다. 그는 체질적 술꾼이었고 나는 깡다구로 술을 마셨다.
언저리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다. 윤재철 윤구병(이들을 ‘못생긴 세 윤씨’라고 했던가)를 위시하여 송기원, 신경림, 김성동 이문구 류인학 등 선배 작가들의 후광이 있었고 김사인, 임우기, 강형철 같은 글쟁이들이 드믄드믄 찾았고 만화가 강병호가 이희재 오세영 등의 그림쟁이들이 캔맥주를 따기도 했다. 때로는 출판쟁이에서 사업가로 전향한 이화섭형이나 조성일, 돼지껍데기집 주인, 모자형이라 불리우는 건설업자, PC방 사장 등이 저마다 가파른 사연을 품은 채 술판에 끼어있기도 했다. 그렇듯 활자 속 인물과 골목길 친구들이 뒤섞인 자리에서 나는 이따금 그의 몸에서 쏟아지는 광채 때문에 눈을 비벼야 했다. 그의 모습만 굵게 그려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그림자 배경처럼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다.
결혼식장에서도 그랬다.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신랑 입장’의 순서를 실천하는 통과 의례의 그 자리다. 주례라고는 생전 처음인 윤구병 교수가.
- 오늘 신랑 윤중호가 참 못 생겼는데요, 일부러 더 못 생긴 사람을 선전하기 저를 주례로 선택했답니다.
하객들이 파안대소하는 사이 나는 그의 몸에서 발하는 광채 때문에 눈을 가려야 했다. 그랬다. 나는 그런 식으로 수렁에 빠진 다음 더 이상 헤어나지 못했다. ‘빈 산’ 이후 그의 노래에 매료되었고 삶의 문학 6집 파란 껍데기 ‘안면도’ 연작시 이후 그의 시를 줄줄 외우게 되면서 그의 술자리 입담에 일희일비하게 되었다. 그의 일화는 입에서 입으로 옮겨다니며 살이 붙고 전설화 신화화되었고 나는 그 스토리가 즐거워 자다가도 킥킥대었다.
그런 ‘쏜 살 같은 그림의 세월’이 있었다. ‘형 같은 친구’요, 우상이요, 저격수겸 매니저를 따라다니며 세상의 이치를 터득하던 시절이 있었다. 특히 그의 노래는 전무후무했다. 솔직히 노래방에서의 대중 인기도로는 나도 버틸만했다. 문제는 젓가락 두들기기다. 그는 ‘빈 산’을 터뜨리며 젓가락 장단에 맞춰 즉흥적 가사를 누에 실밥처럼 뽑아내었고 남들은 후렴구에 합세하기 위해 여백을 기다리며 긴장하곤 했다. 타령과 가곡 창작이 합체 되어 나오는 작품이었다.
‘흑인영가’는 팝송에 우리나라 타령을 접맥시킨 노래다. 그가 기타줄을 팅기며 노래를 부를 때 ‘착한 선생 조기호’는 숨을 쉴 수 없었다. 바늘을 대면 ‘뻥’ 터질 것 같아 젖먹이 감싸는 어머니처럼 심장을 조여매다가 윤중호가 ‘어여, 노래 끝났슈’하며 뒷통수를 쳐도 눈을 뜰 수 없었다. ‘기지촌’은 또 어떤가? 김민기 노래와 전통적인 타령을 접맥시킨 가락이다. 김영호 선배네 집들이에서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나는 자살의 충동을 느꼈다. 각설이 타령과 곱사춤의 합체는 ‘카타르시스와 허허실실의 합종’으로 변하면서 앉은뱅이 술꾼들까지 춤사위로 끌어들였다.
송성영, 최은숙, 한창훈, 류달상, 이규황, 원미연 등도 하나씩 모여들어 팬클럽의 자리를 채워주었고 내 쌘뽈여고 제자 지순희, 이은아, 임지연 등도 수시로 그의 안부를 물었다. 나도 그로데스크한 낭만주의자 흉내 내기 위해 머리칼을 헝클었고 구두 뒤꿈치를 밟아 신었고 바짓가랑이 끌며 빗속을 걸어서 행복했다. 시국이 아파서 내가 아팠던 80년대가 그렇듯 그의 춤사위와 함께 흘렀다.
언제부터였나, 그 신비의 사내에게 수상한 소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의 췌장에 반점이 생기고 복수가 차면서 세상과 작별의 시간이 정해졌다는 흉흉한 소문이다. 사실이었다. 사람들이 먹한 표정으로 달려왔고 특히 채진홍 교수와 김혁 원장, 온누리 김용항 사장이 지성으로 간호했다. 그러나 신은 가혹했다. 견딜만한 시련만 주신다는 하느님의 말씀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비 오는 날, 황재학과 함께 갔다.
누이 연탁스님이 공부하는 옥천 도선사 근방 민가였다. 호두나무 그늘 탓이었을까. 저수지 물안개가 초록빛 빗줄기 사이로 침침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는 없었다. 잠들기 위해 처남의 승용차를 타고 읍내에 나갔다고 했다. 승용차 엔진 흔들림에 취해 잠이 들기 위해 읍내로 떠났다는 그를 기다리며 나는 무서웠다.
-날궂이 하냐?
그의 처 홍경화에게 부축된 채 퉁명스럽게 한 마디 던진다 . 그를 바라볼 수 없었다. 반쪽 얼굴과 복수 찬 몸으로 예전과 똑같은 말투를 던지는 그의 참을성에 깜짝 놀라 식은 땀이 흘렀다. 아, 그게 마지막 상봉이다.
소도시 뒷골목으로 그런 배경이 있었다. 가겟방과 평상⋅깨진 가로등⋅개울물과 물푸레나무에 기댄 채 취한 사내들……늘 몸에 배인 풍경이었다. 초승달빛이 플라스틱 막걸리병을 핥는 중이었고 우리들은 냇물을 향해 몸을 세웠다. 내 오줌발은 코앞에서 구부러졌고 그의 오줌발은 수도꼭지처럼 콸콸 소리를 내며 냇물 중간쯤까지 포물선을 그었다. 물푸레나무가 그림자 흔들면서 지린내를 털어내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이제 돌아서려는 길이다. 그는 늘 그렇듯 바바리코트에 가방끈 멘 채 휘청이며 돌아갈 자세를 취했다. 각설이 타령이 터져나오면 후렴구 ‘얼씨구씨구 돌아간다’를 따라 부르려고 허리를 낮추려는 중이었다.
‘잠깐만 지둘려. 잉.’
라고 분명히 들은 것 같다. 그런데 웬일일까? 그가 구멍가게로 몸을 돌리려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이다.
- 담배 여기 있어야.
그가 이미 문을 열었기 때문에 ‘가지 마’ 소리가 쏙 들어갔다. 이제 가겟방 노파가 치마끈 올리며 꼬부랑꼬부랑 진열대쪽으로 움직여야 할 참이다. 문득 주머니에서 만 원 짜리 지폐가 빠져나와서 구두 밑창으로 즈려밟았다. 배춧잎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가겟방으로 들어간 그의 몸이 얼핏 그림자처럼 흑백으로 보이기도 했다. 이제 술병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릴 판이다. 나는 물푸레나무 가지 속에 몸을 숨겼다.
‘꺄웅, 소리를 질러야지.’
장난끼를 떠올리는 기다림은 그런대로 행복했다. 이제 새도록 술을 마시고 여관방 구들장에 등허리 붙인 채 신새벽에 깨어 노닥노닥 숙취를 해결하리라.
그런데 한 번 간 가겟방 불빛이 다시 켜지지 않는 것이다. 기척이 없어서 섬뜩했던 것은 찬 바람 탓이리라. 라이터를 켜자 불빛이 ‘파아’ 솟구치면서 얼핏 유리창 속으로 바바리와 까만 가방끈이 보이는 것 같아 아주 잠깐 안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람이 몰아치면서 검은 장막이 완전히 앞을 가로막는 것이다. 달빛 그리고 별빛만 즈이끼리 희뿌였다. 끝이다. 그는 오지 않았다.
‘끝까지 기다릴 거야.’
석고상으로 굳어버리리라 결심하는 순간 눈물이 펑펑 쏟아지는 것이다. 없다. 선명하게 없다. 그가 다시 지상으로 돌아올 일이 절대로 없음을 알면서도 나는 물푸레나무에 손등을 찍어대며 펑펑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