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 사적 제223호는 '숭의전(崇義殿)' 아닌 '숭의전지(崇義殿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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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7번지 일대에 있는 '숭의전(崇義殿)'이다. 이곳은 월요일이면 문을 닫는 여느 사적지와는 달리 연중 몇날몇일 정도만을 제외하고, 거의 쉬는 날없이 문을 연다고 하였다. 내가 탐방한 날도 월요일인데 이곳을 구경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단, 관람입장시간은 오후 5시까지로 제한하는 점은 유념할 필요가 있다.
참고로, 숭의전에 대한 안내문안은 현장에서 배포하는 '연천군선사문화관리사무소' 제작 <숭의전·경순왕릉> 팸플릿에서 옮겨보면 이러하다.
<숭의전(崇義殿)>
사적 제223호 (1971.12.28일 지정) <----- 관보고시에는 1971.12.27일로 되어 있음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 7번지
숭의전(崇義殿)은 조선시대에 고려조 왕을 봉사(奉祀)하던 종묘(廟殿, 宗廟)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던 자리에 1397년 (태조 6)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한 것이 시초이다. 사당 건립 이후 1399년(정종 1년)에는 왕명에 의해 고려 태조, 혜종, 성종, 현종, 문종, 원종, 충렬왕, 공민왕(高麗 太祖, 惠宗, 成宗, 顯宗, 文宗, 元宗, 忠烈王, 恭愍王)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이후 1425년(세종 7)에 이르러 조선 종묘에는 5실(五室)을 제향하는데 고려조 사당에 8왕을 제사지내게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여 태조, 현종, 문종, 원종 등의 4왕만을 봉향토록 하였다. 1451년(문종 1)에는 숭의전이라 이름 짓고 고려조 4왕과 더불어 고려조의 충신 16위(복지겸, 홍유, 신숭겸, 유금필, 배현경, 서희, 강감찬, 윤관, 김부식, 김취려, 조충, 김방경, 안우, 이방실, 김득배, 정몽주)를 배향하였다.
숭의전은 조선시대에 1605년(선조 38), 1727년(영조 3), 1789년(정조 13), 1868년(고종 5), 1908(순종 2) 등 총 5차례에 걸쳐 개수(改修)와 중수(重修)를 반복하였다. 그러다가 한국전쟁 중에 전소하여 1971년 그 터를 사적으로 지정하고 다음해에 복원, 건립하게 되었다. 현재의 숭의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정전(正殿, 崇義殿)을 비롯하여 배신청(陪臣廳), 이안청(移安廳), 전사청(典祀廳), 앙암재(仰巖齋) 등 4동의 부속건물과 외삼문(外三門)인 '천수문(天授門)'과 협문(夾門) 3동, 홍살문(紅箭門)과 하마비(下馬碑), 토신단(土神壇)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춘향대제와 추향대제가 봉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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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의전으로 들어가는 홍살문이다. 예전에는 홍살문 가운데에 '하마비'가 놓여 있었다는데, 지금은 새로만든 '말끔한' 하마비가 안내입간판 옆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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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의전 일대의 전경이다. 왼쪽부터 오른쪽방향으로 앙암재(仰巖齋), 전사청(典祀廳), 숭의전(崇義殿), 이안청(移安廳), 배신청(陪臣廳)의 순서로 배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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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이 사적 제223호로 지정된 것은 1971년 12월 27일이며, 그 당시 관보에 고시된 '정식지정명칭'은 <대한민국 관보> 1971년 12월 29일자에 따르면 '숭의전지(崇義殿址)'가 확실하고, 지금도 이 이름을 써야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사진에서 보듯이 문화재지정표석에는 그냥 '숭의전'이라고만 버젓이 새겨져 있다. [지금은 숭의전이 복구된 상태로 되어 있고 복구 이후 상당한 세월이 흐른만큼 그것을 애써 '숭의전지'라고 정색하여 가려 말할 필요까지는 없어보이지만, 그렇다고 표지석에까지 이것을 '숭의전'이라고 제멋대로 고치는 것은 분명 지나친 일이다. 그럴 바에는 차제에 ㅡ 연천군청이 주축이 되어 ㅡ 아예 '숭의전지'에서 '숭의전'으로 사적지정명칭을 변경해줄 것을 문화재위원회에 청원해봄이 어떨까도 싶다. 개인적으로 판단컨대 충분히 승산이 있어보이는 일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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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은 지형상 임진강에 접한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앞으로 숲이 우거져 강물이 흐르는 절경은 한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생각보다는 아주 너른 공간은 아니며, 그저 아담한 느낌을 주는 한적한 사당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저 너머에 보이는 나무 두 그루는 보호수로 지정된 느티나무(경기-연천-6)인데, 수령은 570년이 넘는다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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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앙암재'의 편액이다. 편액을 쓴 때가 '을축(乙丑)'이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1985년을 말하는 것인듯 싶다. 그러고 보면 편액의 재질도 예전에 많이 쓰던 수입목 '나왕'인 듯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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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의전'의 정전 모습이다. 원래의 건물을 한국전쟁 때 불타버렸다고 하며, 이것은 사적지정(1971.12.27일자) 이후 그 이듬해에 복구하여 건립한 것이라고 전한다. 일제 때에 촬영된 사진자료와 비교해보면, 좌우 측면부와 기단부의 형태가 약간 달라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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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때 경기도에서 편찬한 <경기지방의 명승사적> (1937)에 수록된 숭의전의 옛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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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의전 정전의 편액이다. 이 글씨는 누가 쓴 것인지 별도의 표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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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의전에 모시고 있는 고려 태조 왕건의 위패와 초상이다. 오른쪽에 놓여진 왕건의 초상은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지 궁금하다. 저것이 만약 어떠한 '원본'을 근거로 그려진 것이라면, 저 나름으로 문화재의 가치는 충분히 인정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낮아보이는데, 여하튼 그 출처가 어디인지 궁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어디 안내문에다 저 초상화의 출처를 좀 기록해주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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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의전은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에 춘향대제와 추향대제를 벌인다고 하는데, 저건 추계대제 때 사용된 화환인 모양이다. 그런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맨 오른쪽에 놓여진 화환이다. 여기에는 '해군왕건함장 해군대령 정관석'이라는 글씨가 달려 있다. [자료를 찾아보닌 '왕건함'은 2006년 5월에 진수된 4,000톤급 지휘통제함이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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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밖으로 나와 문을 닫기 직전에 사진에 담아본 '숭의전' 전면의 모습이다. 숭의전으로 들어가는 문의 이름은 '천수문(天授門)'이다. 필시 태조 왕건 때에 사용한 '연호(年號)'에서 따온 이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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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의전을 구경하고 되돌아나오는 길에 찻길을 따라 약간 언덕을 오르다 보면, 사진 속의 무덤 하나를 만나게 된다. 차에서 내려 살펴보니, 초대 숭의전사 왕순례(王順禮)의 묘라고 설명문이 붙어 있다. 이곳이 원래의 자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뒤쪽의 절개지 모양이나 도로변에 바짝 붙어 있는 모양새가 어디선가 옮겨왔든지 아니면 원래의 무덤을 최근에 새로 다듬은 흔적이 역력한 듯했다.
[보충자료]
경기도 편찬, <경기지방의 명승사적> (1937)
숭의전(崇義殿)
연천군 미산면 아미리(漣川郡 嵋山面 峨嵋里)에 있으며, 경원선 금곡역(京元線 金谷驛, '전곡역'의 착오)에서 자동차로 2리(里, 일본식 거리).
임진강안에 연한 단애절벽상에 경승(景勝)을 이룬 곳에 있는 와즙평가(瓦葺平家) 건물로, 노수(老樹)가 무성하게 전우(殿宇)를 둘러싸고, 발 아래로는 한 줄기의 청강만경(淸江萬頃)의 창파(蒼波)가 떠내려가는 사변유수(四邊幽邃)의 별천지(別天地)이다.
이 곳은 삼국시대, 앙암사(仰巖寺)라고 부르던 사찰이 있던 곳으로 고려 태조는 유년시절부터 이곳의 풍광(風光)을 애상(愛賞)하여, 오래도록 고려조를 세운 때로부터 특히 이 절을 숭경(崇敬)했다고도 전해진다. 후에, 이조(李朝)의 세상이 되자, 사승 횡포의 폐단이 인지되어 이를 폐사(廢寺)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이조 태조가 즉위하자 고려왕의 자손은 전부 이를 살륙하고, 여조(麗朝)의 위패(位牌)는 이를 석선(石船)에 태위 임진강에 버리자, 배가 강물을 거슬러 올라 이곳 절벽아래에 이르러 하안(河岸)에 멈추어 움직이지 않았는데, 왕(王)씨의 자손이 은밀히 위패를 거두어들여 이곳에다 묘(廟)를 세우고 이를 봉안했던 것이라고 전한다.
이조 제5대 문종(文宗) 때에 이르러, 전조(前朝)의 예우(禮遇)를 인정하여 숭의전(崇義殿)이라는 편액을 내리고, 고려의 태조(太祖),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元宗)의 사왕위(四王位)에 제시를 모시고, 고려의 공신 정몽주(鄭夢周)외 15명 등 십육신(十六臣)을 배향(配享)하여 봉사용(奉祀用)의 토지를 내려 춘추(春秋) 두 계절에 칙사를 보내서 제사를 행하게 하였다. 더욱이 이조 제14대 선종(宣宗, 선조를 말함) 때에 려조(麗朝)의 자손으로 참봉(參奉)의 영직(榮職)을 주어, 이래로 그 자손이 면면히 전우(殿宇)의 수호와 제사를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만 한국병합 후, 전유재산은 전부 관유(官有)로 되었고, 전우의 보존과 제사의 비용은 국비(國費)의 지변(支辨)으로 하였다.
[<동아일보> 1938년 4월 23일자에 석당학인(石堂學人)의 필명으로 기고된 "팔전육릉고(八殿六陵考) (상)"에 보면, 여기에도 '숭의전(숭의전)'에 관한 설명이 나와 있으나 그 내용이 위에서 소개된 <경기지방의 명승사적>의 그것과 95퍼센트 이상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라서 별도로 이것을 거듭 소개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진다.]
(정리 : 2008.10.14,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