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는 계곡에 발 담그고 땀을 식혀가며 천왕봉을 다녀오는데 예전에는 3~4 일 소요. 천왕봉을 오르는 가장 일반적이던 산행 코스.
내원사 계곡의 압권은 내원사 주변 내원골과 장당골 갈림길. 내원사 규모는 작지만 천년의 역사를 지닌 대가람다운 고찰.
내원사를 한 바퀴 돌아 대나무 숲으로 가면, <내원마을 가는 길>. 장당골에는 마을이 없는 반면 내원골에는 바깥내원과 안내원마을. <경상대 자연학습장>이 있는 장당골은 예전의 화전민촌 모두 다 철거.
내원마을 특산물은 곶감과 복조리, 워낙 고산지대라 공기도 맑다. 이곳 주민들은 가을부터 겨울까지 곶감깎고 복조리 만드는 것이 일. '반란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무척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1948년 10월 전라도 여수와 순천에서 제주도 폭동 진압군들의 반란. 여수와 순천을 장악했다가 토벌대에 쫓기며 시작되었던 빨치산 역사. 지리산에서는 구례 문수골에서 시작, 내원골에서 마감된, 반란의 역사. 1950.6·.25~1955. 5월 빨치산이 섬멸될 때까지 7년간 접근 금지된 마을.
소개령 이후 원주민 대부분 도시로 떠나가 정착했다. 그리고, 그들은 고향을 등지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현재 그들이 떠난 빈자리엔 객지인들이 찾이하고 있을 뿐.
'반란의 역사' 산증인들은 고령으로 희미한 옛 기억을 상실. 생존에 있는 산증인조차 거의 역사의 진실을 침묵으로 일관. 지금은 아쉽게도 반란의 역사 현장들이 전설처럼 잊혀져간다.
정순덕 여인.
조개골 내원골 일대는 빨치산 최후의 항전처. 빨치산 전용 방앗간이 있을 규모의 중요 거점. 법일스님이 50 년간 떠나지 않았던 대원사계곡.
'내원골 초입은 정순덕 여인의 체포 현장.'
남부군은 남한 최초의 조직적 좌익 게릴라 유격부대.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이현상의 직속 정예부대. 노고단에서 내원골까지 토벌군을 포함 사망자만 2 만명.
'정순덕 여인 체포로 막을 내린, 반란의 역사.'
제주 4.3 민중항쟁 진압명령을 받은 여수 14연대 국군. 같은 민족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며 민중항쟁 진압 거부. 반란군이 된 여수 14연대가 지리산 문수골로 쫓기며 남부군.
그 반란을 이용해 지리산을 적화기지로 이용한 공산당. 그들을 진압하려 군경연합으로 지리산에 투입된 토벌군. 삶의 터전을 떠날 수 없었던 주민들은 그 틈새에서 방황.
1955년 5월 23일. 남부군 소탕 완료.
그전까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의 주민들. 밤낮으로 지배자가 바뀌는 세상
생존을 위해 불가피했던 선택이 생명과 맞바꾸어 지는 일로 직결. 지리산 주변 주민들이 겪었던 고초.
1949년 9월에서 12월 사이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서 7백 여 주민들이 몰살당한 사건.
좌익 혐의로 덕산 농업 창고에 수용되어 토벌군에게 고문을 당하다가 차례로 총살.
금서면 방곡리 가현부락 청년 40 명 경남 사천군 새동 공동묘지에서 총살.
1951년 '산청 함양 주민 대학살사건' 사망자 수도 파악되지 못한 상태이다.
언제 누가 어떤 이유로 그랬었는지 자세한 사연조차 알 수 없는 사건들.
중군리 구진벌, 군자리 앞산, 시천면 신천국민학교, 경호강변. 중기리 앞 섬진강변 모래밭 등에서 산골주민들이 집단 총살 당한 사건들.
1951. 3. 12. 시천면 외공리 점동부락 뒷산 소정 골짜기에서 500 여명 주민들. 토벌군에 의해서 총살 당한 산골 주민들
남부군에 의해 숨진 주민들 비슷한 숫자였을듯 추정된다.
어느 편일 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혹은 기꺼이, 산으로 들어갔던 주민들.
먼저 산속으로 들어간 남편을 따라서 가장을 따라 산에 올랐던 남은 가족들.
남북간 사상전에 휘말려 죄없이 죽어갔다. 지리산 속을 방황하며 병들거나 굶어 죽고, 토벌군에게 총맞아 죽고, 얼어 죽기도 했다.
'마지막 남부군' 정순덕 여인도 그런 산골마을의 평범한 새색씨. 사상과 이념을 떠나 되새겨 본다.
그녀는 어찌하다 지리산에 입산하게 되었을까? 여자 몸으로 무슨 사연이 있어 남부군이 되었을까? 하여, 그녀의 진술기록을 찾아 그 내용을 소개한다.
......................故 정순덕 여인의 진술기록.................................. 나는 1933년 6월20일(음력) 아버지 정주삼씨와 어머니 진도원씨의 1남4녀 가운데 둘째 딸로 경남 산청군 삼장면 내원리에서 태어났다.
우리 마을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산이 마주 닿는 곳. 해발 800m 하늘아래 첫동네로 9가구가 살던 곳이다. 아버지는 평범한 촌부, 어머니는 전형적인 시골 아낙네.
나 역시 여느 산골 아이들과 다름없이 자랐으나 극심한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선머슴처럼 일했다. 평온했던 우리 마을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것은 내 나이가 열 다섯살 때이던 해인 1949년 부터였다.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말들이 들려오더니만 어느날 반란군들이라는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들은 의외로 거칠거나 험악하게 굴지 않았다. 우리집에서도 밥을 해먹거나 해달라며 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다 그해 봄이던가?
안내원 마을 주민들은 고향을 떠나라는 소개령. 반란군을 소탕한다며 산 아래로 대피하라는 명령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마을 사람들 조상 대대로 살던 동네에서 쫓겨났다. 우리집은 면소재지의 방 한칸에서 살았다. 다행히 그곳 대하리에 고모집이 있었기 때문.
하루 아침에 황망한 꼴을 당한 우리 가족 암소 두마리로 고모네 논을 부치며 살았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1950년 5월 만 16 나이로 결혼했다. 근처 마을에 성씨 집안의 장남 성석조씨가 나의 남편, 그당시 처음 만난 17살 남편에게 시집갈 수 밖에 없었다.
일찍 시집을 가게 된 이유는 단순했다. 넉넉지 못한 살림에 흉년이 3년 겹친 탓. 입이라도 하나 덜어야 할 형편이었기 때문.
남편은 나를 참으로 따뜻이 대해 주었다. 남편은 내가 시집가기 몇해 전 돌림병으로 부모님을 한꺼번에 여의고 농사일을 하면서 3살, 6살, 11살 동생들을 돌보는 외로운 사람.
어른들의 조언도 들을 수 없었던 남편은 어린 나이에 순전히 자신의 판단으로 전쟁 직후 인민군 점령 하에서 몇달 동안 '민족 애국 청년단' 그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며 부역행위를 했다.
이것이 남편뿐 아니라 내 인생을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 인민군은 얼마 못가 철수하고 나자 남편은 빨갱이로 몰렸다. 남편은 당분간 산에 들어가 있어야겠다며 지리산으로 떠났다. 남편이 산으로 들어간 뒤 국군과 경찰이 잇따라 마을로 들어왔다.
그 다음 일어난 일은 불을 보듯 자명했다. "빨갱이 남편을 찾아오라."는 위협과 폭행 시동생들을 맡았던 나는 변명 한번 못했다.
시도 때도 없이 토벌대가 찾아와 총 개머리판과 몽둥이로 어깨가 빠지는 등 온몸에 성한 곳이 없을 만큼 마구 때렸다.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 나는 두려움과 고통을 이길 수 없었다.
1950년 11월 근처에 살던 숙모에게 몸을 피해야겠다고 전한 뒤 약간의 식량을 이고 일주일간 피신했다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남편을 찾아 잠시 몸을 피하려고 들어간 지리산 골짜기에서 13년.
빨치산이란 이름으로 생활을 하게 될 줄은 나 자신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나는 빨치산 부대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얼마 후 취사부에 들어갔다. 거기서 꿈에 그리던 남편을 만났고 입산이 죄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지만 시간이 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날, 1952년 1월 토벌대의 2차 대공세(일명 대성골 천불사건) 지리산에 흩어져 있던 빨치산들이 토벌대 공세에 쫓겨 대성골로 몰려왔다. 토끼몰이 하듯 우리를 몰아넣은 토벌대는 B2 폭격기로 비오듯 포격을 시작
2주간 계속된 공격으로 산속은 온통 불바다 대성골의 빨치산들은 거의 사살되거나 잡혔다.
빨치산은 세번 죽는다는 말이 있다. ‘총맞아 죽고, 굶어 죽고, 얼어 죽는다’
당시 나는 엄동설한에 혼자 바위틈에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일주일 동안 숨어 지내야 했던 극한 상황에서 이 말을 실감했다.
이 공격에서 나는 살아 남았지만 난리통에 헤어졌던 남편은 죽었다. 그 전까지 밥이나 빨래 허드레일을 하거나 환자간호를 하며 지냈다. 그러나 그 후 나는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고 정식 전투원이 되었다.
군경 토벌대와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희생자가 늘었고 빨치산은 위축되었다.
그 와중에 산간지대 주민들도 토벌대에 끌려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또 빨치산 내부에 불만을 품고 토벌대에 자수한 고위 간부들도 있었다. 그들이 토벌대를 데리고 오는 바람에 보급이 끊기고 비트가 기습당했다.
날이 갈수록 운신할 수 있는 폭이 점점 좁아졌다. 정전 이듬해인 1954년 모두 7명 남았던 여자 빨치산. 그 중 한명이 귀순하며 나머지 6명도 신분이 알려졌다.
그후로는 주변의 친척들까지 경찰에 시달렸다. 1954년 말 이은조와 이홍희 나 3인의 여성 빨치산. 이때부터 셋이서 최후의 빨치산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해 추운 겨울을 지리산 속에서 넘기기란 쉽지 않았다. 1955년 한해 동안 전북 장수와 무주 덕유산 기백산 월봉산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살아남기 위해 옮겨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우리가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한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1956년 지리산으로 돌아간 우리는 토벌군 포위망을 뚫지 못하고 고립
식량을 얻기 위해 친척집을 찾고싶어도 친척에게 화가 될까 두려워 갈 수 없었다.
1960년 정부의 통제가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했는데 이때 과거 협조적이던 사람들에게 조금씩 도움 받았다.
하지만, 1961년 겨울 매복 나온 토벌대의 기습으로 총격전 도중에 여자 빨치산 동료였던 이은조를 잃었고 언제 토벌대가 들이닥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 계속됐다.
1963년, 경찰은 우리의 정보원이던 나의 먼친척을 위협하고 회유 11월에 접선할 정보를 알고 치밀한 작전을 세우고 우리를 기다렸다.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그 집에 들렀던 우리는 경찰에게 포위되었다. 동료 이홍희는 사살 당했고 나는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다.
이로써 지리산의 빨치산은 모두 사라졌고 나의 13년 지리산 속에서의 생활도 끝났다. ..............................................................
정순덕 여인의 진술 내용을 읽다가보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누구라도 그녀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비슷한 길을 걸었을 듯. 마지막까지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도망다녔던 남부군들의 최후.
결국, 공산주의에 이용 당하고, 버림 받고, ?捐꽁求鳴? 죽어갔다. 이제는 그 백골들이 진토가 되어 지리산 자락 곳곳에 흩어져 있다. 법일스님은 그 영혼들을 달래려고 대원사를 떠나지 못했던 것 같다.
'국사봉 가는길' 내원골은 남부군 정순덕 여인의 관광 코스. 국사봉은 옛날 봉화를 올렸던 산봉우리를 국사봉이라 불렀다. 마을을 재앙에서 지키려고 신의 거주처를 마련한 것이 국사당.
따라서, 천제단 또는 산신에게 제사지내는 곳이 국사당. 몽골 '오보' 신앙이 한반도에서 산신신앙과 결합한 흔적. 거기에 고대중국 '성황'신앙이 들어와 기능과 명칭이 복합
국사당은 옛부터 속칭 고갯마루 서낭당이라고도 불리워왔다. 국사봉 지명은 원나라에 80년 간 지배받았던 고려 시대 흔적. 국사봉이란 지명은 아직까지도 우리나라 방방곡곡에 남아있다.
산청군은 몽골의 고원과 같아 고대 북방 유목민 풍습이 많다. 산청군 일대는 한반도 고대국가 간에 전란이 빈번했던 격전지. 하여, 국사봉은 마을 재앙이 유난히 많았던 고갯마루를 뜻한다.
'13년간 마지막 남부군 정순덕 여인이 버틴 <내원골>.'
17 살 신랑은 결혼 직후 6.25가 터지자 공산군 수중에서 부역. 국군이 덕산을 탈환하자 그 사실이 두려워 지리산으로 피했고 신혼 새색씨 그녀는 그해 겨울 밤, 남편 찾아 지리산에 들어간다.
그로부터, 16 살 어린 신부에겐 가시밭길 인생 역경이 시작된다. 지리산에서 남편과 함께 지낸지 불과 20 여일 만에 다시 헤어진다. 내원골 안내원 마을엔 그녀가 살았던 집이 옛 모습대로 남아있다.
천왕봉-중봉-써레봉-국사봉-구곡산(961m) = 황금(동남부)능선. 30km 능선의 초원지대가 가을엔 황금빛으로 물들어 붙여진 이름. 덕산 뒷산인 구곡산까지 이어진 써레봉-중봉-천왕봉 구간은 20km.
써레봉은 등산로가 미로와도 같아 길찾기가 어려워 등산객이 드물다. 국사봉은 안내원마을에서 한 시간 거리, 큰 절골, 작은 절골로 나뉜다. 그녀가 태어나 남부군이 되어 붙잡힌 순간까지의 마지막 활동무대이다.
1960년까지 순두류를 거쳐 천왕봉으로 가는 유일한 등산로. 봉화대 역할을 한 남부군 활약무대였고 지휘부대가 있던 곳. 깊은 산중이면서도 민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절묘한 은신처.
1933년 경남 산청군 삼장면 매월리에서 출생한, 정순덕 여인. 1950년 경남 산청군 시천면 출신 17세 성석조씨와 16세에 결혼. 1950년 결혼 직후 6. 25 동란에 공산당에게 남편은 6개월간 부역. 1951년 1.4 후퇴 후 국군이 탈환하자 남편 따라 지리산에 들어감.
1951년∼1953년 지리산 진양군 유격대에 편입(1952년 남편 전사). 1953년 남부군 노영호 부대에 편입하여 거점을 덕유산으로 옮김. 1963년 산청군 내원골에서 국사봉 거점으로 남부군 활동 중 체포. 1963년 11월 체포과정에서 대퇴부에 총을 맞고 한쪽 다리를 절단.
1985년 8월 15일 대구·공주·대전교도소에서 23년간 복역후 가석방. 1988년까지 음성 꽃동네에서 생활하다가.. 자립하기 위해서 나옴. 1995년까지 부산 가죽공장, 서울 가구공장, 구로동 양복걸이 공장. 1995년 비전향 장기수들의 거처인.. 낙성대 ‘ 만남의 집 ’에 정착.
1999년 뇌출혈로 쓰러져 왼쪽 마비. 인천 나사렛 한방병원 치료. 2000년 비전향장기수 1차 송환요구 했으나 당국의 거부로 무산. 2001년 전향 무효 선언하며 2차 송환을 촉구했지만 무산되었다. 2004년 4월 1일 운명후 통일로 길목인 파주 보광사에서 영결식.
정순덕 여인의 비화는 생전처럼 사후에도 지리산의 전설로 남을 듯.. 16세 새색시, 18세 대성골 불바다 속 5일 사투 끝 기적 생존, 72세 타계.
초혼. - 김소월 作.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속에 헤여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심중에 남아 있는 말 한마디는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구나.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붉은 해는 서산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설움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선녀굴.
함양군 휴천면 송전리 뒷산에 위치한 선녀굴 정순덕 여인이 20대 청춘을 숨어살며 보낸 곳. 당시 수색작전에 참여한 분들과 목격자들 증언.
마천, 추성, 송대, 남호, 동강, 문정 주민들 구전.
지리산은 남부지방에서 가장 일찍 첫눈이 내린다. 단풍이 채 가시기도 전에 천왕봉 주위에는 하얀 눈 겨울이 일찌기 찾아오고 봄은 제일 늦게 찾아오는 곳.
'1962년 2월 겨울이 한창이었던 마천 추성골.'
칠선계곡 쪽에서는 천왕봉 아래 희끗희끗 쌓인 눈. 추성리에서 바라보면 겨울이 지나가기엔 아직도 요원 사찰(유격대) 경찰들은 칼빈 소총의 잠금 장치를 한 채 흙으로 채운 마대로 쌓은 토치카 안에서 지루한 하루 하루.
1955년 2월에 이르러 빨치산 세력은 약화되었으나 7월 이후 분산된 빨치산들은 다시 지리산으로 집결 조직을 복구하고, 점차로 활동을 강화하려는 움직임
경찰의 소탕작전은 1955년 후반부터 1956년까지 실시 이 작전으로 55년 조국출판사, 전북도당, 전북의 남원, 정읍군당, 전남 남부 지도부 등의 빨치산 부대들이 소멸.
이현상이가 빗점골에서 사살되고 그 이후 지리산 일대에서 빨치산이 거의 사라졌다 당국이 공식선포한 시기는 1955년 5월 23일.
그러나, 1956년 말까지, 43명의 빨치산들이 활동 1953년 7월 휴전 후 1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활동 당국에서는 경찰서장의 재량으로 사찰 경찰을 임명 향토 방위 또는 빨치산 소탕 작전 때엔 도우미 역할
문영만과 지동식은 이런 사찰 경찰로서 추성리 빨치산 신고 책임을 맡고 있었다. 마천 지서의 지시에 따라 무한정 경계 근무
가끔은 칼빈 소총으로 몰래 사냥을 나가기도 하고, 벌목꾼이나 숯꾼들 불법행위를 눈감아 주고 부수입. 향토 방위대 소집권한도 부여받아 제법 괜찮은 위치.
고사리나 산채를 채취하러 가는 주민들을 빨치산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감시 관솔(소나무 기름이 엉긴 나무) 채취 허가권.
몇년 동안 이렇다 할 전투하나 치루지 못하고 기약 없는 방위 임무만 부여받은 채 하루 하루 어느날 추성골에서 곰을 보았다는 나무꾼의 제보
몇 달 동안 뜸했던 곰 사냥 생각이 간절했다. 꼭 곰이 아니라도 송아지 만한 노루사냥 계획 추성골 석이버섯 전문 채취꾼 허정갑을 안내자
18세의 기골 장대한 허정갑에게는 대나무 죽창 세 사람은 벽송사 뒤쪽 산 능선을 타기 시작했다. 빨치산이 숨을 곳을 없애려 불을 질러 온통 민둥산
약초꾼들이나 나무꾼들이 오르내리던 길목이지만 빨치산들의 출몰 위험 때문에 다져 있지 않은 산길. 정순덕 일행이 언제 집중사격할지 모른다는 강박의식
그들은 선녀굴을 거쳐 독바위 넘어 쑥밭재로 갈 계획. 마천 지서에는 빨치산 수색작전이라고 변명을 할 요량 북서쪽 능선에는 쌓인 눈위에 짐승들의 발자국이 선명
아직도 지리산 어딘가에 숨어 지낸다는 정순덕
눈위의 발자국으로 추적하기에 아주 용이하다는 계산 신출귀몰한 정순덕 여인을 잡거나 사살하면 큰 보상금 평생 행복을 보장받을 만큼 거액이 눈앞에서 오락 가락.
산 능선을 두어 시간을 올랐을 때 개가 발버둥을 치며 낑낑대기 시작. 문영만은 사냥개 목줄을 풀어 주었다.
무엇인가 냄새맡은듯 선녀굴로 달려가는 사냥개 두 사람은 선녀굴을 향해 카빈 총구를 겨냥했다. 6.25 무렵에는 약 2만 빨치산들과 군경찰 토벌대
지리산에서 활개치며 양민들을 참 많이도 괴롭혔다. 젊은이들에게 보급투쟁 명목으로 약탈한 생필품 운반. 공산당 세뇌 교육을 시켜 빨치산 부대로 편입하곤 했다.
빨치산이 가장 많이 출몰하였던 마천 지역
경찰의 힘으론 그네들과 대적하기엔 역부족이어서 마을 청년들로 향토 방위대를 조직해 빨치산과 대적 향토 방위대와 빨치산의 첫전투는 독바위 아래 노장대
총도 제대로 쏠 줄 모르는 향토 방위대 빨치산들은 여러번 마천 지서 습격사건, 면소재지 당벌마을을 습격한 빨치산 공세
함양 빨치산 주요거점은 노장대 신밭골 쑥밭재 산청 빨치산 부대와 정보교환을 할 때는 사립재 주요 지시사항이나 공격목표, 부대사항등 정보교환
특히, 독바위 인근 '천연의 요새' 선녀굴을 위시해서, 노장대 마을 위쪽 박쥐굴, 금낭굴, 상대굴 등 은신처. 눈비 또는 한겨울 칼바람을 피하기엔 아주 적당한 장소
많은 빨치산들이 살다시피 했던 곳이 선녀굴 근처
갑자기 개짖는 소리가 골짜기를 가득 메웠다. 이어 고막을 찢어낼 듯한 총소리가 천지를 진동 총소리와 함께 개짖는 소리도 동시에 뚝 끊어졌다.
세 사람의 이마에서 땀이 송송 맺혀지기 시작했다. 그 칼빈 총소리는 분명 공비의 소행이라 확신한 탓. 잠시후 선녀굴 가파른 바위위에 물체가 어른거렸다.
문영만과 지동식의 카빈 총구에서 불을 뿜었다. 바위 위 검은 물체가 아?≤各막? 굴러 떨어졌다. 나무 사이에서 어른거린 물체는 분명 사람 같았다.
선녀굴 바위에 총알이 튀며 불꽃이 팽팽 돌았다. 안내자인 허정갑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세 사람의 등에서는 김이 모락 모락 피어 올랐다.
엎드려 쏴 자세로 약 30분이 시간이 흘러갔다. 누구인가 총맞고 바위 아래로 굴러 떨어졌는데 선녀굴 방향으로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겁이 났다.
짙은 산그림자가 조금씩 아래로 흘러내렸다. 주변에서는 억새와 싸릿대를 스치는 바람소리. 공비들이 자리를 옮겨 공격할 것만 같은 불안감
세 사람은 선녀굴 반대쪽으로 미끄러지듯 도망쳤다. 산죽 비트에서 총알이 날아올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몇년 간 조용했던 선녀굴의 인근에서 요란한 총소리 우남마을, 세동마을, 송대마을 추성마을, 광아리 마을 등지에서는 주민들이 불안감에 몸들 바를 모르고 있었다.
선녀굴로부터 약 2km 아래에 위치한 송대 마을 집집마다 문을 걸어 잠근 채 알수 없는 불안감 그날 문영만과 지동식은 공비사살 사실을 신고.
이미 날은 저물었기에 다음날 새벽에 비상 총출동 선녀굴 주변지역 수색작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1924년 가족 생계를 맡았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연루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죽자, 그 이후부터 경제적으로 빈곤 여관이나 친구들의 하숙방을 전전하며 무절제한 방랑 생활
1925년말 공부하러 일본으로 갔다가 1926년 귀국 그해 8월 26일 급성 폐렴으로 24세의 나이로 요절.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고, 백조 동인들이 묘비. ...........................................................................
김소월은 나도향과 동갑나기 친구. 김소월 역시 32세 한창 나이에 운명.
아편을 복용하고 음독 자살한 김소월.
조국을 위해 쓸모가 없어졌다는 자괴감. 기생이 몸팔듯 주색에 자신을 던져버린다. 자학과 자괴감에 빠져든 대표적인 지성인들.
'기생의 품속에 안겨 한과 울분을 토로.'
팔도강산에 봄이 오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꽃. 일제에 빼앗긴 산과 들에서도 봄을 알리던 꽃 추운 겨울을 이겨낸 서민들에게 희망을 주던 꽃.
'진달래꽃은 절제, 청렴, 민족혼의 상징.'
연인 간에 나눠먹으면 바람기가 사라진다는 진달래꽃. 한방 또는 민간요법에서 강장,이뇨,건위 등에 쓰인다. 한반도 민족혼을 뜻하는 김소월 시인의 민족시 진달래꽃.
..................<진달래 꽃> 詩에 얽힌 이야기....................... 수많은 연인들의 심금을 울린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 김소월(1902 8.30∼1934)은 32세의 짧은 삶을 살다간 시인. 동경상대에 재학 중 관동 대진재으로 중퇴 후 귀국한 인테리.
김소월이 작품 활동을 하던 1920년대는 3.1운동의 실패 그 영향으로 일제 치하에서 맛본 민족적 분노와 비통함 시의 주제는 저항과 좌절, 의지와 허탈, 분노와 패배감
그 뒤엉킨 감정을 극복하기보다 그것에 휩쓸려가는 풍조 감상적이고 염세적인 사고방식이 퇴폐로 빠져 들던 시기. 피지배층 식민지 민족의 한과 슬픔까지 미학으로 추구한다.
일제 치하에서는 이상주의가 불가능해 지식인들은 좌절. 민족적인 전통이 일제 강요에 의해 단절되고 역사가 전도 삶의 목표와 질서가 무너진 그는 설흔 둘 젊은 나이에 운명.
관동대지진 발생 혼란기에 학업 중퇴하고 귀국. 1924년 조부 광산 일을 도왔으나 광산업이 실패, 가세가 크게 기울자 처가가 있던 구성군으로 이사
구성군 남시에서 동아일보지국 개설후 경영(1926) 실패, 1930년대 작품활동 등한시 생에 대한 의욕을 잃기 시작. 1934년 12월 24일 8시에 고향 곽산에서 아편 음독 자살.
평북 정주 곽산 남산리에서 출생 처절한 애수를 담고 있는 소월의 시. 그 처절한 애수는 어디에서 비롯된걸까?
'김소월은 진달래꽃 주술같은 사랑을 했던듯.'
1920년 '낭인(浪人)의 봄.'으로 문단데뷔 후 1922년 '진달래꽃' 1923년 민족 혼이 담긴 시를 발표한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1924년 오랜 방황 끝에 연변에서 채란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김소월의 '주옥같은 시'를 보면 채란과 깊은 관계.'
못잊어 생각나겠지요.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불멸의 시 작품들. 1925년 처가집 구산군 서산으로 이사 후 발표 作- 꽃촛불 켜는 밤, 옛 임을 따라가다가 꿈깨어 탄식함이라, 무언, 대표작은 <진달래꽃>
'김소월은 채란과 헤어진 후 죽도록 못잊은 듯..'
채란은 진주 권번사에서 손꼽는 미모의 여류시인이자 기생.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가 집을 나가 편모 슬하에서 자란 채란. 13살 때 편모가 개가밑천을 장만하려고 전라도 행상에게 판다.
채란은 팔도강산, 홍콩, 따이렌, 텐진을 떠돌다 연변에서 소월을 만나 사랑을 나눈 것으로 추정. 소월이 주옥 같은 시를 쏟아낼 만큼, 깊은 관계.
채란은 김소월 시인의 '불멸의 시' <진달래꽃>의 여주인공. 한반도는 물론 중국까지 진달래꽃이 피는 곳마다 방황한 채란. 바라만 보아도 곱지만 하도 흔해 손쉽게 꺽을 수 있는 진달래꽃.
온몸으로 님을 반기듯 봄바람 타고 피어나 꺽여버리기도 하는 꽃. 채란은 진달래꽃 같은 신세라 그 꽃을 보며 고향을 그리워했을 듯. 그녀는 객지를 떠돌듯 남자의 품속을 돌며 주옥같은 시를 토해낸다.
진주권번 들병이(삼패기생) 뿌리 없는 몸으로 팔려 다닌 신세. 춤과 노래를 익히고, 고향이 그리울 때면 시로 마음을 달랜 듯.
조국을 잃어 버린 소월과 들병이 신세 채란의 만남. 서로 신세를 한탄하며 자학하듯 사랑에 빠진 두 사람. 당시 소월의 시 속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나타나 있다.
첫날에 길동무 만나기 쉬운가. 가다가 만나서 길동무 되지요.
날글다 말아라. 家長 님만 님이랴. 오다 가다 만나도 정들면 님.'
진주기녀 채란이 고향을 생각하며 처연히 불렀던 <팔베개 노래>. 김소월이 그 노래를 듣고 기록한 민요시라고 지금까지 알려졌다. 김소월의 불멸의 작 <진달래꽃>에는 채란의 심경도 잘 담겨있다.
님은 먼곳에..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
마음 주고 눈물 주고 꿈도 주고 멀어져갔네
님은 먼 곳에 영원히 먼곳에 망설이다가 님은 먼곳에. ♬
노래 : 김추자. 조관우. 장사익.
채란은 몸 파는 기생이라 김소월을 사랑하면서도 붙잡지 못한 듯. 빼앗긴 조국 팔도강산에도 봄이 오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진달래꽃. <진달래 꽃> 시는 김소월을 민족시인이라 부르게 했던 불멸의 명작. ................................................................................................
詩.
진달래 꽃.
........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 영변의 약산 진달래꽃 ...........................................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사랑하는 님을 멀리 떠나보내야 할 때, 그 가슴 아픈 마음. 이미 내 곁에서 떠났어도 현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마음. 그래서, 떠나가는 님이 언젠가 다시 돌아오기를 기대하는 마음.
님이 가시는 무릎 걸음마다 진달래꽃을 뿌리며 고이 보내는 마음. 다시 돌아올 것을 믿고 싶기에, 울고 싶어도 죽어도 아니 우는 마음. 김소월 詩人의 가슴 속에서도 님과 피맺힌 이별은 '한'이 되었나 보다.
이곳 유평리 대원사에서부터 노고단 문수골까지 반란의 역사로 숨진 2만 여명의 토벌군과 남부군. 이 詩로 이곳 못 다한 삶의 진혼들을 위로해 본다.
2004. 10.10. 법일스님 100 주년 탄신 추모제에 즈음하여 2004년 4 월 1일 생을 마감한 정순덕 여인 혼도 달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