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8월 14일부터 8월 18일까지 4박 5일 동안은 프란치스코 교황성하가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하는 기간이었다.
이를 환영하기 위한 준비는 서울 대교구를 중심으로 각 지방 교구가 세부적인 계획을 세워 추진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경호에 있어서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 안전한 가운데 성대한 시복식이 거행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서울과 지방에 있는 각 성당들도 프란치스코 교황성하를 성대하게 영접할 마음의 준비를 하느라 분주할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또한 프란치스코 교황성하와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도 대한민국에서 이루어질 것이고 아시아 청년대회까지 개최되어 세계의 이목이 동방의 고요한 나라 대한민국에 스포트라이트되리라 생각을 하니 한편으로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뿌듯하기도 하였다.
전국 각 성당에서 추천된 가톨릭 신자들이 시복식 참가자로 광화문에 모여서 프란치스코 교황성하를 열렬히 환영하고 순교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릴 것이라 생각을 하니 서울 포이동 성당 소속의 미미한 신자의 한 사람으로서 광화문 시복식에 운집한 교우들과 주님을 뵙고 교황성하를 가슴속 깊이 모실 수 있다는 기대감에 벌써부터 잠이 달아나는 듯하였다.
이러한 기쁨을 나 혼자만 간직할 수가 없어서 고민하고 생각하다가 순교자의 고귀한 사상을 주변에 널리 알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생각한 것이 전국 성지 순례였는데 교황성하의 한국 방문 이전까지는 무사히 마쳐야겠다고 생각을 하고 2012년 하순부터 시작을 하였으나 많은 우여곡절 끝에 2014년 3월에 가서야 겨우 마칠 수 있었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도곡동 성당에 다니는 이명순 자매형제님의 격려와 끝까지 행동을 같이 하려는 동지애 적 우정이 없었더라면 성지순례는 도중에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새벽 4시여서 사진이 정확하게 나오질 않았고
약간 흐릿한 모습이다.
제주도 대정읍 정 난주마리아 묘를 참배하고 곧바로 김대건신부가 중국 상하이에서 고국으로 돌아오는 중에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하였다는 한경면 용수리 성지 기념관을 찾아 관람하였을 때는 눈물이 앞을 가려 한동안 주저앉고 싶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하였다.
눈물을 흐르도록 하였던 것은 바로 라파엘 호라는 작은 목선 때문이었는데 라파엘 호는 김대건 신부가 당시 중국에서 머물던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 올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기 위하여 1845년 4월30일 신자 11명과 함께 상하이까지 타고 갔다 왔던 배였다.
양재역에서 첫 기차를 기다리며
배라고 해야 널빤지를 나무못으로 박아 배의 모형을 갖춘 전형적인 한국 목선으로 길이는 45자(13.5m) 폭 16척(4.8m) 깊이 7자(2.1m)의 27t 규모의 작은 배였다.
이러한 배를 타고 고국에 입국하려고 상하이에서 충청도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서해 바다가운데서 목선에 의지한 채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를 하였을 것이라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지 않을 수 없었다.
용수리 성지를 돌아보고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와산 남길 41번지에 있는 조이빌리조트 숙소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날 추자도로 건너가기로 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찍이 식사를 마치고 제주항으로 출발하였으나 날씨가 고르지 못한 관계로 추자도로 과연 들어갈 수 있을 것인지가 걱정이 되기 시작하였다.
포이동성당 신자들이 후미를 기다리며
호흡조절을 하고 있다.
추자도로 들어가려 하였던 것은 황사영 알렉산드르와 정 난주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던 아들 황경한의 무덤을 찾아 참배하기 위해서였다.
황사영은 조선시대 과거인 소과 진사과에 합격할 정도로 당시 미래가 촉망된 인재였다.
황사영은 정약용의 맏형인 정약현의 딸 정 난주마리아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황사영백서사건으로 본인은 서소문밖에서 능지처참당하고 가정은 풍비박산당하고 말았다.
입장권과 신분증을 대조하고 치밀한 확인 후에서야 시복식
광장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모친 이윤혜는 거제도로 유배되었고, 부인인 정 난주마리아는 제주도 대정 현에, 아들 경한(2세)은 당시 전라도 영광군 추자도에 버려지고 말았다.
눈물을 흘리며 추자도에다 어린 두 살배기 황 경한을 떠밀다시피 할 수밖에 없었던 정 난주마리아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놓칠 수가 없어 우리 일행은 추자도로 들어가려하였는데 들어가는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추자도로 들어가는 길은 목포와 제주도 등 여러 경로가 있었으나 제주도에서 들어가는 길이 가장 편하고 빠른 시간 내에 다녀올 수 있는 코스였다.
추자도로 가기 전날 제주도는 비바람이 몹시 몰아치면서 태풍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전국 성지순례의 일환으로 추자도를 다녀와야 하겠는데 태풍이 밤새 가라앉지를 않아서 친구인 이명순 자매형제님과 우리부부 일행 4명은 걱정이 태산 같았다.
이순신장군이 칼을 세워 거머쥐고 있는 것이 언제라도 지휘할듯 보였다.
이순신장군의 늠름한 동상이 바로 옆에있어서
정신적으로 많은 안정이 되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일기를 살펴보니 천만다행으로 날씨가 점점 개고 바람이 많이 줄어들고 있었다.
추자도에서 1박을 소일하기에는 시간적으로 무료할 것 같았고 오전에 추자도에 들어갔다가 황 경한 묘를 참배하고 오후에 다시 제주도로 돌아와도 시간적 여유가 충분할 것이라는 매표소 안내원의 말을 듣고 예매를 하려하였으나 아직은 출항 허가가 결정되지 않았으니 조금 기다려 보라는 안내원의 답변이었다.
세종대왕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셨다.
대합실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 보니 항만청의 출항 허가가 결정된 것 같았다.
다행히 추자도행 쾌속선이 출항하여 승선할 수 있었으나 제주도와 추자도 사이 망망대해는 아직도 태풍의 여파가 남아 있어 집체만한 파도가 여전히 넘실거리고 있었다.
추자도로 질주하는 쾌속선이 상하좌우로 흔들리면서 앞으로 나가기는 하였으나 마음은 불안하고 무겁기만 하였다.
쾌속선은 마치 바다 가운데 떠있는 조각배처럼 흔들리고 있었으며 터키 케코바의 수중도시를 구경하기 위하여 지중해를 가로지를 때의 파도로 몸을 내맡길 수밖에 없었던 유람선처럼 추자도로 들어가는 쾌속선을 승선한 우리 일행도 파도에 몸을 내맡긴 채 운명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김대건신부가 탔던 라파엘 호가 서해 바다가운데서 풍랑을 만나 흔들렸던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 일행들에게도 고통을 체험하여보도록 주님께서 시험하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차츰 파도는 더욱 거세지기 시작하더니 쾌속선은 롤러코스터처럼 끝없이 하늘로 올라갔다가 갑자기 떨어지기도 하여 공포를 자아내게 하였으며 가슴을 조여 오는 느낌은 심장을 오그라들게 하였다.
김대건 신부가 본래 중국 상하이에서 출발하여 충청도로 귀국하려하였지만 풍랑 때문에 충청도로 귀국하지 못하고 제주도 한경면 용수리에 표착하였다는 말이 이제야 실감나기도 하였다.
추자도에 있는 황 경한 묘를 참배하고 곧바로 서울로 귀경하여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 책자의 검인 란을 들여다보았더니 아직도 절반정도는 도장이 찍히지 않은 채 빈 공난으로 남아 있었다.
경과보고는 아니었지만 여 진천신부님의 전국 성지순례 축복을 위한 기도와 격려 한마디를 듣고 싶어서 친구 형제자매님과 우리부부 4명이 충북 제천시에 있는 배론 성지를 찾았다.
배론 성지에 계시는 여 진천신부님은 일간지를 통해서 조금 알고는 있었을 뿐 평소에 일면식도 없었다.
친구 자매님의 주선으로 어느 날 가자기 찾아가 뵈었는데 미리 주차장까지 나와서 기다리고 계셨다.
얼굴 모습은 어린 아이의 얼굴처럼 천진난만하였고 사심과 욕심이란 없어 보여서 천사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배론 성지를 중심으로 한 주변을 개발하고 발굴을 통한 학문적 연구 결과를 영상으로 남겨 두려하는 열정은 어느 성지의 신부님들 보다 더 강한 추진력과 의욕을 가지고 있었으며 가슴이 열리고 따뜻한 신부님이라는 것을 감성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사제관을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사제관은 늘 곁에 있었지만 경외심이 발걸음을 멈추게 하였고 필시 베일에 감추어져 있는 신성한 곳일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항상 주변에서만 맴돌곤 하였다.
그런데 여 진천신부님은 주저하지 않고 우리 일행을 사제관으로 안내하였다.
사제관은 검소하고 소박하였으며 각종 가톨릭 관련 서적이 책꽂이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책상위에는 컴퓨터와 프린터기가 놓여 있었으며 책장 사이사이에는 수석들이 빛을 발산하고 있어서 여 진천신부님의 깔끔한 성품과 인격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식사를 준비 중이셨던 자매님이 문을 열고 식사가 준비되었음을 알려왔다.
여 진천신부님은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하였다.
식당 식탁위에는 어느 식당의 메뉴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의 음식이 깔끔하고 정갈하게 놓아져 있었다.
우리 일행은 깜짝 놀라 약간 주저하였으나 신부님은 부드럽게 손을 잡고 식당 안으로 우리 일행을 안내하였다.
식사를 하면서 신부님은 전국 성지를 순례하면서 느꼈던 점을 묻기도 하고 자신이 순례하였을 당시의 어려웠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전국의 성지 순례를 절반정도 남겨두고 있는 상태였지만 여 진천신부님의 격려와 고생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성지 순례과정에서 어려웠던 순간들은 눈이 녹아 흘러내리듯 사그라졌고 새로운 용기가 샘솟듯 용솟음치기 시작하여 전국의 성지 순례를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다.
이러한 전국 성지 순례가 밑거름이 되어 더욱 주님 앞으로 다가 설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성하가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건강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한국 순교자들을 어루만지고 위무하여 지하에서도 기쁨을 맛볼 수 있도록 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흔드시는 교황성하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이 평화의 사도로서 베드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종이 되는 큰 성과를 거두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였고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에게도 기쁨을 안겨주어 평화로운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갈수록 인간미가 각박해지고 재물만을 탐하는 사회로 변해가고 있는 작금이 때로는 우려스럽기도 하였고 사회가 변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현실에 묻혀서 그대로 잊혀져가는 것을 보고 때로는 이상스럽게 생각하여보기도 하였다.
재물을 많이 소유하는 것이 인생 최고의 행복이라 생각하는 세상 안에서 사랑과 나눔 안에 진정한 삶의 기쁨과 행복이 있음을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성하의 한국 방문을 계기로 증거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이러한 사랑의 나눔을 실천하기 위하여 우리 본당인 포이동 성당 구요기 욥 주임신부님과 박준병 암브로시오 보좌신부님 그리고 이 체칠리아, 김 마리아, 심 카타리나 수녀님들과 전 신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단체별로 프린치스코 교황성하를 위한 고리기도에 지향하는 모습들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기도 하였다.
2014년 8월 14일(수) 갑자기 친구들 모임이 주선되어 경기도 불암산을 다녀왔다.
집에서 출발할 무렵에는 비가 오지 않았으나 4호선 당고개에 도착하였을 때는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하필이면 교황성하가 방문하는 기간 동안에 비가 내리는가 하는 생각 때문에 불암산을 오르는 시간 내내 불안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자생한 가톨릭교 신자들이 중국 북경 교구에 있는 주교를 초청하기도 하고 스스로 중국 북경을 찾아가 세례를 받으려 하다가 신분질서와 조상대대로 내려온 제사의식을 무너뜨리려 한다는 이유로 당국의 갖은 박해와 고문을 받아 많은 순교자들을 낼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미쳐 성인 반열에 오르지 못하였던 124위 순교자들이 비로소 시복미사를 통하여 성인 반열에 오른다고 하니 로마에서 순교한 신자들만큼이나 자긍심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시복식으로 세상에 드러난 124위 순교자들이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려 고인 물이 하느님도 감화되어 비로 뿌리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비가 주룩주룩 더 내려 그들의 답답하였던 가슴을 후련하게 소통시켜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황성하가 한국을 방문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한국에서 스스로 자생한 가톨릭을 교황청에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한국의 미래가 불확실하고 소위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언행을 신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둡고 방황하는 한국의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도덕성을 일깨우고 정직을 강조하려는데 있었으리라 생각이 들어 더욱 프란치스코 교황을 환영하고 싶어졌다.
2014. 7. 6일 교중 미사시간 말미에 신부님은 오늘 특별히 수고한 3구역 임원들을 앞으로 불러들였다.
그들을 바라보니 미리 약속이나 한 듯 갈색 혹은 흰색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으며 목에는 갈색 스카풀라를 걸치고 있었다.
신부님은 앞에 서있는 봉사자들의 노고에 감사를 표명하고 옷 복장을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니 평소에 열심히 성당 일에 봉사하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고 성당 일이라면 누구보다 더 앞장서서 자기희생적 소임을 충실히 하였던 열성 신자들이었다.
그들이 입었던 옷 복장은 프란치스코 교황성하의 한국 방문을 열렬히 환영한다는 의미의 발현인 듯 너도나도 스카풀라와 티셔츠를 성물 방에서 구입하기 위하여 경쟁을 하는 모습이 눈에 뛰기도 하였다.
선의의 경쟁을 유발하여 신앙심을 이웃으로 확산시켜보려 한 그들의 진심어린 종교관을 바라보고 많은 감명을 받았으며 이러한 현상은 비단 포이동 성당에서뿐만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미천하나마 마음을 환기시키고 프란치스코 교황성하 환영인파에 휩쓸리면서 열렬히 환영을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티셔츠와 스카풀라를 구입하였다.
평소에 존경하였던 프란치스코 교황성하의 모습을 가톨릭 신자들의 먼 뒷발치에서나마 바라보고 환영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여 오던 차에 여성 6구역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혹시 프란치스코 교황성하 한국 방문 시 광화문 시복식에 나갈 의사가 없느냐고 의사를 타진하여 왔다.
평소에 나는 임원들의 열성적인 교회활동에 비하여 발뒤꿈치도 따를 수 없는 냉담적인 신자였던 탓에 전혀 기대를 하지 않았다.
여성 6구역장의 갑작스런 참석 여부 의사 타진에 한동안 답변을 못하고 있다가 내가 과연 교황성하의 한국 방문 환영 행사에 참가할 수 있는 자격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한참 주저하다가 내가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성하의 모습을 이번 한국 방문 때 지근거리에서 뵐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면 이러한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어 저에게까지 기회를 주신 데 대하여 감사하다면서 기쁜 마음으로 고마움을 받아들였다.
구요기 욥 주임신부님 앞에 서있는 봉사자들을 다시 한 번 바라보니 프란치스코 교황성하가 광화문에서 직접 우리나라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를 포함하여 동료순교자 123위' 시복식을 집전하는 2014. 8. 16(토)일 10시 당일 행사 모습이 드라마처럼 선명하게 머리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2014년 8월 16일 10시에 교황성하가 광화문 광장에서 식복식을 집전한다는 그 날이 드디어 다가왔다.
12시간 거리의 로마에서 비행기로 대한민국까지 찾아왔는데 새벽 04:30분인들 일어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다음날(2014.8.16일) 새벽에 일어나지 못할 까봐 일찍 취침에 들어갔다.
그러나 일찍 잠을 청한다고 잠이 들 리 없었다.
밤새 이리 뒹굴고 뒤적이다가 잠깐 눈을 떠보니 새벽 3시 5분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세수를 하고 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나 새벽 3시 40분이 순식간에 지난 것을 보고 서둘러 집을 나서야겠다고 생각하였다.
언남 중학교 옆 파리바게뜨 앞 버스승강장에 도착하니 이미 수녀님이랑 일부 시복식 참석자들이 나와 있어서 그들과 합류하여 양재역으로 갈 수 있었다.
양재역의 3호선 첫 지하철 기차가 04:30분이어서 10여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인근 성당에서 시복식에 참석하려는 사람들로 점점 북적이기 시작하였다.
종로 3가역에서 하차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로까지 빠져나오기는 하였으나 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가 되어 시간이 지체되는 것을 보고 전쟁과 같은 국가 비상시에는 대책이 없을 것 같아 보이기도 하였다.
포이동 성당 소속 일행은 다시 종로3가역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걸어가야 하였다.
소지품 검사를 하고 9번 게이트를 통과하니 포이동 성당 참석자들이 일부 착석하고 있어서 그 옆에 앉을 수 있었는데 시간은 대략 04:50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성하가 광화문광장에 입장하는 시간은 대략 10:00로 예상되어 있어서 꼬박 5시간은 앉아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본래 기상청의 발표대로라면 2014. 8. 16일은 비가 와야 하였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혜인지 다행이도 하늘은 구름이 약간 오락가락하였을 뿐 더위도 별로 없을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광화문 광장은 입추의 여지없이 많은 신자들로 가득하였지만 누구 한 사람 그릇된 언행을 하거나 불쾌하게 구는 사람도 없었다.
서울 대교구 뿐 아니라 지방에서 올라온 성당 소속 신자들도 속속 광장에 도착하여 그룹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광장의 열기는 점점 뜨거워지고 축제장을 방불케 하였다.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 미사가 끝나고
광화문에서 종로로 가는길은 인적이 드물어
시원스럽기만하다.
시간은 거의 10:00시가 되어갔다.
하늘에서는 헬리콥터가 선회하고 있었고 전광판에서는 프란치스코 교화성하의 서소문 참배상황을 방영하고 있었다.
얼마가지 않아 광장이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멀리서 기아차 쏘올인지 싼타페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오픈을 한 무개차 위에 서서 손을 흔드는 프란치스코 교황성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교황성하를 호위하는 경호원들의 건장한 체구를 보고 안도의 숨을 몰아쉬기도 하였다.
상당히 빠른 속도로 교황성하가 탄 무개차가 이동하고 있었지만 교황성하를 엄호하는 경호원은 지친 표정이 전혀 없어 보였다.
무개차 위에 서서 손을 흔드는 교황성하의 모습이 너무 인자하고 평화로웠으며 사회 빈부를 떠나 모든 사람들을 아우르는 듯한 표정은 하느님의 모습과도 흡사하리라 생각하였다.
장미 한 송이를 바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교황성하의 사진을 찍어보기 위하여 발뒤꿈치를 치켜세운 채 스마트폰을 들어 올려보기도 하고 좋은 장소를 물색하여도 보았지만 그것은 나의 욕심처럼 느껴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성하가 지나가고 난 후의 시공은 너무 쓸쓸하고 공허하기만 하였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성하가 우리에게 남기려한 메시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어보았으나 어려푸시 머리에 스쳐지나가는 것은 사랑이라는 단어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성하는 지금까지의 교황 중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었다.
그 이유는 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과 함께하려는 의지가 유독 강하였을 뿐 아니라 소외받는 자들을 찾아가 기도를 하는 모습이 가끔 일간지에 오르내렸기 때문이었다.
교황은 일반적으로 사도들의 우두머리였던 성 베드로의 계승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교황은 로마의 주교이면서 신앙과 도덕적인 분야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사제들에 대한 사법권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내가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소외받고 가난한 자들은 화려하고 미사여구의 달콤한 말 한마디보다는 실질적인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을 많이 느끼곤 하였다.
기본적인 생활에도 미치지 못한 불 안정된 생활과 자괴감에 빠진 자신의 무력한 인생 역경을 한탄하면서 외로움과 고독감에서 헤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마음 한 곳에 자리 잡은 도덕적인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이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삶의 의지조차도 상실된 체 인생을 이미 체념하였다는 듯 눈의 초점을 잃고 먼 곳만 마냥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때는 인생이란 과연 무엇일까? 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정부의 지원을 받은 사회보장 단체나 민간인들로 구성된 시민단체들이 가난하고 소외받는 자들의 생활을 샅샅이 조사하여 보살피고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으나 도덕적으로 그들을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가톨릭 선교 삼매에 빠져있는
6구역 신자들
그런데 갑자기 혜성과 같이 교황청에 등장한 신임 프란치스코 교황성하가 세계 정치인들이나 사제들에게 던지는 도덕적 메시지는 종교인이면 누구에게나 한번쯤 자신을 뒤돌아볼 수 있게 하였고 정치인들에게는 큰 파문을 일으켜 심금을 울리게 하였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사제와 주교시절 검소함의 모범을 보였던 때와 마찬가지로 교황청에서도 소탈한 생활을 지속함으로서 부정적인 교황청의 이미지를 개선하여 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교황성하의 신선한 행동 하나하나가 세계인들의 가슴속에 깊이 각인되어 관심의 초점으로 부상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황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진정한 종교인의 모습을 발견하면서부터 세계인의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게 되었으며 프란치스코 교황성하의 검소한 생활이 종교인의 표상처럼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등장으로 가톨릭교회는 지금까지 상상도 못하였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약간 늦은 감은 있었으나 상명하복식의 중앙집권체제에서 신자 중심의 민주주의 체제로 변화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서울대교구 포이동성당
가난하고 소외받는 자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며 삶의 용기를 불러일으켜주는 프란치스코 교황성하를 바라보고 만시지탄 하였으나 가톨릭교 본연의 보편적 교리에 충실하려는 참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후련하였고 태양의 햇살 아래 하느님이 하강하는 것처럼 진한 감동이 온몸을 짜릿하게 하였다.
주교시절부터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생활하여 온 것이 몸에 베였던 프란치스코 교황성하는 교황 직에 선출되면서 곧바로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떠올렸다고 하였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신의 세례명을 프란치스코로 결정하였다고 하는 말을 듣고 정말 교회가 보편적 사랑을 실천하는 본연의 교회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혹이 들기도 하였으나 프란치스코 교황성하의 실천적인 어록이나 행동에서 나타난 강력한 메시지들로 미루어보아 교회를 확실히 변화시켜나갈 수 있을 것이라 확신이 들기도 하였다.
프라치스코 교황은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에 대하여 “당시 사람들의 사치와 교만, 허영심 그리고 교회의 권력에 반대되는 가난의 개념을 기독교에 도입하였다”고 설명하면서 “그는 역사를 바꾸었다”라고 평가하였다는 글을 읽었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하였다.
프란체스코 교황 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잠시도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아 한 때 종교서적을 뒤지기도 하였던 기억이 생각나기도 하였다.
이탈리아 아시시 부호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젊은 시절 방탕한 삶을 살다가 회개하여 수도회를 만들었고 청빈한 삶을 살아갔다고 하였다.
그가 묻힌 성당을 자신의 이름인 프리치스코를 따서 성 프란치스코 성당이라고 명명하였다는 말을 듣고 이탈리아 아시시에 있는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고조되기도 하였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아직까지 이탈리아 아시시 지방을 가본 적은 없었으나 성인이 탄생한 지역이라는 자긍심은 주민들 사이에 팽배해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어 꼭 한번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또한 성 프란치스코의 일대기를 영화한 것이 있다고 하여 그 내용을 찾아보았더니 많은 감명을 주었을 뿐 아니라 교회의 묵은 종교적 해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반면거울로 삼아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프라치스코 교황성하가 아르헨티나에서 오랜 성직생활을 하면서 실감하고 경험하였던 것들을 토대로 하여 실추된 교회 본래의 이미지를 복원하려는 행동들을 보고 그분은 분명 가슴이 열려있고 따뜻한 분일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도덕과 정의를 바로 세우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는 것을 보고 진정한 종교인이라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으며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말처럼 프린치스코 교황성하의 개혁은 반드시 성공하리라 생각이 들었다.
가톨릭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인류의 정신적 도덕성을 성숙하게 한 세계적인 종교였다.
로마제국시대는 로마 왕의 신성성을 거부한다는 이유로 한때 핍박을 받아 존폐의 기로에 서기도 하였으나 오뚝이처럼 일어서기도 하였다.
중세 때는 종교 재판소를 설치하여 많은 지식인들을 이단자로 파문하여 도덕성을 실추시킨 적도 있었다.
면죄부를 판매하여 성서주의를 혼란에 빠뜨리는 등 교회의 타락 성을 일부 찾아볼 수 있었으나 베드로 대성당을 수축하려는 대명제를 실행하기 위한 것 때문에 강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교회의 갈등을 부추기는 요인이 되어 종교 개혁을 유발하게 한 것은 가톨릭교회의 큰 손실이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하였다.
성지 예루살렘을 회복한다는 명제아래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 이슬람 국가들을 능멸하고 일시적인 경제적 탐욕에 눈이 가렸던 적도 있었다.
이러한 경제적 탐욕 때문에 발생한 종교적 갈등과 일부 성직자들의 타락은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교회의 타락을 극복하고 성직자의 비리를 바로잡으려 노력하였던 교황들도 있기는 하였으나 그 병폐의 뿌리를 뽑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선교중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신자들 자신만만하며
미소를 짓고 있다.
기존의 제도를 고수하려는 몇몇 종교 지도자들의 보수적인 성향 때문에 그때마다 벽에 부딪혀 교회 개혁은 실현되지를 못하였다.
이러한 교황청 내부의 비리를 개혁하여나가지 못하고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그릇된 인식을 개선하여나기지 못한다면 교회는 위선적인 종교로 추락되어 대중들로부터 영영 외면당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프린치스코 교황성하가 교황 직에 선출되어 교황청 내부의 반발에도 개의치 않고 성직자들의 종교관을 개혁하여 나가시는 것을 보고 존경하는 마음이 더욱 굳어가기 시작하였다.
서로마제국 황제로 대관되었던 프랑크왕국 카롤링거왕조 샤를마뉴대제는 영토를 세 아들에게 분봉하여 다스리게 하였는데 이것이 동 프랑크(독일), 서 프랑크(프랑스), 중부 프랑크(이탈리아)로 분리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드비히 4세가 죽자 프랑크왕국의 혈통이 끊긴 동 프랑크(독일)는 왕권이 갈수록 유명무실하여졌으며 오히려 지방 제후의 세력이 왕권을 능가할 정도였다.
왕이 없었던 대공위시기에 독일 황제의 선거권을 가졌던 일곱 사람의 제후가 작센지방의 하인리히 1세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하인리히 1세는 얼마가지 못하여 죽고 그의 아들 오토를 황제로 옹립하였다.
이때의 동 프랑크(독일)왕을 오토1세라 하였으며 이때부터의 독일을 제1제국 또는 신성로마제국이라 하였다.
오토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등극할 무렵의 중부 프랑크(이탈리아) 아시시 어느 을씨년스러운 새벽에 초죽음이 되다시피 한 한 청년이 마을에 도착하였다.
그는 마을의 거부 베르나르도네(Pietro Di Bernardone: 리 몬타귀 분)의 아들 프란치스코(Francesco: 그레이험 폴크너 분)로 전쟁터에 출정했다가 그 참혹함에 충격을 받고 목숨만 부지한 채 명예롭지 못한 제대를 하게 되었다.
예전의 그는 또래 청년들과 어울려 젊은이 특유의 자신만만한 행각을 일삼았던 유복한 가정의 철부지였으나 귀향 후에는 부모의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악몽에 시달리다가 기괴한 행동만을 계속하였다.
들판을 헤매는가하면 종달새를 쫓아 지붕 위를 거닐고, 심지어는 공장 노동자들의 궁핍한 생활을 동정하여 집안의 각종 진귀한 물건들을 그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였다.
이에 진노한 베르나르도네는 아들을 아시시의 대주교 앞에 끌고 가 심판을 요청하였다.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든 광장에서 프란체스코는 육신의 껍질을 벗고 새로운 영혼으로 재탄생할 것을 외치며 자신을 감싸고 있는 옷을 벗어던져버렸다.
그 후 프란체스코는 폐허가 되다시피 한 산 다미아노 성당을 재건하여 그곳에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따스하게 맞아들였다.
그러자 얼마 가지 않아 마을의 가난한 이들은 지배계층이 다니는 대주교의 으리으리한 성당을 버리고 산 다미아노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신자를 빼앗긴 대주교는 산 다미아노 성당을 폐쇄한다는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이에 프란체스코는 교황을 뵙고 그의 자문을 구하고자 하여 바티칸 성당에 도착하였는데 교황 앞에 도열한 성직자들의 화려한 치장에 큰 슬픔을 느끼고 "창공에 나는 종달새처럼 낟알 하나에도 만족하고 감사하며 살 것"을 호소하였다.
그의 말에 감복한 교황은 프란체스코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13세기 초에 아시시의 성인 프란치스코는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설립하였으며 세속화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개혁을 이끈 교회개혁가이기도 하였다.
2014년 7월 10일은 주보에서 공지한대로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의 124위 시복식을 집전하는 광화문 광장 참석을 위한 예비 소집이 있는 날이었다.
그냥 광화문 광장에 나가 프란치스코 교황을 환영하면서 기도만하면 되는 것이 아닐까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으나 예비 소집장소인 포이동 성당 대성전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벌써부터 긴장되어가고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아무리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할지라도 중세까지만 하여도 교황은 절대왕정시대 군주처럼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하였던 신분이었다.
예전에 비하여 현제는 교황을 맞이하는 절차가 간소화되고 신격화되어있는 교황 직제가 느슨해지는 경향이 있어서 그냥 간편하게만 생각하려 하였다.
7시 미사가 끝난 뒤 일반 신자들은 대성전에서 거의 밖으로 빠져나가고 8월 16일 시복식에 참가하는 참석자들만이 남아있었다.
바뿐 일정에도 성당 안을 빠짐없이 둘러보는
신부님
평신도회 여성 총구역장이 대성전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프란치스코 교황성하 한국 방문과 순교자 시복식을 위한 기도를 진행한 후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이후 구요기 욥 주임신부님이 마이크를 잡더니 프란치스코 교황성하에 대한 설명을 구체적으로 진행하였다.
이 부문에서 나는 신부님이 프란치스코 교황성하의 한국방문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과 열의를 가지고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포이동 성당 대성전에 앉아있는 여러 참석자들과 함께 교황성하를 알현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특별한 기회였으며 은혜를 받는 영광의 기회일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