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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3-19]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마태 1,16.18-21.24ㄱ
16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4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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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독서 및 복음 묵상테마] : 내가 너에게.... <독서 : 2사무 7,4-5ㄴ.12-14ㄱ.16 >독서 : 로마 4,14.16-18.22 복음 : 마태 1,16.18-21.24ㄱ 또는 루카 2,41-51ㄱ>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일상을 담은 영화 <위대한 침묵>을 보았습니다. 침묵하며 모든 시간에 하느님을 만나려는 수도승들의 모습, 그들의 기도와 일, 대자연의 아름다움이 한참 어우러져 갈 무렵 화면에 성경 구절 하나가 떠오릅니다.
“나는 있는 나다.” 탈출기 3장 14절에서 하느님이 모세에게 알려주신 당신의 이름입니다. 여기에서 ‘야훼’ 라는 이름이 나왔다고 하지요. 수도승들이 침묵 속에 사는 것은 바로 이분, 계시는 분을 만나기 위함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불 꺼진 성당 바닥에 수도승들이 엎드려 그분을 조배하고 있을 때 오직 감실의 붉은 등만 깜빡거리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해 줍니다.
계시는 분, 존재하시는 그분께서 이제 우리와 같은 살과 피를 지닌 사람이 되셨다는 말씀을 오늘 듣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계시는 분, 존재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곁에 오셨다는 것, 곧 야훼 하느님이 임마누엘 하느님이라는 것입니다.
필리피서 2장의 그리스도 찬가는 자신을 낮추어 사람이 되신 그리스도의 신비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지요.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2,6 – 7ㄱ)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이 사람에게 건너오셨으므로 우리 역시 이웃에게 건너갑니다. 하늘에서 벼락이 치고 땅이 갈라지는 것이 기적이 아닙니다. 진짜 기적은 너무나도 자기에 사로잡혀 있는 나, 내가 너에게 건너가는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건너가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이것을 한 우주가 다른 우주와 만나는 일에 비길 수 있지 않을까요? 이것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온 존재로 증거하는 것이고요.................◆
[말씀자료 : 황인수 신부(성바오로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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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 I 묵상기도방(사이버기도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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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기도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pauline.or.kr%2Fdata%2Fcatholic%2Fimage%2Fcyber_pray_content%2F201001%2F0912-29.jpg) 예수님,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나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을 저와 함께해 주십시오. 저에게 힘을 주시어 지난날 제가 당신께 드렸던 고통대신 사랑을 드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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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2010-03-19) I 복음묵상방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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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요셉을 공경하는 관습은 중세기에 시작되었는데, 동정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예수님과 마리아를 위한 성 요셉의 사명은 미사의 감사송에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마태 1,19 참조)이고, 동정 마리아의 남편이며, "충실하고 현명한 종"이었습니다. 또한 성가정의 수호자이며, "아버지로서 예수님을 지키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 교회의 어머니이신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보호자인 요셉은 교회의 보호자이십니다. 이것이 성 요셉의 전구로써 강생의 충만한 신비를 이해하도록 모든 사람을 인도하게 하여 달라고 교회가 간구하는 이유입니다. |
<요한과 함께하는 묵상> : † 요셉 성인에게 만들어 준 명함(名銜)
한창 사순시기를 보내고 있는 교회가 오늘 하루만큼은 사순시기를 중단하고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요 예수의 양아버지인 요셉 성인을 크게 경축한다. 요셉 성인에 관한 성서상의 기록은 복음서의 전사(前史)에 속하는 마태오복음 1-2장, 루가복음 1-2장에서 예수의 탄생과 더불어 보도된 내용이 전부이다.
요셉은 다윗 가문의 후손(마태 1,16)이었으나, 다윗의 고을인 유다지방 베들레헴에서 살지 않고 갈릴래아지방 나자렛에서 살았던 것(루가 2,4)으로 추정된다. 이곳 나자렛에서 목수 직업을 가졌던 요셉은 '의로운 사람', 즉 법대로 사는 사람(마태 1,19)으로 이미 세간(世間)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하였으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아기를 가진 그녀와 파혼하지 말라는 천사의 명을 받들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호구조사령 때문에 다윗의 고을 베들레헴에 왔고, 여기서 예수를 낳게 된다. 요셉은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온 목동들과 동방박사의 방문을 받았고, 헤로데 대왕의 무죄한 영아학살을 피하기 위하여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였다. 헤로데 대왕이 죽은 후에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은 나자렛으로 와서 살았다. 요셉은 아기 예수에게 할례를 베풀었고,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하였다.
예수가 12세였을 때, 요셉은 마리아와 함께 예수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가서 잃어버렸다가, 학자들과 대화를 하고 있던 아들을 찾기도 하였다. 여기까지가 전사(前史)가 보도하는 내용이다. 그후 요셉이 예수의 아버지이고 목수였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공생활 중 고향방문 때 그곳 사람들의 입으로 증언된다.(마태 13,55; 마르 6,3; 루가 4,22)
기원후 2세기경에 예수의 형제로 추정되는 야고보가 편집한, 그러나 위경(僞經)에 해당하는 《야고보 복음서》에는 요셉과 마리아, 안나와 요아킴, 그리고 예수의 소위 '잃어버린 시절'(12살~30살)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많다. 야고보복음서에 따르면 요셉이 마리아와 약혼할 때 이미 80세의 고령이었고 이미 결혼한 경험이 있어 슬하에 야고보, 유다, 시몬, 미리암 등의 자식들을 둔 것으로(마태 13,55) 전해진다.
야고보복음서의 이러한 내용은 초기 교회가 직면한 일련의 신학적 문제들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들기 위한 시도로 보인다. 당시 중대한 신학적 문제들로는 성모 마리아의 동정성과 천주의 모친성, 성령으로 말미암은 예수잉태, 예수의 신성(神性)등을 손꼽을 수 있다. 야고보복음은 어디까지나 위경(僞經)에 속하기 때문에 그 내용의 역사성과 진실성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나 정경(正經)을 이해하는데 다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요셉!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원래 그는 가장자리에 서 있고, 그림자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침묵 가운데서도 남을 도울 줄 아는 사람이었고, 하느님께서 천사를 통하여 내리는 지시를 군말 없이 따랐으며, 보여주는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이것이 요셉의 법칙이다. 그리고 아무도 그에게 입을 주지 않았다. 이게 무슨 말인가? 위에서 보았듯이 요셉에 관한 성서적 근거는 마태오와 루가복음이 전하고 있는 예수의 탄생예고부터 12살까지로 한정된다.
그러나 그 어느 부분에도 요셉 스스로의 말은 찾아볼 수 없다. 요셉은 그저 침묵으로 등장하며, 그저 마음먹는 것뿐이다. 성서 저자가 말할 기회를 주지 않은 그 의미가 무엇일까? 마태오와 루가의 의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성서상 말하지 못하는 요셉의 답답함을 누가 헤아릴 수 있겠는가? '말이 없는 자의 마음은 크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그렇다. 말하지 않아도 주어진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의 넉넉한 마음 때문이다. 넉넉한 마음은 때로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말이 없는 요셉에게 사람들은 명함(名銜)을 만들어 주었다. 그 명함을 나는 보았다. 명함에 나타난 직함은 이렇다: '임종자의 수호자', '노동자의 수호자', '가정의 수호자', 게다가 비오 9세는 1870년 '교회의 수호자'라는 직함까지 내렸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은 1841년 8월 22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그분의 배필 성 요셉을 한국 교회의 공동 수호자로 정했다. 말로써 주장을 펴지도 못하는 요셉이 왜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는가?
우리가 지난 2000년의 교회역사를 통하여 볼 수 있는 것은 교회의 교도직이 신앙의 유산을 수호하기 위하여 줄곧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수많은 사상적 침입으로부터 신앙을 보존하고 전수하였다는 것이다. 교권은 신앙을 수호하면서 많은 부작용을 빚어냈다. 논쟁을 벌이고 이단자를 파문하고, 심지어는 종교재판을 통하여 사람까지 죽였다. 요셉이 바로 이런 교회의 수호자라 말인가? 아니다. 요셉은 그렇지 않다. 요셉은 그저 '수호자'이다.
오늘 복음에서 해답을 찾아보자. 마리아는 요셉이 모르는 사이에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그러자 요셉은 몰래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꿈에 나타난 천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자 그 마음을 고쳐먹는다. 결국 요셉은 처음에 자신의 잣대로 파혼을 결심하지만, 금방 그 잣대를 내려놓고 하느님의 잣대로 사건을 바라본다.
그 바라봄의 결론은 받아들임이다. 마리아와 그녀의 태중에 있는 아기를 수호하자는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 점이 요셉을 교회, 노동자, 임종자, 가정의 수호자로 칭송할 수 있는 명함을 만든 것이다. 우리도 요셉처럼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아끼고 돌보고 수호할 수 있는 은총을 요셉 성인을 통하여 하느님께 간구해야 하겠다.................◆
[말씀자료 : 박상대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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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함께하는 묵상> : † 의로운 사람 요셉 성인
마태오와 루카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이야기하면서 요셉을 그들의 기자적 관점에 따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마태오는 유다인의 전통을 따라 아버지 요셉을 중심으로 해서 예수 탄생 사건을 기록한 반면, 루카는 실제로 예수를 낳은 어머니 마리아를 중심으로 예수 탄생 사건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오는 족보를 통해서 예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아들"(구약에 약속된 메시아)임을 증거한 후에, 즉시 예수 탄생 기사를 기록했습니다. 이러한 예수 탄생 기사는 예수께서 요셉과 관계없이 성령을 통해 세상에 오시게 된 배경과 경위를 비교적 자세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I. 성령 잉태 사건과 요셉
1.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마태 1,18)
마태오는 예수 탄생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이와 같이 한 사건을 진술하기 전에 먼저 그 사건의 제목을 제시하는 것은 마태오의 고유한 진술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오는 마리아가 성령을 통해 임신하게 된 것은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그들이 함께 살기 전"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다인의 결혼은 다음과 같은 3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습니다. 1) 약정: 유다인은 어릴 때에 그 부모가 결혼할 상대를 미리 정했습니다. 2) 약혼: 그리고 그 아이가 자라서 성년이 되면, 당사자는 부모가 한 약정에 동의를 할 것인지, 아니면 반대를 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만일 당사자가 부모의 약정을 수용하는 경우에는 즉시 그 약정한 당사자간에 약혼이 성립됩니다. 이러한 약혼기간은 대개 1년이었는데, 만일 이 약혼을 파혼할 경우에는 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했습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임신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약혼 단계에 있을 때였습니다. 3) 결혼: 1년의 약혼기간이 지나면 당사자들은 관습대로 결혼식을 거친 후에, 완전한 부부가 되어 함께 살았습니다.
마태오는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을 하고 동거(결혼)하기도 전에 아이를 임신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자가 남자와 동침하지 않고 임신하는 일은 생물학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 보통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로 인해 당시에도 "마리아의 성령 잉태 이야기"는 예수의 제자들이 꾸며 낸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마태오는 분명히 마리아가 요셉과 동침하기도 전에 아기를 임신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마태오는 이러한 이야기를 예수의 친 가족들로부터 확인했을 것입니다. 마태오복음이 기록된 때는 아직도 예수의 주변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일부 살아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마태오가 거짓말로 성령 잉태 사건을 꾸몄다면, 그의 증언은 당시 사람들과 교회에서 반대를 받았을 것인데, 당시 교회와 증인들에 의해서 반대나 저항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은 성령 잉태에 대한 마태오의 증언이 사실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교회와 신자들도 이러한 마태오의 증언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2. 성령을 통한 처녀 수태의 의미
그러면 왜 하느님은 성령으로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아기 예수를 잉태하게 하셨을까요?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로 인류의 구원자가 될 사람은 아담의 죄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정을 통해서 잉태되는 경우 주님은 그 부모의 죄의 유전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부계의 죄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서 예수를 성령으로 임신하도록 초자연적인 역사를 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성령 잉태로 인해 주님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죄와 사탄의 세력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로 인류의 구원자가 될 사람은 인간과 똑같은 몸을 가지고 고난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주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질 수 있도록,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세상에 보내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주님은 성령으로 처녀의 몸에 잉태되는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해서 세상에 오셔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독특한 탄생 과정으로 인해 주님은 신성과 인성을 모두 가진 분이 되셨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성령에 의한 동정녀 탄생" 교리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를 읽어보면 수많은 사람들이 일어나서 성령으로 인한 처녀 탄생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모두 이단으로 규정되고 말았습니다.
3. 의로운 사람 요셉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
요셉은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가 자신과 동거하기도 전에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놀라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아마도 요셉은 그 소문이 믿을 수가 없어서 먼저 그 소문이 사실인지를 확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말도 안되는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요셉은 심한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경우 요셉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로 그는 당시 법을 따라 마리아를 간음죄로 고소할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약혼한 사람은 부부와 같이 취급을 받았기 때문에, 약혼 중에 간음한 여인은 간음죄에 해당되어 처벌을 받았습니다. 약혼한 여인이 간음죄로 고발된 경우, 그것이 사실로 드러나게 되면, 마을 사람들은 그 여인을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신명 22,23-24).
둘째로 그는 마리아를 고발하지 않고 파혼 증서를 써주고 조용하게 그녀와 맺은 약혼을 파기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경우 마리아는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을 앞두고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서 임신을 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경우 우리는 대개 배신감으로 인해 크게 분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질투심으로 인해 그녀를 고발하여 그 여인과 숨은 애인을 찾아 처벌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게 될 것입니다.
요셉 역시 이 일로 인해 많은 시간을 고민하며 보냈을 것입니다. 그가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아마도 그는 이 문제를 놓고 하느님께 기도하며, 하느님의 인도를 간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긴 과정을 통해서 복수의 감정을 누르고 그녀를 용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가능한 마리아가 피해를 적게 받는 쪽으로 일을 처리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는 그녀를 고소하지 않고 조용히 이혼증서를 써주어 약혼을 파기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요셉이 이렇게 결심한 것은 마리아가 그녀를 임신하게 만든 남자와 합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는 이러한 요셉을 가리켜 "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과 사람 앞에서 완전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는 하느님을 경외했으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배신한 여인의 죄도 덮어주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했기 때문에, 하느님과 마리아를 위해 최선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이러한 "의로운 요셉"을 불러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귀중한 곳에 사용해 주셨습니다.
II. 천사의 메시지와 요셉의 순종
1.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마태 1,20)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문제로 인해 깊이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파혼하기로 결심을 굳히고 그 문제를 놓고 하느님께 기도하며 깊이 생각을 했습니다. 바로 그 때에 주님의 천사가 꿈에 요셉에게 나타나서 그가 해야 할 일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며 하느님의 뜻을 묻는 신자들에게 그들이 택할 일을 가르쳐 주시는 분입니다.
천사는 요셉을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그가 메시아의 가문에 속한 사람이었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요셉은 메시아가 오기로 된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왜 요셉이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일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천사는 마리아가 임신하게 된 것은 부정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천사의 말은 믿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경외했던 요셉은 그 말을 그대로 수용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모습을 볼 때에 그는 믿음과 순종의 사람이었음이 분명합니다.
2.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고 예고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면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예수"는 "그가 구원하실 것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천사는 왜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불러야 하는 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천사는 그 아이가 장차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마리아가 낳을 아들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는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신 분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가 아니라, "당신 백성", 곧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오신 분이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를 통해서 자기 백성의 죄 값을 지불하고, 그들을 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분이었습니다.
3. 구약 예언의 성취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2-23)
천사는 요셉에게 이 모든 일이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예언자에게 하신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일어난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가 정말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인가?" 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오는 "예수의 탄생 사건"이 구약 예언의 성취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 해주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주님이 태어나기 수 백년 전에 이렇게 예언한 바 있습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이사 7,14) 이 예언은 유다 왕 아하즈 때에 선포된 예언이었습니다(이사 7장 참고). 아하즈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가 유다의 왕이 되었을 때에는 아시리아가 한창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아시리아의 급속한 팽창에 위협을 느낀 남부 국가들은 이사리아를 반대하는 동맹군을 결성했습니다. 그들은 유다도 이 동맹에 참여하도록 강요했으나, 아하즈는 아시리아를 의지했기 때문에 그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반 아시리아 동맹에 참여한 (북)이스라엘 임금 페가와, 아람 임금 르친이 연합해서 예루살렘(유다)를 공격했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친 후에 친 아시리아 정책을 펴는 아하즈를 폐위시키고, 그들의 입장을 지지해 줄 "타브알의 아들"을 유대 왕으로 세우려고 했습니다(이사 7,6).
아하즈와 유다 백성들은 이스라엘과 아람의 침공 소식을 듣고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하느님은 일찍이 메시아가 오실 때까지 유다 가문에서 왕을 계승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과 아람의 공격이 성공하게 되는 경우 이러한 하느님의 약속은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에언자 이사야를 아하즈에게 보내셨습니다. 이사야는 아하즈 왕에게 가서 65년 내에 그들을 치러 올라온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하여 다시는 나라를 세울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예고해 주었습니다(이사 7,8-9).
그러나 아하즈는 하느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아무 것이나 표징을 요청하면 그것을 이루어 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아하즈는 하느님께 표징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친히 징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그 징조는 바로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는 내용이었습니다(이사 7,14).
이사야는 계속해서 "그 아이가 나쁜 것을 물리치고 좋은 것을 선택할 줄 알게 되기 전에, 임금님께서 혐오하시는 저 두 임금의 땅은 황량하게 될 것입니다."고 선언했습니다(이사 7,15). 일차적으로 이 징조는 이사야의 아내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이사야는 한 여인과 결혼하여, 그 여인을 통해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이름은 유다가 악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유다와 함께 하여 그들을 지켜 줄 것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이 아이가 자라 선악을 판단하기 전에(얼마 되지 않아서) 유다를 치려던 이스라엘과 아람을 쳐서 멸망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이 예언이 완전히 성취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였습니다. 예수께서 탄생하던 당시에는 이사야 때와 같이(아시리아가 강대국으로 등장함) 로마가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악한 아하즈 왕과 같이 사악한 헤로데가 유다의 왕으로 있었습니다. 또한 아하즈가 하느님보다 아시리아를 의지했듯이, 헤로데는 하느님보다 로마를 더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아람이 유다 왕족을 끊으려고 했던 것처럼, 이두매(에돔)인인 헤로데가 유다 지파의 왕족들을 모두 제거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유다족은 바람 앞에 놓인 등불처럼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바로 이 때에 하느님은 다윗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이사야의 아내에게 아들을 주셨듯이, 마리아에게 아들을 주어, 그를 통해서 끊어진 다윗의 왕위를 잇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세우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마리아의 잉태 사건은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인한 마리아의 임신"은 가장 어려운 중에도 하느님께서 그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임마누엘")는 것을 보여준 위대한 표징이었습니다. 이러한 표징은 사람이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친히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늘 말씀에 나오는 "처녀"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니라, 보통 젊은 여인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주장합니다. 히브리어에는 결혼한 여자를 가리키는 말과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인을 가리키는 말이 다릅니다. 결혼하지 않은 젊은 여인, 즉 처녀는 "알마'라고 했고, 결혼한 젊은 여인은 "브둘라"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복음에 사용된 말은 처녀를 가리키는 "알마"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아내는 처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의 진정한 성취는 바로 마리아의 성령 잉태를 통해서 성취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이사 9,5)". 이사야는 장차 태어날 한 아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 아들이 바로 "영원 전부터 계신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였다고 증거했습니다.
4. 요셉의 순종
요셉은 천사가 전해주는 말을 듣고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리고 나서 요셉은 그 동안 마리아의 임신으로 인해 가졌던 모든 걱정과 의심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마리아와 파혼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매우 기뻤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즉시 일어나서 마리아에게 가서, 천사의 지시대로 그녀를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녀를 집으로 데려왔다는 것은 요셉이 마리아와 결혼하여 합법적인 부부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천사의 지시대로 마리아가 아기를 낳을 때까지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끝까지 하나느의 말씀에 온전하게 순종했습니다. 그러므로 마태오는 요셉을 가리켜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리아는 해산할 기한이 되어 천사의 예고대로 아들을 낳았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천사의 지시를 따라서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자료 : 두올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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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나와 함께하는 묵상> : † 꿈을 통한 깨달음
꿈은 무엇인가? 최초로 꿈을 분석한 프로이드는 억압된 리비도의 배출이라고 설명했고, 융은 감추어진 무의식의 암시로서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프로이드의 접근 방법으로는 꿈을 꾼 사람의 심리적 병리 현상을 진단하는데 매우 유용하고, 융의 방법으로는 그 사람의 원형(arche type)을 발견하는데 유용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융은 신화를 집단적인 꿈을 말하는 것이며 집단 무의식의 원형이라고 합 니다.
우리가 신화를 읽다보면 한국 신화와 그리스 로마 신화 중에서 매우 비슷한 스토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집단 무의식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꾸는 꿈은 그냥 연기처럼 왔다가 사라지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소중하게 간직하고 되새겨봐야 할 중요한 자원임에 틀림없습니다.
꿈을 꾸는 것은 현실의 일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칼 융은 꿈이 잠재의식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착안하여 꿈에 대한 이론을 내놓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꿈에 대하여 정신과학적인 가설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꿈이 신의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다고 이해되었습니다. 성서에도 꿈을 신의 메시지로 해석하여 국가정책에 반영시켜 성공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꿈은 인간의식의 한 현상으로, 잠재되어 있는 의식을 읽는 언어로 등장하여 정신심리요법에 많이 이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꿈을 해석하는 것은 미신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꿈에 대한 성서의 이야기를 해석하는데 많은 제약이 있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을 약혼자 요셉이 받아들이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통로는 꿈이었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그대로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꿈을 통해서 구체적인 메시지를 받았고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요셉의 신앙은 당시 유대교 신앙에서 보면 불법이었습니다. 즉 믿음이 약한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정리에 빠져서 불법을 행한 약혼자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꿈을 통해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해 듣지 못했다면 그런 수용적인 자세는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바로 꿈은 신비의 세계를 이해하게 하는 통로입니다.
그리고 잠을 자면서 꾸는 꿈 현상과 다른 꿈이 있습니다. ‘지난날의 꿈이 나를 밀어간다'는 시가 있습니다. 내 인생의 보이지 않는 방향을 가리키는 꿈입니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현실적이 되면 인생에 숨겨져 있는 가능성과 신비를 보지 못하게 되고 어리석은 일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러나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해 보다 가시적 비전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이 두 가지 의미의 꿈을 동반하는 현상입니다. 요셉이 꿈에서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에 대해 듣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자기의 현실로 개입하고 들어오신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인생에 하느님께서 들어오고 싶어 하십니다. 나의 생각을 열어서 전혀 다른 길로 향해진 길을 보여주십니다.
‘꿈장이' 요셉은 형제들의 시기와 질투를 사서 어려운 역경으로 떨어진 끝에 이집트의 재상이 되었습니다. 이런 미래의 인생을 지시하고 설계하시는 하느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꿈은 바로 그런 개입의 통로 중에 하나입니다. 꿈을 가지고 기도하다 보면 숨겨진 메시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꿈까지도 기도로 바꾸는 생활이 그립습니다.
성경에서 보는 또 다른 꿈 이야기도 함께 보겠습니다. 대표적으로는 야곱이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잘 때 하늘나라로 가는 사다리를 본 것, 그리고 야뽁 강가에서 씨름을 한 장면, 요셉이 꿈을 해석해서 나라를 기근에서 구하고 또 자신도 고위 직분을 맡게 된 것... 에제키엘이 본 환상도 꿈의 범위에 속하겠지요. 중요한 것은 그들이 꿈에서 본 계시를 헛되이 사라지게 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꿈을 꾸느냐 안 꾸느냐도 중요하겠지만 그것을 소중히 간직하고 하늘의 뜻을 읽을 줄 아느냐 모르느냐는 더욱 중요합니다.
아메리칸 드림, 코리안 드림... 등등의 드림은 허구적입니다. 현실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요망 사항에 불과한데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현실인 것처럼 착각해서 자신도 망치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한 때 전국을 휩쓸었던 로또 열풍도 대표적인 허구적인 드림일 것입니다. 이른 바 ‘인생역전'이라는 허구를 현실로 이루어보겠다는 열망이 남긴 것은 허탈과 좌절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영어를 처음 배울 때 “Boys, be ambitious!”라는 말을 골백번 외쳐댑니다만, 소위 야망이라는 것도 허구적일 때가 많습니다. 한 사람의 허황된 야망은 주변 사람들을 무척이나 피곤하게 하고 괴롭힙니다. 그래서 자신의 미래에 대한 꿈은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보여 질 수밖에 없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꿈속에서 계시를 보았습니다. “허참, 별 개꿈도 다 있네!”하고서 그냥 지나칠 수도 있겠지만 그는 그 꿈속의 계시를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받아들였고, 그 받아들임의 순간에 우주적인 변화가 생겨났습니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받아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나에게 오고 있고, 이미 온 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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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와 함께하는 묵상> : † 세상이 주는 두려움을 넘어서 법대로 사는 요셉
배낭여행을 하다가 겪은 일입니다. 어느 가게에서 그 지역의 얇은 사진집을 산 적이 있었습니다. 주인은 제가 내민 지폐를 그 사진집 위에 얹어놓고 다른 물건을 찾기 위해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사이 저는 카운터의 턱진 아래쪽 책상 위에 놓인 그 사진집을 다시 보고 싶어서 집어 들었습니다. 물론 사진집 위에 지폐가 얹혀 있는 상태였는데, 저는 그 사진집을 집어든 후 기울여서 지폐는 책상에 떨어뜨리고 책만 보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그러니까 책을 수평으로 집어 들고 지폐는 아직 그 책 위에 있는 상태에서 주인이 돌아와서 그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녀의 표정은 마치 도둑질하는 장면을 잡았다는 식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짧은 제 영어로는 그 상황을 설명하기도 어려웠고, 외국인인 나그네에게 잔뜩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그녀의 표정을 보자 설득할 용기도 나지 않아 얼른 산 물건을 집어 들고 가게를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직도 저를 도둑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를 그녀를 생각하면 억울함과 당황스러움이 교차하는 묘한 감정이 되살아납니다.
이처럼 우리는 살아가면서 쉽게 남을 오해하기도 하고 오해 받기도 합니다. 진정 내가 옳바른 의도와 목적으로 행하는 일인데, 다른 사람들이 쉽게 판단하여 비하하고 단죄하려 들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들이미는 잣대에 휘둘리지 않고 당당함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반대의 경우에도 우리는 그다지 자유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의 상식과 기대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너무 쉽게 우리의 마음속에서 다른 이들을 단죄하기도 합니다.
마리아의 남편이며, 예수의 양아버지인 요셉이 처음엔 '마리아의 성령잉태 사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파혼하려는 생각을 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세상이 주는 오해를 넘어서는 보다 큰 의로움에 자신을 맡기는 의연함으로 그는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들에게 세상이 규정하는 오해와 인습을 넘어서는 삶, 세상이 주는 두려움보다 더욱 큰 하느님의 뜻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진정 자유로운 삶이요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임을 일러주 고 있는 매우 귀중한 복음입니다.
오늘은 항상 사순절 중에 기념하게 되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의 축일입니다. 우리는 굳이 예수님의 ‘양부’라는 이름으로 그분을 부르지만 이 세상에 예수님이 오실 수 있게 선택된 또 한명의 어버이인 요셉의 가치는 양부가 아닌 실제 아버지의 역할을 훌륭히 하신 분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찌보면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여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님과 그 태중으로 들어오신 하느님의 아들의 생명 모두를 손에 쥐고서 아무런 이유 없이, 인간적인 수고와 손해를 감수하며 그들을 지켜낸 아버지의 참된 가치를 실현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탄생에 얽힌 이야기는 요셉을 중심인물로 드러내 줍니다. 아직 예수님은 성모님의 뱃속에 있고 복음은 성령으로 인해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짧은 이야기만을 배경으로 들려줍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방문을 받은 마리아의 이야기가 아닌 이 상황을 요셉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반응했는지를 알려줍니다.
약혼을 하고 함께 살 날을 꼽고 있던 요셉에게 마리아의 성령 잉태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의 상황을 말해줍니다. 마리아가 착하다, 순수하다 등의 수많은 수식어를 붙이더라도 이 상황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그런 약혼자의 이유 모를 임신은 분명 요셉에게는 참을 수 없는 수치스러움이고 분노를 사기에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현실은 끔찍하게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기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을 때였기에 이 일을 전해듣고 그는 당장 마리아를 고발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됩니다. 복음이 너무 덤덤하게 전해주는 요셉의 성품은 그가 그 성품대로였다면 분명 신고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는 마리아의 죄를 밝혀 자신의 부정을 피하기 위해 마리아를 희생시켰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근거 모를 아이 역시 그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우리의 예상과 달리 움직입니다. 그는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지만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만일 요셉이 율법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이었다면 그는 그 율법을 어긴 결정을 하게 됩니다. 혹 여기서 말하는 ‘법대로’라는 말이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면, 곧 율법의 정신을 이야기한다면 그는 법대로 제대로 행동한 것이 됩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라는 율법의 정신 말입니다.
어떻게 해석하더라도 요셉의 행동은 사랑의 이중계명 중 이웃 사랑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더 중요한 것을 복음은 요셉의 이 결정이 주님의 계시 이전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이런 요셉의 결정이 있을 즈음에야 하느님께서 천사를 보내주셨음을 넌지시 알려줍니다.
‘요셉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에...’
요셉은 그 근본부터 하느님의 뜻에 가까운 인물이었다는 말입니다. 마리아가 순수한 영혼으로 하느님의 뜻에 전적인 순명을 보였다면 요셉은 세상을 살아가는 생활인으로 그 속에 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자신만큼, 아니 자신보다 더 귀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간 사람의 모범이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요셉이 성모님의 순명만큼이나 예수님의 탄생에 큰 몫을 하게 된 이유입니다. 또한 주님의 천사의 알림 이후에 요셉이 서둘러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했다는 사실은 그 역시 하느님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임을 동시에 드러내 줍니다.
이런 부모 사이에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적어도 이 부모만큼은 하느님이 이 세상을 내신 첫 사람의 사랑스런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부모, 그 속에 자리하신 예수님을 ‘임마누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로 이 탄생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이웃 사랑의 극치를 보여준 요셉.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불가능하다는, 혹은 그러면 안된다는 그런 선택 속에 하느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사랑은 그래서 어렵지만 하느님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기적을 일으킵니다.
사람의 표본을 갖고 싶으십니까? 그럼 요셉의 마음을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말씀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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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셉 성인처럼 의로우며,,순![종](https://t1.daumcdn.net/daumtop_deco/icon/deco.hanmail.net/contents/emoticon/things_34.gif)
하는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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