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로 통합되어 작동하는 창조-타락-구속의 성경적 세계관을 통해서 세상을 보면 천국이 보인다. 하나님 나라는 이 삼중의 성경적 진리를 통해 보는 세상이다. 이 삼중적인 진리를 통합적으로 이해하여 세상과 삶을 볼 때 존재와 역사의 의미를 바로 알게 된다. 성경은 세계관의 기본 요소에 대한 직접적이며 구체적인 답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성경만이 줄 수 있는 독특한 내용이다. 그 독특성과 유일성을 바로 깨달으면 성경이 과연 하나님의 진리임을 확신하게 된다.
*하나님의 집인 세상에 살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볼 수 있는 눈이 없어서가 아니다. 도둑의 심보로 사니 세상의 주인을 모를 뿐이다. 마치 도둑이 주인에게 관심을 가지기는커녕, 주인이 없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작은 세계에 파묻혀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계의 아름다움과 깊은 의미를 잊고 사는 경우가 너무 많다. 덴마큰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화려한 마차를 타고 밤길을 가는 부자는 별빛을 보고 걷는 가난한 나그네의 기쁨을 알지 못한다는 비유를 든 적이 있다. 사소한 안락 때문에 대자연이 주는 깊고 심오한 기쁨과 아름다움을 잃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다. 워즈워스의 말처럼 우리는 만유에 가득한 하나님의 음성과 모습을 볼 눈을 잃었으니, 이 얼마나 옹졸하고 안타까운 일인가? 모든 사람이 자연주의자나 낭만주의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경이로운 창조세계를 보고 찬양하는 눈은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 뜻의 산물이다. 그런 점에서 도예베르트의 말처럼 존재는 곧 의미이다. 즉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창작 의도를 드러내는 명백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그것은 법아래 있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 즉 ‘아멘’으로만 존재한다. 사물들에게 있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먹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생명체는 없다. 하나님이 존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이 세상은 변함없는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우주는 늘 제자리를 지키며 사계절은 착오 없이 제철을 지킨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입각한 것이다.
*독일 신학자 헬무트 틸리케는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는가」에서 인간의 창조가 얼마나 특별했는지를 잘 설명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중대 결단이었다고 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모여 의논하여 결정하실 만큼 중대한 일이었다. 물론 이런 틸리케의 설명에는 문학적인 수사가 곁들여져 있다. 하지만 다른 사물들을 말씀으로 ‘뚝딱’ 창조하신 것과 다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틸리케는 이를 강조하기위해, ‘인간 창조’는 “하나님의 모험”이었다고까지 했다. 세상이 인간에게 맡겨지고 그에 의해서 좌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 이것이 삼위 하나님의 결단이었다. 시편 8편은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라고 노래한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저에게 만물을 맡아 다스리도록 하셨다”고 밝힌다. 거기에 언급된 가축과 들짐승, 새와 물고기는 만물의 일부일 뿐이다. 하나님은 시공간 내의 유무형의 모든 것을 인간에게 맡기셨다.
*여기에서 특히 조심해야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적인 기준에서 생각하는 성공이나 찬란한 무엇과 동일시하는 일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문화의 표지는 화려하거나 큰 것이 아니라 샬롬, 즉 의와 화평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 스킬더는 문화의 궁극적 의미를 ‘안식’이라했다. 여기서 안식이란 ‘쉼’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의와 평강을 누린다’는 의미가 강조된 것이다.
*문화는 인간이 본능에만 매여 있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 동물이 문화를 만들지 못하는 것은 본능을 초월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벌집이나 거미줄은 놀랄 만큼 정교하지만 그것은 본능에 따른 형성으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발전하거나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이 만들어내는 문화는 환경과 역사에 다라 끊임없이 변하며 지극히 다양하다. 인간은 단지 높은 지능을 필요로 하는 문화적 사명 때문에 독특한 존재가 아니다. 흔히 인간을 호모 파베르, 호피 사피엔스, 사회적 동물, 정치적 동물 등으로 특성화 한다. 하지만 근래에는 철학적 인간학에서도 인간의 특성을 높은 지능이 아니라 ‘본능에 대해 열려있음’으로 본다. 이는 비교적 성경적 인간관에 접근한 것이라고 하겠다.
*성경의 인간관은 여러 종류의 결정론적 인간과과도 다르다. 유물론자들이 말하듯 인간이 물질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존재라는 뜻은 더욱 아니다. 예를 들어,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산업과 경제 구조 의 산물만은 아니다. 프로이트의 생각처럼 본능과 잠재의식에 의해 지배되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인 관계만이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한다고 주장하는 구성주의와도 다르다. 코넬리우스 프란팅가의 말처럼 인간은 유물론자나 진화론자가 말하는 것 같은 동물 수준으로 축소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인본주의자들이 과장하는 것처럼 완벽한 자유를 누리면서 모든 것을 스스로 결단하는 존재도 물론 아니다. 우리의 자유나 인간성은 상대적이며 파생적이다. 모든 선한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피조물인 인간과 더불어 ‘기쁘신 뜻’ 가운데 맺으신 언약은 종교적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은 그분을 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헌신과 모든 삶의 기초가 되는 언약이기 때문이다. 이 언약에 대한 순종은 삶이요, 불순종은 죽음이다. 순종과 불순종을 떠나서 인간은 어거스틴의 말처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만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존재다. 신앙의 근원이라고도 할 수 있는 하나님에 대한 갈망은 인간의 본질 중에 본질이다. 칼빈은 이를 가리켜 인간의 마음속에는 “종교의 씨앗”이 있다고 했다. “신성의 감각”을 타고난다 했다. 인격의 중심에는 자유로움과 하나님을 향한 영원의 감각이 들어있다. 이렇듯 인간은 종교적인 존재로 지음 받았다.
*인간의 죄악은 자율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한 판단이다. 하나님은 법이다.(창 2:17) 인간은 다른 피조물들과 같이 그 법아래 순종함으로 존재한다. 물론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자유의지를 가지고 순종한다. 타락은 법 아래에 있어야 할 존재가 스스로 법의 제정자가 되기를 원한 데서 일어났다. 죄의 본질은 자유를 추구하고 주장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이는 마음 속 깊이, 인격 중심에 숨어있는 악과 죄의 뿌리다. ‘죄’들은 사실 타락의 결과요 증상이다.
*성경이 말하는 타락은 본래 있던 악이 싹트는 것이 아니다. 타락은 인간이 자율적 판단과 행동을 취한데서 비롯되었다. 타락의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권을 의지적으로 거부하고 인간의 주권을 내세우는 것이다. 인간이 의지적인 결단으로 하나님을 배신하고 자신의 판단대로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타락은 궁극적이며 절대적인 기준이 하나님에게서 인간 자신에게로 옮겨졌음을 뜻한다. 이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 이외의 다른 무엇에 절대성을 부여하고 우상숭배에 빠지게 된다. 타락은 이런 의미에서 종교적이다.
*인간의 자율은 바로 이처럼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했다. 그것은 하나님이 큰 기대를 걸고 맺은 약속을 우리 인간이 깨뜨린 것에서 비롯되었다. 타락은 인격의 중심인 마음이 부패한 것이다. 인격간의 최대 악은 신뢰를 깨뜨려 관계를 망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순종하고 사랑하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를 오용하여 이 관계를 깨뜨렸다. 그로인하여 하나님과의 친밀감이 사라지고 마음 속에는 두려움과 증오가 자리 잡게 되었다.
*선악과는 인간을 아름답게 만드는데 필수적이었다. 이것은 인간의 특수성과 관계가 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만은 창조된 이후에도 계속 만들어져 가는 존재다. 속된 말에도 “사람이면 모두 사람인가?”라는 표현이 있듯이 사람다워야 비로소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되려면 자유의지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선악과는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 중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맺은 두 언약, 창조의 언약과 종교적 언약을 실효성 있게 만드는 표지였다. 선악과에 대한 금지로 표현된 종교 언약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면 순종할 것이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선악과를 범할 것이다. 선악과는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의 주권적 명령에 대해 의지적으로 기꺼이 복종할 것인지를 보이는 기준이다.
*하나님은 죄의 ‘조성 자’가 아니시다.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신 것은 그들을 죄악에 빠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간에게 분별력을 주셔서, 본능에 매인 닫힌 존재가 무한한 가능성에 열려 있는 존재가 되게 하신 것도 마찬가지다. 인간에게 선악과를 두고 금지하신 것도 마찬가지이다. 자유와 선악과는 모두 인간의 특성이며, 인간을 ‘인격적인’존재요, ‘너’로 대우하신 증거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라는 시편 기자의 말처럼 이 사실은 찬양의 이유일망정 불평의 소지가 아니다.
*이와 같이 선악과는 사람의 온전한 자유와 그것을 행사하는 능력을 성숙하게 하는 수단이었다. 그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달리 인격적으로 대하셨다는 증거다. 그것은 인간을 다른 피조물과 구분하는 선한 나무였다. 그것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나무였다. 선악과 언약은 자유와 본능에 대해 열려있음을 부여받은 독특한 피조물인 인간이 하나님을 닮아가는 과정이다.
*여자의 후손을 통해 뱀의 머리를 부수는 일이란 죄악에 빠진 인류를 통해서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의 도역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이제는 망가진 세상을 회복시키는 일에도 동참시키시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을 이 지경으로 망쳐 놓은 장본인에게 말이다. 이러한 히엘레마의 설명은 다소 어색한 부분은 있으나, 그 중심 진리만큼은 명백히 성경의 가르침을 잘 설명하고 있다.
과연 히엘레마의 표현처럼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최악의 대안처럼 보인다. 히엘레마의 말은 거기서 끝난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후원자 아들의 생명이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구속 계획은 이렇게 수립되었다. 그것은 타락 직후 선포되었다. 하나님은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사 9:7)고 이사야의 입을 통해 선포하신 그대로 수행하셨다.
*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진리」를 읽으며, 예수를 믿어 구원 받는 일의 의미를 잘 설명했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는 이에 대해 “그리스도가 누구시며, 그가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믿어 구원에 이른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그렇다. 성경은 도덕적인 삶을 살면서 헌금이나 봉사를 잘 하는 것을 구원의 조건이라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세례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되는 것도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는 믿음에서 온다. 그를 믿는 것이 구원이 되는 것은 그가 독특한 분이기 때문이다. 또 그가 하신 일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를 알고 믿는 것이 구원의 핵심이다.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일은 교회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그의 교회로 불러 모으신다. 교회는 세상에서 구별된 성도들의 모임이다. 교회는 그 일의 전초기지요 훈련장이다. 모인 교회는 흩어짐을 전제로 한다. 교회는 모여 힘을 얻고 세상 속의 누룩과 빛으로 다시 흩어진다. 성도들의 삶과 일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는 세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장된다. 복음의 진정한 성취는 어둠 속의 세계가 점차 복음의 빛으로 나오는 것이다. 세상의 죽음과 폭력의 원리가 차츰 생명과 샬롬의 원리로 바뀌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구속의 원리가 구체적인 삶으로 드러나는 곳에 임한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고 인정하고 실천하는 곳에 임한다. 한 개임의 거듭난 마음과 몸이 그런 곳일 수 있으며, 한 가정과 직장이 그런 곳일 수 있다. 물론 교회는 원칙적으로 그런 곳이다. 하나님 나라는 유형적인 무엇에만 임하지 않고, 학문과 예술에도 임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기독교 학문이란 신학이나 기독교 철학만을 말하지 않는다. 공학이건 인문학이건 성경적 세계관과 전제에 입각한 경우를 모두 말한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예술도 성화나 성가 그리고 교회 건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성경적 진리에 기초를 둔 예술 모두를 말한다.
*가라지 비유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온갖 방해와 어려움 속에서도 자라가는 천국을 보여준다. 또한 그런 상황에 하나님이 어떻게 대처하시는지 알게 해준다. 어떤 작가는 ‘하나님이 왜 죄와 악을 방치하고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이 비유에서 찾았다. 그는 이 세상을 가라지 같은 사건 사고가 가득한 세상으로 보았다. 하나님이 최선을 다하시지만 사탄도 줄기차게 회방한다. 이 비유는 하나님이 그것을 일거에 처리하지 않으시고 왜 오래 참으시는지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오늘 밤 하나님이 모든 가라지를 뽑으시면 당신은 과연 내일 아침 살아있을 자신이 있는가?”
*믿음의 눈으로 보는 실상은 비전이다. 그것은 확실한 것이다. 하지만 이루었다고 자랑할 수 있는 업적은 아니다. 은혜로 주어질 것을 바라며 현재에 주어진 소명을 성실히 행하는 근거요 동기다. 바울의 말처럼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푯대를 향해 달려갈 따름이다. 선한 일꾼이라 부르며 상 주실 이는 하나님뿐이다. 그러나 비전은 단지 미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약속인 동시에 확실한 실체가 있는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모든 신실한 성도는 천국을 미리 맛보며 살았다. “영생을 맛보며 주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찬송가 493장에 나타난 이호운의 고백은 바로 이 진리를 노래한 것이다.
*시편 85:11-12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평강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여기서 그려진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평강과 공의가 화합된 모습인데, 그것은 바로 샬롬이다. 긍휼은 따뜻하고 감정적이지만 진리는 차갑고 지적이어서 대체로 이 둘은 만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공의 역시 무사 고평의 날카로움을 함축한 듯 보이는 반면, 화평은 따사롭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이 세상에서 이 둘이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이 둘이 만나며 포옹하며 진정한 덕을 이루는 모습이 하나님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