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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평택지방의 역사
가. 고대의 평택
평택지방에서 정착생활이 시작되고 마을이 형성된 것은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였다. 삼한시대에는 독립적인 정치집단이 성장하지 못하여 양성의 모수국이나 직산의 목지국의 영향아래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삼국시대에도 초기에는 백제의 지배를 받다가 5세기와 6세기 고구려와 신라가 성장하면서 고구려와 신라의 지배를 받았다.
고대(古代)의 큰 변화는 8세기 경덕왕 때 행정구역 및 지명개편에 의해서다. 이 때의 개편으로 부산현은 진위현으로 개칭되었고, 동삭동에는 영신현이, 현덕면에는 광덕현이, 안중읍 용성리에는 거(차)성현이, 팽성읍에는 평택현이 만들어졌으며, 특수행정구역인 오타장(오성면), 종덕장(고덕면), 신영장(청북면), 송장부곡(송탄), 백랑부곡(오성), 포내미부곡(포승), 육내미부곡(포승),천장부곡(팽성읍)이 설치되었다.
나. 중세의 행정구역 변천
고려 초 평택현(팽성읍)은 천안부의 영현으로, 진위현은 수원부의 영현이 되어 양광도에 속했다. 현종 9년(1018년) 전국의 군현을 주현(主縣)과 속현(屬縣)으로 나누면서 대대적인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진위현과 영신현, 서부지역의 광덕현과 용성현은 수주(水州)의 속현으로, 평택현과 경양현(게양)은 천안부의 속현이 되었다.
평택지방이 독립적인 행정구역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명종 때 감무(監務)를 파견하면서였다. 감무(監務)의 파견은 지방자치적 성격이 강했던 고려시대에 중앙집권적이 강화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에 평택지방은 팽성읍의 하양창과 안산만 해안의 제염(製鹽), 포승면 일대의 목마장으로 주목을 받았다.
다. 조선시대의 변화
조선의 건국후 경제력이 향상되고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면서 중앙집권이 강화되자 모든 군, 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다. 이 과정에서 고려시대에 작은 단위로 나눠졌던 행정구역이 통합되고, 속현(屬縣)이 주현(主縣)으로 승격되었다. 예컨대 팽성읍의 하양창에 폐지되면서 이 지역이 직산현에 편입되었고, 영신현, 청호역, 송장부곡, 용인현과 의신현의 일부지역이 진위현에 통합되었으며, 평택현은 그대로 남았다. 진위천 서부지역의 용성현, 광덕현, 오타장, 백랑부곡, 홍원목 등은 수원부와 양성현, 직산현의 월경지가 되어 관할을 받았다. 이로서 평택지방은 안성천과 진위천을 경계로 경기도 진위현, 충청도 평택현, 수원, 양성, 직산지역으로 분할되었다.
평택지방은 19세기 말 근대문물이 수입되고 근대적 행정제도가 만들어지면서 또 한번의 큰 변화를 겪었다. 변화의 핵심은 1895년과 1896년 그리고 1914년에 있었던 근대적 행정구역 개편과 경부선 철도건설이었다. 먼저 갑오개혁 직후인 1895년 전국을 23부제로 개편하면서 진위현과 평택현은 각각 진위군과 평택군으로 바뀌었고, 이 과정에서 진위천 서부지역이 진위군과 수원군 지역으로 재편되었다. 1896년 13도제가 시행되면서 진위군은 경기도에 평택군은 충청도에 편성되었으며, 직산현에 속하였던 옛 경양현(게양) 지역이 평택군으로 이속(移屬)되었다.
라. 신(新) 평택시의 건설
평택시의 현재모습은 1905년 경부선 개통과,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만들어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은 구한말의 진위군, 평택군, 수원군을 "진위군"을 통합시켜 오늘날의 평택을 형성시켰으며, 1905년 경부선 개통은 오늘날의 평택시를 생성시켜 평택지방의 공간구조를 한꺼번에 바꿔놓았다. 부언하면 일제는 1905년 경부선 철도를 개통하면서 황무지였던 진위군 병남면 통복리 부근(현 평택시 원평동)에 "평택역"을 건설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구 평택시가 된 것이다.
철도역 주변에 형성된 식민지형 근대도시 평택에는 시장(市場)을 비롯하여 금융기관, 수원헌병대 평택분견대(현 평택경찰서, 1910년), 경성지방법원평택출장소(1918년), 평택의용소방대(1914년) 등 주요관공서가 들어섰으며, 점차 교통과 경제의 중심지에서 정치와 행정의 중심지로 변모해갔다. 이와 같은 발전에 따라 1926년 4월 1일에는 진위군 병남면 평택리가 평택면으로 발전하였고, 진위면 봉남리에 있었던 군청 및 주요 행정관서가 평택으로 옮겨왔다. 평택면은 인구가 급증하고 교통과 행정, 상업과 금융이 발전하면서 1938년 10월 1일 평택읍으로 승격하였고, 군(郡)의 지명도 진위군에서 평택군(平澤郡)으로 바뀌었다.
마. 해방 후 평택시의 이전과 발전
1946년 병술년 대홍수와 6.25전쟁은 평택지방에 엄청난 피해와 변화를 가져왔다. 1946년의 대홍수는 안성천 변에 건설한 신흥도시 평택을 수해로 휩쓸어 엄청난 피해를 주었고, 수해로 재기가 불투명한 시가지를 6.25전쟁 중 미군은 폭격으로 군청, 경찰서, 세무서, 금융기관, 병원 등 주요 시설을 비롯한 시가지 전체를 쑥밭으로 만들었다. 구 시가지(원평동)가 파괴되면서 기차역을 비롯하여 공공기관들은 한동안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다녔으며, 결국에는 철로의 동쪽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새 시가지에는 철도역을 중심으로 부채살 모양의 도로망과 경찰서, 군청, 시장, 상가, 극장, 시외버스정류장 등이 자리잡았다. 네모 반듯한 방사선 도로망 안에 건설된 공공기관과 상가, 병원, 시장, 종교시설들은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고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특히 1973년 아산만 방조제가 완공되면서 안성천 변에 새로운 간척지가 형성되고, 1971년부터 시작된 농지정리사업과 수리시설 개선사업의 결과 만성적인 수해와 염해에 시달리던 평택평야는 전국 최고의 옥토가 되었다.
1983 년에는 행정구역 조정이 이루어져 기존에 안성시 지역이었던 용이동, 죽백동, 소사동, 청룡동 등이 평택시로 편입되었으며, 1986년에는 평택읍이 평택시로 승격하였다. 이로써 평택은 1914년 행정구역이 하나로 통합된 이래 다시 평택시와 송탄시라는 2개의 시(市)와 1개 군(평택군)으로 성장하였다. 1987년에는 서부지역의 인구증가와 도시발전으로 안중출장소가 설치되었고, 1989년에는 안중면으로 분리 독립하였으며, 평택항과 포승국가공단 건설에 의한 인구증가로 2002년 12월 안중읍으로 승격하였다. 1991년에는 시, 군 의원 선거와 경기도의원선거가 실시되었고, 1995년에는 기존 세 개의 시, 군이 통합평택시로 합쳐졌으며, 이 해 6, 27지방자치선거가 실시되어 지방자치시대의 서막이 올랐다.
바. 송탄지역의 발전
송탄은 구한말 진위군 시절 일탄면과 이탄면 그리고 송장면으로 이뤄진 지역이었다. 일탄면과 이탄면은 본래 탄현(炭峴=숯고개)을 나눈 것인데,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송장의 송(松)과 탄현의 탄(炭)을 합하여 "송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일제시대 송탄(送炭)의 중심지는 중앙동 경부선 서정역 주변이었다.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이곳에 철도역이 세워지자 서정역은 평택북부지역의 교통과 상업, 물류의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역 주변에는 시장이 형성되었고, 기차역과 시장을 중심으로 상가를 비롯하여서정감리교회, 서정리 천주교회 등이 들어섰다.
송탄지역의 큰 변화는 6.25전쟁 후 미군기지가 건설되면서였다. 본래 평택지방 외국군 주둔의 역사는 멀게는 고려 후기 몽고군의 주둔, 임진왜란 때 왜군의 주둔, 1894년 청군과 일본군의 주둔으로 거슬로 올라가지만, 장기적인 주둔으로는 1939년 안정리 일대에 일명 302부대라고 하는 일본해군지원부대가 건설되면서라고 할 수 있다. 일제말 한국인을 징용으로 착출하여 건설된 이 부대는 6.25전쟁 중 미군이 접수하여 안정리 K-6 공군군기지가 되었으며, 이것을 계기로 송탄에도 K-55공군기지가 건설되었다. 송탄과 안정리에 미군기지가 들어서면서 부대주변은 크게 변모되었다. 본래 구릉지대와 농경지로 형성된 안정리 일대는 일자를 얻으려는 사람들과 피난민들이 몰려들었고, 부대주변에는 기지촌이 형성되었다. 또한 산등성이에 참나무가 많아서 적봉리 등에 숯가마가 발달하여 "숯고개"라고 불렀던 송탄의 탄현지역에도 사람들이 모여들고 부대정문과 후문을 중심으로 상가, 술집, 여관 등이 들어섰다.
이렇게 형성된 기지촌에는 인구의 급증과 활발한 경제활동으로 급격한 도시팽창을 가져왔다. 결과 1963년에는 송탄면이 송탄읍으로 승격하였다가 평택지방에서 가장 이른 1981년에는 송탄시로 발전하였으며, 안정리도 1972년에 안정출장소가 설치된 후 1979년에는 팽성읍으로 승격하였다. 1992년에는 새로운 시 청사를 준공하여 이전하였고 도시 동쪽으로 산업도로를 건설하여 이충동, 지산동, 송북동 일대에 신도시가 건설되었지만, 1995년 평택시, 송탄시, 평택군의 통합으로 "통합 평택시"가 만들어지면서 현재와 같은 행정구역을 갖게 되었다.
2. 평택지방의 지리와 지명
가. 면적과 산맥
평택시는 전체 면적이 452.31㎢이다. 넓이는 동서간 32.8km, 남북간 25.6km이고, 2읍 7면 13동으로 이뤄졌다. 이와 같은 면적은 경기도의 23개 시(市) 8개 군(郡) 중에서 5번째로 넓은 넓이다. 평택시에서 가장 넓은 지역은 팽성읍이고 가장 좁은 지역은 통복동이다.
평택의 지형은 동북쪽이 높고 나머지는 평야와 구릉지대이다. 진위면은 용인시를 지나온 광주산맥의 남은 줄기가 서탄면 마두리까지 뻗어있고, 북동쪽은 차령산맥의 지맥인 천덕산 줄기가 덕암산과 부락산을 이루고 있다. 산경표에 의하면 평택지방은 한남금북정맥이라고 하여 속리산 문장대에서 한남정맥으로 이어지는 곳의 중간에 해당한다. 한남금북정맥은 주변에 올망졸망한 구릉을 만들었는데, 평택의 덕동산(해발 30m), 자란산(해발 30m), 매봉산(해발 30m), 송탄의 부락산, 덕암산, 진위의 무봉산, 부산, 오성면의 오봉산이 그것이다.
나. 산과 강
평택지방은 동고서저형의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낮은 지형에 속한다. 그래서 산보다 평야와 구릉이 발달하였고, 평야지대는 대부분 충적토로 이루어진 저습지였다. 산으로 대표적인 것은 구 평택시의 세 봉우리인 덕동산(해발 30m), 자란산(해발 30m), 매봉산(해발 30m)을 비롯하여, 북부지역에는 무봉산(208.6m)과 부산(釜山), 부락산(149m), 남부지역에는 백운산(192m), 덕암산(164.5m), 팔룡산(122m), 부용산(34.8m), 서부지역에는 오봉산(112m), 백봉산, 고등산, 마안산(101m), 무성산(112m), 자미산, 비파산이 있다. 이 산들은 평소에는 바람을 막아주고 그늘을 드리워 산기슭에 사람들을 감싸주었고, 군사적으로 산성이나 봉수를 받아들여 유사시 평택지역을 보호하였다.
평택지방의 대표적 하천은 안성천과 진위천이다. 안성천은 총 연장 66.4㎞, 유역면적 1,699,60㎞의 하천으로 안성시 삼죽면 배태리 국사봉(일설에는 용인 남부)에사 발원한다. 삼한시대에는 웅천강(곰내)였고, 나중에는 홍경천, 한천, 소사천으로도 불렸다. 이 하천은 만경강이나 동진강보다 길이나 수량이 많아서 강(江)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또한 한천, 청룡천, 유천, 입장천, 성환천, 통복천, 도일천, 교포천, 대반천, 둔포천, 등 19개의 작은 하천을 지류로 갖고 있어 규모면에서도 상당하다.
안성천은 여름 백중사리에는 해수(海水)가 안성시 공도면 진사리 북쪽까지 역류하여 생선이나 새우젓, 소금을 실은 작은 상선들이 진촌마을까지 들어갔다. 바닷물이 역류하면서 안성천 주변에는 넓다란 습지가 형성되었다. 이 습지에는 사람 키의 두 배쯤 되는 갈대가 자랐고, 그 사이로 길이 나 있었다. 안성천 변 갈대밭은 처음 밭으로 개간되었다. 농업용수를 구할 수 없어 논농사는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 평궁리에 계미보가 만들어지고, 1970년대 초 아산만 방조제가 건설되면서 논으로 전환되었다.
진위천은 용인군 무네미 고개부근에서 발원한 하천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읍지(邑誌)에는 장호천으로 기록되었다. 진위천은 진위면 신리부근에서 오산천과 합류하고 서탄면 황구지리에서 황구지천과 하나되어 흐르다가 오성면 창내리에서 안성천과 합류하여 아산만(평택호)로 흘러든다. 진위천은 오산천, 황구지천을 비롯하여 지산천, 산하천, 관리천, 서정천 등 14개의 지류를 가지고 있다.
다. 인구분포
근대 이전만 해도 평택지방은 진위현, 평택현, 수원의 일부, 직산의 일부, 양성의 일부로 나눠져 있던 지역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이 지역의 인구통계를 산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가운데 가능한 지역은 옛 진위현과, 옛 평택현 뿐이다. 1789년에 편찬한 호구총수에 따르면 진위현에는 13개 리(里)에 2,137호(戶) 7,090명의 인구가 살앗는데, 그 가운데남자는 3,484명, 여자는 3,609명이었다. 평택현은 1,524호(戶)에 5,860명으로, 이 가운데 남자는 2,884명, 여자는 2,976명이었다. 두 고을을 합치면 총12,953명으로, 두 지역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까지 유추하면 대략 2만 명쯤 되었으리라 짐작된다.
1914 년 행정구역이 통합되고 46년이 지난 1960년에는 인구가 155,879명으로 늘어났는데, 미군기지촌으로 성장하던 송탄의 인구가 34,143명으로 급증하는 양상을 보였다. 송탄과 함께 미군기지가 있던 팽성읍의 인구도 18,742명으로 급증했는데, 구 평택시만 24,873명으로 완만한 성장을 보였다. 면(面) 단위 지역은 오성면이 14,543명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살았고 진위면이 8,295명으로 가장 적게 살았다. 그러다가 1980년이 되면서 전체 인구가 234,356명으로 늘어났고, 2002년 12월에는 12만 2294세대, 35만 8531명(남자 18만 1380명, 여자 17만 7151명)으로 늘었다. 지역별로는 평택과 송탄의 인구가 6만 명을 넘어섰고, 팽성읍이 31,018명으로 성장하였다.
라. 도로
근대이전의 교통과 통신은 중앙집권강화와 관련되었다. 그래서 고려시대보다는 조선시대가, 조선시대보다는 일제강점기의 도로망이 잘 정비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을 8대로 또는 10대로(大路)로 정비하였다. 대로(大路)는 한양을 중심으로 연결되었으며, 마차가 지나갈 정도의 넓은 도로를 말한다. 10대로 중에서도 가장 큰 도로는 한반도의 남북을 가르는 삼남대로(三南大路), 영남대로(嶺南大路), 의주로 등이었다.
조선시대 평택지방은 삼남대로와 제7대로(대동지지)였던 충청수영로가 지났던 길목이면서 성환찰방이 관리하는 성환역도가 지나는 요지였다. 삼남대로는 수원과 오산을 지나 진위, 갈원, 소사를 거쳐 천안, 공주, 전주, 남원으로 가는 길인데, 춘향전에도 수록되면서 "춘향이길"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또 갈원(칠원1동)에서는 충청수영로가 갈라졌다. 이 길은 충청수영이 해미에서 보령시 오천면으로 옮겨간 효종(17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도로인데, 갈원에서 시작하여 군문포를 건너 객사리, 아산, 신창, 예산, 홍성을 거쳐 오천의 충청수영에 다다랐다. 역도(驛道)는 수원을 거쳐 진위의 청호역, 원곡의 가천역을 지나 소사교를 거너 성환에 당도하고, 여기에서 한 길은 천안으로 다른 한 길은 팽성읍 추팔리의 화천역을 거쳐 충청 서부지역으로 나갔다.
대로(大路)가 지나는 길에는 역(驛)이나 원(院)이 설치되었다. 역(驛)은 역마를 갈아타고, 숙식을 할 수 있는 시설을 말하며, 원(院)은 걸어서 공무를 수행하는 관원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일종의 공공주막이었다. 평택지방에 원(院)이 설치된 곳으로는 이방원(갈곶리), 장호원(신리), 백현원(동막), 갈원(칠원동), 소사원(소사동)이며, 역(驛)은 청호리의 청호역, 팽성읍 추팔리의 화천역이 있었다.
마. 지명
평택(平澤)이라는 지명은 옛 평택현이었던 팽성읍 지역이 조수가 밀려드는 간석지가 많고, 넓고 평평하였던 데서 만들어졌다. 진위(振威)는 본래 송촌활달이라고 부르던 것을 5세기 고구려 지배기에 부산(釜山)이라고 바꾸었다. 부산(釜山)은 "솟뫼"라는 우리말로 고구려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는데, 나중에 쓰이기 시작한 진위(振威)도 같은 의미라고 생각된다.
송탄(松炭)은 조선시대에는 송장면과 탄현면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통합되어 송탄(松炭)이 되었다. 송장(松莊)은 고려시대까지 존재했던 송장부곡이라는 특수행정구역에서 비롯되었으며, 숯고개라는 의미를 가진 탄현(炭峴)은 적봉리에서 만든 참나무숯을 지고가던 사람들이 넘나들던 "숯고개"라는 고개이름에서 유래하였다.
팽성(彭城)은 조선시대 평택현의 별호로서 임진왜란 이후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05년 경부선 평택역이 만들어지고 역(驛) 주변에 평택면이 건설되면서 본래 이름을 상실했다가, 1938년 진위군이 평택군으로 바뀌면서 기존의 평택지역을 팽성면으로 이름을 정하면서 공식적인 지명이 되었다.
고덕(古德)은 1914년 진위군 고두면과 수원군 종덕면이 통합되어 만들어진 지명이다. 고려시대 종덕면에는 종덕장이 있었는데 이것이 조선시대를 지나며 행정구역으로 자리잡았다. 서탄(西炭)면은 본래 진위군 일서면, 이서면, 이탄면 지역이 통합되면서 만들진 지명이다. 오성면은 구한말 수원군 숙성면과 오정면이 통합되어 만들어졌다. 오정면에는 조선 초까지 오타장이 있었다. 청북면은 수원군지역으로 토진면과 수북면 일부 청룡면, 서신리면 일부가 통합되어, 청룡면의 청(靑)과 수북면의 북(北)을 합쳐 청북면이라고 하였다. 포승면은 조선시대 수원군과 양성군 지역으로 고려시대까지 포내미부곡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포내면과 승량동면으로 불렸던 지역이다. 그것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포내면의 포(浦)와 승량동면의 승(升)을 합쳐 포승면이라고 하였다. 현덕면은 수원군 현암면과 광덕면, 가사면 그리고 직산군 안중면 일부를 통합하여 현암과 광덕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현덕면이라고 하였다. 안중읍은 본래 직산군 안중면과 포승면, 청북면, 오성면 일부지역이었는데, 1987년 면(面)으로 독립하였고, 2002년 12월 읍(邑)으로 승격하였다.
3. 평택지방의 인물
평택에는 우리지역에는 큰 산이 발달하지 않아서 인물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실제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평택지방은 인구도 적고 출세한 인물도 많지 않다. 하지만 그 이유가 지세(地勢) 때문은 아니었다. 조선시대에 과거에 급제하여 출세하려면 양반사족이어야 했고, 양반이라 할지라도 경제기반이 탄탄해야만 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공부라는 것은 십 수년 동안 일을 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대 이전의 평택지방은 지대가 낮고 조수(潮水)가 내륙 깊숙히 들어왔으며, 습지와 간석지가 많아서 농경에 매우 불리햇다. 더구나 식수와 농업용수의 부족은 인간의 생존 뿐 아니라 농업생산력을 크게 약화시켜 인구의 정착과 증가를 저해하였다. 이 때문에 양반 사족집단이나 동족마을이 형성되기 어려웠으며, 안정적인 경제기반을 바탕으로 학문에 정진하여 과거에 급제할 수 있는 인물을 배출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도 문과나 무과에 급제하였거나 근대 이후 독립운동과 문화운동을 통하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들이 여럿 배출되었는데, 최수성이나 원균, 홍익한, 안재홍 등이 그들이다.
가. 최수성
조선시대에 산림(山林=향촌)에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주력하며 정치적 비판세력을 형성했던 처사(處士)들은 재야의 진보적인 지식인이었다. 이들은 조선왕조 건국에 적극 동참하지 않았던 재지사족층으로서 수구세력화 한 훈구파의 정치와 지방통치를 비판하고 사회개혁에 대한 의지를 표방했던 세력이었다. 16세기 중반 평택지방에도 사림(士林)에 속했던 신진사류들이 있었다. 예컨대 팽성읍의 우남양, 송탄의 최자반, 최수성 등이 그들이다. 이 가운데 최수성은 중종 때 개혁의 주체로 활약했던 조광조, 김정 등과 정치개혁 및 학문과 사상을 같이하였던 대표적인 신진사류(新進士類)였다.
최수성은 본관이 강릉으로 강릉에서 태어났지만 8세되던 1495년 송탄의 남산골로 이주하였다. 그는 성장하면서 일찍이 기호사림의 터를 닦은 김굉필의 문하에서 조광조, 김정, 김식 등과 학문을 익혔다. 재능도 뛰어나서 젊은 시절부터 학식과 덕망 그리고 강직한 의리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명성을 얻었지만 훈구파가 주도하는 부패한 현실과 타협하기를 거부하였다. 이와 같은 태도는 관직을 거부하고 남산 기슭에 원정(猿亭)이라는 누정(樓亭)을 지어 벗들과 교유한다거나, 자신의 숙부였지만 훈구대신인 남곤, 심정 등과 어울리며 권모술수를 일삼던 최세절에 대한 비판에서도 볼 수 있다.
최수성의 나이 33세에 일어난 기묘사화(1519년)는 세상으로 향한 그의 마음을 닫아걸게 하였다. 더구나 평생의 벗이었던 조광조와 김정이 죄 없이 사약을 받은 것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는 현실에 절망하며 명산을 유람하며 술과 시(詩)와 거문고를 벗하고, 뜻맞는 벗을 만나면 그림으로 자신의 뜻을 내보였다. 그의 학문과 재주는 많은 사람에게 칭송을 받았지만, 불의한 훈구세력은 여론이 사림파 학자들에게 몰리는 현실을 두려워하여 최수성을 가만두지 않았다. 결국 최수성은 훈구파가 조작한 신사무옥(1521년)에서 주모자로 몰린 안처겸 등과 사건을 모의했다는 의심을 받고 잡혀 들어갔다가 결국 참형을 당하였다.
최수성은 젊은 나이에 관직에 나아가 뜻을 펴지도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냉철한 정신과 올곧은 삶은 죽은 후 후대의 추앙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사후 17년이 지난 중종 33년(1538년) 신원(伸寃)이 회복되었고, 중종 40년(1540년)에는 종1품인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1545년에는 한 급 올려 정1품 영의정에 추증되는 영광을 받았다. 또한 신장1동 남산의 무덤은 율곡 이이의 건의에 의해 성역화되었으며, 무덤 주변 10리 안에 있는 마을을 "제역동"으로 삼아 부역을 면제하고 묘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이와 함께 강릉의 향현사를 비롯하여 화동서원 등에 배향되어 후대의 존경과 추앙을 받았다.
나. 원균
도일동은 크게 상리, 내리, 하리로 나눈다. 그렇지만 덕암산 아흔 아홉 구비에 숨겨진 작은 마을까지 합하면 그 숫자는 헤아리기 어렵다. 그 가운데 하리에는 여의실, 갓골, 능골, 안말과 같은 동네가 있다. 도일동의 대성(大姓)은 원주(原州) 원(元)씨다. 해방 전후만 해도 원(元)씨들은 세 개 마을에 2백호가 넘게 살았다. 도일동 원주 원(元)씨들의 입향조(入鄕祖)는 세종 때 호조참판 등을 역임했던 원임(1419 - ?)으로 알려졌다. 원임이 도일동의 토호였던 진주 소(蘇)씨 가문에 장가들어 살면서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원주 원씨 가문은 처음 문신으로 입신하였으나 나중에 무인(武人)으로 크게 이름을 날린 무인(武人)집안으로 알려졌다. 입향조(入鄕祖)였던 원임(元任)(또는 원몽이라고도 함)을 비롯하여 원균의 아버지 원준량도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무인이었으며, 원균을 비롯하여 셋째 원전, 둘째 원연의 아들 원사립, 원균의 아들 원사웅도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전후 크게 공(功)을 세운 인물들이다.
원균(元均)은 원준량의 장남으로 도일동 하리 안말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호탕한 인물이었다. 젊은 나이에 무과급제를 한 뒤 조산만호 부령부사 등을 역임하면서 여진족 토벌에 큰 공(功)을 세웠다. 이와 같은 용맹함을 인정받아 임진왜란 직전에 경상우도수군절도사를 제수받았다. 원균은 부임 후 군비강화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두 달 후 발발한 임진왜란에서 왜군의 대군을 방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였다. 그럼에도 원균은 경상우수영이 보유한 네 척의 전함만으로 전라좌, 우수영의 구원군이 올 때까지 수차레의 전투를 치뤄 적선 10여 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이와 같은 전과는 이순신, 이억기 등과 함께 연합함대를 구축하기 전까지 왜군을 거제도에 묶어두는 효과를 거뒀다. 연합함대는 원균의 당파작전과 이순신이 고안한 학익진으로 당포, 당항포, 옥포전투 등에서 연전연승을 거뒀다. 전투에서 이순신이 뒤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역할이었다면 원균은 선봉에서 적선을 깨고 부수는 선봉장이었다. 그러나 전과를 보고하는 장계문제로 갈등을 빚더니, 나중에는 이순신이 먼저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르면서 더욱 심해졌다. 그러다가 이순신이 왕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죄로 백의종군하면서 원균이 통제사에 올랐다. 하지만 이순신을 옹호하던 권율에 의해 무리한 부산포 공격을 명령받고는 죽을 각오로 참전했다가 칠전량 해전에서 크게 패하여 아들 원사웅과 함께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논공행상에서 원균은 이순신, 권율과 함께 무신(武臣)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인 선무1등공신 원릉군(元陵君)에 봉해졌다.
원균의 묘는 가묘이다. 전설에 의하면 그가 죽은 후 왕이 하사했던 애마가 팔 한쪽과 유품을 입에 물고 천리가 넘는 길을 달려 고향으로 가져온 뒤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가족과 후손들은 유품으로 묘를 쓰고, 묘 옆에 애마의 무덤을 만들어 제사를 지냈다. 갓골에서 여의실로 넘어가는 고개에는 사당이 있으며, 선무1등공신 교서는 보물 제 1133호로 지정되었다.
다. 홍익한
팽성읍 본정리 꽃산 북동쪽 기슭에는 홍익한의 묘(墓)와 포의각이 있다. 이 비각에는 병자호란 때 삼학사(三學士)의 한 사람이었던 화포 홍익한과 아들 수원, 증손자인 대성의 묘표 및 묘갈이 보존되어 있다. 홍익한(1586-1637)은 본관이 남양으로 팽성읍 함정리 서원말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선후기 서인(西人) 명문가문 중 하나였던 남양 홍씨이며, 중종 때 공신(功臣)으로 좌찬성을 지냈던 당원군 홍숙의 현손이다. 학맥으로는 기호학파 계통으로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며 명필이었던 이정구에게서 배웠다.
홍익한은 30세(1615)에 사마시(향시)에 급제하여 생원이 되었으며, 39세(1624)의 늦은 나이에 공주 행제시 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급제 후에는 가문과 학파의 후광을 입어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고, 병자호란이 일어났던 1636년에는 정4품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의 영향으로 명(明)나라가 급격히 쇠퇴하고 만주에서는 누르하치에 의해 여진족이 통일되면서 후금(청)이 건국되는 격변기였다. 특히 조선의 사대부들이 중화(中華)의 나라로 떠받들던 명(明)나라가 오랑케의 나라로 여겼던 여진족(후금)에게 멸망당하는 현실은 그들의 세계관(世界觀)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새로운 중국의 패자(覇者)로 부상한 후금(청)을 중화로 인정할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의 기로에 섰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광해군과 북인정권은 현실을 인정하여 중립외교로 명(明)을 달래고 후금(청)의 침입을 막았다. 하지만 재야세력이었던 서인(西人)과 남인(南人)은 화이(華夷)론이라는 성리학적 세계관을 내세워 현실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결국에는 서자(庶子)라는 광해군의 개인적 약점과 대의와 명분이 없는 중립외교의 문제점을 내세워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인조반정과 친명배청(親明排淸) 정책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후금(청)의 침입을 가져올 수 밖에 없는 필연적 조건을 내포하고 있었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자 내재적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조선은 당황만 하다가 맥없이 굴복하였다. 왕자들과 대신들을 보내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했지만 백성들은 응하지 않았다. 청(淸)나라에 ?i겨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왕과 대신들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현실을 인정하고 일단 화해를 하자는 주화파와, 명분을 앞세워 오랑케에게 절대 굴복할 수 없으니 죽더라도 끝까지 싸우자는 척사파로 나뉘어 소모적인 정쟁(政爭)만 일삼았다. 최명길 등 몇 몇 대신들을 제외한 서인과 인조반정의 주체들은 주전파였다. 이들에게는 국가보위나 백성에 대한 도의(道義)보다 자기 당(黨)의 명분과 안위가 중요하였다. 홍익한의 스승 이정구 역시 척사론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당시는 학파와 붕당의 입장을 자신의 입장과 동일시하는 시대였기 때문에 홍익한도 척화파의 입장에 서게 된다. 어쩌면 서인(西人)의 젊은 관료로서 스승보다 더 적극적으로 척화론을 주장했는지도 모른다. 남한성전투와 삼전도의 굴욕으로 병자호란에서 승리한 청(淸)나라는 적극적으로 친명배청(親明排淸)을 주장했던 김상헌과 홍익한을 비롯한 삼학사(三學士)를 5만 여 명의 포로들과 함께 수도 심양으로 끌고갔다. 심양에 끌려간 홍익한은 청(淸) 황제의 회유를 끝까지 거부하다가 처형되어 성문밖에 효수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향에서는 그의 유품을 모아 함정리 서원말 앞산에 안장했다. 홍익한은 당대보다도 사후에 더 큰 평가를 받았다. 그가 죽은 후 서인(西人)들은 북벌정책과 반청(反淸)분위기를 획책하기 위해 홍익한을 비롯한 삼학사를 충절의 상징으로 받들었다. 팽성읍 함정리의 포의사를 비롯하여 남한산성의 현절사, 강화도의 충렬사, 평양의 서산서원, 고령의 운천서원 등에는 국가와 집권층의 지원을 받은 서원(書院)과 사우(祠宇)가 건립되었고, 나라에서는 홍익한에게 충정(忠正)이라는 시호와 함께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홍익한의 묘는 본래 팽성읍 함정리 서원말에 있었다. 그러다가 1942년 일제가 안정리 일대에 군사보급시설을 건설하면서 본정리 꽃산 기슭으로 이전하였다. 묘(墓)가 옮겨간 뒤에도 신도비와 묘표, 묘갈은 그대로 방치되었는데, 나중에 지역 유지들에 의해 수습되어 본정리 꽃산의 묘(墓) 앞에 비각(碑閣 = 포의각)을 짖고 모셨다. 함정리 서원말에 있었던 포의사는 대원군 때 훼철된 뒤 복원되지 못하고 터만 남아있다. 신도비는 조선 후기 세도가 중 하나이며 당대 서인(西人)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민정중이 찬(贊)하였다. 서원(書院)의 이름으로 사용했던 포의(褒義)라는 말은 "의를 기리고 칭찬한다"라는 뜻으로 홍익한에 대한 조선후기 서인층의 평가를 잘 드러낸다.
라. 안재홍
민세 안재홍은 1891년 12월 30일 경기도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에서 안윤섭의 8남매 가운데 2남으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중농 이상으로 비교적 부유한 편이었으며 조부와 부친은 신문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려서는 고향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평택지방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 가운데 하나였던 고덕면의 진흥의숙에서 신학문을 수학하였다. 1907년에는 단발한 뒤 상경하여 황성기독청년회(YMCA 전신) 중학부에 진학하였다. 이곳에서 기독교 계통의 계몽운동가들인 이상재, 윤치호, 남궁억 등을 만나 국·내외 정세와 민족의식, 그리고 신학문에 대한 이해를 얻었다. 또한 이 시기 안재홍은 중국의 근대사상가인 양계초의 저작을 읽고 영향을 받았으며, 평생의 스승이랄 수 있는 단재 신채호를 만났다.
1910 년에는 부친과 이상재의 권유로 일본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서 공부하면서 조선인 기독교청년회와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에 관여하였다. 유학 중 1913년에는 상해로 밀행하여 이회영, 신채호가 조직한 동제사에 가담한 뒤 만주와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1914년 여름 와세다대학 졸업 후 귀국하여 김성수가 설립한 중앙고등보통학교 교감이 되면서 중앙기독교청년회 교육부 간사를 맡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안재홍은 1919년 3.1 운동에 적극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3.1 운동의 영향으로 결성된 대한민국청년외교단 결성에는 적극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의 연통제 역할을 담당하다가 구속되어 3년의 옥고를 치뤘다.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은 민족주의계열이 추구했던 외교독립노선을 추진하기 위한 국내청년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같은 태도로 볼 때 안재홍은 민족주의계와 행보를 같이 했던 인물이라고 분류할 수 있다.
옥고로 치루고 나온 1923년부터 32년까지 9년 간은 언론활동을 중심으로 각종 사회운동을 활발히 전개한 시기이다. 1923년 시대일보 창간에 참여하여 이사와 논설위원을 역임한 안재홍은 1924년부터 신석우와 이상재가 사주와 경영자로 있던 조선일보의 이사 겸 주필로 자리를 옮겼다. 대체로 그의 언론활동은이곳에서 전개되었고, 민족운동계에서도 "조선일보계"로 분류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기간동안 1925년 조선기자대회 부의장을 역임했고, 조선사정연구회, 태평양문제연구회 등에 참여했으며, 1927년에는 일제에 비타협적인 좌우합작단체들로 결성된 신간회의 총무가 되었다. 또 재만주동포옹호동맹 위원장, 1929년 생활개선운동 및 귀향학생 문자보급운동, 광주학생운동진상보고를 위한 민중대회 개최와 같은 일을 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재차 투옥되어 8개월의 옥살이를 하였다.
1930 년대는 국내외 적으로 커다란 전환기였으며 민세의 생애에도 시련과 함께 또 다른 전환기가 되었다. 국외적으로는 대공황 이후 제국주의 열강의 블록화 경제정책이 강화되고 그 영향으로 일제의 민주침략과 파시즘의 대두로 위기가 고조되었으며, 국내적으로는 신간회의 해소 이후 사회주의 노선과 민족주의 노선 대립, 일제 파시즘의 강화로 민족해방운동의 조건이 악화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신간회를 대신할 수 있는 조직재건을 시도했지만 실패하였고,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1931년)하였지만 일제가 조작한 공금유용사건으로 구속되어 합법적인 사회운동이나 언론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시기 안재홍은 사회, 언론운동 보다는 "조선학운동"이라고 부르는 문화운동에 몰두하였다. 특히 정인보 등과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간행을 필두로 실학연구의 불을 지폈으며, 1937년∼44년 사이에는 평택군 고덕면 두릉리 도릉산방으로 내려와 조선상고사와 사상사 등 신민족주의 역사학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여타의 민족운동과 절연하지 않고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국내활동을 하였으며, 조선어학회에도 깊이 관여하여 두 차례의 옥고를 더 겪었다.
잠시 이 시기 재홍이 주장한 신민족주의를 살펴보면, 내적으로 실력과 민족적 자각을 갖춘 자본주의적 근대민족을 지향하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강대국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약소국을 투쟁의 주체로서 인식하자는 것이었다. 또 투쟁이란 인간의 의식적 노력에 의한 투쟁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위해서는 동족, 동일계급, 동일 국민이 협동호애와 단결을 강조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극좌와 극우를 동시에 배척하고 민족과 계급도 민족공동체 안에서 조화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발전하여, 해방 후 계급투쟁보다는 계급협조를 통한 공생을 강조하는 좌우합작을 모색하게 하였다.
안재홍은 일제의 패망이 다가오자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결성 부위원장이 되어 해방 후 좌우합작을 통한 민족국가건설을 가장 먼저 시도한 인물이다. 그러나 해방 후 남북한에 진주한 미군정이 건준을 비롯한 어떠한 정치단체를 인정하지 않은 데다, 조직 내에 좌, 우 대립이 심각해지는 가운데 좌익이 주도권을 장악하자 우익들?? 임시정부 정통론을 주장하며 집단 탈퇴하면서 분열되었다. 안재홍은 건준 탈퇴 후 중도 우익적 성향의 국민당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이후 각 정파별로 우후죽순처럼 정당이 창당되고 좌,우대립과 분열이 격화되자 여운형, 김규식과 함께 "정당 통일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념과, 계급적 기반이 다르고 정치적 입장이 다른 세력들을 하나로 통합하기란 처음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승만과 한민당등 극우세력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하면서 중도 우파적 입장의 안재홍을 비난하였고, 극좌적인 공산주의 세력도 우익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며 중도파를 비난하였다.
1947 年 2月에는 미군정 하에서 민정장관에 취임하는데, 취임 후에도 극우세력은 민세를 비난하고 궁지에 몰아넣었다. 여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친미극우세력인 이승만과 한민당 은 미국의 지원하에 1948年 5月 10日 총선거를 통하여 단독국가 수립에 착수한다. 안재홍을 비롯하여 김구, 김규식 등은 남한만의 국가건설은 민족을 분열시키고 분단시킨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통한 남북협상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에 의해 김구가 암살되고 남북한에 분단국가건설이 이뤄지면서 통일된 민족국가건설은 실패하였다.
안재홍은 1950년 제2대 민의원(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택을 지역구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 해 발발한 6.25전쟁에서 피난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있다가 납북되었으며, 1965년 74세에 사망하였다. 장례위원장은 벽초 홍명희였으며, 해방전후의 공적을 인정받아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었다.
김해규의평택이야기 평택의역사와지리 2003-08-28]
한광중교사,평택향토문화동우회회장
* 2004.6.10 올린내용을 정비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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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울딸 숙제로 써야지쌩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