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딩이 두려우세요?
1. 로맨틱한 드레스에 패딩점퍼를 입은 매기 질렌할. 왠지 야외 찰영중인 신부같지만 사랑스러운 것만은 사실.
2. 팝스타답게 패딩을 소화한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3. 그레이로 통일한 사라 제시카 파커의 포스 넘치는 패딩룩
가뜩이나 매서운 칼바람에 몸을 움츠리게 되는데 내려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살인적인 환율까지 가세해 유난히 춥게 느껴지는 겨울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이맘때면 통과의례처럼 여겨지는 코트 쇼핑은 엄두도 나지 않는다. 하지만 매년 입는 코트들을 또다시 유니폼처럼 입고 다니긴 싫고, 이를 어쩐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무렵 문득 주변 사람들의 차림새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럴 수가! 온세상이 매트릭스임을 깨달은 레오처럼 혼란스러운 눈길로 인지한 그들의 아우터는 하나같이 ‘패딩’이었다. 이런 패셔너블한 스미스 요원들 같으니라고. 블랙 벨티드 패딩 점퍼로 허리를 졸라매고 블랙 드레스와 플랫 슈즈를 매치해 일명 ‘프라다 걸’분위기가 나는 편집장부터, 유난히 추웠던 어느 날 보기에도 든든한 패딩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미팅 다녀올게요”라며 씩씩하게 외근 나가던 옆자리 후배, 나도 모르게 확 안아버릴 뻔할 만큼(다행히 그러진 않았지만) 폭신하게 부푼 패딩 쇼트 점퍼를 입고 스튜디오로 들어서던 촬영 스태프, 심지어는 아침 운동 나가시던 어머니까지 패션계와 일반인(?)을 막론하고 모두가 패딩, 패딩, 패딩!을 외치는 듯했다. 물론 따뜻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패딩이 겨울철 머스트 해브 아이템임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것이지만, 이번 겨울에는 그 체감 정도가 심상치 않다는 이야기.
패딩의 반란!
그래서 나는 즉각 이 ‘패딩 열풍’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우선 트렌드를 가장 손쉽고 발 빠르게 포착할 수 있는 방법은 셀러브리티들의 스타일 탐구 아니겠나. 패딩을 입지 않고도 이마에 땀이 날 만큼 열심히 클릭한 결과, 나는 또 한 번 놀라게 됐다. 기껏해야 촬영장에서 담요 대신 두르고 있거나 후줄근한 트레이닝 팬츠에 생수 통 하나를 들고 휘트니스에서 나오는 차림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던 터였다. 그런데 사진 속 그녀들은 하나같이 모직 코트보다 시크한 패딩 룩을 뽐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사실 에디터는 패션 에디터로서 엄숙한 어조로 이미 지난해 겨울부터 ‘이제 패딩을 고를 땐 재단을 체크할 것’ ‘스키장보다 도심에서 패딩을 입을 것’이라 기사를 써 왔다. 하지만 정작 뚱뚱해 보일 것을 걱정하며 은연중에 패딩을 멀리해왔던 걸 가슴 깊이 반성할 수밖에 없었다. 패딩 코트를 입고도 특유의 에지 있는 분위기를 잃지 않는 카린 로이필드부터 올 블랙 룩으로 세련된 패딩 룩을 입은 블레이크 라이블리, 단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미쉐린 타이어처럼 빵빵한 오버사이즈 패딩 롱 코트를 입은 올슨 자매, 그리고 복고적인 플로럴 프린트 드레스와 글래디에이터 샌들에 패딩 점퍼를 척하니 믹스 앤 매치한 사라 제시카 파커까지. 심지어 드라마에서 사라와 함께 머리부터 발끝까지 럭셔리한 자태로 맨해튼을 거닐던 킴 캐트럴까지 패딩을 간택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그러들지 않는 의구심은 ‘혹시 그녀들이라서 가능한 것이 아닐까?’란 생각. 그래서 이‘파워 퍼프 걸’패션의 배후 세력인 디자이너들을 살펴보면 좀 더 이번 패딩 트렌드에 공감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매년 멋진 패딩 점퍼를 내놓을 뿐만 아니라 지난 2007 F/W 컬렉션에서 블랙 룩에 비비드한 패딩을 섹시하고 터프하게 매치했던 디스퀘어드2(패딩 점퍼의 위아래를 뒤집어 입었던 전위적인 스타일링을 기억하는지?)를 머릿속으로 스캔하면서 컬렉션을 뒤지기 시작했다. 우선 여자들에게 가장 어필할 것 같은 패딩은 블루마린. 달콤한 파스텔 컬러를 덧입은 블루마린의 패딩 점퍼나 베스트는 로맨틱한 실크 드레스나 화이트 프릴 블라우스에 매치되어 여자들의 감성에 무리 없이 연착륙했다. 특히 ‘군밤 장수’ 스타일의 우리네 고전적인 패딩 조끼를 생각해볼 때 사랑스러운 패딩 베스트는 패딩 룩의 완연한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라 할 수 있겠다. 더구나 피트되는 실루엣으로 몸매를 맵시 있게 보이게 해주니 더할 나위 없는 아이템.
하지만 음식이든 옷이든 지나치게 ‘단 것’은 쉽게 질리는 법. 때문에 전형적이지 않고 럭셔리하면서도 자주 입어도 질리지 않을, 좀 더 모던한 패딩 룩을 만나고 싶었다. 해답은 장 폴 고티에와 드리스 반 노튼에 있었다. ‘심 봤다’ 싶었던 건 장 폴 고티에의 지브라 프린트 패딩 점퍼와 코트. 모든 여자들의 은밀한 로망인 애니멀 프린트와 자칫 잘못하면 여자들을 떨게 만들 수도 있는 패딩의 만남이라, 그 결과는 와일드하고 화려하면서도 세련되고, 어딘가 긴장감을 잃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프린트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건 역시 드리스 반 노튼. 이번 컬렉션도 어김없이 에스닉하면서도 에지 있는 갖가지 프린트들로 뒤덮였지만 정작 프린트 패딩 자체가 등장한 것은 아니었다. 드리스 반 노튼이 풀어낸 방법은 현란한 프린트 시폰 톱과 팬츠에 매치한 미니멀한 블랙 크롭트 패딩 재킷으로, 모던함을 만드는 데 블랙이 핵심 요소로 작용했다.
마지막으로 런웨이에서 추출할 수 있는 패딩의 중요한 단서는 ‘형태’다. 사실 몇 년 전부터 패션의 가장 큰 화두는 ‘견고한 테일러링을 바탕으로 좀 더 모던하고 구조적인 실루엣을 구축할 것’이다. 그를 위한 여러 가지 방법론이 있겠는데 겨울철에는 주로 이런 이유들이다. 우리가 별다른 아이템 없이 아우터로만 승부해야 하는 겨울철이 되면 이자벨 마랑의 박시한 코트를 꺼내 입으며 볼륨에 집중하는 현실적인 이유일 수도 있고, 겨울잠을 자는 대신 런웨이의 구조적인 의상들을 보며 변함없는 패션 판타지를 원하는 이상적인 이유일 수도 있다. 둘 중 어느 쪽이든 패딩 룩에서도 이 노선을 견지하는 컬렉션들 중 이번 시즌 리스트업해야 할 것은 자일스 디컨, 지암바티스타 발리, A.F 반더보스트, 아이스버그, 언더커버 등이다. 우선 반더보스트는 블랙, 화이트, 그레이로 컬러감을 최소화하고 직선적인 실루엣을 강조한 패딩 점퍼를 런웨이에 올렸다. 전체적으로 실루엣이나 디테일에서 조형미를 살린 지암바티스타 발리의 컬렉션에서 패딩도 예외는 아니어서, 어깨와 힙을 한껏 부풀린(마치 겨울철 호빵 같다고나 할까) 화이트 패딩 드레스나 목부터 어깨 라인을 삼각형으로 연출한 패딩 점퍼 등이 소개됐다. 아이스버그는 올 블랙의 패딩 룩을 제안했는데 헴 라인을 빵빵하게 채우거나 어깨 라인을 둥글리거나 허리를 조이고 소매를 거대한 퍼로 연출하는 등 과장된 실루엣을 이어갔다. 이들보다 더욱 멀리 간 경우는 익히 짐작하다시피, 남다른 포스를 뿜어내곤 하는 자일스 디컨과 언더커버다. 하지만 자일스 디컨은 닥스에서의 경험 때문인지 예전에 비해 한결 웨어러블한 방법을 고심한 듯 보인다. 로봇을 연상시키는 파워풀한 형태의 패딩 베스트가 등장했지만 성숙한 무드의 컬렉션 전체를 놓고 볼 때 결코 ‘투 머치(Too Much)’는 아니었다. 언더커버도 자일스 디컨처럼 미래적인 무드의 컬렉션이었는데, 쇼 전반부에 등장한 SF 소설을 연상시키는 진지하고 매니시한 그레이 룩도 좋았으나 무엇보다 후반부의 컬러풀한 패딩들이 판타스틱한 분위기를 상승시키는 데 일조했다.
1 시크한 모녀란 이런 것. 패딩 커플룩을 입은 케이티 홈즈와 수리
2 패딩 롱 코트가 두렵다면 브레이크 라이블리의 룩을 눈여겨볼 것.
3 뚱뚱한 패딩을 입는’상후하박’ 원칙을 보여주는 넬리 퍼다도.
4 역시 스타일 퀸은 다르다. 패딩 룩에서도 믹스 앤 매치를 잊지 않는 사라 제시카 파커.
패딩, 스타일로 거리를 덮다
셀러브리티와 디자이너들의 패딩 트렌드를 훑었다면 좀 더 현실적인 리얼웨이 룩으로 눈을 돌려야 할 차례. 사실 이번 시즌 패딩 열풍은 런웨이보다 거리에서 확인하는 것이 빠를 것이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스타들이나 패션쇼는 그렇다고 치자, 따뜻함이야 두말할 것 없지만 아무리 고민해도 실제로 입기엔 고난이도로 보이는 패딩이 언제부터 거리를 점령하게 된 걸까? 대답은 매년 패딩을 선보이는 스포츠웨어 브랜드나 스트리트 패션 브랜드들이 좀더 날씬해 보이고 가벼운 패딩 아이템을 선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패딩 아이템 중 점퍼보다 상대적으로 실루엣이 부담스럽지 않은 베스트의 비율이 높아진 것만 봐도 그렇다. 이번 시즌 푸마가 소개하고 있는 ‘슬림 피트 구스다운 재킷’이 대표적인 예. 패딩은 무엇보다 스티치로 인한 패널의 폭이 날씬함을 연출해주는 결정적인 요소인데 아무리 심플한 디자인이라 할지라도 패널이 넓을수록 되려 뚱뚱해 보이며 두루뭉술한 인상을 만드는 것. 푸마의 이번 점퍼는 얇은 패널과 슬림 피트, 구스다운을 개별 주입하는 섬세한 방식으로 제작하여 옷의 무게를 최대한 줄인 것으로 날씬한 패딩의 모범 사례다.
물론 이런 변화에는 높은 가격에도 자꾸만 손이 가는 명품 패딩 브랜드와, 하이 패션과 그 브랜드들의 콜래보레이션이 끼친 영향도 있다. 1952년 최초로 다운재킷을 선보인 후 프랑스 엘르에 소개된 이래 패션 브랜드로 자리잡은 몽클레어(Monclear)가 발렌시아가나 준야 와타나베 등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 파트너십을 만들었던 것이 좋은 예. 몽클레어는 쿠튀르 라인인 ‘감므 루즈(Gamme Rouge)’ 라인을 알렉산드라 파치네티(구찌와 최근 발렌티노를 거쳐간 디자이너)에 이어 최근 지암바티스타 발리와 협업하면서 패션 피플 사이에서 더욱 인기가 높아졌다. 구스다운의 명가와 세계적인 쿠튀리에가 만났으니 그 상승작용이 남다를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 지암바티스타 발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몽클레어의 기술력을 우아한 방식으로 사용하고자 했어요. 건축적인 방식으로 패딩을 디자인하고 싶었고, 여성들의 옷장에 오랜 세월 동안 걸릴 수 있는 클래식한 아이템을 바랬죠.” 이제 패딩도 여자들의 영원한 클래식인 트렌치 코트나 LBD처럼 ‘신분 상승’할 수 있단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이탈리아 브랜드 듀베티카(Duvetica)도 만만치 않은 가격대의 럭셔리 패딩임에도 불구하고 젊고 캐주얼한 디자인으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인기가 높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고원혜 원장은 최근 맘먹고 이 듀베티카를 구입한 경험을 전했다. “촬영장 등에서 일할 때 편하게 입으려고 큰맘먹고 샀는데 진짜 따뜻해요. 지금 날씨에 이너웨어로 반팔만 입었는데도 등이 후끈거릴 지경이라니까. 패딩은 자칫 잘못 입으면 뚱뚱해 보이기 십상인데 이 패딩은 속이 좋은 건 물론이거니와 겉감부터가 비닐처럼 얇고 감촉도 좋고 몸매가 날씬해 보이는 핏이 나오더라고요. 보통 패딩 점퍼가 블랙과 화이트 아니면 아예 컬러풀한데 그레이와 브라운을 미묘하게 섞은 듯한 남다른 컬러감도 좋고요. 평소 좋아하는 보헤미안 풍의 롱 스커트나 드레스와 매치해서도 입어볼 생각이에요.” 그녀가 구입한 듀베티카나 앞서 얘기한 몽클레어(국내에선 분더숍에서 구입할 수 있다)의 경우엔 기꺼이 지갑을 열 만한 가치가 또 있다. “나, 000 입었어요”라고 말하는 듯 큼직한 로고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옷이나 백, 슈즈보다 한 번 봐서는 어느 브랜드인지 모르지만 어딘가 모르게 멋지고 독특한 아이템이 더욱 투자 가치가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모두가 거금을 들이는 모직이나 퍼 코트 대신 당연히 저렴할 것이라 여기는 패딩을 럭셔리한 것으로 골라 입는다면 세련된 아우라를 큰 노력 없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자, 이제 거의 결론에 도달했다. 좋은 패딩을 고른 후엔 어떻게 입어야 할까? ‘날씬하게 옷입기’는 여자들의 영원한 화두이지만 때론 발상의 전환을 시도해보는 것도 좋다. 메이크업 아티스트 박태윤 실장의 하우투에 주목해보자. 에디터는 이미 지난해 몽클레어 패딩을 누구보다 멋지게 연출한 그의 스타일링을 눈여겨본 터,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디자인이 괴이하지 않고 베이식해서 좋았어요. 은근히 지난해에 산 건지 재작년에 산 건지 모르게 해주는 디자인이니까요. ‘세월을 견디는 아이’라 할 수 있죠. 패션지에 패딩을 날씬하게 입는 법에 대해 많이 나오더라고요. 하지만 패딩의 진짜 매력은 오히려 그 부피감을 즐기는 데 있다고 생각해요. 상체는 부하게 하체는 스키니하게 연출해서 전체적으로 밸런스를 맞춰주면 뚱뚱한 패딩도 문제 없어요. 빵빵한 패딩을 코듀로이 팬츠와 입어 약간 귀여운 학생처럼 입거나 샤이니한 질감의 스키니 진과 입어서 트렌디한 느낌을 즐기는 편이에요.”
그렇다. 패션에는 정답도 왕도도 없듯, 결국 패딩에도 천편일률적인 룰은 없는 것이다. 단, 빵빵한 그 양감처럼 패딩은 확실한 애티튜드(부피감을 즐기거나 맵시를 선택하거나)로 입는다는 것만 기억한다면! 그 다음엔 타이트한 블랙 라텍스 팬츠와 킬 힐을 매치한 록 시크 스타일로 입든, 나긋나긋한 시폰 드레스와 입어 로맨틱 프린세스로 거듭나든, 스톤 워싱 진에 입어 80년대를 만끽하든, 블랙 뿔테 안경을 끼고 너드(Nerd) 풍으로 연출하든, 컬러풀하고 오버사이즈의 힙합 스타일로 입든, 재킷이나 코트, 비니와 긴 니트 워머에 매치해 그런지 룩을 즐기든 간에 모두 모두 각자에게 달려 있다. 코트보다 저렴하고 아노락이나 레더 재킷보다 따뜻할 뿐만 아니라,하이 패션과 스트리트 패션, 여성성과 남성성, 우아함과 캐주얼함 사이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발군의 실력을 뽐내고 있는 패딩, 그러니 어찌 도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자세한 사항은 엘르 본지 1월호를 참고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