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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시집 디자인하우스 센텐스 -시집 속의 시 -신작시 -시작노트 함기석 *1966년 충북 청주 출생. *1992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국어선생은 달팽이』, 『착란의 돌』, 『뽈랑공원』, 『오렌지 기하학』,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동화집 『상상력 학교』 *이형기문학상, 박인환문학상. 눈높이아동문학상 등 수상. ---------------------------------------------------- 시집 속의 시
포텐셜 에너지 외 4편 -언어
두 개의 탄환구멍이 뚫려 있다
생사(生死)를 일시에 관통당한 새가
철철 피를 흘리며 날고 있다
너의 눈동자 속
그곳은 태초의 암흑이자 최후의 설원
모든 시간들이 산산이 부서져 흩날리는 광야
혼(魂)과 백(魄)
두 개의 탄환이 무한을 날고 있다
새를 위한 목적어 침대
새가 난다 쉴 곳을 찾아 도시 상공의 1연을 난다 다음 문장의 공원으로 날아간다 도착해 보니 도축장이다 다음 문장의 놀이터로 날아간다 도착해 보니 사격장이다 포수가 총을 들고 서 있다 새는 놀라 도망친다
새가 운다 날개 아픈 새가 쉴 곳이 없어 운다 병원 창가 2연에서 휠체어 탄 아이 코코가 바라본다 외로운 새에게 말한다 외톨이 새 아무야 울지 마! 새가 날면 주어가 날아 얼룩말이 날고 주전자가 날아 우체통도 날고 집도 나무도 젖소들도 함께 날아
새가 웃는다 지친 새가 구름 옆의 3연에서 웃는다 아이는 새를 위해 선물을 놓는다 까마득한 공중에 살며시 목적어 침대를 놓는다 침대 곁에 풍금을 놓고 나팔꽃 화분을 놓는다 새가 환하게 웃는다 코코에게 고맙다고 윙크하고는 침대 속으로 쏙 들어가 달콤한 잠에 빠진다
새가 잠든 사이 나팔꽃 속에서 하얀 손이 나와 풍금을 연주한다 음악에 맞춰 핑 퐁 핑 퐁 젖소들이 나무들이 바람과 춤추고 침대 끝에서 새의 꿈이 하얗게 흘러내린다 새장 같은 아이의 병실 창밖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5연의 연못으로 방울방울 파문을 그리며 떨어진다 타임커피숍 센텐스
내가 센텐스로 들어서자 말러의 음률이 흐르고 푸앵카레가 커피를 내리고 있다 당신이 주인입니까? 아닙니다, 저는 이 센텐스의 주어일 뿐입니다 천장과 바닥의 낯선 기하학 타일엔 크레용 낙서들 조물주는 왼손잡이라네, 살짝 삐뚤어진 고추∼ Being in two places at once. Holy shit!
피아노에 방울토마토 닮은 예쁜 유리어항이 놓여 있다 눈이 튀어나온 물고기 꽐라, 햇빛에 비늘이 반짝거린다 너도 주어니? 내가 묻자 꽐라가 대답한다 대답하기 싫은데요, 흥! 물고기가 휙 방향을 바꾸자 갑자기 센텐스의 앞문과 뒷문이 뒤바뀌고 벽들이 구불구불 휜다 컵도 꽃병도 테이블도 의자도 마구 뒤틀리고
시계는 엿가락처럼 휜다 창가에 혼자 앉아 책을 읽던 뼈다귀 유령 함기석 입이 좌우로 3미터쯤 길게 늘어나 밀반죽처럼 구불거리다 손잡이 달린 프랑스 커피 잔 모양으로 변한다 푸앵카레가 내 쪽으로 걸어온다 손님, 어떤 타임 커피를 드시겠습니까? 블랙 화이트 레드 블루 옐로우 맘대로 고르세요
저희 가게는 아침엔 1형식, 점심엔 2형식, 저녁엔 3형식 밤엔 4형식, 자정엔 5형식, 자정 이후엔 6형식 라떼랑 7형식 에스프레소가 향이 좋습니다 마시면 바나나, 애플, 도롱뇽, 시소, 벙어리장갑이 되는 마시면 시어핀스키삼각형(1.58차원)이나 코흐곡선(1.26차원)처럼 소수 차원 사물이 되는 커피도 인기 있습니다
꽐라가 살살 꼬릴 흔들며 나를 꼬나본다 백만 년 전에 죽은 무덤 속 오르골 아가씨 쳐다보듯 꽐라가 살살 물의 우주를 몸으로 흔들며 나를 쳐다본다 저 장난꾸러기 물고기 진짜 이름이 뭡니까? 조물주라고 추측됩니다 내일 또는 당신
나는 메뉴판을 뒤적거리다 맨 아래쪽 기호를 가리킨다 내 죽음의 d차원 측도 Md(나) 이 무색 커피로 주세요 그때 유령이 스르르 모자이크 시계가 걸린 벽을 통과해 센텐스 밖으로 나간다 잠시 벽 틈에 궁둥이가 끼어 낑낑거리다가 정오의 정원과 오염된 땅을 지나 카운트다운 해변이 보이는 0차원 숲으로 들어간다
나는 조용히 일어나 그가 보던 책을 집어든다 시집 『디자인하우스 센텐스』다 목차를 살펴보는데 타임커피숍 센텐스에서 365m 떨어진 디자인하우스 센텐스 유리창 불빛이 빨갛게 반짝거린다 그 지붕 위 하늘에 새를 위한 목적어 침대가 놓여 있다
무한 빛깔 소녀 코코가 센텐스 뒷문으로 들어선다 천장을 따라 말러의 음률이 꿀물처럼 흐르고 푸앵카레가 커피를 내리자 물고기 꽐라가 획 방향을 바꾼다 그러자 갑자기 벽과 바닥과 천장이 더 부드럽게 출렁출렁 회전하고 피아노 다리는 점점 길어져 기린이 되고
코코 곁에서 그녀의 예쁜 코를 바라보다 나는 2차원 경계가 없는 3차원 다양체(manifold) 속에서 목이 꽈배기처럼 580도 돌아간 채 창밖을 본다 목련공원, 열세 개의 종이무덤이 보이고 치즈피자처럼 구워져 둥글고 맛있게 부풀어 오르는 세계, 유령이 깃든 시계의 방들이 보인다 방마다 당신은 지금 무수한 당신의 유령과 함께 디자인하우스 센텐스를 읽고 있다
차원이 뒤틀린 잠 속에서 꿈꾸며 당신은 지금 ‘당신은 지금 당신을 꿈꾸고 있다’고 읽고 있다 그렇게 당신도 나도 과거와 미래, 그 균열의 크레바스로 무한히 증발 중인 센텐스 좀비들 그림자와 모래와 피와 설탕이 배합된 귀신의 커피를 마시며
평행선 연인
어떤 문장은 가스 덩어리다 수소와 헬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핵이 없다 내가 라이터 불을 대면 그 즉시 폭발하여 내 얼굴을 태워버린다 눈을 태우고 귀를 태워버린다 그런 밤
어떤 문장은 촛불이다 타오르는 파도고 노래하는 풍랑이다 어떤 문장은 청색 멀미를 일으키고 어떤 문장은 스스로를 문장 밖으로 내쫓아 아름다운 숲이 된다 그런 밤
유성우는 쏟아지고 어떤 문장은 제 몸을 길게 늘여 검은 라인이 된다 라임이 된다 x축이 되고 y축이 된다 1차원 곡선이 되고 2차원 방정식이 된다 그런 밤
나는 나라는 3차 방정식의 세 허근이다 시간은 계속 자신의 몸을 사방으로 끝없이 늘여 좌표평면이 되고 있다 무한의 우주가 되고 있다 그런 밤
지구는 하나의 점, 화성도 목성도 토성도 우주를 뛰노는 모래알 삐삐들, 밤하늘엔 흰 고래들만 헤엄쳐 다니고 어떤 문장은 문장이 없다 입이 없다 항문이 없다 그런 밤
돌이켜 보면 나의 삶 또한 한 장의 창백한 백지였다 발을 찾아 떠돌던 외발의 펜이었다 그런 밤 나는 해저에서 어떤 문장을 가져온다 그곳은 너의 눈동자 물의 침실 아픈 새들의 둥지
돌이켜 보면 너의 삶 또한 불 꺼진 찬 방이었다 세계는 수족관이고 넌 바닥에 납작납작 엎드리다 한쪽으로 눈이 돌아간 넙치였다 그런 밤
우리는 평행선 연인, 안을 수도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난경의 문장들, 건드리면 그 즉시 울음이 터져버릴 작은 물 풍선들 그런 밤
어떤 문장은 약에 취해 있고 어떤 문장은 칼에 찔려 쓰러져 있고 어떤 문장은 모든 기억을 잃어 표정조차 없다 그런 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런 밤
코코의 초공간 유머 랜드, 떠다니는 APT
개신동 현대 아파트에서 13층이 서랍처럼 쑥 빠지더니 밤하늘을 둥둥 떠간다 미아동 24층짜리 평화 아파트 옥상에 내려앉는다 2401호엔 정신과 여의사 레비너스가 산다
아침이 되자 하늘에서 벌레비가 내린다 노란 비는 스멀스멀 아파트 단지 전체를 기어 다니며 벤치를 갉아 먹고 고양이도 갉아 먹는다 여의사의 얼굴 가득 질경이 풀이 돋아 있고 목덜미는 녹색 이끼로 뒤덮여 있다
한 아이가 계단을 오른다 정면으로 보면 뒤통수가 보이는 볼록 거울을 지난다 헤이 코코, 어디 가니? 2501호로 피콜로 배우러 가요 아이는 헐떡헐떡 24층 계단을 올라가 위층으로 사라진다
여의사는 얼른 뒤따라 가본다 아이는 보이지 않고 옥상 난간에 피투성이 새들이 앉아 있다 공중을 향해 일제히 입을 벌리고 있다 어디선가 피콜로 소리 계속 들린다
저녁이 되자 빌딩 숲 여기저기서 입에 벌레가 다닥다닥 붙은 사람들이 하나 둘 퇴근한다 여의사 레비너스는 꽃과 거울이 걸린 계단에 앉아 서류 뭉치를 한 아름씩 안고 25층으로 올라가는 글자 인간들을 쳐다본다
밤이 되자 오이처럼 또 평화 아파트는 층층이 나뉘어져 공중으로 떠간다 7층은 암동으로 9층은 병동으로 18층은 가자동으로 가고 24층만 공중에 섬이 되어 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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