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 처남의 딸이 LG 연구실에 근무하는 관계로 처남이 백암에 있는 LG 연수원에 연휴 기간을 이용하여 예약을 해놓고
같이 놀러 가자고 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처가 팔남매 중 넷집이나 집안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못간다고 했다.
나 역시 의성 산이 고속도로에 편입되는 관계로 미해결된 문제가 많아 그만 빠졌으면 했는데, 나마저 빠지면 예약을
취소해야할 판이다. 작년부터 계획된 일이었는데 앞에서 주선한 막내 처남 보기도 미안해서 할 수없이 기왕 어렵게 예약한 것,
넷집이라도 같이 가자고 약속을 했다.
출발 전 동해안엔 2일부터 폭설이 내린다는 일기 예보는 들었으나 출발 전 날씨가 너무 좋아 게의치 않고 기분 좋게 출발했다.
몇 년 전에도 한 번 갔다 왔는데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나서 나이는 많아도 꼭 수학여행 떠나는 이이들처럼 마음은 들떠 있었다.
오랫만에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며 지나가는 차창 밖 시골 풍경도 즐기면서 고속도로를 잘 빠져 나왔으나 길을 잘못 들어
그만 영일만 항구 쪽으로 빠져 들었다. 여러 번 빠져 나올 기회가 있었지만 안내판이 바로 출구 앞에 적혀 있어서 놓지기
일쑤였다. 할 수 없이 한동대학 입구까지 갔다가 되돌려 대진 해수욕장 앞 새 길로 빠져 화진 휴개소에서 일행과 만났다.
해마다 새로운 도로가 자꾸 생겨나니 자주 다니지 않는 사람은 네비게이션 없이는 길치가 되기 마련이다.
강구에 들러 점심을 먹고 가자고 했다.
강구 다리를 건너자 말자 밀려드는 자동차와 어젯밤 해맞이를 마치고 나오는 차량들로 도로는 마치 거대한 주차장을 방불케했다.
간신히 주차장에 차를 밀어넣고 대게집에 자리를 잡았다. 식당도 밀려드는 손님들로 넘쳐났다.
메스컴에서는 매일 불경기라고 떠들어 대지만 여기는 딴 세상같다. 대게로 점심을 먹었지만 값만 비싸지 다리살 뿐, 몸통
속은 빈 벌집처럼 텅텅 비었다. 그래도 맛은 있었다.
식사 후 해안 도로를 타고 계속 푸른 바다와 넘실대는 파도, 골짝마다 새로 지어진 팬션, 조용한 어촌 풍경을 감상하며 회를
뜨기 위해 후포까지 왔다. 그런데 길가에 있는 건조대에 각종 해산물들이 즐비해야 할텐데 대부분 빈 줄만 바람에 펄럭일 뿐
고기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어촌도 엥간히 흉년인 모양이다.
작년 겨울, 사촌 잔치에 왔다가 여기서 회를 먹고 식중독을 당했던 좋지 못한 경험이 있는 터라 위생을 특별히 강조했다.
후포에서 7번 국도를 타야하는데 진입로를 못찾아 구길로 들어서고 말았다. 우리 차엔 네비게이션이 없기 때문에 앞차
가는대로만 따라가려니 이게 맞는 길인지 잘못 가는겐지, 해가 뉘엿뉘엿해지니까 불안하기까지 했다.
꼬불꼬불하고 좁은 길을 따라 -더러는 빙판도 있는- 얼마를 달렸는지 드디어 온정리 표시판이 보였다. 그제사 마음이 놓였다.
길을 보니 옛날 다니던 그 길이 분명했다. 오후 6시경에서야 겨우 수속을 마치고 입실했다.
하루 종일 차를 탄 셈이다.
짐을 챙겨 넣고 저녁 식사부터 했다.
연수원 식당에서 배식하는 식사는 한 끼에 삼천원인데 맛도 있고 밥과 반찬의 양도 딱 맞아 떨어져 잔반이라고는 전혀
생기지 않았다.
식사후 온천에 들어 갔는데 목욕은 무료다. 해맞이 손님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라서 그런지 조용하고 물도 께끗하였다.
땀을 빼고나니 저녁 먹은 배가 출출해 왔다.
후포서 떠온 회로 술을 한 잔 했는데 금방 떠서 먹을 때보다 훨씬 맛이 좋은 것 같았다.
첫날밤은 그렇게 보내고 내일은 처남 내외만 남겨 두고 일찍 대구로 떠날까하고 속으로 짐작하며 잠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니 먼저 일어난 사람들이 밖을 내다보며 눈이 온다고 야단들이었다.
눈송이가 참 복스럽게도 내린다. 온 산이 자욱하게 안개가 낀 것처럼 포근하고 뿌옇게 흐린채 잠깐사이에 온세상이
은빛으로 변했다. 마치 동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집에 갈 걱정일랑 벌써 잊어버리고 눈덮인 산길을 밟아보자고 아내가
졸라댄다. 먼데까지는 갈 수 없고 연수원 앞 길을 따라 마을 밖 산 입구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나뭇가지마다 핀 하얀 눈꽃은 어떤 꽃보다 신비로웠으며, 발자국 하나 없는 눈길을 따라 걸어 보기는 정말 오랫만이었다.
어린 시절 고무신 신고 꽁꽁 언 발로 눈길을 쏘다니다 발가락에 동상이 걸려 벌겋게 부어오른 발을 밤만되면 근지러워 긁어대던
생각도 났다. 놀러 온 꼬마 녀석들은 벌써 눈을 굴려 눈사람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점심 때까지 눈은 그칠줄 모르고 계속 퍼부어 댔다. 그때서야 모두 걱정들이다. 이러다 눈에 갇혀 꼼짝 못하는게
아닐까? 하고.....하도 눈내린 날 추돌 사고나 접촉 사고가 나는 것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눈발이 조금 가늘어지고 그치는가 싶은데 설상가상으로 포항및 동해 일원에 대설 주의보가 내려졌다.
이제 내려갈 일이 태산이다. 여러 집에서 아이들이 걱정되는지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행여나 무리하게 내려 오시다 사고라도 당하시면 어쩌나 전전긍긍이다. 돈 생각하지 말고 하루 저녁 더 주무시고 오시란다.
우리도 포항에 있는 둘째가 울진에 출장왔다가 내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아예 내려 오실 생각을 말라며 실시간
눈소식을 전해 주었다. 울진 쪽은 그런대로 통행이 되는데 포항 쪽은 제설장비가 모자라 제 때 차우지 못한 눈이
빙판으로 변해 차들이 거북이 걸음을 치고 있어 언제 도착할지 모른다고 했다. 9시경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는데
출발 시간부터 도착까지 어림잡아 계산해보니 울진에서 포항까지 3시간 넘게 걸린 것 같다.
예정된 2박 3일을 다 채우고 오늘은 방을 비워 주어야 하는데 과연 갈 수가 있을까 모두 걱정들이었다.
마지막 온천을 하고 오니 걱정이 되는지 맡며느리 한테서 전화가 세 통씩이나 와 있엇고 딸한테서도 전화가 왔다.
모두들 하룻밤 더 놀다 오라지만 처남은 내일부터 수업을 해야한다니 어차피 오늘 같이 따라 내려가야 한다.
청소하는 아줌마들이 벌써 복도로 청소차를 몰고 왔다 갔다하며 손님이 빠져 나간 빈 방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남들도 다 나가는데 설마 무슨 방법이 있겠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데 한 번 나가 보자' 하고
용기를 내어 짐을 챙겨 모두 차에 올맀다.
비록 걱정스런 표정이긴해도 2박 3일간 온천을 열심히 한 덕택에 얼굴엔 모두 윤기가 흘렀다.
거리에 나서니 생각보다 달랐다. 눈을 치운 곳도 많이 있고 응달진 비탈엔 모래를 깔아 미끄럼 방지를 해 두었다.
그래도 시속 30km 속도로 슬슬 기는 것처럼 큰 길까지 무사히 빠져 나왔다.
들어오는 차는 별로 없고 드문드문 나가는 차만 몇 대 보일뿐이다.
큰길은 눈을 치워서 벌써 바짝 말라 있었다. 들어 앉아서 괜스런 걱정을 했구나 싶었다.
포항 근처에는 완전히 덜 치워진 눈을 , 그것도 밟아서 굳어진 딱딱한 빙판을 이제 막 제설차가 긁어내고
있었다. 그래도 날씨가 포근해서 눈이 막 녹기 시작하여 좀 질퍽거렸지만 통행엔 별 지장이 없었다.
길가 군데군데엔 빈차를 세워놓고 기사가 없는걸로 보아 어제 저녁 긴박했던 상황이 짐작이 갔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벌어졌다.
차에 네비게이션이 없기때문에 일일이 안내판을 보면서 가야하는데 해가 역광으로 비쳐 간판 글씨가 캄캄해 읽을
수가 없었다. 흥해에서 포항IC 진입로까지는 맞게 들어 왔는데 갈림 길에서 그만 안내판을 읽지 못해 영천 경주
방면으로 들어서 버렸다. 영천 쪽만 가면 대구 나오는 줄 알고 갔는데 암만 가도 IC가 안나오고 위덕대학이 나오는 것이다.
처남에게 전화했더니 잘못 들어섰다고 했다. 어떻게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안강 방면으로 해서 대구 포항 고속도로로 진입하려고 시도했지만 그 쪽은 눈이 전혀 치워지지않아
차 바퀴가 그냥 헛도는가 하면 핸들 조작도 마음대로 안되는지 차가 우왕좌왕했다. 겁이 덜컥나기 시작했다.
할 수 없이 경주 방면으로 해서 경부고속도로로 가기로 하고 경주로 들어섰다.
경주 시내에 들어서자 경주 IC 가는 길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역시 역광이라 해를 안고 가기때문에 머리
위에 붙은 안내판 글짜가 캄캄해서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물어 물어 겨우 경부 고속도로에 들어설 수 있었다. 경주까진 눈이 많이 있었는데 경부고속도로는 눈 한 점 없이 깨끗했다.
대구에 도착했을 때는 처남은 벌써 한 시간 전에 큰처남댁에 도착해서 걱정스럽게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도 아무 탈없이 무사히 잘 도착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이제사 모두가 마음놓고 또 한 잔 했다.
작은 처남 덕택에 구경 잘하고 온천 잘하고 잘 먹고 잘 놀다 왔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연수원을 떠나올 때도 LG 가족의 일원으로서 보람과 긍지를 느끼며 수고하신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연수원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는 쪽지를 남기고 왔다.
참 오랫만에 진짜 눈 구경 잘하고, 눈 때문에 마음도 많이 졸였던 이번 겨울 여행은 오래 오래
이야기거리로 남을 것이다. 또 이번 기회에 우리같은 사람들이 여행할 때 네비게이션이 얼마나 필요한지도
절실히 느끼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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