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새 희망의 세계에 눈을 뜬 이후로 소중하지 않은 해는 없었다. 그러나 그 빛나는 세월 중에서도 올 한 해는 특히 소중한 기억과 인연을 선사한 한 해로 가슴에 남을 것이다.
지난 해 점자문헌정보학과로 들어간 나는 점자 연구에 전념할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과는 도서관학과에 치중해 있었고 점자학의 비중은 미약한 형편이었다. 그래서 전과를 결심했다. 내가 가장 공부하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가 신학과였기에 신학과로 전과를 하면서 2008년도가 본격적으로 우리 앞에 펼쳐졌다.
전과해서 공부하는 재미와 의미는 쏠쏠했다. 무엇보다도 감사할 일은 신학과 신앙의 핵심을 파고드는 불같은 열정의 교수님이자 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일 것이다. 교회에 회의를 느껴 수년간 교회에 나가지 않던 나는 그 즉시 그 분이 개척하신 꿈나무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목사님은 매주마다 설교를 워드로 작성해서 메일로 보내주었고 나는 예배시간마다 그것을 읽으면서 은혜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설교 중에 원고에 없는 말씀을 하실 때에는 도우미들이 그 말씀을 워드로 쳐 주었다. 따라서 거의 100%의 설교를 들을 수 있는 은혜가 내게 주어진 것이었다!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형편에서 학교의 수업시간이나 교회의 설교시간처럼 괴로운 일은 달리 없던 나였다. 그런 내가 나사렛대에 들어가면서 강의를 듣는 기쁨을 알게 됐고 꿈나무 교회에 출석하면서 설교를 듣는 환희를 절감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신바람 나게 공부하고 교회에 다니는 동안 한 하니는 훌쩍 지나갔다. 시청각장애인의 복지를 모색하기 위해 사회복지를 복수전공하기로 하고 여름 계절학기부터 사복과목도 수강하기 시작했다.
계절하기도 끝나고 여름방학이 되자 그동안 누적된 피로도 풀겸 오로지 책과 휴식에만 몰두하려고 했다. 그런데 아내가 다니던 대전의 교회에서 대천 해수욕장으로 수련회를 가게 되었다. 웬만하면 그냥 쉬고 싶었지만 가을 학기에 천안으로 이사를 가기로 했으므로 대전에서의 마지막 수련회로 여기고 우리도 가게 되었다. 물론 중, 고, 대학생들이 자원봉사겸 해서 함께 하였으므로 매우 즐거운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가뜩이나 피로가 누적됐던 아내는 수련회에서 돌아왔을 때 녹초가 다 돼 있었다.
그렇게 몇 주를 보내고 우리는 미리 기획했던 대로 팀을 구성해서 여주에 있는 라파엘의집을 방문했다. 방문기는 아래를 참고하시길. 그 방문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소중한 기회였다. 전혀 못보고 못 듣고 말도 못하고 언어나 문자 등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의사소통이 안 되는 이들의 삶을 보고 나는 내가 얼마나 선택받은 풍요와 경이적인 혜택을 누리고 있는가를 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귀한 배움을 받고 돌아 온지 얼마가 지나고 새 학기가 목전에 다가왔을 무렵 모처럼 징검다리에 삼겹살 파티를 했고 그 날 우리 부부도 상추에 삼겹살과 마늘을 싸서 든든히 먹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왔을 때 아내는 그동안의 피로가 누적되어서 인지 잠을 못 이루다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몸에서 비상 신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스꺼운 것은 평소에도 곧잘 있었던 증상이지만 이번에는 호흡이 정지될 것 같은, 죽음이 닥쳐올 것 같은 위기감이 엄습해온 것이었다. 예전에도 그런 적이 있었는데 그런 상태가 되면 손가락하나 자기 마음대로 못 움직이게 되기 때문에 극히 위험한 지경에 빠지게 된다. 내가 119를 부를 수 없기 때문에 그런 상황이 닥치면 참으로 속수무책이 되는 것이다. 다급해진 나는 조금이라도 운신할 수 있을 때 119를 불러서 응급실로 가자고 재촉했고 아내는 힘겹게 수화기를 들었다.
그 뒤로 아내는 몇 주 동안을 병원과 동생집에서 요양해야 했다. 열이 펄펄나고 머리가 터질 것처럼 아픈데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는 고통의 날들이 이어졌다. 아무리 열심히 안마를 해주고 잠들었나 해서 자리에 눕고 부시럭거리는 기척에 다시 일어나서 안마를 해주고... 그래도 잠을 이루지 못해 밤을 하얗게 새운 아내의 퀭한 눈에 눈물이 넘쳐나는 것을 보고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는지... 처남집에서 매일 보약을 먹었는데도 이유없이 매일 세수할 때마다 코피가 새어나왔다. 결우 2학기는 휴학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 2학기는 무려 24학점이나 수강신청을 해 놓은 상태여서 가장 어려운 고비로 예상했고 어떤 일이 있어도 견뎌내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던 중이었는데 아내의 건강 문제로 한발 물러나야 했던 심정은 참으로 착잡한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만사는 새옹지마, 좋은 일도 화근이 될 수가 있고 위기도 기회가 될 수는 법이다. 연일 빼곡한 강의와 과제에 치여 읽고 싶은 책하나 변변히 읽지 못하던 내게 모처럼의 자유가 주어지자 나는 마치 걸신들린 것처럼 독서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태백산맥을 헤집고 다녔고 심령과학서에 심취했으며 외계인 관련서적과 잠재력개법에 관한 책들을 닥치는 대로 훑어 내렸다. 소쇼라그니쉬의 탄트라 명상법도 괜찮았고 그자의 사생활이 적나라하게 펼쳐진 타락한 신도 반쯤 훑어 내렸다. 류시화의 지구별 여행자, 한의 비밀, 마음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진다. 등등 지혜와 지식의 보고는 끝이 없었다. 잊지 못할 일은
역설적이게도 나는 휴학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책들과 지혜들을 접할 수 있었다. 비록 신학만을 가지고 있고 신앙은 흐지부지 되기는 했지만 나는 휴학을 통해 더 높은 차원으로 인도해주신 신께 진심으로 감사해마지 않았다.
다음으로 잊지 못할 시청각장애인을 위한 홍보자료를 펴낸 일이라 하겠다. 일본 홈페이지에서 읽은 내용과 나의 짧은 경험과 알량한 생각으로 급조된 조잡한 책자에 불과하지만 나름대로 우리가 가진 정보를 필요한 이들과 나누고자하는 소박한 의도에서 이루어진 홍보물이었다. 그 작은 홍보책자가 나올 수 있도록 원고 교정, 그림 삽입, 인생 및 배포에 이르기까지 많은 회원들이 없는 시간을 쪼개가며 힘을 모아주었다. 그 때 수고해 주신 모든 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서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마지막으로 2008년도는 내 인생에 있어서 잊을 수 없는 인연들과의 만남으로 더욱 빛을 발하게 되었다. 내가 운영하는 이곳 카페의 회원들을 중심으로 매달 정기모임을 가져 왔는데 시청각장애인들과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통역을 지원하고 점화를 배우는 취지로 모임이 진행되어 왔었다. 그런데 점화라는 것이 바쁘고 버거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배우기 힘든 것인가 하는 것이 곧 드러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화를 배우려는 이들도 줄고 기대치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점화를 끝까지 확실하게 익힌 두 사람이 배출되었다. 그 첫번째 주자는 바로 우리 모임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해온 작은 바보님과 또 한 사람은 시각장애인인 한종갑씨였다.
그들이 처음에 떠듬떠듬 점화를 시작했을 때의 감동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전까지는 컴퓨터와 한소네를 연결해야만 대화가 가능했는데 기계의 도움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두 사람씩이나 늘었다는 것은 시청각장애인인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커다란 경이인지 모른다. 직장생활과 온갖 맡은 직장 때문에 속도가 늘려면 적어도 몇 년은 기다려야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불과 몇 달도 안 되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들이 너무 연습을 열심히 한 나머지 내 손으로는 읽어내기가 심히 어려울 정도로 속도가 빨라져버리고 만 것이다. 내 입에서 난생 처음 놀라움과 즐거움과 위기감이 한데 뭉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다음으로 나의 삶에 중대한 변화를 몰고 온 인연은 춘천의 농아학교에서 20년간 교편을 잡고 후진 양성에 심혈을 쏟으신 최인옥 선생님과의 만남이었다. 신문을 통해 나를 알게 되셨고 나사렛 대학의 어느 수화 강사님을 통해 우리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분은 13세 때 청각을 잃었고 시력도 바야흐로 악화되 사실상 저시력전농의 시청각장애인이 되셨다고 한다. 그래서 주변에 고통 받고 있는 시청각장애인들에 대한 동병상련과 연민이 남달랐으며 그들을 위해 아주 작은 일이나마 시작하고 싶다는 아름다운 소망이 가슴에서 움트게 되었던 것이다.
최샘은 우리 집과 나대를 오가며 우리와 의기투합하셨고 이제는 천안에 시청각장애인들의 작은 공동체를 이루게 되었다. 한 가족이 된 우리는 세상을 값지고 행복하게 살아가기 위한 원동력이 되는 새 희망과 무한한 가능성의 빛을 우리들 시청각장애인들의 삶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날마다 다양하고 심도 있는 독서와 촉수화 등 시청각장애인들의 원활한 의사 소통법 연구에 힘과 뜻을 모으고 있다.
아픔과 아쉬움도 많았지만 기쁨과 감동이 훨씬 많았던 2008년도가 이제는 불좌 몇 시간을 남겨두고 있다. 비록 이 한 해는 영원히 역사의 저변으로 저물겠지만 1년 동안 살며 사랑하며 배운 모든 소중한 인연과 행복한 기억들은 나를 포함한 우리 시청각장애인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져 영원한 보석으로 찬연히 빛날 것이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최인옥 샘의 열정은 특히 남다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