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프롤로그
전라도는 ‘귄’이 있다. 음식은 저마다 ‘게미’가 있으며 어디를 들르나 ‘짠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정이 있다. ‘귄’이란 전라도 말로 ‘아주 잘 생기진 않았지만 뭔지 모르게 마음을 끄는 묘한 매력’ 쯤의 뜻이며,‘게미’는 ‘은근히 입맛 당기게 하는 묘한 손맛’ 정도라고 할까.
‘귄’이나 ‘게미’가 아니면 도무지 표현이 되지 않는 묘한 매력, 그것을 알게 될 때서야 비로소 전라도의 정서를 제대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전라도의 여행지는 그 속내를 알면 알수록 은근히 빠져들게 되는 여인네를 닮았다. 예쁘고 세련된 도시처녀처럼 첫 눈길을 끄는 화려함은 없지만 알면 알수록 ‘거, 진국이네!’싶은 그런 매력 말이다.
고창이 바로 그런 곳 중의 하나다.
고창~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뭘까? 아마도 선운사, 복분자, 풍천장어, 청보리밭 쯤일 것이다. 그러나 고창의 바다가 얼마나 풍요롭고 삶의 활기로 가득 차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 하다. 고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내겐 닭백숙을 한 솥단지 끼고 해수욕장을 갔던 추억이 남아있다.
#2. 만돌 어촌체험마을에서 동심을 되찾다
어른이 되어 고창의 바다를 다시 찾았다. 만돌 어촌체험마을.
어촌체험으로 최우수상을 받은 마을로 조개 캐기, 정치망 , 염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바다체험 프로그램과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어 온 가족이 하루를 온전히 바다와 함께 즐길 수 있다. 갯바람을 맞으며 뭔가를 캐며 노는 일은 옛 생각으로 눈시울을 적시는 일보다 생산적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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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체험마을 여행이 인기다. 그냥 쓱 둘러보고 지나치는 여행보다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느끼면 그 감동이 배가된다. 그 재미는 아는 사람만이 알기 때문에 한번 재미를 붙이면 주마간산 식의 여행은 시시해지게 된다.
서울에서 수련회 코스로 이곳을 선택했다는 한 고등학교 여학생들은 갯벌버스를 타고 바다로 향하자마자 “악악!!”대기 시작한다. 바다는 이들에게 동방신기만큼이나 유혹적이다.
만돌 앞바다의 갯벌은 모래가 많이 섞여있어 탄탄하고 완만하다. 그러나 멀리 나가면 군데군데 움푹 파인 웅덩이가 많기 때문에 갯벌버스의 손잡이를 꽉 잡아야 한다. 행여 방심하고 까불거리다가는 갯벌로 튕겨나가 망둥어랑 친구가 될 수도 있다.ㅎ
제 아무리 엉덩이 쿠션이 좋아도 퉁퉁거리는 쿠션감을 감당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래도 바다에서는 고생도 추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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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아이들에게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갯벌은 해방감 그 자체이다. 체험마을 안내원에게 조개 캐는 요령을 배우고 잠시 조개 좀 캐나 싶더니 금세 얼굴엔 진흙팩이요, 갯벌은 놀이터가 된다. 갯벌을 뭉쳐 던지고 도망치며 깔깔대는 고등학생 아이들은 어느새 동심으로 돌아가 있다. 그 또래의 아이들이 있는 내겐 좀 짠한 모습이다. 일사불란하게 교복을 입고
야간자율학습을 끝내고 별을 보며 귀가하는 대한민국 모든 학생들의 무거운 뒷모습과 오버랩이 된 탓이다. 열일곱의 나이 속에 다섯 살배기 아이가 숨어있다는 걸 어른들은 잊어선 안된다.
만돌마을 앞바다에는 양식산이 아닌 자연산 동죽이나 백합, 바지락 등의 조개가 지천이다.
그러니까 다섯 살 짜리 고사리 손으로 몇 분만 갯벌을 뒤적거려도 곧 바구니에 조개가 한 가득 찬다는 뜻이다. 우리가 만난 이 다섯 살배기 꼬마숙녀는 ‘조개 천 개 줍고 허리 한번 펴기 운동’이라도 할 양인지 내내 허리를 굽히고 조개 캐기 삼매경에 빠져있다.
특히 내내 무릎을 꿇고 아주 공손한(?) 태도로 조개를 하나씩 캐는 크리스.
조개와 대화를 하는 것일까. 바다에 감사하고 있는 것일까.
미국에서 교환학생으로 이 학교에 왔다는 크리스에게도 조개 캐기는 잊지 못할 체험이리라.
이렇게 캔 조개들은 따로 마련된 식당에서 조개탕으로 끓여준다. 물 외엔 소금조차도 넣지 않은 이 동죽탕은 바다의 맛 그 자체다. 날씨가 추워지면 동죽도 살을 통통 찌울 것이다. 국물은 한없이 시원했고 소주 한 잔이 생각나는 그런 것이었다.
조개 캐기 체험 외에 정치망 체험도 할 수 있다. 정치망이란 그물을 일정한 장소에 일정기간 설치해 두고 어획하는 방법으로 단번에 대량 어획하는 데 쓰인다. 정치망 그물을 함께 들어 올려 그물에 걸린 망둥어나 조기, 숭어 등을 잡는 게 아니라 그냥 집는다. 이렇게 거둬들인 고기는 회로 떠주기도 한다. 정치망 주위에는 ‘독 안에 든 쥐’인 물고리를 거저 먹고 사는 게으른 갈매기들이 지천으로, 노을을 배경으로 일제히 후드득 날아오르는 갈매기랑 찍는 사진 한 장도 특별한 즐거움을 준다.
갯벌체험학습장 건물 옆 쪽 사잇길을 따라가면 삼양염전이 있다. 따가운 햇살에 온몸을 말리며 소금이 되어가는 바닷물, 소금밭에 발을 담그고 고무래로 썩썩 소금을 밀어보고 천일염도 맛본다. 햇살이 빚은 생명의 꽃이라고 불리는 천일염, 우리나라 천일염은 다른 나라 소금에 비해 미네랄 함량이 높고 김치나 젓갈을 담글 때 우리 것이 최고의 맛을 낸다고 한다. 염전체험을 한 다음 천일염 한 가마니 사가지고 돌아가면 몇 년은 간수를 빼가며 요긴하게 쓸 수 있다.
망둥어 회의 맛은 어떨까? ‘숭어가 뛰니 망둥어도 뛴다’는 부화뇌동의 흔한 물고기, 너무 많아서 천대받는 망둥어도 사실은 회나 소금구이, 혹은 무침이나 조림, 튀김으로 먹으면 또 다른 별미다. 초고추장에 찍어 처음 맛본 망둥어회는 기름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지방이 적고 담백하여 술안주로 그만이었고 다이어트에도 좋다고 한다.
#3. 하루 백 만원은 번다는 구시포항 꽃게잡이
다음날 새벽 5시.
구시포 항구는 지금 꽃게잡이가 한창이다. 꽃게잡이 배를 얻어 타고자 했으나 뜻은 이루지 못했다. 대신 아직도 어둑어둑한 항구에서 카바이트 불빛에 의지하여 그물에 걸린 꽃게를 분리하는 작업을 하는 부부를 만날 수 있었다. 올해 꽃게가 풍년이라며 부부의 얼굴에 웃음이 가시지 않는다. 바다자원의 관리가 잘 된 구시포항에서는 그물을 내려놓기 무섭게 꽃게며 가을주꾸미가 그득그득 올라온다. 봄에는 중하와 꽃게, 여름이면 민어, 가을이면 전국 유일의 가울 주꾸미가 잡히고 사시사철 감성돔과 백합을 비롯한 각종 조개가 넘쳐나는 구시포항에는, 그래선지 방파제에 낚시꾼들이 많이 모인다.
“이 놈의 꽃게들 때문에 주꾸미 잡을 틈이 없다니께요.”
가느다란 줄로 얽힌 낚싯줄에 걸린 꽃게를 일일이 떼어내는 일은 얼핏 봐도 참을성이 필요한 작업이다. 꽃게는 집게로 그물을 끊기 일쑤여서 주로 낡아서 버릴 그물을 사용한다고 하는데 꽃게 떼내는 작업시간도 만만치 않게 든다고 한다. 그 시간에 주꾸미를 잡으면 보다 편안하게 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불평하면서도 꽃게잡이 어부의 얼굴엔 희색이 만연하다. 요즘 같은 철엔 하루 100kg 정도의 꽃게를 잡는데 항구에선 1kg 당 보통 1만원에 판다. 이렇게 계산하면 하루 100만 원 이상의 수입을 거뜬히 올린다는 얘기다. 대한민국의 부자들은 다 어촌에 몰려있지 않나 싶어진다.
#4. 빠뜨리면 서운한 선운사 3미(三味)
고창에 왔으니 풍천장어와 복분자를 빠뜨리면 서운하다. 이 둘과 함께 선운사 작설차를 포함해서 ‘선운사 3미(三味)’라고 부른다. 장어라고 다 같은 장어가 아니다. 선운사 풍천장어는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잡은 뱀장어를 일컫는데 그 맛이 유별나게 담백하고 구수하여 예로부터 미식가들로부터 사랑받아왔다. 양념구이와 소금구이 두 가지 중에서 특히 소금구이가 장어의 고소한 맛을 더 잘 살리는 듯하다. 이곳의 풍천장어는 쫄깃하기까지 한데 여기엔 특별한 비법이 있다고 한다. 즉, 장어를 농도를 적절히 맞춘 소금물에 몇 시간쯤 담가둔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살이 더 단단해지고 쫄깃해지는 것이다.
장어가 ‘왠지 느끼해서 부담스럽다’싶은 이라도 이런 과정을 거쳐 참숯에 구운 풍천장어라면 체면불구 젓가락질이 분주해지게 된다.
이 풍천장어에는 복분자 술이 제 격이다. 복분자의 효능이야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진 바, 특히 고창의 복분자주는 그 바디감에 있어서 따를 술이 없다. 복분자에 더해지는 알콜 함량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고창의 복분자주는 복분자 엑기스에 약간의 알콜을 더한 듯한
진짜배기다. 한 모금 마시면 입 안을 가득 채우는 묵직함과 풍요로운 향이라니...거기에 목넘김도 부드럽고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온몸을 후끈 데워주는 에너자이저이기도 하다.
풍천장어와 어우러지는 복분자주의 절묘한 하모니는 입 안을 달뜨게 하고 이어 정신마저 몽롱하게 한다. 복분자주 사진 찍을 겨를도 없이 빠른 속도로 “원샷!”을 하다보니 사진 한 장 찍지 못한 게 아쉽다. 어쩌리오! 그게 다 너무 맛있었던 복분자주 탓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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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동백꽃 대신 도솔천 단풍이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는 가을의 선운사
하루 반나절을 바다와 함께 충천한 당신, 이제 선운사에 들러 작설차 한 잔 마시면서 심신을 말갛게 씻어내도 좋을 것이다.
동백꽃으로 유명한 선운사. 그러나 요즘은 동백꽃 열매 수확시기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선운사가 동백꽃으로만 유명한 게 아니다. 겨울엔 동백꽃, 봄엔 벚꽃, 여름엔 배롱나무, 초가을엔 꽃무릇 그리고 늦가을에는 도솔천과 선운사의 단풍이 그림처럼 아름답게 펼쳐진다. 어떤 이는 선운사 자체보다도 도솔천의 아름다움에 마음을 빼앗겨 이곳을 자주 찾게 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아침 저녁으로 일교차가 큰 올해는 곧 유난히도 붉고 화려한 단풍으로 단장한 선운사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선운사의 청정한 기운으로 갯바람에 시달린 눈을 씻었거든 나무 다탁에 단아하게 다구가 마련되어 있는 만세루에 올라 앉아 차 한 잔 마셔보자. 아니면 사천왕문 옆에 자리한 선다원에서 작설차 한 잔 마셔보자. 아홉 번 찌고 아홉 번 말렸다는 참새 혀 모양의 귀한 작설차 한 모금에 풍천장어와 복분자주의 속기를 씻어내 보자.
선운사는 언제 가도 좋지만 특히 비 오시는 날, 저녁 무렵이 압권이다.
대웅전에 나지막이 울리는 염불소리, 목탁소리, 그리고 비에 젖은 배롱나무, 법고와 목어를 두드리며 하루를 접는 사찰의 의식, 추녀 끝에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에 시선이 멎을 때....
온 세상이 침묵에 빠지고, 우리도 말을 잊게 된다.
한 살을 더할수록 이토록 선운사 풍경이 가슴 저릿하게 만드는 이유는 뭘까....?
끽다거! (喫茶去)
...차나 한 잔 마시게나.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첫댓글 이것저것 따지지말고 갔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