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눈이 사라졌다. 95세를 일기로 20세기의 대표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이 2004년 8월 3일 운명했다. 당시 르몽드,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즈 뿐만 아니라 국내 주요 일간지들은 결정적 순간의 전설적인 사진작가의 죽음을 일제히 알렸다.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추모 성명에서 “시대의 진정한 증인으로서 그는 정열적으로 20세기를 찍으면서, 자신의 범 우주적인 불멸의 시각으로 우리로 하여금 인간과 문명의 변화를 영원히 기억하게 만들었다”고 경의를 표했다.
‘찰나의 거장’전은 서거 1주년을 맞이하여 매그넘과 공동 기획되는 대규모 전시회이다. 작가주의를 지향하는 세계적인 사진에이전시, 매그넘의 공동 창립자이기도한 카르티에-브레송은 근대사진의 최고봉이자 현대사진의 문을 연 영상사진의 아버지이다. 뉴스(News) 중심의 사건에서 해방되어 피처(Feature) 중심의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채택된 영상의 일상성은 삶에 대한 개혁보다 인식을 더욱 강조했다. 그는 영상의 사유화와 개인적, 주관적 시각의 다큐멘터리 사진의 출현에 길을 연 선구자이다.
특히 카르티에-브레송은 35mm 카메라의 절대 경지를 이룩한 사진술의 정복자로서 사진의 지배적인 유형을 도출해 냄으로써 사진 형식에 있어서 감흥을 주었다. 그가 완성한 포즈를 취하지 않는, 비연출의 캔디드 사진 미학은 느끼는 바에 대한 정직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움이다. 그는 촬영할 때에 결코 현실을 조작하지 않았다. 게다가 표준렌즈를 즐겨 사용하고 적당한 거리에서 찍었기 때문에 피사체들의 상대적인 크기나 원근감이 정상적으로 나왔다. 더욱 카메라 앵글에 관해서 유일하게 존재하는 각도는 구성의 기하학적인 각도라는 관점에서 극단적인 앵글을 거부하였다. 또한 실제의 빛이 없는 경우에조차도 플래시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광만을 존중하였다. 한편 확대 인화 시에 트리밍을 했을 때에 시각의 성실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본 전시는 카르티에-브레송의 방대한 사진서고에서 엄선된 226 작품이 5 카테고리로 전시된다. ‘결정적 순간’ ‘영원한 존재’ ‘내면의 공감’ ‘20세기의 증거’ ‘인간애’가 바로 그것이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재발견은 물론 결정적 순간에 관하여 더욱 심오하게 사색할 수 있는 문화의 장이 될 것이다.
1. 결정적 순간
위대한 사진작가로서의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평판은 지금까지 발행된 사진집 가운데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결정적 순간 The Decisive Moment’ (1952년)을 출판함과 동시에 굳어졌다. 그 사진집이 발행되면서 그의 사진은 캔디드(candid) 사진의 성전으로 사진의 고전으로 남게 되었다. 그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것을 좋아해서, 사진을 찍고 나서는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천진스럽게 계속 걸었다고 한다. 소위 카르티에-브레송 식 방법은 사진가가 아주 신속하게 촬영해서 대상은 자신이 촬영되었는지조차 전혀 깨닫지 못하는 촬영과 접근법으로 거리 사진(Street picture) 의 대표적인 스타일이다.
카르티에-브레송이 직접 쓴 결정적 순간의 서문을 불어판 ‘재빠른 이미지 Image ? la sauvette’(1952년)에 게재하지 않았으나 영어판에 실었다. 서문에서 카르티에-브레송의 글이
시작되기 전에 “이 세상에 결정적 순간이 아닌 순간은 없다”라는 카르디날 드 레츠 추기경의 명구를 인용하는데, 여기에서 결정적 순간이란 사진집 제목이 비롯되었다. 서문은 카르티에-브레송이 자신의 사진에 대한 생각과 결정적 순간의 미학에 관하여 언급한 유일한 글로서 그의 사진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사진이 그 주제를 가장 밀도있게 전달해야 하는 것이라면 형식의 관계도 엄격하게 수립되어져야 한다. 사진은 실재하는 사물들의 세계 속에 내재하는 리듬에 대한 인식을 다룬다 ...... 한 장의 사진에 있어서 구성은 눈에 띈 요소들의 동시적 결합과 유기적 종합의 결과이다 ...... 사진에는 새로운 종류의 조형성이 있는데 그것은 촬영 대상의 움직임에 의해 만들어지는 순간적인 윤곽의 생성이 있다. 우리는 마치 삶의 전개에 있어서 예감적인 방법이 있듯이 움직임의 조화 속에서 작업한다. 그러나 하나의 움직임 속에는 그 동작의 과정에서 각 요소들이 균형을 이루는 한 순간이 있다. 사진은 바로 이 평형의 순간을 포착해 고정시키는 것이다.” 결정적 순간 서문에서
카르티에-브레송의 조수를 거쳐 매그넘의 회원이 된 잉게 모라스는 “내가 그런 방식으로 제시된 사진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앙리가 나에게 구성과 시각적 질서를 먼저 찾아보라 그리고 드라마가 스스로 돌보게 하라”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그에게 있어 한 장의 사진이란 한 순간의 동결일 뿐만 아니라 잘 짜여진 구성의 한 순간에 대한 포착이었다. 사진은 어떤 사실의 의미와 그 사실을 시각적으로 설명하고 가리키는 형태의 엄격한 구성이 한 순간에 동시에 인지된다는 것이다. 그는 현실의 세계가 생생한 빛을 띠고, 명암과 형태가 있는 장소에 꼭 자리 잡는 순간을 쉽게 포착하여 제시하였으며 그의 사진 형식은 시공간의 통합 즉 완전한 조화와 균형 속에서 찰나였다.
그런데 카르티에-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은 하나의 상황이나 장면에서 한 번의 촬영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한 상황에서 거의 반롤 이상의 촬영을 했다. 그는 “간혹 어느 구체적인 상황이나 장면에 관한 강렬한 것일 수 있는 사진을 이미 찍었다는 느낌이 생길지라도 계속 사진을 찍어야 한다. 그것은 그 상황과 장면이 정확히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미리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고 조언했다.
2. 영원한 존재
20세기 중요 인물들을 사진예술의 거장의 눈으로 구성한 영원하는 존재의 순간이다. 사람들은 초상화라는 수단에 의지하여 자신을 영원히 남기려는 욕구를 지녔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가장 멋진 모습을 후손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사진술의 발명 이후, 회화는 더 이상 초상화분야를 발전시키지 않았다. 사진이 회화의 형식들 중에서 이 분야의 몫을 떠맡은 것이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은 사진작가가 어느 개인의 세계, 내면적인 것만큼이나 외면적인 측면에 대한 진정한 고찰은 촬영대상을 그 개인의 평상적인 상황 속에 놓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속에서 담아내었다.
카르티에-브레송의 포트레이트는 미술계 인물인 마르셀 뒤샹, 앙리 마티스, 지아코 메티,샤갈, 파블로 피카소 등과 문학 및 사상계 인물인 쟝 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사뮈엘 베케트, 존 버그, 수잔 손탁 등의 세계와 교감하게 한다. 그리고 로버트 케네디, 체 게바라, 마릴린 먼로, 퀴리부인, 윈저공, 달라이라마 등 세계 주요 인사들을 만나게 해준다. 그는 언제나 찍고자하는 인물과 함께 생활하면서 첫 인상을 실제화하려고 노력했다. 어느 특이한 얼굴에서 받은 첫인상을 대개 옳은 것으로 믿었다.
카르티에-브레송의 포트레이트에서 주목할 점은 형식이다. 소위 임의적인 지형학은 강렬한 느낌의 포착으로 구성된 것으로 촬영대상에 관한 면밀한 심리학적 연구이다. 그는 빅토르 위고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형식은 표면에 드러난 본질이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사진의 내용에 기운을 불어넣는 것은 율동감이며, 형식과 가치 사이의 관계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각적으로 사물들의 구조, 공간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의 사진은 긴장의 한 다발을 가지고 있는데, 긴장은 구성과 정서적인 강렬한 충격의 역설적 조합이다. 그가 강렬한 감정적 느낌을 받을 때 구성하고, 구성할 때 감정적 느낌을 가진다. 그것은 어떤 구성 스타일과 어떤 강렬한 인상적 충격을 가정하고 있다.
우리들의 시선은 즉각적으로 갑작스럽게 가로축으로, 세로축으로, 앞뒤로 움직이다가 비스듬히 갑자기 굴러 떨어진다. 비스듬하게 떨어지는 지형학은 구성적인 강렬한 느낌의 포착이다. 이렇듯 지그재그로 떨어지는 전락 속에서 번개처럼 빠른 속도를 발견한다. 임의적인 지형학은 인터뷰하는 마릴린 먼로 사진에서도 볼 수 있다. 확실히 수평으로 이동하는 이변체 혹은 수직으로 떨어지는 이변체 등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존재의 부분은 항구적이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카메라를 사용하고,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진지해졌다. 그래서 무언가의 냄새를 뒤쫓아 그것의 냄새를 맡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그때 거기에 영화가 있었다. 몇몇 훌륭한 영화들을 통해 보고 관찰하는 법을 배웠다”고 인정했다. 임의적인 지형학은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 D. W.그리피스의 낙화, 드레이어의 잔다르크, 펄 화이트의 뉴욕의 미스테리, 스트로하임의 탐욕과 같은 영화에 빚지고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형태들의 유기적인 리듬을 포착하는 방식을 가르쳐 주었다. 그의 작업에서 구성된 느낌의 포착이 비스듬히 떨어지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리듬이 꼭 필요했다. 그 결과 카르티에-브레송이 촬영한 모든 포트레이트는 어떤 동질성이 표출되었다. 그는 촬영대상의 아이덴티티를 탐색하면서 독특한 포트레이트 형식을 완성시킨 것이다.
3. 내면의 공감
미술계로부터 사진계로 옮겨온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은 초현실주의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 카르티에-브레송은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가볍게 어루만진다든가 현존하기 위해 자아를 잊는다든가 피사체가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초현실주의가 스며든 사진이란 우연에 의하여 자신이 가는대로 내버려 두는 촬영 행위로서 자동 기술을 말한다. 그것은 모호한 주의력이 날카로운 명증성이 되는 특이한 상태 또는 피사체의 핵심과의 일치이다. 여기서 우연은 단순한 만남이나 출현이 아니라 존재론적 관점에서 자신과의 필연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직관이나 무의식 등의 지속된 잠재적 감정들을 의미한다. 이렇듯 그의 사진은 내면세계와 외부세계 사이에 공감각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대상과 끊임없는 상호과정의 결과로서 느낌의 순간을 포착했다. 이때 대상은 인물일 수도, 풍경일 수도 있다. 사진은 그 대상과 브레송이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찰나의 세계이다. 카르티에-브레송의 생각을 결정적 순간의 서문에서 살펴볼 수 있다.
“나에게 있어 사진이란 어떤 사건에 적절한 표현을 부여하는 형태와 구성에 대한 순간적인 인식인 동시에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한 순간적인 인식이다. 나는 삶의 행위를 통하여, 자아의 발견은 우리를 정형화하고, 또 우리에 의해 영향을 받는 주변 세계의 발견과 동시에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하나는 우리의 내면세계와 그리고 다른 하나는 우리들 밖에 있는 외부세계라는 두 세계 사이에는 어떤 균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끊임없는 상호과정의 결과로서 이들 두 세계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우리가 소통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이 세계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진의 내용만을 소중히 한다. 나에게 있어서, 사진의 내용은 형식과 분리될 수가 없다. 형태에 의해서 표면, 선, 명암의 상호작용의 엄격한 구성을 의미한다. 우리들의 개념과 정서가 굳어지고 전달될 수 있는 것은 이런 구성 내에서 만이다. 사진에 있어서 시각적인 구성은 오직 훌륭한 직관으로부터 생겨날 수 있다.” 결정적 순간 서문에서
이경률 박사(중앙대 사진학과 겸임교수)는 “직관이나 무의식 등의 지속된 잠재적 감정들은 예를 들어 여행에서 전혀 예견치 못한 많은 대상과의 만남으로부터 이유 없이 불쑥 솟아나는 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미묘한 인상 그리고 물위를 부유하는 부초처럼 어떤 이해할 수 없는 기억의 조각들을 경험할 때, 우리로 하여금 거의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대상에 가져가게 하는 그러한 감정들이다. 이때 감정들은 단순한 만남의 우연이 아니라, 말하자면 무의식에 잠재된 또 다른 시선 혹은 욕구이다”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시선의 무의식에 관해 장 클레르는 “그 시선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 위를 조금도 무겁지 않게 떠돌아다녔고, 어느 것에도 특별한 눈길을 보내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쉴새없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와 세계 사이의 일종의 공모관계는 시선의 끊임없는 자유로움의 대가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공모관계의 동기는 형이상학적 차원에 속한다”고 기술하였다.
또한 카르티에-브레송은 쇼펜하우어의 저술을 접하면서 로맹 롤랭과 흰두교에 입문했다. 그리고 2차 대전 중에 탈출한 뒤, 브라크로부터 ‘선불교와 궁도의 예술Zen and the Art of Archery’이라는 책을 받았다, 그것이 일생동안 선불교에 마음을 사로잡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경홍 박사(경일대 사진영상과 교수)는 “직관, 무의식 등 개념적으로 지속되는 시간의 ‘찰나(instant)’는 동양철학에 가깝다. 그에게 있어 진리는 불교이고 선불교이고 도교였다”고 주장한다. 매그넘의 사진작가, 마크 리부가 2004년 8월 4일자 르몽드 지에 카르티에-브레송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남긴 글에서도 동양과의 관련성을 강조했다. “형태와 개념 사이에,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 사이에 그토록 바라는 이러한 관계 ...... 난 그의 총명함과 청명함으로 동양으로 관심을 돌린 그를 생각한다”
4. 20세기의 증거
1947년 앙리 카르티에-브레송, 로버트 카파, 데이비드 “침” 세이무어, 조지 로저는 사진가 회원 전원에게 이익을 분배하는 협동조합 형태의 에이전시를 만들기에 이러렀다. 그들은 편집장으로부터의 독립과 자신이 촬영한 필름에 대한 사용권과 그들 자신의 어사인먼트를 선택할 자유를 보장받고 자신의 개성을 사진에 반영하기 위해 매그넘을 창립하였다. 매그넘 창립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출판물이나 출판사의 편집자들의 지시를 따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사진가로서의 주체성과 자유를 확보하는 것이 4명의 창립자들의 염원이기도 했다.
매그넘의 첫 번째 작업은 세계를 분할하여 촬영하는 것이었다. 데이비드 세이무어가 유럽을, 조지 로저가 아프리카를, 로버트 카파가 소련을 촬영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잡지들이 그의 사진들을 잘라내지 못하도록 보증하겠다는 카파의 약속을 받은 뒤에서야 인도의 분열상을 취재하기 위해 봄베이로 향했다. 1947년 여름 봄베이의 정치적, 종교적 적대감은 참혹한 폭력투쟁으로 변해 있었다. 최소한 천만 명의 힌두교인, 무슬림, 시크교도들이 집을 버리고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 새로 생긴 국경을 가로질러 서로 반대 방향으로 도망하고 있었다. 최소한 백만 명 이상의 인도인들이 살육되었고, 수십만 명이 대탈출 기간 동안 난민이 되었다. 그 기간 동안 카르티에-브레송은 여러 잡지에 500 여장의 사진과 기사를 실었다. 그리고 1948년 인도 독립 운동의 지도자 간디의 죽음을 촬영했다.
한편 중국에서 국민당 몰락 전 6개월과 공산당 집권 후 6개월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독립시기 동안 체류하였다. 특히 마오쩌둥이 집권하기 직전 청조 마지막 황실안의 환관을 촬영하였는데, 마치 황실의 최후를 보는 듯하다. 또한 스탈린 죽음 이후, 공식적으로 소련에 입국한 최초의 서방 사진가이기도 했다. 61년 베를린장벽 설치 이듬해에 베를린 장벽에 매달려서 무심코 놀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촬영하는 등 20세기의 중요한 증거들을 남겼다. 카르티에-브레송은 ‘결정적 순간’의 사진집 서문에서 르포 사진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사진작가들에게 있어 한번 가버린 것은 영원히 가버린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 작업의 고충과 위력이 비롯된다. 우리의 작업은 현실을 감지하여 거의 동시에 그것을 카메라라는 우리의 스케치북에 담는 일이다..”
“우리는 종종 뉴스라 불리는 사건을 촬영한다”고 카르티에-브레송이 1957년에 Popular Photography의 Byron Dobell에게 말했다. 그는 이어서 “그러나 어떤 이들은 뉴스를 마치 회계사의 장부처럼 상세히 하나하나 나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불행하게도 언론 매체에 종사하는 사진기자들은 대부분 범속한 방식으로 사건에 접근한다. 그것은 어느 역사가에 의해 저술된 워터루 전투의 세부사항을 읽는 것과 같다 : 수많은 무기들이 거기에 있었고 수많은 군인들이 부상을 당했다. 당신은 세부 항목의 셈에 관해 읽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만약 당신이 스탕달의 Charterhouse of Parma를 읽게 된다면 당신은 전쟁의 내부로 들어가서 작으나 의미있는 세부사항을 향유한다 ..... 인생은 애플 파이처럼 잘려진 단편같은 기사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사 접근에 있어서 보편적인 방법은 없다. 우리는 상황, 진실을 불러일으켜야만 한다. 이것은 인생의 리얼리티에 관한 시이다”
5. 인간애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은 학창시절 문학, 철학, 시에 관심을 가지고 폭넓은 독서, 예컨대
엥겔스, 프로이트, 랭보, 생 시몽, 쇼펜하우어 등을 탐독했다. 나아가 1930년대 중반 파시즘, 나치즘의 팽창에 맞서 좌파 지식인으로 성장해 갔다.
그는 1937년에 공산당 일간지인 스 수아르(Ce Soir)의 사진기자로 활동하면서 로버트 카파와 데이비드 세이무어를 만났다. 그들은 파리 센 강 남쪽 기슭의 카페에서 정기적으로 만나 정치에 관한 토론을 하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그곳을 공산주의, 파시즘, 나치즘, 사회주의에 관한 격렬한 토론의 장소로 바꾸어놓았다.
그는 1939년에 징집되어 2차 대전 중에 프랑스 군의 영화사진부대에서 상병으로 활동하다가 1940년에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처음에 독일 서남부의 삼림지대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보내졌던 그는 들에서 감자를 심는 강제 노역을 했다. 곧 동료포로와 함께 첫 탈출을 시도하였다. 밤에는 걷고 낮에는 숲 속에서 잠을 자면서 스위스 국경지대 까지 갔을 무렵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행군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그들은 붙들려 20일간의 독방감금에 처하는 선고를 받게 되었다. 그 뒤에 폭탄상자를 만드는 공장에서 노역을 하던 그는 재차 시도했으나 24시간 이내에 발각되고 말았다. 그는 두 번의 탈출 실패에도 포기하지 않고 1943년에 세 번의 시도 끝에 성공하였다. 그는 외국노동자로 변장하여 파리로귀환할 수 있었다. 거기서 그는 즉시 레지스탕스에 가입했고 전복을 기도하는 사진부대를 조직하여 독일점령을 기록했다.
풍부한 독서 그리고 1930년대 유럽의 사회적 정치적인 문제에 관한 관심으로 그는 자연스럽게 급진 좌파 지식인으로 성장해 갔다. 더욱 2차 대전기간 중에 포로 생활과 탈출 그리고 포로와 탈주자들을 돕는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면서 더욱 강한 인간애를 체험할 수 있었다. 그는 “인간애의 뜨거운 관심이 다른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바로 그의 사진 철학이다. 사각 틀 밖으로 머리를 내민 멕시코의 창녀, 인도에서 가난한 민중의 깡마른 아기, 휴가를 즐기는 평범한 사람 등 그의 작품 구석구석은 인간애로 가득히 스며 있다. 카르티에-브레송 사후 사진가, 리차드 아베돈은 “그는 사진의 톨스토이였다. 심오한 인본주의와 함께 그는 20세기의 증인이었다”라고 경의를 표했다.
나오며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은 소년시절에 브로니형 암상자 카메라로 휴일 날마다 스냅사진을 찍곤 하였다. 얼마 후, 으젠느 앗제의 사진에 감명을 받고서 호두나무로 만든 3 x 4 인치의 카메라를 구입했다. 그러나 렌즈 캡으로 노출을 조절하는 카메라였기에 정물의 세계에 한정될 수 밖에 없었다.
22세 때에 아프리카 여행에서 크로스사의 소형 카메라를 만나 시간인식이 가능해졌다. 그 후, 귀로에 마르세이유에 들려 우연히 라이카 카메라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그에게 가장 적합한 카메라가 되었다. 카르티에-브레송은 “소형 카메라는 내 눈의 연장이다. 그때부터 내 곁을 떠난 일이 없다. 나는 삶을 포착하겠다고, 즉 살아가는 행위 속에서의 삶을 간직하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숨 막히는 듯한 느낌을 맛보며 언제라도 뛰어들 수 있는 채비를 갖추고 온종일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무엇보다도 나는 단 하나의 이미지로 장면에서 솟아오르는 근본적인 것을 포착하려는 욕구를 가졌다”고 밝혔다. 소형 카메라를 사용함으로써 거리에서 인간의 삶을 있는 그대로 찍기 시작했다. 소위 거리 사진의 미학적 관점과 전통은 로버트 프랭크, 윌리엄 클라인, 게리 위노그랜드, 리 프리드랜드, 알렉스 웹 등으로 이어진다.
카르티에-브레송은 눈의 연장으로 인식한 소형카메라의 메카니즘을 최대한 활용하여 눈으로 인식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사진적으로 포착해 나갔다. 그는 “나는 회화와 결별하면서부터 내 나름의 참다운 사진을 찍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이것은 바로 회화 구도와 사진 구도의 다른 점에 대한 자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