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씨의 파보
본관은 凝川 또는 密城【지금의 밀양(密陽)】,경주(慶州),평해(平海),구례(求禮),청주(淸州),나주(羅州),부안(扶安:扶寧),안협(安峽),안동(安東:一直) 등이 전하고 있읍니다.
이 중에서 안동손씨를 제외한 모든 손씨는 밀양,평해,경주로 분적(분파)되어 다시 나머지 타 본관은 이들 3본에서 다시 갈라졌다고 하며 안동손씨 제외한 모든 손씨는 신라 6촌(六村)중 대수촌(大樹村:牟梁部)의 촌장인 구례마(俱禮馬)가 득성후 신라의 대효(大孝)인 문효공(文孝公)순(諱順)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 시조 순 할아버지 묘소 >
손씨들은 모두가 동계혈족이라는 것이 통념으로 되어 있어 이본(異本)이라도 서로 혼인하지 않지만 안동손씨만은 계보가 전연 다르며 안동손씨의 시조는 순응(荀凝)으로 성이 원래 순(荀)이었는데 고려 제8대 현종의 휘(諱)인 순(詢)과 음이 같다 하여 이를 피해 손(孫)씨로 개성하였으므로 그 밖의 손씨와는 동성이족(同姓異族)인 셈이다. 본관별 가문을 빛낸인물을 살펴보면
밀양손씨는 순(諱順)의 혈손(血孫) 7대손인 고려개국 공신으로 신라말 고려왕 왕건(高麗王 王乾)을 찾아가 1만5천여명의 군졸을 이끌고 후백제를 쳐 황산군 (黃山郡 :지금의 連山郡)에서 후백제왕 신검(後百濟王 神劍)을 생포하고 혁혁한 전과를 올려 고려 삼국통일을 이룩한 공훈으로 광리군 (廣理君)에 봉해졌으며 아울러 정1품보국숭록대부(正一品 輔國崇錄大夫)에 오르고 삼중대광 사도(三重大匡 司徒)에 추증된 긍훈(諱兢訓)을 증시조로 한다.
< 밀양손씨 중시조 긍훈 영정 >
증시조는 밀성(密城 :당시는 광리) 남정촌(南亭村)에서 태어났으며, 추화산성(推火山城)에 거점을 두고 비적을 방어하여 많은 위훈을 남겼다. 운문사 대작갑사(大鵲岬寺)에는 역대로 원광(圖光), 보양(寶壤) , 원응(圓應)등 삼 국사(三 國師)가 거처 하였는데 주로 보양국사(寶壤國師)를 모시고 무술을 닦으면서 수 백차례에 걸친 비적들의 침공을 막아 사찰과 도장을 보위 함으로써 운문산의 수호신이 되어 - 쇄잔해진 신라를 보위한 위훈으로 - 왕의 칙명에 따라 지금도 장군의 영정(影幀)이 운문사 조영전에 봉안되어 해마다 음력 9월 9일에 향사하고 있으며 신라말기에 진성여왕(眞聖女王 )이 실덕하여 괴귀(怪鬼)가 횡행하게 되고 선량한 백성(주민)들이 많이 죽어 인심이 흉흉해지자 이 괴귀들을 몰아내어 해중으로 쫓아 버리고 경내를 편안케 하였다는 사화도 있다.
(참고문헌 : 인명 대사전, 국사대사전, 청도를 빛낸 사람들 중에서 )
후손들은 밀양, 경주를 중심으로 영호남(嶺湖南)등지에서 대족(大族)을 이루어 세거하고 있으며 이외 밀양손문에 빛낸 인물으로는 과거에 올라 고종 때에 벼슬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수사공(守司空)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된 변(?). 충숙왕 때 여진을 물리쳐 온성(?城)에 <정북대장군 손빈비>라는 전승비가 세워졌고, 조적의 난을 평정하여 밀성군에 봉해진 빈(贇). 고려 말에 수주목사(樹州牧使)를 지내다가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하자 이에 불복, 처형당하여. 그의 부인 이씨가 난을 피해 아들 3형제를 데리고 호남으로 내려와 맏아들 검경(?敬)은 나주에, 둘째 유경(有敬)은 보성에, 셋째 계경(季敬)은 정읍에 각각 정착케 하여 나주, 보성 정읍의 파조가 된 책(策), 예안(禮安) 현감을 지내고 문한(文翰)으로 이름난 영제(英濟), 전적?창원(昌原)부사 등을 역임한 성리학자 기양(起陽),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음을 당한 서륜(敍倫), 문과(文科)등제하여 고령?단성현감을 거쳐 병조정랑이 된 창(昌), 학문이 뛰어난 천우(天佑), 숙종조 문광에 장원한 명래(命來)가 있으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인갑(仁甲), 승선(承善), 덕심(德沈)이 주요인물이 있으며
그 밖에 근세인물로는 1919년(기미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이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초대대통령인 병희(秉熙), 임시정부 의정원 의장 정도(貞道), 독립운동가인 진형(晉衡)?후익(厚翼)?승억(承億)?일민(一民) 등이 있다.
경주손씨는 순(諱順)의 혈손으로 고려때 밀직사판사를 지낸 경원(敬源)을 중시조로 하고 있으며 경원(敬源)의 증손 사성(士晟 : 등의 맏아들)이 조선 세종(世宗) 때 훈민정음(訓民正音) 창제에 참여하고 계성군(鷄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욱(旭)과 소(昭)의 형제(兄弟)가 세조(世祖)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 을 진압하는데 공(功)을 세워 가문의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1459년(세조 5) 김종직(金宗直)과 함께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소(昭)는 주부(主簿)와 병조좌랑(兵曹佐郞)등을 역임한 후 형인 영북 어사(嶺北御史) 욱(旭)과 함께 이시애의 난 때 평정에 참여하여 욱은 함흥(咸興)에서 순절하였고, 그는 난을 평정한 후 적개이등공신(敵愾二等功臣)으로 책록되어 내섬시정(內贍寺正)에 특진, 성주 목사(星州牧使)와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거쳐 계천군(鷄川君)에 봉해졌으며, 안동 부사(安東府使)와 진주 목사(晋州牧使)를 역임하며 특히 문장(文章)과 글씨로 명망이 높았으며 탁월한 문장(文章)과 경륜(經倫)에 밝았던 중돈(仲暾)은 소(昭)의 둘째 아들로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미하고 1489년(성종 20)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를 시작으로 여러 청환직(淸宦職)과 양산군수(梁山郡守)를 지낸 후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올라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으로 간관(諫官)들이 거의 다 쫓겨 날 때 파직당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후에 복직,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주민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어 그의 공덕을 추모했으며, 1517년(중종 12)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공조(工曹)와 이조(吏曹)의 판서(判書)를 지내고 도승지(都承旨)를 3번, 대사간(大司諫)을 4번, 경상(慶尙)?전라(全裸)?충청(忠淸)?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를 지내고 우참찬(右參贊)에 이르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크게 명성을 떨쳤다.
그외 정언(正言)을 지낸 회종(會宗), 부사(府使) 만웅(萬雄), 현감(縣 監) 경익(景翼), 감찰(監察) 회경(會慶), 이조 좌랑(吏曹佐郞) 병주(秉周),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상일(相馹)?기영(耆永) 등이 유명했고, 번(蕃)은 전시문과(殿試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을 지내고 편수사(編修事)가 되어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에 참여했으며 중종(中宗) 때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다.
한편 군자감(軍資監)의 봉사(奉事)를 지낸 윤원(潤源)은 임진왜란 때 참전하여 창암(倉巖) 전투에서 많은 전공(戰功)을 세우고 장렬하게 순절하여 의절(義節)의 가통(家統)을 세웠으며, 영곤(永坤)은 효행(孝行)으로 이름을 떨쳤다.
우참찬(右參贊) 중돈(仲暾)의 현손(玄孫) 종로(宗老)는 광해군(光海君) 때 무과(武科)에 급제했으나 인목대비(仁穆大妃 : 선조의 계비, 영창대군의 어머니)가 서궁(西宮)에 유폐되자 이를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 후에 남포 현감(藍浦縣監)을 지냈으며,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허 완(許 完)의 막하(幕下)로 들어가 이천(利川)의 쌍령(雙嶺) 싸움에서 적과 대전하다가 순절하여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추증되었고 정조(正祖) 때 왕명으로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져서 진해 현감(鎭海縣監) 식(湜), 부사(府使) 종책(鍾策), 군수(郡守) 병수(秉秀) 등이 있다
평해손씨에서는 호조?공조판서?경기도감찰사?대사간?좌찬성 등 내외 요직을 역임하고 궤장을 하사받은 순효(舜孝), 그의 아들로 예조판서?좌찬성?중추부지사를 지낸 주(澍), 당대의 시인으로 이름난 필대(必大)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청주 손씨는 시조(始祖) 순(順:문효공)의 25세손으로 전(傳)하는 필영(弼榮)를 일세조으로 하고있다.
「손씨총원록(孫氏總源錄)」에 의하면 그는 고려(高麗) 때 개성군(開城君)에 봉 해졌다가 후에 다시 청성(淸城:성주의 옛 명칭)군(君)에 진봉(進封)되었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청주(淸州)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후 필영(弼榮)의 아들 취(就)가 영녕군(永寧君)에 봉해졌고, 손자(孫子) 희 (僖 시호는 문간공)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서북도순문사(西北都巡問使):지방에 임시로 파견되던 경관직)를 역임하여 가세(家勢)가 크게 번창했으며 희(僖)의 맏아들 원렬 (元烈)은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제학(提學)에 올라 가문을 빚냈다.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한 채(採)는 원렬(元烈)의 아들로 조선(朝鮮)이 개국(開 國)하자 벼슬의 뜻을 버리고 진천(鎭川)으로 낙향(落鄕)하여 절의(節義)를 지켰 으므로 왕(王)이 가상히 여겨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추증하였다.
그의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한웅(漢雄:자는 사강)과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된 근종(謹宗)이 유명하였으며, 참봉(參奉)을 역임하고 호조 참판(戶曹參判) 에 추증된 지(漬)의 아들 4형제가 뛰어났다.
사마시(司馬試)에 올라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중추부의 종 2품 벼슬)에 오른 희
언(希彦)은 지(漬)의 넷째 아들이며,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찬선(纘先)ㆍ환(環)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부안손씨에서는 성종 때 승지?부호군 등을 지내고 공조참의?판결사 등을 거쳐 예문관부제학에 이른 비장(比長), 그의 증손으로 임진왜란 때 역대의 실록과 선조의 어영을 정읍(井邑) 내장산 용굴암(龍窟庵)에 옮겨 지킨 홍록(弘綠) 등이 있다.
손씨는 조선시대에 84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는데, 두드러진 인물을 본관별로 살펴보면 경주손씨에서는 중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으며 도승지를 3번, 대사간을 4번, 경상?전라?충청?함경도의 관찰사를 두루 지내고 우참찬에 이른 중돈(仲暾), 성주(星州)목사?공조참의 등을 지내고 안동도호부사에 이른 소(昭), 인조 때 남포(藍浦)현감이 되었다가 병자호란의 쌍령(雙嶺) 싸움에서 전사하고 충신 정문이 세워진 종로(宗老), 인조 때 현감을 지내고 병자호란에서 전사한 정구(鼎九) 등이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 손씨의 인구
1960년 국세조사에서는 4만 144가구, 인구 22만 8987명으로 258성씨 중 23위를, 1985년 조사에서는 8만 7995가구, 전국 가구구성비 0.9%로 274성씨 중 24위를 2000년도 조사에서는 12만9780가구 인구 41만5182명으로 286성씨 중 25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