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황산 천하무산(登黃山天下無山)!!"
산행일시:2007,11,3~11,6 산행지:중국 황산 같이 하신분:산행대장(야초님)외17명 날씨:맑음 코스:인천-항저우-해상호텔(1박)-포청천가-비취곡-자광각-(케이블카)-옥병루-오어봉-천해초대소-백운호텔-비래석-배운정-서해대협곡-배운정-서해호텔(2박)-백아령-운곡사-실크박물관-보석전시장- 청대 옛거리(황산시둔계구)-영은사-송성가무쇼-에덴 할리데이호텔(3박)-서호유람-용정차밭및 전시판매장-라텍스전시판매장-항저우공항-인천
명나라때 중국에 유명한 지리학자이고 여행객인 '서하객'이란이가 1616년,1618년두번에 걸쳐 황산을 탐험하고 난뒤에 중국에서 5악(태산,화산,천주산,항산,승산)을 보면 다른산은 볼 필요 없는데 황산을 보고나면 5악도 필요없다.고 극찬 하였다고 하니 바로 "등황산 천하무산"이다.
11월3일 08:30분 서둘러 집결 장소에 가니 야초님,황호님,산이슬님,정민님 등이 벌써 나와서 일용할 양식을 나누어 담고 있었다. 내게도 몸부림 차(?) 몇 병이 할당 되었고, 각자 짐을 챙겨 대기 하고 있던 버스에 몸을 실었다. (공항까지에 안내는 '모두투어"에 권선영실장이 맡았다.) 난 바로 설친 잠을 청 하였다. 누군가 바다다!! 하는 소리에 잠을 깨어 보니 벌써 인천공항! 조금 이른 것 같았지만 일행은 수속을 끝내고 면세점 쇼핑을 한다. 난 아들 녀석이 주문한 G-SHOCK시계를 하나 샀다. G-SHOCK이란 놈이 또래집단서 유행이란다.
14:30 황산! 그 대망의 황산을 향해 아시아나 OZ359편은 힘찬 비행을 시작 하였다. 이윽고, 두어 시간 뒤 일행은 항주 공항에 무사히 안착하였다. 중국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 이지만 중국은 너무 칙칙하다. 건물도 사람도, 분위기도,희 뿌연 날씨같이... 버스에 타니 현지 가이드(엄창룡)가 안내를 한다.
절강성에 성도 항저우 [杭州(항주), Hangzhou.
인구 8백만의 거대 도시다.
"첸탕강[錢塘江]의 하구에 위치하며, 서쪽 교외에 시후호[西湖]를 끼고 있어 쑤저우[蘇州]와 함께 아름다운 고장으로 알려졌다. 7세기 수(隋)나라가 건설한 강남하(江南河:大運河의 일부)의 종점으로 도시가 열려 남송(南宋)시대에는 수도가 되었으나, 임시수도라는 뜻에서 행재(行在)라고 하다가 임안(臨安)이라고 개칭하였다. 10세기 이후에는 외국선박의 출입도 많았고, 원대(元代)에는 M.폴로, 이븐 바투타 등이 이곳을 방문하여 행재의 와전인 '킨자이(Khinzai)', '칸자이(Khanzai)' 등의 명칭으로 유럽에 소개되었다. 19세기에 태평천국군(太平天國軍)의 싸움으로 파괴되었고, 난징조약[南京條約]에 의해 상하이[上海]가 개항되자 항구로서 번영은 상하이에 빼앗겼다. 오늘날 성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다. 녹차(綠茶)의 최고급품으로 알려진 룽징차[龍井茶]의 산지이며, 전통적인 직물공업을 바탕으로 근대적 설비에 의한 견(絹) ·면직포 ·염색 등의 공업이 발달하였다. 교외의 새로운 공업지대에는 1957년에 철강공장이 세워져 공작기계 ·동력기계 ·보일러 ·베어링 ·전선 관련공장이 들어섰다. 중국 정권 성립 후 황폐해진 시후호를 5년 동안 정비하고 호반의 별장 등을 정리, 대공원을 건설하였다."
북경사람들은 정치에만 관심이 많고. 남쪽 광동 사람들은 먹는 것에 관심이 많아 다양한 요리문화가 발전 하였단다. 항주 사람들은 즐기는 "로맨스문화"가 발달 되었다고 하니 지켜 볼 일이다.ㅎㅎ
날씨는 맑았고,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항주 시내는 깨끗했다. 수도 북경보다 오히려 깨끗한 것 같았다. 관광도시 여서 일까? 건물도 산뜻하고 거리도 청소가 잘 되어 있다. 공항에서 느낀 칙칙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황산까지는 네 시간을 가야 한다. 시내를 벗어나니 우리 농촌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펼쳐진 산야가 광활 하다는 것 말고는... 전력사정이 안 좋은지 길가에 휴게소도 침침하다.
창룡(가이드)에 안내에 따라 어느 식당에 들러 저녁을 먹었는데 좌우 옆 테이블에 모두 한국 사람이다. 보조하는 중국 종업원 들이 한국 관광객들에게 너무 익숙해져 있는 느낌이다. 식사를 끝내고 일행 중 누군가가 한화 천원짜리를 꺼내서 봉사료를 주었다. 그 천원 한 장에 고개 숙여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며 가난한 국가에 비애(?)를 보는 것 같아 마음 한켠이 아려온다. 30여년 전 우리에 모습이었는데...ㅠ.ㅠ
1박지인 해상 호텔에 도착 하였다. 빌라형 호텔인데 호텔이 촌을 이루고 있다. 침실은 예상보다 깨끗하였다.
황산시! 인구 150만의 도시다. 황산시 GDP(총생산)187억 위안중, 84억 위안이 황산에서 얻어지는 관광수입 이라하니 황산이 황산시에 있어 어떤 존재인지 알만 하다.
씻고 밖을 나오니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일행 들은 피곤한 심신 내려놓고 모두 잠을 청한 모양이다. 관광지 황산에 해상호텔촌은 그냥 그렇게 잠들어 가는가 보다. 주위는 조용하고 인적 또한 끈기인지 오래이다. 프론트 데스크에 야근하는 직원만이 졸린 눈을 비비고 있다. 그러나 난 잠을 잘 수는 없었다. 아니 궁금 하였다. 황산에 밤문화(?)가...
결국 창룡을 불러내어 택시를 타고 황산시내로 향했다. 시내는 유령도시처럼 어두었다. 군데 군데 가로등이 졸고 있을뿐!! 모든 상점에 불이 꺼져있다. 창룡이 잘 안다는 '고치'집으로 갔으나 거기도 문은 닫혀 있었다. 아무리 사회주의 국가라지만 관광수입으로 먹고사는 도시에 풍경치고는 너무 을씨년하다. 결국 시내만 한바퀴 돌고 왔다. 아까운 택시비만 80원 없애고...
11월14일 06:00시 모닝콜이다. 호텔식으로 아침을 마치고 첫 코스인 '포청천가'로 향했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잠시 법을 지배했다고 불리는 청백리에 상징 포증에 대해서 깊이 있는성찰을 위해 그의 관한 자료를 발췌 인용하였으니 시간 되시는분은 읽으시고, 급하신분은 건너 띄셔도 무방 하겠습니다.^^*
"포청천(包靑天: 999~1062)은 북송시대의 유명한 정치가이다. 자는 희인(希仁), 이름은 증(拯), 여주(廬州) 합비(合肥: 지금의 안휘성 합비) 출신이다. 그는 단주지주(端州知州), 감찰어사(監察御使), 삼사호부판관(三司戶部判官), 경동(京東)·섬서(陝西)·하북로전운사(河北路轉運使), 삼사호부부사(三司戶部副使)·지간원(知諫院), 영주(瀛州)·양주(揚州)·여주(廬州)·지주(池州)·강녕(江寧)·개봉부지부(開封府知府) 및 삼사사(三司使)를 거쳐, 가우(嘉祐) 6년(1061)에는 관직이 추밀부사(樞密副使)에 이르렀다.1062년에 포증은 향년 64세로 병사했다. 그가 죽은 후에는 다시 그를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추증하고, 시호를 "효숙(孝肅)"이라 했다. 현존하는 그의 문집으로는 ≪포증집(包拯集)≫≪포효숙공주상의(包孝肅公奏商議)≫ 등이 있다. 포증(包拯)은 전기적인 인물로 남송(南宋)과 금대(金代)에 이미 그를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과 희곡 등이 출현하였으며, 원대(元代)에는 포공희(包公戱), 포공전설(包公傳說), 설서화본(說書話本), 소설 등에서 포공을 찬양한 작품이 매우 성행하였다. 명대에는 각종 전기(傳奇) 지방희(地方戱)와 수백권에 이르는 소설화본 ≪포공안(包公案)≫으로 더욱 발전하였으며, 청대에는 다시 ≪용도공안(龍圖公案)≫≪삼협오의(三俠五義)≫≪칠협오의(七俠五義)≫ 등의 장편소설로 발전하였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중국의 지방희는 물론 희곡과 소설 속에서 포증을 주제로 한 작품은 많이 전해지고 있다.
1993년부터 그를 주인공으로 한 「포공(包公)」극집이 계속 쏟아져 나오면서 약 500여편의 영화가 제작되었으며, 이로써 포증은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포청천이란 이름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는 이미 시공을 초월하여 청백리(淸白吏)의 전형적인 인물로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그 명성이 자자하다. 북송 진종(眞宗) 함평(咸平) 2년(999), 포증은 전통적인 학자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송왕조의 하급관리였다.북송 인종(仁宗) 천성(天聖) 5년(1027), 포증은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건창현(建昌縣) 지현(知縣)에 임명되었으나 연세가 많은 부모님을 부양하기 위해서 관직을 사임하였다. 몇 년 후 양친이 모두 돌아가시자 무덤가에 초막을 짓고 3년상을 치렀으며, 그후에도 명리를 탐하지 않고 고향에서 정직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였다.북송 인종 경우(景祐) 4년(1037), 그는 천장현(天長縣: 지금의 안휘성 천장현)의 지현에 임명되었다. 약 40여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정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지만, 이때부터 그는 죽기전까지 강직한 성품으로 청렴결백하고 공평무사한 정치를 펼침으로써 위대한 발자취를 중국역사에 길이 남기게 되었다.그가 천장현 지현으로 있을 때, 한번은 그 현에 특이한 소송사건이 하나 발생하였다.
어떤 농민이 밤에 소를 외양간에 매어두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 소가 땅바닥에 드러누워 입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그 농민이 소의 입을 벌리고 살펴보니 누군가에 의해 소의 혀가 잘려있는 것이었다. 분통이 터져 참을 수 없었던 그 즉시 관청으로 달려가서 고소를 하고, 포증에게 소의 혀를 자른 사람을 잡아달라는 부탁을 하였다.이 미궁에 빠진 사건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포증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그 농민에게, "일단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당장 집으로 돌아가서 그 소를 도살하여 팔아버리게."라고 하였다. 당시의 법률에 의하면 소는 개인이 임의로 도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혀가 잘린 소는 얼마 살지도 못할 것이고, 관청에서 소를 도살하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그는 집으로 돌아가서 결국 그 소를 도살하였다.다음날 어떤 사람이 천장현 관청으로 찾아와서 그 농민이 임의로 소를 도살했다고 고발했다. 이에 포증은 자세한 내막을 물어본 후 즉시 큰 소리로 호통을 쳤다."정말 대담한 놈이로구나. 네가 남의 소 혀를 잘라놓고 도리어 임의로 소를 도살했다고 그 사람을 고발하다니!"그 사람은 갑작스런 포증의 호통에 할말을 잊고 멍하니 있다가 땅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그의 죄행을 사실대로 인정하였다. 사실 소의 혀를 자른 사람은 그 농민과 원한이 있었기 때문에 먼저 소의 혀를 자른 다음에 다시 그 농민이 임의로 소를 도살했다고 고발했던 것이다. 이 일이 있은 이후 포증의 판결에 대한 명성이 크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포증은 여러 곳에서 지방관을 역임하였는데, 그는 가는 곳마다 과중하고 잡다한 세금을 없애고 억울한 사건을 깨끗이 해결해 주었다. 그후 그는 경성(京城)으로 가서 간관(諫官)을 역임하면서 인종에게 불법을 저지른 관료들을 막기 위한 많은 시책들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당시 북송은 범중엄(范仲淹)의 신정(新政)이 실패로 끝난 후 조정의 부패가 날로 극심해졌다. 특히 경성 개봉부(開封府)에서는 고관대작들과 황제 인척들의 부정부패가 더욱 심하였으며, 그들은 국법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가우(嘉祐) 원년(1056) 12월, 이러한 혼란한 정치적 상황하에서 인종(仁宗)은 개봉(開封)의 질서를 정돈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포증을 개봉부지부(開封府知府)에 임명하였다. 포증은 그 이듬해 3월에 정식으로 부임하여 가우 3년 6월까지 약 1년 4개월간 개봉부를 맡았다. 개봉부는 황실의 내외척과 권문세족들이 모여있는 곳이었다. 그전에는 그 누구도 그 직책을 맡고 권문세족들과 내통하여 뇌물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포증은 개봉부지부에 임명된 이후 이러한 부패를 척결하기로 결심하였다. 송대의 법규에 의하면, 누구든 관청에 고소를 할 때는 먼저 대리인에게 부탁하여 고소장을 쓴 다음 담당관리를 통하여 그것을 지부에게 전달해야 하였다. 이때 간악한 소송 대리인들은 사기를 쳐서 무고한 소송인들의 재물을 갈취하곤 하였다. 포증은 그러한 법규를 철폐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고소를 할 때는 직접 개봉부 앞으로 와서 북을 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북소리가 울리면 개봉부에서는 정문을 열고 백성들이 직접 안으로 들어와서 고소를 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개봉부의 관리들은 더상 중간에서 농간을 부릴 수 없게 되었다.어느 해에 개봉에 홍수가 발생하였는데, 알고 보니 그곳의 수로가 막혀 배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진상조사에 나선 포증은 어떤 환관과 권문세족이 수로를 점유하고 거기에 화원과 누각을 만들었기 때문에 수로가 막혔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포증은 즉시 명령을 내려 그들에게 수로 위에 세운 모든 건축물을 철거토록 지시했다. 그러나 한 사람이 그것을 철거하려고 하지 않았다.
개봉부에서는 사람을 파견하여 계속 독촉을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억지를 쓰며 땅문서를 꺼내 그 땅이 자기 소유라고 강변하였다. 포증은 다시 그것을 자세히 조사해 보고 그 땅문서가 위조된 것이라는 것을 밝혀냈다. 이에 화가난 포증은 그에게 강제 철거 명령을 내리고 상소를 올려 그 사실을 인종에게 고하였다. 결국 그 사람은 어쩔 수 없이 그 화원을 철거하였다.
포증의 법집행이 엄격하다는 사실들은 전해들은 개봉부의 권문세족들은 함부로 나쁜짓을 저지르지 못했다. 그후 개봉부에서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포증이 청렴한 관리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당시 민간에서는, "청탁이 통하지 않는 사람은 염라대왕과 포증이다." 라는 노래가 전해지고 있을 정도였다.포증은 친척과 친구들에게도 매우 엄격하였다. 어떤 친척이 그를 후원자로 이용하려고 하였지만 그는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 세월이 갈수록 친척과 친구들도 그의 강직한 성품을 파악하고는 더 이상 개인적인 일로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가우 6년(1061), 인종은 포증을 매우 신임하고 중시하여 그를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승진시켰다. 그는 고관이 된 후에도 사생활은 일반 평민과 같이 소박하고 검소하였다. 그 이듬해 5월 그는 중병을 얻어 죽으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후대에 자손들이 벼슬을 하여 부정부패를 저지르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그들이 죽은 이후에도 우리 포씨(包氏) 집안의 선산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라."포증은 살아서는 청백리로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죽은 이후에도 사람들은 그를 청백리의 전형적인 인물로 삼고 그를 추앙하여 '포공(包公)"이라 하였다. 민간에는 포공이 공평무사하게 일을 처리하고 부패한 권세가들을 과감하게 처단하는 이야기들과 포공의 재판을 다룬 희곡·소설 등이 많이 전해오고 있다. 비록 그것들 중에는 허구적인 이야기도 많지만 거기에는 청백리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이 반영되어 있다. 탐관오리와 악덕 토호세력을 척결한 것은 포증의 일생 중 가장 돋보이고 가장 칭송을 받는 부분이다.
역사적으로는 유명한 포공희(包公戱)가 많다. 희곡 속에서는 청백리 포증의 형상 뿐만 아니라 장룡(張龍)·조호(趙虎)·왕조(王朝)·마한(馬漢)·공손선생(公孫先生)·남협전소(南俠展昭)의 형상도 소조하였다. 이들은 일치단결하여 뛰어난 기량으로 포증을 도우면서 부정을 저지른 황제의 친척이나 외척은 물론 모든 탐관오리들을 처벌하였다. 이때 포공은 항상 손에 상방보검(尙方寶劍)을 들고 있었는데 그것은 황제의 성지와도 맞설 수 있는 것이었다. 용작두, 호작두, 개작두, 음양경(陰陽境) 앞에서는 염라대왕도 물러나야 하고 어떠한 요괴들도 살아남지 못했다. 이러한 전설적인 이야기는 민중들이 창조해 낸 것으로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많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모두 근거없이 날조된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예술적 창조는 모두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포증은 30여년의 재임 시절에 관직을 박탈하거나 강등시키는 등 의법처리한 고관대작이 무려 30여명 이상이나 되었다.이것은 역사적으로 보기드문 경이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개인과 하나의 사건을 위해서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집요하게 조사하여 공정한 판결을 내렸다.포증에 의해 탄핵된 사람들은 모두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그들 중에는 포증보다 관직이 높은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강서전운사(江西轉運使) 왕규(王逵)와 송상(宋庠)·장요좌(張堯佐)등의 탄핵은 모두 전국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장귀비(張貴妃)의 백부 장요좌를 탄핵한 것은 가장 전형적이면서도 대표적인 사건이다.현재까지도 중국인들은 포공의 사당을 찾아가 그를 신으로 숭배하고 있다. 그의 공평무사한 판결과 청렴결백한 생활, 예리한 통찰력은 많은 대중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이로써 그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신적인 인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그는 민간종교에서 숭배하는 신이지만 그것은 보통 사람들이 믿는 종교적인 "하느님"과는 다르다. 즉 그는 하늘에서 강림한 신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으로서 초인적인 신으로 변화된 "인신(人神)"인 것이다.포공에 대한 숭배는 마카오에서 가장 성행한다. 지금도 마카오에서는 매일 포공의 사당을 찾아가서 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행열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숭배는 포공이 선한 사람을 보호해주고 악한 사람을 징벌해 주며, 재앙을 없애주고 복을 내려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포공에 대한 숭배는 사회 정의와 바른 정치의 실현에 숭배라고 할 수 있다."
포증에 정신을 기려보고 일행은 비취곡을 향하여 발길을 돌렸다.
비취곡! 일명 "연인의계곡"이라 불리는 곳이다. 물이 얼마나 맑고 고왔으면 비취곡이라 하였을까 마는 오르는 계곡 바위에 크고 붉은 글씨로 "명월송간조 청천석상류"란 글귀가 보인다. '밝은 달은 소나무 사이로 비추고 맑은 물은 바위 위를 흐르네...' 내 짧은 한자 해독력으로 뭐 대강 이런 뜻 아니었을까?
고고히 흐르는 달빛 아래 정인과 술잔을 기울이며 풍류를 즐겼을 낭만을 머릿속에 그려본다.ㅎㅎ
내게 풍류를 좀 아는 후배 한량이 하나 있다. 어느 날 핸펀 문자로
"자네 집에 술 익거든 부디 나를 청하시소 초당에 꽃피거들랑 나도 자네 청 하리라! 백년 덪 시름 없는일 의논 코저 하노라!!"
요로콤 보냈더니 자신이 받은 단문 중에 최고로 멋진 문장 이라나 뭐라나... ㅎㅎ 그넘(?)한테 술 엄청 사줬다...
정인교가 나왔다. 연인의다리? 사랑하는 사람과 손잡고 걸으라는 것 같은데 전후 좌우 아무리 돌아봐도 내가잡아 줄 손(?)은 없었다. '와호장룡' 마지막신을 찍은곳 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자랑을 늘어놓는 창룡의 말을 뒤로하며 비취곡을 하산 하였다.
점심은 비취곡에 있는 어느 반점에서 퓨전식으로 때우고 황산을 오르기 위한 들머리로 이동을 시작 하였다.
본래는 비취곡을 보고 근처에 운곡사 케블카를 이용하여 백아령으로 넘어가게 계획되었던것 같은데 가능하면 황산에 절경을 조금이라도 더보여 주고 싶어 한 집행부에 판단에 따라 다시 버스를 타고 자광각으로 가서 옥병루 케블카를 이용하여 황산을 오르기로 수정한 것이다. 어느덧 버스는 환승터미널에 도착 하였다. 이곳부터는 37인승 이상 되는 버스는 통행제한이란다.
황산을 찾은 다른 관광객들과 뒤 엉켜 이리 부딛고 저리 부딛기면서 오르는 황산의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울창하게 자란 대나무 밭이다. 옛날엔 절개의 상징으로 사랑받더니 이제는 대나무 밥통으로 용도 전환이 되어 우리 곁을 지키고 있다. 한국에서 자생하고 있는 '한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굵고 쭉쭉 벋은 모습이... 푸르른 잎이... 우리 산하에 대종을 이루고 있는 활엽수 군상하고는 비단과 명주에 차이랄까?
숲은 점점 깊어진다. 대숲에 가려 저 건너 푸른봉은 보이질 않는다. 버스는 황산의 심장을 향해 질주 하고 있다.
자광각이다. 걸어서 땀 흘리며... 머언산 가까운 산을 바라보며... 이끼낀 바위를 감상하며... 돌 틈에 매달려 자란 기송의 끈질긴 생명력을 부러워하며 등짐을 지고 기어 오르고 싶것만... 케블카를 이용하여 시간을 줄여야만 했다.
자광각에서 옥병루까지 2,012m에 케이블이 연결 되어 있고, 고도차는 750m이다.운행시간은 6분,한번에 6명이 탑승 할 수 있고,매시간당 600명을 실어 나른다고 한다. 1996년9월에설치.
자광각 역사는 참 특이하다. 절인지 역사인지 구분이 잘 안된다. 참 특이한 문화다.
케블카가 왔다.
일행을 태운 케블카는 두둥실 몸을 허공으로 띄운다. 고소 공포증이 있으신가? 야생화님,춘자님이 몸을 떨고 있다. 난 고소 공포를 즐기고 있는데...ㅋ 죄송(?)
놀랍다!! 그져 놀라울 뿐이다!! 어찌 이럴 수 가... 이런 경우를 두고 진풍경이라고 하는가?? 진경산수가 따로 없다. 하늘 향해 솟아 있는 저 장엄한 바위들... 형 형에 기암들... 그 틈을 비집고, 혹은 휘감고, 혹은 늘어진 나무와 덩굴들... 햇살에 반짝이는 바위에 단면들, 구름에 허리가 잘린 봉우리들... 수 천년, 아니 수 만년을 바람에 빗물에 몸이 내 맡겨져 알몸만을 민구 스럽게 드러내어 놓고 있는 암릉, 신선들이 노닐었을 법한 반석위 노송 한그루!
그러나, 이 신비의 절경을 신은 6분간만 허락 하였다. 창공에 무심히 흘러가는 흰 구름아! 네 어찌 타는 나그네의 심정을 알려하지 않느냐?? 그래 빨리, 많이 ,꼭꼭, 담아야한다. 강박의 욕구는 단발마의 비명처럼 목젖을 타고 넘어 가슴속 깊이 잦아든다.
신이시여!! 이 미령한 나그네는 여기 이 값진 산수병풍 한폭을 마음에 담아 가겠나이다. 그리고 저의 혼을 자이 놓고 가겠나이다.
옥병루에 닿았다. 6분간의 꿈같은 향연은 끝났다. 인산이 앞을 막는다. 인해가 길을 막는다... 또 시끄러운 속세다.
뒤를 돌아본다. 멀리 고산준봉들이 부복하고 손 흔들어준다.
여기로 모이십다!! 창룡의 목소리다. 왼쪽에 높이 솟은 봉우리가 천도봉 입니다. 높이는 1,810m이고요,하늘에 도시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옆이 황산에 주봉인 연화봉 입니다. 높이는 1,864m이고요 하늘을 향하여 연꽃 모양을 하고 있어 그리 부른 답니다. 지금은 자연휴식년이라 산객에 출입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창룡의 설명을 들으며 우린 발걸음을 옮긴다.
흙은 없었다. 바위를 깎고 다듬어 만든 계단만이 있을 뿐이다. 바위가 부족한곳은 시멘트를 발라 바위처럼 곰보를 내어서 감쪽같이 위장을 해놓았다. 각 초대소를 잇는 전선관도 시멘트로 나무인 듯 바위인 듯 감추었고, 우리 같으면 철 난간, 나무난간, 로프로 설치했을 가드레일도 자연 친화적으로 처리 해놓았다. 길가에 쓰레기통은 또 어떤가? 바위에 틈을 이용하여 예쁘게 아주 낮게 배려한 당국(?)에 슬기가 돋보인다. 인적 자원이 풍부한 탓인가? 쓰레기통 지키는 이와 청소하는 이가 관광객의 반은 되는가 보다. 살펴보면 중국인들에 군상은 참 재미있는 구석이 많다. 우리네는 산에 가면 산 복장, 물에 가면 물 복장인데... 이들에겐 그게 구분이 안 된다. 남녀 불문, 노소 불문이다.
기분이 참 좋다. 날씨도 도와주고 코믹한 중국인들도 많이 감상하고... 어릴적 계란 싸들고 소풍가는 기분이다. 내어 딛는 발걸음이 힘차고 가볍다. 헌데 황산 춥다고 뻥(?)쳐댄 총무님 덕분에 바지속에 타이즈를 껴입는 '우' 를 범했으니... 이런 문화인이 백주 대낮에 스트리킹을 할 수 도 없고, 정말 죽을 맛이다. 우!!우우~~정민님! 미오~~~^^*
칼바람 좀 불어다오, 제발 칼바람 좀 불어다오!!!!!!! 수 없이 주문을 욋 것만, 바람은 산들 거리기만 할 뿐!좀체 도와주질 않는다. ㅠ.ㅠ 뉘라서 속 타는 이 마음을 알랴!!
1,600고지 능선길이긴 한데 오르고 내려가길 반복 한다. 이제 이마에 땀도 나고 등줄기 에 육수도 흐른다, 중국인들에 살 냄새가 짜증스러워 질 무렵 5분간 휴식이다. 후미를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 '퀸'님이 괴로운 모습으로 오신다. 발에 티눈 때문에... 옳거니 퀸님의 배낭은 내 몫이다. 내년에 백두대간 종주 하려면 지금부터 체력을 단련 시켜야하니까... ㅎㅎ 한번 해보는 거야~~
세 갈레 길이다. 왼쪽은 능선길이고 오른쪽은 수직 단애코스다. 노폭도 한사람이 통행하기도 좁을 만큼에 난코스다. 밑에서 봐도 현기증이 난다. 내려오던 어느 여성 산객이 난간을 붙들고 꼼짝 못하고 서있다. 돌아서서 내려오면 공포가 덜 할 것인데... 그 산객은 아마 지금도 거기 서 있을지 모르겠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간뎅이가 부은 내가 이럴 진데...바짓깃을 적신이 누군지 내는 안다.ㅎㅎ
황산은 네가지 즐길 거리가 있다고 한다. '비래석'같은 '기암괴석',절벽에 뿌리를 박고 자라는 '소나무', 그리고 '운해'와'온천'이다. 이번산행은 날씨가 너무 좋은 탓에 운해를 볼 수 없었고, 일정상 온천욕을 즐길 수 없었다. 하지만, 네 가지 중 두 가지 즉, 아름다운 기송과 기암괴석만으로도 황산을 찾은 산객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했다.
'오어봉'에 오르니 '광명정'을 비롯하여 천해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천해산장이 보이고 축구공 형상의 커다란 안테나 같은 것도 보인다. 이곳이 우리의 정상이다. 천도봉과 휴식년인 연화봉을 빼놓고 우리가 갈 수 있는 코스 중에서 제일 높은 곳이다. 발아래 크고 작은 숱한 영봉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며 웅거 하고 있다. 중원에서 말 달리던 영웅들이 사자후를 토하는 모습으로...
짐을 벗어 놓고 가슴을 풀어 헤친다. 시원한 바람이 가슴으로 등줄기로 파고 돈다. 작은 산들 바람인데 이렇게 시원 할 수가...
두팔을 들어 외쳤다. 왔노라! 보았노라!고 준비해간 산악회 엠블럼을 펴들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통쾌하고 상쾌했다. 정상주를 마셨다. 이역만리 고국에서 비행기로 공수해온 몸부림차!! 크!! 이맛을... 두잔을 스트레이트로 마셔 버렸다. 기분이 up됐다. 띵호아다~~!!
긴장도 풀리고 밀려오는 성취감에 가슴이 벅차 올랐다. 모른다. 오르지 않고는... 오른자만이 맛 볼 수 있는 이 감동을... 환희고 희열이었다.!! 우리는 동지다!! 동지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이다.
야초님! 또 한 개의 목표를 달성했다는 성취감으로 "만고강산에 호랑나비"다. 참 선하고 찐한 웃음이다. 난 야초님의 가식 없이 웃는 저 모습이 참 좋다. 저 모습에 취해 예까지 왔는지도 모르겠지만...
황호님의 진지함, 산사랑님의 너털웃음, 호돌님의 인자함, 산이슬님의저돌적인모습, 나그네님의 순수함, 옥구슬님과 애마 자매님들의 우애, 퀸님의섬세함, 춘자님의 너그러움, 야생화님의 열정, 써니님의 카리스마, 허니님의 발랄함, 처음뵙는 최진만님 내외분, 너무 조용하셔서 있는듯 없는듯 하신 산사랑님 사모님, 우리의 영원한 총무 정민님의 초아의봉사, (모두투어에 권선영실장, 현지여행사에 엄창룡군) 이 모든 분들이 아마도 작은 인연은 아닐성 싶고, 지금 순간 행복해 하시는 모습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 기록으로 남기고자 하는 것이다. 함께 땀 흘리고 그 자리에 같이 웃던 동지!! 평생동지, 아니 황산동지!!
태고의 신비를 가슴에 쓸어 담으며, 아쉬움을 달래며, 돌아보고 또 돌아보며, 천해대피소(Tiun hai guest)를 돌아 백운호텔 입구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휴대한 행동식을 꺼내먹고 이제 '서해대협곡'을 공략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할 터였다.
갑시다.
창룡의 인도로 일행은 또 무거운 어깨를 추스린다. 지금 지나고 있는 지대는 비교적 평평한 지대다. 그래서 '천해지대'라고 하는가보다. 이 순간 구름이나 운해가 한 바퀴 감고 지나가면 죽여(?) 줄 텐데... ㅎㅎ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작은고개를 넘으니 저 멀리 '비래석'이 보인다.
손오공이 돌이 되어 떨어졌다는 그 전설의 비래석, 그 비래석을 12시 방향으로 바라보고 창룡이 일행을 멈춰 세운다. 보너스를 주겠단다. 여러분들이 말을 잘 들어 주어서... 창룡의 안내를 받아 일행은 비탈진 바위 길을 따라 5분쯤 갔을까? 야호!! 전방에 일대 장관이 펼쳐진다. 멀리 서해 대협곡에 위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창룡은 서해 협곡으로 진입하기 전에 맛 배기로 이 비밀스런 곳으로 안내한 것이었다. 허참!! 어이가 없을 정도로 서해 대협곡에 장엄함이 발아래 모아졌다. 오! 황산, 황산, 황산!
다시 본래의 코스로 이동하여 비래석을 향하여 내려갔다. 비래석은 높이 약 12m 무게 약 600백톤쯤 된다고 한다. 모습은 바위 봉우리에 창이 내려 꽃인 형상이다. 비래석을 만지고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나도 그 바위를 만지고 소원을 빌고 정기도 달라 하였다. 즉석에서 반을 빼앗(?)겼지만...
비래석을 돌아 30분쯤후 서해 대협곡에 들머리인 '배운정'에 당도 했다. 산에서 낙조를 보기 어려운데 이곳 배운정이 낙조를 감상하기 가장 좋은 곳 이란다. 순전히 돌을 깎아 만든 건물로 우리네 버스 정류장과 흡사하다. 여기서 대협곡을 갔다 오려면 3~4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적당히 가다 돌아와야 할 것 같다. 짐은 모두 벗어 창룡에게 맡기고 서둘러 협곡으로 향했다.
'형이상학'이다. 협곡은 초입부터 명성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이제 시간은 정해져 있다. 부지런히 가면 많이 볼 수 있는 것이고 천천히 가면 적게 보는 것이다. 이곳이 황산에 '하일라이트'다. 돌계단을 뛰다시피 걷는다. 바위 터널을 지나니 수직 벽에 제비집처럼 계단이 매달려 있다. 13만개의 돌계단으로 이루어졌다는 황산 돌계단의 백미다.
""일찍이 중국 개혁 개방의 총 설계사 등소평이 우연히 황산을 오르게 되었는데 향년 76세의 그는 황산에 경치를 보고 감탄한 나머지 이 아름다운 절경을 만인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등소평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황산을 거닐 수 있게 하라" 지시 하였답니다. 수많은 사상자와 오랜 세월이 걸린 끝에 21년만인 2001년 황산은 새 단장을 하고 그 아름다운 경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기암절벽에 붙어 당장이라도 내려앉을 것 같은 길들을 계단들을 대체 어떻게 만들었을까? 장비도 없었을 것이고 있었다 하여도 수천길 낭떠러지 절벽에서 어떻게 사용 한다 말인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위대한 중국의 인민이다.
좁고 가파른 돌길은 서해 대협곡이라는 황산 최고의 절경지다. 심산유곡으로 오랜 세월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자연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곳,
"지금부터 약 2~3억년 전에는 이곳이 망망대해였는데 약 1억년전에 연산운동으로써 용암이 침입 되면서 오늘의 화강암을 이루었고 또 몇 천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지각 운동과 침식 풍화작용을 거쳐 오늘의 황산이 되었다고 한다."
인간선경-인간의 천국이다. 그 꿈의 황산을 지금 꿈이 아닌 눈으로 체험하고 있다. 그 심산유곡에... 기봉에... 허리띠 쳐진 운해는 볼 수 없지만 펼쳐진 저 장관을 어떻게 주어 담으랴!! 한낱 태양빛에 사그러들.. 한점 먼지와 다름없고, 한 덩어리 유기체의 불과한 나의 혼백을 진실한 이 위대한 꿈의 황산에 던져 버리고 싶다.
무아지경도 잠시 '니이체'님! 하고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가다 듭는다. 황호님이시다. 그 특유에 부드러운 음성과 손짖, 황호님께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몸부림차 한잔 하자신다. '사양지심 손해지심'이다. 암요 해야죠! 난 기분이 나쁠땐 술을 마시지 않는다. 반대로 내 몸이 술을 찾을땐 억세게 기분이 좋다는 뜻이다. 야초님, 산사랑님, 산이슬님, 나그네님께 한잔씩 권하고 연거푸 두잔을 비워 버렸다.
가히 몽환적이다. 그랬다. 내가 여기 앉아 있는 곳이 '무릉도원'이다. 일찍이 '안견'이 요런(?) 기분으로 '무릉도원도'를 그렸을 것이 분명하다.
이 주체 할 수 없는 감동을 같이 나누는 이들이 있어 좋다. 인간은 그냥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이제 시야가 흐려진다. 아마 태양이 서해 대협곡 너머로 떨어지고 있는가 보다. 아쉽지만 대협곡에 잔상을 가슴에 저장하며 배운정을 향하여 돌아서야만 했다. 배운정서 2박 숙소인 '서해호텔'까지는 멀지 않은 거리다.
이 고봉에 호텔이라니?? 엷은 저녁안개가 산장지대를 감싸고 있다. 살살 부는 바람이 청량감을 더한다.
저녁식사는 현지식이다. 긴장도, 곤함도 풀어놓고, 마음껏 먹고 마시었다. 식당안은 돗데기 시장 같았지만 그래도 좋았다. 여성 대원들 께서도 좋아 뒤로 넘어 갈 것 같다.
천상에서의 만찬이다. '호연지기'를 키운다. 아쉬운 밤을 달래기 위하여 가무(?)가 필요 했다...한바탕의 광란이 쓰나미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황산의 밤은 그렇게 잠들어 가고 있는데 잠 못 이루는 나그네는 돌계단을 따라 황산의 밤을 오른다. 1m쯤 되 보이는 높이에서 광촉이 희끗 희끗 발밑을 비추어 준다.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가로등 불빛이 소나무 가지 사이를 통해 호텔 지붕위로 잔잔히 깔린다. 마치 저녁 연기나는 시골 초가 지붕위에 고즈넉함을 떠 오르게한다.
Joan baez에 "River in the pine"을 흥얼 거려본다. 솔밭사이로 강물이 흐르듯 아름다운 황산의 밤도 그렇게 잠들어 갔다.
(후기 늦게 올려 죄송 스럽습니다. 이런 저런 핑게가 많이 있었으니 혜량하여 주시옵길 바라옵니다. 다음대목은 시간내어 보완 하겠습니다.두서 없이 쓴 긴글 읽어주시어 감사합니다 ^^*)
2007.11.12 시우뜰에서 니이체가 썼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