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와 성적표 1
우리 집엔 아이들이 많았지만도 집에서 군것질을 할 수가 없었다.
먹고 싶은 눈깔사탕이나 꽈배기, 오꼬시, 과자종류를
아예 집에 사들여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지께서는 자라는 아이들에게 그 따위 과자 부스러기들은 충치를 생기게 하고 습관성을 갖게 되면 먹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는 법이라고 아예 금지를 시켰다. 삼시 세끼 밥 잘 먹는 것 처럼 커 나가는 아이들에게 좋은 습관이 어디 더 있겠냐고 하셨다. 누구에게나 금지된 일은 호기심에서도
저지르게 된다는데, 가끔 어쩌다가 잔돈이 생기면 밖에서 몰래, 식구들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주변을 살피면서 군것질을 했다.
가끔은 길거리에서 가위소리를 짤캉거리며 지나가는 리어카 엿장수한테 먼지와 거미줄이 범벅이 된 집 마루밑이나
마당 한귀퉁이에서 구르고 있던 소주병이나 음료수병 등, 조카들과 들고 나가서 엿을 바꿔 먹던 그 달콤한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내게는 쏠쏠한 기쁨이었다.
엿을 가장 인상 깊게 먹은 것은 간호학교 시험칠 때, 싫다는 데도 엄마가 굳이“철석 붙으려면 먹어야 한다“며
입에 넣어 주시던 기억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너무나도 어린 아이들의 심정을 헤아려 주지 않으셨던
게 아닌가 싶은 아쉬운 생각이 든다. 물론 아버지의 생각은 백번 맞는 이론이였지만도 ...그래도 과일은 많이 먹고 자랐다. 여름이면 찬물에 둥둥 띄워놓은 귀한 참외나 수박을 얼마나
맛있게 먹었었는지 모른다. 엄마랑 시장에 가서 참외를 고를 때는 엄마는 늘 냄새를 맡으셨다.
단내가 나야 맛이 있다고 하셨고 수박은 둘째 세째손가락으로 꼭 두들겨 보셨다. 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우리 엄마가 골라 사신 참외나 수박은 늘 성공적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될 때 쯤이면 우리 모두는 아버지의 뒤를 쫄쫄따라 문방구점엘 가서 한학기 동안 필요한 물품들을
골라서 한꺼번에 구입해 주셨다. 다른 친구들은 돈을 타서 학용품들을 구입하고 나머지 쪼끔
남은 돈으로 눈깔사탕이나 과자를 사서 먹었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중학생이 된 후 부터는 상황이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언니들 역시 불만이 많았다.
성적표가 나오는 날은 아버지께서는 여태껏 기다리셨다는 듯이 한사람 한사람의 성적표를 검토하셨다. 성적이 좋지 않은 자식들에게는 나무라시며 다음 학기엔
꼭 학업성적을 올리겠다는 다짐을 받으시기도 했다. 성적표가 나오는 날은 모두들 긴장된 상태였다. 무뚝뚝한 큰오빠는 그다지 관심이 없으셔서 오빠의 몫까지 맡아 하신 셈이다.
그날 자기가 받은 성적표가 좋지 않은 언니나 조카는 친구집을 배회하였고 귀가시간은 자동적으로 늦어졌기에 우린 이미 우리들의 성적표를 대강은 짐작할 수가 있었다. 어떤 언니는
어린 조카들 앞에서 난처하셨다며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다. 언니의 눈에는 정말 겁이 잔뜩 들어 있었으며 얼굴에는
시커먼 어둠이 깔려 있었다. 아버지는 언니들이랑 나를 사사로이 비교하기도 하셨다. 그래서인지 언니들의 영혼은 조금씩 상처를 입은 듯했고 가끔씩 나를 경계하기도 했었다.
아버지의 교육방법엔 누구도 참견할 수가 없었으니 아버지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면 무조건,
좋은 성적표를 제시했어야했다. 그 당시에 통지표에 적힌 잉크펜 글씨와 붓두껍에 빨간
인주를 묻혀 찍어 놓은 행동 발달 상황에 대한 평가의 위엄이란 성적 보다 더 중요한 부분이었다.
‚글짓기가 뛰어나다.’’학급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솔선수범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 ‚학우들에게 신경을 쓰며 학급의 분위기를 위하여 애쓰는 좋은
모습을 보여 준다. 책임감이 강하다.’ ‚학습태도가 예쁘고 봉사정신이
월등해 친구들의 불편을 돕는 데 앞장슨다’ ’미화부장으로 임무를 철저히 처리한다’는 등등.
우리 엄마는 나의 통지표와 상장들은 애지중지 모아서 오랫동안 장농에 간직하셨다가 서울로 이사하시면서 아깝게도
모두 버리셨다고 하셨다. 난 지금까지도 우리 두 아들들의 성적표는 물론 어린아이 때
부터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들도 아주 얌전히, 마치 나의 애장품 마냥 보관하고 있다. 왠지 그 속에서 아직도 내 자식들이 숨을 쉬며 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어쩜
떠나버린 자식들을 그나마 그런 것으로 내 마음을 묶어 두고 싶어서인지도 모른다. 우리집 지하실,
다락방은 깔끔하기로 소문난 독일인들 처럼 완벽하게 정돈이 잘돼있고 없는 것이 없는 만물상이다. 옛 물건들이 그득하다. 독일인들은 대대로 물려쓰는 습관, 옛것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은 물자도 절약하고 가족 간의 사랑과 추억까지 덧쌓아가는 묘책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직장에 다니시면서 쓰셨던 가죽 가방을 그 자식이 물려 받아 사용하는 예도 있다. 지금도 우리집에는 두 아이들이 자라며 가지고 놀았던 장난감이 프라스틱상자에 고스란히 정리돼있다. 상자 옆구리엔 상자안에 어떤 내용물이 들어 있나 적혀져있다.
그래서인지 아들들이 집에 들리는 날엔 자기 자식들 연령에 맞는 장난감들을 추려 가기도 한다. 그러니까 지 아버지의 장난감을 자식들이 가지고 놀게 되는 것이다. 두 손자들의 나이가 거의
똑 같아서 욕심 부리지 말고 반은 남기고, 꼭 반만 챙겨 가라고 일르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신발 보자기 비슷한 헝겊으로 만들어진 주머니를 발견했다.
파란색에 하이얀 선이 그어진 체크 무늬의 주머니였고 거기엔 빨강실로 UC 라고 수
놓아져 있었다. UC 는 UWE CHA 라는 약자이다.
내 기억을 더듬으면 큰아들이 유치원에서 성탄절 때에 선물로 받은 걸로 기억한다.
그 주머니안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초콜릿으로 만든 산타할아버지와 과자,
사탕, 색연필 등이 들어 있었다. 작은아들은
MC 는 MARTIN CHA 라는 약자다. 내 남편은 그 주머니를 빨아서 다림질해서 장난감 자동차 몇 개 추려 넣어 베를린으로
부쳐 주었다.
내가 자랄 때에는 자전거를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아주 드물었다.
남자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일주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아버지께 여쭈었다. 우리집에도 자전거 한대를 구입하자고. 자전거 한 대만 있으면 우리 언니들이랑 번갈아 가면서
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자전거가 요즘 승용차 구입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 당시만 해도 자전거는 사치품이였다. 아버지는 여자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면 ‚처녀막’이 파열될 위험성이 있다며 완강히 반대하셨다. 난 ‚처녀막’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엄마에게
물어 보았지만 내가 완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해 주시지 않았고 그냥 웃으시면서‚ 그런 것이 여자에게는
있는거다’ 라고 하셨다. 어느날 친구집에 놀러가서 친구와 함께 학교
운동장으로 갔다. 쉽게만 생각하고 자전거를 빌려 타고 운동장을 순회하다가 그만 균형을 잡지 못하고 나자빠져서
눈썹주위에 상처를 입어 다섯 바늘이나 꿰매었고 잠시 의식을 잃어서 병원에까지 실려 갔었다. 지금도 내 오른편
눈썹 주위에는 그때 찢긴 흉터가 남아 있다. 내 친구는 우리 엄마, 아버지께 혼이 났었고 울고불고 야단을 피웠다. 난 그때 결국 배우지 못해서 자전거를 영영 탈
수 없었는데 성인이 되어 우리 아이들의 성화에 못이겨 시도를 했지만 결국 배우지 못했다. 수없이 나자빠져서
이러다가는 꽁지뼈를 부러뜨리겠다고 손 발 다 들고 남편과 아이들이 뜯어말려서 그만두었다. 나는 운동신경이
잘 발달되지 못해 뭘 배우는데 상당히 더딘 편이다. 우리 가족이 모두 함께 자전거를 타고 야외로 소풍가고
싶은 아이들의 꿈을 결국 성사시키지 못했다. 나중에는 우리 집 세 남정네들은 자전거를 타고 떠나고 난 명당자리에
자리를 잡고 준비한 식사를 차려놓고 가족들이 돌아 오기를 눈이 빠지게 기달리며 죄없는 시계만 들여다 봤었다. 그런 날에는 잔득 싣고 간 음료수와 음식들은 동이 났었다. 얼마나 맛있게, 신나게 먹었었는지 지금도 내 눈에 삼삼히 보인다. 이곳에서 자라는 우리 아이들은 일찍이 자전거를
배우지 못했던 한국엄마의 유년시절을 이해하지 못했다. 독일에서는 초등학교 시절에 자동차 운전 면허 시험처럼
자전거 실기시험을 치룬다. 그날은 경찰이 나와서 교통질서나 법규에 대해서 주의를 준다. 독일에서 자란 아이들 중에는 신체적인 장애가 없는 한 나처럼 자전거를 타지 못하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첫댓글 역시 교육자 아버지를 둔 학창시절엔 긴장이겠지만
오늘의 나를 있게 한 정신적 지주임엔
분명합니다.
좋은 부모 아래...
좋은 자녀입니다.
안상인 시인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바른 인성이 자식들의 인격을 형성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요.
주님의 축복 아래 평강한 시간 되시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그때는 삶이 참 가난해서 자전거 하나 살 형편이 안되었습니다
말씀대로 자동차 하나 구입하는 비중이였지요
아버지가 선생님이시니 자식들어 엄하게 키우셨나 봅니다
그 때는 부모님들이 죽을 힘을 다해 자식들 학교보내기 위해 헌신을 하시기에
성적표에 관심이 많았지요
저는 십릿길을 걸어 다녔지만 엄두도 내지 못한 자전거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후에
자전거를 익혔지요
리얼리티한 아버지와 가족들 그리고 성적표 잘 감상했습니다
토파즈님, 반갑습니다.
그래도 늦게나마 자전거를 익히셨네요.
저는 실패였지요.
토파즈님도 학창시절의 어려움이 많으셨군요.
십리길을 걸어야 했엇던 학교길..겨울에 얼마나 힘드셨을까 짐작이 갑니다.
까마득한 지난 날이었지만 그리움으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도 큰 동그라미 치는 날이 되시기를 빕니다.
샬롬.
아버님의 교육법~**^
그때는 넘 엄했던것 같아요.
에고..그림의 떡 자전거..
저도 못탄답니다..ㅜ
러브리님, 아, 그러세요?
저 혼자가 아니네요. ㅎㅎ
우리 아버지가 유별나게 엄하셨어요.
동전의 양면 처럼 장 단점이 있는것 같아요.
요즘은 교육방법이 많이 달라졌드라고요.
예를 들어 우리 큰아들집에는 손자녀석이 엄마 아빠를 부르는 호칭이 엄마 아버지라고 할 때도 있지만
이름을 부르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영 거슬리더니 지금은 또 괜찮게 들리더군요.
엄마 아빠이기도 하지만 어쩜 허물없는 친구 처럼 지내자는 의미가 있다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