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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철도문학상 산문부문 당선작] 김경락 염귀순
■ 최우수상
선로의 끝에 이르다 / 김경락
기차가 지나간 자리는 폭풍이 휩쓸고 간 부둣가처럼 고요했다. 철길 주변엔 스산한 바람이 불고 선로 가에 자라난 꽃은 선착장에 묶인 배처럼 흔들렸다.
나는 철길에 엎드려 선로에 귀를 갖다 댔다. 우웅, 뭔가가 울리는 소리. 선로 저편 먼 곳에서 어떤 울림이 귓가에 전해졌다. 열차가 다가오는 걸까. 지금쯤이면 다음 열차가 들어 올 시간이다. 다시 귀를 갖다 댄다. 선로 저편의 미세한 울림과 진동. 육중한 무언 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거긴 위험하다니깐, 빨리 내려와. ”
숙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 애의 말대로 내 바지와 셔츠는 선로에 깔린 자갈에 닿아 검게 변해 있었다. 숙내는 철둑길에서 놀자고 한 걸 후회하는 눈치다. 선로에 깔린 자갈의 검붉은 색이 피처럼 느껴져 감히 선로 위로 올라오지 못한 것이다. 나는 내심 숙내를 놀려 주고 싶었다.
“아이 참. 빨리 내려 오래두.”
칭얼대는 소리를 무시하며 나는 철길 위에서 굳게 버텼다.
“진짜 안 내려올 거야? 거기 있다간 기차에 치인단 말야.”
“야, 니가 오자고 했잖아. 올라와 봐. 겁먹지 말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 역시 잔뜩 겁을 먹고 있었다. 웅웅대는 레일의 진동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보이지 않는 열차의 진동은 거대한 공룡이 되어 나를 덮쳐왔다.
조금 전만 해도 철길 주변은 한적했다. 잔가지가 무성한 은행나무와 갈라진 껍질 사이로 송진이 흘러나온 늙은 소나무만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은행 열매의 악취가 언젠가 이곳에서 일어난 열차사고를 떠올리게 했다. 뭉개진 은행 열매 냄새는 시취처럼 다가왔다.
“빨리 내려와. 그러다 죽을지도 몰라.”
울먹이는 숙내의 뒤로 구멍 뚫린 철조망이 보였다. 조금 전 우리가 들어온 구멍이다. 멀리 섬유 공단의 잿빛 건물과 열병합발전소가 눈에 들어온다. 철길 주변은 사람도 인가도 없이 조용하기만 하다. 게다가 하늘은 곧 비가 내릴 것 같은 잿빛.
“안 내려올 거야? 선생님께 일러 버릴 거야.”
숙내는 울상이다. 이쪽 끝에서 반대편 끝까지 끝없이 이어진 선로에는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않는다. 웅웅대는 소리는 이제 두 발을 딛고 선 선로를 미세하게 흔들어 댄다. 지평선 저편으로 하나의 점이 나를 향해 달려온다.
기차다. 조금만 더 지체하다간 오줌을 지릴 게 뻔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빠아앙-
그때였다. 선로 저편에서 경적이 울렸다. 소리는 바람을 타고 귓전을 때렸다. 점 같은 물체가 무소처럼 나를 향해 질주한다. 열차다. 서울로 향하는 무궁화호 열차. 열차는 나를 덮칠 만큼 가까이 다가왔다. 숙내는 울상이 되어 철조망 구멍으로 달려나간다. 나는 선로에서 뛰어내려 풀숲에 숨는다. 기차는 굉음을 내며 내가 서 있던 레일 위를 지나갔다.
잠깐의 고요
슬며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핀다. 철조망 뒤에서 이쪽을 보는 숙내의 겁먹은 얼굴이 보인다. 나는 숙내를 향해 손을 흔든다. 숙내는 그제야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플랫폼으로 무궁화호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안내방송이 들린다. 열차는 전광판에 찍힌 시간에 정확히 맞춰 도착했다. 커다란 쇳덩이는 조금씩 속도를 줄여 플랫폼에 정확히 몸체를 가져다 댔다. 곧이어 객차의 문이 열린다.
나는 영등포역 한구석에 세워진 기념비를 보고 있었다. 철길에 뛰어든 어린아이를 구하려다 두 다리가 잘려나갔다는 철도원의 행적을 기리는 기념비다.
“원 세상에, 자기 아이를 살려줬는데 그냥 사라져 버린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비문을 읽던 중년의 여자가 혀를 차며 말했다. 철도원이 두 다리를 잃으면서까지 구한 아이의 부모는 사고가 난 순간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고 한다. 아이의 부모는 지금쯤 그 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아이를 구한 철도원은..
문이 완전히 열리자 승객들은 하나둘 열차에 올랐다. 금요일 오후의 경부선 열차는 사람들로 붐빈다. 자리에 앉자마자 와이셔츠 위쪽 단추를 푼다. 갑갑했던 목이 편해졌다. 기차는 잠시 후 미끄러지듯 플랫폼을 벗어났다. 차창 밖 풍경을 바라보다 의자에 비스듬히 눕는다. 객실은 스낵 카트 오가는 소리와 대화 소리로 가득하다. 열차는 서서히 시내를 벗어난다. 창밖으로 땅거미가 내려앉아 대지를 어둠으로 물들인다. 그 어둠 사이로 나는 의식의 촉수를 박는다. 눈꺼풀이 무겁다. 이대로 잠들 것만 같다. 창문에 기댄 머리에 덜컹대는 기차의 진동이 느껴진다.
-안녕하세요. 메일 잘 받았습니다. 제가 숙내입니다만 그쪽 분 이름만으로는 정확하게 얼굴이 떠오르질 않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어렸을 때 염색공단과 열병합발전소 근처에 살았지요. 철둑길에서 놀았던 기억도 납니다. 그 동네엔 속셈학원이 하나 있었지요. 매일 그곳에서 하루를 보냈던 일이 기억납니다.
-답장을 보내고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성호, 김성호. 이름을 반복하다 보니 떠오르는 얼굴이 있습니다. 말씀하신 철둑길의 풍경도 아련히 떠오릅니다. 잘 지내셨나요.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막연하기만 합니다.
-갑작스레 만나고 싶다는 말에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망설였습니다. 추억 사이를 헤집어 기억을 현실로 가져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슴이 설레는 건 사실입니다. 주말까지 기억을 마저 완성해 볼게요. 모쪼록 조심해서 내려오세요.
생각해보면 이 십여 년 전의 일이니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 애의 말대로 막상 만난다고 해도 딱히 대화거리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곳을 움켜쥐는 이 설렘은 무엇일까.
어둠이 깔린 창밖의 풍경은 자꾸만 나를 스쳐 지나간다. 눈을 감는다. 창밖 풍경처럼 옛 기억은 내게 머물지 않고 지나친다. 나는 기억의 끈을 부여잡는다. 시간은 이십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등학교 삼 학년이 되던 해 우리가족은 대구 변두리에 자리 잡은 새동네로 이사 갔다. 새로 조성된 마을이라 새동네란 이름이 붙었지만, 쓰레기 매립지 위에 새로 생긴 마을이어서 짓궂은 아이들은 그곳을 쓰레기 동네라고 부르곤 했다.
엄마는 경제력이 부족한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속셈학원을 운영했다. 숙내는 엄마가 운영하는 속셈학원의 몇 되지 않는 아이 중 하나였다. 숙내의 엄마는 숙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집을 나갔다. 숙내는 엄마의 학원에서 늦게까지 놀다가 집에 가는 날이 많았다. 숙내라는 특이한 이름처럼 그 애는 뭔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의 애들답지 않은 외모가 그랬다. 초등학교 삼 학년 아이라고 하기엔 보통 아이보다 훨씬 작은 머리에 이목구비가 분명한 얼굴. 갈색에 가까운 머리카락과 짙은 쌍꺼풀과 속눈썹. 다른 아이들과 확연히 다른 한눈에도 서구적인 외모를 가진 아이였다.
“아이고, 애 생긴 것 좀 봐. 애가 저 정도니 애 엄마가 바람나 도망간 것도 무리는 아니겠네.”
숙내의 평범하지 않은 외모를 두고 동네 여자들은 수군거리곤 했다. 자신의 무료한 삶을 타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위안 삼은 것이다. 그녀들은 몰려다니며 소문을 만들어 냈다.
“애 엄마가 백인 혼혈아였다고 하잖아요.”
“그라믄 애 할매가 양공주였나 부네.”
“아는 참말로 곱상하다마는 머슴아 여럿 잡아묵것네.”
그녀들의 수군거림을 이해할 순 없었지만 나 역시 숙내가 보통 아이들과 다르다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나와 다른 외모가 그랬고 어딘가 그늘진 표정과 행동이 그랬다.
여름의 초입에 들어선 어느 날이었다. 또래 아이보다 생일이 빠른 나는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고 그런 이유로 사소한 잘못에도 선생님의 눈에 띄어 벌을 받기 일쑤였다. 덕분에 늦게까지 남아 교실을 지키는 벌을 받는 날이 많았다. 그날은 새로 페인트를 칠한 담장에 흙 묻은 발을 올렸다는 이유로 교실에 남아야 했다. 선생님이 퇴근하는 오후 네 시가 넘어서야 나는 집에 갈 수 있었다.
늦은 오후의 운동장은 햇살이 눈부시게 빛났다. 매일 날이 조금씩 더워지고 있었다. 반팔 티셔츠를 입은 목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교문을 나서자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마을이 보였다. 교문 앞은 한산했고 문을 닫기 시작한 문구점엔 물건 정리가 한창이었다. 문구점 앞에 놓인 게임기에서 비행기가 불을 번쩍이며 미사일을 쏘고 있었다. 좌판에는 반쯤 정리하다 만 불량식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때 내 눈에 문구점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 뽑기에 열중하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숙내였다.
“야! 너 뭐하냐?”
나는 멀찍이 떨어져 숙내를 불렀다. 숙내는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하얀 타이즈에 시커멓게 때가 묻어 있었다. 여태 혼자 흙장난을 한 모양이었다.
“너, 왜 여기 있냐?”
“….”
다가가 말을 걸었지만 숙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손을 뒤로 감춘 채 커다란 눈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선생님께 이를 거야.”
그 말에 숙내의 눈망울이 커졌다. 문방구에서 뽑기를 한 것이 알려지면 숙내는 오늘도 아버지에게 매를 맞을 것이 뻔하다.
“에이, 농담이야. 난 고자질 따윈 안 해.”
겁먹은 표정이 안쓰러워 금세 말을 바꿨다. 그때 문방구 주인아주머니가 나왔다. 숙내는 급히 마을 쪽으로 뛰었다.
“얘, 돈은 내고 가야지!”
아주머니가 소리쳤다. 나는 숙내를 부르려다가 말고 주머니에서 100원짜리 동전을 내밀었다. 그날 하루 내가 쓸 수 있는 용돈의 전부였다. 아주머니는 말없이 50원을 거슬러 주었다. 나는 쫓아가려다 말고 마을 사이로 멀어지는 그 애의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숙내에겐 그것이 더 편할 것만 같았다. 그 앤 언제나 혼자였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이들은 그 애와 어울리려 하지 않았다. 더구나 그 애를 향한 어른들의 수군거림. 그 수군거림은 숙내 엄마가 바람이 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숙내의 행동이 평범한 계집애답지 않다고 했다. 평범한 계집애가 어떤 건지 몰랐지만 나는 그런 어른들의 수군거림이 싫었다.
‘망할 계집애. 생긴 건 똑 지 애미를 닮아가지고.’
그날 밤, 숙내의 집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 크지 않은 동네에서 늦은 밤 고함이라도 들리면 동네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나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창문 너머 숙내의 집 쪽을 쳐다봤다.
“문 닫아! 그런 건 구경하는 게 아니야.”
엄마가 말했다.
“그래도. 숙내가 걱정되잖아.”
“숙내 아버지 술 드시면 저러는 거 알잖아. 곧 조용해질 거야.”
엄마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나는 숙내가 불쌍했지만 달리 손쓸 방법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름방학이 됐다. 그해 여름, 아이들이 일찍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간 날에도 숙내는 오후 늦게까지 엄마의 학원에 남아 있었다. 숙내 아버지가 야간근무를 하는 날이면 숙내는 온종일 혼자였다. 학구열이 강했던 엄마에게 붙잡힌 나는 매일 늦게까지 학원 교실에 남아 문제집을 풀어야 했다. 학원에서 시간을 보낸 아이는 그 애와 나밖에 없었다. 그리 크지 않은 공간에는 숙내와 나만이 남겨질 때가 많았다. 목이 부러져 덜덜대는 낡은 선풍기 아래 그 애와 나는 묵묵히 학습지를 풀었다. 매년 그랬듯 엄마는 항상 일에 매달렸다. 방학이라곤 하지만 피서를 가거나 놀이동산에 가는 일 따윈 없었다.
학습지를 다 풀고 나면 나는 학원에 딸린 작은 방에 들어가 만화책을 읽었다. 방에 혼자 있을 때면 집에서 멀지 않은 철둑길에서 열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리서 경적이 울리면 기차는 머잖아 철길을 가로질러 갔다. 그럴 때면 창문은 지진이 난 듯 미세하게 떨렸다. 그건 고요함 가운데 홀로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작은 발견이었다. 기차가 지나간 자리에는 머잖아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나는 깊은 정적 가운데 오랫동안 앉아 있다 그 정적이 싫어질 때쯤 밖으로 나가곤 했다.
새동네 뒤편엔 염색공단과 열병합발전소가 있다. 공장지대와 마을 사이에 기찻길이 놓여 둘 사이를 완벽히 분리했다. 잿빛 연기가 피어나는 발전소의 복잡한 철골 구조가 공단을 더욱 위압적인 분위기로 바꿔놓았다. 공단은 마치 거대한 음모를 감춘 것처럼 느껴졌다.
교대근무가 잦은 공단 노동자들은 오후에 출근해 밤늦게 퇴근하거나 새벽에 일하러 나갔다. 철길 근처에서 새벽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는 공단 노동자를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철길 건널목까지 오백 미터를 돌아야 했기에 대부분 철길을 그냥 건너오곤 했다. 기차사고가 잦아지면서 사람이 함부로 다니지 못하게 철조망이 쳐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철조망은 구멍이 난 채 방치되었다.
엄마의 감시가 뜸한 날이면 나는 종종 혼자 철길 근처를 배회했다. 그곳은 나의 아지트였다. 구멍 뚫린 철조망 사이로 철둑길에 들어서면 수풀에 가려진 작은 공터가 있었다. 공터에는 못이 빠져 삐걱대는 낡은 나무의자가 정물처럼 놓여있었다. 나는 나무의자에 앉아 탁 트인 철길 풍경과 그 앞에 웅장하게 들어선 열병합발전소를 올려다보곤 했다. 발전소 건물에서 피어오른 연기가 파란하늘 위로 뻗어 파란 물감처럼 섞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그 모습에 넋이 나가 있노라면 멀리서 기차 소리가 들리곤 했다.
빠아아아앙- 세상의 모든 고요를 물리치는 경적. 이내 요동치는 땅의 흔들림. 곧이어 괴성과 함께 기차가 달려왔다. 하얀 바탕에 파랗고 빨간 장식이 들어간 무궁화 열차. 부산에서 대구를 거쳐 서울로 떠나는 기차를 볼 때면 나도 어디론가 달려가고 싶었다. 기차가 다다른 곳엔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럴 때면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나는 삐걱대는 의자에 앉아 그 허전함을 혼자만의 상념으로 채워나가곤 했다.
‘이번 정차 역은 조치원, 조치원역입니다.’
잠결에 안내 방송이 들렸다. 조치원이다. 부산으로 향하는 경부선 열차는 조치원을 지나 남쪽으로 끝없이 달릴 것이다. 나는 대구에서 내려야 한다. 머나먼 나의 여정도 이제 중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스무 살 무렵 나는 어린 시절의 꿈대로 기차를 타고 고향을 떠나 서울 변두리에 둥지를 틀었다. 서울에서의 삶은 내가 꿈꾸던 것처럼 내 삶에 날개를 달아주지는 않았다. 서울에선 고향과는 다른 사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하루하루 허덕이며 삶을 꾸려갔다.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 주니까요.’
삶에 허덕일 때면 기형도의 시 구절이 귓가에 어른거렸다. 그렇게 나는 서울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나를 버티게 하는 것은 다소간의 절망과 약간의 희망이었다. 낯선 도시는 이방인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방인에겐 이 낯선 도시가 결코 고향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나는 더욱 버티어 나갔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렸을 때 서울에서 켜켜이 쌓아가던 삶의 잔상들이 고향에 관한 기억을 밀어내고 있었음을 알았다. 언젠가부터 고향에 내려가는 것이 낯설었다. 새동네라 불리던 그곳이 점점 낡아 더 이상 새동네라 불릴 수 없는 것처럼, 고향도 어느새 묵은 기억을 쟁여 놓은 창고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창고 깊은 곳에서 숨겨둔 옛 기억이 나를 찾아왔다.
숙내를 다시 떠올린 건 일주일 전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계정 연장과 스트리밍 트래픽 한도를 높여달라는 서비스 요청 메일을 검토하다 우연히 고객의 쇼핑몰에 접속한 것이다. 쇼핑몰에 들어섰을 때 나는 한 익숙한 얼굴의 피팅모델과 마주하게 됐다. 그것은 흡사 기억 한쪽 벽을 무너뜨리며 누군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당장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영세한 온라인 쇼핑몰의 경우 판매자가 직접 피팅모델을 하는 경우는 많다는 걸 떠올리고 운영자의 정보를 조회했다. 자판을 치는 손끝이 떨렸다. 잠시 후 나는 한 이름과 마주하게 할 수 있었다.
김숙내.
수초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다시 한 번 모델의 얼굴을 확인했다. 자그마한 얼굴에 철사처럼 가는 팔다리. 기억의 혼란이 생긴 것이 아니라면 그녀는 내가 기억하는 숙내가 확실했다. 너무나 무더웠던 1993년 그해 여름의 숙내. 내가 알던 그 숙내였다.
내 기억은 어느새 그 여름의 철둑길로 향했다.
철길 근처 숲에서 자그마한 물체를 본 건 혼자 철길에서 놀던 어느 날이었다. 철조망 옆 수풀에서 뭔가가 바스락대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다가갔다. 수풀 사이에는 꼬질꼬질 떼가 묻은 분홍색 운동화에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여자아이가 앉아있었다. 다름 아닌 숙내였다.
“너 거기서 뭐 하니.”
나를 본 숙내는 황급히 몸을 추스르며 일어났다. 그 애는 쪼그리고 앉아 오줌을 누고 있었던 것이다. 순간 미안한 마음과 함께 얼굴이 화끈거렸다.
숙내는 까만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커다란 눈 속에 까맣고 투명한 눈동자가 보였다. 그 눈 속에 있는 건 한 남자아이였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가버릴까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거기서 혼자 놀고 있었던 거야?”
내 말에 숙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까지 숙내와 오래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다. 간혹 그 애와 마주쳐도 데면데면하다 그냥 지나칠 뿐이었다.
“너 철길 위에 올라가 본 적 있니?”
순간 내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아니, 무서워.”
“왜 무서워? 하나도 안 무서운데. 같이 올라가 볼까?”
숙내는 겁먹은 표정으로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럼 거기서 혼자 놀아. 난 갈 테니.”
퉁명스레 말며 혼자 철길에 올라갔다. 그 애의 눈을 보고 있자니 왜인지 진땀이 났다.
철길 주변은 한산했다.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근처에 불량배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있었다. 철길에서 노는 걸 알면 엄마에게 꾸중을 들을 것이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자주 철둑길을 배회하곤 했다. 어쩌면 늘 들어오던 ‘그런 건 하지 마!’가 나를 그곳으로 향하게 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철길에 올라가 재미난 놀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동전이나 금속 따위를 선로에 올려놓는 놀이었다. 기차 바퀴에 눌린 물건들은 재미난 형상으로 변하곤 했다. 철긴 근처에서 기차에 눌린 물체를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나는 뚜껑이 굳어 열리지 않는 포스터칼라 통과 참치 통조림을 레일에 올려놓고 열차를 기다렸다. 머잖아 열차의 경적이 들렸다. 서서히 진동이 느껴졌다. 거대한 쇳덩이의 진동은 수 킬로 떨어진 곳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진동은 점점 커졌다. 잠시 후 고막을 찢을 듯 경적을 울리며 열차가 달려왔다. 나는 선로 옆으로 몸을 숨기고 귀를 막았다. 열차가 들어서자 선로에 놓아둔 물건이 튀어 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들은 산산이 흩어져 수풀과 나무 사이에 떨어졌다.
기차가 유유히 시야 저편으로 사라졌을 때 숙내가 수풀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나를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야, 거기 있지 말고 이리 와!”
나는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숙내를 불렀다. 숙내는 도리질했다. 몇 번이나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숙내는 한참 주춤하더니 내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어왔다. 잔뜩 겁먹은 표정이었다.
“야, 넌 철길을 그렇게 겁내면서 뭐하러 여기 온 거야?”
나는 핀잔하듯 물었다.
“아빠 기다려.”
숙내는 말을 웅얼거리다 입 밖으로 꺼냈다.
“아빠?”
“응, 우리 아빠. 보통 이 길로 오시거든.”
“정확히 언제 오는지는 몰라?”
“몰라….”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고 숙내는 이내 철길 저편으로 사라졌다.
그해 여름 내내 철둑길에서 숙내와 마주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애는 거의 매일 수풀 사이에 앉아 맞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찻길 맡은 편은 굴뚝 위로 연기를 뿜어내는 섬유 공장이 커다란 나뭇가지에 반쯤 가려진 채 늘어 서 있었다.
맑은 하늘이 펼쳐진 그 여름의 어느 날 숙내와 나는 철둑길 근처 풀밭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뭇잎이 무성한 늙은 은행나무 사이로 태양이 빛을 쏟아냈다. 그 빛 사이로 귀를 찌르는 듯 시끄러운 매미 소리가 들렸다. 매미는 밤낮없이 울어댔다.
“야, 넌 소원이 뭐야?”
나는 뜬금없이 물었다. 그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뭐라고? 매미 소리 때문에 못 들었어.”
숙내가 되물었다.
“소원 말이야. 니 소원.”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말하자 숙내는 그제야 내 귀 가까이 입을 가져다 대고 말했다.
“행복해지는 거.”
“행복해지는 거? 그게 어떤 건데?”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는 거.”
“쳇, 그딴 게 소원이야?”
나는 핀잔조로 말했다. 잠시 후 숙내가 뜸을 들이며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나보고 이상한 애래. 그래서 가까이하지 말래. 아빠가 만날 술 먹고 다니는 게 나까지 이상해 보이는 걸까? 모르겠어. 근데 오빤 소원이 뭐야?”
“난 엄마가 운영하는 속셈학원 말고 다른 학원에 다니는 거야. 우리 엄만 만날 돈 없단 소리만 해. 항상 일 때문에 바쁘다면서 말야. 난 태권도 도장에 다니고 싶어. 태권도를 배워서 날 괴롭히는 애들을 때려줄 거야.”
숙내는 잠시 후 ‘응’하고 대답할 뿐이었다. 우리는 다시 심심해졌다. 심심하고 또 심심한 여름방학이었다.
“그것 말고 다른 소원은 없어?”
내가 다시 물었다. 숙내는 한참 생각에 빠지더니 말했다.
“아빠가 술 조금만 마시는 거.”
“엄마가 돌아오는 건?”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모르겠어.”
“왜?”
“그냥.”
“넌 만날 그냥 이래. 바보같이.”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숙내의 표정이 시무룩해 보였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을 때 멀리서 한 남자가 철길을 건너오는 게 보였다. 숙내의 아버지였다. 짙은 눈썹과 시커먼 얼굴에 표정은 굳어 있었다. 주정꾼으로 유명했지만 술을 먹지 않을 때는 성실한 사람이라고 했다.
“아빠아!”
숙내가 철길로 달려갔다. 남자는 매달리는 숙내를 보더니 손을 잡아 주었다.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숙내는 남자의 손을 잡고 철길 저쪽 편으로 사라졌다.
“계집애. 손이라도 흔들어 주지.”
왜인지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열차는 대전역을 벗어나 좌우로 논밭이 펼쳐진 레일 위를 질주한다. 철길 주변에 심어진 전봇대와 나무가 시선 뒤로 흐트러진다. 휴대폰 진동이 울린다. 창밖을 응시하던 나는 휴대폰을 확인한다. 엄마에게서 온 전화다.
“내려오고 있니?”
“네, 대전 지났어요. 영동쯤 되겠네요.”
“추석에도 일 때문에 못 내려온다더니 어떻게 이번엔 시간이 되나 보구나.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
엄마는 특별한 이유 없이 내려오는 게 의아한 눈치다.
“그런 거 없어요. 지난번에 못 내려가서 이번에 가는 거죠.”
“그래, 너 좋아하는 꽃게탕 해 놨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저기, 숙내라고 기억나요?”
“숙내?”
“네, 예전에 새동네에서 학원하실 때 숙내라고 있었잖아요. 엄마가 혼혈인이었던 이국적으로 생긴 애.”
“글쎄다. 그런 아이가 있었나? 학원을 그만둔 지 십오 년이 넘다 보니 그 많은 애들을 어떻게 다 기억하니. 그런데 갑자기 왜?”
“아니에요. 그냥.”
엄마는 숙내를 기억하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숙내는 기억의 동굴 저 편 한 귀퉁이에서 여전히 방황하는 아이에 불과했다. 나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새동네의 기억은 새동네가 더 이상 새동네로 불리지 않을 때쯤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갔다. 언젠가부터 내가 머물 곳은 삶의 기반이 있는 서울이었고 그곳은 내가 살아가야 할 또 하나의 세계였다. 그곳의 낯섦과 이질감은 언제나 극복해야 할 과제처럼 나를 따라다녔다. 내게 그곳은 알껍데기를 깨고 나가기 위해 거쳐야 할 관문이었다. 그곳은 결코 세상의 전부가 아니었지만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끼려 애썼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전산장비를 유통하고 대여하는 회사에 입사했다. IT가 붐이었던 그해 사람들은 너도나도 사이버 공간을 임대해 홈페이지나 사이트를 개설하기 시작했다. 회사는 그런 흐름에 발맞춰 IT 사업을 시작했고 나는 그것을 진행하는 부서에 배치되었다. 나는 어릴 적 철둑길 한편에 나의 공간을 만들었던 것처럼 사람들에게 사이버상의 공간을 할당해주었다. 그렇게 나는 하루를 버티어 갔다.
이제 두어 시간 후면 고향에 도착한다. 그리고 어쩌면 이십여 년 만에 숙내를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그 애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내게 숙내의 기억은 그해 여름 안에서만 머물러 있다. 우리는 매일 철길 근처를 배회하며 시간을 보냈다. 사람들의 시선이 싫었던 그 애와 그곳만이 유일한 은신처였던 나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종종 철둑길에서 마주치곤 했다. 숙내는 언제나 그곳에 쪼그리고 앉아 반대편을 바라봤지만 선로에 올라가는 건 무서워했다. 날이 갈수록 짓궂어지기만 했던 나는 보란 듯 선로 위로 올라가 그 애의 시선을 끌려고 애썼다.
여름은 어느새 본격적인 장마철로 접어들었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철길에 고인 물 위로 기차가 지날 때마다 폭탄이 터진 듯 물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대낮부터 주변이 어둑해 어둠이 지면 가까이 내려앉을 것 같았다. 나는 우산을 쓴 채 철길 근처를 배회하며 숙내를 찾았다. 예상대로 숙내는 비에 흠뻑 젖은 채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구멍 난 우산 사이로 빗물이 떨어져 내렸다. 비는 비스듬히 쏟아져 내렸다. 비에 젖은 숙내의 머리카락 끝에 물방울이 고였다.
“야! 너 왜 여기서 궁상떨고 있냐. 비도 오는데.”
나는 숙내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그 애는 대답이 없었다.
“야, 왜 말이 없어?”
“아빠 기다려.”
숙내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울고 있었던 것이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과 눈물 젓은 뺨을 구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니네 아빠? 일하러 가신 거 아냐?”
“어젯밤에 술 마시고 죽어버리겠다고 했어. 동네 사람들이 말려서 집에 들어와 잠들었는데 새벽에 사라졌어.”
“그럼 일하러 간 거겠지.”
“하지만 느낌이 이상해.”
“에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
그날 숙내는 한참 동안 그곳에 앉아 선로 반대편을 바라봤다. 늦은 오후가 되자 사방은 더욱 어두워 철길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구분하지 힘들 정도였다.
“야, 안 가?”
“안 가.”
“바보탱이야. 니네 아부지가 다른 길로 집에 가서 널 기다리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
“아냐, 우리 아빤 이 길로만 다녀.”
“그럼 넌 계속 기다려. 난 갈 테니, 이 병신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숙내는 일어서는 나를 쳐다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슬리퍼 신은 발로 고인 물을 차며 성큼성큼 걸어 집으로 향했다. 말끝에 덧붙인 이 병신아가 집에 오는 내내 걸렸다. 집에 다다를 때쯤 나는 방향을 바꿔 숙내의 집으로 향했다. 숙내 아버지가 집에 왔는지 확인한 다음 숙내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숙내의 집은 대추나무가 심어진 녹슨 초록 대문이었다. 문틈으로 숙내가 사는 지하 방을 바라봤다. 불이 켜져 있지 않았다. 힘이 쏙 빠졌다.
‘쳇, 이젠 나도 몰라.’
그 집 앞을 한 시간이나 서성였지만 결국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리던 나는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속이 울렁거린다. 객실의 공기가 답답하다. 너무 한 가지 기억에 집중했던 걸까. 바람을 쐴 겸 객차와 객차 사이 휴게실로 갔다. 객차의 마지막 칸이다. 열차는 커브 길로 접어들었는지 차체가 기울어지는 게 느껴졌다. 차창 밖으로 대지가 어둠에 완전히 뒤덮었다. 창밖에 펼쳐진 논밭은 대낮의 고단함을 내려놓은 듯 어둠에 묻혀 있다. 멀리 좁은 도로를 오가는 차량의 불빛만이 그곳에 길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보다 더 먼 곳에 도시가 숨어 있다. 보일 듯 말듯 어른대는 빛이 도시의 흔적을 말해준다. 기차는 김천을 지나 남쪽으로 달린다. 이내 작업 등을 켜놓은 공장지대가 펼쳐진다. 구미다. 열차는 구미역을 지나 끝없이 달려간다. 머잖아 왜관을 지나 내 여행의 종착지 대구에 이를 것이다. 문득 가슴이 아련해진다. 매년 나는 내 유년의 기억이 머무는 고향을 찾아왔다. 그럴 때면 나는 그곳에 두고 온 것을 하나씩 꺼내 살펴보곤 했다. 한 꺼풀 벗겨진 기억이 내게 손을 흔든다. 기억은 모든 걸 아름답게 바꾸는 힘이 있다. 기억에 얽매이지 말라고 그것을 딛고 나아가라고.
숙내의 기억 또한 그런 것이다. 오랫동안 숙내는 아련한 추억을 넘어 내 유년을 잡아 가둔 사슬이었다. 몇 시간 후면 나는 숙내와 마주한다.
며칠 후 학교는 개학을 했다. 지겨운 여름 방학은 그걸로 끝이었다.
개학 후 학교에 갔을 때 나를 보는 아이들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방학이 끝난 어느 날 교장 선생님의 지시로 전교생 대청소가 있었다. 반마다 걸상을 책상 위에 올리고 교실 뒤로 붙여 본격적인 청소에 들어갔다. 아이들은 담인 선생님의 지시로 나무 바닥에 왁스 칠을 하는 조와 창문을 닦는 조로 나뉘었다. 내게는 교실 맨 뒤쪽 제일 높은 곳에 있는 창문이 맡겨졌다. 키가 크다는 이유였다. 비록 키는 컸지만 싸움을 잘하지는 못했다. 아이들의 싸움이란 힘이나 덩치가 아닌 깡으로 승부가 겨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평소 온순했던 나는 그즈음 날로 거칠어 점점 반항심 강한 소년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날 나와 같은 쪽 창문을 할당받은 녀석은 재훈이었다. 녀석은 우리 반에서 세 번째로 싸움을 잘했다. 대게 싸움 서열이란 일부 아이들이 멋대로 가져다 붙인 것이지만 남자들의 세계에선 공공연히 인정되고 있었다. 그날 실수로 아래쪽 창문을 마른걸레로 닦던 재훈이의 팔을 실내화로 건드린 게 문제였다.
“뭐야, 인마? 왜 발로 사람을 툭툭 건드리는 거야.”
“미안, 실수야.”
나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괜히 시비가 붙어 좋을 게 없었다.
“새끼가 계집애랑 놀더니 이젠 무서운 게 없나 보지?”
“뭐야?”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철길에서 우리를 본 누군가가 소문을 퍼트린 것이다.
“이 새끼 시치미를 떼긴. 너 인마 만날 철둑길에서 계집애랑 논다고 소문 다 났어. 니가 계집애야? 그것도 잡종 혼혈이랑 놀게.”
잡종 혼혈이란 말에 이성을 잃은 나는 녀석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금세 교실 바닥에 엎어져 싸움이 붙었다. 왁스가 칠해진 바닥에 뒹굴어 옷은 엉망이 되어버렸다.
싸움은 몇 분 안에 끝났다. 내 머리엔 커다란 혹이 났고 티셔츠는 늘어나 있었다. 녀석은 코에서 흘러내린 피를 보자 울음을 터트렸다.
그 싸움으로 여름 내내 숙내와 내가 철길을 배회했다는 사실이 전교에 알려졌다. 더불어 계집애와 어울리는 녀석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여자애들도 은근히 나를 피했다. 숙내를 따돌리던 아이들에겐 좀 더 그럴듯한 구실이 생긴 셈이었다.
하지만 그 일은 머잖아 아이들의 기억에서 잊혔다. 다음날 숙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심지어 철둑길에서도 숙내는 보이지 않았다. 불량 식품을 사 먹고 만화영화를 보던 비디오 가게에서도 문방구 앞 뽑기 상자 앞에서도 더 이상 그 애를 볼 수 없었다. 아이들이 숙내의 행방을 물을 때면 그저 쏘아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니 숙내가 사라졌단 사실조차 몰랐다. 정작 숙내가 없어졌단 말에 가장 궁금했던 건 나였지만 숙내의 행방을 모른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는 숙내를 찾아 철둑길을 헤맸다. 철둑길 어디에도 숙내는 없었다. 며칠 사이 철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철길로 이어진 철조망 앞 숲길에 노란 테이프가 처졌고 사람이 들어가지 못한다는 안내 표지판과 함께 철조망이 수리되어 있었다.
그날 밤 엄마에게 철길에서 사고가 났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순간 온몸에 오한이 느껴졌다. 사흘 전 저녁 무렵 철길 근처에서 거대한 쇳덩이가 바닥에 긁히는 소리를 들은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끼이이이이이익- 고막을 찢을 것 같은 소리는 곧이어 호루라기 소리와 사이렌 소리로 이어졌다. 그전에 누군가 술에 취해 고함지르는 소리를 들었다. 여름의 막바지에 이른 그 밤 엄마는 시끄러운 소리에 창문을 닫았다. 마지막 힘을 다해 피를 빨던 모기에게 물린 팔을 밤새 긁으며 뒤척이던 날이었다.
열차에 치인 사람은 숙내의 아버지였다. 늦은 밤 홀로 술에 취해 철길에서 난동을 부리다 사고가 났다고 했다. 한동안 사람들은 모일 때마다 그 일로 수군댔다.
“애들이 그런데 못 가게 잘 단속해야 해.”
“아무리 술에 취해도 그렇지. 어린 딸을 두고 죽으면 어떡하자는 거야.”
사람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탰다. 말은 어느새 눈덩이처럼 커져 동네를 떠다녔다. 진실과 거짓이 뒤섞였고 때론 거짓이 진실로 진실이 거짓으로 바뀌었다. 숙내의 가족은 진실과 거짓 가운데 괴물로 변해갔다.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닫았다. 하지만 숙내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며칠 후 비가 내렸다. 장마가 끝난 지 오래였지만 비는 밤새워 내렸다. 비포장 길이 많은 철둑길 곳곳에 웅덩이가 생겨났다. 새벽녘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선로 이곳저곳에 남아 있을 핏자국이 이 비로 말끔히 씻겨 내려갈 수 있을까 하고.
그 후로도 한동안 레일에 깔린 붉은 자갈을 볼 때면 철길 사고가 난 자리에 흩뿌려진 핏자국이 떠오르곤 했다.
한동안 집에선 부모님의 다툼이 잦았다.
“당신이 단속을 어떻게 했기에 애가 철길에서 서성거려?”
“그럼 애한테만 신경 쓸 수 있게 당신이 일을 제대로 하면 되잖아.”
높아져 가는 언성과 반박 사이에서 나는 꼬치 속 애벌레처럼 몸을 말았다. 한동안 방에서 나오지 않고 멍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숙내는 어떻게 된 걸까. 철둑길에 앉아 맡은 편만 바라보던 숙내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숙내 가족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서서히 잊혀졌다. 숙내가 인근 지역에 사는 친척댁으로 보내졌다는 말을 들은 건 몇 개월 후였다. 술 취한 숙내의 아버지가 죽어버리겠다며 선로 위에 올라갔던 것을 그때마다 동네 사람들에 의해 간신히 끌려 내려오곤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숙내가 그토록 철길을 두려워했던 이유를 그 애가 매일 그곳에 온 이유는 나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여름은 끝났다. 이듬해 나는 옆 동네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동네는 더 이상 새동네가 아니었다. 그곳은 구청에서 명시한 평리 6동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졌고 새동네라 부르는 사람은 점점 줄어만 갔다. 몇 년 후 그곳에서 몇 킬로 떨어진 황무지를 개간해 새로운 마을이 조성되었을 때 사람들은 새로 생긴 그곳을 새동네라 부르기 시작했다.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 엄마는 학원을 그만두었다. 얼마 후 우리 집은 또 다른 새동네로 이사했다.
기차는 왜관을 지났다. 차창 밖으로 경부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의 불빛이 보인다. 창밖으로 어둠에 가려진 도시가 서서히 나타났다. 철길 방음벽 사이로 늘어진 가로등이 그 어둠 사이 어딘가에 마을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기차는 금호강을 따라 대구 시내로 진입했다. 곧 섬유 공단이 나오고 열병합발전소가 보일 것이다. 지난 십여 년간 서울과 대구를 오가면서도 나는 숙내에 대한 기억을 잊고 있었다. 아니 잊으려 애쓰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철길은 강을 따라 시내로 이어졌다. 이윽고 섬유 공단이 눈앞에 펼쳐진다. 열병합발전소의 야경이 차창 밖으로 비친다. 기차는 숙내와 내가 서 있던 철둑길을 지난다. 철길 옆 철조망 아래에서 수풀에 웅크린 채 맞은편을 바라보던 숙내가 있을 것만 같다. 온종일 아버지를 기다리던 그 아이는 지금 행복하게 살고 있었을까?
‘우리 열차는 잠시 후 대구역에 도착합니다.’
대구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렸다. 기차는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플랫폼에 발을 디디자 남쪽 지역의 매서운 더위가 몸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나는 휴대폰을 확인한다. 한 통의 메일이 와 있다. 숙내가 보낸 메일이다.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처음 메일을 받았을 때부터 제 가슴 속에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꿈틀대기 시작했습니다. 냉정한 척하면서도 따뜻했던 그 마음을 기억합니다.
새동네를 기억하시지요? 그 시절의 기억은 제게 되새기고 싶지 않은 슬픔과 상처로 각인되어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아직 그 기억을 지울 수 없습니다.
지금도 가끔 꿈에 그 철둑길이 나타나곤 합니다. 그럴 때면 선로 한가운데는 어김없이 아버지가 서 있지요. 그리고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서 이 슬픔에서 깨어나라고, 이제는 괜찮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꿈을 꾸는 새벽이면 자리에서 일어나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습니다. 때로는 울 때도 있었지만 이제는 울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직 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나 봅니다. 이런 나를 이해해주시겠어요?
우리가 만나기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언젠가 이 마음이 회복된다면 그때는 제가 먼저 연락하겠습니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을게요. 행복한 고향 방문이 되길 바라요. 저는 여전히 행복을 찾아가는 중이랍니다. - 숙내가
한동안 메일을 보다 휴대폰을 닫았다. 그리고 가만히 숙내의 마지막 말을 되뇌었다. 행복을 찾아가는 중이라…. 그 애는 언제쯤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니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
한동안 플랫폼에 서 있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쪽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대기실 옆 계단을 거쳐 역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고층 건물로 둘러싸인 도심이 눈앞에 펼쳐졌다. 밤공기가 코끝으로 스며든다. 눈앞에 펼쳐진 야경을 보며 생각했다. 이 도시의 어느 곳에서 숙내는 오늘도 행복을 찾고 있을지 모른다고.
늦은 밤 역 광장으로 빠져나온 사람들은 늘어선 택시를 잡기 바쁘다. 나는 그들 사이에 서서 택시를 기다렸다. 잠시 후 택시 한 대가 미끄러지듯 달려와 멈춰 섰다. 나는 차에 몸을 싣는다.
“평리 7동 새동네로 가 주세요. 섬유 공단 뒤쪽에 새로 생긴 동네로.”
나를 태운 택시는 도심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도심을 바라보던 나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도시 어딘가에 숙내가 바라는 행복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200자 × 99장)
■ 우수상
코스모스역 / 염귀순
북천역에 바람이 인다. 정오를 향하는 투명한 햇살아래 코스모스들이 들판 가득 산들거린다. 사람이 반가운지 하양 분홍 빨강의 꽃 웃음을 한꺼번에 보내온다. 산골 허허한 벌판에 꽃을 심어 여행객을 불러들인 마음이 시詩적이라고 할까. 숨은 듯 외딴 역, 그것도 코스모스가 지천인 기차역은 처음이다.
역이라지만 코스모스가 지고나면 존재마저 분간키 어려울 성 싶다. 흡사 옛날 영화 속에나 나옴직한 역사驛舍의 대합실엔 올망졸망한 액자 너덧 개가 벽면을 채우고 있다. 그나마 차표를 파는 사람이 있고 열차시간표가 걸려있어 조그만 시골 역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하동 북천역은, 지금 그렇게 코스모스 꽃빛으로 가을을 건너는 중이다.
천개의 바람이 불다가고 수만 송이 꽃이 만발해도 사람이 찾지 않으면 고적할 테다. 잠잠하던 역이 열차가 부려놓고 간 한 무리의 관광객들로 수런거리기 시작한다. 코스모스와 철길 사이에서 사진촬영을 하느라 난데없는 사람 꽃도 피었다. 꽃보다 더 꽃인 청춘들이야 그렇다 쳐도, 만화방창 찬란하던 꽃의 계절을 하마 사윈 사람들은 꽃빛이 아쉬워서인가. 뜨거운 결정結晶들도 조용히 여물어가는 시점이면 맹맹하게 나이만 먹은 빈 가슴이 그러하다. 불꽃같은 사랑에 미쳐본 적도, 어떤 일에 목숨 걸며 빠져본 적도 없으며 간절함마저 잃어버린 채 당도해버린 망망한 가을에, 낯선 길이라도 나서지 않고서야 배길 수 있었으리. 대합실 액자 속에 든 작자 미상의 시 구절이 꽃을 보는 객의 마음을 헤아려준다.
‘…코스모스가 미쳤다/ 북천 기찻길 옆 가을들판이 미쳤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벌건 대낮에 연분홍 붉은 입술로/
떼지어 유혹할 수 있을까/ 미칠 수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미쳐야 저지르고/ 저질러야 일을 내고/ 일을 벌려야 다다를 수 있는 것/
아! 기찻길 옆 남바구들처럼/ 아름다이 미치고 싶다.’
역은 내게 왠지 ‘떠남’의 이미지였다. 바람 부는 플랫폼과 긴 철로와 기차를 품고 있는 역은 외할머니 손을 잡고 처음 기차를 타보면서부터 그랬다. 기적소리를 내며 달려가는 기차는 떠난다는 의미와 함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고, 어딘가로 향한 무한한 동경이 들어있었다. 요즘에도 기차역은 인파로 빽빽한 고속버스 터미널보다 정情적이면서 약간의 쓸쓸함과 그리움, 떠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어느 날엔 내 여행의 목적지가 그곳 지명을 단 ‘○○역’일 때도 있다. 책 한권 끼고 훌쩍 찾아갈 역이 있다는 건, 마음 붙일 곳 없는 팍팍한 삶에서 얼마나 위안인지. 여행이란, 과거와 현재의 길 위에서 나도 하나의 순순한 길이 되는 것이다.
가을엔 고속열차보다는 조금쯤 더딘 열차를 타고 북천역을 찾을 일이다. 잃어버린 이름처럼 아스라한 그리움 하나를 만날 지도 모른다. 가녀린 꽃대에 하늘빛 닮은 코스모스들이 역의 배경이면서 주인공으로 일명은 ‘코스모스역’이다. 탐스럽도록 풍성한 꽃송이도 아니 되며 핏빛으로 격하게 토해낸 꽃빛이어도 운치가 덜하리라. 기찻길 옆 코스모스의 연연한 빛에 가을 하루를 온통 맡겨보아도 좋겠다. 티끌 한 점 없는 꽃빛을 받아 마음을 적셔보거나, 속속들이 물든다면 더욱 좋겠지. 가슴 안에 꼭꼭 심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
에두르고 에둘러 온 길이다. 어디를 어떻게 디뎌야 할까 노심초사하며 허둥대는 세상길에서 비켜난 걸음이다. 아니 작정하고 찾아온 길이다. 얇은 바바리코트에 가방 하나 가볍게 달랑 메고 무궁화열차로 두 시간 사십분에 걸쳐 달려온 하루 낮의 여행길이다. 코스모스 하늘하늘한 가을을 걸으며 그윽하게 깊어져 보리라. 남몰래 맑아 보리라. 이 시간 고요의 하늘에 떠있는 유유한 구름일 수도,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다가 다시 욱신거리는 세상길을 그리워할 수도 있지 않으랴.
어디라도 간다면 좋아서 따라 나섰던 세상은 마냥 들뜨던 ‘소풍 길’이었다. 종착역을 떠올리며 기차표도 챙기고 잊은 건 없는지 이것저것 살피는 나이부터 인생은 ‘추억여행’이라고 누군가 말했다. 문득 돌아본 뒤안길은 힘겨웠던 날과 방황하던 장소와 길조차 여리고 순한 색으로 채색되어졌다. 세월이 그렇게 만들어 놓는다. 하지만 그 세월 탓에 마음속이 허허롭고 자주 옛길이 겹쳐진다면 인생의 가을에 든 것일 터, 추억이라고 아름답기만 하겠는가.
가끔 가슴이 먹먹하다. 오래전, 주말이면 오가던 부산역과 동대구역이 불현듯 떠오르기도 한다. 대구에 있는 요양원으로 아버지를 뵈러 다니던 길이었다. 철없는 동생들과 병약한 어머니의 근심을 뒤로하고 눈물바람으로 달려가야 했던 내 이십대의 동대구역. 그때의 깜깜하던 시간들과 아버지 얼굴이 되살아나면 지금도 아프다. 인생의 파릇한 봄날에 맞닥뜨린 삶으로는 난해하기 이전에 혹독하게 아리고 절박한 것이었다. 저마다 명치에 박혀 세월이 가도 새록새록 돋는 통증도 있는 법이라서 인생은 아무래도 눈물겨움인가 싶다.
내게 조금쯤의 방랑벽이 생겼었다면 아마 그런 시간들 때문일 게다. 그러면서 나를 싣고 아득한 철로 위를 달려가던 기차는 인생에서 선물 같은 여행길을 안겨주기도 했다. 여행은 새로움에 대한 ‘눈 뜨임’인 동시에 ‘돌아오기 위한 떠남’이었으며 내 여행길엔 늘 많은 풍경을 담은 기차역이 있었다.
다시 북천역을 언제 찾게 될는지, 만일 그렇다면 나는 또 어떤 모습일까. 하동 북천엔 코스모스 꽃만 있는 게 아니다. 때론 사람으로부터도 그곳이 읽히고 덤으로 나를 읽기도 하므로. ‘이병주문학관’ 가는 길을 묻자, 타고오던 자신의 차를 돌려 선뜻 실어다준 산동네 아주머니의 마음을 새겨둔다. 문학관에서 내려오는 길은 꽃을 벗 삼아 한껏 유유자적해보는 참인데, 뜻밖에도 볼 일차 나간다며 뒤따라오신 노老 관장님. 기어이 태워다주신 호의도 소중히 간직한다. 나, 스쳐가는 길손에게 그만한 정을 베푼 적 있었던가. 남을 사랑한 적이나 있던가. 얼떨결에 받아 안은 인정에 호젓한 꽃길은 살짝 아쉬움으로 남겨두었다.
인생은 단 한 번의 여행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여행 중의 여행은 삶의 간이역과도 같지 않을까. 분주함과 번잡함을 내려놓은 소적한 간이역은 가쁜 숨 돌려 갈 수 있는 곳이다. 이제부터 나의 여행은 꽃과 풀과 바람향기를 품은 간이역이면 좋겠다. 거기엔 사람이 아름다워지는 마음의 길도 들어있으리라.
어쩌면 북천역의 가을을 또 한 번 예약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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