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열”Anarchist from Colony
한국영화, 장르:드라마, 개봉:2017.06.28
감독:이준익, 제작:박열문화산업전문유한회사
주연:이제훈,최희서,김인우, 관객:2,353,150명(2017.07.27.현재)
1. 박열(朴烈)의 생애
박열은 1902년3월12일,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에서 “박지수”와 “정선동”의 3남1여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박준식”(朴準植)이다. 그는 전통적인 양반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경술국치 후 궁핍한 생활을 면하지 못하였다. 1908년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1911년 함창공립보통학교(4년제)를 졸업한후 경성고등보통학교(현,경기고등학교) 사범학과에 진학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을 계기로 박열은 일본이 세운 경성보통학교를 자퇴하고 고향 문경으로 돌아와 태극기와 격문을 배포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10월, 일제의 탄압이 가중될 무렵, 박열은 일본 동경 한복판에서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신념으로 일본행 배를 탔다. 동경에 도착한 박열은 신문배달, 공장직공, 우편배달부,인력거 등 노동현장을 누비며 고학을 하였고 “세이소쿠영어학원”에서 영어를 배우며 서방 열강들의 책을 탐독했다. 그 과정에서반제국주의와 “아나키즘”(무정부주의,anarchism)에 몰입하며 일본의 사회주의자 “오스기 사카에”, “사카이 토시히코”, “아와사 사쿠타로”와 접촉하며 사상교육을 전수 받았다. 또한 “김찬”, “조봉암” 등 동경유학생들과 “의혈단”을 조직하고 친일파들을 타도대상으로 삼았다.
요코하마 출신의 “가네코 후미코”는 유아기때 부모에게 버려지고 조선으로 이주해 충청북도 청주군 부용면 부강리 할머니댁과 고모집에서 7년동안 학대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이것을 계기로 후미코는 일본제국주의와 일본인에 대한 강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 1919년4월, 일본 동경으로 귀국한 후미코는 여학교 졸업검정시험에 합격한 후 여자의전에 진학하려 하였지만 뒤늦게 나타난 아버지가 자신을 외삼촌에 매매하려는 시도에 충격을 받고 가출해 신문판매대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1920년11월, “김약수”, “백무”, “최갑춘”, “황석우”, “임택룡” 등 조선인 고학생, 노동자 200명으로 결성된 “조선고학생동우회”를 설립한 박열은 12월9일, “일본사회주의동맹”에 참여하였다. 1921년11월29일, “원종린, 김약수, 황석우, 백무, 손봉원, 정태성” 등 조선인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를 중심으로 하는 “흑도회”를 결성하여 반제국주의 투쟁을 본격화 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이와사키 오뎅집”점원으로 일하던 후미코는 사회주의자 “히라사”, “다케노스케”, 아나키스트 “다카오 헤이베에” 등 노동사 멤버들과 교류하며, 조선인 아나키스트 “원종린”, 공산주의자 “정우영, 김약수, 정태성” 등을 접촉했다. 1922년2월 “청년조선”이란 잡지에서 박열이 지은 “개새끼”라는 시를 읽고 감동에 물든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하늘을 보고 짖는/달을 보고 짖는/보잘 것 없는 나는
/개새끼로소이다./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뜨거운 것이 쏟아져/내가 목욕을 할 때/나도 그의 다리에다/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나는 개새끼로소이다.“
박열의 시에 감동한 후미코는 정우영의 하숙집에서 박열과 대면한다. 당시 일본사회운동가들의 변절에 분노한 박열은 “강자와 약자의 투쟁, 약육강식의 관계가 우주 대원칙이다. 모든 사물에 복수함으로서 만물을 멸하는 것이 위대한 자연에 대한 합리적 행위”라는 논리를 전개해 나갔다. 후미코는 기성의 가치관에 저항하는 박열에게 신앙심과 같은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1922년3월, 후미코는 박열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4월 하순경, 동경 에바라군 세타가야의 데이지리 “아이카와 신사쿠”의 2층방에서 동거를 시작했다.
1922년7월10일, 박열은 후미코와 함께 흑도회 기관지 “흑도”를 창간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파괴적 의열투쟁을 지지하는 박열과 대중적 전위정당을 추구하는 김약수가 충돌하며 각자 다른 길로 향하였다. 이로 인하여 박열은 “뻔뻔스러운 조선인”을 창간하고 4호까지 발행했지만 “요시찰 조선인 갑호 해당자”로서 일본경찰의 미행과 감시를 받아야만 했다.
1923년4월, 박열은 민중과 호흡하는 사회운동을 기치로 “김철, 육홍균, 홍진유, 정태성, 서동성, 나가타 게이자부로, 오가와 다케시, 최규종, 이필현, 서상경, 하일” 등 조선인 15명, 일본인 6명 등 총 21명을 회원으로 하는 “불령사”(不逞社)를 조직했다. 불령사는 각자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고 권력에 저항하는 파괴작업을 각자 알아서 결행하는 방식이었다. 요미우리신문은 니가타현 나카오우누미군 아키시로촌에 건설중인 시나에쓰전력발전소 건립에 동원된 조선인 600명이, 새벽 4시부터 밤 9시까지 중노동에 동원되면서, 이를 견디다 못해 도주한 조선인들을 잔혹 살해한 후 나카쓰강변에 방치한 것을 보도하였다.
이에 격분한 박열은 현지노동자로 잠입하여 밀착 취재한후 그 해 9월, 미토시로쵸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수천명의 청중들에게 이러한 만행을 고발하였다. 또한 경성으로 귀국해 경운동의 천도교 교당에서 이 사건의 전말을 공개했다. 더 나아가 박열은 의열단원 김한과 함께 폭탄테러 계획을 착수했으나 중국군 장쭤린의 수하들에게 체포되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후 수차례에 걸쳐 황족, 외국대사등의 테러 계획을 착수했으나 폭탄구입자금 등 여러 가지 내부적 이견으로 인하여 어느 것 하나 성사된 것이 없었다.
1923년9월1일 오전11시58분, 간토지방에 대지진이 발생하였다. 동경과 요코하마에서는 조선인과 공산주의자들이 건물에 방화하고 우물에 독약을 넣었다는 유언비어가 유포되었다. 구조활동에 참여한 일본경찰과 자경단들은 조선인에 대한 잔혹한 살상을 자행하였다. 이일로 동경 1,798명 등 전국에서 6,618명의 조선인이 학살되었다. 조선인 대학살이 일본내 외신기자의 타전을 타고 전세계에 알려지자 일본정부는 국제사회로부터 맹비난을 받게 되었고,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불령사 멤버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1923년9월3일, 일본군 제1사단 병참 제1대대 하사관 “스즈키 가메오”는 도미카야 지역 이시카와 목장숲에서 박열과 후미코 등 조선인 3명을 긴급 체포하고 “사타가야 경찰서”에 유치하였다. 가택수색에서 각종불온서적과 선전용 삐라를 압수하고, 10월 중순까지 “김중한, 정태성, 장상중, 최규종, 홍진유, 니야마 하쓰요” 등 불령사 전원이 체포되었다. 취조과정에서 박열의 폭탄입수계획을 자백받은 검사는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의 원인을 조작하는데 이용하였다. 10월20일 박열과 불령사 회원 16명이 치안경찰법 위반혐의로 기소되자 오사카 아사히신문은 “대지진을 틈타 대관 암살을 기도한 불령사 비빌결사대 검거”라는 제목의 기사를 전 세계에 타전했다.
공판 초기, 불령사 회원들을 구명하기 위해 폭탄테러 계획을 단독범행이라고 자백한 박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중한의 폭탄입수계획 가담과 후미코가 박열과 모의했다는 주장으로 단독범행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1925년, 박열과 후미코는 천황, 태황태후, 황태후, 황후, 황태자, 황태손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가하려 한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대역죄로 기소되었다. 본래 대심원의 심리가 1심으로 종결되는 중죄로 인하여 박열과 후미코는 “최고특별재판”에 회부되었다. 박열은 “일본의 권력자 계급에 주노라!”,“나의 선언”,“음모론”,“일하지 않고 먹어치우는 자들” 등 4대 선언문을 발표하고, “후세 다쓰지”인권변호사를 통해 4가지 요구사항을 전달하였다. 박열의 이같은 당당한 요구는 이 사건이 전세계적인 집중을 받으면서 외신기자들이 동경으로 입성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첫째 조건과 둘째 조건을 수용하는데 성공하고 공판당일 조선의 혼례복장으로 법정에 들어서 한국어로 답변을 이어갔다.
“첫째, 나는 피고 아닌 조선민족의 대표로서 일본천황을 대표한 재판관과 동등한 자격으로 법정에 설 것이다. 재판관이 천황을 대신해 법관 법의를 입고 나온 것이라면 나도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입장이니 왕관과 왕의를 착용케 해줄 것. 둘째, 재판관이 심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조선 민족을 대표한 내가 먼저 법정에 서게 된 취지를 선언하게 해줄 것. 셋째, 법정용어는 조선말만 쓰겠다. 넷째, 피고의 좌석을 재판관과 동등하게 높일 것.”
1926년2월27일, 박열과 함께 재판정에 출두하였던 후미코가 기록한 “26일 밤”이라는 제목의 한 구절이다. 일본인 아내로부터 온전한 믿음과 사랑과 헌신을 받았던 박열은 독립운동사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애정의 흔적을 갖고 있다.
“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모든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때문에 그가 나에게 저지른 모든 과오를 무조건 받아들인다. 박열의 동료들에게 말한다. 이 사건이 우습게 보인다면 뭐든 우리 두 사람을 비웃어도 좋다.그렇지만 이것은 두 사람의 일이다. 재판관에게도 말한다. 부디 우리를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 박열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한다. 설령 재판관들이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해도 나는 당신을 결코 혼자 죽게 하지는 않겠다.”
1926년3월25일, 대법원심리 “마키노 재판장”은 박열과 후미코에게 형법 제73조 대역죄와 폭발물단속벌칙 제3조를 적용 사형을 선고했다. 최후 변론에 나선 박열은 “재판장, 수고했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지만 나의 정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후미코는 “만세!!만세!!”라고 부르짖었다.
사형 판결후 검찰총장 “고야마 마쓰키치”는 사법대신 “에기 다스쿠”에게 권력자에 대한 증오심 때문에 테러를 하려 했고, 사실상 그 계획 자체도 허구에 가깝다는 이유로 사면을 요구했다. 후미코는 공범으로서, 박열은 주범이지만 일본황실의 자애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1926년4월5일, 이치가야 형무소장 “아키야마”가 박열에게 감형장을 주었을 때 박열은 그것을 받았지만 후미코는 휴지조각처럼 찢어 버렸다. 다음날인 4월6일, 박열은 지바 형무소로, 후미코는 우쓰노미야 형무소 도치기지소로 이감되었다.
그후, 박열은 단식으로 자살을 기도했으나 형무소에서 주는 강제급식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 후미코 역시 끊임없는 자살을 시도해 7월23일, 노끈으로 목을 매달아 자살함으로서 그들의 정당성을 증명하려 하였다. 후미코의 시신은 11월5일, 박열의 고향인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 팔령산 기슭에 모셨다.
몇 개월후, 박열과 후미코가 찍은 옥중사진이 공개됨으로서 일본 정계는 파문을 일으키고“와카스키” 내각의 총사퇴를 요구하였다. 사건담당 “다테마쓰” 예심판사는 강제 퇴임을 당하고 국회는 3일간 휴정에 들어갔다. 그후 일본제국주의는 박열을 미혹하며 전향을 제안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1945년10월27일, 박열은 투옥 22년2개월만에 호카이도 아키다 형무소에서 석방되었다. 박열의 석방은 대대적인 석방환영대회로 개최되었고, 이 대회에서 아키다 형무소장 추지시타 이사부로가 조선인들 앞에서 죄를 자백하고 자신의 아들을 박열의 양자로 바쳐 “박정진”으로 개명까지 하는 등 깜짝 놀랄일이 일어났다. 한때 무정부주의자였던 박열은 우익으로 전환하여 반공주의 노선을 천명하고 나섰다. 이강훈, 원심창 등과 함께 1946년1월20일,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10월3일, 재일조선건국촉진동맹 등 우파단체와 통합하여 “재일본조선거류민단”을 설립하고 단장에 취임하였다.
1949년5월, 한국으로 귀국한 박열은 한국전쟁때 납북된 후로 행적이 끊어졌다. “조소앙,안재홍, 엄항섭, 김약수” 등과 함께 1956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임위원장으로 활동하며 남북한 정권에게 자주적 평화통일원칙을 촉구하였다. 1974년1월17일, 평양방송은 박열이 애국열사릉에 묻혔다고 전했다.
2. 영화 “박열”
누군가 “박열”(이제훈역)이 쓴 “개새끼”라는 시를 읽고 있다. 시를 읽는 동안 누군가는 인력거일을 하고 있고, 인력거에 탄 승객은 일본 사람이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몇푼의 동전을 던져주며 집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동전의 개수가 모자란 인력거 일군은 바지를 붙들고 모자란 금액을 채워 달라고 보채지만 승객은 발길질만 해 댈뿐 돈을 주지는 않는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하늘을 보고 짖는..달을 보고 짖는..보잘 것 없는 나는..개새끼로소이다...높은 양반의 가랑이에서..뜨거운 것이 쏟아져..내가 목욕을 할 때...나도 그의 다리에다...뜨거운 줄기를 뿜어대는...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인력거일을 끝내고 귀가길에 들어선 박열이 동지를 만나려 할 때, 때마침 그 앞에 나타난 한 여인이 있었다. 당돌하기 그지없고 박열에게 첫눈에 반해버린 그녀는 “가네코 후미코”(최희서역)다. 조금전 그녀가 박열이 쓴 개새끼를 읽고 있었다. 후미코는 초면의 박열에게 여자가 있냐고 물었다. 혼자 지낸다고 말하는 박열에게 후미코는 거침없이 동거를 제안하고 내심 끌리는 마음을 가진 박열이 이것을 승낙한다.
박열은 삼일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참여하면서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에 분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등학생 신분으로 시위운동에 적극적으로 주도하다가 일본 동경 한복판에서 이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을 굳힌다. 박열의 나이 스무살, 일본 동경에서 식민지 조선인의 삶은 간단하지 않았다. 신문배달과 각종 노동일을 하였지만 수입은 겨우 풀칠만 할 정도였다. 이데올로기가 판을 치던 1920년대, 박열은 유럽의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매료되어 있었다. 민족주의적 투쟁일변도였던 당시 박열은 인류평등과 권력중심의 폭력적 부당성을 정면 비판하며 천황제도를 무력화 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의외로 빈약성을 가지고 있다. 이념적 성향이 게릴라적이라도 그 숫자가 가지는 힘과 능력의 한계는 무엇을 해낼만한 자극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들은 시내 오뎅집에 앉아 이념을 토론하고 시대를 비판하며 극우적이거나 제국적 사고를 지향하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수단을 강구하고 있다. 박열에게 있어서 후미코는 새로운 동지이자 사랑하는 아내다. 후미코는 진심으로 박열을 존경하고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러던 1923년 어느날, 일본 관동지역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수많은 인명과 시설의 피해가 있었다. 제국주의 국민들은 동요하기 시작했다. 천황의 심기 또한 불편해 했다. 그래서 일본 내각은 조선인이 건물에 방화를 하고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괴소문을 퍼뜨리고 조선인에 대한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일본 경찰과 함께 소위 자경단을 움직였던 일본 내무대신은 6천여명의 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해 그 시신을 유기까지 해 버렸다. 그러나 이 일이 확산일로로 치달으면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건의 배후와 원인관계자로서 당시 일본에서 활약하던 “불령사”를 주목한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채 이 사건에 휘말린 박열과 후미코와 불령사는 오히려 바깥보다 감옥안이 안전하다고 판단하며 체포되기에 이른다. 감옥생활은 의외로 평안해 보인다. 조선인 학살에서 피맛을 본 자경단이 구치소까지 찾아와 학살을 감행하려 했지만 경찰들에 의해 제지를 당한다. 후미코와 박열은 이렇게 창살 하나를 두고 사랑과 연민에 젖어들며 두사람의 사랑은 깊어만 간다. 두사람을 연결하는 그 고리가 이데올로기라는 점에서 아이러니 하기도 하지만, 일본인으로서 부모에게 버림받고 친척들에게 학대당한 후미코와 조선인으로서 나라잃고 일제에 학대를 당한 마음이 통했을 것이다.
“다테마스”(김준한역)검사는 상부의 지시를 받고 불령사 사건에 투입되었다. 관동대지진 괴소문의 진원지로 박열을 지목한 것이다. 괴소문의 진원지로 모든 것을 둔갑시키려 할 때 다테마스는 의외의 성과를 거두어 들인다. 그것은 박열이 폭탄을 구입하려는 계획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박열은 간단치 않은 문제가 발생하자 홀로 모든 것을 뒤집어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후미코가 이 일을 알고 있었다고 자백함으로서 박열과 후미코는 천황시해범으로 대역죄인의 신분으로 전환된다.
일개 불령사라는 조직의 우두머리였던 박열은 일본제국주의의 치밀한 계략속에 일약 조선의 영웅으로 둔갑되어 갔다. 조선일보 “권세인”(권율역) 기자는 박열을 조선의 영웅으로 대서 특필한 기사를 가지고 일본 동경에 나타났다. 이 사건은 의외의 변수를 일으키면서 국제사회에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외신기자들이 이 재판을 취재하기 위해 동경으로 입성하고 있었다.
“후세 다츠시”(야마노우치 타스쿠역)변호사를 지명한 박열은 당시 동경법정에 네가지 요구사항을 제출하면서 이 사건은 점점더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첫째, 나는 조선민족의 대표로서 일본천황을 대표한 재판관과 동등한 자격으로 법정에 선다. 재판관이 천황을 대신해 법관 법의를 입고 나오니, 나도 조선민족을 대표하는 왕의를 착용케 해줄 것. 둘째, 재판관이 심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조선 민족을 대표한 내가 먼저 법정에 서게 된 취지를 선언하게 해줄 것. 셋째, 법정용어는 조선말만 쓰겠다. 넷째, 피고의 좌석을 재판관과 동등하게 높일 것.”
일제 식민지 백성으로서 당돌찬 조선인 박열의 의지는 매우 강했고 결국 동경법정은 첫째와 둘째를 허용하면서 재판은 시작되었다. 재판장에 신랑의복과 신부의복을 입고 나타난 박열과 후미코에 방청석은 매우 당황했고 조선인 방청객은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재판은 이미 한쪽으로 기울여진 시이소와 같다. 결국 박열과 후미코는 대역죄인으로서 결코 피해갈수 없는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러나 그 어떤 자리에서든지 박열과 후미코는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박열과 후미코는 한 장의 사진을 남기려 한다. 다테마스 검사는 박열의 요구를 들어 주었다. 그래서 박열과 후미코는 검사실 한켠에서 결혼사진과 같은 한 장의 사진을 남긴다. 박열의 왼손이 후미코의 가슴에 닿아 있는 한 장의 빗바랜 사진은 두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박열과 함께 재판정에 출두하였던 후미코는 “26일 밤”이라는 제목의 글을 낭독하였다.
“나는 박열을 알고 있다. 박열을 사랑하고 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과실과 모든 결점을 넘어 나는 그를 사랑한다. 때문에 그가 나에게 저지른 모든 과오를 무조건 받아들인다. 박열의 동료들에게 말한다. 이 사건이 우습게 보인다면 뭐든 우리 두 사람을 비웃어도 좋다.그렇지만 이것은 두 사람의 일이다. 재판관에게도 말한다. 부디 우리를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 박열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박열에게 말한다. 설령 재판관들이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는다 해도 나는 당신을 결코 혼자 죽게 하지는 않겠다.”
대법원 “마키노 재판장”은 박열과 후미코에게 대역죄와 폭발물단속벌칙을 적용 사형을 선고했다. 최후 변론에 나선 박열은 “재판장, 수고했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지만 나의 정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하고, 후미코는 “만세!!만세!!”라고 부르짖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반전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천황의 자비로 무기징역으로의 감형장을 받게 된 것이다. 박열은 간수의 입장을 고려하여 감행장을 받아 들었지만 후미코는 그마져도 갈기갈기 찢어 버리며 분노를 표출했다. 조선인으로서 절개를 지키며, 일본인이지만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려 하였던 박열과 후미코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두사람은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하며 죽음을 향하여 한걸음씩 나아갔다. 그러나 모든 약속을 지킨 것은 후미코였다. 후미코는 결국 자살을 결행했고 그의 시신은 박열의 고향땅으로 돌아갔다.
박열은 어떻게 되었을까? 박열은 끝내 죽지 않았다. 그는 22년의 감옥생활을 끝내고 수많은 사람들의 환영속에 출소를 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영화는 끝이 났다. 민족적 인물이지만 역사의 한켠에서 빗바랜 사진처럼 숨겨져 있었던 한 인물을 그려 내었다는 측면에서 박수 받을만 하다. 그러나 사실, 내용이 없다. 법정 영화이지만 박진감이나 긴장감도 없다. 일본 제국주의를 조롱하는 듯 하지만 조선인으로서 감옥생활은 오히려 평안함을 느낀다. 박열의 온갖 요구조건에 안절부절하는 일본 정부의 모습에는 무엇인가 짝이 맞지 않다. 박열과 후미코의 감옥생활은 마치 천국을 보는 듯 하다. 잔잔한 영화는 일부 관객을 잠들게 까지 한다. 그만큼 무엇인가 뚜렷한 내용이 없고, 일본 스스로가 벌인 자작극에 조선인 한사람이 뜬금없는 영웅이 된듯한 인상만 남게 된다.
그래도 우리는 이 영화에서 무엇인가 알아가고자 한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신념”을 말하고 있다. 박열과 후미코는 자신이 가진 신념에 투철하였다. 특별히 후미코의 사랑과 신념은 감히 종교적이다. 그리스도인에게도 신념이 있다. 신앙과 신념은 하나로 연결된 고리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아가야 할 그리스도인의 신앙적 신념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종교가 아닌 이념을 위해 평생을 헌신했던 박열과 후미코의 삶을 바라보며 우리가 잃어버린 신앙적 신념을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그 삶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