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정부 주관으로 대통령의 동남아 순방에 대한 세일즈 외교 결과를 듣는 날이었다.
보나마나 투자 요청이겠지만 변장수는 나름대로 행복했다. 국가수반과 대면할 수 있을 정도로 큰 자신이 대견스러웠다.
청와대 별관에는 기업의 총수들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변장수는 아는 얼굴을 만나면 일일이 악수를 청했다.
'진성 그룹에서도 왔네."
진성 그룹은 와이프의 친정이었다. 참석한 사람은 와이프의 큰 집 오빠였다. 변장수는 어쩔수 없이 다가가 악수를 했다.
맥없는 농담을 주고 받을 때 대통령이 만찬장으로 들어섰다. 인사말이 이어지고 뻔한 이야기가 나왔다.
동남아시아 일대 국가들로부터 전적으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으니 투자를 하라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들어간 뒤 자세한 브리핑은 고수행이 했다.
변장수는 적잖이 놀랐다. 강승혜와 고수행이 지금도 은밀히 만나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후 고수행을
그저 부처의 비서관 정도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변장수는 그의 얼굴을 살피며 이런 저런 계산을 했다.
그에게 통할 접대를 궁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면 그의 발목을 잡을 궁리가 필요했다.
브리핑이 끝난 후 청와대에서 회사로 향하면서 변장수는 신정하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정하를 비서실로 불러올릴 생각을 하고 있던 참에 와이프에게 발각된 것이었다.
'지금 거신 전화는 고객의 사정으로 당분간 이용이 정지….'
변장수는 새로 장만한 휴대폰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역시 같은 응답 메시지만 흘러나왔다.
회사로 돌아온 변장수는 퇴근 무렵 비서실장을 불러들였다.
"기획실에 신정하라고 있지? 좀 오라고 해."
비서실장이 득달같이 달려 나갔다가 돌아왔다.
"회장님, 신정하씨는 지난 주말에 병가를 냈답니다."
'병가? 와이프가 벌써 손을 쓴 건가? 유치하게 그럴 여자가 아닌데.'
변장수는 석연찮은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김 변호사 들어오라고 해."
변장수는 오늘 강승혜와 변강호에게 돌아갈 유산 문제를 마무리 지을 계산이었다. 김 변호사가 들어왔다.
변장수는 양동탁에게서 받은 사진들을 내밀었다.
"…회장님, 이런 사진들만 가지곤 분배 거절 사유론 부족합니다. 그리고 변강호 군은 상속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자네 같으면 백억 대의 유산을 포기하겠어? 그 놈이 객기를 부린 거지."
김 변호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니까 이걸로 매듭을 지으란 말이야. 강승혜 그년이 바람을 피워서 사생아를 낳았다면 가능한 얘기 아냐?
안되면 되게 해야지."
변장수는 양동탁의 연락처를 김 변호사에게 건넸다. 김 변호사는 곤욕스러운 얼굴로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무슨 일이지? 예감이 좋지 않은데….'
변장수는 연락이 되지 않는 신정하를 떠올리곤 얼굴을 찌푸렸다.
187. 강쇠의 후예
오탁번이 탄 차는 '궁'의 후문 쪽으로 향했다. 미리 전화를 해 둔 터라 영업이사가 그를 마중 나와 있었다.
오탁번은 영업이사의 안내를 받으며 '궁'의 밀실로 들어섰다. 강승혜가 그를 맞이했다.
"오 상무님께서 어쩐 일로 이런 누추한 데를 찾아오셨습니까."
"누추하다니. 강 사장은 여전히 아름답고 겸손하시군."
오탁번이 자리에 앉자 종업원들이 재빠르게 상을 준비해 올렸다. 자리가 정리되자 강승혜가 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상무님께서 저를 그냥 찾아오시지는 않으셨을 테고…."
강승혜가 오탁번을 빤히 쳐다봤다.
"내가 꼭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사실대로 말해줄 수 있지?"
오탁번의 얼굴이 진지했다.
"자네, 돌아가신 그 양반… 정말로 사랑했나?"
잔을 들던 강승혜의 손이 멈칫했다.
"저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제 마음은 언제나 단 사람만을 향해 있었지요."
오탁번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승혜는 며칠 전 박무달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변양수 죽음의 배후에 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
"그 마음이란 게··· 흔들릴 수도 있지 않을까?"
오탁번은 강승혜의 가야금 소리를 듣고 싶어 했다.
그녀의 가야금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딱 두 사람이었다. 고수행과 죽은 변승우.
"상무님도 아시겠지만 저는 이제 가야금을 만지지 않습니다."
"언젠가 한번쯤 뜯을 날이 있겠지."
오탁번은 앞에 놓인 술잔을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말이 섬뜩하게 들렸다.
문득 강호가 걱정되었다. 오탁번은 마음만 먹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내였다.
강승혜는 가능한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차 앞까지 배웅을 했다.
오탁번이 차에 올라탔을 때 그의 비서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상무님, 신정하예요."
"음. 그래. 수고했구나. 내일 한남동으로 오도록 해라."
오탁번은 간단하게 통화를 끝낸 후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키워주면 저 혼자 큰 줄 아는 싸가지 없는 것들….'
오탁번이 한남동으로 향하고 있던 그 시각, 대일그룹의 장자인 변일수가 평창동 긴자의 지하 밀실에서
대일 그룹의 전략본부장인 남궁성을 만나고 있었다.
"…오 상무와 오늘 밤 10시에 약속이 잡혔습니다."
변일수 라인의 임원들은 물론 남궁성 역시 오탁번과 손을 잡아야한다고 생각했다.
"유럽인의 시조인 게르만 족의 왕들이 영토를 분할할 때 막내 아들한테 자신이 지배하던 영토를 주는 전통이
있다는데 돌아가신 회장님도 결국 그렇게 하시고 말았군요."
남궁성의 말을 듣던 변일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게르만 민족의 역사는 반란으로 얼룩져 있었던 겁니다."
남궁성의 말에 변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188. 강쇠의 후예
변일수가 오탁번의 한남동 밀실로 들어간 시각은 밤 10시였다. 남궁성은 차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는 집사의 안내를 받아 지하로 내려갔다.
'외삼촌 집이 이렇게 화려했어? 이 늙은이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변일수는 물론 대일의 주요 임원들 역시 오탁번의 자산 규모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여자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어르신 전용 바입니다."
집사는 변일수를 안내한 후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변 사장, 아니 조카님이 우리 집엘 다 오시고 이거 영광이군."
오탁번은 너스레를 떨며 변일수의 손을 잡았다. 변일수는 오탁번의 어깨 너머를 넘겨다보았다.
무대 위에서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여자가 반라의 몸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노래에 몰입한 듯 여자는
변일수의 등장을 알지 못했다.
"오해하지 말게. 개인적인 취미니까. 혼자서 늙어가는 처지에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
오탁번은 변일수의 손을 다정하게 잡은 채 소파 쪽으로 이끌었다.
'괴벽이 있는 줄은 알았는데 이런 거였어?'
"내가 다른 사람은 몰라도 큰 조카한테만은 허물없이 대하지 않았나."
순간 변일수는 오탁번이 진짜 자신의 동지라도 된 듯 싶었다. 문득 차에 남아 있는 남궁성의 조언이 떠올랐다.
'사장님, 오 상무의 농락에 절대로 속으시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 상무가 사장님께 잘 해주는 건 다 계산이 있는 겁니다.'
변일수는 소파에 앉으며 무대 위를 올려다보았다. 쭉 뻗은 다리에 군살 한 점 없는 몸매의 여자였다.
음정이 높아질 땐 배에 힘이 들어가 아름다운 근육을 나타냈다.
여자가 노래를 부르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을 때 변일수는 그녀를 보고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양동탁의 가게에서 노래를 부르던 청자였다. 청자는 변일수를 알아보고도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노골적으로 변일수를 쳐다봤다. 구경하고 있는 변일수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오탁번이 테이블 위에 술을 준비했다.
"조카님 용건이…."
오탁번은 뜸 들이는 걸 싫어했다. 그런 그의 성격을 변일수도 잘 알고 있었다.
"회장 말인데요."
변일수가 입을 열자마자 오탁번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군주가 죽으면 발 빠른 자가 군주를 맡게 되어 있지. 그건 세상 이치야. 세상이 그렇게 굴러왔으니까.
왕국을 세우는 데 별 노력도 없는 작자가 군주가 되면 왕국을 세운 공신들은 억울하겠지.
더군다나 서열도 있는데 말이지."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그래서?"
"그러니까 외삼촌과 저 둘 중에 한 사람이 회장이 되어야 순리죠.
그러려면 외삼촌과 제가 손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 사이 청자는 브래지어를 벗어던졌다. 그녀의 몸을 가린 건 손수건보다 작은 팬티 한 장이었다.
변일수는 자꾸만 눈길이 그녀에게 갔다..
189. 강쇠의 후예
오탁번은 흔쾌히 동맹에 응했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버릇없는 놈 하나 이기려고 어른들이 뭉쳐야하다니."
오탁번은 그저 담담하게 혀를 찼다.
"그건 그렇고, 저 아이는 어떤가?"
"네?"
"저 아이 말이야."
"노, 노래를 잘하네요."
변일수는 얼른 눈길을 떼었다.
"내가 조만간에 조카님 오피스텔로 한번 보내지."
"네? 아니 그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변일수는 왠지 모르게 오탁번에게 끌려가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버티고 있을 수 없어 변일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여전히 청자에게서 눈길을 떼지 못했다. 지금껏 만나보지 못한 묘한 매력의 여자였다.
"그럴게 아니라 오늘 당장 데리고 가려나?"
"아, 아닙니다."
변일수는 황급히 손사래를 친 후 오탁번의 집에서 빠져나왔다. 차 안에 있던 남궁성이 그를 맞이했다.
"순순히 그러자는데."
"그래요? 좀 이상한데요. 오 상무가 순순히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렇지? 나도 그게 좀 이상해. 아니면 늙어서 사람이 변한 건지도 모르지."
변일수와 남궁성이 탄 차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자신만의 바에 앉아 청자의 노래를 듣고 있던
오탁번은 모니터를 통해 그들의 차가 사라지는 걸 묵묵히 지켜봤다.
"상무님, 저… 다른 남자에게 보내지 마세요. 전 가고 싶지 않아요."
가슴과 아랫도리를 수건으로 가린 청자가 오탁번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왜?"
"전… 상무님이 정말 좋아요. 저도 제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지만….
상무님이 저를 다른 사내에게 보내신다고 하면 정말로 전 미쳐 버릴 것 같아요."
청자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슬그머니 오탁번의 곁에 앉아 그의 어깨에 기댔다.
그녀의 몸에서 수건이 스르르 흘러내렸다. 그녀의 다리 하나가 오탁번의 다리 위로 올라가려할 때
그의 손이 그녀의 다리를 잡았다.
"프로는 프로다워야지. 나는 네 남자가 되기엔 너무 늙었어. 네 아버지 뻘이야."
"플레이보이지 사장은 나이가 여든이 넘었어도 여자들이 안기지 못해 안달인걸요."
오탁번은 청자의 다리를 내려놓았다. 오탁번도 청자가 싫지 않았다.
하지만 오탁번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여자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긴장의 끈이 끊어진다는 것을.
"네가 내 곁을 떠날 때가 된 모양이구나."
오탁번은 차가운 인상과는 달리 부드럽게 말했다.
"상무님… 제발 절 버리지 마세요. 전 상무님 아니면 못살 거 같아요."
청자는 와락 오탁번의 품에 안겼다. 머뭇거리던 오탁번이 마지못해 그녀의 등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190. 강쇠의 후예
다나카 회장의 동경 집무실 곁 회의실. 다나카는 불빛으로 휘황한 동경의 밤거리를 내다보고 있었다.
주요 임원들은 조용히 앉아 기획본부장의 브리핑을 듣고 있었다.
"…하버드대 경영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회사 경험은 처음입니다. 햇병아리라는 말이죠.
다만 아버지가 국제 거상으로 알려진 공설암이라는 게 마음에 걸립니다.”
"공설암?"
"네, 공설암입니다."
"우리가 다른 기업들 인수할 때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던 그 공설암이 맞아?"
"네. 맞습니다."
기획본부장의 설명에 다른 임원들도 적잖이 수군거렸다.
"그런 배경의 여자가 뭣 때문에 대일 전자엘 들어간 거지?"
"죽은 대일 회장과 공설암이 친구였습니다. 죽은 변승우 회장이 전자를 살려달라고 부탁했던 모양입니다."
"살려달라? 살려달라고?"
다나카의 얼굴에 음흉한 미소가 그려졌다.
"지시했던 다른 문제들 말해 봐."
기획본부장이 자리에 앉자 홍보이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님께서 아시다시피 한국에서 대일의 점유도는 1%도 안됩니다.
우리가 합병할 경우 한국 언론의 주목을 받을 확률은 미미하다는 말입니다. 사전 언론 작업은 이미 시작한 단곕니다."
"미디어는 금방 달구어졌다가 금방 식어. 문제는 책이야. 한국 놈들은 근본부터 바꿔져야 해, 근본부터. 그 쪽은?"
"아직…."
다나카가 창을 등지고 홱 돌아섰다. 회의실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너 뭐하는 놈이야. 내가 네 놈한테 왜 월급을 주는데. 네 놈 하나한테 주는 돈이면 참신한 애들 백 명은 써.
너 지금까지 뭐했어?"
"한국에서 섭외할 마땅한 출판사들을 찾고 있습니다."
"찾아? 이제서?"
다나카가 손가락을 들어 가볍게 저었다.
"이번 달까지 한국에서 최소 10종은 책을 출판하도록 해. 붐을 만들란 말이야."
다나카는 차갑게 말했다. 일본의 기업이 한국의 기업을 인수 합병하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게
다나카의 전략이었다. 그 핵심에 책을 두었다.
엄청난 홍보비를 부어 기업의 적대적 인수 합병이라도 당연하다는 인식을 심어주자는 것이었다.
그건 유대인의 다국적기업이 알짜 기업들을 잡아먹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했다. 길게는 50년을 두고 50년 전부터
사전 작업을 하는 실로 무서운 기업가들이었다. 다나카는 그런 그들을 존경했다.
홍보이사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는 테이블 밑에서 다리를 부들부들 떨었다.
잠시 후 그의 비서가 옆문을 열고 들어왔다.
"회장님, 전화 왔습니다. 홍 마담이랍니다."
"다들 나가! 이번 주에 보고서 완성해."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