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5: 8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 히 5: 11 듣는 것이 둔하므로
히 5: 8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 -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
1]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예수께서는 아들로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셨다. 그는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난을 당하며 죽기까지 아버지께 순종하셨다.
* 빌 2: 8 -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2]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그가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다는 말씀은 특히 그의 인성(人性)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의 신성(神性)은 본래 완전하셨다. 그러나 그의 인성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완전함이 증거되셨다.
그의 순종과 의는 완전해졌고 그의 속죄 사역은 다 이루어졌다. 예수께서는 완전한 대제사장과 완전한 구주와 완전한 중보자가 되셨다.
이렇게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며 온전케 되셨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믿음은 마음의 순종이다.
* 롬 6: 17-18 - ⑰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⑱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비록 믿는 이들의 순종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마음으로 믿고 실제로 순종하고자 하는 자들은 구원받은 자들이다. 이런 자들을 위해 예수께서는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예수께서는 그를 믿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영원한 구원, 곧 한번 받으면 영원히 잃어버리지 않을 구원을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고난 받아야 할 이유가 없으시다(Morris).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에마덴 아프 혼 에파덴)은 헬라문학에서 오랫동안 쓰인 관용구로서 '배우다'의 헬라어 동사어근 '마드'와 '고난 받다'의 동사어근 '파드'는 음성학적으로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수사학적인 효과를 위해 자주 함께 사용되었다(Lane).
수사학적 관용구가 적용된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순종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하나님께 순종하였으며 순종의 과정 속에서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Bruce, Morris).
본 절에서 사용된 '고난 받다'(에파덴)은 '파스코'의 부정 과거 능동태 직설법으로 본서에서 오직 '예수의 수난'에만 사용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한다.
히 5: 9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
1] 온전하게 되셨은즉
본 절은 고난받기 이전에 그리스도의 본질이 불완전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고난을 받으심으로 인해 사람들의 죄를 사할 수 있는 대제사장으로서 온전하게 되셨음을 뜻한다(Lane, Hewitt, Meeter, Morris).
예수께서는 고난을 통해 구속 사업을 완수하시고 그의 백성의 대제사장으로 완전하다는 인정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아 이제는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Klappert, Hewitt).
2]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온전케 되신 결과로 자신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
본 절의 '순종'은 앞 절에 언급된 예수 자신이 행하신 '순종' 즉 죽음의 고난을 받기까지 행한 철저한 복종을 의미한다(Lane).
이것은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한 것과 같이 자신을 따르는 자들도 그러한 순종을 해야 함을 시사한다.
이렇게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구원은 '영원한' 것이다. '영원한'(아이오니우)는 '끝없는 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은 시간의 차원을 뛰어넘는 참된 것이며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참 하늘에 속한 것임을 암시한다(Morris, Williamson).
히 5: 10 대제사장이라 칭하심 -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
그리스도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한 순종으로 온전케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는 칭하심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는 것은 멜기세덱의 후손으로 대제사장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6 절)
그리스도께서 율법 하에 있던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과는 다른 약속의 은혜에 의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시사한다(Hewitt).
2. 영적 미성숙에 대한 경고 ( 5: 11 – 14 )
⑪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⑫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⑬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⑭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 5: 11 듣는 것이 둔하므로 -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
앞에서와 같이, 구약성경 시편 110: 4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 즉 멜기세덱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렀다.
* 시 110: 4 -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그는 아브라함 시대에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출하기 위해 싸우고 돌아올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라함을 맞으며 축복했던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다.
* 창 14: 18-19 - ⑱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⑲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그때 전쟁터에서 돌아온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전쟁 노획물의 십분의 일을 드렸다.
* 창 14: 20 -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살렘 왕 멜기세덱은 신비한 인물이며 그의 이름에는 깊은 예표적인 뜻이 있었다.
성도가 영적으로 성장하면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점점 더 경건해지고 의로운 인격이 되며 그와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의 지식이 많아지고 말씀의 깨달음이 깊어진다. 그러나 서신의 수신자들은 아직 그렇지 못했다.
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멜기세덱에 관하여는'(페리 후) 헬라어 '멜기세덱'이라는 명칭이 직접 거명되지 않고 관계대명사 '후'로 나타난다. '후'의 성(性)에 따라서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 '후'는 남성으로 10절의 멜기세덱을 받는다고 볼 수 있다(Robertson, Bruce, Morris).
멜기세덱에 관하여 일반적인 유대 개념과는 다른 관점에서 설명될 것이므로 저자가 7: 1-28에서 그것을 논하기에 앞서 본 절을 통해 수신자들을 준비시키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 '후'는 중성으로 그리스도의 전체적인 대제사장직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Lane, Hewitt).
저자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 이라는 난해한 주제를 납득할 만한 이해력이 수신자들에게 결핍되어 있음을 수신자들에게 주지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Hewitt).
'할 말이 많으나'(폴뤼스 호 로고스)는 헬라 문학의 관용구로서, 다루고 있는 주제의 중요성을 독자들에게 심어주기 위하여 사용되었다(Lane).
2]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둔하므로'(노드로이)는 부정어 '네'와 '멀다'라는 뜻의 '호데오'의 합성어로서 '듣는 것에 무관심한' 혹은 '이해력이 부족한'을 뜻한다.
혹자는 본 절을 앞 문단의 결말로 보아 '듣는 것이 둔하다'는 말은 9 절에서 언급된 '자기를 순종하는' 즉 그리스도께 대한 철저한 복종을 요구하는 저자의 말을 수신자들이 충분히 깨닫지 못함을 시사한다 고 주장한다(Lane, Morr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