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11장 28-44절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향해 가실 때의 상황은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6절에 기록된 도마의 말을 통해서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나사로가 있는 예루살렘 근방 베다니 지역으로 가고자 하신 것은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단지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이적을 통하여 보이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선 예수님께서 베다니 마을 밖에까지 오셨을 때 언니인 마르다가 베다니 마을 밖에서 맞이하게 됩니다. 거기서 이런 저런 대화가 오고갑니다. 그 대화 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마르다가 가지고 있는 믿음의 수준입니다. 즉 예수님에 대한 마르다의 믿음은 그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지극한 은총을 받고 계신 분으로, 그러하기에 언제든지 하나님께 간구하기만 하면 들어주시는 분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때도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마지막 때 가서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지, 지금 당장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25절과 26절을 보시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때 살아서 나를 믿는다는 말 때문에 죽어서도 믿을 수 있는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언제나 살아 있는 때입니다. 죽음 이후는 믿거나 믿지 않거나가 있을 수 없습니다. 때문에 살아서 나를 믿는다는 것은 육신의 살아있음보다는 죽었던 영혼이 살아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산다는 말씀은 본래 육적으로는 살아 있지만 영적으로는 죽은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중생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실제로 육체의 죽음을 경험할지라도 다시금 부활하게 된다는 의미까지 담고 있습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 다시 말해 중생한 자들이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게 믿을 때 영원히 죽지 않는, 이때도 육적으로 죽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육적으로 죽더라도 영생을 잃어버리는 일은 결코 없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마르다를 향하여 이런 가르침이 있을 때 그 말씀의 역사가 마르다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참된 선지자 정도로만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지극한 은총을 받고 있는 분으로만 알았습니다. 결코 그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마르다는 27절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오면 마리아를 만나십니다. 28절 이하 30절을 보시면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지난번에 말씀을 드렸지만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어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틀을 더 머무셨던 것은 죽을 때를 기다린 것도 있지만 죽음 이후 사람들이 위문하러 온다고 할 때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일 때를 기다리신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그 이적을 공개적으로 나타내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마르다와 마리아는 그런 예수님의 뜻을 알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베다니 마을로 들어오시기 전 마르다는 예수님이 오신 것을 알고 마을 밖으로까지 가서 맞이했습니다. 이제 마리아를 만나시게 되는데 여전히 마을 밖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참된 고백을 했지만, 유대인들의 적대감에 대한 부분이 여전히 염려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염려 때문인지, 아니면 마르다와 마리아와 함께 곧바로 무덤으로 가고자 하신 것 때문인지 예수님께서는 마리아를 불러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마르다는 마리아를 불러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 29절에 의하면 마르다가 예수님께서 너를 부르신다는 말을 했을 때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게 됩니다. 마르다 입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사실이 유대인들 귀에 들어가는 것을 염려하고 있지만, 마리아의 이 행동으로 말미암아 마르다 입장에서는 뜻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31절에 보시면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나간 것이지만, 나가는 마리아를 보면서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 하면 오라비의 죽음에 대하여 곡하기 위해 무덤으로 가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따라가게 됩니다.
여기서 굳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길게 말하지는 않겠지만 내 의도와 달리 어떤 일이 일어날 때 그것 역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말은 내 의도대로 일어나는 일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일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즉 우리가 우연이라고 말하는 그런 일은 하나님께 없다는 것입니다.
섭리와 관련해 요셉이 말한 바를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창세기 45장 5절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로마서 8장 28절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씀을 하시는데, 하나님의 모든 섭리는 택한 백성들에게는 선을 이루는 역사로 있습니다. 이때 모든 일은 택자의 선만이 아니라 악도 포함됩니다. 요셉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할 때 그 일은 분명 악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악한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선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을 인간의 악이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뜻, 내 의도대로 안 된다고 해서 하나님의 선하심이 폐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뜻, 내 의도대로 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시며, 또한 그의 섭리 역시 선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점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사실을 숨기길 원했지만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과정에서 유대인들이 따라 나갈 때 큰 일 났다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혹 그 일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당하고,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지라도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그 섭리를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어쨌든 마리아는 급히 일어나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달려갑니다. 32절을 보시면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21절에서 마르다가 한 말과 동일합니다. 그 말은 마르다가 가지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마리아가 가지고 있던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거의 일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존중은 분명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립니다. 예수님 당시 그 지역에서 왕이나 고관대작들에게 예를 갖추어 절하거나, 혹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에 통상적으로 사용되던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 그만큼 존중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물론 누가복음 10장에 나온 마르다와 마리아의 비교를 보면 말씀을 듣는 일에 힘쓴 것은 마리아입니다. 말씀을 듣는 일에 힘쓴 만큼 일반적인 이해로 하자면 믿음 또한 더 나았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르다와 동일한 말을 했다는 것은 마리아 역시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있는 그런 상태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계속해서 33절 이하 35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고 기록합니다. 일단 마리아는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웁니다. 유대인들 역시 마리아를 따라왔는데, 거기서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우는 것을 보고는 일시적으로라도 적대적인 감정이 누그러뜨려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도 함께 웁니다.
이 모든 것을 보시고서 예수님은 심령에 비통함을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또한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참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참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예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또한 히브리서 5장 2절에서는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분으로 계셨습니다.
여기서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합니다(매튜 풀 주석 참고). 과연 그리스도께서도 본성적인 반응으로 자동적으로 괴로워하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괴로워하신 것인가? 왜 이런 질문이 나왔느냐 하면 옛 교부들 중 몇몇은 이것이 주님의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칼빈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이것이 주님의 필연적이고 본성적인 반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본성을 입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본성적인 연약함들인 우리의 감정들도 입으셨고, 그런 점에서 우리와 다를 바가 없으셨다는 것이 히브리서의 진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감정들을 입으셨다고 해서, 그런 감정들을 나타내셨다고 해서 그것이 죄로 나타나는 일이 있는가? 그런 일은 없습니다. 덧붙이지만 이런 감정들을 나타내셨다고 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훼손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하셔서 우리의 본성을 입으셨고, 그렇게 하심으로써 인간의 감정들과 관련해서도 우리와 같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자원하셔서 우리의 본성을 온전히 입으시기는 하셨지만, 우리의 본성에 내포되어 있는 감정들로부터 자유로우셨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는 감정이라는 측면에서도 자기가 우리의 형제라는 것은 증명하십니다. 이것을 통해 그가 우리를 위한 중보자라는 사실을, 우리와 같은 연약함들을 스스로 경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나타내십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연약함들을 쉽게 용서하실 수 있으시고, 그 점에서 우리를 기꺼이 도우실 준비가 되어 계시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반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들은 죄악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분이 우리의 그러한 감정을 공유하신다는 것은 그분의 본성과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4:15)고 말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감정과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정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감정들은 어떠합니까? 무절제하고 한계를 지키지 않고 과도한 까닭에 잘못되고 죄악된 것을 나타냅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감정들은 우리와 같지 않습니다. 절제되고 조화로우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감정들로 충만합니다. 때문에 그분의 감정으로 나오는 모든 것은 잘못된 것도 아니고 죄악된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왜 우리의 감정이 잘못되고 죄악된 것으로 나타납니까? 그 감정들이 하나님의 법의 지배를 받아 절제된 것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멋대로 날뛰고 소동하며 소란을 피웁니다. 소위 ‘자기 성질에 못 이겨서’라는 말처럼 하나님의 법에 지배를 받아 절제된 감정으로 나타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거나 다스리지 못합니다. 우리의 감정은 그런 식으로 제멋대로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에 지나치게 집착해서 합당한 이유나 근거 없이 슬퍼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그런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감정들은 그 한계를 벗어나지도 않고, 합당한 이유나 근거 없이 생겨나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감정이 잘못되고 죄악된 것으로 나타난 것은 결국 인간이 맨 처음 창조 된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타락하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즉 인간의 타락은 우리의 전인을 타락하고 부패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우리의 의지도 타락하고 부패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감정도 타락하고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은 그런 타락과 부패에 물들지 않은 자로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감정과 그리스도의 감정 간의 큰 차이는 더럽게 오염된 시궁창의 물과 이물질이 하나도 없는 순수한 물 간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함께 우셨다는 것은 그들과 마음을 나눈 것이기도 하지만 저들과 달리 한계를 벗어나거나 합당한 이유나 근거가 없는 그런 감정에서 나온 것은 아닌 겁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는 권면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자는 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를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는 것은 요한복음 11장에서 알리고자 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이시기 때문에 죽어도 살고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영생을 소유한 자들이요, 지금은 죽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금 살아나게 될 자들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 앞에서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슬퍼하되 과도하게 슬퍼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소망이 없는 다른 이들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말라는 권면을 하는 겁니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저들의 슬픔을 보시면서 예수님도 슬퍼하셨습니다. 저들이 우는 것을 보시면서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감정이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감정을 받아 나온 것이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감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들은 과하게 슬퍼할 수 있습니다. 저들은 과하게 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마음을 아시고 함께 슬퍼하고 함께 울 수 있지만, 저들처럼 과한 것이 아니라 절제된 감정으로, 죄와는 상관없이 슬퍼하고 우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보면서 유대인들이 말합니다. 36절과 37절입니다.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여기서 다른 두 반응을 보게 되는데, 한 부류는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는 쪽으로 반응한 것이고, 다른 한 부류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이 좀 더 일찍 와서 죽지 않게 할 수도 없었냐는 반응입니다.
그러나 첫 번째 부류는 단지 인간적인 면만을 볼 뿐입니다. 슬퍼했다, 울었다는 것으로 그것을 판단하고 있는 겁니다. 두 번째 부류는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듯 하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비난합니다. 여기에는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마음도 담겨져 있습니다. 왜냐하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나사로는 죽지 않게 할 수 없는가 할 때 사람의 능력의 한계, 사람이기에 가지는 한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을 보면서 인간적인 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죄가 없다는 사실을, 그가 하나님이란 사실을 함께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능력을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사가 아버지의 뜻 안에서 행하시는 것이지 아버지의 뜻과 무관하게 행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여 응답 받을 때 감사하면서도 응답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불평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전에는 이렇게 하셨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 하십니까? 그러나 이전에 그렇게 하셨다고 해서 지금도 그렇게 하셔야 할 의무가 하나님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전에 이렇게 응답하셨지만 지금은 달리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만큼 자유로우신 분이십니다. 자유로우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기도에 따라 이렇게 움직이고, 저렇게 움직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고쳐주시기도 하시지만, 요한복음 11장에서 죽어가는 나사로를 살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통해 자신의 선을 나타내십니다. 즉 맹인을 고치신 것도 그분의 선이요, 죽어가던 나사로를 살리시지 않고 죽게 내버려둔 것도 그분의 선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후 더 영광스러운 사실을 보게 되겠지만, 그런 영광스러운 사실을 보지 않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폐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이런 저들에 말에 오늘 본문 38절에서는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라고 기록합니다. 마리아를 만나 34절에서 나사로를 어디에 두었느냐 물으셨고, 이런 과정 속에서 유대인들의 말을 듣고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신 것입니다. 이때 ‘다시’ 비통히 여기셨다는 것은 33절에서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신 동일한 마음을 다시금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마리아의 우는 것과 유대인의 우는 것을 보시면서 슬퍼하고 울었다는 것은 저들의 마음을 공감한 것도 있지만, 분명 다른 마음이 있으셨던 겁니다. 즉 저들의 불신에 대한 비통함을 가지셨던 겁니다.
계속해서 38절 나머지 부분과 39절을 보시면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님은 불신의 마음으로 따르고 있는 유대인들에 대하여 비통히 여기시면서 무덤에 가십니다. 그 무덤은 굴로 되어 있었고, 돌로 막아 놓았습니다. 나중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매장할 때도 이와 같은 방식인데, 유대인들의 무덤은 이렇게 굴을 파서 무덤으로 삼고 큰 돌을 굴려서 그 입구를 막아 놓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때 마르다가 이미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날 정도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40절에 근거하자면 지금 마르다의 이 말은 불신의 말이 분명합니다. 이미 부패하고 썩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자가 이런 불신을 가질 수 있는가? 예수님께서 친히 부활이요 생명임을 말씀하시면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신 말씀에 믿는다고 했으면서도 어떻게 이런 불신이 가능한가?
그러나 이것이 인간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사도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란 고백을 했습니다(마16:15-16). 그 고백에 대하여 칭찬하시기를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란 말을 들었습니다(마16:17). 즉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선물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마16:21). 이때 베드로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했고, 이 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란 말씀을 하셨습니다(마16:22-23). 바로 앞에서 칭찬을 받았지만, 복이 있다는 말씀을 들었지만 곧바로 사탄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즉 주께서 참된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시고도 그 선물을 유지하도록 역사하지 않으면 인간은 얼마든지 넘어질 수 있고 믿었다가도 불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홀로 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늘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어 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늘 하나님만을 의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마르다의 불신은 뜬금없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라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모습입니다. 참된 믿음이라 할지라도 그 믿음에는 점과 흠이 있습니다. 결함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지만 그 은혜를 한 순간 쏟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란 것입니다. 그만큼 연약한 자들입니다. 이런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는 40절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여기서 ‘내 말을 네가 믿으면’이라고 한 말은 이미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말씀하신 25절 26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리고 이 말씀에 대하여 믿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을 고백한 데는 예수가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믿음의 고백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이 불신으로 나타나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마태복음 13장 58절에 보면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는 말씀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되겠지만, 믿지 않으면 믿음 않음으로 말미암아 볼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주께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유무에 따라 하나님이 일하시는가?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뜻에 구속 받는다는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하나님은 자유로우신 분이십니다. 자유로우시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의지대로 행하십니다.
그럼 믿지 않음으로 인해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고,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음으로 인해 그 능력을 볼 수 없다는 말은 무엇인가? 저들의 악의가 하나님의 능력을 저항하고 반대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볼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들입니다. 내 말을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씀하셨다고 해서 불신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불신하는 마르다에게 믿음을 화합하라는 것입니다. 뉘앙스 자체는 책망일 수 있지만, 그 책망은 믿음을 일으키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돌을 옮겨놓으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나타나게 되는데, 41절 이하 44절입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우선 예수님은 기도하십니다.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신 것은 기도하는 자의 자세 중 하나로 모든 응답이 하늘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이런 자세로만 기도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리의 기도처럼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는 심정으로 하나님 앞에 서면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기도하시되 감사 기도를 먼저 드리십니다.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으로서 기도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예수님은 참 사람으로서 기도를 하시는 분으로 있습니다. 즉 신성을 따라서는 기도를 들으시는 분으로 계시지만 인성을 따라서는 기도를 하시는 분으로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자주 기도하셨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가 부족해서 기도하신 것인가? 그가 모자라서 기도하신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머리로서 몸 된 우리가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감사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내 말을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요구하시는 모든 것은 언제나 아버지의 뜻과 일치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은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뜻이 다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말을 들으시는 것으로 아버지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그가 아버지의 뜻을 따라 구하고 또 그 뜻대로 받아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예수님도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버지께 구하지 않고도 행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질서를 파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자주 아버지로부터 받아 행하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러한 기도를 드리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나사로를 살리실 것인데, 이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나타나는 일인 줄 알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 이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복음서를 보면 항상 기도하시고 능력을 나타내신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 질서가 달라지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자이신 예수님께는 항상 아버지의 영광을 구하고, 아버지의 뜻만을 따르는 분이십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는 데 있어 기도를 하신 것은 다른 자가 아니라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란 것입니다.
기도 후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그러자 무덤 안에 있던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게 되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보게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 마르다의 믿음은 말씀과 함께 이적을 통해 확증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 역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을 듣지는 않았지만, 말씀을 사모하는 자에게 그 말씀의 역사가 무엇인지를 친히 보여 알게 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께서 말씀하시자 죽었던 자가 살아났다는 것은 그의 말씀에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유대인들 중 일부가 말하는 것처럼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지만 죽어가는 자를 살리지는 못하는 그런 능력이 아니라, 참으로 죽은 자라 할지라도 다시금 살릴 수 있는 그런 능력인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 앞에서는 죽음조차 굴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능치 못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일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또한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런 죄의 권세를 무너뜨릴 수 있는 분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은 죄를 짓고 그 결과 죽음을 향해 가지만, 그 방향을 완전히 바꾸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사망이 아닌 영생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이 안에서 생명을 얻었고, 이 안에서 영생을 얻은 자들입니다. 더 이상 죽음이 우리를 주장하지 못합니다. 죽음이 우리를 다스리지는 못합니다. 물론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예수님께서 다시금 오시지 않으면 육체의 죽음은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사로 역시 죽었다고 부활했지만 다시 죽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죽었기에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이 헛되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우리에게 성취가 될 것입니다. 죽으면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고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 품에 앉기게 되겠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란 것입니다. 부활의 때가 있습니다. 지금의 육체와 동일한 육체로 부활하지만 그때는 영광스럽게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부활한 자로서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토록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지금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면서 예수님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나타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 안에 있는 생명을 받고 영생을 소망하는 자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