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 민속박물관을 찾았다
풍산홍씨 정익공파 유물전을 보기 위해서이다
지난 번 인연이 되어 풍산홍씨 정익공파 문중을 맡고 계신 홍만식 회장님의 초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 19일에 본 행사를 진행했는데 나는 학교 행사때문에 참석하지 못해 오늘 방문했다
온양 민속박물관에 온 지도 근 15년은 넘은 것 같다 오는 길도 착각을 해 한참을 돌아 당도했다
때마침 유물전이 열리는 본관에 당도하니 회장님께서 마지막 손님들 유물소개를 마치면서 반갑게 맞아 주셨다
풍산 홍씨(豊山 洪氏)는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을 본관으로 고려 고종때 문과에 장원 급제해 국학직학을 지낸 홍지경을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그 이후 조선조에 들어와 모당 홍이상 선생 때 이후 인물들이 줄줄이 배출된다
사진은 김홍도가 그린 모당 평생도 좌의정 부분이다
이후 선조부마 홍주원, 장헌세자 장인 홍봉한, 정조를 왕위에 올린 홍국영, 벽초 홍명희 등등 유명한 인물이 많은데 그중 조선 숙종때 만퇴당 홍만조 공이 바로 그 한가운데 있다
만퇴당 홍만조 선생은 자는 종지(宗之), 호는 만퇴(晩退). 대사헌 홍이상(洪履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 홍탁(洪𩆸)이고, 아버지는 현감 홍주천(洪柱天)이며, 어머니는 증 영의정 김광찬(金光燦)의 딸이다.
1669년(현종 10) 성균관유생이 되고, 1678년(숙종 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열을 거쳐 지평·정언을 지냈다. 그 뒤 1688년 부수찬, 이듬해 부응교를 거쳐 1690년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다음해 돌아와 승지·전라도관찰사·도승지가 되었다.
1693년 강화유수가 되고, 1696년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전라도·강원도·함경도·경상도 및 경기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대사간·형조참판·한성부판윤·좌참찬·형조판서를 거쳐, 1718년 우참찬을 지낸 뒤 이듬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21년(경종 1) 판의금부사·좌참찬을 역임하고, 이듬해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정익(貞翼)이다.
아산 배방 세교리에 만퇴당을 모시는 자은영당이 있는데 그 안의 영정은 평양 생사당 때 영정이다
죽은 이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사당인데 평양엔 생사당이 있었다
죽기도 전에 그 인물을 사당에 모셔서 생사당이라 한다 그만큼 백성들이 흠모했던 인물이란 상징성이 있다
사실 이 영정도 보물급인데 영정 위부분에 후손중 한명이 잘못된 정보를 훗날 써 놓아 보물에서 탈락되었단다
그 뒤 기로소에 들어갈 때 숙종(59세인데 한 해 일찍 들어감)과 같이 들어갔기에 기사계첩이 작성되었고 그 기사계첩이 이번에 국보가 되면서 오늘 이 자리에 이른다
우리 동복오씨와의 관계는 수촌공 오시수 선조와 손아래 동서지간이 된다
그래서 수촌집에 교류한 흔적이 여럿 보인다
그 이후 그 자손들은 갑술환국후 남은 남인의 후예로서 성호 이익, 식산 이만부, 번암 채제공, 다산 정약용 등의 남인 실학자들과 가까이 교류하며 세상의 중심에 서게 된다
바로 만퇴당 아들인 도정공 홍중인, 양효공 홍중징이 그 인물의 대표격이다
우리 동복오씨와의 교류도 계속 활발하여 만퇴당 홍만조 공의 치제문도 약산 오광운 선조가 짓게 된다
어찌 되었든 이 만퇴당 가문이 갑술환국 후 전멸한 이 남인계를 끌어주는데 큰 역할을 한다
앞에서 보았듯 만퇴당의 어머니는 서인계 중심인 안동 김광찬(김상헌의 양자, 김수항 형제 아버지, 김창집,김창협의 조부)의 여식이였기에 전멸되는 남인계에서도 남을 수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이 가문이 후덕하여 남인계 뿐만 아니라 두루두루 인맥관계를 폭넓게 유지했던 것이 더 큰 후손 번창의 원인이었겠지만...
어쨌든 숙빈최씨도 만퇴당을 중히 여겼고 여러 주변 사람들이 만퇴당의 사람됨을 훌륭히 숭모하였다
약산 오광운 선조의 만사 속에 나타난 만퇴당의 풍모로 이 글을 마친다
홍상서 만조이다 의 만사-오광운
洪尙書 萬朝 挽 二首
금포(마음에 품은 생각이나 포부)는 양화(봄의 따뜻한 기운)요 정신은 학이셨는데
문정(대문의 뜰)은 물과 같아 재상이면서도 가난하셨네
만 가지를 갖춘 복리(타고난 복)에는 이지러진 경계가 없었고
천 갈래로 변하는 세상 길에는 완전한 사람이 있었다네
세 조정을 섬기신 살쩍은 서쪽누각의 눈빛과 같으셨는데
팔로(천하)의 봄기운은 남국의 팥배나무 그늘(주나라 초기 재상 소공처럼 은혜로운 정치나 관리의 인자한 행실을 비유함)에 말미암았네
지하에서도 응당 채복(채색복장)을 차린 이가 짝지어 모실 텐데
그뿐만 아니라 연진(옛 나루이름인데 보검인 용천검과 태하검이 분리되었다 만나서 용으로 변해 날아갔다는 곳임)에서는 용천검(춘추시대 초나라의 소왕이 오나라의 간장과 월나라의 구야를 불러서 만들게 하였다는 보검으로 아주 탁월하고 귀중한 것이란 뜻)을 만나리
창생들에게 명망이 성대한 때에 머리카락은 이미 누른 빛이었는데
누가 암랑(높은 조정, 정승을 뜻하는 것으로 보임)을 한걸음 앞두고 가로막히게 하였던가?
활을 쏘는 솜씨는 신선의 그림자를 엿보기 어려웠지만
피로 쓴 주소는 일월과 빛을 다툴 수 있었다네(왕에게 직간함에 최고라는 뜻 같음)
주나라 때 뒤에도 교산(신화적인 임금 황제를 제사하던 중국 협서성의 산)에서 개미를 홑이불에 그렸는데(은나라의 사상례에서 관을 덮은 붉은 천으로 된 홑이불의 네 모서리에 그려 놓던 개미 무늬로 왕을 위하여 따라 죽음을 비유)
십년이 넘도록 맑은 낙수(낙동강)에는 용이 누워 있었네
봄구름 같은 아름다운 사조(화려하고 훌륭한 시문)는 공의 여사(본업의 일 외의 것)였기에
반드시 노포(경험이 많은 나이든 농부처럼)에서 늦은 절기(만년의 절조를 비유함)의 향기로움을 살피셨네
陽和襟抱鶴精神。如水門庭宰相貧。福履萬全無缺界。世途千變有完人。西樓雪色三朝鬂。南國棠陰八路春。地下應陪雙彩服。不徒龍劒會延津。
望欝蒼生髮已黃。誰令一步阻巖廊。射工難伺神仙影。血䟽能爭日月光。褥蟻喬山周歲後。卧龍淸洛十年強。春雲麗藻公餘事。老圃須看晩節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