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방창(萬化方暢)의 에너지, 김종학 ‹꽃›
김종학, ‹꽃›(1985) 캔버스에 유화물감, 80×10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AI가 들려주는 박혜성 학예사의 명화이야기만화방창(萬化方暢)의 에너지, 김종학 ‹꽃›
전통자수에서 영감을 받은 김종학의 추상적인 꽃그림
“세계적인 작가는 고사하고 한국에서도 유명해지기를 포기하고 그저 마음을 달래고자 아무 생각 없이 그려나갔다. 얼마나 외로운지 자연과 말 없는 대화를 했다. 특히 잡초, 꽃, 새, 그리고 물고기가 있는 웅덩이를 장화를 신고 찾아다니면서 가시에 찔리고 벌에 쏘이고 뱀에 물리기도 하면서 설악산을 느꼈다. 설악산의 봄은 아름답고 여름은 풍성하며 풀이 쓸쓸하게 죽어가는 가을 모습 모두가 아름다웠다. 겨울은 흰 눈에 모든 것이 깨끗해 보였다.”
설악산 스튜디오 인근에서 산책 중인 김종학 ⓒ일치문화재단.
어찌 보면 자발적 망명이었다. 서울대학교 회화과 졸업(1962) 무렵부터 박서보, 김창렬 등과 함께 1960년대 전위미술 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이들과 함께 당시 여러 해외 비엔날레에 참여했으며 도쿄(1968~1970), 뉴욕(1977~79)에 유학까지 다녀온 김종학(金宗學, b.1937)이 1979년 갑작스레 설악산에 들어간 것은. 김종학의 설악행은 용기 있는 자의 과감한 행동처럼 보였지만 실은 상처받은 이의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서울, 도쿄, 뉴욕 등 대도시에서 다양한 미술을 접하고 왕성하게 활동했던 김종학은 여러 현대미술 사조들이 흥했다가 쇠퇴하는 과정을 목격했다. 그는 앵포르멜, 판화, 일본 모노하(物派)의 영향을 받은 설치미술, 구상회화 등 그때까지 배우고 모방하고 활용하고 시도했던 것들을 이제 자기 것으로 숙성시켜야 할 때임을 절감했고, 여기에 녹록하지 않은 가족사까지 겹쳐 결국 대자연 속으로 망명을 택했다. 누군가 망명에 대해 상상하는 것은 흥미로울 수 있지만, 그것을 직접 체험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라 했던가. 그는 철저한 고독 속에서 온 감각을 자연에 맡겼고, 당시 미술계에서 보기 힘든 자유롭고 파격적인 예술을 탄생시켰다.
김종학, ‹작품›(1963) 캔버스에 유화물감, 145×112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1974년 국립현대미술관(덕수궁)에서 열린 «앙데빵당 2회전»에 출품된 김종학의 ‹무제 No.1›
김종학, ‹얼굴들›(1990년대) 종이상자에 아크릴물감, 127×90cm, 작가 소장.
설악에 칩거하며 김종학은 대도시에서 살 때는 전혀 알지 못했던 자연의 경이로움에 매료되었다. 삶의 무대가 바뀌니 작품의 소재와 양식이 완전히 거듭났다. 설악의 다채로운 사계(四季) 풍경과 산에서 만난 야생화, 꽃나무, 풀, 물, 새, 벌레 등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자연의 강인한 생명력을 표현하기 위해 김종학은 섞지 않은 화려한 원색의 물감을 그대로 캔버스에 발랐다. 꿈틀거리듯 자유로운 필치와 현란한 색은 고스란히 형태가 되었다.
김종학, ‹무제(폭포)›(1987)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191×32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종학, ‹No. 13›(2006) 캔버스에 아크릴물감, 91×290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그의 작품에는 설악산에 자생하는 온갖 꽃들이 등장한다. 개나리, 개망초, 국화, 궁궁이, 나팔꽃, 달개비, 달맞이꽃, 도라지꽃, 동백꽃, 마타리, 맨드라미, 모란, 박꽃, 벚꽃, 복사꽃, 산수국, 산수유, 철쭉, 생강나무 꽃, 엉겅퀴, 연꽃, 유채꽃, 진달래, 참나리, 초롱꽃, 패랭이꽃, 할미꽃, 호박꽃 등은 대상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관심과 관찰, 사생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작가가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 것이 아니다. 각 꽃의 주요 특징은 강조하되 형태는 과감하게 생략했고, 환경이 다른 곳에서 자라는 꽃들을 한 화면 위에서 즉흥적으로 조합했다. 그 결과 꽃, 넝쿨, 숲은 작가의 캔버스 위에서 스스로 생산적인 질서를 지닌 생명체로 재창조되었다. 그의 꽃그림은 올 오버 페인팅(all-over painting), 즉 중심이 되는 특정 모티프나 구도 없이 화면 전체가 위계 없는 균질한 가치를 지니는 전면 회화 형식을 띄는 경우가 많다. 이는 작가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으로 대표되는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내 작업에서 꽃이나 나무 등은 설악의 자연에서 온 것이지만, 원색의 컬러를 섞지 않고 사용하는 태도는 우리나라 전통자수 영향을 받은 거라고. 우리가 자랄 적은 일정 말이니까 이미 근대화가 돼버려서, 화려한 자수 같은 것을 보질 못했어요. 내가 화려한 자수 작품들을 본 것은 서울에 와서가 처음이었다고. 허동화 선생 같은 이가 모은 자수를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고. 그래서 나도 색을 섞지 않고 원색을 그대로 써서 그런 강렬함을 구축하고 싶었다고.”
작업 중인 김종학 ⓒ일치문화재단.
김종학이 수집한 자수 민예품 ⓒ일치문화재단.
동시에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그의 꽃그림은 전통자수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기도 하다. 김종학은 청년기부터 고미술 수집에 열성적이었다. 그의 관심은 추사 김정희, 우암 송시열 등의 글씨와 능호관 이인상, 단원 김홍도, 북산 김수철 등의 그림-이들의 개성 있는 필묵(筆墨)과 구성 감각은 김종학의 설악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다-뿐만 아니라 목공예, 목가구, 석상, 보자기와 자수, 농기구에 이르기까지 폭이 무척 넓었다. 주머니가 곤궁하던 젊은 시절, 도자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으며 이미 골동 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팔리고 있었기에 학생 신분의 김종학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목기에 눈을 돌렸다. 여기에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에 근무하고 있던 혜곡 최순우의 역할이 컸다. 그 인연으로 김종학은 그동안 수집한 사방탁자, 문갑, 머릿장, 서안(書案, 좌식 책상), 연상(硯床, 문방가구) 등 조선시대 사랑방에서 사용되던 목가구를 1987년 국립중앙박물관에 대규모로 기증했다.
목가구 다음으로 그의 고미술 수집에서 중요한 영역은 자수와 보자기로, 1978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개최된 허동화, 박영숙 부부의 컬렉션으로 만들어진 «한국자수 특별전» 관람이 김종학의 자수 수집의 계기가 되었다. 당시는 자수가 예술, 또는 보호해야 할 전통문화로 간주되기보다 -참고로 故 한상수 선생이 국가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으로 지정된 것은 1984년의 일이다- 여성의 부업을 통해 해외 수출과 국내 수공업 증대를 위한 산업적, 기술적인 분야로만 인식되던 때였다. 김종학은 전통자수, 특히 섬세하고 세련된 궁수(宮繡, 궁궐 장인들이 제작한 자수)보다 서민 여성들이 “자기 재주대로, 그저 멋대로, 바느질이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만든” 민수(民繡)에 애착을 가졌다. 최순우가 전통자수에서 발견한 미적 특질-“창의적인 데포르메이션”, “어느 구석을 어떻게 잘라 놓고 보아도 그 한 조각이 그대로 독립된 조형의 세계를 갖추고”, “거의 추상에 가깝도록 왜곡된 사물들의 조형”, “품위 있는 색채들이 서로 튕기는 화음”, “현대적 조형 정신에도 능히 육박”, “신선한 민중적인 근대 감각”, “당시 우리 미술계의 아방가르드적 위치” 등-을 예민한 김종학 역시 감지했고 이를 철저히 자기화했다. 최순우의 표현은 마치 김종학의 꽃그림을 설명하는 것으로 들릴 정도다. 다만 미술사학자 최순우가 조선시대 자수를 이야기하면서 “젊은 여인들의 순정,” “정념의 바늘을 꽂았을 앳된 조선시대 여인,”“(여인들의) 참을성과 적공의 미덕과 침묵” 등을 강조한 것과 달리, 화가 김종학은 다만 자수의 조형적 대범함과 평면성, 그리고 다채로운 색채와 강렬한 보색대비에 집중했다는 점이 다르달까. 게다가 그는 화려한 꽃이 오히려 생물학적으로 남성적이라고 생각했다.
김종학이 수집한 자수품은 버선 집, 수젓집 등 각종 주머니, 베갯모, 보자기 등 생활자수와 활옷, 적삼 등 복식 자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회화의 모든 소재를 다루는 감상 자수(대개 병풍)와 달리 생활자수와 복식 자수는 주로 길상적인 의미를 지닌 꽃과 새, 나비, 십장생 등을 소재로 삼는다. 그는 상경할 때마다 인사동, 장한평, 이화여대 근처에서 자수를 구입했는데, 이때 허동화나 한상수, 복식 학자 석주선 등이 최상의 상태의 물건만 까다롭게 고른 것과 달리 그는 중간상이 파는 보따리를 따지지도 않고 통째로 구입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의 수집품에는 유독 꽃을 소재로 한 자수가 다수를 이룬다는 점이 흥미롭다. 여성의 취미 또는 부업 정도로 폄하되던 자수를 “홑으로 볼 수 없는 맹랑한 예술”로 인식한 김종학의 자수 컬렉션 중 극히 일부가 오는 5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개최되는 «한국 근현대 자수» 전시에 소개된다. 김종학의 꽃그림과 전통자수에 관심이 있는 분들, 그리고 도대체 근현대 자수가 무언지 궁금하신 분들 모두 꽃 피는 계절 덕수궁에 걸음 하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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