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방진 용서
오경자(제9회 대상)
6월이 다 가기 전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체의 행사 등으로 6월이면 현충원을 참배할 때가 많았거나 현충일 기념식에 경건한 마음으로 차분히 앉아 방송으로라도 머리를 숙여 호국영령들께 추모와 감사의 인사를 올리곤 해왔다. 요즘에는 그것조차 잘 안 되어 시간을 놓치고는 마음이 무겁고 미안했다. 이제 철이 들었는지 혼자서라도 참배 한 번 하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면서 조바심이 났다. 그분들의 희생이 아니었으면, 인천상륙작전이 며칠만 늦어졌어도 우리 엄마와 나는 인민군에 의해 소개당해 북녘 땅 어딘가에서 비참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아마 이미 죽었겠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6·25 당시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며 모골이 송연해진다.
반동분자놈의 에미나이라며 길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는 9살짜리 계집애의 땅아 내린 머리 꼬랭이를 사정없이 잡아 흔들던 사내, 그 눈빛은 뱀 같았다. 하나님 앞에 가서 열 번을 책망 받는다 해도 그들을 동족이라는 이름으로 용서 운운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이다. 국군장병의 목숨값으로 지금의 내가 있는데 1년에 단 하루, 6월의 하루를 그분들께 참배하는 것으로 보내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구체적으로 하게 된 것이 70년 만이니 이제야 철이 좀 드는 모양이다.
이른 아침 현충원은 고요했다. 충혼문을 들어서 현충탑 앞에 묵념을 올리고 무명용사비를 우러르니 만감이 교차한다. 그동안 여럿이 함께 왔을 때와 사뭇 다른 경건함에 머리 숙여 참배하며 미안하다는 사과와 감사하다는 고백을 소리 없이 바쳤다. 누구에게나 목숨은 하나씩뿐인데 나라를 구하고자 그 귀한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림으로써 나라를 구하신 고귀한 피가 금방이라도 뚝뚝 떨어질 것 같다. 묘역을 돌며 머리만 조아릴 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영령님이 아니었으면 저는 지금 여기 없을 거라며 ‘서울에서 북으로 끌려갈 뻔한 9살 계집애, 당시 서울 거주’라고 방명록에 쓰는 일만이 감사의 표시였다.
이승만 대통령 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1950년 6월 25일 서울 중구 저동2가 14번지의 우리 집에서 북괴군의 남침만을 알리며 국군장병은 귀대하라는 방송, 그리고 북이 38선을 넘어왔으나 잘 물리치고 있으니 서울 시민들은 걱정하지 말라는 아나운서의 반복적인 보도를 전해 들으며 아버지 무릎에 기대 있던 나는 서울 교동초등학교 3학년 재학 중이었다. 27일 밤 지하실에서 국민 여러분 걱정하지 말고 안심하고 있으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방송을 서울 경무대에서 하는 것으로 알고 정부의 발표를 철썩같이 믿으며 잠이 들었다. 이튿날 아침 눈을 떠 보니 소련제 탱크가 서울 한복판에 버젓이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이렇게 서울 시민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어 석 달의 생지옥을 겪었다. 어디 그뿐인가, 우리 아버지같이 북괴의 손에 강제로 납치되어 북으로 끌려간 소위납북인사가 10만을 넘어섰다.
이승만 대통령의 그 방송만 없었더라도 우리 아버지가 잡혀가지 않았을 것이라는 원망이 신념처럼 뇌리에 박혀 70년을 미움으로 살았다. 세상에, 대전의 충남도지사 관사에서 한 방송이라니 어이없는 일이었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고 3학년 때 학도호국단 대표로 경무대를 예방해서 이승만 대통령을 뵙게 되었는데 대춧빛 안색의 온화한 미소를 띤 그 어른을 보는 순간 그동안의 미움이 봄눈 녹듯 사라지며 꼭 이웃집 할아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때 왜 그러셨느냐, 안 그러셨으면 우리 아버지 안 잡혀 갔을 것이고 내가 행복했을 것 아니냐고 따져 묻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느라 애꿎은 입술만 멍이 들었다.
그날 이후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미움이 거의 없어지려 해서 마음을 다잡아가며 미움을 계속해왔다. 그러던 것이 수년 전부터 그럴 수밖에 없었지 않겠느냐는 이해로 돌아서면서 마음이 좀 편해지기는 했지만 완전한 용서는 되지 않았다. 세상이 야릇하게 변하고 북에 대한 시선이 너무 기막히게 바뀌는 동안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그래도 그 어른이 대한민국을 건국해주지 않았더라면 어찌 됐을까 하는데 생각이 미치면서 그 공로로 전쟁 중의 민심 수습을 위한 고육지책일 수밖에 없었던 그 밤의 방송은 이제 용서해 드려야 될 것 같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오늘 그 어른을 찾아뵙는 것은 내 마음의 앙금을 말끔히 씻어버리고 흔쾌하고 온전하게 그 어른을 용서해 드리기 위함이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누워계신 이승만 대통령 묘역에 다다르니, 만감이 교차한다. ‘건국 대통령 존경합니다’ 하는 문구로 방명을 했다. 그 안에 어린 소녀의 용서와 늙은이의 화해가 함께 엉켜 있다고 본다. 이제 비로소 내가 자유를 얻을 것 같다.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용서하지 못하고 계속 강팍하게 마음을 다잡아 왔던 70년의 족쇄가 스르르 풀리는 순간이다. 피해 다니던 아버지가 집에 숨어들어 온 것을 고발한사람을 오빠가 바로 용서해 주라고 9 · 28수복 직후 경찰에 오히려 탄원했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았다. 그 사람 벌 준다고 우리 아버지가 다시 돌아올 것도 아닌데 전쟁 중의 일로 사람 상하지 않겠다는 것이 오빠의 생각이었다. 오빠도 그 일로 한때 원망스러웠지만 워낙 아버지 같은 오빠라 감히 대들지도 못했다. 역시 우리 오빠는 훌륭한 사람이었고 아버지가 자랑스러워해도 부족함이 없는 그런 인품이 아닌가?
이승만 대통령 내외분께 참배하고 하늘을 우러르니 무심한 뭉게구름만 더덩실 떠 있다. 그래, 어차피 인생이 구름 같은 것을 무얼 그리 아웅다웅할 것 없지. ‘하나님, 저 오늘 그동안 이승만 대통령 미워한 것 다 용서해 드립니다. 건국 대통령 공로가 그보다 크신 것 같아서 입니다. 제 판단의 옳고 그름이야 제가 알 수 없지만 건국에 대한 감사와 6·25 초기의 대국민 민심수습 차원의 방송에 대해 다 용서해 드리겠습니다.’
하직인사를 하고 돌아서 내려오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동작동 너른 품이 감싸안아 주는 듯하다. 그래, 미래로 가자, 과거에 얽매어 종노릇하지 말고 넓고 먼 미래로 가자. 우리 후손들이 더 큰 세상에서 뜻을 펼 수 있는 밝은 미래로 가자. 현충천을 따라 걷는 숲길이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다.
첫댓글 『月刊文學』 635 / 2022년1월
잘 읽었습니다.
월간 문학 저도 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