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들레 씨를 날리다
엄영희
노란 꽃이 피어올랐다. 인도 한쪽 휑한 전봇대 밑에 자리 잡은 민들레다.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으로 덮인 삭막한 도시의 틈을 뚫고 어디로부터 어디에서 날아든 것일까. 무심히 지나칠 척박한 곳에 한 송이 민들레꽃이 있어 봄이 왔음을 실감한다.
어릴 적, 양지바른 담벼락에 붙어 앉아 친구 동무들과 민들레 홀씨를 불던 어린 시절 추억이 떠오른다. 아련하다. 바람을 거슬러 홀씨를 불다가 콧구멍과 입안으로 잔털이 넘어가 “켁켁”거리며 재채기를 해댔던 기억 말이다. 민들레는 천재의 영감靈感도, 이나 번득이는 지성도 가지지 못한 내가 어쭙잖게 글을 쓰고 있는 이력과 닮았다.
“이름 부른 사람, 내 따라가야 한다.”
“………….”
"연필과 지우개 준비하고 같이 간다. 알았제?"
쌍꺼풀이 두툼하고, 언제나 얼굴이 불콰하던 선생님이 등교하자마자 하신 말씀이다. 몇몇 친구 학우들과 함께 이름이 불렸던 나는 달랑 연필과 지우개를 들고 대책 없이 선생님을 따라 나섰다. 도착한 곳은 읍 소재지에 있는 학교였고, 우리학교 보다 규모가 크고, 분위기가 달랐다. 교통이 불편하던 때라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도착한 곳은 읍 소재지에 있는 큰 학교였다. 촌 학교 출신인 나는 주눅이 들어 얼떨떨했다. 여러 학교에서 온 학생들 틈에 끼여서 글을 썼다. 썼는데 글제가 뭔지도 다. 제목이 뭔지 내용이 뭐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난생처음 참석해 본 백일장이었다. 글짓기대회에 참석했던 것을 잊고 있을 잊어 갈 즈음, 얼굴에 웃음을 머금은 선생님께서 수상 소식을 전해 주었다. 내 별명을 부르며 제법이란 투로 하시는 칭찬 말씀이 싫지 않았다. 아침 조회 시간에 단상 앞에 앞으로 나가 상을 받았다. 평소 학교에서 받은 상과는 격이 다른, 크기도 크고 테두리에 용무늬가 새겨진 상이었다.
백일장 수상 이후 나를 향한 선생님의 대접이 달라졌던 것 같다. 목표치대로 성적이 나오지 않았을 때, 그 마이너스 점수만큼 매로 벌충하던 선생님으로부터 조금 덜 맞았다. 선생님의 물음에 고개만 푹 숙이고 있다가 한 마디 모기만한 소리로 하게 대답을 해도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으며 봐 주는 면이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난 후 색이 누렇게 바랜 글짓기 상장 하나로 퍼 올린 기억이다.
쓰기보다는 읽기에 집중하면서 살아온 시간이었다. 학교 공부가 그랬고, 나의 내면을 성장시켜 준 듯 문학도 마찬가지였다. 문학이 그랬다. 늦은 밤 읽고 싶었던 문학작품을 훑으며 보내는 시간들은 보낸 시간은 얼마나 흐뭇했던가. 어스름 창밖이 훤해질 때까지 소설 속 주인공과 배경에 푹 빠져 보낸 시간들은 지새운 날은 또 얼마나 행복했던가.
직장에서 쓰는 보고서나 계획서는 짜여 진 틀에 맞추어 쓰면 되었고, 문학소녀를 지향한 영향일까, 논문을 쓸 때는 글에 감성이 묻어나면 곤란하다고 지도교수에게 퇴짜를 맞았다.
글쓰기는 퇴직 후 할 일 중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버킷리스트였다. 도서관 글쓰기 수업에 등록을 했다. 개나리가 노란 웃음을 준비할 무렵, 길게는 10년 이상 수업에 참여했던 용기를 내어 경력이 쟁쟁한 수강생들 사이에서 틈에 끼었다. 어색하게 한 자리를 차지했다. 직장과는 다른 분위기, 분위기와는 또 다른, 편안한 수업 방식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 차츰 익숙해졌다. 어느 날, 점심을 함께 한 후 카페에서 '선생님은 전에도 글을 썼죠? 오랫동안 우리 팀에 남아 있을 사람으로 보여요.'라는 한 글동무의 말에 발목이 잡혔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흔히 말한다. 옷 가게를 하는 친구를 가까이 둘 때 옷을 많이 샀고, 사게 되고, 서점하는 친구를 가까이 둘 때는 책을 많이 구입했다고 하지 책에 눈길이 간다지 않던가.
'동무'는 마법 같은 단어다. 왠지 사람을 조금 순수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고, 가까운 한 편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사회주의 혁명 이후로 금기어처럼 여겨져 왔던 이 동무란 단어를 요즘 즐겨 되뇐다. 전에 없었던 글동무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글동무들의 수고로 카페를 문턱이 닳도록 드나든다. 은은한 커피 향은 없지만 말이 되지 않는 것을 걸러 주는 거름종이, 완급을 조절하여 주는 드리퍼, 서로를 따뜻하게 데우는 포트가 될 것이다.
같은 곳을 지향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서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고받는 선순환이 되기도 하고, 한다. 반짝이는 글솜씨와 합평 시의 때의 생생한 반응을 확인하는 것은 나를 긴장하게 한다. 무엇보다 헐렁한 백수에게 팽팽한 고무줄 같은 루틴(routine)이 생겨서 좋다.
나에게는 고쳐지지 않는 병이 한 가지 있다. 마감 시간에 쫓기는 기자도 아닌데 어떤 압박이 없으면 글이 써지지 않는다. 시험지를 막 받아들기 직전의 시간처럼 긴장을 최고치로 올려야 전두엽이 활동을 개시할 자극을 받는다. 또한 “미래에 수필집 하나는 한 권은 너끈할 것이다.”는 글동무의 응원은 내 손가락을 근질거리게 한다.
민들레가 꽃을 피우고 있다. 머잖아 씨를 맺고 홀씨를 날려댈 것이다. 어릴 적 우연히 참석 참가했던 글짓기 대회, 가 문학의 씨를 뿌렸다. 도서관 글쓰기 수업에 등록한 일 하여 싹을 틔웠고, 카페에서 글동무를 만나는 일은 민들레 씨를 날리는 일이다. 만나 함께 홀씨를 날린다. 어디에서 어떻게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울지 알 수 없을 뿐.(2022년 4월/ 12.8매)
○ 떠오른다 → 진부한 표현(나도 나도 흔히 쓰는 듯) → 아련하다
○ 저도 엄 샘처럼 백일장에 끌려 나간 적이 있어 공감합니다.
먹으려고 사는 건 아닌데
이형국
나에게는 풀리지 않는 명제가 있다.
‘내가 살려고 먹는가, 먹으려고 사는가?.’ 이다. ↳끼니때가 되면, 되어 수저를 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주저주저하면서 가끔 나를 괴롭히는 사유이다. 명제다. 어느 것도 정답일 수도 있고, 또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 각자의 판단에 따를 뿐이다. 사람이 다르니, 판단도 다를 것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나는 키는 작은 편이지만, 몸무게는 제법 나간다. 그런데 어찌 된 셈인지, 먹는 양은 다른 성인들의 평균치보다 적은 게 사실이다. 다른 이들은 나를 보고, “위가 그렇게 작아서야 어쩌나, 사람이 많이 먹어야 힘을 쓰지.”라고 한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인다. 내가 일반인과 비교하면 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힘이 부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팔 힘이 약하다. 왜 그런지 나도 모른다. 학교 다닐 때는 턱걸이도 제법 잘 했는데, 성인이 되고 나서 저절로 그리된 것 같다. 뱃살 때문에 그럴 거로 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교사생활이나, 재무 쪽 일을 했기에 무거운 물건을 접할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일 거다. 게다가 기초 생체운동조차 게을리하니, 그럴 수밖에. 근력이란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하는 게 기능이 아닌가.
나는 살아오면서 단 한 번이라도 많이 먹는다고는 나무람이나 빈정거림을 받아본 적이 없다. 오히려 너무 먹지 않는다고, 그러다 사내구실 어떡할 거냐고 핀잔받은 적은 종종 있었다. 한 번은 동무 집에 가서 저녁밥을 먹게 됐다. 고2 때였는데, 동무 집에서 공부하다가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집안일을 돌보는 여자애가 밥을 먹으러 오라고 했다. 동무 어머니가 손수 차려주는 밥상 앞에 앉아, 밥을 깨작거리고 있었더니, 갑자기 머리 위에서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야야, 니는 밥을 우째 글케 깨작거리노? 그카마 복 나간다. 머시마 자식이 그리 안 묵으이 고래 짝제! 우리 집에선 밥그릇 다 안 비우마 못 나간데이.” 내 우리 엄마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동무 어머니는 가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황급히 밥을 퍼넣었다. 밥이, 반찬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때의 그 호통으로 인해, 그 경을 친 이후로는 남의 집이나, 또는 단체로 식사하는 자리에서는 빨리 먹는 게 버릇이 되었으며, 다. 밥그릇을 남김없이 다 비우고서야 수저를 내려놓는 습관이 들어버렸다. 보는 이로 하여금 참 맛있게 먹는다는 느낌이 들 것이고, 그렇게 먹어주는 사람이 복스럽게 보이지 않겠는가!. 그 사람이 그 집의 안주인이거나 식당의 주인이라면, 더욱 좋아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 배속의 뱃속 비축량이 증가한 것은 건 아니다. 물론 조금은 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실은 밥을 먹기 전에 꼭 지키는 규칙이 있다. 먼저, 밥을 푸기 전이나. 면을 담기 전에 반드시 하는 소리가 있다. “좀 적게 주세요.” 한다. 그런데,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은 데다 덜어둘 음식도 아니면 억지로라도 먹는다. 체면치레 빈말인 줄 알고 많이 줄 때는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먹는다. 그 때문에 소화제를 먹거나, 소화하느라 가 되지 않아 한동안 애를 먹는다.
그다음에는, 될 수 있는 한 밥그릇 비우기에 충실하기 위해 반찬은 적게 먹는다. 습관이 일상화되어 있다. 예를 들어 몇몇이 짜장면과 탕수육을 시켰다 한다면, 나는 을 땐 짜장면 다 먹을 때까지 탕수육에 젓가락이 가지 않는다. 괜히 탕수육에 젓가락 넣었다가는 몇 점을 집었다간 짜장면을 다 먹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적게 달라고 요청할 상황이 아니면 아예 밥그릇 뚜껑이나 곁에 있는 빈 그릇에 먹을 만큼 덜고 난 후, 먹는다. 여하튼 외부에 나가서 밥 먹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신경을 쓰고 있다.
집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다. 나도 모르게 걸신들린 듯 먹어 치우고, 재빨리 수저와 그릇을 거두어 싱크대에 집어넣는다. 아내는 그러지 말라고 충고한다. 내가 잘 체하는 이유가 빨리 먹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누가 뒤따라 오는 것도 아닌데, 먹는 행동이 채신머리없어 보인다.”며 꼬집어댄다.
나이가 들면서 위장이 약해졌는지, 요즈음은 자주 체해서 약을 먹고 하는 짓이 반복된다. 밥상을 받으면, ‘오늘은 천천히 먹자.’라면서 수저를 들지만 단 몇 숟가락 만에 잊어버린다. 그러다가 ‘아차!’하고 속도를 낮추고, 다가 곧 다시 빨라지고, 갈팡질팡이다. 한다.
특이한 것은, 적게 먹지만 주전부리가는 심한 편이다. 먹을 것을 보면 참지 못한다는 거다. 밥상이 곧 나오는데, 눈에 띄는 무엇이 있으면, “한 조각만!” 하다가 아내에게 핀잔을 많이 듣는다. 물론 외부에서나 손님 앞에선 내숭 떠느라 그러지를 못한다.
하지만, 막상 끼니때가 되면, 아내는 딱히 먹을 게 없다 하는 며 투정하는 나를 붙들고 뭘 해 줄까 하며 달래기도 하고 신경질 내기도 한다.
지금 나는 즉석 볶음밥을 먹으면서 이 글을 쓴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먹으려고 사는 건가, 아니면 살려고 먹는 건가! 건지 살려고 먹는 건지 원. (12.3매)
○ 쉼표를 줄이시면 더 좋은 글이 되겠습니다.
대녀를 보내며
엘리
며칠 전, 수요일 아침의 일이다. 날씨가 화창해서 봄나들이라도 가야만 할 것 같은 화창한 날이었다. 날씨였다. 한잔의 커피와 가벼운 클래식 음악으로 느긋하게 마음의 여유를 누리고 있었다. '띵똥' 문자가 들어온다. 위에 뜨는 글씨를 보니 대녀 이름이 보이고 '부고'라는 글씨도 보인다. "무슨 소리지?" 싶어 정식으로 터치하여 문자를 보니 대녀가 하느님 품으로 갔단다. ‘대녀’란 가톨릭에서 영세를 받을 때 종교적인 후견을 약속한 여자를 어머니의 입장에서 대녀라고 부른다. 부르는 호칭이다. 신앙으로 맺어진 모녀 사이라고 보면 된다.
아직 50대로 매사에 활력이 넘치는 대녀가 갔다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문자에 쓰인 번호로 전화를 했다. 목소리만 듣고 아들이거니 싶어서 대모라고 밝히고 어쩌다가? 했더니 남편이란다. 목이 메어 말을 못 잇는다. 잇지 못한다. 나도 목이 메어 가슴이 탁 막혀 말을 못 하고 서로 울기만 했다. 대녀의 남편이 아내를 계속 못 지켜서 죄송하다고 한다. 나한테 죄송할 게 무에 있겠노. 배우자를 잃은 슬픔이에 하늘이 무너진 듯할 것인데., 나한테 죄송할 게 무에 있겠노. 뭐 있겠나. 평소에 혈압만 조금 높을 뿐이었는데 말 한마디 못 남기고 급작스레 떠났다고 한다. 코로나 시국이니 장례식장에는 오지 말라고 했다. 나도 ‘부디 잘 보내 주시라.’ 고 하고는 전화를 끊은 뒤 한참 울었다. '오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는 없다' 더니 인생이 참 허무하네. 하루 온 종일 가슴이 꽉 막혀 답답한 게 우울하다.
그녀는 노래도 잘하고 색소폰도 잘 부는 만능 재주꾼인 멋진 여자였다. 이었다. 예술 공연단 단장으로 왕성한 연예 활동을 하는 지역 가수였다. 봉사활동도 많이 해서 구청장 감사패를 받고 좋아하더니 이렇게 빨리 갈 줄이야. 그녀는 나의 몇 명 안 되는 대녀 중 가장 늦게 맺은 인연이다. 늦게 맺은 뒤늦은 인연이지만 가장 많이 만나었는데. 만났다. 최근에도 통화하면서 하길 확진자 수가 정점을 찍고, 오미크론이 숙지면 만나기로 했다. 만날 날을 미룬 게 이렇게 후회스러울 줄이야.
대녀는 평광에서 과수원을 한다. 하고 살았다. 몇 차례나 사과를 보내 줘서 고맙게 잘 먹었다. 얼마 전에 보내 준 사과가 아직 몇 개 남았는데, 보내 준 사람은 돌아오지 못할 먼 길을 떠났구나.
지금쯤 발인이 끝났겠거니 싶은 생각에 오늘은 일이 손에 잡히질 않는다. 날씨가 좋아서 더 처연한 마음이 든다. 환하게 웃는 얼굴이 명품인 대녀가 너무 보고 싶다. 내가 이럴진대 가족은 어떨까?
세레나 잘 가거래이. 가족들 걱정일랑 말고 편하게 눈 감아. 그래도 다행히 자녀들은 다 결혼시켰잖아, 세례레나가 이승에서 할 일은 다 한 거야. 짧다면 짧은 생이었지만 알차게 잘 살았어.
"대모님." 하고 활기차게 부르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올해 봄은 떨어진 목련 잎이 더 아프게 느껴지는 아쉽고 구슬픈 봄이다.
봄 들녘에서
권자이
개수대에 서면 창문 너머 파스텔 빛깔 영상이 나를 끌어당긴다. 아파트 19층에서 내려다보는 확 트인 들녘엔 잘 어우러진 자연이 시시때때로 다른 빛깔을 뿜어낸다.
어느새 내 발길은 휘적휘적 들길을 걷고 있다. 내가 심은 보리밭도 이 들녘을 수놓는데 한몫하는 것 같아 뿌듯하다. 지난겨울 수분이라고는 겨우내 비 한 방울도 얻어먹지 못해 누렇게 말라 있던 보리밭이 아니던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농로 길인데도 차들이 수없이 다니면서 바퀴가 세 번씩이나 빠져들어 수난을 당했다. 이런 참상을 겪었으니 올해 보리농사는 접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봄비가 한번 내린 뒤 어느 날 부엌 창문으로 내려다보니 분명 형편없던 내 밭인데 푸른빛을 띠는 것이 아닌가. 하도 반가워서 밭으로 갔더니 차바퀴에 진 짓눌려서 완전히 뭉개져 있던 싹을 제외하고는 말고는 다 깨어나 있었다. 끈질긴 생명력이다. 고맙고 대견했다.
그 후로 두어 번 더 와준 비로 파스텔 빛깔의 고운 들판에, 으로 변하였다. 때론 짙푸른 녹색 물결을 만들며 조연이지만 제 몫을 톡톡히 해 조화를 이룬다. 만들어 멋지다. 멀리서는 보이지 않아도 보리밭 둘레에는 보랏빛 앙증맞은 제비꽃이 나보란 듯이 피어있다. 노란 민들레가 제비꽃과 잘 어울려 조화를 이룬다. 작년에는 둘레에 해바라기를 심었는데 보리를 수확하고 한 뒤 꽃이 피어서 인연이 맞지 않았다. 농업이 생업이거나, 옥수수밥이라도 배불리 먹을 수만 있었으면 탈북하지 않았다는, 탈북민이 들으면 배부른 소리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농사는 물론 농사는 수확하기 위함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눈으로 보는 즐거움도 비례한다고 한몫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식물의 색깔이나 크기, 둘레에 어떤 작물이 있는지를 항상 생각해서 심는다. 그러니 정성을 들이니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텃밭이 꽃밭 같다고 한다.
지난날 몇 차례 이맘때 지중해를 끼고 있는 유럽 여러 나라들을 여행했을 때다. 밀밭이 끝없이 펼쳐진 사이로 붉은 꽃 양귀비(현지에선 불 양귀비라고 함)가 마치 푸른 양탄자에 수를 놓은 것 같아 감탄했었다. 바람이라도 불 때면 고호의 그림 한 폭을 연상케도 했다. 이런 밀밭이 끝없이 펼쳐지다가 또 어느 곳을 지나면 유채꽃이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이런 시기가 조금 지나서 지중해 가까운 곳으로 내려가면 가보면 해바라기가 또 끝자락이 어딘지를 모를 만큼 끝없이 이어진다. 물론 단순히 보기만 좋아라고 심은 것은 아닐 것이다. 유채꽃은 공업용 기름으로 쓰고 해바라기 씨는 식용기름을 짜거나 견과류로 먹는다.
생 떽쥐베리는 그의 저서 “‘인간의 대지’”에서 “제비꽃이 제비꽃으로 피면 그만이지 제비꽃이 피어서 봄의 들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는 제비꽃이 알 바가 아니라고 했다.”
내 몫의 삶에 무심히 최선을 다했으면 그만이지 사족蛇足을 달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그렇다, 아침저녁으로 걷는 산책길에 부딪치고 스치는 자연을 대할 때면 매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늘 이리저리 자로 재듯 계산하고 유불리로 집착하지 않았던가.
내 둘레에 딴엔 조화를 이룬다고 이루며 산다고 생각하지만 광활한 세상의 눈으로 보면 소꿉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이웃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눈 앞에 펼쳐진 자연과도 얼마나 조화로운 삶을 살았든가? 거름도 주지 않았는데 한 뼘이나 자란 초벌부추 한 옴큼을 베서 휘적휘적 돌아오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한 움큼 부추를 베서 돌아오는 종종걸음이 가볍지 않다.
속물인가 복수 아쉬움인가
이지연
1)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시댁으로 합가한 지 몇 년 되었을 때였다. 식사를 하며 중에 아버님께서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과수원, 문중으로 넘겼다. 심장이야 상하지만 자꾸 넘겨달라고 해서 넘겨줬다.”
2)이 무슨 날벼락인가. 과수원은 봄부터 가을까지 온갖 과일이 나오는 수천 평이나 되는 아버님 땅이 아닌가. 내가 알기로는 그랬다. 남편이 맏이이기에 시간이 지나면 우리 게 소유가 된다는 것에 조금도 의심을 갖지 않았었다. 친정 식구들도 그리 알고 있었다.
3)결혼 전에 남편이 과수원 소유권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지만, 소유권을 가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도 없는 건 명백하다. (누구에게? 남편 or 문중)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날은 내가 몰랐음을 내 의견을 언급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평소 과묵하고 신중한 아버님이 오죽이나 심사숙고 하셨을까. 누구도 그 자리에서 아버님께 토를 달지 못했다.
4)시댁 근처 야트막한 언덕배기에는 유실수가 수백 그루 있다. 본디 낮은 민둥산이었던 곳을 개간하여 과수원으로 만든 것이다. 남편이 태어나기 전부터 감나무가 있었지만, 그 양은 그루 수는 많지 않았다고 한다. 과수원 만들기의 시작은 아버님이 하셨지만, 어도 농장 규모를 늘리는데 더 많이 기여한 이가 자신이란 이야기를 남편으로부터 수없이 들었다. 오솔길을 포크레인 포클레인을 장비를 동원하여 길을 넓혀 자동차가 오르내릴 수 있게 한 것도 자신이라고 했다. 남편은 자신의 개척정신을 여러 번 자랑했지만, 그 소유권에 대해서는 정녕코 말한 바가 없었다.
5)남편은 부모님께 아버님께 속내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아버지가 소유권을 포기한 것에 속상해했다. 자신의 공이 결코 적지 않은 과수원이기에 서운함이 컸으리라. 거기에다 내가 어떻게 어찌 진실 공방을 하겠는가. 오래전에 은근슬쩍 문중 땅을 개인 소유로 이전한 사람이 있음을 아는 남편인지라 속상함이 더 컸으리라.
6)문중에는 여러 곳에 토지가 있다. 종손이었던 아버님은 문중 땅 곳곳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과수원도 그 중 한 곳이었다. 예전에 영향력 있는 집안 어른이 과수원은 ‘종손 땅’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문중에서도 묵시적으로 인정을 하는 분위기였지만, 였다. 그러나 그 문중 어른이 돌아가시고 세상 뜨시고 공시지가도 해마다 올라가니 아까웠던 아까운 생각이 들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7)남편은 ‘만약에’를 여러 해 되씹었다. 적당한 때가 되면 과수원을 되찾겠다는 말도 간간히이 했다. 아들이 진로를 변경하여 법조인이 되겠다고 했을 때 남편은 또다시 희망을 품고 아들에게 첫 사건을 맡기겠다는 말을 했다. 남편의 말에 맞장구를 친 적도 있지만 거기에 미련을 갖지는 않는다. 억울해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서류 정리가 된 마당에 더 이상 머리 아프고 싶지 않다.
8)문중으로 명의를 변경해 주었지만 매매한 것은 아니기에 토지 사용에 대한 권리는 여전히 우리가 가지고 있다. 수백 그루의 나무는 순수한 우리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님이 떠나시고 작고하시고 십여 년 간 과수원을 도지 놓아 매년 용돈벌이를 하고 있다. 더불어 몇 가지의 과일 맛도 볼 수 있다.
9)가정을 돌보기보다 문중 일에 더 신경을 쓰신 아버지. 아버님이셨다. 그 아버지가 집안일은 뒤로 하고 문중 일에 매달려 욕심 없이 일만 하셨는데. 하신 분이기도 했다. 그런 아버지가 선비다운 아버님이 배신을 당한 걸 곁에서 지켜본 남편은 그 일에 관련한 종친들에게 많이 매우 서운해 했다.
10)얼마 전부터 문중에서 개인 명의로 된 문중 땅을 법인으로 변경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조부님 명의 땅을 특별조치법으로 문중으로 변경하는 작업을 할 모양이다. 욕심 없이 넘겨주느냐, 이의 제기를 하느냐의 기로에 섰다. 어디에 있는지 관심조차 없던 땅인데 몇 평이나 되는지, 공시지가가 얼마인지 새삼스럽게 궁금하다. 이제 영영 사라진다 생각하니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건 재물 앞에서 속물이 된 것인가, 빼앗긴 것에 대한 복수인가. 들녘에 깃들 봄이 아쉬워선가.
○ 복수 → 섬찟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 문학적인 표현
첫 단추
배정행
A는 과거에 수면제 중독으로 환각 증상을 겪은 적이 있다. 이러한 증상이 나타나는 사람은 자신이 본 것이 환각이라는 것을 자각할 수 있어야 병이 낫는다고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환자들이 가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A도 그랬다. 아무도 듣지 못했는데 지기만 듣긴다고 들린다고 하고 하거나 상대방은 가만히 있는데 자꾸 자기를 위협한다고 생각하는데 한다. 아무리 아니라고 얘기해 줘도 소용이 없다. 본인에게는 분명히 들리고 보이니까.
A는 초로의 나이인데도 여전히 매력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별로 꾸미지 않아도 희고 깨끗한 피부와 호리호리한 몸매 덕에 길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곧잘 붙잡곤 한다. 보기 드문 미모의 여인이지만 아직 미혼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들어간 직장에서 만나 사랑하게 된 남자가 있었다. 매일(,) 같은 업무를 보고 외근 갈 때도 한 조가 되어 나가다 보니 정이 들었었나 보다. 문제는 그 남자가 유부남이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워낙 의지하고 도움을 받다보니 마음이 끌리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결국 그의 부인이 알게 되었고 그는 남자는 가정을 지키는 쪽으로 마음을 정해버렸다고 한다.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고 그녀는 무너져버린 자존심과 배신감 때문에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결국 직장을 그만두고 해외로 나가버렸다.
그후 해외에서 오랜 세월 힘든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안정적인 전문직으로 편안한 생활을 하기도 했다. 적어도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랬다. 그러나 어디 사랑이 그렇게 쉽게 잊혀지는 것인가. 지인들과 같이 갔던 식당에서 A는 우연히 그 사람을 보게 되었다.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었던 그 남자였지만 그는 그녀를 못 본 듯했고 그녀도 선뜻 아는 체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녀의 가슴은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예전 직장 동료에게 연락해서 그의 근황을 묻고 싶었지만 참았다. 그렇게 마음은 늘 그에게로 향한 채 세월은 또 무심하게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사람이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그 증세가 나타나게 된 것은 그 무렵 부터였다. 잠이 오지 않아 수면제에 의존하게 되었고 결국 수면제 중독에 걸리게 되었다. 중독에 걸리면 중독이 되면 환각 증상까지 생긴다는 그 약을 먹어야 잠이 들 수 있었다. 그 때 그를 우연히 보게 된 후 연락 한 번 해보지 못했던 게 그렇게 가슴 깊이 후회가 되었다. 이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린 그를 향한 그리움까지 그녀를 힘들게 했다..
사랑의 첫단추를 잘못 끼운 탓에 그녀는 그렇게 청춘을 허비하고 말았다.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 제대로 된 직장을 다닐 수가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겨우 밥벌이를 하다가 그것마저 적응하지 못하고 부모에게 의지하게 되었다. 그녀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부모의 불안은 극에 달했다. 급기야 가족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게 되었고 그녀는 정신병원에 보내지게 되었다. 환각 때문에 부모도 못 알아보고 몹쓸 짓을 하는 사건이 매스콤에서 가끔 보도되곤 했기 때문이었다.
앰뷸런스가 왔고 병원 직원이 죄수를 연행하듯 그녀를 차에 태웠다. 시외에 있는 정신 병원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굴욕적인 모습으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도주를 우려하여 양쪽 팔이 꽉 붙잡힌 채로 안전하게 병실로 인도되었다. 그러데 그 순간 문제가 발생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모여 있던 남자 간호사 중에서 그녀를 알아 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언젠가 우연히 미팅을 하게 된 남자였는데 그 때 그는 자신의 직업을 의사라고 소개했었다. 그녀는 순간 창피한 것도 잊고 자기가 속았다는 사실에만 민감하게 반응했다.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로 둘이 나눈 대화는 딱 두 마디였다.
"의사라더니!"
"정신병자였어?"
무승부로 끝난 그 다툼 뒤 그녀가 받은 충격은 엄청났다. 그러나 그 때부터 그녀는 자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강한 자각을 하게 되었다. 환각 증세도 사라졌다. 물론 약물 치료와 정신과 상담을 병행해 도움이 됐겠지만, 무엇보다도 큰 전환점이 된 것은 그 남자와의 환장할 맞닥뜨림 덕분이었다. 병실에서 다른 환자들과의 유대 관계도 좋았다. 그녀는 아름다운 미소를 되찾게 되었고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퇴원할 수 있었다.
그 후로 재발 없이 몇 년이 흘렀다. 전문직은 다시 못 찾게 되었지만, 정상적인 생활을 하면서 생업에 필요한 자격증 준비를 하고 있다. 부모님과 다른 가족들도 전 보다 더 관심을 가져주며 비난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가족들도 알게 된 것이다. 정신적으로 비정상이 된 사람은 관심과 사랑만이 약이라는 것을. 가족들도 알게 된 것이다.
비록 첫단추를 잘못 끼워 그녀의 인생은 험난했지만 이제라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는 남자를 만난다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사람으로 인하여 잊혀진다.
○ 그녀 → A 통일
찌거리
이광조
빈손으로 돌아서야 했다. 우체국 앞에서 한 시간 반이나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내 앞에 10여명 남기고 준비된 마스크가 동이 나 버렸다. 나처럼 사지 못하고 돌아가는 사람이 7,80명은 되어 보였다. 아내에게 전화를 했더니 꾸물댈 때 알아봤다며 직격탄이 날아왔다. 사태가 심상치 않은 것이 몸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며칠 사이에 제도가 바뀌어 농협에서도 마스크를 살 수 있게 되었다. 어디에 줄을 서는 게 유리할까 머리를 굴리다가 농협을 택했다. 사거리를 중심에 두고 대각선으로 건너다보이는 길 건너 우체국에 줄을 선 사람들이 우리보다 훨씬 더 빨리 사가는 걸 보고 그 전 주에 느꼈던 패배감을 한 번 더 느꼈다. 한 우물을 팔 걸 싶어 후회하였다. 급변하는 환경에 제때 적응할 만큼 아직 촉이 갖춰지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못하는 촉 무딘 나 자신을 자책했다.
찬바람을 맞으며 한 시간 이상 떨고 나서 마스크 두 장 구하고 나니 전혀 딴 세계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북쪽한처럼 배급 제도가 생겼고, 새치기를 한다고 고함이 오가더니 오간다. 샀으면서도 한 번 더 줄을 섰다가 들통 나서 쫓겨나는 원색적인 장면이 그대로 펼쳐지고 있으니 말이다. 펼쳐지기도 하니 말이다.
저녁에 집에 들어가니 집에 들어서니 일반 마스크 한 뭉치가 놓여있었다. 서울에 사는 조카가 보낸 것이었다. 대구가 위험하다는 보도를 보고, 마스크 공장 운영하는 지인에게서 부탁해서 구했단다. 대구에 사는 고모들한테도 보내겠다며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평소 무덤덤하게 지냈지만 위기가 닥치자 큰아버지와 고모들을 챙기는 조카 때문에 핏줄의 온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마스크 공장들이 늘어나고 정부가 개입하여 다양한 공급정책을 시도하더니 마침내 약국에서 판매하게 되었다. 줄 서서 기다리는 대신에 정해진 요일에 사러 가면 구할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동네약국에 들려 마스크를 요청했더니, 때마침 몇 장 여유가 있다고 하면서 가족주민번호를 모두 받아 적은 다음 식구 수대로 다 챙겨주었다. 약국 주인과 사제 간이라는 걸 알고 있는 판매원의 조용한 배려에 든든한 빽을 찾은 것처럼 안심이 됐다.
마스크 착용 버릇을 기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차를 몰고 가는데 내가 마스크를 집에 두고 온 것을 알게 되었다. 당황하여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로변에 차를 세웠다. 아내가 약국에 들어가 평소 가격의 몇 갑절을 더 주고 일반 마스크를 사오는 것으로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불필요한 돈을 쓰면서도 집으로 되돌아가지 않고 문제를 해결하게 된 것을 큰 다행으로 여겼으니 이미 마스크에게 멱살을 잡힌 셈이다.
외손자 손을 잡고 바깥 구경을 하러 나가려는데, 아이가 언짢은 표정을 지으면서 “마!” “마!”라고 했다. 무슨 소린지 몰라서 어리둥절해 하자 마스크를 씌워 달라는 소리라고 제 어미가 해석을 해 주었다. 현관입구에 걸어둔 앙증맞은 마스크를 씌워주면서 어린 것을 데리고 외출한다고 들떴던 기분이 착 가라앉는 걸 느꼈다. 겨우 첫돌을 지난 천진난만한 아이에게 마스크를 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으로 각인된 사실이 서글펐다. 어린 것이 이 얄궂은 세월을 어린 것이 어떻게 살아나갈까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면서 가라앉은 기분이 좀처럼 되살아나지 못했다.
우리가 마스크 때문에 이렇게 벌벌 떨며 지낼 것을 상상이나 했었던가. 수술하는 의료진이나 위험물 취급하는 사람들이 썼던 것을 전 세계 사람들이 다 쓰고 있으니 너무 갑작스런 변화다.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도구였는데, 이제는 자기 제 몸에 지닌 나쁜 것을 타인에게 전파하지 않기 위해서도 써야하는 책임이 덧붙었다.
어느새 마스크 착용은 하나의 에티켓이 되었으며,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음을 나타내는 최소한의 척도가 된 것이다. 만약의 경우를 위해서 한두 장 더 지니게 되고, 잊고 와서 당황하는 이웃을 위해 두세 장씩 여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보인다. 기왕 착용하는 김에 좀 더 예쁘게 보이도록 패션이 가미되고, 얼굴에 더 잘 맞추어 빈틈이 없도록 하려고 잘 맞춰지게 철심이 들어가 있다. 버릴 때는 끈을 잘라서 새의 발목에 걸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폐기방법 캠페인까지 생겼다.
두 눈과 이마만 드러내는, 마스크를 착용한 외모가 훨씬 더 예뻐 보인다고 해서 ‘마스크 미인’이라는 용어가 생겨나더니, 났다. 마스크를 착용한 덕분에 감기환자가 대폭 줄어서 이비인후과에 비상이 걸렸다는 소식도 있다. 이전 같으면 표정관리에 신경을 써야하는 상황인데도 태연할 수 있어서 좋지만, 좋다. 입술을 걷어 올리고 잇빨을 드러내면 됐던 것을 수식어를 몇 마디 덧붙여야 호감이 겨우 전달되는 불편도 생겼다.
소의 행동을를 통제하는 것으로는 수단으로 코뚜레 말고도 하나 더 있다. 곡식이나 채소가 있는 전답에서 밭에서 소를 부릴 때 소 주둥이에 씌우는 ‘찌거리’¹ 가 그것이다. 일단 씌워지면 먹을 것을 눈앞에 두고도 침만 삼켜야 하니 제법 잔인한 형벌이다. 욕망의 한쪽 구석을 식욕을 억누르면서 밭을 갈고 짐을 나르게 하니, 입을 틀어막는 재갈 물림에 못지않은 억압수단인 셈이다.
코로나라는 바이러스가 세계적으로 대유행을 한 이 시대를 아득한 훗날 역사가들은 어떻게 규정할까. 이 그 당시 모든 인간이 입에 걸치고 다녔던 이상한 천 조각을 그들은 또 어떻게 어찌 해석할까. 과학과 기술을 믿고 천방지축 날뛰던 그 시대 인간들에게 “더 이상은 는 안 되겠다. 너희들 찌거리 쓰고 근신 좀 하자.”라며 대자연이 한 방 먹인 걸로 풀이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입을 봉하고 지낸 지 3년째다. 머잖아 마스크 착용지침이 해제된다는 소문도 들려온다. 대안이 없으면서도 짜증난 대중의 비위를 맞추려는 당국의 시도마저 안쓰럽다.
봄꽃이 다 지기 전에 얼굴을 드러내고 활짝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대자연 어머니의 눈밖에 나기 전에는 우리 또한 봄꽃이었으니.
주1 ‘찌걸이’는 소의 입마개를 뜻하는 부리망에 대한 경상도 방언임. (22년 4월 11일. 15매)
첫댓글 공문서 다듬듯 수정해 본 글입니다.
조금이나마 도움 되신다면 좋겠네요. ^^
이렇게나 수고 많이 하신걸 언제 보답하죠
일손 딸릴 때 수성에세이팀 부르세요
가서 마늘 쫑이라도 뽑는거 거들께요^^
수고 많이 하셨네요. 결석자도 합평해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마늘쫑은 저도 잘 뽑아요~ㅎ
김상영 선생님, 봉사라 생각하시고 매번 이렇게 애써 주시니 감사합니다.
덕택에 우리 수성에세이 선생님들이 날로 발전합니다.^^
선생님들께서 두루 격려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글에 너무 치중하지 마시고, 일상을 즐기십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