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5월 10일 금요기도회 설교)
성경 : 에베소서5:15-21(구약 1020)
- 영성 회복의 신앙 / 양창삼
요사이 ‘유산소 운동’이 각광을 받고 있다. 이 운동은 산소를 충분히 섭취하면서 하는 운동이다. 심폐 지구력을 기르고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하는 조깅, 에어로빅, 수영, 자전거 타기, 등산 등이 이에 속한다. 땀이 날 정도로 운동을 한 후 샤워를 하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우리의 영적 건강을 촉진 시키는 유산소 운동은 무엇일까? 그것은 성령 충만한 봉사, 섬김의 봉사이다. 성령 충만 하면 섬김의 태도가 달라지고 영적으로 건강해지며 삶에 활력이 넘치기 때문이다. 남을 섬기며 봉사하는 사람은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다. 나는 갖지 못한다 하더라도 남이 갖는 것을 더 기뻐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바로 이런 인간이 될 것을 강조하신다.
베블리 라헤이가 쓴 「성령 충만한 여인」에서 여인은 부엌일을 하면서 이렇게 기도한다. “모든 냄비와 그릇과 부엌 물건들의 주님, 식사 준비를 하고 설거지를 함으로써 성도가 되게 해주옵소서. 당신께 드리는 봉사를 받아주소서. 당신께 이 일을 해드리나이다.”
단순한 부엌일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주님을 생각하고, 섬기며, 봉사하는 것이다. 걸레를 들면서 짜증을 낼 것이 아니라 ‘먼지 쌓이고 더럽고 어지러운 곳을 깨끗하게 해주는 걸레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겠다.’ 라고 생각하고,
걸레를 빨면서 “이 더러운 걸레가 하얗게 되듯이 나의 마음도 성령으로 정결케 하옵소서” 하고 기도할 수 있다. 작은 섬김을 통해 영적으로 거듭날 수 있을 만큼 우리의 영성은 민감해야 한다.
옛날에 시계가 귀하던 시절에는 닭이 시계 자명종 역할을 했습니다. 아침에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집안에 새벽에 울어주는 닭이 꼭 필요했습니다.
어느 집에 새벽에 울어주는 닭이 없어서 장터에 나가서 잘 우는 닭 한 마리를 사기로 하고 닭 장사에게 잘 우는 장 닭 한 마리 달라고 해서 사왔습니다. 그리고 닭이 울기를 기다렸는데 해가 중천에 뜰 때 까지 닭이 울지를 안는 것입니다.
닭을 사 오신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닭 우는 소리를 들었느냐고 물었더니 못 들었다고 하고 아들 내외와 손주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아무도 닭 우는 못 들었다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화가 나서 닭을 들고 닭 장사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화를 내면서 아니 잘 우는 닭을 달라고 했더니 울지도 않는 닭을 팔아먹었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닭 장사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닭 모이는 많이 줬습니까?’ 그러자 할아버지는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암탉이 집에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역시 ‘그렇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닭 장사는 ‘그럼 닭 우리(집)는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역시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닭 장사가 ‘그럼 닭이 뭐가 아쉬워서 울겠습니까? 먹을 많이 주지, 마누라 있지, 포근한 보금자리 있지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뭐 때문에 울겠습니까?’하고 말하더랍니다.
한국교회의 기도가 줄어들었습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도 교회에서 밤새워 기도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었는데 통행금지도 없는 교회에 와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의 성도의 수도 줄어들고 부흥회를 해도 모이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새벽기도나 철야 기도를 해도 모이는 사람의 숫자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30년 전만 해도 여의도 광장에서 기도회를 하면 수 십 만 명의 성도들이 모여서 기도했지만 지금은 연합 성회를 열어도 사람들이 별로 모이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의 모습이 먹을 것 풍부하고 좋은 집 있고 행복한 가정이 있으므로 부족한 것이 없어 울지 않는 닭과 같지는 않은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봉독한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성도들에게 언제나 필요한 것은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이고 언제나 성령 충만한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고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어야 하는데
1. 주의 뜻을 이해해야 합니다.
15-17절
5: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 이 시대의 성도들에게 주의 뜻을 이해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이해한다는 것은
첫째로 어떻게 행할지를 아는 것입니다. 심복이란 말이 있습니다. 유명한 정치인이나 기업의 총수 같은 사람들 곁에서 도와주는 비서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인데 심복이 되려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눈빛만 봐도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눈빛만 봐도 아는 사람이 심복입니다.
그리고 심복의 두 번째 조건은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즉 그 뜻대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고도 그 사람이 원하는대로 하지 않는 사람을 심복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눈빛만 봐도 그 생각을 알고 알아서 그 뜻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심복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이라고 불렀을 때는 이미 그분의 종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왕이면 심복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눈빛만 봐도 그 뜻을 알고 그분이 원하시는 일을 행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라고 찬송을 부르면서 내 뜻대로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바울의 일대기를 보면 그는 언제나 주님 뜻대로 살았습니다. 그가 아시아로 가기를 원했지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을 보여주시매 그 뜻대로 마게도냐 즉 유럽으로 갔습니다.
바울의 사역을 보면 공통적인 것이 있는데 언제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는 언제나 유대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유대인의 사도가 아닌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셨습니다. 이러한 삶이 바로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주님께서 원하는 대로 행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이 임하시는 과정에서도 사도들이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에 순종해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모여서 간절히 기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사도행전 1장에 부탁하신 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간절히 간구하며 기도했더니 성령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는 것은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대로 행하는 일입니다.
둘째로 지혜 있는 자처럼 살아야 합니다. 지혜 있는 사람과 지혜 없는 사람,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의 개념은 한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지혜 없는 사람은 주님의 뜻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주님을 뜻을 알았다 해도 그 뜻대로 살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혜 있게 산다는 것은 그리고 미련하지 않게 산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1:24-25
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1: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계속해서 고전 1:27절에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 사도는 지혜란 곧 예수 그리스도이며 지혜란 곧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 곧 지혜로운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입니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 사는 것이 어리석은 것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주님의 심복이 되는 사람이고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셋째로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악한 세상입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아낀다는 것은 곧 산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우리의 시간들과 세월들을 사야 합니다. 즉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고 의미 있게 살아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불필요하게 낭비하거나 허비하지 말고 주님을 위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을 참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쁘게 살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낭비하는 시간들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시간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믿음 안에서 주님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기 위해서는 언제나 임박한 종말론 사상으로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곧 다시 오신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하루하루 또한 한 시간 한 시간이 귀하게 여겨지고 주님을 위해서 더 많은 시간을 드리고자 하는 열정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24시간 살아가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 충만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하면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고 성령을 통해서 주님께서 나와 동행하시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삶 전체는 주님께 드려진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성령 충만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살아가는 것이 세월을 아끼는 것이고 악한 세대를 이기는 비결입니다.
2.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
18절에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는 성도는
첫째로 술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시급하게 고쳐져야 할 것이 술 문화입니다. 우리는 술에 대해서 너무 관대합니다. 웬만한 집에서는 고등학생만 되도 맥주 마시는 것 정도는 허용을 하고 심지어 자녀들에게 맥주를 마시게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골 노인들은 막걸리를 마실 때 손주들에게 막걸리를 먹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모든 행사에 술이 빠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문화를 바꾸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술 취하는 것은 방탕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은 술은 모든 죄와 악의 시작이라는 의미입니다.
술 때문에 싸움이 일어나고 술 때문에 죄가 들어오게 됩니다. 사탄의 가장 강력한 무기 중에 하나가 술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술 취하지 말아야 합니다. 술을 취한다는 것은 취할 정도로 마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몸 안에 술을 섭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몸은 거룩한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따라서 이 거룩한 성전을 더럽혀서는 안 됩니다. 술 취하지 않는 대한민국이 되고 술 취하지 않는 이 나라의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이미 이곳에 모인 우리들은 성령 충만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미 성령 충만을 경험한 성도들은 계속해서 성령으로 재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언제나 성령으로 충만하고 재 충만하고 계속해서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버릴 것들이 있습니다.
1)죄악을 버리고
2)영적 무관심을 버리고
3)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리고
4)불순종을 버려야 합니다.
또한 사모해야 합니다. 언제나 성령 충만을 사모하는 심령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성령 충만의 결과
19-21을 보면
5: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5:20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첫째로 항상 찬송하게 됩니다. 19절을 다시 보면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바울 사도는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면 나타나는 현상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으면 나타나는 찬송의 현상 중에 시는 구약의 시편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표현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내가 경험한 여러 가지 일들을 시로 만들어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날그날 감사 일기를 쓴다든지 감사의 고백을 한다든지 하는 것도 찬양의 한 형태입니다.
찬송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시에 곡조를 붙여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감사하면서 하나님을 높이며 찬양하는 곡조 있는 찬양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령한 노래는 세속적인 노래와 다르게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영감있는 곡조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초창기에는 그 시대 유행하던 노래 곡조에 찬양의 가사를 붙여서 찬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아리랑 가사에 곡조를 붙여서 찬양을 부르는 나라도 있습니다.(https://www.youtube.com/watch?v=A5Q5zXHjOXg)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중에는 외국의 민요에 가사를 붙인 찬양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같은 곡조이지만 그 안에 영감을 담은 찬양으로 불려 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능하면 세상에서 먹고 노는 사탄의 문화에 이용되던 곡조를 찬송가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실 때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을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신령한 노래라는 뜻에는 우리가 기도하면서 어떤 음률의 형식이 없이 고백하는 것도 신령한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항상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20절을 다시 보면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항상’ 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라는 뜻으로 성령충만한 성도는 어떠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감사하며 살아갑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환경의 좋고 나쁨에 상관없이 처한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하심을 깨닫고 감사드리며 살아갑니다.
감사는 우리의 생명과 삶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되며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음을 믿고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살전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셋째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복종하게 됩니다. 21절을 다시 보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존경하고 섬겨야 합니다. 피차 복종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경외’에 해당하는 헬라어 ‘포보’는 ‘존경’보다 더 강한 의미로 ‘공포심, 두려움, 놀람, 경악, 공경, 존경, 경외’ 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순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강요나 위압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상호 복종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계급적인 관계가 아니라 서로 존중하고, 섬기는 섬김 공동체이고 서로를 존중하고 복종하면서 성령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아서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 항상 찬송과 감사가 넘치고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차 복종하는 진정한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가고 성령안에서 표적과 기사나 나타나는 역사를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