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 죽음에 대한 티벳의 과학적인 견해
1.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은 과학 차원에 속한 질문이다. 서구 과학은 심장의 박동이 멎고 뇌파 측정기의 그래프가 직선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죽음이라고 정의한다. 유물론자들은 뇌가 활동하고 있는 동안 '나'라고 하는 개체적인 의식이 존재하며, 뇌의 활동이 멈추면 의식도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으면 의식이 소멸된다는 견해는 과학적인 탐구의 결과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럴 것이라는 가정일 뿐이다. 실제로는 한동안 뇌파가 정지된 상태로 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많으며, 그들은 한결같이 뇌파가 정지된 상태로 있는 동안에도 이런저런 체험을 했노라고 증언한다.
현대적인 과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죽음을 생명의 활동이 완전히 소멸된 영원한 무와 망각 상태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죽음을 잠, 어둠, 무의식 등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지금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나 앞으로 행복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괴로움에 지친 사람은 고통을 의식하지 못하는 영원한 마취 상태로서의 죽음을 바라기도 한다. 그러나 죽음이 확실히 그러한 것인지 과학적으로 탐구해 보아야 한다. 사실 내면[마음]의 과학은 무에 대한 분석에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무는 말 그대로 무일 뿐이다. '무'라는 관념은 무가 아니다. 아무 것도 없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무인데, 관념은 나름대로 의미의 범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무는 범위가 없다. 또한 안도 없고 밖도 없다. 따라서 무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그 안에 무엇을 넣을 수도 없다. 무는 무이기 때문에 없애 버릴 수 없으며, 어떤 힘이나 영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무는 그 무엇도 아니며, 어떤 상태나 영역도 아니다. 무는 두려워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절대적인 무일 뿐이다.
무는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것의 반대편에 있는, 만물의 궁극적인 종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를 그 어떤 것으로 생각하는 관념을 갖고 있다. 무에 대해 이러저러한 생각을 한다는 사실은, 인간의 관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깊게 환상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가를 명백히 보여 준다. 무가 '있다[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이것', '저것', '그것' 또는 '이러한 상태', '저러한 상태', '그러한 상태'라고 대명사를 써서 지칭하는 것도 잘못이다. 무는 무이기 때문에 상상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무를 일종의 종착역 즉 인생이 도달하는 마지막 상태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 뇌파 그래프가 직선으로 나타나는 상태를 무라고 상상하는 것 역시 옳지 않다. 모든 감각 활동이 정지한 일종의 마비 상태를 무라고 보는 것이나, 의식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영역으로 보는 것 또한 논리적으로 앞 뒤가 안 맞는다. 무는 겉도 없고 속도 없기 때문에 그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음과 같은 어떤 상태를 무라고 상상하는 것은 스스로 위안하기 위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무의 상태가 깊은 잠과 같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깊이 잠들면 감각, 생각, 걱정, 그리고 의식 마져 사라진다. 우리는 어떤 근원적인 상태로 돌아가는 듯한 편안함을 느끼며 잠에 '빠진다'. 잠에 빠져들기 직전까지는 의식이 있지만, 다시 꿈에 대한 어렴풋한 기억을 가지고 잠에서 깨어날 때까지는 의식이 없다. 꿈은 기억할 수도 있고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의식은 말 그대로 '무'의식이기 때문에 체험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무의식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는 동안 의식이 없는[무의식] 상태에서 편히 쉬었다는 느낌은 무의식의 체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잠들기 직전과 깨어나는 순간의 느낌에서 오는 것이다.
잠은 휴식, 평화, 고요, 원기 회복 등과 관련되어 있다. 정신적 혹은 육체적 질병으로 인해 잠을 제대로 못 자는 사람은 심한 고통을 겪으며, 지속적으로 잠이 부족하면 육체의 건강을 잃는다. 잠을 자는 것과 뇌파가 뛰지 않는 것은 비슷한 것이 아니다. 잠자는 동안에도 두뇌의 활동은 멈추지 않는다. 깨어 있을 때보다 꿈을 꿀 때 오히려 두뇌가 더 활발하게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육체적.물질적 관점에서 보면 잠과 죽음은 완전히 다르다. 죽음을 무의 세계로 들어가는 入場으로 여기는 것은 죽음의 실상에서 눈을 돌리고자 하는 자위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을 잠과 비슷한 그 어떤 상태로 여기는 것은 물질적인 관점에서 비롯된 추측에 불과하다. 이런 견해는 마치 세상과 결별해야만 자유가 있다고 보고 그런 상태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는 소승 불교, 힌두교 신비주의, 도교, 그리고 서구 唯一神敎의 이원론적인 해탈관 내지는 구원론과 흡사하다. 그들은 걱정과 괴로움과 문제 투성이로 뒤얽힌 세상을 떠나, 평화와 안식으로 충만한 잠과 비슷한 축복의 상태에 들어가기를 원한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적인 이상인 니르바나는 고통과 슬픔의 세계와 완전히 결별한 영원한 축복의 상태, 즉 무의식적인 잠과 같은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보면 유물론자들이 영적인 구원이나 종교적인 해탈을 비웃는 것이 이해가 된다. 그들은 종교적인 계율을 지키지 않고도, 배우거나 수행하지 않아도, 또 깨달음이 없어도 매일 밤 저절로 그런 상태에 들어갈 수 있는데 무엇 때문에 쓸데없는 고생을 하느냐고 조롱한다. 세상 걱정을 모두 여읜 깊은 잠과 같은 상태가 해탈이라면, 유물론자들은 수많은 밤을 지나면서 이미 해탈하는 방법에 숙달되어 있는 것이다.
죽은 다음에는 잠과 같은 무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그들의 견해는 사실에 부합되는 것인가? 그렇게 믿을 만한 증거가 있는가? 무의 세계를 경험한 다음 그 세계는 이렇더라고 보고한 사람은 없다. 아무도 그 세계를 본 사람이 없고, 그 세계에 대한 기록도 없으며, 자신이 죽은 사람의 주관적인 의식을 가지고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사람도 없다. 육체적으로는, 죽음 속으로 들어가 그 상태를 탐색하거나 규명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는 무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티끌 하나라도 무로 돌아가는 것을 관찰한 바가 없다. 그들은 에너지는 없어지지 않고 형태만 바뀐다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을 들먹인다. 그렇다면 의식도 에너지일진대 어째서 의식 에너지만이 그 법칙에서 예외가 된다는 말인가? 유물론자들이 일종의 에너지 연속체인 의식이 무로 돌아간다고 그렇게도 강력하게 믿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유는 명백하다. 그들에게는 죽음 이후에 무엇이 있는지를 입증할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믿음은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막연한 소원을 등에 없고, 머리로 짜낸 허황된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 죽으면 무로 돌아간다는 그들의 견해는,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털 끝만큼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되뇌이는 과정을 거치면서 강화된 공허한 교리에 불과하다.
인간에게는 만물의 실상을 알고 싶어하는 종교적인 충동이 있다. 그래서 죽으면 무로 돌아간다고 하면 당연히 무는 어떤 상태일까 하는 의심이 생긴다. 유물론자들은 인간 본연의 이런 종교적 충동을 만족시키기 위해 증거도 없고 경험도 해 보지 못한 것을 아는 체한다. 그들은 죽음 이후의 무가 예상할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일 수도 있으나, 쓴 약을 꿀꺽 삼키듯이 이것 저것 따지기 전에 그냥 받아들여야만 하는 그 어떤 상태라고 주장하는 무모한 사람들이다.
유물론적 과학자들이 죽음 이후에도 의식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증거들을 교리적으로 거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죽음 이후에도 의식이 활동한다는 것이 자기들의 믿음에 의문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런 증거들에서 눈을 돌린다. 어떠한 의문도 허용하지 않는 종교적인 교조주의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증거도 없고 때로는 비합리적인 빈약한 논리의 믿음을 무조건 믿으라고 강요한다. 의심을 하기 시작하면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죽음 이후에도 의식이 존재하며, 의식과 감각이 살아 있는 삶이 계속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증거는 많다. 첫째, 만물은 변화를 통해 형태는 바뀌지만 그 존재의 지속성은 끊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 이후에도 의식은 소멸되지 않고 새로운 형태의 삶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둘째, 죽었다 살아 난 사람들이 전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믿을 만한 증거가 많다.
의학적으로 분명히 죽었다 살아 난 사람들이 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어린 아이가 전생에 있었던 일과 자기가 처해 있던 환경을 기억하는 것처럼, 죽음의 세계에서 경험한 일을 기억한다. 신뢰할 만한 학자들이 이런 사람들의 증언을 모아 비교해 본 결과 믿을 만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죽음 이후의 체험에 대한 다양한 증언을 수집하여 체계적으로 분류한 사람도 있고, 문화적인 성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죽음의 형태에 대한 안내서를 펴낸 사람도 있다. 그러나 무엇 보다 중요한 사실은, 문명 사회에 살고 있는 현대인일지라도 죽음 이후에 직면하게 될 자신들의 상태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아무 것도 아닌 것[無]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즐거운 것도 아니다. 단 아무 것도 아닌 것이 깨어 있는 상태의 혼란과 고통에 비해 상대적으로 편안한 상태일 수는 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고통이다. 사실 고통은 당연히 두려워해야 할 그 무엇이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 사랑하는 가족의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죽음이 무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다. 시체로 변하면 자신과 가족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앞으로 닥쳐올 고통스러운 상황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앞으로 닥쳐올 고통스러운 상황을 피하려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궁리한다. 오늘 밤 깊은 잠에 빠진다고 해서 내일이 오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잠자리에 들기 전, 낮 동안에 최선을 다해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한다. 준비를 잘하면 잘하면 잘한 만큼 편안하게 잠자리에 들 수 있다. 마찬가지로 죽음이라는 잠에 빠진다고 해도, 자고 나면 저절로 내일이 오는 것처럼 의식의 다음 상황이 자동적으로 전개된다. 그러므로 살아 있을 동안 그 새로운 상황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준비를 잘하면 잘한 만큼 죽음 이후의 상태가 편안해지리라.
아무리 극단적인 유물론자일지라도 다음과 같은 파스칼의 유명한 '도박의 원리'에는 귀를 기울여 봄직하다. 죽으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면, 살면서 준비하고 쌓은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도 존재의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악한 행위만 일삼으며 준비를 게을리 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오래도록 후회하게 될 것이다. 죽으면 끝이라고 생각하고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은, 그의 믿음대로 죽음 이후에 무로 돌아가든지 아니면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든지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다. 하지만 죽음 이후에도 존재의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는다고 믿고 철저히 준비한 사람은, 죽음 이후에 새로운 삶이 전개되면 준비한 만큼 큰 행복을 누릴 것이고,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무 것도 잃지 않는다. 모든 것이 소멸되어 버린다면 무엇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존재조차도 없을 터이니 말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 존재의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준비를 한 사람은 반드시 그 열매를 거둘 것이고, 영원성을 부정하고 세상 일과 감각적인 즐거움을 추구한 사람은 생명을 낭비한 것을 깊이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생이라는 판돈을 어느 쪽에 거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
시간과 공간을 무대로 펼쳐지는 상대적인 삶의 상황을 대하는 태도가 신중하든지 아니면 모험적이든지,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삶을 꾸려 나갈 수 있다. 무한한 우주 속에서, 상호 연관성은 무한대로 펼쳐져 있다. 나쁜 쪽이거나 좋은 쪽이거나 발전할 가능성 역시 무한하다. 자신이 무한한 상대적인 연속성에 얽혀 있는 존재임을 이해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 뒤따른다. 자신이 처해 있는 상대적인 상호 연관의 세계에 살고 있음을 확실히 이해하는 사람은 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권을 자신을 포함한 주변 상황을 개선하는 데 쓰고자 할 것이다.
합리적인 증거도 없고, 그럴듯한 추론에 불과한 종교적인 성격의 믿음 속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스스로 선택한 행위는 그에 상응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 과정은 끝이 없다. 왜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는가? 죽은 다음에 평안한 마비 상태가 올 것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째서 죽음을 모든 상황과 체험에서 단절된 영원한 고립이라고 보는가? 상대적인 관계의 영향을 받지 않는, 모든 상대성을 초월한 그런 절대적인 소멸 상태를 상상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여기서 파스칼의 도박의 원리를 다시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전능한 존재가 있어서 어떤 행동을 한 사람이든지 모두 구원해 준다면,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누구나 구원받을 것이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 준비한 사람이라고 해도 괜히 쓸데없는 고생을 했다고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구원을 받았는데 무슨 불평이나 후회가 있겠는가. 그러나 모든 사람을 구원해 주는 그런 전능한 존재는 없고, 우리가 준비한 만큼 우리를 도와주는 신적인 존재가 있다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준비하지 않은 사람은 오래도록 통한의 눈물을 흘리게 될 것이다.
건전한 믿음이라고 해서 비이성적일 필요는 없다. 올바른 신앙은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맹목적이어서는 안된다. 진정한 신앙은 과학적인 탐구의 뒷받침을 받아 그 힘이 강화되어야 하고, 문자의 얽매임에서 풀려나는 개방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건전하고 유용한 신앙이라면 죽음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과학적인 탐구자들은 자기 보다 앞선 선배들이 시도한 행위와 그들이 남긴 방대한 문헌에 마땅히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데, 죽음에 관한 한 아마 인도-티벳의 전통 속에 남겨진 문헌이 가장 방대할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한 상호 연관 속에서 무한한 우주 속에 퍼져 있다. 유물론적 진화론은 이런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목적 없이 일어나는 자연 도태설과 돌연변이라는 이론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은 진화가 시작되는 어떤 한정된 출발점과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그 출발점과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한 언급이 없다. 그들은 물질 세계가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전개되며, 때에 따라서 돌연변이가 일어나기도 한다고 말한다. 합리적인 견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마음 역시 육체와 마찬가지로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발전하고 때에 따라 돌연변이를 일으킬 수 있지 않겠는가?
'까르마[業]의 법칙'으로 알려진 불교의 정신.생물학적인 진화론은 다윈주의자들의 견해와 상당히 비슷하다. 까르마 이론은 모든 존재가 그물에 꿴 구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생명의 형태를 계속 바꾸어 나간다고 말한다. 까르마 이론은 인간은 과거에 원숭이였으며, 모든 동물을 단세포 생물이었다는 다윈주의자들의 주장을 부정하지 않는다. 까르마 이론이 다윈주의자들의 견해와 다른 점은, 까르마 이론은 모든 존재는 윤회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삶을 취하는 돌연변이를 한다고 말하는 데 있다.
윤회 과정에서는 미묘한 차원의 의식이 생명의 다음 형태를 결정하는 역할을 한다. 정신 수준에 따라 생물학적으로 같은 種 안에서 발전하거나 돌연변이 할 수도 있고, 다른 種으로 뛰어 넘을 수도 있다. 까르마적인 진화 과정에서는 지금 보다 고등한 생명체로 태어날 수도 있고 열등한 생명체로 태어날 수도 있다. 따라서 어떤 일정한 법칙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 따라 진화가 계속된다는 것을 일단 의식한 존재는, 자신의 생각과 행위의 선택을 통해 원하는 방향으로 진화의 물줄기를 돌려놓을 수 있다. 물론 까르마 이론과 진화론적 설명 사이에는 명백하게 다른 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까르마 이론이 어떤 존재가 어떻게 그런 형태의 존재가 되었는가를 설명해 주는 진화론적 설명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까르마'를 '진화' 또는 '진화적 행위'라고 번역하고자 한다.
까르마란 변화와 발전의 원인이 되는 행위를 뜻한다. 우리가 쓰는 진화라는 말과 그 의미가 비슷하다. 그러므로 굳이 '까르마'라는 인도 말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번역자들 중에는 '까르마'라는 말 속에 담겨 있는 독특한 의미를 살릴 수 있는 적당한 번역어가 없다는 생각에서 '까르마'라고 그대로 音譯해서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동양 사상에 깊이 심취한 서구인들 중에는 '까르마'를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운명 같은 것으로 여기고, 번역하지 않고 고지식하게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까르마는 비인격적이고 자연적으로 전개되는 원인과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을 뜻할 뿐, 운명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이다. 까르마는 삶과 죽음 또는 중간계를 포함하여 모든 순간에 원인의 힘으로 작용하는 일종의 총체적인 틀[原形]이다. 이 틀은 연속되는 삶을 살아오는 동안 쌓은 이전 행위에서 비롯된다. 이전 행위에서 비롯된 까르마라는 복합체는 현재의 몸과 마음과 행위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바꾸어 말하면, 현재의 행위와 말과 마음이 미래의 삶의 형태와 질을 결정하는 새로운 추진력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인이 되는 복합체인 까르마를 '진화의 추진력'(evolutionary momentum)이라고 불러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티벳에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가르침이 있다. "그대의 전생이 어떠했는지 알고 싶으면 그대의 현재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해 보라. 그대의 내생이 어떠할지 알고 싶으면 그대의 지금 마음을 살펴 보라," 이 말 속에는 우리의 현재 상태는 과거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길고 긴 진화 과정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며, 우리의 미래 상태는 지금 생각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진화의 방향을 의식적으로 좋은 쪽으로 돌리기에는 죽음에서 새로운 탄생으로 전이해 가는 중간계 기간이 최적의 기회다. 그 기간 동안 진화의 추진력은 일시적으로 유동적이 된다. 그러므로 중간계라는 결정적인 고비를 넘기면서 수직으로 상승할 수도 있고 하강할 수도 있다. 티벳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티벳 死者의 書>를 운명의 방향을 좋은 쪽으로 돌려놓는 안내서로 여기며, 보물처럼 귀하게 여긴다.
2. 여섯 차원의 존재 영역[六道]
불교는 생명의 존재 차원을 여섯으로 나눈다. 그 중에서 지옥계(地獄界)는 최고로 부정적인 몸서리쳐지는 상황을 경험하는 영역이다. 이 영역에 대한 생각은 서양인과 동양인이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불교도들은 뜨거운 지옥 8곳(8熱地獄), 차가운 지옥 8곳(8寒地獄), 누르고 짓이기는 지옥 8곳, 그리고 베고 자르는 지옥 8곳('짓이기는 지옥'과 '자르는 지옥'을 합쳐서 16遊增地獄이라고 한다.)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켰다. 이런 지옥의 모습은 더위로 인한 고통, 추위로 인한 고통, 압박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살을 에일 때의 고통을 상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무시무시하고 소름끼치는 극심한 정신적인 고통에 대한 묘사도 있다. 이런 여러 종류의 지옥은 '미움'의 힘에 이끌리는 부정적인 진화 행위가 만들어 낸다.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은 지속적으로 발산한 미움의 힘이 증폭되어 재생된 것이다. 지옥에 있는 동안에는 무한한 고통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지옥에서 영원히 머무는 존재는 없다. 나는 이런 영역에 거하는 생명을 '지옥 존재'라고 부르겠다.
지옥계 다음에는 흔히 아귀계(餓鬼界, 굶주린 귀신들이 사는 곳)라고 부르는 프레타preta 영역이 있다.
프레타 영역의 존재들이 목마르고 굶주린 것은 사실이지만 귀신은 아니다. 그들은 극단적인 좌절감과 욕구 불만에 사로잡혀 있는 살아 있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은 프레타에 거하는 존재라는 뜻에서 '프레탄'이라고 부르겠다. 지옥은 미움의 힘이 만들어 내듯이, 프레타는 끝없는 탐욕의 힘이 만들어 내는 영역이다. 프레탄들은 끝없이 반복되는 탄탈루스의 고통을 겪는다. 어떤 프레탄은 밥통은 잠실 운동장 만한데 목구멍이 바늘 구멍처럼 가늘고, 그나마도 길이가 십리는 되어서 끝없이 배고파하고 목말라 한다. 먹을 만하게 생긴 음식을 발견해도 차지하기가 쉽지 않고, 또 용케 차지해도 먹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또 먹었다 해도 식도를 따라 내려가는 중에 시커멓게 타 버리는 바람에 만족은커녕 오히려 참을 수 없는 고통만 당한다. 프레탄의 이런 모습은 배고픔과 목마름, 즉 욕구 불만과 갈망이 형상화한 것이다.
아귀계(餓鬼界) 다음은 축생계(畜生界)이다.
미움은 지옥 존재를 만들어 내고 탐욕은 끝없이 갈망하는 프레탄을 만들어 내듯이, 무지와 어리석음과 우둔함은 동물적인 존재[畜生]를 만들어 낸다. 동물적인 존재와 인간적인 존재인 우리와 상당히 비슷하다. 동물적인 존재는 지적인 능력과 의사 소통 능력이 부족하다. 그들은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 본능적인 반사 행위로 어떤 상황에 반응하다. 따라서 그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가능성은 지극히 한정적이다. 불교도들은 자신들 내면의 본능적인 부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동물적인 존재를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그들에게도 영혼이 있으며, 그들도 고통을 경험하고 따라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들에 처해 있는 상황은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발전해 나가기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본능적인 무지에 단단히 붙들려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화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붓다 역할을 하는 인간적인 존재가 있어서 특별히 보살피고 도와주어야만 한다.
축생계(畜生界) 다음은 인간계(人間界)이다.
인간 차원 역시 모든 부정적인 요소들의 집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지옥 존재와 프레탄과 동물적인 존재들이 사로잡혀 있는 극단적인 미움, 탐욕, 그리고 무지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로운 상태이다. 인간은 미움과 탐욕과 무지라는 부정적인 요소와, 그와 반대되는 인내와 관용과 지적인 감수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진화된 존재이다. 수없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윤회의 과정을 거치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해야만 인간 차원에 태어날 수 있다. 인간 차원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오랜 세월의 진화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에는 아주 미미한 상태이겠지만, 인내심으로 지옥을 만들어 내는 미움의 힘을 감소시켜 누구를 해치고자 하는 반사적인 행위를 줄여 나가야 한다. 또 초연함과 관용으로 프레타를 만들어 내는 탐욕의 힘을 감소시켜 집착하고 욕심 부리는 습관적인 반사 행위를 줄여 나가야 한다. 그와 더불어 나 이외의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세심한 배려를 통해, 자기 중심적으로 행동하게 만드는 동물 차원을 지배하고 있는 본능의 힘을 감소시켜 나가야 한다. 그래서 가끔은 다른 존재들에 관심을 기울일 줄 알아야 비로소 인간 차원에 태어난다.
지옥계와 아귀계와 축생계라는 무섭고 지겨운 상태는 본능의 힘이 지배한다. 아무리 미미하다 할지라도 그런 본능의 힘을 약화시키는 노력이 쌓이면, 그것이 인간이라는 보다 고상한 존재 형태로 태어나게 만드는 진화의 추진력으로 작용한다. 인간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이냐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기가 쉽지 않다.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쉽게 보아 넘길 수 없는 위대한 성취다. 상대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은 본능적인 충동에서 자유롭다. 그리고 인간에게는 자유와 지성과 감성의 힘을 궁극적인 자유와 지복의 삶을 누리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인간계 위에는 신들의 영역인 아수라계(阿修羅界, asura)가 있다.
아수라들은 인간 차원에서 진화해 올라간 존재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 보다 더 큰 자유와 기회를 누린다. 그러나 자신의 인내와 관용과 감수성을 남보다 더 키우고자 하는 열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경쟁심의 노예가 되어 있다. 그들은 남보다 뛰어 나기를 바라며, 싸우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천상계와 아주 가까운 곳에 살면서, 천상계를 차지하기 위해 신들과 자주 겨룬다. 이렇게 계속 싸우고 죽고 죽이는 과정 속에서 아수라들은 습관적으로 화를 내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점차 지옥으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아수라계(阿修羅界) 위에 있는 천상계(天上界)는 '좋은 의미의 자기 중심적인 삶'이 영위되는, 윤회하는 세계[迷界] 중에서 가장 높은 영역이다.
천상계의 신들은 마음을 조절하는 훈련과 더불어 오랜 세월 관용과 아량과 감수성을 키우는 진화의 과정을 겪은 존재들이다. 그 결과 인간 차원을 초월한 여러 낙원을 거쳐 그 영역에 도달했다. 그들에게는 인간 보다 더 많은 자유와 기회가 있다. 하지만 그런 풍요로움이 오히려 위험 요인이 되기도 한다. 천상계의 신들은 스스로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갖고 있는 힘과 즐거움과 영광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수명도 상당히 길다. 차원이 낮은 영역과는 상관하지 않는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면서, 자기의 삶이 고통스러워질 가능성에 대해서는 꿈도 꾸지 않는다. 이런 자기 만족 때문에, 그들은 가지고 있는 자유를 창조적인 일에 쓰지 않는다. 자만심에 사로잡혀 있는 천상계의 신들은, 그 영역에 도달하도록 만든 진화의 추진력을 서서히 잃는다. 그리고 이런 퇴화의 과정이 오랜 세월 지속되면서, 인간 차원 아래로 다시 떨어져 내려가는 경향이 있다.
신적인 존재들이 거하는 천상계는 욕망의 하늘[欲界天], 욕망이 없는 순수한 형상의 하늘[色界天], 그리고 형상마저 없는 하늘[無色界天] 셋으로 이루어져 있다.
욕망의 하늘[欲界天]은 다시 6영역으로 구분된다. 그 중 둘은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상에 있으며, 나머지 넷은 하늘에 있지만 그 안에 거하는 신적인 존재들의 눈에 보이는 경계가 있다. 욕망의 하늘에 거하는 신적인 존재들은 안락한 낙원 생활을 즐긴다. 하지만 안락함 때문에 궁극적인 자유와 보다 뛰어난 끝없는 기쁨을 추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6단계의 욕망의 하늘 위에는 18영역으로 구분되는 순수한 형상의 하늘[色界天]이 있다.
거기에 거하는 신적인 존재들은 순수한 에너지 몸[心體]을 가지고 있다. 이들의 모습은 마치 은하계 너머에서 빛나는 밝은 에너지 구름 같다. 그래서 '(빛나는) 브라흐마의 몸을 가지고 있는 존재'[梵衆]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의 가장 큰 약점은 스스로 기뻐한다는 점이다. 이들의 지적인 능력은 엄청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약했던 시절의 자신의 모습을 잊는 경향이 있다. 고통받던 시절의 자신과 여러 차원의 영역을 거쳐오면서 만났던 이웃들의 고통을 기억하지 못하고, 자신이 다시 그런 나약한 존재로 퇴화할 수 있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순수한 형상의 하늘[色界天] 너머-사실 여기서는 공간 개념인 '너머'라는 말이 별 의미가 없지만-에는 4영역으로 이루어져 있는 형상이 없는 하늘[無色界天]이 있다.
이 하늘은 무한 공간, 무한 의식, 즉 의식과 무의식을 넘어 선 절대 무의 영역이다. 이 하늘에 거하는 신적인 존재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들은 모두 형상에 대한 집착을 떨쳐 버리고, 궁극적인 실재를 추구하며 진화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지극히 평화롭고, 지극히 신비하고, 지극히 실제적인 상태를 추구한다. 그래서 자기를 감싸기 위한 모든 상대적인 관념을 버린 존재들이다. 그들은 죽은 것처럼 고요한 상태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평안하게 지낸다. 어떤 생각으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는 일이 없으며, 궁극적인 목표를 성취하여 절대자와 하나 되었다는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간파하기 힘든, 아주 미묘한 자만심과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은 스스로 건설한 세계 속에 고립되어 있으며, 자신의 상상 속에 갇혀 있다. 불교에서는 수행자가 이런 상태, 즉 空에 떨어지는 것을 가장 위험한 일로 본다. 이런 상태에 빠지면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을 주관과 객관을 초월한, 표현할 수 없는 무 또는 절대로 여기게 되기 쉽기 때문이다. 또 때에 따라서는 空에 떨어진 자신의 상태를 궁극적인 깨달음이라고 막무가내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려면 모든 것과 모든 상태의 '상대성'과 '비어-있음'[空]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 두 가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형상이 없는 하늘의 고요와 정적의 유혹에 말려들고 만다. 그러면 끝없이 계속될 미래를 살아갈, 새로운 존재로 거듭 날 수가 없다.
돌고 도는 '여섯 차원의 존재 영역'[六道]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은 티벳은 물론 불교 사회의 어딜 가나 쉽게 눈에 띤다. 사원 벽에 '윤회의 수레 바퀴'라고도 부르는 이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경우도 있다.
이 그림은 '죽음의 입'을 향해 날아 들어가는, 죽음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사람의 체험을 묘사하고 있다
(죽음의 신 야마가 윤회의 바퀴를 입에 물고, 두 손과 두 발로 바퀴를 지지하고 있다).
죽음의 과정을 거치고 있는 사람은 자신이 축적한 진화의 추진력에 따라 여섯 영역 중에 한 곳에 속하게 된다(4번 그림을 보라).
<티벳 死者의 書>는 윤회의 바퀴가 묘사하고 있는 우주적인 배경을 죽은 다음 중간계를 여행하는 사람의 여행 무대로 설정하고 있다. 모든 존재 영역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붓다의 경지를 향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할 가능성도 무한하고, 동물적인 차원이나 프레타나 지옥을 향해 부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할 가능성도 무한하다. 차원이 낮은 영역의 삶은 끔찍하고 비참하다. 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 무에 빠지는 것은 그 보다 훨씬 더 바람직하지 못하다. 두려운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각성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게 만드는 강력한 동기가 되며,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게 하는 효과 있는 촉진제 역할을 한다. 존재 양상의 변화를 이해하고 인정하지 않는다면, 고통받고 있는 다른 존재를 구원하겠다는 메시아적 깨달음도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존재 양상의 변화에 대한 개념은 이기적인 존재를 이타적인 보살로 변화시키는 영적인 가르침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몇 십년 동안, 아시아에서 온 선생들 중에 무시무시한 상태에 대한 묘사는 문자적인 사실이 아니고 피해야 할 마음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묘사한 것일 뿐이라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 물론 온 우주가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는 그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들의 서양인 제자들은 (기독교에서 배운) 유황불이 펄펄 끓는 지옥이라는 개념을 버린 지 오래다. 따라서 그런 개념을 정신적인 상태에 대한 비유라고 설명하는 것은, 배움과 명상을 효과적으로 진행시킬 수 있게 하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형이상학적인 접근은 궁극적으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며, 사실 이런 접근 방식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긍정적인 세상이든 부정적인 세상이든 모두 마음이 만들어 낸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대가 만약 달려오는 화물 열차 앞에 서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그대의 마음은 아마 화물 열차에 깔려 죽을 것에 대한 공포로 가득 찰 것이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존재의 실상을 명백히 깨닫고 완전히 해탈한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다른 존재들에게 유익한 일이라면, 달려오는 화물 열차 앞에 서 있어도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이런 정도의 사람이라면 지옥이나 프레타나 동물적인 영역이 존재하든 말든, 또는 자유와 기회가 털 끝만큼도 없는 지옥 보다 더 비참한 존재 상태가 있든지 없든지 아무 상관이 없으리라.
하지만 그 밖의 사람들이라면 달려오는 기차를 보고 놀라고 두려워하는 편이 훨씬 낫다. 그래야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 칠 테니 말이다. 우리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부정적인 성향이 자라는 것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런 것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필연적으로 부정적인 결과가 따라 온다. 완벽한 도인이 아니라면 부정적인 성향이 꽃으로 피어나 열매를 맺기 전에,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봉오리를 꺾어 버리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낫다.
잘 죽는 법을 터득하기 위하여 죽음에 관한 과학을 이용하고자 한다면, 다양한 존재의 영역을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인간 영역처럼 실제적인 영역으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자신의 여러 전생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런 다양한 차원의 존재 영역이 실재하는 영역이라고 증언한다. 그리고 광대한 진화의 바다 속에는 지구라는 이 조그만 땅 덩어리 위에서 볼 수 있는 것 보다 훨씬 많은 다양한 생명 형태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이런 관점을 가질 때 비로소, '모든 것이 네 마음 속에 있다'는 식의 접근도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좋아하는 것은 실제처럼 여기고 싫어하는 것만 선택적으로 마음의 작용이라고 규정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실제로는 모든 실체가 마음 속에 있다. 그리고 마음은 실체들을 '저기 밖에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저기 밖에 있는' 것을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또 '저기 밖에 있는' 것들을 두려운 상황을 예방하고 아름다운 상황을 증진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3. 붓다의 세 몸
생명체의 존재 영역을 여섯으로 나누는 것은 불교의 우주론과 관련되어 있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깨달은 사람은 여섯 영역을 끝없이 돌고 도는 윤회를 경험하고 이해한 사람이다.
한 영혼의 생명은 죽음 상태, 중간계 상태, 삶 상태를 반복적으로 거치면서 이어져 나간다. 이 생에서의 경험과 비교하자면 죽음은 깊은 잠이고, 중간계는 꿈이며, 삶은 깨어 있는 상태와 상응한다. 그 중에서 깨어 있는 상태는 다시 명상과 초월 상태, (육체와 별도로)마음이 만들어 내는 신비한 몸 상태, 물질적인 육체 상태로 구분할 수 있다. 이 3가지 상태는 붓다의 상태를 보여 주는 붓다의 세 몸과 관련되어 있다.
명상과 초월 상태는 붓다의 진리의 몸(法身)과 관련되어 있고, 신비한 몸 상태는 붓다의 깨달은 몸(報身)과 관련되어 있으며, 물질적인 육체는 붓다의 나투는 몸(化身)과 관련되어 있다.
<도표 2. 붓다의 세 몸과 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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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몸(法身) 깨달은 몸(報身) 나투는 몸(化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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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중간계 삶
깊은 잠 상태 꿈꾸는 상태 깨어 있는 상태
명상 차원 신비한 몸 차원 육체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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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트라 요가 수행은 죽음과 깊은 잠과 명상 상태를 붓다의 진리의 몸으로 변형시키고, 중간계와 꿈과 신비한 몸 상태를 붓다의 깨달은 몸으로 변형시키며, 삶과 깨어 있는 상태와 육체를 붓다의 나투는 몸으로 변형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수행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티벳 死者의 書>는 중간계 기간을 붓다의 경지를 향해 속도를 붙여 전진해 나가는 좋은 기회가 되도록 안내해 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일생은 여섯 중간계 즉 이승 중간계, 꿈 중간계, 명상 중간계, 죽음 중간계, 저승 중간계, 탄생 중간계로 이루어진다. 삶을 이런 도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수행자로 하여금 삶의 모든 순간을 중간계로 보도록 한다. 그래서 삶의 모든 순간을 깨달음을 얻어 해탈할 수 있는, 유동적이고 변형 가능한 순간으로 보도록 한다.
이승 중간계란 보통 말하는 삶 즉 탄생과 죽음 사이의 기간을 말한다. 꿈 중간계는 깊이 잠든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 사이의 기간이다. 명상 중간계는 이원성을 의식하고 있는 일상적인 의미의 깨어 있는 상태와 초월적인 지혜가 각성된 명상 상태 사이를 가리킨다.
죽음 중간계는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밝은 빛이 비치는 며칠 안되는 아주 짧은 기간이다. 저승 중간계는 죽음 중간계와 탄생 중간계 사이의 비교적 긴 기간으로, 때에 따라서는 2주일 정도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이 기간에도 의식은 깨어 있다.
탄생 중간계는 저승 중간계와 태어 나는 순간 사이의 기간으로, 의식을 가지고 통과하는 중간계 중에서 두 번째로 긴 기간이다. 이 기간에는 자기가 태어날 장소로서 자궁이나 알이나 축축한 곳이나 연꽃 등과 만나는 체험을 한다. 이와 같이 진행되는 한 영혼의 일생은 <도표 3>처럼 요약할 수 있다.
<도표 3. 여섯 중간계로 이루어진 삶의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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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중간계 | 기간(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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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 중간계 | 태어남과 죽음 사이
꿈 중간계 | 잠과 깨어 있음 사이
명상 중간계 | 이원적인 의식과 초월적인 각성 사이
죽음 중간계 | 이승에서 저승으로 건너가는 기간
저승 중간계 | 저승에서 실체를 체험하는 기간
탄생 중간계 | 저승 중간계와 태어남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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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중간계에 대한 이런 설명은, 현재 어느 차원을 지나고 있든지 삶의 모든 순간이 변형 가능한 순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다. 붓다의 세 몸과 여섯 중간계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은, 이기적인 편견에 사로잡혀 모든 것이 고통스럽기만 한 삶을 사랑과 행복이 넘치는 삶으로 변형시키는 수행에 도움이 될 것이다.
4. 몸과 마음의 복합체
<티벳 死者의 書> 바닥에 깔려 있는 우주론을 개관하려면 먼저 몸과 마음의 복합체라는 티벳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해야 한다. 불교는 목적에 따라 인간과 우주의 여러 가지 모델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 여기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몸과 마음의 복합체인 인간에게는 거친 차원[肉]과 미묘한 차원[魂]과 지극히 미묘한 차원[靈 ]이라는 세 차원이 있다는 모델이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5가지 무더기[五蘊]와 5가지 근본 요소[五大]와 6가지 감각-의식[六識]에 관한 것이다. 이들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기억해 둘 사실이 있다. 불교 과학이 제시하는 이런 도식적인 구조는 스스로 발견하게 하는 교수법의 일종으로, 기억하기 쉽도록 일정한 패턴에 따라 만든 하나의 방편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꼭 5가지이고 저것은 꼭 6가지뿐이라는 식으로 보아서는 곤란하다. 모든 범주를 보다 더 크게 나눌 수도 있고 보다 더 잘게 나눌 수도 있다. 티벳 사람들이 위와 같이 나누는 것은, 오랜 경험에 비추어 그렇게 나누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개념상의 도식은 사진과 비슷하다. 동일한 피사체를 향해 셔터를 눌러도 105미리 렌즈를 끼우고 찍은 사진과 35미리 렌즈를 끼우고 찍은 사진은 서로 다른 그림을 나타내 보인다. 그 두 사진을 놓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를 따지는 것은 전혀 필요치 않은 일이다. 모습은 서로 다를지라도 둘 다 진실한 사진이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의 복합체에 세 차원이 있다는 것은 일상적인 체험을 하는 자기와 명상 상태의 미묘한 자기를 통합하고자 하는 불교 수행자에게 유용한 틀 역할을 한다. 이 틀을 기반으로, 습관적으로 '나'라고 생각하는 관념[我相]을 떨쳐 버리기 위해 의식이 말똥말똥 깨어 있는 상태로 意識下意識 속으로 들어가는 수행을 한다. 우리가 보통 무엇을 보거나 느끼는 것은 의식의 표면에서 이루어진다. 저기에 나무가 있다든지 아니면 배가 아프다고 느끼는 것 등은 모두 표피 차원 의식의 활동이다. 시신경을 자극하여 무엇이 보이게 만드는 빛 에너지[光子]는 의식하지 못한다. 중추 신경계를 통해 뇌로 하여금 배가 아프다고 느끼게 만드는 신경 전달 물질의 활동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면 세계를 탐구하는 불교 수행자 혹은 정신세계 비행사들은 意識下意識 영역에서 일어나는 그런 일련의 과정을 의식하기 위해 훈련해 왔으며, 자신들의 내적인 탐험 결과를 표현할 개념이 필요했다. 그래서 인간 존재를 묘사하는 특이한 모델을 만들어 냈다. 이 모델은 표면 의식으로는 알 수 없는 내적인 과정을 직접 체험하기 위한 오랜 수행의 결과로 나온 것이다.
몸과 마음의 복합체인 인간에게는 거친 차원[肉], 미묘한 차원[魂], 지극히 미묘한 차원[靈]이라는 세 차원이 있다. 거친 차원은 육체와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차원의 육체는 피와 살과 뼈 그리고 앞으로 살펴볼 5가지 근본 요소[地.水.火.風.空]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는 원소를 아주 잘게 분류하는 현대 과학의 화학적인 분석은 필요치 않다고 본다. 그런 방법으로는 '나'라고 하는 실체를 밝힐 수 없기 때문이다. 거친 차원의 마음은 6가지 감각-의식[六識]으로 이루어진다.
6가지 감각-의식이란 육체의 감각 기관인 눈.귀.코.혀.피부[眼.耳.鼻.舌.身]를 통한 5가지 감각-의식[五識: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에 감각이 받아들인 정보를 통합하는 생각, 상상, 충동과 의지 등의 정신[意] 작용[意識]을 더한 것이다.
미묘한 차원의 몸은 우리가 중추 신경계라고 부르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 거친 차원에서 경험을 정리하는 뇌는 축축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중추 신경계는 축축한 물질 구조가 아니다. 우리 몸에는 미간에서 정수리를 거쳐 꼬리 뼈와 성기 끝에 이르는 신경[에너지] 통로가 있는데, 그 통로 중간 중간에 5개나 6개 또는 7개의 차크라가 있다.
차크라는 원반 모양으로 생겼다고 해서 바퀴라고 부르기도 하고 연꽃 모양이라고 해서 연꽃이라고도 하는데, 여기에서는 빛을 내뿜는 일종의 섬유질을 발산한다. 이 발광체 섬유질이 바로 미묘한 몸을 구성하는 물질 아닌 물질이다. 신경[에너지] 통로로 골격을 이루고 있는 이 미묘한 몸 속에는 존재의 精髓를 담고 있는 각성된 빈두[精液]가 프라나[氣또는 숨]의 기운을 타고 흐른다.
이렇게 형성된 미묘한 몸에도 3단계가 있으며, 3단계의 몸은 모두 육체적인 감각과는 관계없이 자신의 주체적인 의식 활동을 한다. 3단계의 미묘한 몸은 깊은 차원으로 들어갈수록, 차원에 따라 밝은 달빛, 밝은 햇빛, 그리고 순수한 어둠의 빛과 같은 빛을 발산한다. 깨달음이 없는 사람의 경우에는, 보통 이 세 몸이 잠재의식과 뒤엉켜 80가지 형태의 본능적인 행위로 나타난다. 80가지 형태의 본능적인 행위란 욕망과 공격성과 무지에서 비롯되는 여러 행위들을 (편의상 80가지로) 분류해 놓은 것이다.
지극히 미묘한 몸[영적인 몸]은 흔히 불멸의 빈두[精液]라고 하는데, 보통은 심장 부근에 있는 차크라에만 미미한 에너지 형태로 존재한다. 여기에 상응하는 지극히 미묘한 마음은 투명한 직관의 빛이다. 이 차원에서는 몸과 마음의 구별이 사라진다. 몸이 마음이고 마음이 몸인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투명한 각성을 그 내용으로 하는 이 불멸의 빈두[精液]가 바로 생명과 의식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영혼이다. 삶은 이 생에서 저 생으로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불멸의 빈두[精液]인 영혼의 연속성은 끊어지지 않는다.
이 지극히 미묘한 몸과 마음의 복합체를 각성시키는 것이 곧 佛性을 깨닫는 것이다. <티벳 死者의 書>도 바로 이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도표 4. 몸과 마음의 복합체의 세 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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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원 몸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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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차원 5가지 근본 요소 6가지 의식-작용
(肉) (五大) (六識)
미묘한 차원 신경(에너지) 통로, 80가지 본능과 뒤얽힌
(魂) (신경) 에너지, 세 차원의 직관
각성된 빈두[精液]
지극히 불멸의 빈두 속에 투명한 빛 에너지의 精髓
미묘한 차원 있는, 투명한 빛을 또는 불멸의 빈두[精液]
(靈) 운반하는 에너지체(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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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의 복합체를 이해하기 위해 만든 또 다른 중요한 도식은, 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몸(色), 느낌(受), 지각(想), 의지(行), 의식 활동(識)이라는 다섯 무더기[五蘊] 또는 5가지 과정에 대한 개념이다. 이를 일컫는 산스크리트어 '스칸다'skandha는 문자 그대로 '무더기' 또는 '더미'를 뜻한다. 나는 몇 가지 이유에서 이들의 역동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과정'이라는 말을 더 좋아하지만, 불교의 표준 번역어는 '무더기'[蘊]이다.
다섯 과정 중에서 첫 번째인 몸(色)은 거친 차원의 육체에 상응하며, 나머지 넷은 거친 차원의 마음과 그 마음의 내적인 작용과 관련이 있다. 인간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를 이렇게 다섯으로 분석한 근본 목적은 몸과 마음의 복합체인 자기 자신을 정확히 이해하여 그릇된 인식에서 비롯되는 구속에서 해방되는 데 있다. 즉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과정[무더기]에 대한 이해를 통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나'라고 주장할 수 있는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음을 깨닫고, 그 깨달음을 통해 '나'라고 생각하는 습관적인 에고 의식[我相]에서 비롯되는 굴레에서 벗어는 것이 이 구조를 만든 목적이다. <도표 5>는 몸과 마음의 복합체를 구성하는 다섯 무더기 또는 다섯 과정의 구조를 요약해 놓은 것이다.
<도표 5. 존재를 구성하는 다섯 무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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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기 구성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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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色) 5가지 근본 요소(地, 水, 火, 風, 空),
또는 5가지 감각 대상(色, 聲, 香, 味, 觸)과
5가지 감각 기관(眼, 耳, 鼻, 舌, 身)
느낌(受) 5가지 감각 기관의 작용
쾌감, 불쾌감, 즐거움, 고통 또는 무감각 등
지각(想) 체험을 만들어 내기 위해 사용하는 모든 말과 상징[이미지]
의지(行) 욕망, 증오심, 망상, 그리고 여러 가지 감정
의식 활동(識) 6가지 감각-의식(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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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식에서는 거친 차원[육적인 차원]의 몸과 마음의 복합체는, 의식 활동[識] 하나를 뺀 나머지 넷은 출생과 더불어 시작했다가 죽음과 동시에 끝난다. 정신적인 의식은 죽음과 동시에 오감(五感)과 관련을 끊고 육체에서 빠져나가, 중간계 존재의 의식으로 변한다.
정신적인 의식이 물질적인 육체와 관련 없이 독자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좋은 예가 꿈이다. 꿈을 꾸는 동안, 의식은 육체와는 다른 새로운 몸이나 주변 환경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꿈 속의 존재도 경치나 색깔을 보기도 하고 소리를 듣기도 한다. 꿈을 꾸는 동안 자기라는 몸이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중간계 존재의 자아 의식이 그와 비슷하다.
물론 특별한 훈련을 하지 않고는 그런 몸에 대한 자각이 생기지 않는다. 보통의 경우에는 꿈을 꾸었는지 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꿈을 기억한다 할지라도, 꿈이 시작되는 상황과 끝나는 상황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특별한 훈련을 하면 꿈을 꾸면서도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구나' 하는 자각을 가질 수 있다. 즉 잠을 자면서도, 의식이 각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투명한 꿈을 꿀 수가 있다. 이런 능력이 계발되면 투명하게 죽는 능력도 생긴다. 즉 새로운 세계로 넘어가는 죽음의 과정을 의식이 초롱초롱 각성된 상태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투명하게 죽는 능력을 계발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 단계는, 몸과 마음의 복합체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차원 또는 다양한 상태를 이해하고 그 변화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것이다. 미묘한 차원[혼적인 차원]의 몸과 마음을 묘사하는 도식은 특별히 이 목적을 위해 고안된 것이다. 에너지 통로[수슘나, 이다, 핑갈라], 프라나[氣], 빈두[精液]로 이루어져 있는 미묘한 몸의 구조에 대한 이해는 특별한 내적인 감각을 각성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이마에서 시작하여 정수리로, 정수리에서 척추를 타고 아래로 꼬리뼈까지, 그리고 꼬리뼈에서 생식기 끝까지 연결된 중앙 에너지 통로가 있다. 3개의 줄기[수슘나, 이다, 핑갈라]로 이루어져 있는 중앙 에너지 통로는 정수리, 목, 심장, 하복부[단전], 생식기 부위에 있는 바퀴 모양의 차크라[에너지 센터] 중앙을 관통한다. 그리고 이 중앙 통로에는 72,000 개의 부수적인 에너지 순환 통로가 연결되어 있으며, 이 작은 에너지 통로들이 온 몸에 퍼져 있다. 에너지 통로로 에너지 센터를 묘사하고 있는 그림은 종류가 다양하다. 수행자마다 자기가 특별히 계발하고자 하는 내적 감각이 다르기 때문에, 묘사하는 방법도 자연히 달라진 것이다.
에너지 통로 내부에 흐르는 에너지를 프라나[氣 또는 숨]라고 한다. 프라나는 5가지 주요 프라나와 5가지 부수적인 프라나로 나뉜다. 그리고 각 프라나는 모양, 크기, 색깔, 기능, 성격이 다른데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여기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므로 생략하겠다. 단, 이런 여러 종류의 프라나의 상태에 따라 몸의 기능이 변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과정을 조절하는 능력을 계발하는 열쇠라는 사실 하나만은 강조해 두기로 하자.
빈두[精液]는 각성-전달 물질로서, 생식과 관련된 일종의 화학적인 엣센스[精]이다. 빈두가 어느 차크라에 도달하느냐에 따라 의식 상태에 변화가 생긴다.
예를 들어 칼라차크라 시스템의 경우, 4종류의 빈두에 대한 체계가 있다. 깨어 있는 상태로 활동하는 동안에는 빈두가 이마나 배꼽[丹田]에 있다. 그래서 깨어 있다는 생각과 자아 의식을 갖도록 만든다. 꿈꾸는 동안에는 빈두가 목이나 꼬리뼈 부근에 있으면서, 꿈 체험의 진원지 역할을 한다. 깊이 잠들었을 때에는 빈두가 심장 의식 센터 주위나 생식기 중심에 자리 잡고 편안한 휴식을 체험하도록 만든다. 마지막으로 4번째 상태의 빈두는 심장 센터 중심이나 생식기 끝에 머물며, 깨달음으로 인한 희열과 지복감 또는 성적인 오르가즘의 근원이 된다. 수행자는 빈두의 활동과 역할을 이해함으로써 각성에 수행의 초점을 맞출 수 있고, 또 일상적인 체험과 깨달음의 강도를 높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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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서 39쪽 그림(차크라 모형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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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표 6. 미묘한 몸을 구성하는 에너지 통로와 차크라>
미묘한 몸의 신경 시스템을 묘사한 그림이다. 3개의 중앙 통로와, 그 통로를 따라 5개나 6개 또는 그 보다 많은 신경 에너지[의식] 센터가 배치되어 있다. 신경 에너지 센터에는 이 그림에는 묘사되어 있지 않지만, 72,000개의 부수적인 에너지 순환 통로가 연결되어 온 몸에 퍼져 있다. 이 그림에서 보듯, 요가 수행자들이 계발한 인간의 자기 이미지는 에너지와 의식이 회전 운동을 하는 역동성과 민감성을 가지고 있다. 경직된 에고 의식이 결코 아니다.
<도표 7. 미묘한 차원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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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마음 경험상의 유추 관련된 본능적인 행위 또는 직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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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단계직관 밝은달빛 욕망에서 비롯되는 33가지 본능적인 행위
2단계 직관 밝은 햇빛 공격성에서 비롯되는 40가지 본능적인 행위
3단계 직관 어두움 무지에서 비롯되는 7가지 본능적인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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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묘한 차원의 마음은 에너지 통로와 프라나[氣]와 빈두[精液]로 구성되어 있는 미묘한 몸의 주체로 보면 된다. <도표 7>은 3가지 상태로 나타나는 미묘한 차원의 마음과, 그에 관련된 (깨달음이 없는 사람의) 80가지 본능적인 행위를 요약한 것이다. 1, 2, 3 단계의 직관은 미묘한 몸이 특정한 상태에 도달할 때 나타나는 마음 상태이다.
티벳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이런 미묘한 마음이 있으며, 누구나 이 세계를 체험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미묘한 차원의 몸과 마음을 체험적으로 알고 느끼기 위해서는, 이 차원에 대한 각성을 키우는 특별한 훈련을 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존재의 가장 깊은 단계인 지극히 미묘한 차원[영적인 차원]이 있다. 이 차원에 이르면 몸과 마음이라는 이원성(二元性)이 사라진다.
"투명한 빛을 발산하는, 에너지와 마음이 하나로 융합된" 불멸의 빈두[精液]가 이 차원의 몸과 마음이다. 불멸의 빈두는 설명하기도 곤란하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다.
불멸의 빈두를 어떤 독특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물질로 오해하면 안된다. 불멸의 빈두는 인간 존재의 지극히 미묘한 핵심으로써, 물질이면서 마음이고 마음이면서 물질이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미묘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살아 있는 지성적인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다. 불멸의 빈두는 영혼의 속알이다. 이 속알에서 발산되는 빛이 지성과 생명과 독자성의 근원이다. 지성과 생명과 독자성은 만물과 무한한 관계를 맺으며 변화한다. 하지만 영혼의 속알인 불멸의 빈두의 연속성은 끊어지지 않는다.
불멸의 빈두는 탐욕과 공격성과 무지에서 비롯되는 본능적인 행위에 영향을 받지 않으며, 모든 이원성(二元性)을 초월해 있다. 불멸의 빈두는 궁극적인 실재와 모든 붓다들의 진리의 몸과 하나이다.
'불성(佛性)'이라는 말과 '불멸의 빈두'라는 말은 는 같은 뜻이며, <티벳 死者의 書>의 목표는 바로 이 불멸의 빈두 즉 불성을 체험적으로 깨닫는 데 있다.
티벳 불교의 닝마파(派)에서는 수행이 최고 단계에 이르면 존재의 가장 깊은 본래 상태에서 휴식하는 특별한 방법을 가르치는데, '위대한 완성'(the Great Perfection)이라고 부르는 그 특별한 수행의 핵심이 바로 불멸의 빈두 행법(行法)이다.
모든 생명체의 가장 깊은 차원에는 불멸의 빈두가 있다. 불멸의 빈두는 모든 존재의 생명이며 영혼이다.
끝없는 환생 과정은 불멸의 빈두의 끊어지지 않는 연속성 때문에 생긴다. 불멸의 빈두는 항상 열려 있는 해탈로 들어가는 문이다. 휘몰아치는 고통 속에 있을지라도, 영혼의 속알인 불멸의 빈두는 늘 자유롭다. 불멸의 빈두는 평화롭고 투명하며 조화롭다. 불멸의 빈두는 창조된 피조물이 아니다. 붓다는 이 사실을 깨닫고 미소 지었다. 이 자리에서는 모든 붓다와 중생이 하나가 된다.
힌두교에는 에고 의식이 모두 부정된 자리에 남는 아트만[atman 眞我]과 파라마트만[paramatman 至高我]에 대한 개념이 있는데, 불멸의 빈두와 상당히 비슷하다. 붓다는 자신의 가르침에 대해 결코 교리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자신의 가르침의 핵심이랄 수 있는 '비어-있음[空]'에 대해서조차 그랬다. 절대주의자들에게는 '비어-있음'에서 '빔'을 강조했고, 허무주의자들에게는 '있음'을 강조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초기 불교가 '빔'에 매달린 반면, 후대에 탄트라와 티벳 불교가 '있음' 또는 '자아'에 대한 탐구로 방향을 바꾼 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붓다는 인간을 수없이 반복되는 윤회 과정을 거치고 있는 존재라고 가르쳤다. 그에 따르면 고정 불변의 절대적인 자아는 없으며, 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상대적인 자아만이 있을 뿐이다. 지극히 미묘한 불멸의 빈두에 대한 확실한 체험과 '비어-있음' 또는 '자기 없음'에 대한 완전한 깨달음은 그 내용이 같다. 그 자리에 도달하면 <마이트레야나타 Maitreyanatha>에 나오는 표현대로 '비어 있는 지고한 자아'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미묘한 차원을 철학적으로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은 아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창조적으로 죽는 법을 수행하는 요가 체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간 존재에 관한 도식만을 확실히 설명해 두는 것으로 그치기로 하겠다.
5. 죽음의 단계
앞에서는 세 차원의 몸과 마음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이제는 죽음의 여러 단계를 살펴 볼 차례다. 죽은 사람이 여러 단계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티벳 死者의 書>의 대전제이다. 죽는 사람은 소위 '8단계의 해체 과정'을 거친다. 죽음의 세계를 탐구한 티벳 사람들은, 죽는 사람이 아래에서 설명할 8단계의 과정을 거치면서 각 단계마다 그 단계에 해당하는 체험을 한다고 말한다. 해체의 각 과정에서 주관적인 체험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불교 요가를 닦는 남녀 수행자인 요기와 요기니들은 생명 에너지를 이해와 깨달음을 위해 쏟는 사람들이다. 죽음의 과정이 8단계로 진행된다는 모델은 그들의 수행 전통에서 확립된 것으로써, 죽음이라는 전이(轉移) 과정을 이해하고 조절하는 능력을 계발하는데 아주 유용한 역할을 한다. 8단계 중에서 처음 4단계는 '25가지 거친 요소의 해체'로 다시 세분되는데, 이 단계에서는 다섯 무더기[五蘊]와 그에 관련되어 있는 깨달음의 에너지인 지혜가 해체된다.
첫 번째 4단계의 해체 과정을 25가지 거친 요소와 연관시켜 고찰하게 되면, 죽음의 과정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가 가능해 진다
<도표 8. 죽음의 단계 : 해체와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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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가지 요소의 해체 체험
1. 흙[地]이 물[水]로 신기루
2. 물[水]이 불[火]로 연기
3. 불[火]이 바람[風]으로 반딧불
4. 바람[風]에서 의식[空]으로 밝은 촛불
(거친 차원의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는 마지막 단계)
5. 거친 차원의 의식이 1단계 직관으로 달빛 밝은 하늘
6. 1단계 직관에서 2단계 직관으로 햇빛 찬란한 하늘
7. 2단계 직관에서 3단계 직관으로 순수한 어두움
8. 3단계 직관에서 투명한 차원으로 투명한 새벽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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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형성하고 있던 흙[地]이 물[水]로 해체되는 1번째 단계에는, 분명한 형체를 가지고 있던 몸이 묽은 액체처럼 흐물흐물해지며, 따라서 사지[色]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음을 느낀다. 이때 망상과 관련된, 거울과 같은 지혜가 해체되고 시력이 떨어진다. 모든 것이 비오는 날 젖은 도로에 반사되는 영상처럼 흐릿하게 보인다.
2번째 단계인 물[水]이 불[火]로 해체될 때는 액체처럼 흐물흐물하던 몸이 건조되어 말라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며, 온 몸이 언 것처럼 감각 작용[受]이 마비된다. 이때 집착이나 자만심과 관련된, 모든 것을 평등하게 봄으로써 좋고 싫음을 초월하는 지혜가 감각과 함께 사라진다(동시에 집착하는 힘이 사라진다). 청각이 소멸되어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며, 연기가 자욱한 방 안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3번째 단계인 불[火]이 바람[風]으로 해체될 때는 추위를 느낀다. 이때 욕망이나 정욕과 관련된, 분석하는 지혜가 흐릿해 진다(동시에 욕망과 정욕의 힘이 사라진다). 들숨이 약해지면서 후각이 떨어져 더 이상 냄새를 맡지 못한다. 이 과정을 거치는 사람은 주위가 온통 반짝거리는 반딧불로 뒤덮인 듯한 느낌을 받는다. 또는 폭죽이 터질 때 퍼지는 불똥 같은 것으로 뒤덮인 공간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4번째 단계인 바람[風]이 의식 공간[空]으로 해체될 때는 숨이 멎고, 온 몸을 돌고 있던 에너지가 중추 신경계로 모두 철수한다. 이때 시기심이나 경쟁심과 관련된, 모든 것을 성취하는 지혜가 소멸된다(동시에 의지와 충동의 힘[行]이 사라진다). 혀가 굳고 미각이 사라지며, 피부의 감촉과 더불어 육체 의식이 사라진다. 이 과정을 거치는 사람은 마치 촛불을 켜 놓은 것과 같은 밝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 의학적으로는 이 때부터 죽은 것으로 취급된다. 육체의 기능이 모두 정지하고, 두뇌와 순환계가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다. 그러나 거친 차원의 의식은 거친 차원의 육체 기능이 모두 멈춘 다음에도, 80가지 본능의 힘과 더불어 3단계로 이루어진 미묘한 마음 차원에서 계속 활동한다. 거친 차원의 의식은 5번째 단계에 이르러서야 해체된다.
5번째 단계에 이르면 80가지 본능적 행위에 힘을 불어넣던 프라나[氣 또는 에너지]가 중앙 통로로 철수한다. 그리고 남성 엣센스인 흰 색 빈두[흰 색 '영적 각성 물질']이 중앙 통로를 타고 정수리 차크라에서 심장 차크라를 향해 내려온다. 그러면 마음-공간이 밝은 달빛으로 충만한 하늘처럼 느껴진다. (이 단계에서 거친 차원의 의식이 사라지고 미묘한 마음의 1단계 직관이 나타난다.)
6번째 단계에는 여성 엣센스인 붉은 색 빈두[붉은 색 '영적 각성 물질']이 생식기 차크라에서 심장 차크라로 올라온다. 그러면 마음-공간이 붉은 태양 빛으로 충만한 하늘처럼 느껴진다. (이 단계에서 1단계 직관이 사라지고 2단계 직관이 나타난다.)
7번째 단계에는 미묘한 마음의 2단계 직관이 사라지고 3단계 직관이 나타난다. 이 단계에서 흰 색 빈두와 붉은 색 빈두가 심장 차크라에서 만나 의식을 에워싼다. 그러면 ‘마음-공간’이 칠흙같은 어두움으로 꽉 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마지막으로 8번째 단계에 도달하면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사라진, 전혀 새로운 투명한 빛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도표 9. 단계별로 해체되는 무더기와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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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五蘊] 지혜 요소[五大] 매체[六根] 대상[六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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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色] 거울 지혜 흙[地] 시각[眼] 형태[色]
(1번째 단계에서 해체)
느낌[受] 평등 지혜 물[水] 청각[耳] 소리[聲]
(2번째 단계에서 해체)
지각[想] 분석 지혜 불[火] 후각[鼻] 냄새[香]
(3번째 단계에서 해체)
의지[行] 성취 지혜 바람[風] 미각[舌] 맛[味] 촉각[身] 감촉[觸]
(4번째 단계에서 해체)
의식[識] 궁극적 지혜 공간[空] 마음[意] 비감각 대상[法]
(5번째 단계에서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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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과정이 여기에 이르면 한 존재를 구성하고 있던 핵심 요소인, 심장 차크라에 있는 6겹의 매듭이 풀린다. 이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 수태되는 순간부터, 좌우측 중앙 통로[이다와 핑갈라]가 심장 차크라를 6겹으로 단단히 에워싼다. 그리고 그 6겹의 심장 매듭을 중심으로 중추 신경계가 형성된다. 그런데 이제 그 매듭이 풀리는 것이다.
6겹의 매듭이 완전히 풀리면 심장에 갇혀 있으면서 진화적 행위의 정보를 낱낱이 기억하고 있는, 지극히 미묘한 차원의 의식[靈]이 해방된다. 이 순간이 진정한 의미에서 죽음의 순간이며, 이 순간이 곧 죽음 중간계이다.
지극히 미묘한 차원의 의식에 대해서는 어떠한 설명도 불가능하다. 존재의 핵심인 지극히 미묘한 순수 의식의 빛은 유한과 무한, 시간과 영원, 주관과 객관, 자기와 남,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이원성(二元性)을 초월해 있다. 그 안에는 무지와 깨달음이라는 분별도 없다. 그 빛은 너무나 투명하기 때문에 생전에 준비를 하지 않은 사람은, 막상 그 상태에 도달해도 그 빛을 의식하지 못한다.
죽음의 단계를 밟는 사람은 3단계 직관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의식을 잃는다. 그런 다음 깜깜한 상태를 지나 새로운 의식 상태로 돌아오는데, 마치 깊은 잠을 자다 갑자기 깼을 때처럼 주변 상황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몽롱한 상태로 돌아온다. 죽음 중간계를 통과하는 법에 대한 안내는 모두 이 순간에 주어진다.
즉 <티벳 死者의 書>에 나오는 죽음 중간계의 길을 안내하는 가르침은, 이승에서의 습관적인 삶을 떠나 지극히 미묘한 의식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기쁨, 자유, 완전한 지성, 풍부한 감수성으로 충만한 존재의 본래 상태 즉 완전한 깨달음의 길로 안내하고자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연결점에서, 대부분은 완전한 무의식 상태로 여러 날을 보낸다. 3번째 단계의 직관을 거친 다음 무의식 상태가 되는데, 그 무의식 상태에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혼란스러움이 깃들어 있다. 그 안에는 또 절멸될 것이 아닐까 하는 무의식적인 두려움도 깃들어 있다.
그래서 투명하게 맑은 빛이 자신의 가장 깊은 근원임을 인식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 빛 속에서 온 우주에서 가장 사랑스럽고, 강력하고, 안전한 존재들과 영적으로 하나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란과 두려움 때문에 그것을 거부한다. <티벳 死者의 書>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기가 바로 이 때이다.
죽기 전에 죽는 훈련을 해 두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지 못했다면 죽음의 길을 가는 동안 그 길에 대한 안내를 받는 것이 좋다. 물론 수행이 전혀 없는 사람은 그런 안내를 받아도 자기 중심적인 본능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고도의 에너지 위기 상황인 이 시기에 밀려오는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한 해탈을 이루기가 어렵다.
심장 차크라를 둘러싸고 있는 6겹의 매듭이 풀리는 순간은 대단한 위기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동안 그 매듭을 점차 느슨하게 푸는 훈련을 하는 것이 좋다. 그러면 죽음의 길을 가는 동안 거치는 매듭이 풀리는 순간에, 자신이 해체되는 듯한 느낌에서 비롯되는 극심한 고통을 피할 수 있다.
이런 해체의 과정을 지나는 동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맑고 투명한 빛 속에서 쉬지 못하며, 자신들의 본래 상태인 자유와 행복 속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 또 자신이 모든 생명체와 기쁨을 나누는 무한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의식은 맑은 허공을 가로질러, 해체 과정과는 반대 순서를 밟아 다시 거친 육체의 세계로 되돌아온다.
죽음의 과정과 반대 순서로 진행되는 환생 과정은 이렇다.
먼저 투명한 빛 속에 있던 의식이 몽롱한 흑암 상태의 3단계 직관이 된다. 다음에는 밝은 햇빛 같은 2단계 직관과 밝은 달빛 같은 1단계 직관 상태를 통과한다. 본능적인 직관 단계를 지난 다음에는 자신의 영적인 유전자 - 각 사람의 영적인 유전자[씨]의 특성은 전생의 행위의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 속에 암호처럼 기록되어 있는 진화 패턴의 이미지에 따라, 5가지 근본 요소[地, 水, 火, 風, 空]를 취해 존재를 재구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몸과 마음은 한동안 꿈 속의 존재처럼 유동성을 갖고 중간계에 머문다. 그러다가 연꽃이나 자궁이나 알이나 축축한 곳에 깃들어 거친 차원의 존재로 구체화된다.
중간계 기간의 에너지 체(體)는 매우 미묘하고 유동적이다. 의식의 힘도 강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지성적인 상태에 있다. 따라서 이 때야말로 <티벳 死者의 書>의 내용을 읽어 주거나 정신적으로 전달해 줄 수 있는 최적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환생 과정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다. 처참한 존재 상태로 태어나는 것을 막고, 바람직한 상황에 태어나도록 유도할 수 있다. 이것이 <티벳 死者의 書>라고 알려진 <中間界에서 듣고 이해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게 하는 위대한 책>을 지은 사람이 의도했던 가장 중요한 목적 중에 하나이다.
중간계에서는 의식이 마치 유령과 비슷한 중간계의 몸을 갖고 있다. 그 몸은 마음의 이미지가 만들어 낸 일종의 에너지 체(體)로, 우리가 꿈 속에서 경험하는 미묘한 몸과 비슷하다. 그러나 아무리 미묘해도 몸은 몸이며, 그 몸이 해체 순서의 반대 과정을 밟아 자궁 속에 수태되는 순간 거친 차원의 몸으로 변한다. 그때 일종의 '작은 죽음 과정'(minideath process)을 체험한다.
앞서 설명한 대로, 죽음의 8단계 해체 과정은 이승 중간계의 몸이 투명한 의식의 빛으로 전이해 가는 과정을 밟는다. 그런데 (저승 중간계의 입장에서 보면 이 역시 해체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환생이라는 8단계 해체 과정은 죽음의 과정과는 반대로 투명한 의식 상태에서 점차 거친 차원의 몸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실제로 우리는 깊은 잠에 빠지고, 꿈을 꾸며 꿈 속에서 꿈을 현실로 여기고, 또 꿈에서 깨어나 거친 차원의 몸으로 되돌아 올 때 해체 과정을 경험한다. 보통은 그 과정의 전이(轉移)가 순간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중간계와 관련된 명상 수행에서는 이런 각 과정의 전이를 충분히 의식하는 상태에서 천천히 경험하기 위해서, 그리고 어떤 상태로 옮겨가든지 명료한 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서 고도로 집중하여 깨어 있는 훈련을 한다. 이것은 티벳 사람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일구어 낸 죽음에 관한 과학으로서, 그들은 죽음에 관한 이러한 도식을 마음 속에 늘 간직하고 마스터하고자 한다.
6. 해탈이란 무엇인가?
의학은 의술의 바탕이다. 마찬가지로 죽음에 대한 과학은 죽는 방법의 토대가 된다. <티벳 死者의 書>를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명료한 의식을 가지고 죽음의 과정을 탐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분명히 이해하여야만 한다. '그 자리에서 해탈'이라는 말에서 '해탈'이란 무슨 뜻일까? 만물의 궁극적인 실체가 비어 있다는 뜻인가? 아니면 자유라는 뜻인가?
<中間界에서 듣고 이해함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게 하는 위대한 책>이 약속하고 있는 '그 자리에서 해탈'이란 일종의 '완전함'을 가리키는 말인가?
아니면 '기쁨'이나 '현상계에 다시 태어나지 않음' 또는 '고통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불교는 과연 현실 도피적인 종교이며 <티벳 死者의 書>는 현실 도피를 위한 일종의 처방인가?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 불교 자체에도 해탈과 자유에 관한 이론이 하나 둘이 아니다. 붓다의 근본 가르침인 4가지 고귀한 진리[四聖諦] 중에서 3번째인 니로다(nirodha)의 문자적인 뜻은 '단절'인데, 고통의 단절[滅]을 의미한다.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도달하는 궁극적인 실재 상태를 가리키는 니르바나[涅槃]라는 말의 문자적인 뜻은 '(촛불이) 꺼짐' 또는 '사라짐'이다.
붓다 당시에는 여러 가지 모습의 지적인 금욕주의가 퍼져 있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영적인 분위기였다. 금욕주의자들은 깨달음이 없는 삶에서 비롯되는 속박에 넌더리를 치며, 강력한 초월적인 사마디[三昧]를 통해 몸과 마음을 절멸시키고자 했다. 붓다가 이원적인 냄새가 풍기는 니르바나라는 개념을 도입한 것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였다.
붓다는 니르바나가 마치 금욕주의자들이 그렇게도 열렬히 갈구하는 최종적인 초월 상태인 것처럼 말했다. 그가 그런 가르침을 펼 때 그는 이미 깨달음을 얻어 니르바나에 도달한 붓다였다. 그는 인도 전역을 돌면서 가르침을 펴는 동안에도 결코 니르바나에서 분리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현실적인 존재인 동시에 초월적인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죽음을 '궁극적인 니르바나(parinirvana)'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와 해탈을 일종의 현실 소멸이라고 생각하는 다분히 개인주의적인 이원론에 사로잡힌 사람들을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자기 중심주의에 중독된 사람들은 -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한데 - 자기라고 하는 고립된 존재가 있으며, 습관적으로 그게 바로 '나'라고 생각한다. 거의 무의식적으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있는 그들 속에는 망각에 대한 은밀한 갈망이 깃들어 있다. 그들에게는 망각이 혼란으로부터의 완전한 분리를 의미한다. 그들은 그런 망각 상태에 도달하면 소란스러움도 없고, 책임지고 돌보아야 할 가족도 없고, 육체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괴로움도 없으며, 따라서 진정한 기쁨을 맛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그들은 위험한 요소나 상처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고, 망각 상태에 이르면 말 그대로 모든 괴로움이 잊혀질 것으로 본다.
그런가 하면 현대인들 중에는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감정적인 절멸주의와 현실 도피주의에 강한 거부감을 표시하며, 현실 참여를 강력히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강하게 현실 참여를 부르짖는 것은, 근본적으로 망각에 대한 두려움이 그들 내면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식으로든 망각이 찾아 올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두려워한다. 따라서 망각 상태가 되면 모든 것이 잊혀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에게 지옥이니 뭐니 얘기하는 것은 씨가 먹히지 않는다. 반면에 자멸을 초래하는 전쟁이나 마약 중독 또는 니코틴이나 알코올 중독을 통해 멸망을 향해 치달리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다. 지금 이러한 절멸주의가 온 세상을 휩쓸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 내면을 살펴보면, 이런 절멸주의자들의 행동은 단절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기본적인 정신 상황이 이러하므로, 니르바나를 마치 행복감이 넘치는 지고한 망각 상태인 양 말하는 것은 상당히 기민하고 효과 있는 전술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무(無)를 탐닉하고 공허한 사마디를 추구하는 사람을 이런 방법으로 이끌어 들인 다음, 사라지는 것은 삶이 아니라 무지와 오해와 에고에 대한 집착과 주관과 객관을 가르는 망상일 뿐임을 알려 주어, 그들의 삶이 영속적인 행복과 기쁨이 넘치는 삶으로 바뀌게 된다면 이 방법이야말로 더 없이 훌륭한 방법이지 않겠는가. 에고라는 올가미를 뒤집어쓰고 누리는 세상의 자그마한 행복은, 현실 속에서 현실을 초월하여 누리는 행복에 비하면 허접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에고의 껍질을 깨고, 현실 속에서 현실을 초월하는 깨달음을 얻으면 궁극적인 희열이 보너스로 따라 온다. 이 희열이 진정한 의미의 해탈이고 자유다. 이 상태에 도달한 사람은 독립된 고정 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존재와 사물이 무한하고 영원한 관계의 그물로 짜여 있음을 안다. 무와 망각에 대한 갈망은 사라지고, 자신의 운명이 무한하게 펼쳐져 있는 다른 존재들과 끝없이 얽혀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행복을 서로 나누고, 사랑을 베푸는 삶이 시작된다. 그렇게 나누고 베풀어도 자신이 누리는 궁극적인 니르바나의 자유와 희열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
다른 존재들과 사랑의 결합을 하는 것과 자신이 개인적으로 누리는 기쁨이 하나라는 사실은 이원론적인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으리라. 하지만 자신의 자유와 기쁨을 자발적으로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를 위해 바치는 사람은 그렇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 단절, 소멸, 종결, 그리고 자아 도취로부터의 해방은 진정한 행복과 참 사랑과 무한한 기쁨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다.
사실이 이러하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티벳 死者의 書>의 저자가 말하는 '해탈'의 의미를 이해하기가 한층 수월해진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상황이 이러하다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티벳 死者의 書>가 말하는 해탈을 죽은 다음에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유물론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은 일종의 망각으로 오해할 가능성이 크다. 해탈이 만약 그런 종류의 망각이라면 그 세계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나 삶을 변형시키는 가르침은 필요성도 없고 존재할 가치도 없으리라.
요점을 명확히 하기 위해, <명상을 통한 해탈> 문헌에 속하는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8장을 보라)에서 뽑은 짤막한 철학적인 구절을 인용해 보겠다. 파드마 삼바바는 여기에서 모든 종류의 불교가 최고의 목표로 설정하고 있는 해탈, 니르바나, 진리 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세 점의 시간의 문을 통과하려면 -
과거는 맑고 텅 비어 자취도 없으며,
미래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것이며,
현재는 만들어 낸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일 뿐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시간이 이러함을 알고,
있는 그대로의 그대 자신을 볼 때,
투명한 보는 행위만 있을 뿐
보이는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투명한 바라봄이
있는 그대로를 직접 바라보는, 밝은 지성이다.
이 지성이 바로 아무 것도 첨가되지 않은 맑은 공(空)이며,
이원성이 사라진 투명하고 순수한 공(空)이다.
이 상태는 어떤 고유한 형태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이 상태는 밝고 분명하다.
따라서 완전히 멸절된 상태가 아니다.
이 상태에서는 다양한 것이 동시에 식별된다.
따라서 일종의 단일체라고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라는 생각이 없고,
나눌 수 없는 하나라는 느낌이 든다.
이 상태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각성이며,
있는 그대로의 실체다.
이 구절은 니르바나의 궁극적인 실상을 묘사하고 있다. 니르바나는 '위대한 완성'의 영역이자 진리의 영역이다. 또 궁극적인 자유와 해탈이며, 불성(佛性)을 향한 진화의 정점이다. 깨달음을 얻어 니르바나에 도달하는 것은 <티벳 死者의 書>에 담겨 있는 모든 가르침의 목적이기도 하다. 원칙적으로 보면 니르바나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일상적인 상황일지라도, 니르바나는 모든 현재 상황의 내적인 본질이기 때문이다. 니르바나를 깨닫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그대 자신을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보는 행위 자체를 주시해야 한다.
그대는 그대 속에 자아라고 하는 고정 불변의 독립된 알맹이가 있고, 그대의 생각과 행위가 거기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관점을 180도 바꿔서, 보는 행위 자체를 보려고 해 보라. 그러면 그대라고 하는 고정 불변의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데카르트도 이런 사실을 알았다. 그는 생각이 일어난 다음에는 생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생각이 시작하는 지점에서는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인식 주체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하면서, 발견할 수는 없지만 인식 주체라는 알맹이가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기 때문에 인식 행위가 일어난다고 거칠게 주장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했지만, 의심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고 기정 사실로 받아 들였다.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발언은, 끝까지 의심하기를 포기한 게으른 불교 철학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데카르트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려면,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과 보는 행위 자체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보는 자'라는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실체가 없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시작되는 지점을 찾아내기 위해 끝까지 파고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 나가다 보면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의 분별이 사라지고, 보는 행위만 투명한 상태로 남는 단계에 도달한다. 그 투명성은 무한대로 확장되어 나간다.
인식 주체는 발견할 수 없다는 데카르트의 말은 맞다. 그러나 주체가 없다면 대상도 없는 것이다. 스스로 자신도 알지 못하는 주체가 다른 대상을 확실하게 인식한다는 것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보는 행위 자체를 응시하는 통찰 속에서는 주관과 객관의 분별이 녹아 버리고, 모든 것이 자유로운 상태로 투명하게 존재한다. 이 투명성이 바로 위에 인용한 구절에서 말하고 있는 '있는 그대로를 직접 바라보는 순수한 지성'이다. 이 상태는 밝고 분명하며, 직접적이고, 비이원적이며, 어떠한 고유한 성질도 가지고 있지 않다. 심지어는 비어-있음[空]이면서도 비어-있음[空]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그 어떤 고유한 성질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이 명료한 지적인 각성은 멸절되지도 않고 망각되지도 않는다. 또 독자성을 가지고 있는 실재인 것이 분명하지만, 다른 것에 의지해서 존재하거나 또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존재하는 그런 이원성의 실재가 아니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이 자유로운 상태를 맛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그 자리에서 해탈을 가능하게 하는, 모든 사람의 진정한 본성인 영원 불변의 금강실체(金剛實體)이다. 우리의 진정한 본성은 붓다이다. 불성(佛性)은 힘들여 만들어 내야 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우리의 영혼 자체가 이미 그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혼은 모든 것이 소멸되어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영역이 아니라, 모든 존재와 사물이 투명한 상태로 존재하는 '비어-있는'[空] 영역이다. 영혼 속에는 아무 것도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 투명한 비어-있음 속에는 모든 것이 아름다움과 기쁨을 나누는 상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그 관계의 폭과 깊이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다. 우리들 내면의 붓다의 진리의 몸(지혜와 자유), 우리들 내면의 붓다의 깨달은 몸(기쁨과 희열), 그리고 우리들 내면의 붓다의 나투는 몸(자비와 사랑)은 동시에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하여 그들 자신의 본성이 자유와 기쁨과 사랑임을 깨닫도록 돕는다.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존재와의 이 객관적인 동일시 속에는
나누어질 수 없는 (붓다의) 세 몸이 온전히 담겨 있다.
모든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진리의 몸,
빛과 자유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깨달은 몸,
모든 곳에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나투는 몸이
그 속에 하나로 깃들어 있다.
이 셋이 일체를 이루고 있는 이것이
곧 실재의 모습이다.
이렇게 볼 때 <티벳 死者의 書>가 목표로 하고 있는 해탈이 망각이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진리의 몸은 우리들 저 너머에 초연하게 존재하는 몸이 아니다. 그 몸은 우리들 내면에서 무한한 지혜의 빛을 발산하며, 자신의 아름다움 속에 거하고 있다. 동시에 자신이 고립된 존재라고 느끼는, 에고에 중독된 처량한 존재들을 사랑과 자비의 힘으로 끌어안고 있다.
사람들은 <티벳 死者의 書>의 저자인, 연꽃에서 태어난[化生] 파드마 삼바바를 붓다의 세 몸이 세상에 나타난 존재였다고 믿는다. 그는 저 높은 곳에서 시나 읊조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인간 현실 속으로 들어와서 자유와 해탈에 이르는 실제적인 통로를 알려 주었다. 그는 <지적인 이해력을 통해, 있는 그대로를 봄으로써 그 자리에서 해탈에 이르는 길>의 다른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 실체 세계로 들어가는 강력한 방법을 터득하려면
지금 그대의 각성이 바로 실체 세계임을 알아야 한다.
지금 그대 마음의 본성이 아무 꾸밈없이 명료한데,
그대는 왜 "나는 마음의 본성을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깊게 생각할 마음이라는 대상도 없고,
그대의 지성이 스스로 밝게 빛나고 있는데,
그대는 왜 "나는 마음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마음 속에 이미 생각하는 존재가 있는데,
그대는 왜 "나는 그것을 찾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가?
(깨닫기 위해) 지금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는데,
그대는 왜 "나는 아무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가?
지금 있는 그대로 있으면 되는데,
그대는 왜 "나는 고요히 머물 수가 없다"고 말하는가?
지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만족할 수 있는데,
그대는 왜 "나는 그것을 할 수 없다"고 말하는가?
명료함, 각성, 비어-있음은 그 자체로 나눌 수 없는 것인데,
그대는 왜 "수행이 효과가 없다"고 수행을 들먹이는가?
모든 조건과 상황이 있는 그대로 자유롭고 자발적인데,
그대는 왜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생각과 해탈은 동시적인데,
그대는 왜 "벗어날 길이 없다"고 말하는가?
그대의 지성이 이와 같은데,
그대는 왜 "나는 그것을 모르겠다"고 말하는가?
이 가르침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을 해탈과 연결시키고 있다. 표현도 아주 단순 명료하다. 이 구절들은 중간계의 여행을 안내하는 <티벳 死者의 書>의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에고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아! 그런가'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공백을 만들어 준다. 그리하여 에고를 벗은 자유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문 역할을 한다. 각 구절은 에고의 독단과 자기 연민 그리고 스스로 해탈에서 멀어지려고 하는 어리석음에 대해 도전하면서, 동시에 지겨움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든든한 토대 위에 서도록 유도하고 있다. 현대 서구 문화 속에 깊이 스며 있는 영적인 허무주의를 강화시키는 내용으로 오해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비어-있음'과 '없음'의 차이를 알고 '해탈'과 '망각'을 혼동하지 않는다면, 이 가르침은 전혀 해로울 게 없다.
이제 지금까지 쌓은 토대를 발판으로, 티벳 사람들이 수행하고 있는 창조적으로 죽는 방법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