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봄호『문장21』신인상 수상 박종승 시인
심사평
상상력의 깊이
시인은 사물을 대상으로 그가 선택한 물상들 속에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상상의 그림을 만들어가는 존재이다. 그러한 상상력의 바탕 위에 그려진 언어의 그림들이 기교면이든 내용면이든 귀결되는 종착점은 인간의 풍경을 요구한다. 그것은 시인의 정신 질감 속에 들어 있는 여러 체험 요인들과 복합적인 상관속에서 싹을 틔우기 때문이다.
이번에『문장21』에 응모한 시작품은 예년에 비해 상당한 수준과 안목을 갖고 있었다. 치열한 시정신과 예민한 시의 촉각은, 서정시의 새 길을 열기에 충분했다. 특히 박종승의 작품「인간인형」외 네 편의 시는 새로운 각도의 신선한 문체가 돋보였다. 이 작품 속의 ‘인간인형’의 상황은, 손주들이 할아버지를 인간인형처럼 가지고 노는 것에서 촉발된다. 시적 현실의 세태를 예리하게 투시한 능숙한 솜씨가 볼 만할 뿐 아니라, 작금의 노인 세태의 서글픈 현실을 투영하고 있다는 점을 높이 샀다.
그의 또 다른 작품「푸른 말」은 “나뭇잎이 푸른 말”을 한다는 놀라운 시적 인식은 볼만하다. 보이지 않는 바람 속에서, 나뭇잎들이 “작은 우주” 하나씩을 흔들고 서 있는 이미지는 서정시의 장점이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들이 밤낮으로 노는 장면은, 신비하고 아름답다. 또한 달빛과 “수화手話”를 하며 노는 청솔가지들의 “푸른 말”은, 서늘한 가을 풍경을 한 단계 더 높은 격조의 세계로 끌어올린다.
심사위원∥이문걸, 김철, 김종, 윤일광, 김동원, 최철훈
수상작
인간 인형 외 4편
그의 예쁜 손주들은
인간 인형을 가지고 논다
그 인형은 아이를 꿈찍이 사랑하지만
서로 잘 지내지는 못한다
그건 달라진 세상 때문
첫새벽부터 밤을 낮 삼아
그가 쳐놓은 울타리에
스스로 갇혀 산다
인간 인형이 되고서야
성큼 어른이 되어 버린 그
엉덩이 하나쯤 밀치면
그의 자리 늘 비어 있지만
지금은 모든 이의 자리다
앞에서 달아나는 세월
조금만 느리게 갔으면 좋으련만
살아보니 그래야 된다 할 것도 없고
그러면 안 된다 할 것도 없는데
문지방이 달라진 세상 밖이란 걸
어렴풋 짐작은 간다만
예쁜 손주들은 오늘도 인간 인형 가지고 논다
오도암 가는 길
오도암 가는 길에는
가시넝쿨에도 박새 길이 있네
산벚꽃은 피고 지고
봄은 또 찾아왔건만
내려갈 길 허허로워
갈 길 쉽게 찾이 못하네
뜻 깊어 구름 덮인 영산 자락
에워싼 참나무 숲 바람 소리
계곡물 맑은 물소리
가득 들려오는데
스님은 속세와 오도암 사이
싸리비로 훨훨 구름을 쓸어내네
그 옛날 마음 하나 잃지 않으려고
소망 한 걸망 지고 와
간절히 풀어놓던 어머니의 산사
그 합장 오늘 다시 피게 하소서
나, 꽃 핀다 이제
나, 꽃 핀다 이제
마음 한 잔 매화 한 잔
겨울 눈 내리는 날
나, 꽃 핀다 이제
우전차 앞에 두고
여윈 잎맥 그대로 드러낸 채
뜰 앞 햇살 곱게 펴어
빛바랜 사진 속 그녀를 들춰 보네
분홍빛 두 볼은
꽃 피어 봄날인데
비껴간 운명
바람 소리 차가와도
나, 꽃 핀다 이제
흰 눈 한 잔 매화 한 잔
풍경
가을 들녘 속에는
지나가는 기차가 있고
벼 베는 아낙이 있고
한낮의 풍경이 있네
이따금 고개를 들었다 내렸다
침묵 속 햇볕을 보는 농부
마을 앞 느티나무 그 아래 앉아 쉬는
늙은 군상들의 소근거림
외로움인지 슬픔인지 모를 파란 하늘은
저녁으로 가는 시를 쓰는데,
한창 노을은 한 됫박 구름을 퍼내어
전망 좋은 정자에 뿌리고 있네
푸른 말
나뭇잎은 푸른 말을 하네
만상이 귀 쫑긋 세울 즈음,
보이지는 않아도 바람은
작은 우주 하나씩 흔들고 있네
어둠이 잠시 비켜 서 있네
열린 창밖 내다 보노라면
청솔가지 흔드는 서늘한 가을 곁에
달빛은 수화手話를 하네
한줌 바람결에 흔들리는 것
어디 드러난 몸뿐이냐고,
길섶 여린 잡초의 질긴 삶뿐이냐고,
나뭇잎은 푸른 말을 하네
그대로 듣고 보고 받아들이면 되는
모든 게 마음의 일인 것을
푸른 나뭇잎은 푸른 말을 하네
당선소감 / 박종승
현실 공간과 시의 공간은 둘이 아니다
‘시를 쓸 때만 시인이다.’란 말이 떠오릅니다. 겨울을 밀어낸 봄의 훈풍으로 시를 쓰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줄곧 열심히 창작을 해오면서, 꽃이 왜 아름다운지를 당선의 소식을 접하고 보니 그 참뜻을 알 것 같습니다. 몸과 정신이 다르지 않듯, 저는 ‘현실 공간과 시의 공간이 둘이 아니다.’라고 생각합니다. 소박하지만 제 체험의 깊이를 시 행간 속에 깊이 밀어 넣고 싶습니다. 코끝을 타고 전해오는 매화꽃 향기처럼, 이 초봄 한없이 기쁩니다. 제 시가 모든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는 없지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데 아름다운 다리가 되고 싶습니다.
봄바람에 실려 온 당선 소식은 제 평생 잊을 수 없는 시의 향기로 남았습니다. 늘 소심한 저를 따끔한 질책과 푸근한 이해로 시작詩作을 열어주신 김동원 시인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한국현대시의 폭 넓은 토론과 힘들 때마다 곁에서 시의 자긍심을 키워준 텃밭시인학교 문우들에게 이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 쓰기를 더욱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씀 드립니다. 끝으로 늦깎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부족한 제 시를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과『문장21』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박종승 약력 : 경북 군위 출생. 영남일보 주최 독도 문예대전 특선 입상(2011). 아세아문예 시부문 신인상 수상. 국제문예 신인상 수상(2012). 대구문협, 군위문협 회원.
2017 여름호『문장21』신인상 수상 박정섭 시인
심사평
시는 사물에게 말 걸기이자, 말 듣기
이번 여름 호에는 많은 분들이 응모를 해 오셨다. 시를 쓰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밝고 건강하다는 의미다. 선자의 마음 같아서는 모두 뽑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시는 사물에게 말 걸기이자, 사물의 말 듣기이다. 박정섭의「이명(耳鳴)」외 4편은, 근래에 보기 드문 서정과 서사의 향연이다. 특히 당선작「이명(耳鳴)」은 시행의 압축보다 서사적 이야기 구조를 가진 잘 짜여진 작품이다. 어린 날 벌에 쏘인 사건에서부터 이 시는 촉발한다. “목 뒤에서 번쩍하고 별”이 보였다는 첫 행은, 치고 들어간 시적 재치가 생기를 얻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이런 아름다운 서정적 풍경은, 이제 도시에서는 두 번 다시 못 볼 시골 정서이다.
〈“흙을 뿌려라, 얘야” 호령에 놀란 나는 정신없이 흙을 집어 허공으로 던졌어 후드득 흩어지는 흙비 속에 날개 다친 벌들이 미친년처럼 춤추었지 회오리치는 벌 무리 속에서 아버지는 다리를 후들거리며 나무기둥에 찰싹 붙어 계셨지 어느새 벌들은 쇠똥을 칠한 벌통 속으로 다 흘러들어갔어 다시 하늘은 푸르고 시냇물 흐르고 바람은 산들거렸지 목덜미에 느낀 뻐근한 통증, 산들은 뱅글뱅글 빠른 속도로 회전 했어 벌에 쏘인 세상은 어린 기억 속에 뒤죽박죽 꿈속처럼 뒹굴고 있었지.〉―「이명(耳鳴)」일부
벌에 쏘여 저 혼자 들리는,「이명(耳鳴)」이란 시 제목도 멋지거니와 벌떼를 피해 다리 밑으로 달아난 아버지와 아들의 그 급박한 정경은, 오히려 정겹기까지 하다. 시「이명(耳鳴)」은 산문시가 갖는 느슨함이 없을 뿐 아니라, 내재율의 유장미로 인해 ‘절제와 균형감’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하겠다.
좋은 시를 쓴다는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 되었든 간에 대상에서 영감을 피워 올리면서 관찰자로서의 끈기와 상상력의 바탕 위에서 깊이 천착할 때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심사위원 : 이문걸, 김철, 김종, 윤일광, 김동원, 최철훈
수상작 이명 외 4편
이명(耳鳴)
목 뒤에서 번쩍하고 별이 보였지 갑자기 하늘에서 신비한 화음이 내려오고 있는 거야 쳐다 본 허공은 온통 벌떼로 가득 했어 두려움에 떨며 나는 다리 밑으로 숨었지 아버지는 굴피로 만든 동그란 방패 하나 달랑 들고 벌떼 속으로 달려들었지 엉킨 뭉게구름은 쉼 없이 흐르고, “흙을 뿌려라, 얘야” 호령에 놀란 나는 정신없이 흙을 집어 허공으로 던졌어 후드득 흩어지는 흙비 속에 날개 다친 벌들이 미친년처럼 춤추었지 회오리치는 벌 무리 속에서 아버지는 다리를 후들거리며 나무기둥에 찰싹 붙어 계셨지 어느새 벌들은 쇠똥을 칠한 벌통 속으로 다 흘러들어갔어 다시 하늘은 푸르고 시냇물 흐르고 바람은 산들거렸지 목덜미에 느낀 뻐근한 통증, 산들은 뱅글뱅글 빠른 속도로 회전 했어 벌에 쏘인 세상은 어린 기억 속에 뒤죽박죽 꿈속처럼 뒹굴고 있었지.
너덜강 건너가기
한 순간 날아올라 애급의 사각뿔이거나
토함산 암굴의 본존불이거나
그 언덕 아래 웅크린 보탑 몸돌이거나
영나라 솔즈베리 평원 돌기둥으로 서거나,
다부진 입매에 숨긴 한 여름 기억 뒤로
수억 년 묵언으로 다져진 고수의 폼으로
순간의 비상을 위해 발톱을 접고,
무게중심 든든히 단전에 모우고
한 덩이 정물로 꿈꾸듯 숨쉬며
꽃처럼 나무처럼 제각각 제 빛깔로
치열한 존재의 현장에서 침묵하다,
간혹 하수상한 시절 오면,
어느 못된 놈 마빡으로 날아가는 짱돌 하나로 살아갈지니……
춤추는 칼
- 마산어시장을 지나며
여기선 모두가 손질되어야 한다
껍질은 벗겨지고 뼈는 추려진다
살은 발려지고 껍데기는 버려진다
몸은 썰어지고 고기는 져며진다
고추장에 세파(世波)를 섞으면 초장이 되고
된장에 땀을 넣으면 양념장 되고
겨자는 간장에 넣어 눈물이 된다
회가 되어 날걸로 먹히든지
말려져 건어물이 되든지
삶을 뒤집어쓰고 튀김이 되든지
숯불에 구워져 아가리를 벌리는 우리
좁은 수족관에서도 유혹은 강하지
한 순간 내려치는 칼날 몸을 가를 때
부르르 떠는 너와 나의 경계
쭈꾸미 할매 쭈그려 앉고
명태 할배 평상위에 걸쳐져 있는
마산어시장 비린내 풍기며
춤추는 칼
땅꾼
비 개인 숲속 햇살 퍼지면
자루 하나 달랑 차고 뱀 사냥 떠났지
뱀과 맞닥뜨리면 긴장한 눈끼리 기를 겨루고
달아나는 미끈한 잔등 장화발로 누르고
찌그덕 찌께로 집어 올릴 때
그 나불대던 붉은 혀 나 잊지 못하지
여름 산바람 계곡물 휘돌아
도회의 대로는 능구렁이처럼 꿈틀대고
자잘한 골목길 교미 붙은 뱀처럼 엉켰는데
고단한 내 삶 꽃뱀 되고 구렁이 되고
간혹 독사처럼 독을 품기도 하지
내 어릴 적 꿈속은 늘 뱀이었지
슬며시 담을 넘어 마당을 지나
섬돌을 올라 안방으로 스며드는 뱀
두 다리를 기어올라 붉은 혀 날름대며
온몸에 휘감기며 뒤엉켜 함께 뒹굴곤 했지
세상길은 뻗어나 엉켜 어디론가 달리고
삶은 묵정밭처럼 무성한 녹음이 우거지고
이순으로 가는 숲길 가을은 깊어
내 고향 뱀골에 서리던 그 안개 지금도 자욱할라나
탁란(托卵)
너와 나 둘 아니고
내 것 네 것 다르지 않음을
이미 배워 알지만 서두
줄탁(啐啄)이 끝난 한 식경
놀라운 괴력으로 용을 쓰는 널 보며
카인의 환영에 당황한 나
붉은 동굴 속 머리 쑤셔 박고
반쯤 삭힌 먹이를 네 탐욕의 블랙홀
깊숙이 밀어 넣어야만 하는 오늘
인연이란
서로 속고 속이는 것
서로 뜯고 뜯기는 것
형제를 밀쳐 창밖으로 던지고
오늘도 너는 게걸스레 먹는 구나
아담과 이브를 감아 오르던
그 팜므파탈 독 사과
그 때 흔들리던 나뭇가지 나 기억하지
네가 가리키는 붉은 하늘과
내가 바라는 하늘이 겹쳐 흔들렸지
오늘도 붉은머리 뒤엉킨 검불 털며
해질녘 한줄기 바람에 속고 있지
건너편 나뭇가지 위
뻐꾸기 한 마리 잎새 뒤에 숨어 키득대는데
당선 소감 / 박정섭
유쾌한 집짓기
내가 최초로 지은 집은 어릴 적 고향집 마당가 돌담 밑에 사금파리와 자갈을 모아 지은 아주 단순한 2차원의 집이었다. 초등학교 때는 하굣길에 동무들과 어울려 한 길 높이의 나무 가지와 잎들을 엮어 아프리카 정글식 원시 오두막을 지어보기도 했다. 사실 이 세상 우주는 원래 하나일 뿐이지만, 무한한 세계 속에 유한한 우리는, 곳곳에 자기만의 작은 집을 지으며 유쾌한 놀이에 빠지곤 한다.
시도 어쩌면 인간이 가지고 노는 기억의 언어놀이인지도 모른다. 나는 줄곧 시작(詩作)을 해오면서 표면에 드러나는 형상보다, 언어의 그림자에 더 관심을 가졌다. 될수록 시 속에 들어있는 시어들을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려고 무척 애썼다. 숲도 이따금 바람을 숨기듯, 나 역시 언어의 의미를 행간 속에 감춰 두며, 읽는 이로 하여금 그 보물을 찾기를 바랐다. 나는 정말 수년간 많은 시(詩)의 집을 지었다 부수곤 했다. 물론 시어 속에 들어있는 금싸라기를 주을 때엔 좋아서 뛰기도 하고, 행간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맬 때엔 종일 우울하기도 했다. 타인이 지은 집의 구조는 완벽해 보였지만, 밤 세워 지워 논 내 시의 집은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나만의 언어 감옥에 갇혀 불화하며 살고 있을 즈음,『문장21』에서 당선의 소식이 왔다. 그 소식은 본격적으로 시(詩)의 집을 지어도 된다는 지엄한 말씀으로 새겨들었다.
시인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형태의 집을 독창적으로 지어야 한다는 소명일 것이다. 나는 새처럼 하루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그런 멋진 울림통을 가진 집을 짓고 싶다. 그동안 함께 모여 시의 놀이를 해온 텃밭문우들에게 이 영광을 돌린다. 매번 부족한 부분을 지적하며 자상하게 도와주시던 김동원 선생님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생활이나 경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엉뚱한 집짓기놀이에 빠진 가장을, 군소리 없이 지켜봐준 아내와 가족들에게도 감사의 정을 표한다. 언젠가는 나의 이 어수룩한 집짓기가 부디 멋진 시집(詩集)으로 완성되어 당당히 제 모습을 드러내 보일 날을 고대(苦待)해 보며…….
박정섭 : 강원도 영월 출생. 2017『문장21』여름호로 등단.『시조문학』시조 신인상 수상(2015). 텃밭시학 동인. 현) 대구문인협회원, 창녕 영산고등학교 교사
2017 겨울호『문장21』신인상 수상 황손순 시인
심사평
달빛 한 그릇 먹은 죄
‘만물양아(萬物養我)’라 했던가. ‘세상 모든 것이 다 나를 길러준다.’ 하여, 시는 시 아닌 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연은 그 자체가 모두 시의 재료이다. 당선작 황손순의「한숨」외 4편은 우선 시가 참 편하게 읽힌다. 최근 시단의 자폐적 언어나, 생다지로 시어를 비틀어댄 흔적이 없는, 그야 말로 유행과는 한참 동떨어진 서정과 서경이 버물린 감동의 시이다. 일견 이런 유(類)의 시는, 행간 사이의 긴장미 약화와 의미의 단순성으로 인해, 자주 약점으로 지적되곤 한다.
그러나 시「한숨」을 읽다보면, 황 씨의 시적 내공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낮달 한 그릇 / 바람 한 그릇 / 퍼 먹다〉는 은유의 맛도 놀랍거니와, 바람을 ‘퍼 먹다’는 시적 발상이 한층 묘하다. 궁극엔〈시 세 그릇〉을 또 퍼 담을 수밖에 없는 화자의 숙명은, 이 세상 작가들의 고달픈 삶 같아 짠하다.
행간과 여백의 깊이가 긴 여운을 남기는「가뭄」도 비유의 맛이 잘 곰삭았다. 먼저 간 남편을 그리워하며 느낀 화자의 아픔을,〈갈라지고 메마른 / 마음 메꾸려고〉란 ‘가뭄’에 비유한 시법은 눈여겨 볼만하다. 행여나 죽은 남편이 돌아올까 삽짝 문 열어두고〈아랫목 / 이불속에 / 또, 따뜻한 밥 한 그릇 묻는다〉는 시행은 근대 농경사회의 따뜻한 풍경이다. 황 씨가 왜 시를 쓸 수밖에 없는지를, 가장 절실히 보여주는 시가「제비꽃 등에 업힌 막내 나비」로 보인다.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피란 중 오빠마저 저 세상으로 보낸 가족사는, 시인에겐 비극인 동시에, 축복이다. 개인의 트라우마야 말로 끊임없이 지워야하는 흔적이자, 시가 비집고 나오는 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시가 비유로 자신의 마음을 나태내고 그 시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은 여러 개의 답안을 제시할 수 있다. 이것은 시인이 저마다 인생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표정에서 나타난다. 시라는 정신의 그림을 앞으로 잘 그려나가길 바란다.
심사위원 : 이문걸, 김철, 김종, 김동원, 최철훈
당선작 한숨 외 4편
한숨
낮달 한 그릇
바람 한 그릇
퍼 먹다
뜬구름 잡느라
여기저기 부딪쳐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별 두 그릇
가을 두 그릇
꾸역꾸역
또 퍼 담는 시 세 그릇
새벽 빈 마루 혼자 앉아
몸 바뀌는 줄도 모르고
깊이 쉬는 한숨
가뭄
온 몸 팔자로 꼬이며
타들어가도
맨 날 기다린다
오지 않는 널
죽어도 보고 싶지 않지만
갈라지고 메마른
마음 메꾸려고
삽짝 문 열어놓고
행여 올까
아랫목 이불속에
또,
따뜻한 밥 한 그릇 묻는다
바람난 강냉이
두렁 하나 사이 밭에
한 알 한 알 심어 잘 자라준
강냉이 꺾어 와 옷 벗겼다
아이고
이 일 우짜마 좋노
내가 심은 강냉이 보라색인데
노오란 강냉이가 우얀 일이고
분통 터져 와드득 와드득 뜯다가
혼자 씨익 웃었다
숫바람 서방 놈이 꽃가루 묻혀
바람난 강냉이 치마 속에
저질러 놓은 흔적
보라색 노오란색 알록달록 강냉이
옷 벗겨 찜통에 찜질시켜
나랑 텃밭학교 나들이 갔다
동인들 강냉이 하나씩 들고 하모니카 불고
야한 농담 웃음보 터지게 한
참 즐거운 바람난 강냉이
이기 에민기라
내 속 다 파묵고
하나 둘 나오디마는
지 잘났따 설치대사이
난 고마 뒷전이데이
쑥쑥 커 가는 지들보마
안 무그도 배 부르제
암 이기 에민기라
하루하루 속잎 날수록
멀어져가는 저것들
뒷모습 바라보며
이놈들아
느그,
늙으마 이맘 알 것 나
힘없이 바라보다
떨어진
늙은 목화 떡잎
제비꽃 등에 업힌 막내 나비
오십년 유월 이십칠일
막내 나비 태어났다
나비 세상 첫 선 본지 일주일
아버지 세상 뜨시고
피란 갔다 온 작은오빠마저 가 버렸다
엄마는 충격에 외가 가 버리고
친구들은 학교 가는데
어린 제비꽃 언니
막내 나비 키우느라 공부 못 하고
칠순이 넘어 한글 공부 한단다
그 옛날 제비꽃 등에 업힌 막내 나비
예순을 훌쩍 넘겼다
나비 동생 오늘
제비꽃 귓등에 대고 속삭인다
언니, 키워 줘 행복해 !
《당선 소감 / 황손순》
달빛 한 그릇을 먹은 죄
팔공산 둘레를 끼고 우리 집은 들녘 한 복판에 있다. 이따금 노란 벼들이 익어가는 들판을 가로질러 칙칙푹푹 칙칙푹푹 기차가 달리는 풍경은, 고운 한 줄의 서정시 같다. 이런 구경은 팔공산과 늘 함께 하는데, 어쩌다 홀짝홀짝 한 잔 막걸리에 취하면, 안주는 풋고추랑 산 둘레에 흐르는 구름을 버무려, 하늘로 먼저 간 남편과 지짐이를 부쳐 먹는다.
그저 외로워 혼자 달빛 한 그릇을 먹은 죄 밖에 없는데, 언젠가부터 내 가슴 속에는 ‘시’란 것이 들어와 산다. 채진 밭에서 옥수수를 딸 때에도, 밭두렁에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볼 때에도, 가슴이 벌렁벌렁한 것이, 수상한 시골 아지매가 다 되었다. 이른 아침 까치가 내 원고지에 들어오면, 이내 다음 행은 참새가 물고가고, 시냇가 물방개랑 피라미 놈도 서로 끼워달라고 행간에 꼬리를 친다.
그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 옛날 봄 진달래에 미쳐 들로 산으로 천지사방 쏘다니던, 그 산골 소녀가 시인이 된다니 꿈만 같다. 먼저 팔공산 수태골에 사는 내 친구 구절초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해야겠다. 그리고 밤마다 달빛에 나와 앉아 나를 내려다보던 그 사람에게, 또 자식들에게도 행복한 이 마음을 알려야겠다. 무엇보다 텃밭시인학교 김동원 선생님께 진심으로 고마운 인사 올린다. 논두렁이 시가 되고 목화꽃이 시제가 되고, 아지랑이가 시의 마을에 산다는 것을 가르쳐주신 것이 고맙다. 이제 종일 밤바람 속에 헤매다 빈집에 들어와도 외롭지 않겠다. 수년 간 한솥밥을 먹은 텃밭문우들이 곁에 없었다면, 나는 참 외로울 뻔 했다. 끝으로 부족한 나의 글을 뽑아 주신《문장21》심사위원님들께 좋은 시로써 보답 드리고 싶다.
황손순 : 대구 출생. 2017『문장21』겨울 호로 등단. 텃밭시학, 대봉문학아카데미 동인. 현) 대구문인협회원.
첫댓글 박정섭 시인의 자료를 찾다가 올겨왔다.
신인상 수상 3분 다 등단소감, 울림이 있어서 옮겨왔다. 물론 등단 작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