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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김상철의 선물
그날 밤 9시경에 서울발 대한항공 518편은 근대리아의 근대공항에 착륙했다. 관제탑의 유도로 23번 게이트에 도착했을 때는 9시 15분이 되어 있었다. 예정보다 15분이 늦은 것이다. 송명길 관제사는 부산 출신으로 공군에서 제대한 후에 근대리아로 이주한 사내였다. 그는 마이크의 스위치를 켜고 518기를 호출했다.
「대한항공 오일팔, 삼십 분 후에 사십이 번 게이트로 이동하라. 그곳에 곧 노스웨스트가 들어온다.」
「공항경비대 책임자를 바꿔 달라.」
기장의 목소리에 주위의 관제사들이 모두 이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이맛살을 찌푸린 송명길이 마이크를 입에 바짝 붙였다. 도난사건이나 기내에서 싸움질이 가끔 일어났던 것이다.
「오일팔, 무슨 일이냐?」
「난 시체를 싣고 왔다.」
「뭐라고?」
관제탑 책임자는 이미 뒤에 서 있었고 대여섯 명의 관제사가 송명길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기장의 짜증난 듯한 목소리가 다시 관제탑을 울렸다.
「서울에서 시체를 싣고 왔다. 기내가 온통 피바다가 되어 있고
시체는 모두 스물다섯 구이다. 앰뷸런스는 필요 없다.」
「아니 도대체.」
「모두 총에 맞아 죽었다.」
「이봐, 오일팔. 당신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렇게 버럭 소리친 것은 책임자인 하동수 소장이다.
「시체를 싣고 오다니? 더구나 총에 맞은‥‥」
「이 개자식아, 와서 보면 될 것 아니야!」
기장의 아우성치는 듯한 목소리가 관제탑 안을 울렸으므로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기장이 소리치듯 말을 이었다.
「비행기가 출발하기 직전에 승객의 거의 전부가 피살되었어. 피살자는 모두 일본 야쿠자들이다. 시바다 누구의 부하라고 들었다. 나는 시체를 싣고 근대리아로 가라는 협박을 받았어. 그렇지 않으면 가족을 해치겠다고.」
「이봐요, 기장. 진정하고.」
「진정 못해! 어서 기내에서 시체를 가져가란 말이야! 수취인은 행정청의 강미현 보좌관이라고 들었다.」
「김상철이 보내는 하물이라고 했어!」
2시간쯤 후인 밤 11시경이다. 근대시 교외의 총독 관저에는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고 건물 옆쪽의 헬기장에는 방금 착륙한 헬기의 프로펠러가 아직도 돌아가는 중이었다. 이남호와 이대각이 응접실에 들어서자 소파에 앉아 있던 총독이 머리를 들었다. 검정색 실크 가운 차림인 그의 얼굴은 험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그들이 잠자코 앞쪽 자리에 앉자 총독이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모두 시바다의 부하들이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대답한 것은 이대각이다. 어깨를 편 그가 총독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신분증도 확인했지만 근대리아에 있는 오다 센자부로 씨의 부하들도 확인해 주었습니다.」
「각하, 그들은 대량의 총기를 휴대하고 있었는데 승무원들의 말을 들으면 한국 경찰이 그들을 활주로 안까지 호송하여 왔다고 합니다. 한국 정부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총독 못지않게 이남호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이대각이 말을 이었다.
「김상철의 부하들은 미리 조종석을 점거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출입국 관리요원으로 위장하고 와서는 야쿠자들을 앞뒤에서 친 것입니다.」
이대각은 방 안의 분위기에 맞게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결국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말끝을 떨었다. 그는 바로 조금 전 이남호와 둘이 있을 때는 실로 호쾌한 작전이라는 등 하면서 제 일처럼 후련해 했던 것이다. 이남호가 이대각의 분위기를 진정시키려는 듯이 헛기침을 했다.
「각하, 김상철은 시바다 겐지와 나까무라 두 명을 끌고 갔다고 합니다. 경찰 간부 두 명도 함께 끌려가는 것을 조종사가 보았다는군요.」
조종사는 기체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찰 호송대 7명도 순식간에 제압되어서 호송버스에 실리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김상철의 부하들이 조종석 안에서 자신의 집까지 확인한 터이라 조종사는 그들이 시킨 대로 시체를 날라 왔다. 모험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윽고 총독이 머리를 들었다. 눈시울이 더욱 늘어져 있어서 지친 얼굴이었다.
「한국 정부가 그자들을 보호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나?」
이남호와 이대각이 제각기 시선을 피하자 그가 거친 헛기침 소리를 냈다
「총기를 가지고 근대리아에 도착했다면 우리 공항의 세관과 경비대는 그들을 내버려 두었을까? 그렇다면 이곳에서도 그들을 검색 없이 공항 밖으로 빼돌릴 예정이었을까?」
이남호와 이대각이 그래도 입을 열지 않자 총독이 손바닥으로 의자의 팔걸이를 내려쳤다.
「말해 봐라, 어서!」
「각하.」
이남호가 머리를 들었다.
「진정하십시오.」
「강미현이가 배후에 있어, 그렇지?」
「청와대에 부탁해서 그놈들을 출국시킬 계획이었고 이곳 공항에는 검색 없이 입국시키려고 준비를 해두었을 것이다.」
총독이 한껏 눈시울을 들어올렸다.
「그렇다면 김상철의 부인을 죽인 것이 시바다이고 그놈을 배후 조종한 것이 강미현이란 말인가?」
「각하, 자문관은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저한테도 누차‥‥」
「손을 끊으라고 했는데도 그놈이 ‥‥」
어깨를 떨군 총독이 탁자 위로 시선을 내렸으므로 이대각은 소리죽여 한숨을 쉬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25명의 시체는 강미현에게 보낸 선물이라고 했다는 김상철의 전갈을 차마 전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한 일이라면 내가 했다고 하지. 지금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어깨를 편 시바다가 똑바로 김상철을 바라보았다. 이한에게 몇 차례 얻어맞은 후라 입가에 피가 맺혀 있었지만 눈빛이 날카로웠고 목소리도 굵다.
「난 당신 처를 납치해서 당신을 이곳으로 끌어들일 작정이었다. 그런 다음 당신을 없애려고 했어. 난 목장에 부하를 내려 보내지도 않았다. 아파트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그는 입술을 비틀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내 거처가 탄로나는 바람에 일이 허사가 되었다. 솔직히 당신 처를 누가 그랬던지 간에 당신이 한국에 왔다는 건 나에게 좋은 기회였는데 말이야.」
저택의 지하실 안이었다. 시바다 주위에는 김상철을 중심으로 이한과 심재택이 둘러앉아 있었는데 아직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간이었다. 나무 의자에 묶여 앉은 시바다가 턱을 들더니 위쪽의 벽을 바라보았다.
「그년을 믿지는 않았지만 배신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 그렇게 간덩이가 큰 년인 줄은 몰랐어.」
심재택이 헛기침을 했다.
「너는 김사장님을 제거하라는 강미현의 지시를 받았어. 그것은 명백한 사실이야. 그렇지 않나?」
시바다가 심재택을 쏘아보더니 이윽고 얼굴을 허물어뜨리며 웃었다.
「죽는 마당에 나도 신의를 지켜보자. 난 그런 부탁을 받은 적 없다.」
「그렇다면 한국 정부가 널 보호해 준 이유는 뭐라고 설명할 테냐?」
「내가 대통령과 아는 사이이기 때문이지.」
이제까지 잠자코 있던 이한이 입을 열었다.
「이 년 전, 불칸 역에서 넌 기차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그것도 아니라고 하겠지?」
의외로 차분한 목소리여서 심재택이 그를 돌아보았다.
시바다가 의자에 등을 기대고는 묶인 손이 불편한 듯 팔을 꿈틀대었다.
「불칸 역이라. 그곳에서 네 애인인 중국 갈보년도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는 똑바로 이한을 바라보았다
「내가 한 일이다. 이젠 후련하겠지?」
그의 시선을 받은 이한이 창백한 얼굴을 펴고 웃었다. 두 눈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래, 후련해.」
「불칸 역 사건은 내가 집행한 거요.」
나까무라가 반듯이 앉아 말했는데 놀랍게도 유창한 한국어를 썼다. 그들은 이제 옆방으로 옮겨와 나까무라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위조지폐가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지요. 처음에는 저택을 습격하기로 했는데 기차로 떠난다는 정보를 듣고 계획을 바꿨지요.」
머리를 끄덕인 심재택이 부드럽게 물었다.
「네가 재일동포라는 소문은 들었다. 강미현이 김사장님을 제거하라는 부탁을 했을 텐데, 자세한 내막을 말해라.」
「말하면 바로 죽여주실 겁니까?」
심재택과 김상철이 얼굴을 마주보았다. 이한이 헛기침을 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김상철이 머리를 끄덕였다.
「소원대로 해주지.」
「강미현은 백오십만 달러의 활동비를 보내 주었습니다. 김사장님을 제거하는 조건의 계약금이었지요. 일이 성공하면 삼백오십만 달러의 잔금을 받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지하실은 창고로 쓰이는 시멘트 구조물이었다. 그의 말소리가 방을 울렸다.
「강미현은 청와대 쪽에 우리 일행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그들도 합의했지요. 강미현은 김사장님이 안기부 관리들과 함께 정권을 전복시킬 계획라고 말했다고 들었습니다.」
「…………」
「그리고 한국 정부는 강미현의 요청을 거절할 입장도 못 된다고 하더군요. 시바다한테서 들은 말입니다.」
그들은 나까무라가 시바다의 이름을 부르는 것에 긴장을 했다.
나까무라가 앞에 앉은 그들의 얼굴을 차례로 돌아보았다.
「물론 김사장님 부인의 트럭사고 건은 우리가 저지른 일이 아닙니다. 시바다는 한국 정부가 선수를 친 모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부인을 납치할 계획이었습니다.」
김상철이 가늘게 한숨소리를 내었고 와락 상체를 세운 심재택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호주머니에는 녹음기가 돌아가고 있는 중이다.
「한국 정부가 했다는 증거가 있어?」
「그들밖에 그 짓을 할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물론 시바다가 계집질에 빠져들지 않았다면 어쨌든 우리들도 성공했겠지요.」
의자에 등을 기댄 나까무라가 김상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도 근대리아에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그곳에서 한국인으로 어깨를 펴고 살고 싶었지요. 그곳은 확실한 한국인의 땅이었으니까요.」
이한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으므로 김상철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받은 이한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형님, 돌아가서 그 계집부터 죽입시다. 그 일이 첫째인 것 같습니다.」
다음 날 새벽,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선잠이 들었던 안숙명 여사는 소스라쳐 잠에서 깨었다. 그녀가 수화기를 집어 들었을 때에는 고광식도 반쯤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보세요.」
「어머니.」
「아이구, 동민아.」
저도 모르게 소리친 안숙명이 수화기를 움켜쥐었다.
「동민아, 너.」
「어머니, 저 강남역 근처의 공중전화 부스에 있어요.」
「아이구, 공중전화.」
고광식이 손을 뻗쳐 수화기를 쥐었으나 안숙명은 몸을 흔들어 더욱 귀에 붙였다.
「그럼 동민아, 너.」
겁이 났고 뒤에 누군가가 있는 것 같은 생각에 안숙명이 더듬거렸다. 이미 눈에는 가득 눈물이 고여 있었고 목이 메었다.
「어머니, 저 풀려났어요.」
「응, 풀려나?」
그러자 고광식이 기를 써서 수화기를 뺏어 쥐었다.
「동민아, 애비다.」
그도 이제 목이 메었다.
「풀려났다구?」
「예, 아버지. 금방 택시타고 갈게요.」
「택시, 그것보다 내가‥‥」
「괜찮아요, 아버지. 그 사람들이 택시비도 넉넉하게 주었어요.」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신음소리를 뱉은 고광식이 어깨를 늘어뜨리자 다시 안숙명이 수화기를 가로채었다.
「동민아, 너 지금 어디에 있다구?」
그로부터 20분쯤 후에 고동민이 탄 택시가 집 앞에 도착했다.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던 안숙명이 두 팔을 휘저으며 달려가 그를 안았고 턱을 들고 선 고광식은 헛기침을 했다. 새벽 5시다. 안숙명이 아들을 안았으나 체격이 큰 고동민이 어머니를 안은 꼴이 되었는데 안숙명은 소리죽여 흐느껴 울었다.
「자, 어서 들어가자.」
고광식이 아들의 어깨를 안았다. 고동민은 검정색 운동모를 깊게 눌러쓰고 있었는데 깎인 머리칼 때문일 것이다.
「전 괜찮아요, 어머니.」
철부지인 것 같았던 고동민이 어머니의 어깨를 안고 집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처음에는 겁났지만 그 아저씨들, 괜찮은 남자들이었어요,」
그들의 뒤를 따라 걷던 고광식은 어금니를 물었다.
출근시간이 가까워진 아침 7시경이다. 대한병원의 앰블런스가 고광식의 이층 양옥집 앞에 도착했고 안숙명과 고동민의 부축을 받은 고광식이 앰블런스에 올랐다. 뒤칸의 침대에 누운 고광식은 아내가 건네주는 핸드폰을 받아 번호를 눌렀다.
「나 고차장인데, 이명규 부장을 바꿔 줘.」
잠시 후에 고광식은 말을 이었다.
「이부장, 나야. 나 지금 앰블런스 안인데, 갑자기 쓰러져서 당분간 일을 못할 것 같아서.」
그는 한 손을 뻗쳐 고동민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아내의 손이 그들의 손등을 덮었다.
「그래, 지금 대한병원으로 가는 중이야. 아니, 올 것 없어. 내 말을 들어. 그래, 내 병가를 내줘. 청장께도 말씀드리고, 그리고 청와대의 신수석한테도.」
핸드폰의 스위치를 끈 고광식이 누운 채로 길게 숨을 뱉었다.
그러나 아직 그들의 손을 잡은 채로였다.
「그 사람이 고혈압일 줄은 몰랐는데.」
신형목의 목소리는 짜증기가 섞여져 있었다.
「병이 났다면 하는 수 없지. 이봐요, 이부장. 이젠 앞으로 당신이 수고를 해주셔야겠는데.」
「알겠습니다, 수석님. 제가 부족하지만‥‥」
「우선 몸이 건강해야 일을 할 수 있어요.」
「물론입니다, 수석님.」
「이제까지 진행상황은 잘 알고 있겠지요?」
「예, 제가 실무자였기 때문에.」
「김상철과 심재택의 검거에 총력을 기울여 주시오. 그리고 이정훈도.」
「알겠습니다, 수석님.」
「김상철 그놈이 언제 다시 나타날지 모르니 발견 즉시 처리해야 됩니다.」
김상철이 공항에 나타나 비행기 안에 있던 25명의 야쿠자를 사살하고 시바다 겐지와 나까무라 두 사람을 끌고 간 것은 그야말로 경천동지(驚天動地) 할 사건이다. 그러나 천만다행히도 김상철은 비행기를 근대리아로 떠나보냈고 근대리아 정부는 25구의 시체를 인수하고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있었다. 만일 공항에 시체들이 남아 있었을 경우를 생각하면 지금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이다. 경찰의 보호 아래 세관도 거치지 않고 비행기에 태운 일본인들이다. 언론이 이런 호재를 놓칠 리가 없는 것이다. 사건 현장을 목격한 것은 2명의 경찰 간부와 4명의 승무원뿐이었으므로 승무원만 입막음을 하면 되었다. 경찰 간부들은 인질로 잡혀 시내까지 끌려갔다가 풀려났는데 그들이 입을 열리는 없고 비행기 아래에 있던 경호경찰들은 안에서 일어난 일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명규와의 통화를 끝낸 신형목은 방을 나와 비서실장실로 들어섰다. 오전 10시 10분 전이었으므로 이태준은 서류를 챙겨들고 나갈 차비를 하는 중이었다. 매일 10시 정각이면 그는 대통령과 독대하는 것이다. 사흘에 한 번꼴로 여당 대선후보 정동민이 아침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오늘이 그날이다
「실장님, 그럼 저는 약속 때문에 나가보겠습니다.」
선 채로 신형목이 시계를 내려다보는 시늉을 하자 이태준이 머리를 끄덕였다.
「오전에 각하께서 직접 연락을 하실 거요. 그러나 오늘은 결론을 내야 합니다.」
머리를 숙여 보인 신형목은 방을 나왔다.
12시 정각에 신형목은 시청 앞의 로열호텔 15층에 위치한 스카이라운지로 들어섰다. 라운지의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던 지배인이 허리를 꺾어 절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배인이 그를 안내해 간 곳은 안쪽의 밀실이다. 원탁을 앞에 두고 혼자 앉아 있던 오성의 비서실장 조영규가 일어섰다. 얼굴에 가득 웃음을 띄우고 있었다.
「그동안 적조했습니다, 수석님.」
「서로 바쁘다보니 그렇게 되었군요.」
창밖은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는 8월 초순의 무더운 날씨였지만 방 안은 서늘했다. 주문한 음식이 놓여지고 종업원이 물러갈 때까지 그들은 날씨와 건강, 집 안 이야기로 시간을 때웠다. 그래서 웃음도 건성이고 끄덕이는 것도 형식적이다. 스테이크를 썰어 포크로 찍어 든 신형목이 이윽고 정색을 했다.
「각하께서 회장님께 직접 통화를 하신다고 하셨는데 ‥‥」
「예, 제가 출발하기 조금 전에 하셨습니다.」
조영규가 입 안에 든 야채를 삼켰다.
「이 년쯤 전에 저희 전자공장을 방문하신 적이 있지요. 그곳 식당의 음식이 맛있었다고 하셨다는군요.」
「저희 회장이 꼭 다시 모시겠다고 했답니다. 영광이지요.」
고기를 씹어 삼킨 신형목이 헛기침을 했다.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려는 것이 각하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 잘 알고 계시겠지만 대다수의 국민은 안정을 바라고 있고.」
「결국은 국가와 국민을 위한 일입니다. 각하께선 다른 욕심이 없으십니다.」
조영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어느새 그도 정색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말씀 안 하셔도.」
「대선자금이 필요합니다. 선거 직전에 마련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다시 머리를 끄덕인 조영규가 물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물론 드려야지요. 그래서 저희들도 미리 비자금으로 외국은행에 예치해 두었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얼굴에 웃음을 띄운 신형목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어련히 알아 하셨겠지요.」
「그런데 그 돈을 11월에야 찾게 되어 있어서, 예전처럼 선거 직전에 돈을 풀 것으로 생각해서 말입니다.」
「은행에 적립시켜 놓았기는 하지만 도저히 11월 이전에는 불가능합니다. 기술적인 문제입니다만, 그 돈을 담보로 차관을 얻었는데 11월이 되어야 담보가 해제될 것 같은데요.」
물잔을 쥔 채 신형목이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이제까지 대선자금 수금에 대한 뚜렷한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필요하면 선거 유세기간 동안에도 걷었으므로 더 이상 다그칠 명분이 없는 입장이었다.
로열호텔에서 한 블록밖에 떨어지지 않은 킹덤호텔의 지하 식당 안이다. 경제 부총리 윤동선은 통상산업부 장관 진양근과 마주앉아 초밥으로 점심을 들고 있었다. 윤동선은 경제 부총리를 두 번째 맡고 있었는데 10년 전 처음 맡았을 때는 경제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를 받았었다. 윤동선이 머리를 들었다.
「재경원의 사무관급 이십여 명이 사표를 내었어요. 그런데 알고 봤더니 모두 근대리아로 이주할 모양이야. 근대리아의 행정청으로 자리를 옮기는 거요.」
그는 입맛이 달아난 듯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야단났어. 사람들이 왜 진득하지를 못하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우리도 마찬가집니다. 내 생각엔 선거 전에 대한민국 중소기업인의 반은 근대리아로 이주해 갈 것 같습니다.」
그러자 윤동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에이, 진장관도, 설마 그렇게 까지야.」
「요즘 하루에 몇 명씩이나 이주해 가는지 아십니까? 삼천 명 가깝게 된단 말입니다.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조사한 바로는 그 중 반 이상이 중소기업인입니다.」
「경제수석은 부도 직전이나 경쟁력이 없는 중소기업인들이 떠난다던데.」
「그 소인배. 그자는 정권이 바뀌면 무솔리니처럼 광화문에 거꾸로 매달아야 합니다.」
진양근의 얼굴이 금방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자도 전 안보수석 박정규처럼 수틀리면 미국으로 도망갈 것입니다. 그러면 끝이지요. 나라는 황무지가 되고.」
윤동선은 정권을 4번이나 겪은 노회한 인물이다. 잠자코 입맛만을 다시는 그에게 진양근이 말을 이었다
「경쟁력 없는 중소기업이 떠난다면 한국에는 경쟁력 있는 기업만 남는단 말입니까? 도대체 그런 발상은 그자가 배운 미국의 어느 경제학자 놈이 말한 것입니까? 큰일났습니다. 이대로 가면 한국 산업은 밑바닥이 무너져 단숨에 허물어질 테니 위기예요.」
「선거 끝나면 다시 안정이 돼요. 이주도 제한을 할 것이고, 또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제도나 규제도 고쳐야 될 것이고.」
진양근이 머리를 저었다. 그는 상공부 주사로 시작하여 통상산업부 장관까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는데 운도 좋았다. 정치권의 인맥도 없었던 터에 유력한 경쟁자 하나는 암으로 입원을 했고 다른 하나는 장관이 된다고 미리 떠던 바람에 물을 먹었던 것이다.
「저도 오래 연구도 하고 노력도 해보았습니다만 이제 뿌리가 너무 깊습니다. 아니, 더러워졌다고 할까요? 흙탕물 구덩이에 몇 양동이 맑은 물을 넣는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물을 모조리 뽑아내고 다시 채우든지 아니면 모조리 정수시설에 넣어 거르든지 해야 됩니다.」
「너무 비관적이야, 진장관은」
「너무 낙관적이십니다, 부총리께서는.」
「한국민의 저력을 모르시는데, 어떤 계기나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일시에 일어납니다. 두고 보시오.」
「이런 정치권 아래에서 말씀입니까? 다음 정권에도 과연 그런 기회가 올까요?」
윤동선이 잠자코 입맛을 다시자 진양근이다시 머리를 저었다.
「무역적자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하고, 증시는 폭락하는 데다 수출은 마이너스, 거기에다 각종 규제와 부처 간 이기주의로 기업 활동은 위축되고 투자는 대폭 줄어들고 있습니다. 시장개방으로 국산 제품의 가격은 경쟁력을 잃은 지 오래인데다 노조의 고질적인 파업투쟁으로 기업은 만신창이가 되어갑니다. 국가부채가 세계 삼위인 나라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북한의 위협에 경수로 자금이네 부가시설 자금이네 해서 몇 십억 달러를 공출 당하듯이 주고 있어요. 이런 상황에 정치권에서는 대선 준비만 하고 있는 겁니다. 도대체 어제 열릴 경제장관 회의가 무산된 이유는 뭡니까? 이런 위급한 시기에 말입니다.」
「곧 열리겠지요.」
그러자 진양근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긴 한숨소리를 냈다.
「기업인뿐만이 아닙니다, 부총리님. 이젠 일반 국민들도 작금의 정치와 사회에 환멸을 느끼고 근대리아로 이주해 가는 것입니다. 그들도 알고 있어요. 흙탕물은 맑아지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맑은 곳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것이지요.」
입맛을 다신 윤동선이 보일 듯 말 듯 머리를 끄덕였다.
「위기의식을 느끼는 건 나도 마찬가지요. 하지만 길이 있을 거요.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길이, 우린 이제까지 그렇게 견디어 왔으니까.」
총독이 행정회의를 주관한 것은 오랜만의 일이어서 각 국장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행정청의 국장이면 내각의 장관이었고 행정청장은 국무총리이다. 따라서 오늘의 회의는 한국의 대통령이 주관하는 각료회의와 비슷한 역할이었다. 총독과 행정청장 이남호, 그리고 16명의 국장 외에 부청장이자 경비본부장인 이대각이 두 명의 핵심참모와 함께 참석하고 있었으므로 근대리아의 행정부와 사법부 양원의 합동회의였다.
8월 초순, 남부지방의 들판에 푸른 풀잎이 돋아나고 영상 10도 안팎의 기온이어서 리조트 시티의 스키장에 나체 스키어들이 나타나는 시기였다.
총독이 무거워 보이는 눈시울을 들고 둥글게 둘러앉은 각료들을 바라보았다. 행정청의 소회의장이었지만 대리석으로 벽과 바닥이 장식된 300평이 넘는 방이다.
「여러분들은 대부분 한국인이고 한국에서 생활한 사람들이 많다. 따라서 그곳의 장단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을 것이야.」
낮은 음성이었지만 앞에 장치된 초소형 스피커의 볼륨을 알맞게 키운 때문에 총독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행정규제는 최소한으로 한다. 부처 간의 이해가 걸린 일로 업무가 한 시간 이상 지연되었을 경우에는 담당 실무자는 국외로 추방시킬 것이고 담당 국장은 파면이다.」
그런 일은 아예 있지도 않았으므로 국장들은 태연한 표정들이었다. 한국에서 너무 오래 시달려 온 총독의 과잉반응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청장실 산하에 행정조정위원회가 있어서 부처 간의 업무를 조정한다. 한국은 공장 하나 짓는데 300여 개의 도장이 필요하지만 이곳은 6개의 도장에 제한시간은 3시간이었다.
총독이 말을 이었다.
「한국에서 중소기업뿐만이 아니라 고급인력이 몰려오고 있어, 이 추세는 당분간 이어질 것 같은데 아까운 인력을 낭비하지 말도록.」
「인력수급위원회를 만들까 합니다만.」
이남호가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는 비서실에서 지원서를 받고 해당국장에게 지원자의 자료를 넘겨주었는데 업무가 많습니다. 그래서 ….」
「어허.」
이맛살을 찌푸린 총독이 입맛을 다셨다.
「청장은 아직 한국 버릇을 못 버렸어. 자꾸 조직을 만들어서 뭘 하자는 게야? 기존 조직에서 처리하도록.」
「예, 각하.」
꾸지람은 받았지만 이남호는 느긋한 표정이었고 국장 서너 명은 얼굴에 웃음을 띄우고 있다. 근대리아의 행정부에는 정년제도가 없었으므로 두어 명의 국장은 70대로 전직 한국 정부의 장관들이었다.
오늘의 회의 주제는 이주민 수용 및 중소기업 육성 방안이다. 한국에서 몰려드는 수백 가지 업종의 중소기업군(群)을 업종별로 배치하고 지원해 주는 방안을 검토하려는 것이다. 이미 15개의 위성도시에 업종별로 공단을 세우는 중이었고 중소기업가들은 각각 사업장을 배정받아 일을 시작하게 된다.
노동국장이 머리를 들더니 헛기침을 했다.
「각하, 청장에게 보고한 사항입니다만 기본인력이 모자랍니다. 시급한 조처가 필요합니다.」
총독이 이대각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지금 현재로 근대리아 인구가 얼마나 되지?」
「680만 명이 조금 못 됩니다, 각하.」
「국적 비율은?」
「한인과 러시아인, 중국인의 비율이 각각 삼십 퍼센트이고 나머지 십 퍼센트가 약 25개 국적입니다.」
「올해 예상은?」
「그건 각하께서 결정하셔야지요.」
그러자 국장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났다. 국경의 통제를 풀기만 하면 당장에 러시아와 중국, 그리고 타국민의 비율이 치솟아오를 것이다. 그러면 인구 1,000만도 몇 달 안에 채울 수 있다. 하지만 이제까지 총독은 엄격하게 민족의 비율을 조절해 왔다. 총독도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보고서를 보았는데 한국 이주민이 이 추세로 나간다면 올해 안에 백만 명 가깝게 될 거야. 그것은 확실해.」
모두 알고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 이주민은 대부분이 중소기업인과 그 가족, 투자이민에다 전문인력이다. 노동국장이 말하는 기본인력이 아닌 것이다.
창틀에 두 손을 짚은 강미현은 석양이 걸려 있는 지평선을 바라보며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늘이 짙어가는 대초원의 지평선이 붉은 하늘을 더욱 선명하게 받쳐 주었고 반쯤 걸린 흰 태양이 여러 개의 빛무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광대한 땅이다. 대자연의 중심에 서 있으면 인간의 희로애락과 때로는 삶과 죽음까지도 하찮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인간은 미물(微物)일 뿐이다. 요즘 며칠 동안 강미현은 관저에 박혀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은 물론 총독이 금족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행정청에는 병가를 내었으므로 가끔 이곳저곳에서 차도를 묻는 전화가 올 뿐이었다.
창틀에서 몸을 뗀 강미현은 소파로 돌아가 앉았다. 총독이 아직 퇴근해 오지 않은 관저 안은 조용했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는 그녀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모두들 조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강미현은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위쪽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김상철은 시바다 겐지의 부하들을 몰살시켜 그 시체를 자신 앞으로 보냈던 것이다. 이대각은 말하지 않았지만 비서실의 박태현을 통해 그가 전한 말을 들을 수가 있었다. 이제 그의 다음 대상이 누가 될지는 뻔한 일이다. 그가 박미정을 사랑했던 만큼 증오심이 반비례하여 증폭될 것이고 그 대상은 자신이다.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문 강미현은 상체를 세웠다. 박미정을 그렇게 만든 것은 한국 정부일 것이다. 그들은 김상철의 제거라는 목적만 같았을 뿐이지 작전은 별개였다.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그녀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수화기를 들면서 올려다본 시계는 저녁 8시가 되어가고 있었다.
「병세가 어떠십니까?」
서일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었는데 앞에는 장호성과 박기환이 나란히 앉아 그를 바라보는 중이다.
「이젠 좀 나아졌어요.」
서먹한 분위기로 강미현이 말하자 그는 얼굴을 폈다.
「아, 정말 다행입니다. 걱정하고 있었지요. 근대리아의 여름 감기는 독해서요.」
「그럼 언제부터 출근하십니까? 병문안을 못 오게 하셨으니 사무실로나 찾아뵙지요. 상의드릴 일도 있고.」
「제가 나중에 연락을 드리지요.」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서일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아직 근신이 언제 풀릴지 본인도 모르는 모양이야.」
「총독이 단단히 화가 났다고 들었습니다. 강미현을 귀국시킨다는 소문도 돌고 있어요.」
장호성이 입맛을 다셨다.
강미현은 그들의 가장 든든한 근대리아 정부 측의 배경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김상철을 견제하기 위한 그녀의 계산된 행동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기회였다.
서일이 박기환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김상철의 소식은 없소?」
「아직 남조선에 있다는 것밖에는 모릅니다, 대표 동지.」
무뚝뚝한 표정으로 박기환이 말을 이었다.
「시바다를 잡아갔다니 곧 제 마누라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를 밝혀내겠지요.」
이미 근대리아의 조직세계에서 공항에 시바다의 부하 25명의 시체가 실려왔고 시바다와 나까무라가 김상철에게 잡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또한 강미현이 시바다의 배경이 되어 있었다는 것도 알려져 있는 것이다.
서일이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남조선에서 김상철이 제거되면 그 시점에서 강미현의 금족령도 풀릴 거요. 총독은 지금 근대리아에 남아 있는 김상철의 추종세력들의 눈치를 보느라고 강미현을 잡아두고 있는 거요.」
그는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강미현이 시바다를 시켜 김상철의 처를 해쳤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믿고 있소. 김상철의 부하들은 흥분하고 있단 말이오. 이런 상태에서 김상철이란 뇌관이 근대리아에 오게 되면 근대리아는 전쟁이 일어날 거요.」
비록 김상철은 떠나 있지만 그레고리와 변순태 등을 중심으로 그의 조직들은 번성하고 있는 것이다. 단순한 조직이 아니라 근대리아의 조직은 모두가 사업형 조직이다. 조직원들은 종업원으로 등록되어 있었으므로 김상철의 공식 조직원만 해도 2만 명 가깝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다 안기부의 도움으로 한인 전체를 망라한 세포조직을 형성해 나가고 있었는데 그것은 북한의 세포조직에 대항하려는 의도였다.
장호성이 입을 열었다.
「근대리아에 이미 남조선 이주민이 삼십만이 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우리 북조선 이주민은 비율이 적어요. 시급한 조처가 필요합니다.」
「숫자가 많다고 두려워 할 건 없어요.」
서일이 얼굴을 펴고 웃었다.
「남조선의 투자이민과 기업인들, 고급 전문인력이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우리에게도 바람직한 일이오, 모두 당과 지도자 동지께서 계획하신 일이란 말이오.」
역삼로의 대형 빌딩 신축공사장의 주차장에는 트럭 2대가 세워져 있을 뿐 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밤 12시가 지난 시간이어서 주차장 아래쪽의 현장사무소에도 인적이 없었고 담장 너머의 도로를 지나는 차량들의 엔진소리만 울려오고 있었다.
「적당한 장소로군.」
트럭 옆으로 차를 세우고 시동과 라이트를 끈 심재택이 주위를 둘러보며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물론 숨어서 저격하기에도 적당하고 말이야.」
옆자리에 앉은 이한이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심재택이 직접 운전하고 온 승합차에는 그들 외에도 2명의 부하와 2명의 승객을 태우고 있었는데 그것은 시바다와 나까무라이다. 그러자 뒷좌석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났다. 시바다였다.
「공사장에 시체를 묻을 모양인데 그건 옛날 수법이야. 다른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 겨우 이렇게 하려고 그 소란을 떨다니.」
심재택은 어둠 속이었지만 이한이 입술 끝을 비틀면서 웃는 것이 보였다.
부하 한 명이 뒤쪽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습기가 많이 포함된 눅눅한 공기가 차 안으로 몰려 들어왔고 파헤친 흙냄새가 짙게 맡아졌다.
「이봐, 뭘 해? 어디서 종소리라도 울려오기를 기다리나?」
시바다가 다시 빈정거리듯 말했을 때 차의 뒤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자갈더미를 밟는 여러 사람의 발자국소리였다.
「왔습니다.」
운전석 옆으로 다가온 부하가 말하자 심재택은 차에서 내렸다.
어둠 속에 세 사내가 서 있었는데 가운데에 선 사내가 한 걸음 다가왔다.
「노구치 마사요시입니다. 일본 정보국의 동북아과장으로 있지요.」
「심재택 입니다.」
이미 전화로 인사를 나눈 터이라 그들은 가볍게 손을 잡았다.
「수고를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그럼, 제가 ….」
「뒷자리에 있습니다.」
이한과 차 안에 있던 부하까지 내렸고 노구치와 2명의 사내가 대신 안으로 들어갔다.
「고문하는 기계 같은 걸 가져오지나 않을까 했는데 맨손이군.」
주위를 둘러보던 이한이 혼자소리를 했다.
김상철은 시바다를 쫓고 있던 일본 정보국에 연락을 했던 것이다. 이미 시바다의 거처를 통보까지 해주었던 김상철이다. 그의 연락을 받은 노구치가 펄쩍 뛸 듯이 기뻐한 것은 물론이었다.
이한이 심재택에게로 한 걸음 다가와 섰다. 그들은 승합차 앞쪽의 흙더미 옆에 서 있었다.
「심선생은 형님이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건가를 알고 계시오?」
어두웠으므로 심재택은 크게 머리를 저었다.
「아니, 난 모릅니다. 그걸 물을 만한 분위기도 아니었어요. 이형도 아시다시피 ….」
「…………」
「강미현의 사주를 받은 한국 정부가 저지른 일은 틀림없어요. 저놈이 한 짓은 아닌 것 같소.」
그는 턱으로 승합차를 가리켰다.
「이건 내 추측이지만 안보수석 신형목이 다른 라인을 통해 일을 시킨 것 같소. 고광식이 안 했다면 말이오.」
그가 흙더미 위에 쭈그리고 앉았으므로 이한도 옆쪽에 앉았다.
안보수석이 어떤 위치의 인물이라는 것은 이한도 안다. 신형목은 이제까지 그가 상대해 온 사람들과는 수준이 다른 것이다. 심재택이 잠자코 있는 이한을 돌아보았다.
「이형, 이 정권은 썩었소. 이형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난 이미 각오를 했어요. 죽을 때까지 부딪쳐 보겠다고. 이미 한 번 죽었다가 살아난 놈이오, 나는.」
「내 생각엔 강미현이 한 년만 죽이면 끝나겠는데. 난 이 나라하고는 인연도 없고 관심도 없습니다.」
심재택이 다시 입을 열었을 때 승합차의 문이 열리며 한 사내가 나오는 것이 희미하게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들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나온 사내는 노구치였다.
「이건 계획에 없는 일입니다만.」
그들 앞에 선 노구치가 입을 열었다.
「시바다 놈을 데려가야 되겠습니다. 물론 시바다는 전 동북아과장 몬도와 요원 두 명을 살해한 혐의로 중형을 받게 될 겁니다.」
그러자 이한이 한 걸음 다가섰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들은 조사할 것이 있으니 만나게만 해달라고 하지 않았소?」
더듬거리기는 했지만 그의 일본어도 수준급이다.
「쓸데없는 소리 마시오.」
「김사장님께 허락을 받았습니다.」
노구치가 부드럽게 말했다
「차 안에서 연락을 했으니 지금 확인해 보시지요.」
「시바다가 중요한 정보를 쥐고 있어서, 저희 정보국으로서는 꼭 필요한 것입니다.」
잠자코 있던 심재택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김상철에게 확인해 보려는 것이다. 잠시 후에 그들은 승합차 안에 들어가 있었다. 뒷좌석의 뒤쪽 자리에 시바다와 나까무라가 나란히 앉고 그들의 앞에 심재택과 이한, 노구치가 둘러앉은 형태였다.
심재택이 시바다를 바라보았다. 차 안은 어두웠으나 건너편 빌딩에서 흘러들어온 빛을 받아 서로의 얼굴은 보인다.
「시바다, 너는 또 일본 정보국과 흥정을 한 모양이군.」
시바다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한국 안기부와도 흥정할 것이 있었는데 네가 안기부에서 잘려나간 바람에 이야기가 안 되었어. 그건 네 탓이다.」
입맛을 다신 심재택이 노구치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이자는 필요 없단 말이오?」
나까무라에 대하여 묻는 것이다. 조금 비아냥대는 말투였는데도 노구치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예, 그자는 필요 없습니다. 마음대로 처리하십시오.」
이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심코 그를 바라본 심재택이 입을 딱 벌렸는데 그의 손에 충이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소음기가 끼워진 긴 총신의 검은 쇳덩이가 싸늘한 빛을 내었다. 노구치가 눈을 크게 떴지만 감히 입을 열지 않았다. 이한이 이를 모조리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총구는 시바다의 양쪽 눈썹 사이를 정확하게 겨누고 있다.
「아무리 네가 운이 좋고 흥정을 잘해도 내 손에 잡힌 이상 끝난 것이다, 시바다 겐지.」
이미 시바다의 얼굴은 시멘트벽같이 굳어져 있었는데 그의 눈동자가 향해져 있는 곳은 총구의 검은 구멍이다.
「형님이 허락했어도 나는 안 돼.」
다음 순간 그의 총구에서 섬광이 튀어나오면서 모래자루를 몽둥이로 치는 것 같은 총성이 났다. 눈썹 사이가 뚫린 시바다가 머리를 뒤쪽 창에 부딪히며 넘어지자 이한이 노구치를 바라보았다
「자, 저놈을 데려가시오, 선생.」
이한은 딴전을 피우며 앉아 있었고, 심재택이 공사장에서의 상황을 김상철에게 보고했는데 당사자가 옆에 있는데도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심재택이 말을 마치자 김상철이 이한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이한의 시선은 딴 곳에 있다.
「나까무라를 살려 데려온 이유는 뭐냐? 같이 쏘아 죽이지 않고.」
이한이 머리를 들었다.
「한국인이라고 괄시하는 것 같아서.」
「하지만 지금은 우리끼리 있으니까 죽여 없애지요. 살리려고 데려온 건 아니니까요.」
마악 입을 벌렸던 김상철이 다시 입을 닫고는 입맛을 다셨다.
심재택이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노구치는 잠자코 시바다의 시체를 싣고 갔습니다. 그 일로 일본 정보국과의 관계가 나빠질 리는 없습니다.」
김상철이 이한을 바라보았다.
「나까무라를 데려오너라.」
이한이 잠자코 방을 나가자 심재택이 입을 열었다.
「어제 대한일보 편집국장 이정훈과 연락이 되었어요. 그 동안 숨어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야당 대선후보 이대현 씨와도 접촉하고 있었습니다.」
「김사장님은 내가 의지하는 가장 든든한 힘이오. 내 생명의 은인이기도 하고. 그래서 말씀인데, 이곳보다 근대리아가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시선을 피하려는 듯 머리를 돌린 김상철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누가 그 짓을 했는지 확실하게 알아내지도 못했어요.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사건 현장에 있었던 경찰청 사람들은 범인이 아니오. 내가 공항에서 인질로 잡았던 사내가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자는 내 자식이라도 살리자고 비행기로 전화를 해왔던 사람이었어요.」
「시바다도, 검찰도, 경찰도 아니라면 신형목이 군 요원이나 경호실 요원을 시킬 수도 있습니다. 안기부 요원은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신형목을 만나야겠습니다.」
「글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방문이 열리고 이한과 나까무라가 들어섰으므로 그들은 말을 멈췄다.
새벽 3시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모두 눈빛이 생생했다. 나까무라는 등산용 로프로 두 손이 우악스럽게 결박되어 있다. 김상철은 앞에 선 나까무라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시선이었다.
「나까무라,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느냐? 살아서 나와 함께 일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은 거다.」
이한과 심재택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고 나까무라는 아직 말뜻이 제대로 이해 안 된 모양이었다. 눈을 껌벅이며 김상철을 바라보고만 있다. 김상철이 얼굴에 쓴웃음을 지었다.
「시바다를 따라 죽을 의리도 충성심도 사라진 마당이라 넌 그저 짐승처럼 죽는다. 그래서 너한테 기회를 주려는 것인데.」
김상철이 힐끗 이한을 바라보았다. 바지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이한은 의외로 딴전을 피우고 있다. 김상철의 목소리가 다시 방을 울렸다.
「구걸해라, 값지게 죽겠다고. 우선 네 옆에 서 있는 이한한테부터. 너는 한이의 여자와 누님을 죽였다.」
「너를 죽여서도 한이의 분은 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살아서 그에게 빚을 갚아라, 죽는 날까지.」
한동안 김상철을 바라보던 나까무라의 시선이 곧 어지럽게 흔들리더니 아래로 내려졌다. 이윽고 옆쪽으로 몸을 돌린 그가 이한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형님, 살려 주십시오.」
「형님, 살려 주십시오.」
이한이 옆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말주변도 더럽게 없는 자식이군.」
묶인 두 손을 땅바닥에 짚은 나까무라는 머리를 숙이고는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심재택이 헛기침을 했다.
「이형이 받아들인 것 같군요, 김사장님.」
머리를 끄덕인 김상철이 나까무라를 바라보았다.
「네 한국명이 무엇이냐?」
나까무라가 꿇어앉은 채로 이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김봉만입니다. 김해 김씨로 봉우리 봉(峯)에 찰 만(滿) 입니다.」
이제 그의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봐, 내가 무슨 돈이 있다고.」
박영수가 버럭 언성을 높이자 아내는 입을 다물었다.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옷장에서 저고리를 꺼낸 박영수가 머리를 들자 아내의 등 뒤로 제 방으로 들어가는 아들 녀석이 보였다.
「제 친구들하고 약속을 한 모양이에요, 그래서.」
「약속은 제 놈 멋대로 하고. 그래, 그 약속을 내가 지키란 말인가?」
저고리를 입은 박영수가 아내를 쏘아보았다.
「당신은 도대체 살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돈 이백도 못 만들어?」
「어머나, 세상에.」
눈을 크게 뜬 아내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월급에서 적금 넣고 애들 학비 빼면 남는 돈이 얼마라고. 생활비는 또 얼마나 나오는지 아시우?」
몸을 돌린 박영수는 서랍을 열고 콜트를 꺼내어 혁대에 찔러 넣었다. 권총집이 있었으나 버릇이 되지 않아서 불편했던 것이다. 그의 등에 대고 아내가 퍼붓듯 말을 이었다.
「수진이네는 지방청으로 나간 지 이년 만에 집을 옮겼어요. 당신은‥‥」
「이 빌어먹을 여편네가.」
와락 몸을 돌린 박영수가 눈을 부릅뜨자 아내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자 방문 앞에 아들 녀석이 나타났다. 그의 장남으로 대학 1년생이다.
「엄마, 그만두세요. 안 가면 되지 뭘.」
그는 박영수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 머리를 숙이고 있다. 박영수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들 녀석은 방학을 이용하여 친구들과 함께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떠난다는 것이다. 이윽고 그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었다. 어제 한 달분 판공비와 수사비로 210만 원 가량이 나온 것을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그가 200만 원을 내밀자 아내의 얼굴이 대번에 환해졌다. 아들 녀석도 우물거리며 웃었다. 이번 달에도 다시 가불을 해야 수사비용을 메울 것이다.
그가 아내와 장남의 따뜻한 배웅을 받으며 마악 현관을 나서려는 때였다. 전화벨이 울렸으므로 아내가 서둘러 응접실로 돌아갔다.
「여보, 전화왔어요. 경찰청이래요.」
예상했던 터이라 곧 그는 수화기를 쥐었다. 이 시간이면 당직의 전화였다.
「전화 바꿨습니다.」
「난 김상철입니다.」
사내의 굵은 목소리에 박영수는 퍼뜩 시선을 들었다.
「누구시라고?」
「며칠 전에 만났던 김상철입니다.」
「여보, 당신 지금.」
「박 경정님은 내가 어떤 이유로 수배당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쓸데없는 소리 마라.」
아내와 장남이 다가왔으므로 그는 손을 휘저어 그들을 방으로 내몰았다.
「난 알고 싶지 않아.」
「당신은 양심이 있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내 자식만이라도 살리려고 나한테 전화를 해준 것을 잊지 않고 있어요.」
「당연한 일이오. 가족의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한국 정부는 남북한 간의 비밀합의 내용을 알고 있는 나를 제거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어요. 내 아내의 사고도 그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내가 현장에 있었지만 난 모르는 일이오.」
「만나서 이야기 합시다.」
「난 끼어들기 싫소. 난 지시받은 일만 할 테니까.」
「듣고 나서 판단은 당신이 하시오. 우리는 약점을 잡지도,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이 원한다면 원상태로 돌아간다고 약속드리지요.」
김상철이 낮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주객이 전도된 것 같지만 난 당신을 살려 주었습니다. 당신이 누군지 알고 나서 말이오. 난 약속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만나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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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
즐독~~~~~~~~
즐감요
즐독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더러운 정치인들,
007 같은 김상철의 활략에
한국과 근대리아까지 새물갈이 안될까요?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
즐감요~~~ ! 감사합니다.
즐감요 ~^^
감사합니다
잘읽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굿...................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