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오신 고산 윤선도 선생
■ 부산 기장에 유배(1616.광해군,8) 온 흔적
■ 오영수 문학 <개마을> 과 일광
일광 갯마을(오영수 소설) 촬영지
당집 위로 느티나무가 멋지다.
여기가 영화 갯마을 촬영지
이 배우가 고은아?
난계 오영수(1914~1979.5.15) 소설가
1) 인물 소개
* 경남 울주군 출신, 오사카 난니와 중학, 동경 국민 예술원 수학.
* 경남여고 교사
* 잡지 <<白民>> 에 시인 등단, 소설로 전향, 현대문학 창간 멤버. 아시아 자유문학상
* 주요 작품 ; 화산댁, 두노우, 갯마을, 명암, 개개비, 추풍령 등
* 단편집 ; 머루, 갯마을, 명암, 메아리 등
2) 작품 세계
-인정과 윤리의식을 바탕으로 인간의 선성을 긍정, 가혹한 현실을 정화해 나갈수 있다는 신념.
-약하고 고독하고 피해를 받는 전통적인 인간을 등장시키면서도 이들이 현실에서 패배하거나 승리하거나 간에 선한 인간성을 강렬하게 긍정하고 있다.
- 담담한 에세이풍의 문장은 서정미와 시적 정서에 감싸여 흐뭇한 안도감을 준다.
3) 일광지역과 인연의 계기는?
해방 직전 당시 동래쪽에서 초등학교 교편생활을 하던 큰누이가 일광초등학교로 부임해오자, 지인의 도움으로 오영수 선생이 일광면에 임시직으로 근무함. (1943년 경) 해방될 때까지 살면서 갯마을에 대한 체험이 토대가 되어, 1953년 <<문예>> 지에 소설 갯마을을 발표함.
고산 윤선도 일광 시비
일광해변 삼성대에 있는 고산 윤선도 선생 시비
일광해변 삼성대에 있는 고산 윤선도 선생 시비
일광해변 삼성대에 있는 고산 윤선도 선생 시비
경성과 기장현에서 약 6년간 귀양살이 함. 기장현에서만 4년 7개월.
일광해변 삼성대에 있는 고산 윤선도 선생 시비
<병중견회> 윤선도
(병중에 회포를 보내다)
편히 살기 위해서 도깨비를 막음이 어찌 나만의 즐거움이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먼저 가졌기에 모든 것이 절로 걱정이네.
산 넘어 옮겨 사는 괴로움을 가련하게 여기지 마오.
서울 바라보니 도리어 막힘이 없구나.
고산 윤선도 선생 존영
孤山 尹善道 선생 年譜
■ 1587.6.22. 한성부 동부 연화방에서 태어남.
■ 6세 학문 시작
■ 8세 큰 집으로 양자가심(한성부 남부 명례방종현 소재)
■ 26세 진사시에 1등 합격
■ 30세 12월 집권파의 전권난정을 상소하다.
■ 31세 1월 함경도 경원으로 귀양, 기장 이배됨.
■ 37세 인조반정으로 귀양 풀림.
■ 42세 봄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급제.
■ 42세 3월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사부가 됨.
■ 50세 12월 병조호란 일어남
■ 51세 2월 보길도 입도
■ 52세 6월 경상도 영덕으로 귀양감.
■ 53세 2월 귀양 풀림
■ 56세 해남 금쇄동에서 산중신곡 19수 지음(오우가 6수 포함)
■ 65세 완도 보길도 부용동에서 어부사시사 40수 지음
■ 66세 8월 예조참의
■ 74세 6월 함경도 삼수로 귀양감
■ 81세 7월 귀양 풀림
■ 1671년 6.11. 보길도 부용동 낙서재에서 85세로 별세. 9.22. 해남군 현산면 문소동 금쇄산성하에 묻힘.
■ 1675년 숙종1년 이조판서 증직
■ 1679년 숙종 5년, 충헌 시호 내려짐 (忠憲 ; 危身奉上日忠 博文多能日憲)
일광 삼성대에 있는 고산 윤선도 시비
고산 선생 시비기
* 윤선도 선생은 나이 32세 때인 1618년 광해군 10년 겨울에 함경도 경원에서 경상도 기장현으로 이배(유배지 옮김)후 인조반정(1623년, 광해군 15년, 광해군이 쫓겨난 정변) 으로 해배 될 때까지 4년 7개월 동안 기장현에서 유배생활을 하셨다.
* 35세 되던 해 광해군 13년 1621에 동생 선양이 유배지 형을 위문하고자 기장에 왔고, 이곳 삼성대에서 동생과 작별하면서 <贈別小弟二首>을 남겼는데, '이별하는 아우에게 주는 두 수의 시' 라는 의미다. 그리고 <病中遣懷 ; 병중견회, 병중에 회포를 보내다> 1수도 남겼다.
* 당시 조정이 붕당싸움으로 혼탁하여진 때에 선생은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과 고결한 인격과 높은 가치관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 특히 속전(贖錢)을 권유받고도 단호히 거절한 선생의 참된 모습은 천고에 빛날 아름다운 인격이라 하겠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귀감이 아닐 수 없다.
[ 보충 설명] 속전이란 돈을 내고 귀양에서 풀려나는 것을 말하는데. 동생이 제의하였으나, 선생은 그것을 거절한 것이다.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 왜 돈을 내고 소신을 굽혀 풀려나느냐는 것이었다. 광해군 당시 조정은 북인 중에서도 대북파 이이첨, 박승종, 유희분 등이 실권을 쥐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고, 영창대군을 죽이는 등 반인륜적인 행태를 보인 점에 대하여 성균관 학생 신분이었던 윤선도가 상소를 하며 권세가들에게 저항하였기 때문에 유배된 것이다. 이 유배는 결국 광해군과 대북정권이 몰락하면서 해배되었다.
* 이곳 삼성대는 선생이 기장현에 계시는 동안 유일하게 고산유고에 나와 있는 지명이기도 하다. 조선조에 시가문학의 대종이며 삼대가인(가사문학 3대가 ; 송강 정철, 노계 박인로, 고산 윤산도) 의 한분인 선생이 삼성대에서 詩作한 작품이 남겨지게 된 것은 우리고장의 자랑이며 큰 광영이 아닐 수 없다.
늘 시비 건립을 걱정하던 중 2004년 12월에 부산광역시로부터 기금을 기장문화원이 지원받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2005년 2월에 군내 뜻있는 인사 21인으로 고산 윤선도 선생 시비건립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선생이 삼성대에서 詩作한지 우금 384년 만이다. 선생이 동생과 이별하면서 직접 지어준 유서깊은 역사의 장소에 선생의 불후의 작품을 돌에 새겨 비를 세우게 되니 산생의 고매한 숨결이 먼 훗날까지 전해질 것이며 불의에 타협하지 않은 선생의 강직한 모습은 후학들에게 교훈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2005년 2월
*
기장 일광 삼성대 지명 유래는 모호하다.
삼성(三聖)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1) 삼성교(三聖敎)에서 모시는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 등을 가리킨다는 설
2)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尹弼) 등을 가리킨다는 설,
3) 고려 말의 삼은(三隱)인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등을 가리킨다는 설.
4) ‘세미성대’라는 말에서 유래하여 ‘세성대’가 되고 이를 한자식으로 바꾸면 ‘삼성대(三聖臺)’가 된 것인가?
‘세미성’의 ‘세미’는 ‘샘’ 삼성대가 ‘샘’과 배를 정박하는 곳이라는 ‘섟’에서 유래하였다는 설
5) 동래에는 삼성대(三姓臺)가 있는데, 동래 삼성대의 경우 『동래부지(東萊府誌)』 고적(古蹟)에 “안(安), 송(宋), 옥(玉)씨 등 세 성의 시조가 살았던 곳이어서 삼성(三姓)이 되었다”라고 밝혀져 있다. 그와같이 일광에도 세 성씨를 가르키는 것인지?
요즘 일광 신도시가 번쩍번쩍해서 활기찬 곳으로 변하였다.
기장군 죽성 황학대에 있는 윤선도 시조 안내판.
* 시조 한 수 소개하는데 두군데나 틀린 무성의한 안내판을 학정이 바로잡는다. 제목이 틀리고, '갓끈' 이 빠지고~
윤선도는 1616년 경원으로 유배 됐다가 다시 1618년 기장으로 이배됐다.
* 이때가 아직 벼슬하기 전인 성균관 학생시절이었다. 기장에서 4년 7개월, 경성과 기장현을 합치면 약 6년간 귀양살이 함.
영덕에 오신 윤선도 선생
영덕 풍력발전공원에 있는 고산 윤선도 시비
영덕 풍력발전공원에 있는 고산 윤선도 시비 해설
영덕의 고산 윤선도 시비
윤선도가 정계를 은퇴 한 몸으로 선생은 전란중의 나라와 임금을 걱정하며, 고향에서 안락하게 지내지 않고, 병자호란(1636) 중에 인조를 호종하기 위하여 노구를 이끌고, 고향인 해남에서 강화도까지 갔다.
왕은 처음 강화도로 피난할 계획이었으나. 길이 막히자, 남한산성으로 피난했고, 항복 후에 환궁하였다. 윤선도는 전쟁이 끝났으면 됐다고 생각하고, 해남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관리들은 은퇴한 윤선도 조차도 가만 두지 않았다. 왕을 만나지 않고 간 것은 불충하다는 모함으로 귀양을 갔다. 귀양 사유도 가지가지다 싶다.
은퇴한 몸이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고향 최남단 해남에서 강화도까지 찾아갔으면 됐지, 서울까지 가서 임금을 찾아뵙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영덕으로 귀양을 간 것이다. 영덕에서 추석을 맞이하면서 쓴 윤선도의 시 한시漢詩 두수를 영덕 풍력발전단지 공원내에 시비로 세웠는데 편의상 한글 풀이로 안내한다.
신거대중추월시 新居對月中秋詩
-귀양 새 거처에서 추석달을 바라보며
지난해 추석에는 남해에 있었는데,
수운(물위로 피어오르는 구름)의 저물녘
모첨(띠로 이은 지붕의 처마)에서 달을 맞이하네.
어찌 알았으랴, 오늘 같은 추석날 밤에 동해 바닷가에서
맑은 달빛을 마주한 채 옛동산 고향생각 그리워할 줄을.
구름 잦아들고 바람 가라 앉아, 먼지 끊어지니,
바로, 숨어사는 이, 달구경 할 때로다.
청유(조촐한 놀이)를 위해 힘들어도 말없이 비는데,
늙고 병든 모습을 해신도 불쌍히 여기리라.
고산 윤선도 서울생가터(마로니에공원)에 있는 윤선도작 오우가 비
서울 마로니에공원 윤선도 생가터
윤선도 오우가
윤선도 오우가비
윤선도 오우가비
일광역
일광해변 갯마을의 생선조각상
일광해변 갯마을의 생선조각상. 고놈 참 살찌다.
시랑대 안내
임랑 앞 바다
철새들, 청둥오리, 원앙새, 가마우지, 다 섞여 있네.
작은 두 놈 갈매기는 이미지 삽입한 것,
먼바다에 볕이 나서 옥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