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G ]
스물 한 살 때 저는 세상의 모든 스승들-부처, 라마크리슈나, 그리고 많은 깨달은 이들이 모두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남들까지 속이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그런 스승들이 말하고 묘사하는 그런 상태가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저와는, 제가 살아가는 방식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말합니다. "화내지 말라' 그러나 저는 항상 화가 나 있었습니다. 저의 내면은 난폭한 성향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거짓입니다. 제가 어떠해야 한다고 말하는 모든 것은 다 거짓입니다. 거짓이므로 그것을 따르는 저를 거짓된 것으로 만들 것입니다. 저는 거짓된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그 사람들은 무욕을 이야기하죠. 어딘가 잘못되어 있는 겁니다. 저에게 욕망은 진실 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들이죠. 그러니, 어디선가 무언지 잘못된 겁니다. 그렇지만 저는 자신을 바꿀 생각은 없었습니다. 무욕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저 자신을 거짓된 것으로 만들기는 싫었습니다. 저의 욕망은 저에게는 생생한 현실이었죠. 저는 그런 이야기를 끝없이 늘어놓는 사람들 틈에서 자랐습니다. 모두가 거짓이었습니다. 실존적 구토라고 할까요. (그때는 물론 이런 용어를 몰랐습니다.)
저는 성스럽다는, 신성하다는 모든 것을 극도로 혐오했습니다. 저의 세계 속에 숨어들어 모든 것을 다 부정했습니다. "슬로카스도, 종교도, 수행도 그만두자. 그런 것들에는 아무 것도 없다. 여기에 있는 것은 보다 자연스러운 것들이다. 나는 짐승이고, 괴물이다. 나는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이 현실이다. 나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무욕, 비폭력, 그런 것들은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런 것은 모두 거짓이다. 거짓일 뿐 아니라 나를 거짓된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리고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제 모든 일을 끝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죠. 그렇지 않습니까?
하루는 어떤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죠. 그는 제가 무신론자이며 모든 일에 회의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그가 말했습니다. " 마드라스 근처 티루반나말라이에 어떤 사람이 있어. 라마나 마하리쉬라고 하는데, 우리 한번 같이 가보자구. 이 사람이야말로 힌두 전통의 살아 있는 구현이야."
저는 어떤 성자도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나를 보면 나머지는 보나마나 한 것 아닙니까. 저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스승의 발치에 앉아 무언가를 배우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모두 똑같은 소리만 합니다. "하던 수행을 더 열심히 계속하면 얻을 것이다." 제가 얻은 것은 더 많은 체험들뿐이었습니다. 나중에는 그런 체험이 지속적으로 필요해졌죠. 하지만 세상에 지속되는 것이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했습니다. "성자는 모두 거짓된 거야. 그들은 오직 책에 있는 것만 이야기할 뿐이지. 그거라면 직접 읽는 게 낫지. 수행을 더 열심히 계속하라는 말도 듣고 싶지 않아. 체험도 싫어. 그들은 자기의 체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하지만 나는 체험에 아무런 관심도 없어. 나에게 종교적인 체험은 성적인 체험이나 다른 체험과 똑같아. 종교적인 경험이라고 다른 경험들과 다를 것은 없지. 나는 브라만을 경험하거나 실체를 경험하는 일에도 관심이 없어. 진리를 경험하고 싶지도 않아. 다른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아. 더 이상 같은 수행을 계속할 생각도 없네. 나는 이미 충분히 했어. 수학문제를 풀려면 계속해서 문제에 매달려야 하지. 결국 풀어내는데, 답이 문제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돼. 도대체 무엇을 한 걸까? 그 모든 과정을 거치지 않고 첫눈에 답을 찾아내는 것이 더 쉬울 텐데"
그렇지만 내키지 않아 하면서, 마지못해, 억지로 저는 라마나 마하리쉬를 만나러 갔습니다. 그 친구가 저를 끌고 갔죠. 한번만 가보면 무언가 일어날 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폴 브런튼의 인도기행이라는 책을 주었습니다. 저는 그 책에서 마하리쉬와 관계되는 부분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찾아가 보기로 했죠. 그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저는 그가 무엇을 도울 수 있는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잡지를 읽고, 야채를 다듬고, 이런 저런 것을 가지고 노는 저 사람이 어떻게 저에게 도움을 줄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저는 거기에 앉았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죠. 저는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도 저를 바라보았죠. '그의 현존 속에서 그대는 침묵을 느낄 것이다. 그대의 질문은 사라지고 그의 바라봄은 그대를 바꾸어 놓을 것이다.' 그것은 이야기 속에서나 있는 일이었습니다. 저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았죠. 그곳에 앉아 있는 제 안에는 무수히 많은 질문이 오락가락 했습니다. 모두 어리석은 질문이었죠. 두어 시간이 지나도 질문이 사라지지 않자 저는 몇 가지 질문을 해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당시에도 저는 해탈을 강하게 원하고 있었죠. 그러나 저는 그에게 해탈했는지를 묻지는 않았습니다. '당신이 갖고 계신 것을 저에게 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죠. 그 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조금 있다가 다시 물었죠. '당신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 지는 모르지만, 저에게 그것을 줄 수 있습니까?" 그러자 그 분이 말했습니다. "그래요. 저는 줄 수 있죠. 하지만 당신이 받을 수 있을까요?" 맙소사, 처음으로 이 사람은 무언가 제가 받을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자신이 줄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자신이 줄 수 있는데 제가 그것을 받을 수 있겠는지를 묻고 있었습니다. 만약 누군가 그것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나라고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칠 년간이나 사다나(Sadhana)를 해 왔으니까, 만약 내가 받지 못한다면 누가 받을 수 있겠는가. 그래요 그 때 저의 에고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저는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곁에 오래 있지도 않았고, 그의 책을 읽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를 더 물어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어떤 때는 자유롭고, 어떤 때는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습니까" 그가 말하길 "자유롭거나 전혀 자유롭지 못하거나 둘 중의 하나지요." 그밖에도 기억나지 않는 질문들을 했습니다. 그는 색다른 방식으로 대답했습니다. 그곳으로 이르는 계단이란 없다는 이야기도 했죠. 그러나 저는 그 모든 것들을 다 무시했습니다. 질문부터 저와 상관없는 것이었으니까요. 대답은 저의 흥미를 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던진 한마디. '당신이 그것을 받을 수 있을까요?" 얼마나 건방진가, 그것이 저의 느낌이었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그것을 받을 수 없단 말인가, 그것이 뭐기에, 무얼 가지고 있다고' 저는 그것이 궁금했습니다. 자연스러운 의문이었죠. 의문은 번져 갔습니다. "붓다나 예수, 그런 사람들은 어떤 경지에 있는 걸까? 마하리쉬도 그런 경지에 있는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사람이라고 나하고 다를 게 없어. 같은 사람이고. 나하고 어떻게 다른 거지? 그 사람이나 다른 사람의 말은 나에게 중요하지 않아. 누구라도 같은 일을 할 수 있어. 무엇이 있는 거지? 나와 아주 다를 수는 없지. 그도 부모 밑에서 태어났고. 그는 세상을 독특한 눈으로 보고 있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하기도 하지만, 나하고는 어떻게 다른 거지? 무엇이 있는 거야? 그 경지는 뭐지?" 이것이 저의 근본적인 질문이 되었습니다. 갈수록 의문은 심해졌죠. 저는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아내야만 했습니다. 아무도 그런 경지를 전해 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저마다 자기의 경지 속에서 살아가는 거죠. 저는 이 망망대해에 나침반도, 배도, 널빤지도 없이 뛰어들기로 했습니다. 그 사람이 들어 있는 경지가 어떤 것인지 스스로 확인해 봐야만 했죠. 그러치 않으면 계속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습니다.
[ Q ] 준다, 받는다 하는 이 이야기를 저는 이해할 수가 없는데요.
[ UG ]
마하리쉬가 무슨 뜻으로 그렇게 대답했는지 제가 말할 수는 없죠. 하지만 그 대답은 저의 의문을 구체화시켜 주었습니다. 아마 누군가 저에게 비슷한 질문을 한다면 저는 다른 사람에게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제가 어떻게 줄 수 있겠습니까? 이미 여러분 안에 다 갖추어져 있는데요. 우리가 함께 산니디 25번 가에 있을 때 제게 산니디 25번 가가 어디인지를 물으면 무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이미 와 있다고 할 수 밖예요. 나는 그곳에 있노라고 대답하지는 않겠죠. 당신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몰랐을 뿐이니까요.
(UG는 그 이후로 라마나 마하리쉬를 방문하지 않았다고 한다. 철학시험 공부할 때 말고는 종교적인 책을 들여다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진정한 구도가 시작되었습니다. 종교적인 배경은 저의 안에 있었으니까 저는 새로운 탐험을 시작했습니다. 심리학을 공부했고, 동양과 서양의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신비주의, 현대 과학, 몇 년에 걸쳐 인간이 쌓아 온 지식을 배웠습니다. 저는 스스로의 탐험을 시작한 것이죠. 저의 물음은 '그 경지는 무엇일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물음은 나름의 강렬함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저의 탐험은 계속되었죠. 그러나 결국 그런 지식들은 저를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심리학은 저의 석사학위 전공중의 하나입니다. 그때는 불운하게도 심리학이 교과과정에 들어 있었죠. 제가 심리학에 관심을 가진 것은 소박한 이유에서입니다. 에고라는 것이 저의 관심을 끌었기 때문이죠. 에고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서양 심리학자들의 글을 읽었죠. 어느 날 저는 교수님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에고라는 것에 대해 항상 이야기하는데요. 에고란 것이 어떤 것인지 교수님 자신이 분명하게 알고 계십니까? 프로이드며, 융, 아들러의 책을 읽었고 그들이 내려놓은 정의에 대해서는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수님 스스로가 에고에 대해 무언가 알고 계십니까?" 교수님은 말했습니다. "그런 불편한 질문은 하지 말게. (웃음). 위험한 질문이군. 시험에 통과하고 싶으면 이 글을 받아 적고, 요약해서 답안지에 옮겨 쓰도록 해. 그러면 학위가 나올 꺼야." 저는 학위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저는 에고를 찾아내는 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의 외조부가 돌아가시자 그는 학위를 마치지 않고 마드라스 대학을 그만두었다. 1943년 그는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나서 저는 신지학회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외할아버지로부터 많은 돈과 함께 신지학회와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도 상속받은 셈이었습니다. 5,6만 달러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큰돈이었고 저는 이런 저런 일들을 모두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신지학회의 강연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러나 흡족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다른 곳에서 얻은 정보였고, 저는 그것을 전달할 뿐이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꽤 훌륭한 연설자였습니다.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만, 당시에는 일류의 연설자였죠. 어디에서나 강연을 했습니다. 많은 대학에서 강연을 했죠. "이것은 진정한 나의 삶이 아니야. 누구나 머리만 있으면 정보를 모아서 사람들에게 떠들어 댈 수 있지. 내가 무얼 하는 거지? 왜 나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지? 이것이 나의 생계수단인 것도 아니잖아. 생계수단이라면, 앵무새처럼 되풀이하고 밥벌이를 하는 거라면 그럴 수도 있지만. 하지만 역시 이 일에는 무언가 나의 흥미를 끄는 점이 있어."
그럴 즈음,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1940년대 말엽이고, UG는 얼마 후 신지학회를 떠난다) 그는 미국에서 돌아와 그의 새로운....
[ Q ] 혹시,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친척간인가요?
[ UG ]
크리슈나무르티는 성이 아닙니다. 그의 성은 '지두'이죠. 크리슈나무르티라는 이름은 정말 흔한 이름입니다. 저는 그에게 매력을 느꼈습니다. 그 전에도 그가 인도에 올 때마다 그의 강연을 들었죠. 그러나 개인적으로 만날 기회는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의 스승'이었고 그것이 거리감을 느끼게 했죠. "세상의 스승이 어떻게 만들어지겠어. 그것은 타고나는 거야." 이런 것이 말하자면 저의 기질이죠. 저는 그곳의 사정을 잘 알고 있기는 했지만 중심적인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주변에 있었죠. 저는 완전히 빠져들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의 삶이 공허하다는 점에서 그들도 역시 위선자들이었습니다. 학자며, 마음의 스승들, 그리고 뛰어난 천재들이었지만 피상적이긴 마찬가지였죠. "이게 뭐지? 이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칠 년 정도 그런 식의 만남밖에 가지지 못했는데, 어떻게 일이 되어서 우리는 매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갖가지의 일에 대해 이야기했죠. 저는 그의 추상적인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에도 흥미가 없었죠. 저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 당신은 심리학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그 용어를 통해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합니다. 당신은 분석을 사용해서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곳까지 다가갔습니다. 이런 식의 분석은 사람들을 무력하게 만들뿐입니다. 저도 무력한 기분이 듭니다." 저는 제 안에 있던 의문도 털어놓았습니다. "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어떤 겁니까? 당신은 저에게 추상적인 개념을 늘어놓습니다. 저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 추상적인 개념 뒤에 무언가가 있는 겁니까? 도대체 그건 어떤 거죠? 설명을 할 수는 없지만 제 느낌으로는 당신이 말하는 추상적인 개념 뒤에 있는 어떤 것이 바로 제가 관심 있어 하는 그것인 것 같습니다. 왠지 그런 느낌이 듭니다. 저의 희망일수도 있겠죠. 하지만 낡은 비유를 든다면, 당신은 설탕을 맛보지는 않았더라도 최소한 설탕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기는 한 것 같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것을 듣고 있노라면, 당신이 설탕을 보기는 한 것 같단 말입니다. 맛을 보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식으로 우리는 몇 해를 다투었죠. (사람들 웃음) 우리는 개인적으로 분명히 차이가 있었습니다. 저는 분명하고 정직한 대답을 듣고 싶어했죠. 그러나 그는 그러한 대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매우 방어적인 사람입니다. 무언가를 지키고 있죠. "무얼 그리 지키십니까? 과거는 나무에 걸어 버리고 사람들에게 맡겨 버리세요. 왜 그렇게 자신을 방어하려고 합니까?" 저는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을 솔직히 말하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죠. 그리고 그와의 관계는 끝나 갔습니다. 어느 날 저는 이렇게 말했죠. " 당신이 줄곧 말하는 그 추상적인 개념 뒤에 무언가가 있기는 있는 건가요?"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당신으로서는 결코 알 수 없을 겁니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끝이 났습니다. 제가 결코 알 수 없다면, 그도 결코 전달할 수 없겠죠. 우리는 그 동안 무엇을 한 겁니까? 칠 년 동안 저는 헛고생만 한 셈이었습니다. 저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에게 그렇게 말하고 그를 떠났습니다.
(같은 시기에 UG는 어떤 종류의 능력을 얻는다.)
마흔 아홉이 되기 전에 저에게는 여러 가지의 능력이 있었습니다. 갖가지의 체험도 했죠. 그런 힘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는 않았어요. 저는 어떤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살아온 일생의 일들과 현재의 모습,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그런 능력이 생겼는지 의아해 하긴 했지만 그런 능력을 이용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그 메카니즘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능력을 얻기 위해 애쓴 적도 없었죠. 제가 예언한 일이 그대로 벌어지는 것은 불쾌한 결과를 낳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고통을 주기도 했죠.
(UG는 강의를 계속하면서 전세계를 여행했다. 1955년 그와 그의 아내는 네 명의 자식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큰아들의 소아마비를 치료할 길을 찾기 위해서였다. 1961년 그의 재산은 바닥이 났다. 그리고 그는 내면으로부터 주체할 수 없는 강렬한 에너지의 상승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상태는 이후 육 년간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연스러운 상태로 들어섰다. 그는 이 일을 '재난'이라고 부른다- 그의 결혼은 끝이 났다. 그는 가족들을 인도행 비행기에 태우고 자신은 런던으로 떠났다. 그는 한푼도 없이 런던에 도착해서 방랑자처럼 살았다. 삼 년간 그는 길거리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지냈다. 그의 친구들은 그가 내리막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그 당시의 생활은 그에게 더없이 자연스러웠다고 한다. 후에 종교적인 사람들은 그의 이 시기를 신비가의 말을 빌려 '영혼의 어두운 밤'이라고 묘사했다. 하지만 그는 -유혹과 속세에 대한 영웅적인 저항도, 욕망과의 힘 겨루기도 없었고 그저 의지를 거두어 들였을 뿐-이라고 말한다.)
마치 머리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머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었죠. 머리가 있기는 한 건지, 생각은 어디에서 오는지, 그런 것이 의문이었습니다. 머리는 사라지고 그 부분만이 주위를 맴돌고 있었죠. 아무 것도 할 의지가 없었습니다. 마치 여기저기 나뒹구는 낙엽 같았죠. 가짜들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갔습니다. 어느 날 문득 이렇게 계속 살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상 저는 룸펜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자선에 기대어 살아가면서 아무런 계획도 없었죠.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관심이 없었죠. 사실, 저는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그 때 저는 런던에 있었습니다. 길거리를 헤매 다녔죠. 집도 없어서 밤새 거리를 걸었습니다. 경찰이 저를 붙들고는 했죠. 집이 없으면 부랑자숙소에 집어넣겠다고 위협하곤 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살았습니다. 낮에는 대영 박물관에 앉아 있었습니다. 표를 살 돈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때 저는 아무 것도 읽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읽는 척 하면서 앉아 있었죠. 속어사전은 가끔씩 들여다보았습니다. 하층민들의 속어, 범죄자들의 속어, 모든 종류의 속어들이 있었죠.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밤에는 길거리를 헤매 다녔습니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었죠.
어느 날 저는 하이드 파크에 앉아 있었습니다. 경찰이 와서 내쫓더군요. 갈 데가 없었습니다. 할 일도 없었고요. 돈도 없었습니다. 아마 5펜스정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라마크리슈나 선교센타로 가자' 하는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 한 토막 -제 무의식의 소리였는지도 모르죠. 저는 갈 데가 없었고 경찰은 저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있는 돈으로 갈 수 있는 만큼 지하철로 가고 그 다음에는 걸어서, 라마크리슈나 선교센타로 갔습니다. 제가 스와미를 만나고 싶다고 하자 그들은 거절했습니다. 이미 밤 열 시였으니까요. 저는 그들에게 꼭 스와미를 만나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스와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스크랩북을 내밀었습니다. 저와 저의 강연에 대한 뉴욕타임스의 기사가 들어 있었죠. 미국에서 매니저가 만들어 주었던 것이었죠. 제가 말했습니다. " 이것이 저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의 모습은 이렇고요." 그가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저 명상실에 가서 밤새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죠.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규칙에 어긋났습니다. 여덟 시 이후에는 아무도 명상실에 들어가선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규칙이었죠. 결국 그들은 제게 호텔 방을 잡아 주었습니다. 다음날, 정오쯤에 선교센타로 가서 그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습니다. 오랜만에 맛본 식사다운 식사였습니다. 저는 입맛을 잃고 있었죠. 배고픔도 목마름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점심을 먹고 스와미는 저를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해요. 편집을 돕던 사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말이죠. 결국 병원에 입원했어요. 비베카난다 전집을 내기 위해 사람이 필요해요. 우리를 도와주지 않겠소" 저는 그 당시 무엇을 쓸 수도 편집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말하고 그런 일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같이 일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인도 철학과 신지학 방면에 지식이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는 제가 휴식을 취하고 그곳에 머무르며 그의 일을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방만 있으면 접시닦이 같은 허드렛일을 도우며 지내고 싶었지만 그는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일을 도왔습니다. 저의 만족을 위해서도 아니었고 그의 만족을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그 일을 했습니다.
그는 다른 스와미들과 마찬가지로 저에게도 급료를 주었습니다. 5파운드였죠. 오래간만에 그런 큰돈을 만져 본 거죠. 저는 돈의 가치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무엇을 하여야 좋을 지 알 수 없었어요. 물론 전에는 십만 루피의 수표를 끊던 생활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얼마 후에는 일 파이사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제 5파운드가 있는 겁니다. 무엇을 할까 한참 궁리하다 저는 영화를 보러 다니기로 했습니다. 아침나절에는 선교센타에서 일을 하고 한시에 점심을 먹고 나서 극장으로 갔습니다. 나중에는 볼 영화가 하나도 남지 않더군요. 변두리 극장에서는 일 실링에 세 편의 영화를 동시상영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영화에 질리게 되었고 돈을 다 썼습니다.
저는 명상실에 앉아서 명상을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곤 했습니다. 왜 이런 것을 하고들 있을까 의아해 하면서 말이죠. 그곳에서 매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저의 상상일 수도 있겠지만 그 일이 일어난 것은 사실입니다. 저는 명상실에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안스러웠습니다. "저 사람들은 왜 명상을 하려 드는 걸까? 사마디에 들고 싶어서? 하지만 사마디에서는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데. 내가 지나온 길인데. 저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어. 저렇게 인생을 낭비하지 않도록 내가 도울 수 없나? 저런 명상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데." 그 때 저는 무언가 낯선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의 몸 안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어떤 것이 움직이기 시작했죠. 그 에너지는 성기로부터 올라와 머리 꼭대기로 뻗쳤습니다. 마치 내부에 통로가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 에너지는 시계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돌더니, 다시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았습니다. 마치 공항에 있는 윌스 담배의 광고판 같았죠.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게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미 끝난 사람이었으니까요. 사람들에게 얹혀 살며 내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계획도 없는 생활이었죠. 속으로는 저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하려는 최소한의 욕구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저로서도 어쩔 수 없었죠. 그런 식으로 그냥 지냈습니다. 석 달 정도 지내고 그곳을 떠났습니다. 제가 떠난다고 하자 스와미는 저에게 돈을 주었습니다. 사 오십 파운드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파리로 갔습니다.
저에게는 인도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가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파리로 가서 표를 팔아 돈을 마련했습니다. 삼십 오 파운드와 합해서 한 백 오십 파운드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삼 개월 동안 저는 호텔에서 지냈습니다. 런던에서 하던 대로 길거리를 헤매 다녔죠. 돈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달랐습니다. 그러나 서서히 돈은 떨어져 갔습니다. 삼 개월이 지나자 저는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도로 돌아가는 것은 싫었죠. 가족과 아이들 때문이었습니다. 복잡한 문제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죠. 정말 인도로 가기는 싫었습니다. 겁이 났죠. 그래서 저는 스위스에 저의 계좌가 있었던 것을 생각해 냈습니다. 어쩌면 돈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죠. 그 길이 저의 마지막 탈출구였습니다. 저는 취리히로 가서 돈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 보기로 했습니다. 호텔 앞에서 택시를 타고 리용 역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파리에서 취리히로 가는 기차는 레 역에만 있었죠. 왜 제가 리용 역으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리용 역에 도착한 저는 제네바행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제가 제네바에 도착했을 때 저의 수중에는 백 오십 프랑 정도가 남아 있었습니다. 저는 계산을 할 돈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호텔에서 지냈습니다. 두 주일이 지나 그들은 제게 계산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저에게는 돈이 없었죠. 남은 길은 인도 영사관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인도로 돌려보내 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끝이 나는 구나 싶었습니다. 저는 영사관을 찾아가 전의 그 스크랩북을 보여 주었습니다. 스크랩북에는 노만 커신과 라다크리슈난 교수가 저에 대해 이야기한 기사가 들어 있었습니다. '인도가 낳은 가장 명쾌한 강연자' 라고 되어 있었죠. 그러나 부영사는 정부의 돈으로 저를 귀국시키는 데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제가 그곳에 머무르며 인도에 연락해서 돈을 마련해야 한다고 했죠. 저는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여기 앉아 있는 이 스위스 여인(발렌타인 드 커빈)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인도 영사관에 통역관으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안내 보는 사람이 결근을 했는지 안내 창구에 앉아 있었죠.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고 곧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만약 제가 원한다면 스위스에 머무를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한달 후 저는 영사관에서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살집을 마련했죠. 그녀는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부유하지도 않았고, 그저 적은 연금뿐이었지만 우리는 그 돈으로 생활해 갈 수 있었습니다.
사아넨이라는 곳이었습니다. 그 장소는 저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저는 53년도에 그 근방을 여행하다가 그곳에 잠시 머무른 적이 있었죠. 그냥 그곳을 보자 기차에서 내려 잠깐이라도 지내보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일주일간 그곳에서 지냈습니다. 저는 언젠가 이곳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겠다고 마음먹었죠. 그때 저에게는 많은 돈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아내는 스위스에 머물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기후 때문이기도 했고, 다른 여러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으로 떠났죠. 그 때 채워지지 못한 꿈이 현실로 나타난 겁니다. 우리는 사아넨으로 갔습니다. 제가 꿈꿔 왔던 곳이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우리는 그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얼마 후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여름의 회합장소로 사아넨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나타났죠. 저는 그곳에 살고 있었지만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사실 다른 것에도 관심이 없었죠. 발렌타인은 제가 마흔 아홉이 되기 전에 몇 년이나 함께 살았지만 진리나 실체에 대해 서로 이야기해 본 일이 없습니다. 저는 그녀뿐만 아니라 누구와도 이런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어요. 제게 무엇을 찾아야 한다는 마음은 이미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재미있는 현상은 계속 일어났죠.
그 시기에 (저는 이 시기를 '부화의 단계'라고 부릅니다.) 온갖 종류의 일들이 제게 벌어졌습니다. 두통이 있었죠. 끊임없이 두통에 시달렸습니다. 뇌 속에서 끔찍한 통증이 계속 되었죠. 얼마나 많은 아스피린을 삼켰는지 모릅니다. 아무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았죠. 편두통이나 뭐 그런 알려진 두통이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끔찍하게 아팠습니다. 아스피린과 스무 잔 가까운 커피를 들이켰어요. 어느 날 발렌타인이 불평하더군요. 하루에 스무 잔씩이나 커피를 마시면 한 달에 삼 사 백 프랑이 더 든다고요. 어쨌든 두통은 제게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일들도 있었죠. 몸을 문지르면 불꽃이 일곤 했습니다. 인에서 나오는 빛과 같은 것이었죠. 발렌타인이 무슨 일인가 싶어 침실에서 나오곤 했어요. 그녀는 밖에 차가 지나가는 줄 알았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침대에 들면 여기저기 빛이 번뜩이곤 했습니다. 그건 꽤 재미있었어요. 전기적인 빛이었습니다. 제가 전기-자기장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것이 제가 입은 옷에서 나오는 정전기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나일론 옷을 입지 않았죠. 저는 그런 일에 회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믿지 않았죠. 제 앞에서 기적이 일어나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은 저에게 아무런 소용도 없었습니다.
매우 이상한 일들이 저에게 벌어졌지만 저는 그런 일을 해탈과 연관짓지는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해탈과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는 붓다가 스스로를 속이고 다른 사람까지 속였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스승과 구세주는 스스로를 속이는 바보녀석들이라고 생각하고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죠. 그러니 그런 것은 이미 저의 삶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해탈에 가까워 졌다는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 거기에 가까울 수도 멀 수도 없습니다. 준비되어 있어서 아주 가까이 다가간 사람이란 없습니다. 거기에 준비란 있을 수 없죠. 그저 그것이 몇 톤의 무게로 부딪혀 올 뿐입니다.
첫댓글 뭘까요..지루한지 모르고 빠져들어 읽어내려가며..내면에 작은 울림을 보았습니다..3이 기대되는군요..
네.. 기대하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