⑻ 고려 중·후기의 전쟁
① 여진족과 윤관(1040~1111)
윤관은 고려 숙종과 예종 대의 문신입니다. 동북 9성 개척으로 활약한지라 무관 같지만 고려 초기의 서희, 강감찬이나 조선 시대 김종서, 권율 등과 마찬가지로 문과에 급제한 문관이지요. 고려는 예종과 공양왕 때를 제외하고는 무관을 따로 뽑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전시에는 문신이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무신들은 직접 칼을 들고 적과 싸우는 역할을 맡았지요.
그렇기 때문에 문관들은 병법에 능해야 했고 반대로 무관들은 실전 무술이 뛰어나야 했습니다. 윤관과 척준경의 역할 분담이 그 전형적인 예이고요. 윤관은 전략의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지도력과 굳은 의지가 장기인 ‘뚝심형 지도자’의 인상이 더 강합니다. 말하자면 기획자 유형의 장수이지요. 서희나 강감찬 같은 재기 넘치는 지도자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윤관 이후 파평 윤씨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약 명문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② 동북 9성
동북 9성은 서기 1108년(예종 3) 윤관이 천리장성 동북방의 여진족들을 정벌한 후 쌓은 9개의 성입니다. 윤관은 성을 쌓기 전에 고려 예종의 명을 받아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해 별무반을 조직하여 여진을 정벌했지요. 동북 9성은 강동 6주와 더불어 고려의 북진 정책을 상징합니다. 9성 중 최북단에 설치되었다는 공험진(公嶮鎭)이 어디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요.
만약 공험진의 정확한 위치를 찾았다면 9성의 위치를 제대로 알 수 있겠지만 현실은 막막한 상태입니다. 만약 이때 국경을 표시하기 위해 선춘령에 세운 비를 찾는다면 그야말로 세기의 발견이 되겠지요. 현재로서는 가능성이 적어서 문제지만 말입니다. 여하튼 고고학으로 실증된 학설은 아무 것도 없지요.
그나마 문헌상으로는 두만강 이북 700리 설이 유일하나 이마저 각 학자의 견해에 의해 논쟁이 있는 상황입니다.
③ 칭기즈칸과 몽골 그리고 최충헌과 고려
서기 1216년 8월에 대요수국의 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전에 칭기즈칸이 몽골과 여진족의 금나라가 전쟁을 치렀는데 이때 금나라와 다투면서도 몽골에 붙지 않은 거란의 잔존 세력(대요수국)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했던 것이지요. 이러한 변화는 모두 몽골의 칭기즈칸이 금나라 정벌에 성공적이어서 일어났습니다.
거란인들은 몽골에 대체로 적극 협조했지만 대요수국 같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이때 고려의 집권자는 최씨 무신정권을 시작한 최충헌이었는데 권세를 얻는 정치력은 상당했지만 국방이나 치국은 매우 부족한 인물이었지요. 조선을 세운 이성계와 비슷한 면면이 있지만 이성계는 외적을 물리친 구국의 영웅 이미지가 있는 반면 최충헌은 그런 것이 1도 없었지요.
④ 고려-몽골전쟁과 강화도
고려-몽골전쟁은 서기 1231년(고종 19년)부터 1259년(고종 46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9차례에 걸친 몽골 제국의 고려 침공으로 촉발된 전쟁입니다. 고려-거란전쟁과 달리 이 전쟁은 고려의 항복으로 끝난 고려 전쟁사 최악의 암흑기였지요. 전쟁이 고려의 강역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고려는 몽골군에게 굉장한 인명 손실과 전 국토가 유린당하는 참담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당시 무신정권의 집권자인 최우는 앞으로 있을 몽골군의 침략에 대비해 재추회의(宰樞會議)를 열어 강화도로의 천도를 단행했습니다. 결국 서기 1232년(고종 19년) 음력 6월에 고려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기고 몽골과의 장기 항전 태세에 돌입하자 이에 분노한 몽골은 살리타이를 다시 내세워 침입했지요.
해전에 약한 몽골은 강화도를 치지 못하고 사신을 보내어 항복을 요구했으나 고려는 거절했습니다. 몽골은 내륙국인데다가 물이 부족한 탓에 전통적으로 물에 대한 금기가 대단했지요. 고려정부는 강화도에 웅거하며 저항했고 부처의 힘을 빌려 난국을 타개하고자 서기 1236년 《팔만대장경》의 제조를 시작했습니다.
고려 국왕 원종은 몽골에 태자를 인질로 보내어 복속을 거듭 표시했습니다. 그렇지만 이때 최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집권자가 된 김준의 반대로 강화도에서 나올 수가 없었지요. 최씨 무신 정권은 전쟁 과정에서의 졸렬함도 커서, 전 국토가 피폐해지는 와중에도 정예부대는 강화도에만 두고 내보낼 생각을 하지 않았으며, 체계적인 방어 전략도 없었습니다.
⑤ 처인성 전투
처인성 전투는 서기 1232년에 벌어진 제2차 고려-몽골전쟁의 전투 가운데 하나입니다. 처인 부곡(현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에서 고려의 승장 김윤후가 몽골 장수 살리타이를 저격해 사살한 뒤 몽골군을 대파시킨 전투지요. 처인성은 자그마한 토성이었습니다. 거기다 처인성이 위치한 지역은 바로 천민들의 거주지인, 처인부곡(處仁部曲)이었지요.
성 안에 피난해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정규군이 아닌 용인시 일대 수령들이 이동시킨 약간의 병력과 백성들, 그리고 김윤후를 비롯한 승려 100여 명과 다수의 부곡민들이었습니다. 이 전투는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군인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을 주축으로 몽골군을 상대하여 성공적인 방어전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지요. 고려-몽골전쟁의 주요한 승리 중 하나입니다.
⑥ 충주성 전투
고려 정부로부터 상장군의 직위 수여를 사양한 김윤후가 21년 뒤 장수가 되어 다시 활약을 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서기 1253년의 충주성 전투입니다. 몽골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김윤후가 방호별감으로 있던 충주성에 도달하였고 70일간의 혈투가 진행되었지요. 군량이 떨어지고 사기가 저하되었을 때 김윤후는 다음과 같이 충주성 사람들을 격려했습니다.
“힘을 다해 싸운다면 훗날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벼슬을 내릴 것이다!”
김윤후는 관청에 보관된 노비 문서를 불사르고 몽골군에게서 빼앗은 소와 말 등을 사람들에게 나눠줘 사기를 이끌어 냈습니다. 결국 몽골군은 퇴각할 수밖에 없었고 충주성 사람들은 관노나 백정부터 일반 백성까지 벼슬을 받았으며 김윤후 자신의 공도 인정받아 감문위 상장군(監門衛 上將軍)에 임명되었지요.
⑦ 합천 해인사 대장경판
팔만대장경으로 잘 알려졌는데 구체적으로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伽倻面) 치인리(緇仁里) 해인사 경내 장경판고(藏經板庫) 2동(棟)에 보관된 대장경판 약 8만여 장을 말합니다. 팔만대장경은 수천만 개 글자 하나하나가 오자와 탈자 없이 모두 고르고 정밀하다는 점에서 보존 가치가 매우 크지요.
팔만대장경은 현존 대장경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와 내용의 완벽함 등으로 당시 동아시아의 불교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그 역사적 가치가 큽니다. 해인사가 ‘법보사찰’로 불리는 이유도 팔만대장경 때문이지요. 여기서 법보(法寶)는 불교 삼보(三寶)의 하나입니다. 깊고 오묘한 불교의 진리를 적은 불경을 보배에 비유하여 이르는 말이지요.
⑧ 공민왕
공민왕은 고려 제31대 임금입니다. 그는 원 간섭기 이후의 고려 말기 임금 중 마지막으로 정권을 장악했던 임금이었지요. 그런지라 사실상 고려의 마지막 임금으로 평가되기도 합니다. 조선 왕실 종묘에 사당이 모셔진 고려의 유일한 임금으로서, 역성혁명으로 고려 왕조를 장악하고 조선 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가 진정으로 충성심을 바친 임금이었지요.
공민왕은 여러모로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입니다. 흔히는 고려의 자주성을 되찾고자 반원(反元) 정책을 펼친 고려의 회광반조를 상징하는 인물로 불리지요. 그러는 한편으로는 대조적으로 아내의 죽음 이후, 고려의 멸망을 가속화시킨 암군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공민왕은 암살당했을지언정 고려 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재위 중에 죽음을 맞은 왕이지요.
그 뒤의 왕들인 우왕과 창왕은 폐위된 뒤 유배를 간 후 유배지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현역에서 물러난 후 맞은 죽음이었지요. 마지막 왕인 공양왕도 이성계에 의해 폐위된 후 2년여 뒤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고려의 마지막 불꽃’인 공민왕이 죽음을 당하면서 고려는 회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지요.
⑨ 홍건적(紅巾賊)
홍건적은 원말명초에 화북과 강남 일대에서 일어난 한족 반란군 중 하나로 백련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봉기하였습니다. 홍건이란 명칭은 동한 말 태평도 교도들을 지칭하는 황건적처럼 머리에 붉은 수건을 두르고 다닌 것에서 유래했지요. 홍건적은 태평도 교도들(황건적)과 마찬가지로 단일 종교단체라기보다 느슨한 정치·군사 종교 세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런 홍건적은 한국의 역사와도 연관성이 있습니다. 홍건적은 원나라(몽골)의 토벌 때문에 쫓겨나 2차례에 걸쳐서 고려를 침공하기도 했지요. 이것을 홍건적의 침공이라고 합니다. 고려는 결국 홍건적을 몰아냈지만 이로 인한 패해가 매우 컸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