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허돌과 비비추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동산*문학관* 스크랩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외 / 김경주
동산 추천 0 조회 62 09.06.09 20:54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어머니는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 / 김경주

 



고향에 내려와
빨래를 널어보고서야 알았다
어머니가 아직도 꽃무늬 팬티를 입는다는 사실을
눈 내리는 시장 리어카에서
어린 나를 옆에 세워두고
열심히 고르시던 가족의 팬티들,
펑퍼짐한 엉덩이처럼 풀린 하늘로
확성기소리 짱짱하게 날아가던, 그 속에서
하늘하늘한 팬티 한 장 꺼내들고 어머니
볼에 따뜻한 순면을 문지르고 있다
안감이 촉촉하게 붉어지도록
손끝으로 비벼보시던 꽃무늬가
어머니를 아직껏 여자로 살게 하는 한 무늬였음을
오늘은 죄 많게 그 꽃무늬가 내 볼에 어린다
어머니 몸소 세월로 증명했듯
삶은, 팬티를 다시 입고 시작하는 순간 순간
사람들이 아무리 만지작거려도
팬티들은 싱싱했던 것처럼
웬만해선 팬티 속 이 꽃들은 시들지 않았으리라
빨랫줄에 하나씩 열리는 팬티들로
뜬 눈 송이 몇 점 다가와 곱게 물든다
쪼글쪼글한 꽃 속에서 맑은 꽃물이 똑똑 떨어진다
눈덩이만한 나프탈렌과 함께
서랍 속에서 수줍어하곤 했을
어머니의 오래 된 팬티 한 장
푸르스름한 살 냄새 속으로 햇볕이 포근히 엉겨 붙는다 

 

  

 

 

 

 

 



Blues

  

 

 


나무에게 / 김경주  

 



매미는 우표였다
번지 없는 굴참나무나 은사시나무의 귀퉁이에
붙어살던 한 장 한 장의 우표였다 그가
여름 내내 보내던 울음의 소인을
저 나무들은 다 받아 보았을까
네가 그늘로 한 시절을 섬기는 동안
여름은 가고 뚝뚝 떨어져 나갔을 때에야
매미는 곁에 잠시 살다간 더운
바람쯤으로 기억될 것이지만
그가 울고 간 세월이 알알이
숲 속에 적혀 있는 한 우리는 또
무엇을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이냐

모든 우표는 봉투 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연이다

허나 나무여 여름을 다 발송해 버린
그 숲에서 너는 구겨진 한 통의 편지로
얼마나 오래 땅 속에 잠겨 있어 보았느냐
개미떼 올라오는 사연들만 돌보지 말고
그토록 너를 뜨겁게 흔들리게 했던 자리를
한번 돌아보아라 콸콸콸 지금쯤 네 몸에서
강이 되어 풀리고 있을
저 울음의 마디들을 너도 한번
뿌리까지 잡아 당겨 보아야 하지 않겠느냐

굳어지기 전까지 울음은 떨어지지 않는 법이란다

 

 

 

 

 

 

 

 

MANGO TROT PARADE

 

  

 

 

 

폭설, 민박, 편지 2 / 김경주

 

 


낡은 목선들이 제 무게를
바람에 놓아주며 흔들리고 있다
벽지까지 파도냄새가 벤 민박집
마을의 불빛들은 바람에도 쉽게 부서져
저마다 얼어서 반짝인다
창문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나는 연필심이 뜨거워지도록
편지지에 바다소리를 받아 적는다
어쩌다 편지지 귀퉁이에 조금씩 풀어 넣은 그림들은
모두 내가 꿈꾼 푸른 죄는 아니었는지
새 ·나무· 별· 그리고 눈
사람이 누구하고도 할 수 없는 약속 같은
그러한 것들을 한 몸에 품고 잠드는
머언 섬 속의 어둠은
밤늦도록 눈 안에 떠있는데
어느 별들이 물이 되어 내 눈에 고이는 것인가

바람이 불면 바다는 가까운 곳의 숲 소리를 끌어안고
가라앉았다 떠올랐다 그러나
나무의 속을 열고 나온 그늘은 얼지 않고
바다의 높이까지 출렁인다
비로소 스스로의 깊이까지 들어가
어두운 속을 헤쳐 제 속을 뒤집는 바다,
누구에게나 폭설 같은 눈동자는 있어
나의 죽음은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눈동자를 잃는 것일 테지
가장 먼 곳에 있는 자 가장 가까운 곳에서 아프고
눈 안을 떠다니던 눈동자들,
오래 그대의 눈 속을 헤매일 때 사랑이다
뜨거운 밥물처럼 수평선이 끓는가
칼날이 연필 속에서 벗겨내는 목재의 물결 물결

숲을 털고 온 차디찬 종소리들이
눈 안에서 떨고 있다
죽기 전 단 한번이라도 내 심장을 볼 수 있을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심장을 상상만 하다가
죽는다는 사실을 나는 안다
언젠간 세상을 향한 내 푸른 적의에도
그처럼 낯선 비유가 찾아오리라는 것
폭설을 끊고 숲으로 들어가
하늘의 일부분이었던 눈들을 주워 먹다보면
황홀하게 얻어맞는 기분이란 걸 아느냐
해변에 세워둔 의자하나 눈발에 푹푹 묻혀가는 지금
바라보면 하늘을 적시는 갈매기
그 푸른 눈동자가 바다에 비쳐 온통 타고 있다는 것을 

 

 

 

 

 

 

 

 

 

 

Donkey ride

 

 

 

 


늑대는 눈알부터 자란다 / 김경주

 

 

 


내 우주에 오면 위험하다
나는 네게 내 빵을 들켰다

기껏해야 생은 자기피를 어슬렁거리는 것이다

한 겨울 얼어붙은 어미의 젖꼭지를 물고 늘어지며
눈동자에 살이 천천히 오르고 있는 늑대
엄마 왜 우리는 자꾸 이 생에서 희박해져가요
내가 태어날 때 나는 너를 핥아주었단다
사랑하는 그녀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싶어요
네 음모로 네가 죽을 수도 있는 게 삶이란다
눈이 쏟아지면 앞발을 들어
인간의 방문을 수없이 두드리다가
아버지와 나는 같은 곳에 똥을 누게 되었단다
너와 누이들을 이곳에 물어다 나르는데
삼십년 동안 침을 흘렸단다 그 사이
아버지는 인간 곁에 가기 위해 발이 두 개나 잘려나갔다
엄마 내 우주는 끙끙 앓아요
매일 발자국 소리하나 내지 않고
그녀의 창문을 서성거려요
자기 이빨 부딪히는 소리에 잠이 깨는 짐승은
너뿐이 아니란다

얘야 네가 다 자라면 나는 네 곁에서 길을 잃고 싶구나

엄마.. 


 

 

 

 

 

 

n

 

 

 

 

 

못은 밤에 조금씩 깊어진다 / 김경주

 




어쩌면 벽에 박혀 있는 저 못은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깊어지는 것인지 모른다

이쪽에서 보면 못은
그냥 벽에 박혀 있는 것이지만
벽 뒤 어둠의 한가운데서 보면
내가 몇 세기가 지나도
만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못은
허공에 조용히 떠 있는 것이리라

바람에 벽이 스미면 못도 나무의 내연(內緣)을 간직한
빈 가지처럼 허공의 희미함을 흔들고 있는 것인가

내가 그것을 알아본 건
주머니 가득한 못을 내려놓고 간
어느 낡은 여관의 일이다
그리고 그 높은 여관방에서 나는 젖은 몸을 벗어두고
빨간 거미 한 마리가
입 밖으로 스르르 기어나올 때까지
몸이 휘었다

못은 밤에 몰래 휜다는 것을 안다

사람은 울면서 비로소
자기가 기르는 짐승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Be back by dinner

 

 

 

 

 

바다 횟집 / 김경주

 

 

 

그 집은 바다를 분양 받아 사람들을 기다린다

싱싱한 물살만을 골라 뼈를 발라 놓고

일년 내 등 푸른 수평선을

별미로 내놓는다

손님이 없는 날엔 주인이

바다의 서랍을 열고

갈매기를 빼 날리며 마루에 앉아

발톱을 깍기도 하는, 여기엔

국물이 시원한 노을이

매일 물 위로 건져 올려지고

젓가락으로 집어먹기 좋은 푸른 알들이

생선을 열면 꼭 차 있기도 한다

밤새 별빛이 아가미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그물보다 촘촘한 밤이 되어도 주인은

바다의 플러그를 뽑이 않고

방안으로 불러들여

세월과 다투지 않고

나란히 살아가는 법을 이야기 한다

깐 마늘처럼 둘러앉아

사발 가득 맑은 물빛들을 주고 받는다.

 

 

 

 

 

 

 

 

 

Untitled

 

 

 

 

 

구름이 백 년 전을 지나갔던 것일까 / 김경주

 

 

 

 

    구름의 분위기가 물 안에서  흐려진다. 처음부터 다시 쓰자 구름의 저녁이
 물의 이미지를 입는다. 물은 저녁이면  미미한 소리에도 자잘하게 부서져

 서로의 몸에 가라앉고 가라앉고를 반복한다 인간의 예의들은 서로의 몸으로
 가라앉아보는 데 있다
 

    백 년 된 여관에선 타인이  놓고 간  잠의  예의를 먼저  갖추어야 한다 죽음
 같은 잠도 누웠다가 갔고 들것에 실려간 잠도 있었따 잠의 내력에 대해서 말
 한다면 당신은 어느 날 잠 속에서 따라갔던 꽃을 따올 수도 있다
 

    잠 밖으로 가지고  나온  그 꽃을  이름  붙일 수 없는 한기들에게  보였다면
  당신은 방금 지독한 살 하나를 지나간 것이다
 

    누군가 세벽에  들어와  옆방에서  흘흘흘  오줌 누는 소리가 들린다 자세히
  들으니 오줌을 누면서 그는 흐느끼고  있다  생이  눈물에 올라타고 있다! 방
  안에서 몸에 흘려 있는 잠들이 눈을 뜨고 그 소리를 듣는다 지금은 새벽인데
  밖에선, 구름의 저녁이 백 년 전 이곳을 지나갔던 것일까
 

    그곳을 지나다가 백 년은  그의 몸에 이륙할  것 같은 나의 눈을  본 적이 있
  다 백 년 된 구름 아래서 꽃의 사인(死因)으로 죽고 싶은 적이 있다

 

 

 

 

 

 

 

 

 

 

Wase Market near Dali (China)

 

 

 

 

 

   무릎의 문양 / 김경주 

  

 

 

   1 

   저녁에 무릎. 하고

   부르면 좋아진다

   당신의 무릎, 나무의 무릎, 시간의 무릎,

   무릎은 몸의 파문이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살을 맴도는 자리 같은 것이어서

   저녁에 무릎을 내려놓으면

   천근의 희미한 소용돌이가 몸을 돌고 돌아온다

 

   누군가 내 무릎 위엣 잠시 누워 있다가

   해골이 된 한 마리 소를 끌어안고 잠든 적도 있다

   누군가의 무릎 한쪽을 잊기 위해서도

   나는 저녁의 모든 무릎을 향해 눈먼 소처럼 바짝 엎드려 있어야 했다

 

   "내가 당신에게서 무릎 하나를 얻어 오는 동안 이 생은 가고 있습니다

무릎에 대해서 당신과 내가 하나의 문명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몸에

서 잊혀질 뻔한 희미함을 살 밖으로 몇 번이고 떠오르게 했다가 이제 그

무릎의 이름을 당신의 무릎의 이름을 당신의 무릎 속에서 흐르는 대기로

불러야 하는 것을 압니다 요컨대 무릎이 닮아서 사랑을 하려는 새들은

로의 몸을 침으로 적셔 주며 헝겊 속에서 인간이 됩니다 무릎이 닮아서

된다면 이 시간과는 근친 아닙니다"

 

 

    2 

   그의 무릎을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은 잊혀진 문명의 반도 같았다

   구절역 계단 사이,

   검은 멍으로 한 마리의 무릎이 들어와 있었다

   바지를 벌리고 삐져나온 무릎은 살 속에서 솟은 섬처럼 보였다

   그는 자신의 무릎을 안고 잠들면서

   몸이 시간 위에 펼쳐 놓은 공간 중 가장 섬세한 파문의 문양을

   지상에 드러내 보여주고 잊었던 것이다

 

   "당신의 무릎으로 내려오던 그 저녁들은 당신이 무릎 속에 숨긴 마을

이라는 것을 압니다 혼자 안장 모과를 주무르듯 그 마을을 주물러 주는

동안 새들은 제 눈을 찌르고 당신의 몸속 무수한 적도 赤道들을 날아다

닙니다 당신의 무릎에 물이 차오르는 동안만 들려옵니다 당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바람의 귀가 물을 흘리고 있는 소리를"

 

 

   3 

   무릎이 말을 걸어오는 시간이 되면

   사람은 시간의 관절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고 한다

   햇빛 좋은 날

   늙은 노모와 무릎을 걷어 올리고 마당에 앉아 있어 본다

   노모는 내 무릎을 주물러 주면서

   전화 좀 자주하라며

   부모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한다

   그 무렵 새들은 자주 가지에 앉아 무릎을 핥고 있었다

   그 무릎 속으로 가라앉는 모든 역약함에 대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음절을 답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신과 내가 이 세상에서 나눈 무릎의 문명을 무엇이라고 불러야 할까

요 생은 시간과의 혈연에 다름 아닐진대 그것은 당신의 무릎을 안고 잠

들던 그 위에 내리던 눈 같은 것이 아닐는지 지금은 제 무릎 속에도 눈이

펑펑 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무릎의 근친입니다'

 

 

 

 

 

 

 

 Shrine In The Desert

 

 

 

 

물새의 初經 / 김경주




빛이 그리는 그림 위에 새들이 긴 어둠을 만들고 지나간다
나무들이 수컷을 향해 물관을 들어올리며 흰 김을 피워올린다
물새의 하루에 그 물관은 바깥이었다
나는 아내(我內)가 없다 아내가 없어도 코를 파는 짐승은 인간뿐이다
물새의 초경이 시작되는 바다에 오면 물은 보라색으로 시작된다
나는 수첩 속의 짐승들을 몰고 와 이곳에서 나무로 빚은 술을 마신다
비밀이 많은 나무로 빚은 술은 물관의 냄새가 치밀어오르고
인간의 허공에서 물새의 임종을 바라보며
가장 높은 가슴에 자신의 위도(危道)를 세운다
물 속의 산에서 검은 이파리의 향들이 올라오면
나무들이 더이상 부풀릴 수 없는 물관에
승려들은 물새의 목소리를 닮은
종(種) 하나를 달아주고 하산했다
등대는 바다 위의 절이다
바람의 불공이 시작되고 있다

 

 

  

 

 



    
 

 

 

저녁의 동화 / 김경주

 


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도 저녁은 찾아온다
그 저녁에 닿기 위해
나는 나무의 구멍을 빚어 만든
당신의 오래된 기타를 생각한다
당신의 기타 속엔 오래된 강물이 고여 있고
활어떼가 흘러다닌다
아직 만들어지지 않는 노래 안에 살고 있는 활어들이
아슬아슬한 水面을 향해서
내게 있는 투명을 조금 흔들었을 뿐이다

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 살고 있는 저녁은
하늘에서 내려온
가장 늦은 그늘이 들어가는 자리다
그 저녁으로 들어온 그늘에 빗물이 묻으면
나무는 밤보다 어두워진다
어떤 짐승도 구멍으로 아이를 낳지 못하며
어떤 아이도 짐승처럼 구멍 안에 낮게 엎드려 울지 못한다
어둠은 저녁이 천천히 빚어내는 꿈이기 때문이다

죽은 나무의 구멍 속에서 검은 물이 흘러나온다
꿈을 꾸던 맨발의 아이들이 다가와
그 물을 손으로 받아 마시며 조금씩 늙어 돌아간다
당신이 지느러미를 흘리며 물속으로 돌아갈 때
나는 아무도 모르는 나무의 구멍에 입을 대고
목젖을 보였던 사랑이다

 

 

 

 

 

 

 

 



 Sheparding along the Nile

 

 

 

 

 

 드라이 아이스 / 김경주

 

 



사실 나는 귀신이다 산목숨으로서
이렇게 외로울 수 없는 법이다 *


문득 어머니의 필체가 기억나지 않을때가 있다
그리고 나는 고향과 나의 시간이
위독함을 12월의 창문으로부터 느낀다
낭만은 그런 것이다
이번 생은 내내 불편 할 것


골목 끝 수퍼마겟 냉장고에 고개를 넣고
냉동식품을 뒤적거리다가 문득
만져버린 드라이아이스 한조각,
결빙의 시간들이 타 붙는다
저렇게 차게 살다가 뜨거운 먼지로 사라지는
삶이라는 것이 끝내 부정해버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손끝에 닿은 그 짧은 순간에
내 적막한 열망보다도 순도 높은 저 시간이
내 몸에 뿌리내렸던 시간들을 살아버렸기 대문일까
온몸의 열을 다 빼앗긴 것처럼 진저리친다
내안의 야경(夜景)을 다 보여줘버린 듯
수은의 눈빛으로 골목에서 나는 잠시 빛난다
나는 내가 살지 못했던 시간속에서 순교할 것이다
달사이로 진흙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천천히 오늘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 공기들이
동상을 입은 채 집집마다 흘러 들어가고 있다
귀신처럼.

 

 

 

 

 

 

 


  

 

 

 

 

 

저녁의 염전 / 김경주

                                     

 

죽은 사람을 물가로 질질 끌고 가듯이
염전의 어둠은 온다
섬의 그늘들이 바람에 실려온다
물 안에 스며 있는 물고기들,
흰 눈이 수면에 번지고 있다
폐선의 유리창으로 비치는 물속의 어둠
선실 바닥엔 어린 갈매기들이 웅크렸던 얼룩,
비늘들을 벗고 있는 물의 저녁이 있다
멀리 상갓집 밤불에 구름이 쇄골을 비친다
밀물이 번지는 염전을 보러 오는 눈들은
저녁에 하얗게 증발한다
다친 말에 돌을 놓아
물속에 가라앉히고 온 사람처럼
여기서 화폭이 퍼지고 저 바람이 그려졌으리라
희디흰 물소리, 죽은 자들의 언어 같은,
빛도 닿지 않는 바다 속을 그 소리의 영혼이라 부르면 안 되나
노을이 물을 건너가는 것이 아니라 노을 속으로 물이 건너가는 것이다
몇천 년을 물속에서 울렁이던 쓴 빛들을 본다
물의 내장을 본다

 

 

 

 

 

 

 


In Search of Paradise

 

 

 

 

 내 워크맨 속 갠지스 / 김경주   

 

 

 

 외로운 날엔 살을 만진다
 내 몸의 내륙을 다 돌아다녀 본 음악이 피부 속에 아직 살고 있는지

 궁금한 것이다  열두 살이 되는 밤부터 라디오 속에 푸른 모닥불을 피운다

 아주 사소한 바람에도 음악들은 꺼질 듯 꺼질 듯 흔들리지만 눅눅한 불빛

 을 흘리고 있는 낮은 스탠드 아래서 나는 지금 지구의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는 메아리 하나를 생각한다
 나의 가장 반대편에서 날아오고 있는 영혼이라는 엽서 한 장을 기다린다

 오늘날 불가능한 감수성에 대해서 말한 어느 예술가의 말을 떠올리며 스무

 마리의 담배를 사 오는 골목에서 나는 이 골목을 서성거리곤 했을 붓다의

 찬 눈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고향을 기억해낼 수 없어 벽에 기대 떨곤 했을

 붓다의 속눈썹 하나가 어딘가에 떨어져 있을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 나는

 겨우 음악이 된다

 

 나는 붓다의 수행 중 방랑을 가장 사랑했다 방랑이란 그런 것이다 쭈그려

 앉아서 한 생을 떠는 것 사랑으로 가슴으로 무너지는 날에도 나는 깨어서

 골방 속에 떨곤 했다 이런 생각을 할 때 내 두 눈은 강물 냄새가 난다

 

 워크맨은 귓속에 몇 천 년의 갠지스를 감고 돌리고 창틈으로 죽은 자들이

 강물 속에서 꾸고 있는 꿈냄새가 올라온다 혹은 그들이 살아서 미처 꾸지

 못한 꿈냄새가 도시의 창문마다 흘러내리고 있다 그런데 여관의 말뚝에

 매인 산양은 왜 밤새 우는 것일까
 외로움이라는 인간의 표정 하나를 배우기 위해 산양은 그토록 많은 별자리

 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른다 바바게스트 하우스 창턱에 걸터앉은 붓다의
 사랑은 가슴에 띄우는 열이었다고 쓰고 싶어지는 생이 있다 눈물은 눈 속

 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한 점 열이었다

 

 

 

 

 

 

 

 


 

 

 

  

 


우주로 날아가는 방 / 김경주  

 

 

                                            
 방을 밀며 나는 우주로 간다

 산동네 지하 방들은 하나 둘 풍선처럼 떠오르기 시작하고 밤마다 우주의

바깥까지 날아가는 방은 외롭다 사람들아 배가 고프다 

 인간의 수많은 방을 싣고 지구는 날고 있다 그런 방에서 세상에서 가장

작은 편지를 쓰는 일은 음악 같은 일이다 불씨처럼 제 정신을 떠도는 일이지만

북극의 냄새를 풍기며 내 입술을 떠나는 휘파람, 가슴에 몇 천 평을 더 가꿀 수

도 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들이, 이 세상을 희롱하는 방법은, 외로워 해주는

것이다 

 외롭다는 것은 바닥에 누워 두 눈의 음音을 듣는 일이다 제 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인 것이다 그러므로 외로움이란 한 생을 이해하는데 걸리는 사랑

이다 아버지는 병든 어머니를 평생 등뒤에서만 안고 잤다 제 정신으로 듣는 음악

이란 없다 
     
 지구에서 떠올라온 그네하나가 흘러 다닌다 인간의 잠들이 우주를 떠다니는 동안

방에서 날아와 나는 그네를 탄다 내 눈 속의 아리아가 G선상을 떠다닐 때까지,

열을 가진 자만이 떠오를 수 있는 법 한 방울 한 방울 잠을 털며 밤이면 방을 밀고

나는 우주로 간다

 

 

 

 

 

 

 

 

 

 

 

 

 

 

 

오래 전 나는 휘파람이었다 -1 바다로 가는 길 / 김경주

 

 

 

 

휘파람은 바람 위에 띄우는 가늘고 긴 섬이다
외로운 이들은 휘파람을 잘 분다

나무가 있는 그림들을 보면 휘파람을 불어 흔들어 주고
도화지 끝에서 푸른 물소 떼를 불러오고 싶다

대륙을 건너오는 바람들도 한때는 누군가의 휘파람이었으리라
어느 유년에 내가 불었던 휘파람이 내 곁을 지금 스치는 것이리라

죽어 가는 사람 입 속에 휘파람을 불어넣어 주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죽은 사람의 입에 휘파람을 불어넣어 주면 나는 잠시 그에게 옮겨가는 것이다

내 휘파람에선 아카시아 냄새가 난다
유년을 향해 휘파람을 불면 꼭 그 냄새가 난다

자전거위에서 부는 휘파람이 내 학업이었다

헌책방에 가면 수많은 사람들이 골방에 엎드려
그 책 속에 불어넣었던 휘파람이 숨쉬고 있다 이스트에 부풀린 빵처럼
비 오는 날이면 휘파람은 방안 가득 부풀어올라 천장을 꽉 채웠다

휘파람이 데리고 가는 길로 끝까지 가지 마라
절벽은 휘파람의 성지이다 벼랑끝에서 다친 말을 버리면
말은 조용히 눈을 감고 마지막 휘파람을 불면서 내려간다

갈매기들이 휘파람을 불면서 날아간다
등대가 부는 휘파람은 절해고도의 음역이라 흉내내기가 어렵다
그러나 고래나 물고기들은 그 휘파람소리를 듣고 그물을 피하고
스스로 바다로 걸어 들어간 사람들은
내내 이 등대의 휘파람을 들으며 잔다
바다로 가는 길에서 나는 가끔 아버지의 옛날 휘파람소리를 듣곤 했다

 

 

 

 

 

 

 

 

 

Ja1275 Driver

 

 

 

 

 

        여인숙에서 보낸 한철 / 김경주

 


 

        한 밤중 맨발로 복도를 걸어가
        공동화장실에서 몰래 팬티를 빤다
        방으로 돌아와
        발가락을 뻗어 스위치를 끄고 누우면
        외롭다 미라처럼
        창틈의 날벌레들은 입을 벌린 채 잠들고
        어제는 터진 베개 솜 같은 눈들이
        방안까지 뿌려졌다
        내가 마지막이 아니라서
        이 이불은 또 펼쳐질 것이지만
        피부병처럼 피어있는 이불위의 꽃잎들,
        밤마다 문틈으로 흘러온
        옆방 기침소리처럼 피가 묻어 있는 것은                 

                    


        방안 곳곳 낙서처럼 살다간
        사람들 머리카락 몇 줄,
        손끝에서 가루로 부서진다
        때 절은 하모니카를 속이불로 밤새 닦거나
        철지난 주간지 위에 뜬 발톱을 깎아 놓는 일,
        배를 잡고 화장실 순서를 기다리며
        눈이 튼 사람들과 비린 아침을 주고받는 일은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독채에선
        아침마다 작약냄새 환하게 피어올랐다

        언제쯤 내 몸을 거절하지 않는 위증이
        희망이 아닐 수 있을까
        이불속에 들어가 라디오를 끌어안으며
        사람들은 산다 허구처럼,
        몇 줄의 최전방을 수첩 속에 갈겨 놓은 채

        아침이면
        나는 촛농처럼 조용히 바닥에 흘러있을 것이다

 

 

 

 

 

 

 

 

 

 

 

 

 

 

 

피는 공중전화 / 김경주

 

 

 

퇴근한 여공들 다닥다닥 세워 둔
차디찬 자전거 열쇠 풀고 있다
창 밖으로 흰쌀 같은 함박눈이 내리면
야근 중인 가발 공장 여공들은
틈만 나면 담을 뛰어넘어 공중전화로 달려간다
수첩 속 눈송이 하나씩 꾹꾹 누른다
치열齒列이 고르지 못한 이빨일수록 환하게 출렁이고
조립식 벽 틈으로 스며 들어온 바람
흐린 백열등 속에도 눈은 수북이 쌓인다
오래 된 번호의 순들을 툭툭 털어
수화기에 언 귀를 바짝 갖다 대면
손톱처럼 앗! 하고 잘려 나갔던 첫사랑이며
서랍 속 손수건에 싸둔 어머니의 보청기까지
수화기를 타고 전해 오는 또박또박한 신호음
가슴에 고스란히 박혀 들어온다
작업반장 장씨가 챙챙 골목마다 체인 소리를
피워 놓고 사라지면 여공들은 흰 면 장갑 벗는다
시린 손끝에 보푸라기 일어나 있다
상처가 지나간 자리마다 뿌리내린 실밥들 삐뚤삐뚤하다
졸린 눈빛이 심다만 수북한 머리칼 위로 뿌옇다
밤새도록 미싱 아래서 가위, 바위, 보
순서를 정한 통화 한 송이씩 피었다 진다
라디오의 잡음이 싱싱하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외계/ 김경주

 

 

 

 

양팔이 없이 태어난 그는 바람만을 그리는 화가였다

입에 붓을 물고 아무도 모르는 바람들을

그는 종이에 그려 넣었다

사람들은 그가 그린 그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붓은 아이의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아주 먼 곳까지 흘러갔다 오곤 했다

그림이 되지 않으면

절벽으로 기어올라가 그는 몇 달씩 입을 벌렸다

누구도 발견하지 못한 색 하나를 찾기 위해

눈 속 깊은 곳으로 어두운 화산을 내려 보내곤 하였다

그는, 자궁 안에 두고 온

자신의 두 손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부재중 / 김경주

 

 

 

말하자면 귀뚜라미 눈썹만한 비들이 내린다 오래 비워둔 방안에서 혼자 울리는

전화 수신음 같은 것이 지금 내 영혼이다 예컨대 그 소리가 여우비 는개비 내리는 어느 식민지의 추적추적한 처형장에서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 두고, 바닥에 내려

놓은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댕강 댕강 목 잘리는 소리인지 죽기 전 하늘을

노려보는 그 흰 눈깔들에 빗물이 번지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인지 아니면 카자흐

스탄에 간 친구가 설원에서 자전거를 배우다가 무릎팍이 깨져 울면서 내게 1541

을 연방연방 보내는 소리인지 아무튼 나 없는 방안에서 나오는 그  소리가 지금

내 영혼이다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그대라는 봄을 타는지도 모르겠다 비 맞으며  귀신이 자신의 집으로 저벅저벅 문상 간다 생전에 신던 신발을 들고

운다 산에 핀 산꽃이 알토기의 혀 속에서 녹는다 돌 위에 해가 떨어진다 피난민

처럼 나는 숨어서만 운다

 

 

 

 

 

 

 


 

 

Ja1275

 

 

 

 

 

바람의 연대기는 누가 다 기록하나 / 김경주

 

 

 

    1
    이를테면 빙하는 제 속에 바람을 얼리고 수세기를 도도
  히 흐른다
    극점에 도달한 등반가들이 설산의 눈을 주워 먹으며 할
  말을 한다 몇백 년 동안 녹지 않았던 눈들을 우리는 지금
  먹고 있는 거야 얼음의 세계에 갇힌 수세기 전 바람을 먹
  는 것이지 이 바람에 도달하려고 사람들은 수세기 동안
  거룩한 인생에 지각을 하기 위해 산을 떠돌았어 그리고
  이따금 거기서 메아리를 날렸지


   삶이
        닿지 않는 곳에만
                         가서
                              메아리는
                                       젖는다

 

    메아리는 바람 앞에서 인간이 하는, 유일한 인간의 방
  식이 아니랄까
    어느 날 거울을 깨자 속에 있던 바람이 푸른 하늘을 향
  해 만발한다
    그리고 누군가 내 얼굴을 더듬으며 물었다 우선 노래부
  터 시작하자고.

 

 

  2
  바람은 살아 있는 화석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사
라진 뒤에도 스스로 살아남아서 떠돈다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 속에서 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바람의
세계 속에서 울다 간다


바람이 불자
            새들이
                   자신의
                         꿈속으로 날아간다

 

  인간의 눈동자를 가진 새들을 바라보며 자신은 바로 오
는 타인의 눈 속을 헤맨다
  그것은 바람의 연대기 앞에서 살다 간 사람들의 희미한
웃음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바람에게 함부로 반말하지 말라는 농담 정도


 

 

 

 

 

 

 

 

 

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8 

 

 

 

[2008 한국의 젊은 작가를 만나다] 

 

시집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의 김경주 시인


사람들은 시와 친하지 않다. 수능을 보기 위해 시를 공부했던 것이 현재의

대중들에게 남겨진 시의 마지막 흔적이고, 윤동주니 김소월이니 하는

시인의 이름과 그들 시의 몇 구절을 기억해 주는 것은 시에 대한 마지막

예의처럼 보인다. 그렇게 ‘입시용’ 시 문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어지는 순간,

사람들은 시를 읽지 않는다. 늘 사람으로 북적대는 대형 서점에 가더라도,

시 코너만큼 조용하고 작은 곳이 없다. 그것이 한국 현대시의 현실이다.


김경주는 그런 한국 시 문학 속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대박 시인’ 이다.

그리고 실제로 일반 대중들에게 그만큼 인지도를 갖고 있는 젊은 시인도 거의

없다. 말하자면 그는 ‘성공한 시인’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시라는 영역 속에 자신을 가두는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이룬 것에 멈추지 않고, 다양한 문화에 관심을 갖는다.

연극도 하고, 실험적인 낭독회도 연다. 그리고 스스로 인디 문화를 지키는

‘문화 저격수’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동시에 시는 그에게 여전히 ‘성역’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그가 생각하는 시와 한국 문학, 그리고 그가 하고 있는 그 많은 활동

은 더욱 호기심을 자극한다. 7월의 어느 날, ‘시 쓰는 김경주’와 그의 동료들이

운영하는 ‘츄리닝 바람’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츄리닝 바람’: 김경주

작가가 속해 있는 자칭 ‘무경계문화펄프연구소’. 공연이나 영화를 비롯한 문화

컨텐츠 기획 아웃소싱을 하거나, 자체 제작을 하기도 한다.)


- ‘2008 서울 젊은 작가 페스티벌’(이하 ‘젊은 작가 페스티벌’)에서

재미있는 일이 많았다는 말을 들으니 호기심이 생긴다. 어땠나?

 

보통 이런 프로그램들이 대개 우리가 해외 작가들을 초대해서 접대하는

형식이 되기 쉽다. 하지만 이번 행사의 경우에는 젊은 작가들이 많이 참여

했고, 그들 사이에 이야기가 오갈 수 있는 지점을 만들어 줬다는 점에서

아주 좋은 행사였던 것 같다. 외국 작가 선정도 형식적으로 ‘의뢰’한 것이

아니라, ‘유튜브’ 같은 곳을 통해 알려졌던 이들을 직접 찾아 초대했다고

들었다. 그 동안 한국 문학은 번역의 문제로 인해, 해외 문학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한국 문학도 해외에 알려질 텐데,

이런 행사를 통해 준비를 해 나가는 것이 좋지 않겠나.


- 해외 작가들과의 교류에서 얻은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참여했던 해외 작가 중에 ‘어니스 모주간’이라고, ‘유럽 시 낭독 대회’에서

챔피언을 했던 친구가 있다. 말하자면, 시 낭독을 해서 점수를 매기고

상을 주는 대회다. 이들은 낭독회를 할 때 자신의 시 몇 편을 외워서 하나

짧은 공연의 형식으로 진행한다. 이런 사례를 보고 나니, 국내 낭독회의

시스템도 달라졌으면 하는 욕심이 들더라. 이제 작가들도 낭독회에서 자기

작품을 철저히 외워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단순한 낭독이 아니라 여러 장르의 예술을 결합해 가면서, 다양한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 ‘젊은 작가 페스티벌’에는 이런 것들을

더 잘 준비해서, 초대 된 해외작가들에게도 이런 것들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 그런 것들을 통해 한국 문학을 드러낼 만큼 충분한 경쟁력이 있다

생각하나?

 

나는 한국 문학이 갖고 있는 힘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아직 그게 제대로 표현이 되지 않았을 뿐이다. 그래서 이번 행사 (젊은

작가 페스티벌)는 그런 의미도 컸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정말 한국에도 퀄리티 높은 문학이 많다.

특히 시 같은 경우, 전 세계적으로 시가 살아있는 곳 자체가 많지 않다.

일본만 해도 글 쓴다고 하면 90% 이상이 소설가다. 유일하게 프랑스,

독일, 멕시코가 시를 쓰는데 사실상 프랑스와 독일도 극작가를 병행

하는 경우다. 그들은 자신의 시를 희곡 속으로 집어넣어서, 반응이

좋으면 그것들을 엮어서 시집을 내는 시스템이다. 우리와 멕시코만

유일하게 시집을 내고 있다. 이건 세계적으로 굉장한 거다.

 


 

 

- 여러가지 문화 활동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왜 굳이 시를

   택했나?

 

나는 시를 좋아하고, 좋아하는 것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있을 순 없다는

게 이유다. 하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다. 이제 시는 소위 ‘마니아 문화’처럼

취급되고 있다. 자칫하면 사라질 수도 있는 거다. 그리고 나는 시를 비롯한

모든 사라져 가는 다양한 장르의 문화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겐 시가 왜 좋고 왜 시를 써야 하는가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장르

자체가 멸종되어 간다는 점이 더 가슴 아프고 어떻게 살려나가야 하는가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본다.


- 그렇다면 당신에게 시는 어떤 것이고,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나는 시가 언어 예술의 최전방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언어 자체가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시가 최전방에서 실험적인 시도들을 해 줘야 한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이런 실험적인 시도에 대해 소극적이다. 왜냐하면 시만 써서는 생계가 너무

힘들고, 시를 출판하는 시장 자체가 어려우니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만큼 ‘시적이다’라는 느낌을 잘 알고 있는 곳이 없다.

왜 ‘시적이다’라는 표현도 자주 쓰지 않나. 영화나 연극을 봐도 ‘시적이다’라는

표현을 쓰고, 상황에 대해서도 ‘시적이다’라는 표현을 잘 쓴다. 그렇게 시적인

느낌을 가지고 뭔가를 만들어 낸다면, 그게 어떤 분야가 됐든 시는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시를 영화나 연극이나 인디 문화에 결합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시적인 느낌들을 계속 살려 나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텍스트 역시 살아나갈 수 있다. 안 읽히는 것을 계속 읽히려

하면 오히려 힘들어 진다. 시 이 할 수 있는 역할들이 있기에, 시는 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접근 방법이 필요한 거다.


- 속해있는 ‘츄리닝 바람’도 그렇고, 마니아 문화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 같다.

 

마니아 문화는 하나의 인종이다. 인종과 문화라는 게 별거 있는가?

하나의 집단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고, 그들이 추구하는 정체성으로 삶의

에너지를 얻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이 하나의 인종이 되는 거다. 하나의

다양성 측면에서 인정을 해 줘야 하는 것이다. ‘츄리닝 바람’이 추구하는

바도 그런 것이다. 모든 마니아 문화를 지원하면서, 그들의 문화와 함께

가는 것이다. 시도 그런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활동들 안에서

시적인 것을 갖고 가는 것이 나의 목표다.


- 문학은 어떻게 보면 보수적인 분야 중 하나다.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은 없었나?

 

왜 없겠나. 안티(Anti)한 시선도 많다. 하지만 문학과 작가, 출판계는 많이

정체되어 있다. 신인이 책 한 권을 내기 위해서는, 학력이나 등단을 어디로

했는지까지도 중요한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대중들의 시선도 작가라고

했을 때 생각하는 이미지가 뻔하다.

내가 다양한 활동들을 하는 것은, 이러한 것들에 대해 저항하고자 하는

이유도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학연이나 지연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활동을

통해서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을 지원해 주고자 하는 것이다.


 



- 등단을 하고 나서, 무명 시절이 좀 있었던 것으로 안다.

   무얼 하며 지냈나?

 

그 이야기가 여기저기 많이 하고 다닌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너무

유명해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많은 무명작가들이 그러듯 나도

대필 작가, 야설 작가로 일을 하면서 지냈다. 그러다 대기업에서

카피라이터도 조금 했었다. 그런데 야설 작가 했던 이야기가 너무

급속하게 퍼져서 좀 당혹스러운 부분들도 있었다.

그 부분에서는 할 이야기가 많다.


-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

 

한번은 Daum에서 ‘대박 시인, 알고 보니 전직 야설 작가’ 같은 타이틀

로 메인 뉴스로 선정된 적이 있었다. 나는 사실 부끄럽지 않았다.

왜 부끄럽나. 내가 가진 재주로 먹고 살았는데, 창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 후배들에게도 꼭 그런 말을 해 준다.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다 치고, 설 연휴에 집에 내려

가니까 부모님께서 그 뉴스를 보시고 물어보시는 거다. 정말 그 당시

에는 고소할 생각도 했었다. 시 쓰는 것 자체도 쉽지 않은데, 힘은

주지 못할망정 그런 것들로 지치게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10쇄 정도 팔았을 뿐인데 무슨 대단한 ‘대박 시인’이라고,

스캔들 난 것처럼 이야기하니 힘이 빠졌다.  

 

- 하지만 요즘 같이 시가 안 읽히는 시절에 시집을 10쇄나 팔았다는 건,

   대단한 것 아닌가?

 

소설의 10쇄와 시의 10쇄는 다르다. 시집은 1쇄를 찍을 때 기본 일천 부

이상은 안 찍는다. 소설은 1쇄 찍을 때에 오천에서 만 부 정도 찍는다.

시집의 10쇄 라고 해도, 겨우 만 부다. 이게 ‘대박’인가?

내가 시를 10년을 썼다. 그리고 3년 동안 만 부를 팔았고, 그것에 대한

인세는 500만원이다. 이게 많이 팔았다고 할 수 있을까? 절대 아니다.

사람들이 시를 더 읽어야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내 시집이 기형도

시집 이후에 가장 많은 쇄를 찍었다고 해서, 주목받았던 것도 있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기쁘지 않다. 사람들이 더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독자들이 구입하는 시집들도 여러 가지 시를 짜깁기

해 놓은 소위 ‘컴필레이션 시집’이라는 것도 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 그렇게라도 사람들이 시를 읽으면 좋지 않을까?

 

그건 시를 죽이는 행위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시집을 사서 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올해의 좋은 시’ 같은 시집들도 나오는데, 나는 그런 것에

대해서도 의문이 제기한다. 시는 ‘좋게’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잘 쓰는 시’가 중요하지, ‘좋은 시’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 예술로 도덕을 하려고 하나. 영화를 예로 들면, 혹 그 영화가 최악의

도덕성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좋은 작품성을 담보하고 있고

사회에서 반드시 건드려야 하는 부분을 담고 있다면 그건 필요한 거다.

예술은 그렇게 시작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굳이 좋은 시의

기준을 정해서 이를 대중들에게 선보이는 것이 맞는 일인지는 의문이

든다.


- 어찌됐건, 현실은 사람들이 시를 안 읽는다는 것이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우선은 현대시가 입시 교육 때 봤던 시랑은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교과서의 시들은 2-30년대의 시들이고, 주제성이 선명하다.

대개 서정성을 강조하거나, 일제 항거의 내용을 담고 있지 않나. 하지만

그런 시 말고, 자아 자체를 현미경처럼 들여다 보는 시들도 있다.

그에 대해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이 유일하게 이상의 시 몇 편 정도다.

그 시들을 봤을 때 ‘낯설음’을 느끼지 않나. 그런데 현대시에 그런 시

들이 많은 거다. 시는 결국 상징이다. 그 상징을 보기 위해서는 적극적

으로 참여해야만 한다. 우리 사회가 자극과 감각에 민감하게 되니,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에 대해 어렵게 생각하고 하기 싫어한다.

그러다 보니 시와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되는 거다.


- 대개 소설은 독자와의 소통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은 데, 시는

   그런 생각이 안 들 때가 많다. 그런 원인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현대시가 추구하는 부분이 소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가 담고 있는 것이 개인의 희열이기 때문에, 그 희열을 같이 느끼지

않으면 당연히 어렵다. 쉽게 말해서 인디 영화를 생각하면 된다.

그들이 대중과의 소통을 노릴까? 아니다. 하지만 그게 좋아지면, 그것에

미치게 되는 거다. 시도 마찬가지다. 시에 희열을 느끼면 따라가고

빠져들어야 하는 거다. 그건 시의 문제가 아니라 대중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시 쓰는 사람들)의 문제는 시를 자꾸 머무르게

한다는 것이다. 시를 그대로 두지 말고 다양한 문화로 전위를 시도해야

한다. 위에서 말했든 그게 살아남는 길이기도 하다.

 

 

 

 

- 전화를 받을 때 스스로 ‘시 쓰는 김경주’라고 말했다. 본인의

정체성은 여전히 시인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은 시적인 행동의 전위라고 생각한다.

시는 나에게 성역이다. 그 어떤 것 하고도 타협을 해도, 시만큼은 타협하고

싶지 않다. 내가 생계형 글을 썼었지만, 시를 쓰면서는 절대 출판사와도

대중과도 타협하지 않는다. 시인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굉장히 외경심을

갖게 한다. 그래서 나 스스로 ‘시인 김경주’라고 하지 않는다.

‘시를 쓴다’고 하지. 그것도 스스로 ‘시 쓴다’라고 할 때는 내가 이뻐 보일

때나, 시를 좀 열심히 쓰고 있을 때다.


- 산문집도 꽤 인기가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여행을 담은

  이야기던데, 여행을 좋아하나?

 

여행을 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고 할 만큼, 여행을 좋아한다. 외국 문화에

대한 동경이나,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이 아니다. 여행 가서 스스로

환기도 하고, 글도 쓰고 하는 거다. 나에게 여행은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다. 여행에 관해선 계획이나 유난 떨지 않고, 일단 조건만 되면

바로 떠난다.


- 여행산문집 <passport>는 내가 읽었던 여느 여행기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여행에 대해 근본적으로 질문하는 책을 내고 싶었다. 사실 다른 여행기

와는 다르게 따라 하기도 힘든 여행이다.

누가 한국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배-그것도 상선을-를 타고 가나.

일반 사람들에게는 낭만적이거나 로맨틱한 여행이 아니다. 하지만

내겐 그게 더 로맨틱하고, 또 무엇보다 (비용이) 싸다.(웃음)

- 그렇게 다녔던 여행 장소 중 어디가 가장 좋았나?

 

나는 유럽 문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황량한 곳이 좋다.

고비 사막 같은 곳. 그렇게 황량한 곳에 가게 되면, 뭘 보는 게 아니라

자기 머리 속을 들여다 보게 된다. 사유를 하게 되고, 머리는 더

시끄러워진다. 특히 고비 사막에 가면 꼭 다른 행성의 표면에 와 있는

느낌이 든다. 그 모습을 보면서 쌩 떽쥐페리의 <어린왕자>의 배경이

여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도 있다.

 

 


 

 

- 이야기를 나눠보니, 하고 싶은 말도 많고 쓰고 싶은 것도 많은

   것 같다. 올해 계획은 어떤가?

 

우선 올해는 책이 3-4권 나올 계획이다. 오랜 친구 (그는 독립 영화를

찍는 감독이다)와 ‘동경에 관한 76개의 틈’을 소재로 쓴 <레인보우

동경>이라는 여행 책이 곧(현재는 이 책이 정식으로 출간되었다) 나온다.

그리고 무명 작가 시절에 있었던 이야기들을 담은 책도 낼 계획이다.


- 처음 인터뷰를 시작할 땐 마지막에 ‘어떤 시인이 되고 싶은가’

  를 질문하려 했다. 하지만 바꿔서 말하고 싶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글쎄. 무엇보다 지치지 않는 사람이고 싶다. 무기력한 것 하고, 무력한

건 다르지 않나. 무력한 건 내가 힘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견딜 수

있겠지만, 기운이 없고 에너지가 없는 건 견디기 힘들 것 같다.

무기력해서 못하게 되는 걸 스스로 가장 경계한다. 이렇게 끊임없이

나의 계획과 앞을 이야기하는 것도 어떻게 보면, 무기력하지 않게

지금 일들을 잘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다. 내가 계획한 것들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지금의 나에겐 가장 중요하다.


그는 세상에 대해 긍정적이고, 또 밝은 사람이었다. 인터뷰 내내 분위기

를 밝게 해주다 못해 ‘내가 끼여 대화하는 자리에서 30분 이상 웃음이

터지지 않으면 내 책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던 모습에서는 시인의

이미지나, 그가 글에서 보여주던 감수성을 찾기 쉽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누구보다 한국 문학과 시, 나아가서 문화에 대해

고민하고 많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처음 인터뷰를 시작했던 ‘시 쓰는 김경주’는 문화에 대해 경계를 짓는

것에 대해 가장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여행도 ‘경계를 허무는 작업’이고, 그가 몸담고 있는 ‘츄리닝 바람’도 

‘무경계문화펄프연구소’다. 그는 끊임없이 다양한 문화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믿었고, 그 속에 시적인 느낌을 담아내길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시는 살아남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인터뷰를 마무리한 ‘문화 저격수 김경주’는 이미 경계를

허문 사람이었다. 시를 쓰지만 스스로를 거기에 머무르도록 하지

않는 그의 에너지는, 그가 우려하듯 무기력한 모습으로 지치는

모습은 없을 것 같았다.


어떠한 장르든 소수의 문화는 살아남아야 한다고 하던 그의 말처럼,

다양성은 사회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논리다. 특히 문화는 한 가지

논리에 지배되다 보면, 쉽게 취약성을 드러내고 만다.

물론 이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다수의 문화에 맹목적으로 지배

당하지 않기 위해서 누구보다 대중들이 문화에 대해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양한 교류와 적극적인 대중의

관심 속에서만, 한국의 문학은 다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

 

김경주 시인  

 

2003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

성생명 카피라이터, EBS 사회과학 탐구 부문 구성작가로 활동

했으며, 서강대 철학과 재학 중 친구들과 독립영화사 '청춘'을

설립하여  무단편영화  작업들을 하기도 했다.

2006년 현재 안양예술고등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으며,

영화사 '고골 픽쳐스'에서 시나리오 팀장으로 재직 중이다.

 

시집

<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다 > 

< 기담 >

 

 

 
다음검색
댓글
  • 09.06.10 09:08

    첫댓글 "나 없는 변방에서 나오는 그 시간이 지금 나의 영혼이다.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현대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데 김경준의 시가 많이 도움이 됨니다. 감사합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