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송총의 위치는 일본 고시군高市郡 명일향촌明日香村 대자평전자大字平田子 고송高松 44번지입니다.이곳이 고대에는 회외지會畏地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곳을 비조飛鳥(아스카)의 회전檜田(히노쿠마)라고 하였습니다. 고송총의 위치가 비조지방의 회전이고, 고대에는 이곳이 회외였으므로 회전과 회외는 같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고송총이 생겨날 때의 지명은 회외이고, 발굴될 때의 지명은 회전입니다.
고송총 연구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이 무덤은 낮은 구릉지에 표면에서의 높이 106m~113.5m사이에 자리 잡은 고분으로, 분구의 정상부에 여러 구루의 광나무가 자라고 있고, 직경이 18m~20m이고 높이가 5.6m입니다. 이 원형의 고분은 크기로는 작은 편에 속합니다.
고분을 발굴할 때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봉분을 절개하여 파고 들어가서 중간부분에 석실이 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석실은 봉분의 크기가 작은 만큼 길이가 265.5cm, 폭이 103.5cm, 높이가 113.4cm에 불과하여 피장자의 관이 그대로 있었다면 몸을 움직이기가 불편할 정도라고 합니다.
석실의 북쪽 벽에 현무도玄武圖가, 현무도의 좌우에 부인도婦人圖가 각각 그려져 있고, 천정에 성수도星宿圖가 그려져 있습니다.
석곽의 내면은 3mm~7mm의 두께로 회칠을 했는데, 회반죽의 탄산칼슘 순도純度가 95% 경상북도 고령高靈의 벽화고분과 일치합니다. 고송총은 신라고분과 가야고분과 회칠 기법이 같습니다.
고송총이 발굴된 이후에, 소림혜자(小林惠子 고바야시야스코)씨는 안료의 재질과 그림의 기법과 양식을 연구하여 고송총의 축조연대가 7세기 중엽인 지통조指統朝(686~696)로, 무덤에 묻힌 사람은 천무천왕天武天王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므로 소림헤자씨의 주장에 따른다면, 고송총 벽면에 그려진 부인도에 등장하는 부인들은 천무천황의 부인과 부인의 시녀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들 여인들은 서벽 북쪽 면에 4명, 동벽 북쪽 면에 4명, 모두 8명이 그려져 있습니다.
여자들은 관녀官女의 복식으로 보이는 덧저고리와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치마는 여러 색의 천을 옆으로 이어서 길게 세로무늬로 이은 천으로 만들었습니다. 덧옷은 각각 청·황·적·백색의 옷으로 오방색을 취하고 있습니다.여자들은 모두 앞머리 머리카락을 약간 부풀려 긴 머리카락 위로 넘겨 묶고 가는 끈으로 넓게 잡아매어 궁중머리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들 여자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해가 1972년, 소림혜자씨가 그의 연구를 발표한 해가 1988년입니다
2 被葬者
천무천왕은 백제가 멸망할 때 일본으로 건너간 부여풍夫餘豊 그 사람입니다.
소림혜자씨는 피장자가 천무천왕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천무천왕을 대해인大海人으로 보고 있는데, 대해인은 일본인이 아니고,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입니다. 부여풍은 백제가 나당羅唐연합군에게 멸망한 후에 백제의 부흥을 꾀하고자 주류성周留城에서 무왕의 조카 복신의 추대로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유인궤가 지휘하는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여 그의 꿈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복신福信을 일본에서는 중대형仲大兄이라고 합니다. 부여풍에 버금하는 사람 즉 부여풍의 동생이라는 뜻입니다. 중대형이 된 복신은 천지왕으로 즉위하였습니다. 그의 아들을 대우왕자大友王子라고 하였습니다. 대해인은 대우왕자의 숙부가 됩니다. 대해인 천무천왕의 중대형 천지천왕은 671년 6월에 행방불명이 되었는데,<서기書記에>는 그가 그해 12월에 사망했다고 밝혔습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복신과 부여풍이 서로 시기하여 복신이 부여풍을 죽이려고 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서 복신(중대형)부자와 부여풍(대해인)은 백제에서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듯합니다. 672년 대해인은 임신壬申의 난을 일으켜 대우왕자와 싸웠습니다. 대우왕자는 근간대진경近簡大津京에 은거하고 있다가 7월 13일에 성이 함락되어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리하여 대해인은 천무천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행적으로 보아, 조카와 싸워서 권좌를 찬탈했으므로 그에게 반기를 드는 적들이 있었으리라고 추측이 됩니다. 소림혜자씨는 그에게 적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고송총 발굴 결과 피장자가 수의조차 입지 못하고 매장되었음이 밝혀졌는데, 부토에 미처 썩지 않은 몇 점의 뼈 조각이 남아 있었으나, 두개골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피장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은제 칼이 몸통은 없어지고 약간의 금장식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흔적은 이 능이 언젠가 천무천왕의 적들에게 도굴 당했음을 말하는 것이라고 소림혜자씨는 말했습니다. 소림혜자씨는 도굴이 겸창시대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리합니다. 천무천왕의 능이 수모를 당하는 이유는 권력을 장악한 적들이 무덤을 훼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리하여 천왕은 수의조차 입지 못하고 나신으로 매장된 채 이어서 도굴이라는 엄청난 수모를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