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잘나가던 건기대여업’ 옛말, 전국 일거리 없어 손놓아...세대교체 언감생심
▲ 50~60대가 주류인 건기대여사업자들. 자식은 키워놓았지만 시집장가 밑천마련도 여의치 않으니 노후대책은 사치다. 40대, 대출로 산 비싼 건기를 놀리는 심정이 타들어 간다. 30대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 |
50대후반의 김경호(가명)씨. 잘나가던 ‘중장비 기사’ 시절을 거쳐 나름 ‘성공신화’를 썼던 그 지만 노후대책은 없다. 자식 키워 시집장가 보내고 나니 경기도 변두리 작은 연립주택 하나와 낡은 굴삭기 한다. 하지만 일이 없어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50·60대 건기업자들이 점차 업계서 사라지고 있다. 신체적으론 아직 조종이 가능하지만, 일감도 없으려니와 건설사들이 나이 먹었다고 받으려 하지 않기 때문.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용돈벌이는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은 오산이다. 노후 삶을 어찌해야 할지 답이 없다.
충주에서 굴삭기업을 하는 40대 중반의 성대곤(가명)씨. 가산을 털고 여기저기 빌려 마련한15톤 덤프트럭. 한 땐 수익이 5백만원을 넘어 고된 노동에도 그럭저럭 버틸만 했다. 언제부턴가 일감이 줄더니 이젠 25톤덤프에 밀려 부르는 이가 없다. 월 2백도 못번다. 깜깜하다.
성씨처럼 10년 넘게 몸담아 온 40대 건기대여사업자들. 요즘 골머리를 앓고 있다. ‘배운 게 도둑질’라고, 일감이 없어도 기다릴 뿐이다. 교체한 새 건기 할부금 갚느라 여기저기 돈 꾸며 정신없지만 언젠가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 싶어 맘 상해가며 마냥 기다린다. 그러니 30대들은 접근조차 꺼린다. 가업으로 물려받은 이들은 하나같이 전업을 고민하는 때다.
건설기계 대여업은 더 이상 고수익을 보장하는 않는다. ‘황금알을 낳는 건기업’은 50대 이상 장년층의 회상일 뿐. 일거리가 없어 하루 종일 우두커니 세워놓아야 하는 고가의 건기. 그러니 세대교체는 언감생심이다. 대여업자들이 모이면 ‘언제 저걸 그만두나’ 입을 모아 한숨뿐이다. 이에 본지는 건기대여사업자들을 세대별로 구분해 그들의 삶과 생활여건을 살펴보려 한다.
30대 “지난달 5일 작업, 깜깜”
△김모씨(34세, 서울·굴삭기·기혼)=전문대 졸업을 앞두고 2000년 휴학을 했다. 군 입대도 해야 하고 새로운 일들을 하고 싶기도 했고. 삼촌의 소개로 굴삭기 조종면허에 도전했고 몇 달 후 시험을 통과했다. 공병으로 군복무를 하며 건기를 조종했다. 전역하고 졸업을 했지만 사회는 일자리를 주지 않았다. 갈 곳도 찾는 이도 없었다. 1년 정도 백수로 떠돌다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건기조종 일을 시작했다.
공병으로 3년여 조종레버를 잡았기에 초보 이상의 기술은 가지고 있었다. 3년 정도 조종사 생활을 하며 돈을 좀 벌고 2008년 결혼도 했다. 조종사 월급으로 모은 돈을 털어 서울 변두리에 작은 전셋집을 마련했다. 1년 정도 더 조종을 하다보니, 좀 더 고민거리가 많아졌다. 애가 태어나 가장으로서의 중책을 느낄 즈음이다.
조종을 하면서 거래처 사람들도 많이 사귀었고 주변에서 ‘열심히 한다’는 칭찬도 없잖은 터라 왠지 자신감이 있었다. 신제품 건기 값을 알아보니 1억원 가까이다. 60%는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연 10% 이율이니 한달 150만원이 원금과 대출이자를 상환하면 된다. 걱정이 없지 않지만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2010년부터 시작된 건기대여사업은 세 식구가 검소하게 살며 생활하기에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한달 5백~6백만원을 버는데, 대출금·유류비·유지비 등을 빼고 250~300만원은 됐다. 육아만 하는 아내를 달래며 그런대로 살아왔다. 하지만 작년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수입이 줄었다. 한 달에 10일 일하는 때도 생겼다. 결국 아내가 맞벌이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달에는 5일만 일했다. 수금 되는 올 가을이 가장 위기일 것 같다. 잘 될 거라 생각했던 사업, 점점 희망이 사라지고 있다. 아내도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게 어떠냐고 조심스레 부추긴다.
△박모씨(33세, 부산·지게차·미혼)=아버지가 지게차 대여사업을 했는데 나이 들면서 그만두고, 2007년 사업을 넘겨받았다. 그 전에는 서울의 한 중소기업에서 세일즈맨을 했다. 아버지가 가업을 넘기기 1년 전 지게차 면허를 따 놓으라고 하셨는데 그 때부터 준비를 하신 것 같다. 지게차 6대를 물려받았다.
처음에는 6대 모두 물류회사에 임대했다. 한 대에 월 80만원씩 받았다. 인건비나 유류비는 임차인이 감당하기에, 유지·보수비를 제하면 수입이 괜찮았다. 2009년부터 어려움이 닥쳤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가 악영향을 끼친 것. 주문이 줄면서 서 있는 지게차가 늘었다.
줄어든 수입을 메우려고 직접 조종을 시작했다. 틈틈이 조종기술을 터득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연식이 오래되지 않은 1대를 골라 직접 조종했다. 조종을 하면서 지게차 대여사업자들과 조종사들이 현장에서 얼마나 형편없는 대접을 받는지도 체험했다.
사업은 점점 힘들어졌다. 초반에는 아버지 거래처가 있어 그나마 유지됐던 것 같다. 3년여 지나니 그 약발도 먹히지 않았다. 2010년 지게차 3대를 팔고 사업을 절반으로 축소했다. 남은 지게차로 어떻게든 고비를 넘겨보려 했다. 하지만 수입은 줄고, 유비·관리비는 늘어갔다. 지게차가 노후화 되면서 몇 안 되는 주문도 끊어진 상태다. 그렇다고 새 기계를 사기도 어렵다. 투자할 돈도 없고, 수익성도 없을테니.
마지막 생각은, 나머지 지게차도 시세가 더 떨어지기 전 처분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실패한 것 같아 아버지에게 죄송하고, 또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아직 결혼도 못했는데 청춘을 사업실패로 점철하지 않을까 걱정이 태산이다.
40대 “배운게 도둑질, 속만끌여”
△윤모씨(44세, 경기·굴삭기·기혼)=고교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좋지 않아 취업전선에 끼어들었다. 대학을 가고 싶었지만 맘뿐이었다. 건설현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90년대 초반, 여기저기 아파트 건설붐으로 착실하게 일하면 혼자 먹고 살기엔 별 지장이 없었다. 그러다 굴삭기사업자로부터 수입이 좋다는 얘기를 들었고, 뛰어들기로 결정했다.
학원수강 4개월 만에 굴삭기 조종 자격을 땄다. 면허만 가지고는 일을 할 수가 없어 현장 조종사들을 찾아가 술을 사주며 조종기술을 조금씩 배웠다. 그러던 중 한 굴삭기대여사업자가 함께 사업을 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시작된 조종사 일이 10여년 이어졌다.
조종사로서 자리를 잡으니 급여도 괜찮았다. 2000년 초반, 월 350만원 정도는 벌었다. 하지만 2005년 사장이 수익이 여의치 않다며 사업을 접고 굴삭기 한 대를 싸게 넘겨줬다. 대여사업을 시작했다. 그해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가졌다. 가정이 생기며 사업에 집중한 때문인지 월수입도 늘었다.
2008년 글로벌 위기 때도 그는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냈다. 전세로 시작했던 결혼생활이었는데, 2009년 경기도에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장만했다. 절반이 대출이지만, 내집이라는 생각에 뿌듯했다. 이듬해엔 새 굴삭기를 장만했다. 10년 가까이 된 거라 기름도 많이 먹고 잔고장도 잦아 교체한 것. 중고처분 값에 모아 둔을 보태고 대출을 받았다.
돈을 더 벌거란 기대는 곧 무너졌다. 작년, 장기 고객이던 한 건설사가 부도를 내고 사라졌다. 타격이 컸다. 그 회사 일은 거의 도맡아 해왔기 때문. 일감 절반이 줄었다. 아파트와 새 굴삭기를 장만하며 대출받은 돈의 이자상환만 월 200만원이 넘는데, 수입은 400만원선. 수입이 줄며 생활이 힘들었다. 자식도 한명 늘고. 생활비와 대출금 상환을 제하면 적자.
대책이 필요했다. 지출이 가장 큰게 굴삭기 할부금. 사업의 전부인 굴삭기를 처분할 순 없다. 결국 아파트를 전세로 돌리고 본가로 들어갔다. 잠시 부모님께 신세를 지기로 한 것. 하지만 형편이 나아지진 않았다. 올 수입도 형편없다. 상반기 좀 나아지려나 기대해봤지만 헛물만 켰다. 지난달엔 일한 날이 거의 없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밤잠을 설치고 있다.
△성모씨(45세, 충북·덤프·기혼)=2004년 서울에서 유통업을 하다 쫄딱 망했다. 집 팔고 짐 싸 고향 충주로 내려왔다. 친구 녀석이 덤프 대여사업을 하는데 괜찮다는 얘기를 해 염두에 두던 터였다. 전에 하던 사업이 용달차를 몰고 재래시장을 도는 일이였기에 유사하기도 하고. 집 팔고 남은 돈에 형제들에게 조금씩 빌려 15톤 덤프트럭 한 대를 구입했다.
초반엔 배우는 때여서 그런지 돈벌이가 수월하진 않았다. 몇 달이 지나니 일감 구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먼저 시작한 친구 녀석도 도움이 컸다. 남한강 주변 도로보수와 주택단지 건설로 일이 제법 많았다. 한 달 1000만원 이상 벌었다. 기름값 유지보수비 빼면 순수입은 500만원선. 새벽 출근, 심야 퇴근으로 일은 고되지만 괜찮은 수입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2008년부터 일이 줄기 시작했다. 25톤 덤프사업자들이 늘면서 15톤 덤프 수요가 갑자기 줄었다. 15톤 덤프 두 대 할 일을 25톤 한 대가 해버리니. 4대강사업 등 곧 일감이 생길 것이란 이야기가 나돌았지만 정작 그와는 별 인연이 없었다.
지역 내 일감에 만족할 수밖에 없는데, 작년부터는 그 일마저 크게 줄었다. 반면, 기름값이니 소모품이니 해서 지출할 돈은 늘어갔다. 요즘엔 월매출 500만원도 힘들다. 그거 받아봐야 이것저것 다 떼고 나면 순수익은 200만원도 안 된다. 앞날이 깜깜하다.
50대 “노후, 달랑 굴삭기 하나”
△김모씨(56세, 경기·굴삭기·기혼)=80년대 중반 부기사로 굴삭기를 탔다. 20대 초반이었는데 주변에서 중장비(현 건설기계)가 돈을 많이 번다고 해 무작정 달려들었다. 큰아버지가 소개해주신 건기업체에서 일을 시작했다.
선배 조종사한테 참 많이 두들겨 맞았다. 윤활유 조금 넣었다고, 흙 제대로 안 닦았다고, 유리에 오물 묻었다고 때리니... 맞으면서 배웠고, 그러면서 조종면허도 땄다. 1년이 지나고 조종사로 취업했다. 한 달 50만원이상 벌었다. 대기업 평사원 월급이 40~50만원 하던 시절이다.
서울올림픽 특수로 일감이 넘쳐났다. 호시절 번 돈으로 89년부터 대여사업을 시작했다. 잠시 경기가 주춤하나 싶더니 90년대 다시 건설붐이 일었다. 이때 번 돈으로 사업도 제법 키웠다. 건설기계 40~50대를 모아 관리사를 차렸고, 직접 소유한 굴삭기도 6대나 됐다.
사업은 97년 IMF에 직격탄을 맞았다. 멀쩡하던 건설사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일하고 받아야 할 돈이 수금되지 않았다. 사라진 회사를 상대로 돈 받을 길도 없었다. 그 해 관리사 문을 닫았고, 굴삭기도 3대로 줄였다.
IMF로 몸집이 작아지긴 했지만, 남은 굴삭기로 사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신도시 개발과 월드컵 특수로 그럭저럭 사업을 유지했다. 서울과 용인에 아파트를 두 채 소유했다. 하지만 2008년 금융위기로 굴삭기 1대를 더 정리했다. 가동되지 않는 굴삭기를 갖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2010년에는 남은 2대중 한 대를 팔았다. 일도 없었거니와 장남과 둘째 딸 결혼비용이 필요했기 때문. 서울 아파트를 팔아 아들 결혼시켰고, 용인 아파트도 내놨는데 매매가 안돼 전세를 줬다. 아파트 판돈과 전세금으로 받은 걸로 부부가 살 30평 연립주택을 경기도 외곽에 마련했다. 굴삭기 1대로 부부 생활비를 간신히 충당하고 있다.
하지만, 노후준비를 해놓지 못한 것이 걱정스럽다. 자식들에게 손 벌리며 살고 싶지 않은데, 요즘 일이 없고 자꾸 줄어들어 그리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서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