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관한 시모음 43)
겨울 초대장 /신달자
당신을 초대한다.
아름다운 눈을 가진 당신.
그 빛나는 눈으로
인생을 사랑하는 당신을 초대한다.
보잘 것 없는 것을 아끼고
자신의 일에 땀 흘리는,
열심히 쉬지 않는
당신의 선량한 자각을 초대한다.
행복한 당신을 초대한다.
가진 것이 부족하고 편안한 잠자리가 없어도
응분의 대우로 자신의 삶을 신뢰하는
행복한 당신을 기꺼이 초대한다.
눈물짓는 당신,
어둡게 가라앉아 우수에 찬
그대 또한 나는 초대한다.
몇 번이고 절망하고
몇 번이고 사람 때문에 피흘린 당신을
감히 나는 초대한다.
당신을 초대한다. 겨울 아침에.
오늘은 눈이 내릴지 모른다.
이런 겨울 아침에 나는 물을 끓인다.
당신을 위해서.
겨울 시계 /곽재구
지나가는
비님
혹 들어오실까
창문 열었네
두 손 내밀어
가만히 보듬는
원죄의 서늘한 목소리
비님은
들어오시지 않고
헐벗은 나무 몇 그루
산그림자 속으로 걸어가네
새봄의 이파리만큼 많은 인생의 나날들
하루쯤 쉬어 엄격한 겨울의 시계가 파손되지 않는다면
그대여, 그대 발자국 찍힌 지상의 모든 안쓰러운 추억마다
성냥개비 끝 매달린 머루알만한 그리움의 불꽃들 새겨 두고 가시게나
가난한 사람들이 호호 입김을 불며
난로가 꺼진 눈보라 속으로 정처 없이 나아갈 때
그들 영혼의 텃밭 한 귀에 추운 매화꽃 한 송이 피어나게 하라.
겨울 /이창호
지금 세상은 새하얀 독을 푼 냉동창고
내 가슴 냉돌 위,
눈은 하염없이 퍼붓고 집 대문 밖,
-[시인의 길을 가겠다]-
등불처럼 내 걸린 무명시인의 문패,
사소한 삶이 시의 삶으로 소생하기까지
이 가슴,
얼마나 더 더워져야 할 것인가.
그러나
알몸의 시(詩)로 부활할 것들을 위해
또 다시 내 가슴 붉게 달구겠다.
후끈 달아올라 더는 견딜 수 없을 때,
스스로 분향하여 이루어내게 될
새까만 재,
그 속을 파헤치면 사리(舍利)처럼
빛날 한줌의 시(詩).
죽음처럼 하얗게 창(窓)을 두드리는
눈보라 속에서도 몸,
따뜻하게 뎁혀 갈 한 줄의 삶, 그 위를
걷겠다.
겨울잠 /이규옥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저마다 분주히
오가는데 오가는데
잠을 잔다 잠을 잔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제각기 어디론가 총총히 떠나는데
떠나는데 눈 뜨고 잠을 잔다 잠을 잔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이제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데 뜬 눈 속으로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데 잠 속 깊숙이 눈이 내린다
눈이 뿌리내린다 뿌리내린다 눈 뜬 잠 속으로 하얀
눈이 푸른 뿌리내린다 붉은 뿌리내린다 새하얀 눈이
푸른 꽃 내린다 붉은 꽃 내린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겨울의 소리 /염인덕
하얀 솜털이 햇살 먹으면
은빛 찬란하게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놨습니다
축 늘어진 빨랫줄 쉬어가는데
전깃줄에는 지지배배 노래가
저 멀리 울려 퍼집니다
하얀 도화지 위에 나무는
수 국화꽃을 그려나
활짝 웃고 있어 아름답습니다
나도 하얀 꽃송이 되어
누군가에게 하얀 사랑을
하염없이 꺼내 주고 싶습니다.
겨울노래 /박신지
그대를 묻고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가랑잎처럼 가벼웠다
삭정바람 속으로 겨울새 한 마리
푸드득 빈 가지를 뿌리치고 간다
산 품 속에 안겨간다는 게 잠시
외로운 길이라지만
머지않아 나 또한 함께 할 길
그 길이 아스라이 보인다
발길에 채이는 마른 풀 포기 정겨웁다
내 머리카락 쓰다듬는 청솔 가지에
설렁이는 산바람이 향기롭기만 하다
산다는 것은 아름답다
돌아가는 세상은 더욱 위대하다
겨울빨래 /김남조
시린 적설위에
묽은 아침해가
기도하듯 간절히 엎드려 있다
눈과 둘이서
한밤내 어둠을 밝힌
하얀 빨래들
이상하여라
순백이 순백위에 설풋 겹쳐진
빨래그림자 마저
살아 있듯이 유정하고
누리 안 냉쾌와 광명함이
섬세히 빗질하여
온세상 매듭들을 풀었구나
오로지 유순뿐이구나
일상의 예삿일 중에
새삼 황홀히 압도해 오는
아름다움들이
맑디밝게 영혼에까지 갈채 울리고
신의 나라인양
넉넉히 자족하는
이네들의 좌석에서
나의 할바란
최소한
비껴 서기라도 해야할까보다
겨울 나그네 7 /전병윤
-길
어누 땐가 상현달이
내 눈을 콕콕 찌르더니
오늘은 눈꽃이 핀
섣달 매화 가지에 앉아서
내 가슴을 두들겨 팬다
지금까지 놓고 온
디딤돌들이 흔들리는 이빨처럼
제자릴 못 잡고
하나씩 빠져나간다
그래, 철없는 나이라면
다시 이빨이 날 텐데
사람들은 지구처럼 공전과 자전을 못하고
왜 평면의 외길만 가고 있는가
이 눈 위에 발자국이라도 찍어보자
그래, 어느 봄이 왔다 가면서
흩뿌린 매화 꽃잎이
내 발자국에 머물러 주겠지.
겨울 나그네 1 /양채영
눈 섞인 바람이 분다
오라는 이 없어도 가야 하리
얼까말까 망설이는 개울을 옆구리에 끼고
붉은 망개열매와 멧새 떼에 길을 물어
마른 풀잎 쓰러져 흩날리는 논밭뙈기를 지나
술렁술렁 걸어서 가야 하리
내 조선시대 사모하던 선비들의 기골을 닮은
잡목숲과 낙낙장송과 거친 암벽이 솟아 있는
이 나라 눈 덮인 산악을 우러르며
산가마귀 우짖는 산협을 지나면, 어디선가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명년 춘삼월에 돌아올까
어―허이 어―화
건 쓴 상제들과 상여꾼과 선소리꾼이
흰 겨울산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들의 슬픔도 갖고 싶던 모든 것들이
눈발 속으로 날아가고 산은 더 높고 깊다
고사리국에 밥 한술 말아먹고 소주 한 잔 걸치고
무너진 산성을 지나면 호도나무 과목들 사이로
푸르딩딩한 냉이잎이 얼어있고
신라적 암각된 마애불이 길손을 맞는다
그는 이 산과 바위와 바람과 더불어
수척한 길손을 지키며 바랜다
흰 눈벌에 모여선 낙엽송숲의
자잘한 가지들이 더 가까이 더 가까이
겨드랑이를 끼고 겨울바람을 막아
수묵화처럼 허공중에 부풀어 있다
그 속에 누군가 저녁 등불을 켜고
그 머리 위로 겨울새떼가 돌아가고 있다
나는 것도 모여 있는 것도 걸어가는 것도
모두 춥다. 모두 간다. 모두 남는다.
겨울의 수목화[水墨畵] /진장춘
여름의 화려한 빛깔과
가을의 풍요와 슬픔
다 버리고
수묵화로 남은 빈들의 가난함
옷을 벗고 선 나목들이
경건히 기도하는 발치에
초가집에 잠자는 아이들처럼
눈 덮인 낙엽 속에 숨은
선한 짐승들의 배고픔
그리고 산의 큰 침묵
겨울의 산야는
곱게 늙은 고승처럼
성스럽다.
겨울 이야기 /조민희
숱한 사연을 묻어둔채
그렇게 가을은 떠나고...
우리동네 소래산에도
다시 겨울이 왔다.
온통 하얀 눈 으로 덮인
전나무 숲 소롯길 에는
스산히 눈발이 날리고...
산길 에는 듬성 듬성
등산객의 발자욱이 희미하다.
청솔모는 이곳저곳 기웃거리다
어디론가 사라지고
산새 들은 먹이 찾기 바쁘다.
산 그림자 짙어가는 늦은 오후
찬 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조그만 찻집에 앉아
따스한 한잔의 커피 향에
취해 본다.
겨울 하늘 1 /민경대
조그만 하늘이 열라고
무게있는 시간들이 춤을 추면서
시간을 자꾸 연장하며
거룩한 시간의 싹들이
이스트처럼 발효되면서
촛점늘 향해 시간은 타고 드는데
역사의 신들은 빌및에서 꿈틀거라며
용봉의 꽃봉우라 들이 수없이
호수에 수제비 뜨며
하나가 되어 하늘을 나르는 연은
다시 바람을 타고 더 높이 상승의 꿈나래 펴면서
앞서거나 뒷서거니 대화를 만들며
벽이 하물어진 춤사위 이미 활을 당겨
활을 하늘애서 그칠줄 모르면서
선화하는 무용은 초저녁 밤을 관통하고
새벽에 까지 희망의 눈부신 약속으로
한 점에 모였다
기도를 하면서 마음속에 눈이 내리면서
전설같은 서사시가 아담과 이브의 눈빛에
광채로 빛나며 더욱더 큰 보폭으로 하늘 문을 향해
걷고 있다
겨울동거 /김 문
아파트와 전철역 사이 왕벚나무 가로수
나무는 공중의 계절로 서식지를 옮긴 듯했다
모든 풍경은 야윈 못처럼 박혀 있고
쇠기러기 한 마리가 벚나무의 옹색한 구도 속에 거주를 시작했다
전철이 들어오면 풀등처럼 생기는 나무의 창
추위를 견딜 곳이란 제 날개밖에 없어
깃털에 부리를 묻고 솜뭉치처럼 웅크린 새가 있는 소묘 한 점
전철은 칸칸이 날개를 달고 와서 언 바람을 잔뜩 부려놓고 간다
벚나무의 적막에 든 새와 점점
새가 되어가는 벚나무가 시작한 겨울동거 서로
적막을 나눠 먹으며 언 밤을 견딘다
벚나무는 가끔 바람의 부피를 붙들고 날갯짓을 한다
스스로 깃털 빠진 새라고 믿는 것 같다
밤이면 건너편 임대아파트 몇몇 불빛들 건너와
쇠기러기 날개 밑에서 깜빡이다 간다.
마지막 전철이 출발하고 멀리 무소식의 밤
북쪽에서의 한때가 울컥울컥 목울대를 넘어 간다
몇 채의 세입자들이 적은 평수로 주소를 옮기고
며칠 후면 전기도 끊긴다는 갈 곳 없는 이들의 캄캄한 대낮
새의 부리가 나뭇가지를 톡톡 쫀다 찌릿찌릿
나무의 귀가 바람의 소리를 엿듣고,
겨울 나루터 /이남일
바람에 실려 왔다가
강물 따라 흘러가는 발자국 소리
보고 싶었소.
꽃잎이 날리던 자리에 눈발이 날리면
그리움은 천길 물속 별빛처럼 박히는데
강물이 얼고
갈대 숲에 함박눈이 쌓이면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바라보다가
얼음 강 눈길 위를 끝도 없이 걸었소.
강둑을 만나 돌아오는 길에
찍고 온 내 발자국은 왜 이리 낯선지
걷다가 멈추다가 서성이던 모습들이
한줌 햇볕이면 안개처럼 스러지고 말
육신이 남긴 중력의 흔적들이
강물에 띄울 말 한 마디 담지 못한 채
문득 흰눈 속에 사라지더이다.
계절 따라 만날 것 같던 영혼의 노래여
눈발 날리면 서둘러 떠나는 겨울바람처럼
배 띄우면 물결 따라 닿는 곳에서
그냥 보고 싶었소.
겨울 등반 1 /강계순
풀뿌리에 고여 있는 몇 모금의 이슬
눈 먼 희망으로 허기를 달래고
빛나는 갈기 흔들어 바람을 가르면서
꿈의 두께만큼 깊이 굳어 온 살
철없이 성 내고 울먹이던 피 유순히 가라앉고
날개 떨어진 풍향계 하나 허섭쓰레기로 남아 있는
배낭 등에 걸치고
뒤돌아 보면 아득히
등불 켜 놓고 도란거리는 집들
어릴적 귀 익은 노래도 몇 마디
들리는 듯하다.
청청한 들판을 달려온 바람도
허리 굽히는 이 골짜기
등 넓은 바위들 사이로 설핏설핏 비추는 햇살
살 데이지 않을만큼 따스하여
한 생애의 끝에 이르는 길 말갛게 밝히고 있으니
혼자 숨어서 고이는 그리움 때때로 열어보던
녹슨 은빛 열쇠
무겁게 지고 다니던 곡괭이와
허공 휘젖던 잠자리채 팽팽한 방패 모두
이쯤에서 벗어 두고
가벼운 차림으로 옷 갈아 입는다.
아는 별자리 이름 한 개씩 내려 놓으면서
아직 남아 있는 몇 개의 등승이 향해
빈 손으로 떠나는 겨울 등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