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론? 순중론? 대체 그것들이 무엇이길래....
(생소한 분들을 위한 지침서) - 윤영상 목사
1. 용어 이해
조직신학에서 "좁은의미의 중생"이 있고 "넓은 의미의 중생"이 있습니다. 그리고 "회심"이 있고요. 개념으로서는 좁은의미의 중생과 회심사건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사건으로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용어들의 개념상 효과적부르심과 좁은의미의 중생을 동일시 하는 분도 있고, 넓은의미의 중생을 회심과 동일시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고요.. 이러한 부분들은 연중론과 순중론 모두 같이 이해를 하고 있는 입장입니다.
연중론과 순중론이라 불리기게 된 이유.(논쟁시 편의를 위한 임시적 용어입니다)
*연중론:
중생이 시작포인트지점부터 완료포인트지점까지 시간적과정이 있는 연장적이라서 연장적 중생관이라 합니다.
"좁은의미의 중생"이란 포인트지점에서 "넓은 의미의 중생이 완료되는 포인트 지점"이 회심사건이 일어나는 지점으로 이 두 포인트 지점 사이에 과정이 있다. 라고 주장합니다. 즉 좁은 중생과 회심사건 사이에 어떤 시간적 과정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좁은의미의 중생--> 설교자의 말씀 선포시 죄각성,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넓은의미의 중생완료, 회심사건-->성화
*순중론:
중생의 시작포인트지점이 곧 완료포인트지점이라 시간적 과정이 없는 순간적이라서 순간적중생관이라 합니다.
"좁은의미의 중생"이란 포인트지점에서 "넓은 의미의 중생이 완료되는 포인트지점"인 회심사건 지점까지 그 어떤 시간적 과정이 없고 두 사건인 좁은의미의 중생과 회심사건은 두 포인트가 아닌 한 포인트로 일어나는 것이다. 즉 좁은의미의 중생시, 회심도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좁은의미의 중생,회심,확정적성화--> 믿음과 회개,성화
그럼 왜 논쟁이 되었나?
연중론(연장적중생론)에서는 좁은의미의 중생은 중생의 시작포인트점으로... 회심사건은 중생의 완료포인트점으로 이해를 합니다. 즉 효과적으로 부르셨다면, 그에 대한 반응으로 회심이 일어난다는 것이며, 이러한 효과적 부르심으로 인해 회심사건의 반응이 일어나기전에 효과적인 부르심으로 인한 여러 반응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죄를 각성하고 설교를 들을 때 회개하려하고 믿는.. 그러한 반응들말입니다. 이에 대해 순중론적 입장에서 의문들을 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순중론의 의문 제기 (1): 중생은 하나님의 단독사역인데? 어떻게 그 중간에 사람의 요소가 들어갈 수 있느냐? 그것은 알미니안적 요소 아니냐?라고 반론을 펼친 것입니다.
순중론의 의문 제기 (2): 또한 좁은의미의 중생이후 회심사건까지 시간적 과정이 있다면 대체 성령의 내주는 언제이며, 성령의 내주 이전 좁은 중생을 한 불가항력적인 은혜 가운데 있는 자는 어떤 상태냐? 그리고 만약 좁은 중생을 했는데, 중간에 취소되면 어찌되냐? 라는 질문을 합니다.
순중론의 의문들에 대한 연중론의 답변들: 연중론에서는 이러한 순중론의 반론에 대해서 좁은의미의 중생 이후 회심까지 나타난 반응들은 사람에게서 기원된 것이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은혜에 대한 반응으로써, 즉 효과적인 부르심의 은혜가 있기에 그 은혜로 인해 인간이 자동적으로 나타난 반응이라서 인간에게서 기원된 반응이 아닌 하나님에 의해서 일어난 반응이라 알미니안적이 아니다. 라고 줄곧 공통되게 주장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을 순중론에서는 계속 비판하고 있습니다.
또한 순중론자들은 좁은 중생 이후 회심까지 가다가 중간에 죽으면 어찌 되느냐는 펠라기우스적 사고방식의 질문까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심에도 연중론자들은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은 자는 결코 회심에 이르기까지 결코 중간에 중단되거나 하지 않고 꼭 열매를 맺게 된다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인한 열매맺음을 줄기차게 언급했으나, 계속 펠라기우스적 의심만 할 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 참고자료14번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순중론자는 중생에 인간의 요소를 빼버리기 위해 바빙크가 이야기했듯이 중생에서 믿음과 회개를 분리시켰는데, 이러한 것은 바빙크의 평가에 의하면 중생을 인간의 의식과 의지와 전적으로 독립된 영적 능력의 주술적 주입과 같다고 말합니다. 참고자료3번 참고.
성령의 내주가 언제냐는 질문에 대해서 연중론은 좁은의미의 중생시에 그리스도와의 원리적 연합이 있게 되고, 회심시에 그리스도와의 실제적 연합이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또한 효과적부르심을 받은 자는 결코 회심이 일어나기 전에는 중도하차와 같은 일이 발생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항력적 은혜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연중론의 의문 제기 (1): 좁은 의미의 중생은 개혁주의학자들이 말하듯,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으로 들을 수 있는 귀가 생기는 것이며, 마음이 하나님께 회개하려는 원리들이 심겨지는 것이다. 그럼 귀가 생긴 후에 그 결과로서 설교말씀을 듣고 죄를 각성하는 것, 말씀 듣고 회개하려는 것, 믿으려는 것은 대체 어느 위치에 넣어야 하는가? 좁은 중생시 회심하면 회심이후 죄를 각성한다는 뜻인가? 아니면 좁은 중생 이전에 이미 죄를 참되게 각성하고 있다는 것인가? 부르심후 응답해야 의롭다 칭하는데, 부르심이 곧 응답이면 그게 과연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 할 수 있는가?
연중론의 의문 제기 (2): 좁은의미의 중생의 포인트지점에서 회심사건도 일어난다는 이 논리는 대체 어디서부터 기원된 것인가?
연중론의 의문들에 대한 순중론의 답변들: 죄를 각성하고 하는 것은 좁은 의미의 중생 이전 예비은혜로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중생과 회심사이에는 절대적으로 인간적 반응이 들어갈 수 없다.(수년 전에는 이러했는데, 최근들어서 이러한 입장이 수정이 된 듯 합니다.중생과 회심 사이에 간격이 있을 수 있다는 입장을 인정하는 듯 하더군요)
순중론의 견해에 대한 지지학자로 존머레이를 대표적 학자로 뽑고 있습니다.
그러나 순중론의 그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불분명합니다. 칼바르트에 의하면 자신 이전 개혁주의자들은 모두 연장적중생론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순중론의 기원이 혹시 칼바르트를 시점으로 생겨난 것인가를 추측도 해보고 있습니다.
p.s 순중론자들은 신학자들의 모든 책에서 언급되는 좁은 중생이 순간적으로 일어나고 회심도 순간적으로 일어난다는 표현들을 하고 있기에 자신들이 주장하는 바, 중생과 회심이 동시에 순간적으로 일어남을 국내 신학교수들도 자신들과 똑같은 견해라고 주장하는 실정입니다. 즉 순간적이란 말을 엉뚱한데 적용하고 있는 셈이지요.
****** 참고 자료들 ******
루이스 벌코프의 중생론 구조: https://www.evernote.com/shard/s126/sh/eba65118-e2d2-4c16-97a1-189811eaaebb/82f04d613a5d714e
안토니A.후크마의 중생론 구조: https://www.evernote.com/shard/s126/sh/f31fe759-1a1f-4375-b768-004da289e230/631b9ec8f183b475
헤르만 바빙크의 개혁교의학 중생론 구조: https://www.evernote.com/l/AH4iTVYXnk5Iz7B5r7aqMdqudrJ-sEljKHI
참고자료(1) 중생과 회심사이의 시간적 과정을 부정적으로 보는 칼바르트적 관점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4부2권, 최종호역, 기독교서회:2012, 697쪽 "후기 구정통주의적 교의학은 칭의(justificatio)와 성화(sanctificatio)를 소위 일련의 구원의 서정 혹은 순서(ordosalutus) 안에 배치된 단계로 이해하려고 했다.그들은 칭의와 성화 앞에 소명(vocatio)과 각성(illuminatio)을 앞세우고, 그리고 (이 순서를 자명한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중생(regeratio)과 회개(conversio)가 서로 구별된 채 그것들을 뒤따르는 것으로 이해했다. 더욱이 (루터교회에 있어서는) 신비적 합일(unio mystica)와 영화롭게 됨(glorificatio)은 최종적인 단계의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구원의 순서 안에서 오늘 여기의 사람들은 점점 더 성령 하나님이 마치 자신의 사역을 - 이것은 물론 그때, 그 장소, 즉 골고다에서 완성된 화해사건의 후속작용인데 - 일종의 시간적 순서를 통해 일으키시는 것처럼 이해하였다.
이것은 그러나 옛교의학이 그리스도론 안에서 그리스도의 낮추심과 높이우심 사이의 관계에 의존했던 것보다 더 지나치게 시간적인 순서에 의존하고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는 소위 구원론 안의 심리적인 요소가 그리스도론 안의 역사적 실용주의에 상응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심리적인 요소가 무엇인가? 이것에 우리는 처음부터 동의할 수 없다. 바로 옛 그리스도 정교회가 심리학으로 잘못 빠져드는 것과 그리스도인들의 영혼의 역사를 설명하려고 나서는 행위 안으로 잘못 빠져들어가는 것을 혐오했기 때문에, 시간적 서열로 이해되는 구원의 순서(ordo salutis)의 구성에 관하여 오랫동안 망설여 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분명히 밝혀 두어야만 한다."
참고자료(2): 중생은 인간의 의식을 포함
바빙크 개혁교의학 4권 중생의 두가지 측면 p60 그리스도의 생명의 교제에 들어가는 것, 즉 중생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닌다. 한편으로 중생은 하나님에 대한 관계의 변화를 초래하며, 이것은 칭의다. 다른 한편으로, 중생은 삶의 변화이며 회심이라고 불린다. 인간이 거듭나는 순간, 즉 회개하고 믿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이 하나님을 거룩하고, 의로운 분으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과거에 짓눌렸던 허물과 정죄의 의식에서 해방된다. 중생은 인간의 의식의 변화를 포함하고 그런 점에서 칭의라고 불린다.
참고자료(3): 중생과 회심 사이 인간의 행위가 들어가는 구원이 어떻게 전적으로 하나님의 단독사역이라 할 수 있는가?
바빙크 개혁교의학 4권 p64~65 만일 중생이 전적으로 믿음과 회개로부터 분리된다면, 중생은 인간의 의식과 의지와는 전적으로 독립된 단지 영적 능력의 주술적 주입으로만 드러날 것이다. 이런 연유로 많은 교의학자들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오늘날에도 중생을 믿음과 회개 뒤에 두고 중생을 믿음과 회개에 다소 의존시키고 있다. 이런 경우 당연히 직면하게 되는 문제는 ‘만일 믿음과 회개가 반드시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여야 한다면 어떻게 동시에 구원이 여전히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 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연인이 여전히 교회 갈 수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며, 성경을 연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문제의 해결책을 찾으려고 애쓸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을 은혜에 적용할 수 있는 능력 혹은 능동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가능성을 여전히 소유하고 있다. 인간은 부르심이나 세례 가운데 원한다면 믿을 수 있는 능력을 받았다. ….. 이 두 활동은 두 측면에서 본 하나의 사건, 동일한 사건… 하지만 중재를 위한 이 모든 제안들이 헛된 시도들이라고 주장할 필요는 없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과 분리되지 않을지라도 구분된다면, 사람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모든 상호작용의 끝에 마지막 결정은 누구에게 놓여 있는가? 결국 누가 문제를 결정짓는가? 만일 인간이라면 원칙적으로 펠라기우스가 옳은 것이며, 결정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 그러나 만일 최종적인 결정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은혜의 권세에 있다면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 편에 서고 수동적 인간에 선행하는 중생(내적은혜)을 수용한다.
참고자료(4): 좁은 중생과 회심사이의 시간적 과정(믿음과 회개의 과정 중에 회심사건으로 드러남에 대해)
바빙크 개혁교의학 4권 p103 이 생명은 모든 자연적인 생명과 근본적으로 구별되고, 또한 이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며, 처음부터 활동했고, 성령의 교제 가운데 지속되고 확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생명은 범죄할 수 없고 죽을 수 없고, 살아 활동하고 자라나며, "때가 되면" 믿음과 회개의 행위 가운데 자신을 드러낸다.
참고자료(5): 존머레이의 그리스도의 연합이 웨신고백에서 벗어난 것이라 비판하는 레이몬드
최신조직신학,907쪽, 영어원문, 715~6 pp.
I believe, however, that Murray is too restrictive in his view of what God's summons effects. He insists, but offers no scriptural support for his contention, that it only actually unites one to Christ, and that it is from this actual union with Christ that every other inwardly operative saving grace, including regeneration, thereafter flows. Murray conceives of regeneration not as the effecting force in God's effectual summons as the Confession of Faith plainly does, but as a divine work which comes after God's effectual call and before the human response, and which "provides the link between the call and the response on the part of the person called."
But is it so that it is effectual calling per se, apart from regeneration, that actually unites one to Christ?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효력을 나타내는 것에 대한 머레이의 견해가 너무 제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의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대지도 않으면서, 그것만이 실제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며, 또 중생을 포함하여 그 이후 따라 오는 다른 모든 내적으로 역사하는 구원을 얻게 하는 은혜가 바로 이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머레이는 중생에 대하여,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이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 안에 있는 유효한 힘이라고 분명히 하듯 하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의 유효한 부르심 후에 오고 또 사람의 반응 전에 오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또 그 사역이 "그 부르심과 부르심을 받는 사람 편에서의 반응 사이의 연결을 제공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참고자료(6): 효과적부르심에 대한 인간의 수동적인 죄인이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능동적이 됨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의 10장 "유효한 부르심"의 장을 보면, 이 부르심이 한편으로 수동적이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능동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게 됩니다. 그 2절은 이렇습니다:
II. This effectual call is of God's free and special grace alone, not from anything at all foreseen in man, who is altogether passive therein, until, being quickened and renewed by the Holy Spirit, he is thereby enabled to answer this call, and to embrace the grace offered and conveyed in it.
(이 효과적인 부르심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특별한 은혜일 뿐인데, 전적으로 수동적일 뿐인 사람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을 미리 아시게 되는 그 어떤 것으로 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수동적인 것이 성령에 의해서 살아나게 되고 새로워지게 되어서 그는 그것으로 이러한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enabled to) 된다. 그 부르심에 담겨져서 제안되어진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홀리죠이역).
참고자료(7)
벌코프의 조직신학 p733 There are two sides to this conversion, the one active and the other passive; the former being the act of God, by which He changes the conscious course of man's life, and the latter, the result of this action as seen in man's changing his course of life and turning to God. Consequently, a twofold definition must be given of conversion: (a) Active conversion is that act of God whereby He causes the regenerated sinner, in His conscious life, to turn to Him in repentance and faith. (b) Passive conversion is the resulting conscious act of the regenerated sinner whereby he, through the grace of God, turns to God in repentance and faith.(이 회심에는 능동적, 수동적 두 측면이 있다. 능동적 측면이란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식적 생의 과정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행위요, 수동적 측면이란 인간이 생의 과정을 수정하고 하나님께 나아감으로써 나타나는 이 행위의 결과이다. 결국 회심에 대해서는 2중적 정의가 내려져야 한다. (1) 능동적 회심은 하나님께서 의식영역에서, 중생한 죄인으로 하여금 회개 신앙으로 하나님에게 돌아가게 하는 하나님의 행위다. (2) 수동적 회심이란 그 결과로서,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회개와 신앙으로써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생 한 죄인의 행위다).
참고자료(8): 중생이란 용어의 쓰임새
안토니후크마의 구원론 1. 세 가지 의미에서의 중생
성경은 세가지 서로 다른 의미에서 중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 연관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1) 중생이란 새로운 영적생명의 시작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령에 의해 우리 안에 심기워지며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고 믿음에 이르도록 하는 의미에서의 중생이다.(요3:3, 5) (2) 심겨진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낼 때를 가리켜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약1:18; 벧전1:23) (3)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최종적인 완성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중생이라 하기도 한다.(마19:28)
본장에서 나는 위에서 언급된 의미들 중 첫 두가지의 의미들만을 다룰 것이다. 초기 개혁신학에 있어서는 중생이란 단어가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의미보다 휠씬 넓은 의미로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예를들어 칼빈은 중생을 우리가 전적으로 새롭게 되는 것-돌이킴과 성화를 포함하여-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1561년 벨직고백서도 중생을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삶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대부분의 17세기 신학자들 역시 중생을 돌이킴(conversion: 회심, 개종으로 구체적으로 번역함: 제8장 참조)과 동일시 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서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좁은 의미의 중생(위의 (1)의 의미)과 넓은 의미의 중생(위의 (2)에 해당)을 구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다시말해서 성령에 의해 새로운 생명이 심기워지는 것과 돌이킴을통하여 새 생명이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과의 구별이다.
나는 일차적으로 좁은 의미에서의 중생의 의미를 다루려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라볼 때 중생이란 성령의 사역이라 정의할 수 있으며 이 사역을 통하여 성령께서 사람들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시사 그들로 하여금 전에는 영적으로 죽었으나 이제는 영적으로 살아나게 하여 죄를 기꺼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며, 주님을 섬기도록 하게 하신다. 성경은 세가지 서로 다른 의미에서 중생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 연관을 갖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참고자료(9): 의식영역의 중생에 인간성을 발휘하는 부분도 포함된다.
김홍전 [그리스도 안의 유아] p172~175.
신학적으로 엄격히 구분할 때 중생에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심어 주신 부분이 있고, 다음에는 그 사람 속에서 그 생명이 충분히 인간성을 발휘하는 신생(新生)이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 임플랜테이션(implantation)이라는 것이 있고, 그 다음에 거기서 나오는 뉴 버스(new birth)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생명을 심어 주셔서 새로운 사람으로 나타나면 그의 기본적인 성향이 확실해지는데 그 방향은 지금까지 인간적으로 자기를 추구하고 이 세상으로 흘러가던 것이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자꾸 하나님을 향해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지배적인 성향, 거버닝 디스퍼지션(governing disposition)이라고 합니다. 포괄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을 향해서 전진해 나가는 성향을 가지고 일보를 디디는 그 장면까지를 신학적으로 중생이라는 제목으로 다룹니다.
참고자료(10): 좁은의미의 중생 후 회심전 예비단계에 대한 켄달의 오해
칼빈과 칼빈주의자들, 폴 헬름 저 / 서종대 역 , 생명의 말씀사.
제4장 그리스도인을 위한 회심(2)
은혜를 위한 준비 켄달의 견해에 있어서 회심시 의지의 역할에 대한 문제와 은혜를 위한 준비에 대한 문제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연결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의지의 행위라는 견해를 취한다면 그는 또한 의지가 자체적으로 회심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견해도 취하려고 할 것이다. 켄달은 청교도들이 자발적인 믿음의 견해를 취했으며 그가 말하는 “예비주의”(preparationism)로 빠졌다고 말한다. 아울러 그는 계속해서 칼빈은 주의주의자(主意主義者,voluntarist, 아래 설명참조)가 아니었으며,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예비주의”를 반박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의 주장을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예비주의”에 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켄달이 “예비”라는 용어를 쓸 때 그것은 “한 인간이 기꺼이 믿게 되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이 과정이란 주로 하나님의 율법의 기능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중생의 과정 속에 내포될 수는 있으나 믿음에 선행하는 것 혹은 중생과 믿음 양쪽에 선행하는 것이다.”(Kendall p. 5)
우리는 후에 회심에 있어서의 율법 설교의 역할에 관한 문제를 대하게 될 것이다. 그 이전에 칼빈의 교리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훈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비록 “예비”와 “예비주의”라는 용어가 청교도주의에 대한 일반 학자들의 논의 속에 폭 넓게 사용됨에도(예를 들면 Norman Petti의 The Heart Prepared(1966)가 있다) 그들은 청교도들이 구분해 놓았던 차이를 채택하지는 않았다. 이 단어들이 한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명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청교도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히 “예비주의자들”이었으나 또 다른 의미에 있어서는 분명 예비주의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요한 요지는, 청교도들이 칼빈으로부터 이탈했다는 증거의 극치를 이루는 것으로 켄달 자신이 간주하는 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통하여 설명될 수 있다. 자유의지에 대한 장(章)의 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인간은 죄의 상태로 타락함으로써 구원에 수반되는 영적 선을 행하고자 하는 모든 의지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따라서 자연인은 영적 선을 아주 싫어하고 죄로 죽어 있기 때문에 자력으로는 자신을 회개시키거나 회개에 이르도록 준비시킬 수 없다. [Westminster Confession Ⅸ:3. 켄달은 고백서가 예비주의를 가르치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하여 다소 분명치 못한 태도를 보인다. 한곳에서는(p. 198)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으나 그 뒤에서(p.204)는 실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또한 p.208eh 참고하라).]
전체 단락의 전후 관계를 고려해 볼 때 마지막 네 단어-회개에 이르도록 준비시킬수 없다(to prepare himself thereunto)-는 타락한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고백서의 견해를 강조하고 있다.(Westminster Confession X. 1.) 영적 죽음이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이 자신을 회개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간은 자신을 회개에 이르도록 준비시킬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자신이 살아나도록 준비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은 준비가 있다는 것은 생명이 있음을 의미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회개에 이르도록 준비시킬 수 없다는 말의 의미는 만일 어떤 사람이 영적인 생명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만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전체적인 청교도의 전승(이 전승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의해 옹호되고 있다)이 “예비”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의미하지 않은 두가지의 사실이 있다. 첫째는 고백서가 어떤 인간이 회심을 위해 준비될 수 없음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회심은 회개와 믿음의 의식적인 행위, 그리고 신뢰와 감정을 포함한다. 인간으로 하여금 준비하게 하시고 의식적인 회개와 믿음의 자리로 그를 인도하시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예비적이고 영적인 하나님의 행위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같은 예비적 행위는 잠재의식중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고백서에는 회심의 의식적인 경험에서 선행하는 시간과 그것을 준비하는 기간이 정상적으로 존재함을 암시하는 표현이 있다. 이 기간 중에 한 개인은 그리스도의 영의 확신시키는 능력의 대상이 된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복음에서 오는 은혜이다. . . 죄인은, 회개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위험할 뿐 아니라 더럽고 추악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그분의 의로운 법에 반대되는 것임을 눈으로 보고 깨달음으로 해서, 또한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게 되며 결국은 모든 죄에서 방향을 돌려 하나님께로 향하게 된다. . . .(Westminster Confession XⅤ. 1.)
이 설명에 따르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는 때에 죄가 악하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는 자에게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죄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선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하나님께로 회심하는데 있어서 따르는 요소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효과이다. 고백서가 가르치는 것은 한 인간이 스스로 회심을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백서가 부인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준비가 아니라 스스로의 준비인 것이다.
그러나 고백서는 스스로의 준비를 부인함에 있어서 한 인간이 성령의 직접적이고 중생시키는 영향력이 없이는 전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사실을 말하고 있다. 중생되지 못하고 영적으로 죽어있는 한 인간도 성령의 직접적인 도움이 없이 많은 행위를 할 수 있다. 이 행위들은 회심을 위해 정상적인 사건의 과정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다. 예를들어,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설교를 들으며 충고를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행위의 경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행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섭리에서 나오는 고무적인 성령의 영향력은 아니다. 고백서는 그 어느곳에서도 한 인간이 성령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고무되거나 능력을 받지 않으면 교회에 갈 수 없다는 내용을 암시하고 있지 않다. 이와같은 차이점, 특히 스스로 준비하는 것과 준비되는 것과의 차이점을 명심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예비주의”를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그 용어가 의미하는 바에 정확하게 의존하고 있음을 알게되는 위치에 서 있다. 기타의 모든 학문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신학에 있어서도 사용되는 단어의 의미는 중요하다. 만일, “예비주의”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예비하는 자연적인 능력을 의미한다면 고백서는 그와 같은 사실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사실을 강력히 부인한다.
칼빈의 경우는 어떠한가? 이에 대한 답변은 그의 견해 역시 근본적으로 고백서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고백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칼빈 역시 거부하는 “예비”의 의미가 있다.
우리는 날 때부터 모두 죄인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죄의 멍에 아래 놓여있다. 그러나 전인(全人)이 죄의 권능하에 놓여 있다면 죄의 주요 좌소인 의지는 가장 단단한 결박으로 묶여 있으리라는 것은 필연적인 결론이다. 만일 어떤 의지가 성령의 은혜에 선행한다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부은 하나님이시니”(빌2:13)라는 바울의 말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이 사용하고 있는 “예비”라는 말을 집어치우라! 왜냐하면 종종 다윗이 여러 구절들을 통해서 그랬듯이, 신자들조차도 자신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도록 간구하고 ᅟᅵᆻ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이 같은 기도의 욕망이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Inst. Ⅱ. ii. 27.)
그러나 칼빈은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하는 믿음의 의식적인 적용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준비하실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마음이 성령의 능력에 의해 강화되거나 고무됨이 없이 심성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조명된다면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 . . 따라서 양면에 있어서, 즉 인간의 심성이 하나님의 진리를 맛볼 수 있을 정도로 정화되면 마음이 그 진리속에 자리잡는 다는 점에 있어서 믿음은 하나님의 유일한 선물이다.(Inst. Ⅲ. ii. 33.)
위에 제시된 인용문은 주의주의(主意主義,각주참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칼빈과 청교도들 사이의 유추된 차이점이 과장에 근거하고 있으며 공감적인 차이점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어거스틴 추종자들과 더불어 칼빈과 청교도들은,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독립적이고 자발적인 능력을 소유하리라는 점을 강력하게 부인했다. 그렇지만, 양측은 모두 하나님께서 종종 그 자녀들이 거의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서 은혜로운 역사로 영혼의 회심을 위해 준비하고 계심은 인정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논의는 논쟁 중에 있는 요지에 정확하게 답변하지는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청교도들은 넓은 의미에서 “예비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심에 앞서서 예비적인 “율법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 같은 사상은, 비록 그것이 가능한 것으로 주장될 수 있다 하더라도 칼빈의 사상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킬빈과 청교도들 사이의 가정적인 마지막 차이점을 살펴보아야 하겠다.
참고자료(11):
조엘비키의 예비적은혜 1장:Preparation and Modern Scholarship(예비개념에 대한 현대신학계의 동향) The Puritans believed that the Holy Spirit labors for the conversion of sinners. Specifically, since salvation is by grace through faith, the Spirit labors to work faith in the heart of the sinner. Without this work of the Spirit, no one can acknowledge or confess that Jesus is Lord(I Cor.12:3). Sadly, in addition to the utter inability of the sinner to exercise saving faith, during his years in the natural state many obstacles have piled up, such as habits of sin and settled attitudes of self-righteousness, which have so hardened his conscience that the sinner cannot even acknowledge his need for Christ. The omnipotent Spirit could sweep aside such obstacles and bring the sinner immediately to faith, but that is not the Spirit's usual or ordinary way, for He created the mind and conscience of man and generally prefers to work through those faculties. So the Spirit begins by removing obstacles to the gospel call in the mind and conscience. The gospel requires only faith in Christ, but ordinarily it is necessary to remove such obstacles to prepare the way for faith. So the Spirit works to prepare the lost sinner's soul for grace. This is the essence of the Puritan doctrine of preparation.
(청교도들은 성령께서 죄인들의 회심을 위해서 애쓰심을 믿었습니다.특별히 구원 믿음을 통해서 은혜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죄인의 마음 속에 믿음이 일어나도록 애쓰십니다.이러한 성령의 사역이 없으면,어느 누구도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슬프게도,죄인인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는데다가,자연인의 상태로 있는 동안 쌓여져 온 방해물들 곧 죄의 습관과 자기의를 이루고자 하는 형성된 태도들로 인하여 그의 양심이 아주 굳어져 버려서 죄인은 그리스도가 얼마나 필요로 하는 분인지조차도 인식할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전능하신 성령께서 이러한 방해물들을 옆으로 밀쳐놓으실 수 있고 즉각 죄인들을 믿음으로 이르게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성령의 보통의 일상적인 방식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창조하셨고 일반적으로 이러한 기능들을 통해서 역사하시기를 선호하시기때문입니다. 그래서,성령께서는 마음과 양심 속에서 복음의 요청에 대해 이러한 방해물들을 제거하심으로 시작하십니다. 복음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만을 요구하지만, 통상적으로 이러한 방해물들을 제거하여 믿음을 갖게 되는 길을 예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죄인들의 영혼이 은혜에 이를 수 있도록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청교도들의 예비교리의 핵심입니다. )
위의 본문 글 아래로 계속 되어지는 글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청교도들의 예비교리는 죄의 인식과 하나님의 자비를 적극적으로 구하는 것(active seeking of God's mercy)을 대개 그리스도에게 의식적으로 의뢰하고 신뢰하는 것 이전에 일어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청교도들의 예비교리가 20세기 중엽부터 학자들에 의해서 비판을 받기 시작하면서 율법주의적이고 또한 알미니안적이며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게 됨을 부인하는 것인 양오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오해를 일으킨 사람들이 Perry Miller, Norman Pettit, 그리고 R.T Kendall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비판이 과연 근거가 있는가를 잠시 검토해 보겠습니다.
참고자료(12): 회심 전 죄각성과 그 기간에 대해서
조나단에드워즈의 놀라운 부흥과 회심이야기 중...
사람들은 구원에 가까워질수록 마음의 기복과 변화를 무수히 경험하기는 했지만 대개 점점 더 자신들의 비참한 상태를 심각하게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기가 완전히 무감각해졌다고 생각하고 성령이 자기를 떠나셔서 자신은 이제 무서운 심판에 넘겨졌다고 두려워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그 두려움에 대해 깊이 고민하면서 또다시 자기 죄를 자각하기 위해 진지하게 노력합니다.
죄에 대한 각성은 은혜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다. 성령이 율법으로 사람들을 각성시키시는 목적은 사람들에게 스스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과 은혜 및 중보자의 보편적 필요성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게 하시려는 것임이 매우 분명해 보였습니다. 성령은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 악하고 죄가 많다는 것을 더욱더 느끼도록 인도하심으로써 이 일을 이루셨습니다. 사람들은 죄로 오염되어 어떤 방법으로도 자기 의로는 스스로 구원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며 하나님이 자기와 자기의 모든 행동을 거부하시고 영원히 자기를 버리셔도 지극히 정당하고 의로우시다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확신도 그 방식과 특징에 있어서는 천차만별입니다.
죄에 대한 각성이 깊을수록 자신의 무능을 더 절감하게 되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부패하고 악하다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신할수록 자기 자신이 더 나아 보이기는커녕 점점 더 나쁘고 강퍅하고 눈멀고 구제불능으로 악해 보입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쉽게 낙심하며 구원에 가장 가까운 상태에 있어도 구원이 그리 멀지 않았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습니다. 성령이 그들의 죄성을 깨우쳐주시는 가운데 그들은 종종 자기가 다른 모든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마음은 자기가 누구보다도 악하며 자기처럼 악하면서도 자비를 얻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쉽게 낙심합니다.
죄에 대한 각성이 외적 행동에서 내적 마음의 부패로 옮겨 가다. 각성이 처음 일어나면 사람들의 양심은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는 자기의 악한 길이나 다른 죄악 된 행동에 대해 가장 많이 고민하지만 이후에는 마음의 죄에 대한 의식, 본성의 끔찍한 부패, 하나님에 대한 적의, 마음의 교만, 불신앙, 그리스도에 대한 부인, 의지의 완고함과 고집 등으로 인해 더 많은 괴로움을 느낍니다. 대개 사람들이 각성하고 구원을 추구하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그들 자신의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셔서 자신의 무가치함과 전적인 부패함을 깨닫게 하십니다.
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는 헛된 노력은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런 미궁 속을 남들보다 열 배는 더 헤매고 나서야 경험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자신의 경험만이 아니라 그 경험과 더불어 성령의 깨닫게 하시는 능력임이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길게 거듭되는 헛된 노력을 통해 깨달을 때까지 굳이 기다리실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최근에 풍성하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과정을 짧게 단축시키신 수많은 예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양심을 깨우고 각성시키셔서 자신의 엄청난 사악함을 깨닫게 하셨고, 그들이 모든 헛된 자기 신뢰를 곧 버리고 거룩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먼지 같은 미물로 낮출 만큼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크게 느끼게 하셨습니다.
죄에 대한 각성으로 고통을 겪는 시기는 다양하다.
각자가 죄에 대한 자각으로 괴로움을 겪는 기간만큼 천차만별인 것도 없습니다. 어떤 이는 며칠, 어떤 이는 몇 달 혹은 몇 년이 걸립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영이 임하기 전에는 이 마을에 구원 문제를 놓고 몇 년, 혹은 십 년 동안 고민한 사람이 많았습니다. 사람들은 아마도 완전히 각성하지는 않았겠지만 매우 불안하여 걱정 근심이 가득한 삶을 살 정도로 구원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자신의 구원을 위해 상당한 수고도 계속해서 감수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안전함을 입증할 만한 어떤 확실한 증거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 사람 가운데 몇몇은 이 특별한 때에 빛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마지막까지 남았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무수히 많은 사람이 그 입으로 구원의 노래를 부르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전에 자기가 영혼에 대한 걱정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동안, 경솔하고 안일하며 헛된 일을 좇는 것 같았던 사람들이 말입니다. 정말 어떤 이는 방탕하게 살면서 회심하기 얼마 전까지 그런 생활을 계속했으면서도 하나님이 베푸신 무한한 축복을 거룩하게 기뻐할 만큼 성장했습니다.
죄에 대한 고통 후에 하나님의 정죄의 정당성을 깨닫게 되다. 각성이 구원의 문제와 직결되어 보이는 이들에게 일반적으로 율법적인 번민 이후에 나타나는 첫 번째 현상은 자신을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자각입니다. 이런 자각은 자신의 극심한 죄성과 자기의 모든 행실의 사악함을 깨닫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각자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했습니다.
율법적인 고통 이후 발견한 평안은 은혜를 체험할 때까지 잠시 계속되기도 하다. 사람들이 율법적인 고뇌 후에 경험하는 영혼의 고요함은 복음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가 그 영혼에 특별하고 기쁘게 나타나기까지 얼마간 지속됩니다. 그러나 대개 자비로운 하나님, 부족함 없으신 구주, 위대하고 기쁨이 충만한 복음의 내용 등에 대한 만족스럽고 감미로운 인식이 즉시 또는 단시간 내에 뒤따릅니다. 또 어떤 이들의 경우에는 지옥에 가도 마땅한 자신의 처지를 처음 깨닫고, 자기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음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에 부족함이 없음을 발견하는 과정이 매우 짧아 마치 이 모든 과정이 한꺼번에 일어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참고자료(13): 좁은 의미의 중생과 넓은의미의 중생 사이 그리고 넓은 중생과 회심의 관계
벌코프의 조직신학 영본 p471 The Relative order of calling and regeneration. (부르심과 중생의 상대적인 순서)
(1) Logically, the external call in the preaching of the Word(except in the case of children) generally precedes or coincides with the operation of the Holy Spirit, by which the new life is produced in the soul of man.
(1) 논리적으로 볼 때 말씀의 설교에서의 외적 부르심(유아의 경우는 제외)은 일반적으로 새 생명이 인간의 영혼 속에 생성되는 성령의 사역에 선행하거나 이와 동시에 일어난다.
(2) Then by a creative word God generates the new life, changing the inner disposition of the soul, illuminating the mind, rousing the feelings, and renewing the will. In this act of God the ear is implanted that enables man to hear the call of God to the salvation of his soul. This is regeneration in the most restricted sense of the word. In it man is entirely passive.
(2) 이때 창조적 말씀으로 하나님은 새 생명을 생성시키시고, 영혼의 내적 성향을 변화시키시며, 마음을 조명하고, 감정을 고양시키시며, 의지를 새롭게 한다. 하나님 이러한 행위 안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영혼을 구원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심어지게 된다. 이것이 엄격한 의미에서의 중생이다. 여기서 인간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3) Having received the spiritual ear, the call of God in the gospel is now heard by the sinner, and is brought home effectively to the heart. The desire to resist has been changed to a desire to obey, and the sinner yields to the persuasive influence of the Word through the operation of the Holy Spirit. This is effectual calling through the instrumentality of the word of preaching, effectively applied by the Spirit of God.
(3) 영적인 귀를 가진 후 죄인은 이제 복음안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게 되며, 효과적으로 이를 마음에 받아들이게 된다. 저항하고 싶은 열망이 순종하고 싶은 열망으로 변화되고, 죄인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의 설득력에 감화된다. 이것이 설교 말씀의 도구를 통해 하나님의 영에 의해 효과적으로 적용되는 효과적 부르심이다.
(4) This effectual calling, finally, secures, through the truth as a means, the first ly exercises of the new disposition that is born in the soul. The new life begins to manifest itself; the implanted life issues in the new birth. This is the completion of the work of regeneration in the broader sense of the word, and the point at which it turns into conversion.
(4) 마지막으로, 이러한 효과적 부르심은, 진리를 통해 영혼 안에 탄생된 새로운 성향이 최초로 거룩하게 발현되도록 한다. 새 생명이 발현되기 시작하고, 심겨진(주입된) 생명은 새로운 출생을 일으킨다. 이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의 중생의 사역의 완성이요, 회심으로 전환되는 시점이다.
참고자료(14): 인간의 의지가 신앙과 회심을 향하도록 그를 중생시키시고, 또한 중간에 끊어지지 않도록 불가항력적 은혜로 이끄심(성령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 자체가 펠라기우스적 사고방식이다.
도르트 신조 셋째,넷째 교리에 대한 잘못된 주장을 배격함제 6 절 주장 : 인간이 참 회심을 하는 데에는 그 어떤 자질이나 능력과 은사가 하나님에 의하여 인간의 의지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처음으로 회개하여 신자라고 불리게 된 이 믿음이란 하나님에 의하여 받아들인 자질이나 은사가 아니라 다만 인간의 행위일 뿐이다. 이 믿음에 따라 얻게 되는 능력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 믿음이란 어떤 선물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반론 : 이 주장은 성경의 말씀과 모순되는데,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순종의 새로운 자질과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마음을 인간의 마음속에 넣어주셨다고 선언한다.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렘 31:33). “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사 44:3).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롬 5:5). 또한 위의 주장은 “나를 이끌어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돌아오겠나이다”(렘 31:18)라고 외친 선지자의 기도와 같이, 교회의 지금까지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이다.
제 7 절 주장 : 우리가 하나님께로 회심할 수 있었던 바의 이 은혜란 일종의 부드러운 충고요, (다른 말로 하면) 회심하는 사람 속에서 움직이는 가장 고상한 태도요, (충고에 포함되는데) 인간의 본성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다. 따라서 왜 이러한 충고의 은혜가 자연 상태의 인간을 영적인 상태로 만들기에 충분할 수 없었는가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충고의 태도를 통한다는 것 이외에는 인간의 의지에 동의를 구하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시다. 사단의 일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역의 능력은, 사단이 일시적인 것을 보여주는 반면에 영원한 것을 약속해 주셨다는 데 있다.
반론 : 위의 내용은 모두가 펠라기우스파의 주장이요 성경과 모순되는 것인데, 마치 에스겔서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의 회심 속에서 나타난 성령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 있는 모습과 거리가 먼 것이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제 8 절 주장 :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의지가 신앙과 회심 쪽으로 향하도록 그를 중생하게 하는 데 있어서 그의 무한한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은혜의 사역을 다 이루신 후에라도 인간은 하나님과 성령에 저항할 수 있는데, 이때에도 하나님은 인간이 중생하기를 바라며 그를 중생시키고자 하신다. 따라서 인간이 강하게 저항함으로써 완전히 중생치 않게 될 수도 있는데, 인간의 중생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은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
반론 : 바로 이와 같은 주장은 인간의 회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의 충족성을 부인하는 것이요, 전능한 하나님의 사역을 인간의 의지에 종속시키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이 말한 사도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엡 1:19). “……우리 하나님이……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벧후 1:3).
제 9 절 주장 : 은혜와 자유 의지는 회심하는 데 필요한 부분적인 요소가 되는데, 회심의 과정을 볼 때 은혜는 자유 의지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자유 의지가 작용하여 결정을 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는 이 자유 의지를 돕기에 충분하도록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반론 : 이미 오래 전에, 교회는 다음과 같은 사도의 가르침을 좇아서 이런 펠라기우스의 교리를 정죄했다.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니라”(롬 9:16).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고전 4:7).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참고자료(15)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거듭남의 첫 부분이다.
월리엄 아메스의 예비에 대한 신학논증 중.. 논제 5 ~ 12 참고 http://blog.daum.net/londonhorace/15859661
생략...
논제12. 반박하기 어려움이 있는 것처럼 여겨져서 반대를 하게 하는 견해가 이것입니다: ‘거듭나지 않은 사람 안에서 율법을 듣게 되면서 일어나게 되는 공포심은 너무 심하여서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않고 오히려 뒤돌아서게 하는 한 원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1. 거의 모든 해석자들이 로마서8장15절의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란 구절을 해석하는 것처럼, 어떤 강력한 두려움은 성령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바로 앞의 논제에서 보여졌던 것처럼) 이제 인정되었습니다. 더욱이나 사도행전2장과 16장에서 나타나는 두려움은 거듭남의 첫 부분이면서 또한 성령의 역사의 효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면, 특별히 거듭남의 부분이 아닌 것이라면, 그런 것은, 그 자체로서 전혀 사람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2. 어떤 면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고난 자체가 악에 이르게 하는 경향도 있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오히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처럼, 오히려 상황에 의해서 하나님께로 사람들을 인도하게 합니다.
3. 강력한 두려움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두 가지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두려움의 감정 그 자체를 말합니다. 그 감정 자체로 인해서 어떤 사람들은 죄의 복수자로서의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대상으로 알고 나아오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정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덧붙이는, 노예적 기형을 말합니다. 전자는, 그 자체로서 선한 것입니다. 거듭난 자 속에 그런 정서가 머무릅니다. 그러므로, 강력한 두려움에는, 하나의 재료적인 기질(material substrate)가 있어서 그 재료적 성향(material disposition)이 아버지에게 느끼는 두려움과 회심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덧붙이게 되는 기형적 두려움은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경향이 있지만, 순전한 두려움으로서의 강력한 두려움은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칼빈의 사도행전20장과 21장에 대한 언급과 기독교강요3권3장에서 말하고 있는 바, ‘율법적 통한은 회개의 시작이며, 믿음에 이르게 되는 하나의 예비이다. 나는 그것을 우리의 불쾌감의 시작이라고 부르겠는데, 그 불쾌감은 하나님의 분노의 두려움에 의하여 주어지는 것으로서 우리가 강력하게 영향을 입게 되면 그것이 우리를 몰아서 그 해결책을 찾고자 힘쓰게 한다’는 말이 정당합니다. 또한 까미에르(Daniel Chamier, 1564–1621, 프랑스위그노파목사)의 말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복음을 섬기는 경향이 있다. 행위상으로 보면 가장 확실하게 저주에 이른 것이 분명한 것이 오히려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은혜를 추구하게 한다’(Panstratiae Catholicae, 3권15부4장). 그는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우리는 강력한 두려움이 선하다는 것을 당연히 인정한다. 곧, 그것은 이성과 유용성에 일치되는 선한 것으로까지 드러날 정도이다’(22부9장). 이것은 어거스틴이 시편127편을 주석하면서 ‘그 두려움은 선한 것이며 또한 유용한 것이다’고 한 것과 꼭 같습니다.
참고자료(16) 회심 이전 회심을 위한 행위에 대해서...
하이델베르크요리문답 강해(우르시누스강해서): p761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가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히 부정하며 가증스럽고, 우리의 모든 행위는 더러운 배설물일 뿐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의는 회심 이전에는 우리에게 전가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회심 이전에는 우리도, 우리의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불가능 한 것이다. 믿음이 선행의 원인이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믿음의 열매인 선행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믿음과 회심이 있기 전에는 선행이 있을 수가 없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결과가 원인보다 앞서는 격이 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주제와 관련하여, 회심을 예비하는 행위가 있지 않는가? 하고 묻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예비적 행위가 회개의 계기나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회개를 이루시고자 사용하시는 어떤 일을 뜻한다면, 즉 겉으로 드러나는 품행과 생활의 절제 등 하나님의 율법에 맞는 행위들이나,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묵상하는 일, 그리고 십자가나 기타 힘겨운 상황 같은 것을 뜻한다면, 회심을 예비하는 행위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비적인 행위가 회심 이전에 율법에 따라 행하여지는 행위들을 뜻한다면... 즉 사람의 선한 노력들로써 하나님을 매혹시켜.. 그런 행위들을 뜻한다면.. 우리는 그런 행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참고자료(17) 청교도 신앙을 계승한 18세기 스코틀랜드 존 콜쿤(John Colquhoun, 1748-1827)은 제시한 회개의 여섯 가지 실천요소
그러면 회개는 무엇을 어떻게 행하여야 할까? 청교도 신앙을 계승한 18세기 스코틀랜드 존 콜쿤(John Colquhoun, 1748-1827)은 제시한 회개의 여섯 가지 실천요소를 따라 설명을 해보자(지평서원, 「참된 회개」참조).
(1) 참된 회개의 실행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의롭다는 교만이 무너지는 데에서 시작된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가를 고백하고, 다른 사람들을 오히려 자신보다 더 낫게 여기는 겸손함을 가진다. 자신이 얼마나 비열하고 가증하며 혐오스러울 정도로 죄를 사랑하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할 뿐만 아니라, 생각과 말과 행동의 모든 면에서 의를 행하지 못하는 무능력자임을 절감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 회개의 첫걸음이다. (2) 이어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슬퍼하며 애통한다. 이 슬픔의 대상은 단지 자신이 죄로 인해 겪게 될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훈을 거슬림으로써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거슬려 대적하며 커다란 죄를 하나님께 범하였는지를 아프게 탄식하는 것이다. 자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도록 못박은 자이며, 자신의 심령 안에서 거룩한 양심을 일깨우던 성령 하나님을 근심케 한 자라는 사실 앞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울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통함으로 탄식한다. (3) 은혜로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대적해 왔던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와 쓰라린 애통함은 모든 죄를 미워하고 혐오한다. 죄를 하나님의 거룩과 사랑을 거슬리는 극악한 것으로 여기며 이를 혐오하고 더럽고 가증한 것으로 여긴다. 죄를 범하는 자신의 양심을 달래기 보다 오히려 자신의 부패를 보고 분노하며 정죄한다. 곧 자신의 가슴을 치는 것이다. (4) 하나님을 대적하므로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고 혐오하는 죄가 자신 안에 뿌리깊게 있음을 탄식하므로 하나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부끄러움에 어쩔 줄을 몰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상이, 마치 알몸이 백주에 드러나듯이, 낱낱이 드러남에 낯이 뜨뜻하고 수치심을 피하지 못한다. (5) 이제 하나님 앞에서 백일 하에 드러나는 자신의 죄과와 악함을 감히 감추려 시도하지 않으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이야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 죄인임을 고백한다. 죄의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것은 하나님에게, 사람들에게 행한 것은 사람에게, 공적으로 지은 것은 공적으로, 사적으로 지은 것은 사적으로 행한다. 그리고 유의할 것은 죄의 고백은 어떤 경우든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점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이로 인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는 것이 죄의 시인이다. (6) 끝으로 죄로부터 돌이켜 하나님을 향해 나가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회개를 회개되게 하는 참된 본질이다. 왜 회개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인가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회개를 고백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율법적 회개에 지나지 않는다. 정녕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알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깨달은 자라면 그의 회개가 하나님을 향하여 돌이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교훈을 살펴서 그것에 감사의 심령으로 순종한다. 이 모든 일을 기쁨으로 신속하게 그리고 삶 전체 영역에 걸쳐서 행한다.
참고자료(18) 루이스 벌코프 구원론: 좁은 의미의 중생 후 회심에 이르기 전 죄의식 단계에서 잠시 동안 머물러 있을수 있다.
3. 신앙과의 관계
회심은 회개와 신앙으로 구성되며, 따라서 신앙은 실제적으로 회심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구별해야만 한다. 참된 신앙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각자는 판이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즉 (1) 하나님의 구속 계시의 진리에 대한 인식인데 이는 편견이 없고 역사적인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그것이 비난을 받지 않고 무시될 수 없는 실재로 인식되는 방법으로 인식함이니 그 이유는 그것이 생생한 방법으로 생활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며 (2) 예수그리스도안에서 제공된 구원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그것은 적절한 의미에서 구원의 신앙이다. 그런데 전자의 의미에서의 신앙이 회심에 즉시 임재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성령은 죄인으로 하여금 그 진리를 자기의 생활에 연관시켜 살펴보게 함으로써 그는 각성하여 자기의 죄를 의식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 계단에 잠시동안 머물러 있을 수 있으며 따라서 구원적 신앙이 어느 정도로 회심에 즉시 포함되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논리적으로 회개와 죄에 대한 지식이 신뢰적인 사랑으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신앙보다 선행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참고자료(19) 자주 많은 시간을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지낸 다음에야 기적적으로 믿음의 확신에 이르는 경우: 헤르만 바빙크 개혁교의학 p180 게다가 심지어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들도 나중에 회심에 이르는 방식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부드럽게 인도되어 그 어떤 강력한 변화를 겪지 않고, 조용히 지속적으로 어린아이에서 청소년으로, 그리고 청소년에서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인으로 성장한다. 이와는 반대로 다른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한동안 죄 가운데 살거나 자신들의 어릴 적 기독교적인 양육으로부터 내적으로 소외되었다가, 때때로 갑자기 특별한 경우에 어떤 인상적인 말씀이나 사건을 통해 그리고 종종 격렬한 감정의 동요 가운데 회심에 이른다. 이 사람들은 죄의 끔찍함과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선명하게 인식하고 자주 많은 시간을 두려움과 공포 가운데 지내고, 그 다음에서야 비로소 기적적으로 믿음의 확신에 이른다. 이 모든 것은 회심의 시각과 방식에 관련되지만, 회심의 특징과 성격에 있어서 온갖 종류의 차이도 보여준다.
참고자료(20)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에는 회심의 의식적인 경험에서 선행하는 시간과 그것을 준비하는 기간이 정상적으로 존재함을 암시하는 표현이 있다: 폴헬름 제4장 그리스도인을 위한 회심(2)
은혜를 위한 준비
켄달의 견해에 있어서 회심시 의지의 역할에 대한 문제와 은혜를 위한 준비에 대한 문제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연결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의지의 행위라는 견해를 취한다면 그는 또한 의지가 자체적으로 회심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견해도 취하려고 할 것이다. 켄달은 청교도들이 자발적인 믿음의 견해를 취했으며 그가 말하는 “예비주의”(preparationism)로 빠졌다고 말한다. 아울러 그는 계속해서 칼빈은 주의주의자(主意主義者,voluntarist, 아래 설명참조)가 아니었으며,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예비주의”를 반박했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의 주장을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예비주의”에 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켄달이 “예비”라는 용어를 쓸 때 그것은
“한 인간이 기꺼이 믿게 되는 과정을 의미하는데 이 과정이란 주로 하나님의 율법의 기능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중생의 과정 속에 내포될 수는 있으나 믿음에 선행하는 것 혹은 중생과 믿음 양쪽에 선행하는 것이다.”(Kendall p. 5)
우리는 후에 회심에 있어서의 율법 설교의 역할에 관한 문제를 대하게 될 것이다. 그 이전에 칼빈의 교리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교훈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비록 “예비”와 “예비주의”라는 용어가 청교도주의에 대한 일반 학자들의 논의 속에 폭 넓게 사용됨에도(예를 들면 Norman Petti의 The Heart Prepared(1966)가 있다) 그들은 청교도들이 구분해 놓았던 차이를 채택하지는 않았다. 이 단어들이 한가지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명심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청교도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분명히 “예비주의자들”이었으나 또 다른 의미에 있어서는 분명 예비주의자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중요한 요지는, 청교도들이 칼빈으로부터 이탈했다는 증거의 극치를 이루는 것으로 켄달 자신이 간주하는 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통하여 설명될 수 있다. 자유의지에 대한 장(章)의 한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인간은 죄의 상태로 타락함으로써 구원에 수반되는 영적 선을 행하고자 하는 모든 의지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따라서 자연인은 영적 선을 아주 싫어하고 죄로 죽어 있기 때문에 자력으로는 자신을 회개시키거나 회개에 이르도록 준비시킬 수 없다. [Westminster Confession Ⅸ:3. 켄달은 고백서가 예비주의를 가르치고 있는지의 여부에 대하여 다소 분명치 못한 태도를 보인다. 한곳에서는(p. 198) 가르치지 않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으나 그 뒤에서(p.204)는 실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말한다(또한 p.208eh 참고하라).]
전체 단락의 전후 관계를 고려해 볼 때 마지막 네 단어-회개에 이르도록 준비시킬수 없다(to prepare himself thereunto)-는 타락한 인간은 영적으로 죽어 있다는 고백서의 견해를 강조하고 있다.(Westminster Confession X. 1.)
영적 죽음이란 영적으로 죽어 있는 사람이 자신을 회개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간은 자신을 회개에 이르도록 준비시킬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자신이 살아나도록 준비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같은 준비가 있다는 것은 생명이 있음을 의미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회개에 이르도록 준비시킬 수 없다는 말의 의미는 만일 어떤 사람이 영적인 생명을 받게 된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만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전체적인 청교도의 전승(이 전승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의해 옹호되고 있다)이 “예비”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의미하지 않은 두가지의 사실이 있다. 첫째는 고백서가 어떤 인간이 회심을 위해 준비될 수 없음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회심은 회개와 믿음의 의식적인 행위, 그리고 신뢰와 감정을 포함한다. 인간으로 하여금 준비하게 하시고 의식적인 회개와 믿음의 자리로 그를 인도하시는, 인간의 영혼에 대한 예비적이고 영적인 하나님의 행위가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같은 예비적 행위는 잠재의식중에서 일어날 수도 있다. 고백서에는 회심의 의식적인 경험에서 선행하는 시간과 그것을 준비하는 기간이 정상적으로 존재함을 암시하는 표현이 있다. 이 기간 중에 한 개인은 그리스도의 영의 확신시키는 능력의 대상이 된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복음에서 오는 은혜이다. . . 죄인은, 회개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가 위험할 뿐 아니라 더럽고 추악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그분의 의로운 법에 반대되는 것임을 눈으로 보고 깨달음으로 해서, 또한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을 베푸신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자신의 죄를 슬퍼하고 미워하게 되며 결국은 모든 죄에서 방향을 돌려 하나님께로 향하게 된다. . . .(Westminster Confession XⅤ. 1.)
이 설명에 따르면,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향하는 때에 죄가 악하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하는 자에게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죄 때문에 슬퍼하는 것이 일시적으로 선행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은 하나님께로 회심하는데 있어서 따르는 요소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효과이다. 고백서가 가르치는 것은 한 인간이 스스로 회심을 준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백서가 부인하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준비가 아니라 스스로의 준비인 것이다.
그러나 고백서는 스스로의 준비를 부인함에 있어서 한 인간이 성령의 직접적이고 중생시키는 영향력이 없이는 전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말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사실을 말하고 있다. 중생되지 못하고 영적으로 죽어있는 한 인간도 성령의 직접적인 도움이 없이 많은 행위를 할 수 있다. 이 행위들은 회심을 위해 정상적인 사건의 과정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다. 예를들어,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있고 설교를 들으며 충고를 받아들일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행위의 경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행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섭리에서 나오는 고무적인 성령의 영향력은 아니다. 고백서는 그 어느곳에서도 한 인간이 성령에 의하여 직접적으로 고무되거나 능력을 받지 않으면 교회에 갈 수 없다는 내용을 암시하고 있지 않다.
이와같은 차이점, 특히 스스로 준비하는 것과 준비되는 것과의 차이점을 명심 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예비주의”를 가르치고 있는가? 우리는 지금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그 용어가 의미하는 바에 정확하게 의존하고 있음을 알게되는 위치에 서 있다. 기타의 모든 학문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신학에 있어서도 사용되는 단어의 의미는 중요하다. 만일, “예비주의”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예비하는 자연적인 능력을 의미한다면 고백서는 그와 같은 사실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사실을 강력히 부인한다.
폴 헬름 저 / 서종대 역 , 생명의 말씀사.
참고자료(21) 합신 송교수 조직신학 강의안
합신 송교수 강의안 요약맵(1)합신 송교수 강의안 요약맵(2)합신 송교수 강의안 요약맵(3)합신 송교수 강의안(4)합신 송교수 강의안(5)합신 송교수 강의안 (6)
[출처] 연중론? 순중론? 대체 그것들이 무엇이길래....(윤영상목사)|작성자 크로스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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