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강독
밥 먹었어?
소유민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매해 여름, 풀벌레가 찌르르 우는 무더운 날이면 그 시구가 먼저 떠오른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선생님의 얼굴도. 시를 낭독하는 선생님의 목소리는 얼음이 가득 담긴 허브차를 저을 때 나는 달그락 소리와 닮아 있었다. 허브 특유의 달콤쌉쌀한 향기도 느껴지는 듯했다. 얘들아. 그거 아니? 달이 떠서 전화했다는 말은 사랑한다는 뜻이야. 꼭 사랑한다는 말만이 사랑한다는 뜻은 아니야. 선생님의 목소리가 유리잔을 두드리듯 파르르 떨렸다.
다녀올게.
라는 말도 사랑한다는 뜻일 수 있다고 선생님은 덧붙였다. 다녀온다는 말이 정말 사랑한다는 뜻이라면, 어느 날 죽음이 갑작스레 닥쳐온다고 해도 조금은 안심 아닐까 생각했다.
너희한테도 사랑한다는 말을 대신할 말이 있니? 선생님은 애써 무언가 떨쳐내려는 사람처럼 시원하게 웃었다. 왜인지 그때 내가 떠올린 것은 푸릇한 채소로 가득 찬 냉장고 야채칸이었다. 까만 봉투에 담긴 샛노란 콩나물, 빨간 끈으로 돌돌 묶인 시금치와 풀죽은 나무껍질 같은 고사리. 냉장고를 열어 그것이 가슴 속에 품고 있는 짭짤한 젓갈과 벌거벗은 생닭을 보고 있으면, 윗배가 뜨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것들도 사랑한다는 말의 일종 아닐까.
냉장고 뱃속의 음식들이 건강해야 자식들도 건강하다는 것이 내 부모님의 철칙이어서, 나는 탄산음료 대신 맑게 끓인 보리차를 마시며 자랐다. 여름이 깊어지면 엄마는 고명으로 푸릇한 오이가 올린 하얀 콩국수를 만들었다. 눈이 오는 날에는 만두와 수제 햄을 넣은 부대찌개를 끓여 먹었고, 벚꽃이 필 무렵엔 수정과를 담갔다. 비 오는 날마다 거실에 울려 퍼지던 지글지글 소리. 부추전 반죽을 젓는 아빠의 손에 땀방울처럼 맺힌 굳은살. 기름 앞에서 땀을 닦던 엄마의 얼굴. 그런 것들이 내 살을 찌우고 뼈를 이뤘다.
그렇게 잘 먹고 자라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언젠가부터는 집밥보다 밖에서 먹는 것들을 더 좋아했다. 음식을 이루는 것들은 탄수화물, 단백질, 지방일 뿐이지. 사랑이 어떻게 음식을 구성하겠느냐고 조소하기도 했다. 콩나물국 위를 둥둥 떠다니는 대파 조각을 씹으면서, 이제 이런 건 지긋지긋하단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고, 어디론가 멀리 떠나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음식을 음식으로만 보게 된다는 뜻일까?
내 앞에 차려진 김치찌개를 김치찌개로만 보게 된다는 뜻일까. 하루를 꼬박 새워 김치를 담던 아빠와 재료를 썰고, 뜨거운 불 앞에서 찌개를 팔팔 끓이던 엄마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일까. 사실 그 정반대의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묵묵히 내 그릇에 제 몫의 고기를 덜어주는 엄마의 모습이 더 이상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 나는 고기 별로야, 라고 말하는 엄마의 얼굴에 오래된 넝쿨 줄기처럼 얽힌 무상과 인내를 읽는 것. 계란말이를 내 쪽으로 밀어주는 엄마의 손길을 더 이상 감사하게만 바라볼 수 없고, 얼마쯤은 슬퍼해야 하는 사람이 되는 것. 사랑한다는 ‘말’만이 사랑한다는 뜻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비로소 느끼게 되었을 때, 깨끗이 닦인 간장 종지를 보며 나는 울었다.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그 시구를 읽던 선생님의 목 떨림이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제주도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하늘로 뻗친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것만 같던 어느 겨울이었다. 엄마의 음식이 위 속에 꾸역꾸역 쌓일수록 내 마음 한편엔 지울 수 없는 부채감 같은 것이 켜켜이 쌓여갔다. 어른이 되어가는 나에게, 아빠가 퇴근길에 사 온 빵과 떡 같은 것들은 세상의 그 어떤 협박보다도 무섭게 느껴졌다. 나는, 언제고 나를 품어줄 듯 두 손 뻗던 냉장고와 묵묵히 우리 가족의 식사를 지켜보던 식탁을 뒤로한 채 비행기에 올랐다. 사채업자에 쫓겨 다른 나라로 밀항하는 이가 된 기분이었다.
한동안은 자유의 몸이 된 것 같았다. 비행운이 길게 늘어진 하늘은 도망자들을 품어주겠다는 듯 새파란 가슴을 내밀고 나를 내려다보았고, 대학가 특유의 북적이는 소리는 늘 두 팔 별러 나를 환영했다.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술집에 갔던 날, 그 골목 가로등의 아스라한 불빛은 내게 막연한 해방감을 주었다. 형광 네온사인과 알록달록한 전구들로 장식된 술집들이 일렬로 들어선 거리. 모든 것이 살아있고, 과격했고, 화려했다. 나는 제주도에 두고 온 것들은 전부 잊은 채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 섞여 들었다. 겨울이었지만,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 앉은 사람들의 체온 때문인지 술집 안은 한증막이 따로 없었다. 나는 감자 면이 들어간 닭칼국수와 새우 완자 튀김 따위를 집어 먹었다. 몇 번쯤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 왔지만, 받지 않았다. 뒤이어 문자 하나가 알람음과 함께 화면에 떠올랐다.
밥 먹었어?
그게 무슨 느낌인지, 지금도 완벽히 설명해낼 수가 없다.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것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증명되는 기분. 엄마, 나 잘 먹고 다녀. 그렇게 문자를 보내려다가 말고 차가운 생수를 한 모금 들이켰다. 목 마디마디가 쿡쿡 쑤셨다. 나의 몸을 이루는 것은 물이 아니라, 엄마가 불판 앞에서 흘린 땀과 눈물들, 혹은 양파를 썰다 칼에 베였던 자국과 핏방울들, 아빠의 세월과 주름들이었나. 내 몸의 70퍼센트를 이루고 있는 것들은 모두, 그들이 내게 평생을 걸쳐 건넸던 “사랑한다”는 말이었다.
대충 먹었어.
제주도 오면 소고기 구워줄게. 아빠가 너 준다고 부추김치 담갔어. 식혜도 담을까? 너 다음 달에 올래?
나는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모든 말이 사랑한다고만 읽혔다. 엄마는 매번, 나의 아침과 점심 저녁 시간에 맞춰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보내온 것이다. 멍한 얼굴로 튀김 조각을 깨작깨작 집어 먹고 있는데, 아빠에게도 전화가 걸려 왔다.
어, 여보세요?
뭐해. 밥은 먹었어?
정말로 울고 싶어졌다.
밥 먹었냐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앞으로 밥 먹었냐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내게 밥을 먹이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던 이들의 역사를 떠올릴 것이었다. 내 안을 채운 누군가의 시간, 피, 땀, 눈물의 자국들을 머금고 언젠가는 내가 먼저 물을 것이다.
밥 먹었어?
우리는 같은 맛을 먹고 자랐어
정우연
닮지 않은 오누이, 그것이 누나와 나였다.
커피와 숭늉처럼, 파스타와 수제비처럼, 스테이크와 백숙처럼, 도무지 한 식탁 위에서 마주 어울리지 못하는 운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누나는 명문대를 나온 수재였고 나는 대학은커녕, 공업 고등학교 졸업도 겨우 한 처지였다.
“네가 ‘걔’ 동생이구나?”
중학교를 올라가자마자 담임 선생님이 건넨 인사였다. 실은 그것이 최초는 아니었다. 갓 걸음마를 뗀 어린 시절부터 동네 슈퍼에서도, 문방구에 들려도, 우연히 먼 친척과 마주쳤을 때도, 나는 누나의 동생이었다. 모범생인 누나의 행실은 칭찬이라는 열매로 빛이 났고 그 빛은 나라는 풀포기를 보잘것없게, 더욱 그늘지게 만들었다.
“누나는 안 그런데, 너는 왜 그러니?”
원한 적 없는 기대가 실망으로, 그 실망이 비난으로 변질하는 성장기란 참으로 거북한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스물이 된 해에 곧장 집을 떠났다. 경북 점촌이라는, 좁디좁은 촌동네가 숨이 막혔는데 비단 면적 탓은 아니었으리라. 누나에 비해서 모자란, 좀 더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문제가 있다고 손가락질 받는 동생이 아니라, 나 자신의 삶을 꾸리고 싶었다. 아니다, 이 또한 이름 없는 전문대라도 입학하라고 사정하는 부모님에게 늘어놓은 변명에 불과하다. 그저 한시라도 빨리 누나보다 더 많은 돈을 벌어서, 내 돈으로 누나의 주먹코를 콱 눌러주고 싶었다. 그렇게 되면 마침내 주변 어른들도 인정해 주겠지, 네가 누나보다 낫다고.
10년 만에 고향에서 다시 마주한 누나는 코를 높게 성형했고 서울의 한 회사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짧게 커트한 머리칼 위로 하얀 리본을 꽂아 올리며, 누나가 물었다.
“밥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밥이 넘어갈 리가. 나는 괜찮다고 고개를 저으며 상복 위로 완장을 올렸다. 요즘 같은 세상에 결핵이라니. 아버지는 한때 탄광촌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였고 그 시절에 얻은 기침으로 한평생 가래를 쏟으며 살다가, 별안간 떠나셨다.
“먹어야 버틸 수 있어.”
누나는 삼일이 네 체력보다 길 것이라고, 울음도 없이 육개장에 밥을 한 공기 말아서 삼켰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누나의 말은 옳을 때가 잦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수시로 정신이 아득해졌다. 때로는 이곳에 서서 무얼 하고 있는 것인지 잊을 만큼이나. 홀로 남은 어머니는 실신하기를 반복하였고 그때마다 누나는 당황하는 낌새도 없이 자리를 지켰다. 나도 저렇게 강했다면, 내 인생이 좀 더 나아졌을까?
내가 집을 떠나 처음 한 일은 고깃집 서빙이었다. 그게 시급이 가장 셌다. 그 식당에서 만난 여자친구와 서른한 번의 계절 동안 연애했다. 둘이 함께 보증금을 모아서 배달앱에 음식점을 등록했다. 제대로 된 요식업이라고 하기에는 배달만 전문으로 하는, 공장에서 떼온 냉동식품을 데워서 되파는 작업에 불과했지만, 언젠간 큰 식당을 운영하리라는 꿈을 품었다.
남의 끼니를 팔면서, 정작 내 끼니는 대부분 라면이었다. 맛있고 간편하고 다양한데 저렴하기까지. 아버지는 이런 아들을 창피해하기보다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나는 이만하면 괜찮다고, 나의 이십 대를 잘 소화하고 있다고 받아들였는데, 여자친구는 아니었나 보다. 우리에게 서른두 번째 계절이 찾아왔을 때, 이별했다. 그녀는 라면보다 더 신물 나는 건, 10년 뒤에도 이러고 살 것 같은 예감이라며. 그동안 모은 돈을 모조리 가지고서 나를 떠났다.
사방이 가을볕 아래서 황금으로 물결치는 시월의 가운데, 할아버지 묘 옆자리에 구멍을 파서 아버지의 봉분을 만들어 밟았다. 누나는 아빠, 아빠, 하고 몇 차례 부르더니 가지 말랬다가 잘 가랬다가, 고마웠다고 인사를 건네고는 이내 미안하다고 빌며 두 손으로 붉은 흙을 그러쥐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끅끅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참아온 것들이 쏟아지는 광경이었다. 그쯤에 나는 도리어 기운이 빠져서 울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덕분에 침착하게 인부들의 수고비를 챙기고 친척들을 보살폈다.
“동생이 있어서 든든하겠네.”
고모가 누나를 위로하며 건넨 말에, 누나는 분명 “네.”라고 대답했다. 그 순간 알아챈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누나의 몸집이 나보다 한참 작다는 것, 키도 손도 발도 그렇다는 것. 그래서 나보다 밥도 덜 먹는다는 것. 그런 주제에 누나 노릇 하느라고 마음껏 소리 내어 잘 울지도 못한다는 것. 그리고 이제는 내가 가장이라는 것.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우리는 그동안 밀린 잠을 여한 없이 잤다. 마치 온 세상이 빨리 감기로 흐르다가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고요하게, 곳곳에 추억이 때묻은 고향 집에서 아기처럼 오래. 설핏 잠에서 깼을 때는 새벽인지 저녁인지 모를 만큼 사방이 어스름했다. 누나는 배고프지 않으냐고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런 누나를 말리며 정신이 들었다. 아버지는 힘든 일을 치르고 돌아온 날이면 뜨거운 국물을 들이켜셨다. 그것을 누나와 나누고 싶었다.
멸치 육수를 우려낸 뒤에 냉장고에 남아 있는 신김치, 콩나물, 다진 마늘을 몽땅 넣고 끓이다가 라면으로 간을 맞췄다. 냉동실에 떡과 만두도 있기에 곁들였다. 끝으로 찬밥까지 꺼내놓으니 진수성찬이다. 보글보글 끓는 그럴듯한 냄새에 어머니도 잠에서 깨셨다.
“네 아빠가 좋아하는 ‘갱시기’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갱시기는 예전 보릿고개 시절에 먹는 양을 불리기 위해서 온갖 남는 재료를 집어넣고 끓인, 이를테면 잡탕이라고 하셨다. 이것이 지금에 와서 나에게는 가족의 배를 굶기지 않겠다는 결심이 담긴 가장의 레시피를 의미한다.
누나는 한 숟갈 크게 떠서 입에 넣고는, 자신이 아는 맛이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나를 통해서 아버지를 그리듯이.
갱시기는 인생과 닮았다. 몽땅 넣고 끓이면 되니까.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재료들이 한통속이 되어서 눅진한 맛을 우려낸다. 끓여보지도 않고 배를 곯는 게 문제지, 끓이다 보면 무슨 맛이든 나게 된다.
삶의 공평한 점은 누구나 먹어야 산다는 것이다.
우리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면 세상은 다시 빨리감기로 돌아가겠지만, 허기가 지면 잠시 멈춰서 밥을 먹겠지. 같은 맛을 그리워하면서.
할머니의 꽃 피는 된장찌개
박다영
시간이 겨울에서 봄의 문턱으로 건너가던 3월, 나는 어두운 방에 앉아서 이력서를 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외롭게 고군분투를 해도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서울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지방 일자리를 찾는 것도 날 힘들게 했지만, 그보다 더 힘든 건 내가 무용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결국, 심각한 불안과 우울이 날 덮쳤고 밥조차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다. 며칠 사이 무려 5kg이나 살이 빠지고 말았다. 몸이 망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더 이상 뭔가를 해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염없이 무기력하게 누워서 시간과 마음을 동시에 죽이던 어느 날, 문득 열어본 냉장고에서 할머니의 된장을 발견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우리 집 베란다엔 늘 장독대가 있었다. 누군가는 장독대를 교과서나 영상으로만 접했겠지만, 나에게 장독대는 우리 집 맛의 역사 그 자체였다. 장독대를 집으로 들인 사람은 다름 아닌 할머니였다. 할머니께서 매년 메주로 손수 된장을 담그셨던지라 베란다에 나가면 장독대 근처에서 늘 은은한 된장 냄새가 나곤 했다. 어린 마음에 간단하게 사 먹을 수 있는 된장을 굳이 고생하시며 손수 담그시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성스레 장독대와 메주를 닦고, 숭고하다고 느낄 정도로 온 마음을 다해 된장을 담그는 할머니 곁에서 내가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을 때마다 할머니께선 웃으며 말씀하셨다.
“지금은 내가 이해가 안 되지? 하지만 나는 천날만날 먹어도 내가 담근 된장 맛이 가장 좋다. 고생해서 담근 만큼 속을 든든하게 해주는 건, 이 된장밖에 없다. 너도 언젠가는 이 된장의 가치를 알게 될 거다.”
내가 초등학교를 벗어나서 교복을 입을 때까지도 할머니의 된장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할머니께서 꾸준히 된장을 고집하시는 동안 나는 마치 반항이라도 하듯 된장을 더 기피 했다. 친구들과 만나면 기름진 파스타나 피자, 햄버거 등을 먹기 바빴다. 그것도 그럴 것이 할머니와 나 사이에 놓인 세월의 거리가 무려 60년이었다. 이 까마득한 시간의 공백을 소박한 된장 따위가 메꿀 수 있을 리가 없다고 믿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혀 예상치 못한 충격적인 일이 나를 찾아왔다. 부모님께서 이혼을 결정하신 것이다. 나는 낮과 밤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무너진 채, 쥐죽은 듯 누워서 잠만 잤다. 자연스레 식사는 거르게 됐지만, 배가 고픈 줄도 몰랐다. 할머니는 그런 날 보며 애간장이 다 녹았다. 저러다가 애 죽는다며 걱정하시던 할머니는 사흘째 되던 날에 나를 강제로 방 밖으로 데리고 나오셨다. 그리곤 장독대에서 된장을 퍼 오셨다. 일부분에 하얗게 곰팡이가 핀 된장이 보였다.
“이걸 골마지라고 하는데, 된장이 잘 익으면 생기는 고마운 곰팡이니까 살짝 걷어내고 먹으면 된다.”
할머니는 살집이 통통한 멸치를 넣고 담백한 육수를 만드셨다. 멸치육수에 직접 담그신 된장을 한 큰술 크게 떠넣으시곤 살살 풀어내셨다. 마무리로 내가 좋아하는 애호박과 두부를 듬뿍 넣어서 된장찌개를 만들어주셨다.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정성스레 차려주신 음식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나는 억지로 수저를 들었다. 고슬고슬한 밥을 먼저 먹고, 아직도 김이 풀풀 나는 된장찌개를 한 입 떠먹었다. 짭짤하면서도 눅진하게 입안에 맴도는 된장 맛이 꼭 눈물 맛 같았다. 우는 건지, 밥을 먹는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모양새가 된 나를 쳐다보시던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된장이 잘 익어야 곰팡이도 핀다. 골마지가 무용해 보여도 된장한텐 꽃인 게지. 사람도 똑같단다. 살다 보면 때때로 골마지가 피는 일도 생기지만, 그건 잘못된 게 아니라 오히려 잘살고 있단 증거인 셈이야. 그러니까 너무 길게 슬퍼하지 말 거라.”
왜 나에게 이런 아픔이 찾아왔을까.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을 안고서 힘들어하던 내게 그날 할머니의 된장찌개는 시간이 지나서도 잊히지 않는 깊고 따뜻한 위로가 되어 주었다.
약 일 년 전, 할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신 뒤에 장독대에 있던 된장은 모조리 냉장고로 옮겨졌다. 장독대에서 나온 된장은 더 이상 골마지가 피지 않았다. 마치 할머니께서 다 거둬가신 것처럼 말이다.
나는 냉장고에 있던 된장 통을 오랜만에 밖으로 꺼냈다. 그리고 그때 할머니께서 해주셨듯 나를 대접해주기로 했다. 똑같이 뜨거운 물에 멸치로 육수를 내고, 된장을 살살 풀었다. 애호박과 두부까지 듬뿍 넣어서 팔팔 끓인 다음 고슬고슬한 밥과 함께 식사를 했다. 여전히 짭짤하고 눅진하게 입안을 맴돌 줄 알았던 된장 맛은 예상과 다르게 구수하고 깊은 맛이 났다. 된장 맛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내가 어른이 되어서 맛이 다르게 느껴졌단 걸 깨달았다. 할머니와 나 사이에 있던 60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이 된장의 맛을 통해서 채워지던 순간이었다.
된장찌개로 허했던 속을 든든하게 채우고 밖으로 향했다. 어둡게 은둔하던 시간 동안 완연해진 봄은 사방에 꽃을 피운 채 나를 반겨주었다. 겨울을 이겨내고 흐드러지게 만개한 봄꽃을 보며 그날의 우리를 떠올렸다. 할머니 말씀이 옳았다. 지금 내게 닥친 이 어려움과 두려움은 마치 된장에 핀 골마지와 같다. 잘살고 있다는 증거이자, 반드시 피었어야 할 꽃일 뿐이다. 내 안에 핀 골마지만큼 나는 또 한 번 깊어질 것이다. 기어코 깊어져 무용하지 않은 나의 새로운 계절을 향해 건너갈 것이다.
엄마의 빼떼기국
장영란
“지난 가실에 삐져 말린 고메가 뿌연 분이 올라서 빼떼기죽 끓일낀데 오이라.”
‘진주라 천릿길’ 먼 길을 옆집에 사는 양 엄마는 음식을 핑계로 나를 부른다. 막내딸이 보고 싶은 마음을 에둘러 죽 한 그릇 먹이는 것에 갖다 붙이나 보다. 엄마의 달큰하고 걸쭉한 빼떼기죽 맛이 혀 속 깊은 곳부터 밀려온다. 그립던 엄마의 손맛이 진주로 가는 차창에 비친 햇살같이 내 몸을 나른하게 훑어준다. 입맛을 다시며 까무룩 단잠에 빠져든 나는 어느새 팔랑거리는 소녀가 되어 엄마의 부뚜막에 서 있다.
엄마가 찬장 구석에서 무명천 콩 자루를 풀며 ‘동부 콩이 얼마 없어 팥을 마이 넣어야겠네’ 혼잣말을 한다. 옆에 있는 또 다른 자루를 꺼내는데 사그락사그락 소리가 유난스럽다. 생고구마를 얇게 썰어 말린 빠삭한 빼떼기가 드러난다.
“엄마! 오늘 빼떼기죽 끓이는 거 맞제?”
나의 달뜬 목소리와 함께 엄마는 빼떼기를 물에 불린다. 솥에서 막 퍼지기 시작한 죽은 콩과 팥에서 우러난 붉은 빛과 함께 고구마 빼떼기가 삶아 뭉그러지면서 고유의 갈색빛을 띠는 죽으로 변하고 있다. 술술 뿌려지는 설탕으로 어우러진 단내가 먹고 싶어 안달 난 마음을 더 부추긴다. 계속 조릴수록 구수하고 달콤해진다며 엄마는 불 앞에서 쉴 새 없이 주걱을 휘젓고 있다. 뜨거울 때는 후루룩 죽처럼, 차갑게 식으면 탱글탱글한 양갱처럼 두 가지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는 빼떼기죽.
나에게 빼떼기죽은 호들갑스럽지 않은 엄마의 사랑처럼 은은한 단맛으로 나의 세상살이의 쓴맛을 달래주는 특별한 죽으로 기억되어 있다.
낯익은 담장 너머로 빼떼기죽의 아련한 냄새가 나를 먼저 맞이한다. ‘엄마’ 하며 들어선 부엌은 예전과 달리 난리 북새통이다. 풀어 헤쳐 놓은 자루에서 팥알이 뒹굴고, 방태기는 찹쌀가루 반죽이 덕지덕지 묻은 채 뒹굴고 있다. 뜨거움에 못 이겨 숨구멍을 튀우 듯 동그란 호흡을 퍽퍽 내뱉는 죽은 사방팔방으로 튀어 가스레인지 주위가 질척거리고 있다. 언제 엄마가 이런 난장인 채 음식을 만들었던가 의문을 품기도 전에 엄마는 죽 한 대접을 퍼주며 얼른 먹어라 성화다. 한술 뜨기도 전에 희멀건한 색이 마음에 걸리더니, 입안에서는 이미 엄마의 손맛이 아니라고 새알이 걸린다. 착 감기는 듯 혀에 안기는 느낌도 없고, 달착함도 없는 그야말로 맹탕인 맛이라니.
가까이 사는 언니가 엄마가 변했다며 푸념처럼 늘어놓던 말이 실감이 났다. 언니에게 장엇국을 끓여났으니 퇴근길에 가져가라, 연근조림이 많으니 가져다 먹으라 채근하는데 예전 엄마 솜씨가 아니라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간도 못 맞춰 재료만 낭비하고, 막무가내로 벌리기만 해서 뒷감당도 못 하신다는 것이다. 언니의 투정이 야속하게 들렸는데 어지러운 부엌과 죽 맛을 보니 그제야 구십을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슬거리는 엄마의 주름진 얼굴, 흐릿한 기억 속을 헤매는 듯 초점 잃은 눈빛.
젊을 때 엄마는 누가 아프다거나 입맛이 없다는 소식이 들리면 죽을 쒀서 들여다보곤 했다. 봄에는 햇 쑥으로 초록 새알심을 빚어 넣은 노릿한 콩죽을 만들었다. 봄날의 춘곤증이 쨍하고 물러가는 맛이었다. ‘너그 엄마가 끼리 준 콩죽 먹고 봄을 이긴 거라’며 빈 그릇을 들고 오는 친구분들이 제법 있었다. 가을엔 늙은 호박 나이만큼 곤드라지게 푹 곤 호박죽으로 아파 누워 있는 동네 어른들의 빈속을 가득 차게 해주었다.
살가운 표현을 잘 못 했던 엄마는 죽 한 그릇으로 사람들을 위로하며 마음의 온기를 올려주던 따뜻한 사람이었다. 이웃들은 한결같이 음식을 나누는 엄마의 마음 씀과 정갈한 죽 맛에 감탄했다. 그런데도 엄마는 솜씨를 부끄러워하며 당신은 잘하는 게 없다며 늘 민망해했다.
집 앞 사거리가 낯설게 느껴졌다며 집을 못 찾아온 그 날부터 엄마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늘 뒷전이던 엄마의 모습이 없어져 갔다. 노인복지센터에서 운동하고 오면 친구들의 흉을 보기 시작한다. 누구는 바보처럼 된장도 못 담는다는 둥, 김치에서 구린 젓갈 냄새가 난다는 둥 여태 살면서 그런 것도 제대로 못 하는 등신 같다는 둥, 한바탕 퍼붓고 나서 세상에서 제일 야무진 사람이 당신이라는 결론에 도달하여야 입을 다문다. 유난히 다른 사람의 음식에 트집을 잡고, 식탐을 부리는 심술궂은 노인네가 되어 버렸다.
죽처럼 따스했던 엄마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노년의 쓸쓸함을 읊조리며 홀로 방에 누워 허공을 바라보는 엄마는 세월의 더께에 눌러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일까? 얌전하던 엄마의 머릿속을 누가 흩트려 놓았을까.
빼떼기죽은 날로 납작하게 썰어 놓은 고구마가 빼닥빼닥 비틀어지게 말랐을 때 먹는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마당 귀퉁이 채반에 끓이고 남은 빼떼기가 널려있다. 하얗게 분이 오른 빼떼기는 푹 고아 건져 낸 사골 뼈다귀처럼 보인다. 골수에 든 속을 다 우려낸, 경상도 말로는 ‘빼다구’라 부르는 백골. 고구마 빼떼기라는 말은 어쩌면 가을철 단물을 가득 품고 있던 고구마가 빼다구처럼 하얗게 말라 비틀어져 빼떼기라 부르게 된 것이리라.
빼떼기는 모든 것을 쏟아내고 이제는 허연 백발이 된 엄마 모습 같았다. 솥에 찐 포근한 고구마 같았던 엄마는 자식 셋을 세상에 내놓느라 당신은 진이 다 빠진 빼떼기가 되어 버렸나 보다. 백골이 되어버린 아흔 살의 엄마는 기억조차 하얗게 말라 당신이 얼마나 촉촉한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특별한 죽을 잘 끓이는 사람이었는지 잊어버렸나 보다. 누구보다도 새끼들 먹이고, 죽을 끓여 이웃과 나눌 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을 엄마는, 그 시절이 그리워 지금도 음식으로 사람을 부르고, 음식으로 사람을 타박하며 자신의 존재를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일까.
“마이 무라. 와 안 묵노? 인자 내도 옛날에 우찌 빼떼기죽을 끼릿나 암 생각도 안난데이”
엄마의 넋두리와 함께 엄마의 손맛을 잃은 멀건 빼떼기죽이 한입 가득 슬픔으로 밀려와 내 목을 타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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