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5일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제1독서 : 지혜 2,1ㄱ.12-22
복 음 : 요한 7,1-2.10.25-30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를 돌아다니셨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으므로, 유다에서는 돌아다니기를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2 마침 유다인들의 초막절이 가까웠다.
10 형제들이 축제를 지내러 올라가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도 올라가셨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셨다. 25 예루살렘 주민들 가운데 몇 사람이 말하였다.
“그들이 죽이려고 하는 이가 저 사람 아닙니까?
26 그런데 보십시오. 저 사람이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합니다.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27 그러나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28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29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30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고등학교 졸업 후, 바로 신학교에 입학해서 사제 성소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리고 지금 사제로 만 25년을 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성소는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즉, 이미 신부가 되었지만, 완성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완성되어 가는 과정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신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자기 성소가 아니라며
사제의 길에서 벗어나는 경우를 관심 있게 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성소가 아니라는 본인의 말은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아직 완성된 성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완성되지 않았으니 자기 성소가 아직 아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완성되기 전에 포기했다는 것입니다.
‘성소’라는 하느님의 부르심은 늘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을 드러내는 길이었습니다.
나를 드러내는 길로만 가려고 할 때,
진정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낄 수가 없으며 그 길로 제대로 갈 수도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분명한 것은 주님의 진정한 협조자도 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을 드러내고 당신을 세상에 높여 세우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자기만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이는 성소의 초기 단계에 머무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는 완성된 것이 아니어서 그 안에서 결코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또 큰 혼란 속에 빠지게 됩니다.
자기 성소가 아니라면서 걷어차고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주님 안에서만 자기 성소가 완성되어 갑니다.
기도하며 또 사랑을 실천하면서 나의 성소를 성숙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성소를 확실하게 지켜 나가셨습니다.
즉, 자기의 영광이 아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삶을 철저하게 사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사람은 두려워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과 최고 의회 의원들의 모습이 대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리낌 없이 이야기하시지만,
최고 의회 의원들은 못마땅해하면서도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분을 잡으려고 하지만 손도 대지 못합니다.
성경은 아직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예수님을 따르는 군중이 두려웠고 자기들이 하려는 일에 대해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다 보니 다른 사람의 시선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봐야 할 시선은 하느님의 시선이었습니다.
그 시선에 집중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초막절 축제일을 맞으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와 벌어진 일,
곧 예수님을 향한 대립과 배척이 고조되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 정체성에 대한 문제로 극대화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약 6개월 뒤, 유월절에 온전히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요한 7,30)
사람들은 우왕좌왕합니다.
예수님을 두고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기원과 정체성에 대한 무지와 몰이해 때문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인성은 알지만, 신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어디에서 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습니다.”(요한 7,28)
그들은 비록 그분이 나자렛 사람이고,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분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났고, 하느님에게서 왔다는 것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그리스도에 관해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는 나자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다.”(마태 2,23)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신지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당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공적이고 그들 삶의 중심적인 장소인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7,28)
여기서 ‘큰 소리로 말하다’의 뜻은 성령의 영향을 받아서 ‘급박하게 외치다’라는 뜻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마치 희년선포 때처럼 성령의 힘으로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위’에서 오신 분이심을 밝히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니코데모와의 대화를 떠올리게 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불어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요한 3,7-8)
분명 우리는 성령으로 난 사람들이며, ‘위’로부터 난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수난의 사순시기를 당신과 함께 걸으며,
새로운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 갑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9)
주님!
위로부터 새로 나게 하소서.
당신을 향해 있고, 당신이 흘러들게 하소서.
영에 따라 흘러가게 하소서.
빠스카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않았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당신 신변의 위협을 아시고
아직 당신의 때가 아니었으므로 갈릴래아 지방으로 가셨다.
초막절이 되어 제자들과 따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초막절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하던 생활을 기억하며 그때와 같은 천막을 세우며,
9월 말에서 10월 초순에 걸쳐 지냈다. 이 축제는 8일간 계속되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영광스럽게 변모시켜 보여주신 때가 바로 초막절이었다.
이 초막절 때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27절).
이 말은 근거 없는 생각이다. 성경에는 나자렛 사람,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메시아가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은
“누가 그의 가계를 말할 수 있으랴”(이사 53,8 칠십인역 참조)에 근거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인간으로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하느님이시라는 것은 모르고 있다.
그래서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28절). 그러시면서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28절).
그분의 가족들을 알고 고향을 아는 것뿐이며,
그분에 관해서 모르는 것은 당신이 하느님이시며
하느님에게서 오셨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말씀은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하느님과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29절)
당신 말고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하시는 것은
그분이 아버지에게서 나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본성으로 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에게서 나신 유일한 분이시므로 그분만이 하느님을 아신다.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이유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그분의 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30절)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라는 말씀에 자신들의 지식을 믿고 있던 유다인들은 격노한다.
그러나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한다.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분이 원하시지 않으면 붙잡힐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의 때란 그분께서 죽음에 처하기로 된 때를 말한다.
우리는 그분을 잘 알고 있는가?
편견과 선입견에 갇히지 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우리를 성가시게 하는 자, 우리가 하는 일을 반대하며 우리를 나무라고 탓하는 자,
그를 모욕으로 시험해 보자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당히 당신이 누구신지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서 왔다는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신배경을 알았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다인들에 의하면, 메시아는 획기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야 하며
아무도 그의 출처를 몰라야 합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하느님의 현존 안에 숨겨져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안다는 것이 오히려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가난한 나자렛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것이 메시아가 될 수 없는 이유였습니다.
그야말로 확실하게 알면 힘이요, 능력이지만 어설프게 알면 ‘아는 게 병’입니다.
해박한 지식도 따뜻한 가슴이 없으면
자칫 교만에 빠지고 자기 안에 갇혀 볼 것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비록 의문이 가도 우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일단은 받아들여야 비로소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되고 또 확고히 믿게 됩니다.
존 포엘신부는
“믿어라. 그러면 너는 하느님의 능력을 보게 될 것이다.
기적이나 표징을 요구하지 마라. 먼저 믿어라.
그러면 나는 네가 애당초 기대했던 것보다
너에게 더 위대한 일을 행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모든 것을 확인하고 나서 의심이 해소된 후 믿겠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과학적인 확인일 뿐입니다.
사실 우리는 믿음이 있어서 따르기보다 먼저 따름으로써 믿음의 소유자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 비록 저의 믿음이 부족하오나
당신을 주님으로 믿사오니,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촌뜨기가 말하여도 그 말이 힘이 있고, 살아있으니
그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주십시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오로지 믿기만 하시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의 모든 것을 받게 됩니다.
믿기 위해 아는 것이 인간적이라면 알기 위해 믿는 것은 신성에 가깝습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 훌륭한 인물이 났을 때 쓰는 말입니다.
보잘것없는 집안에서는 훌륭한 인물이 나와서는 안 됩니까?
어디에서 났느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삶을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지혜로 사느냐? 아니면 세상의 지식으로 사느냐가 믿음의 사람을 결정합니다.
요즘 세상은 ‘얼짱’, ‘몸짱’을 선호하고 그것으로 사람을 쉽게 판단해 버립니다.
그러나 정작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겸손하며 이해심 많은 ‘맘짱’에는 관심이 부족합니다.
용모나 신장의 선입견에 갇혀 있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학연, 지연, 혈연, 출신성분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것이 신앙인의 가야 할 길입니다.
“글도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교 교수보다도 훨씬 더 큰 믿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모습으로 그의 믿음을 판단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편견과 선입견, 고정관념의 벽을 넘어 ‘내가 만든 예수님 상’을 바로 세우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반대로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오늘 ‘알다’라는 말을 함께 고민하고 싶습니다.
첫째, 아는 것은 과거에 대한 ‘기억’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교회는 2000년 넘게 이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자존감을 무너트리는 것들 중에는 ‘기억 상실증’이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나의 이웃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은 커다란 아픔이고, 슬픔입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발전으로 우리는 기억력에 의지하기보다는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의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기억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지도를 보거나, 기억으로 길을 찾았는데
요즘은 ‘내비게이션’을 보면서 길을 찾습니다.
자꾸 사용하고, 만나고, 생각하면 기억도 업그레이드됩니다.
둘째, 아는 것은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맥가이버, 미션 임파서블’과 같은 작품은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공들의 활약을 보여줍니다.
저는 기억력은 나쁘지 않은 편인데 문제 해결 능력은 좋지 않습니다.
‘길치, 기계치, 디지털 문맹’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남들은 쉽게 조립하는 의자도 1시간 넘게 고민하면서 겨우 조립하였습니다.
그것도 엉성하게 되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을 바로 문제 해결의 능력을 뜻하기도 합니다.
복음서는 ‘해결사’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귀 들린 사람들로부터 마귀를 쫓아내 주셨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도 마귀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교만, 탐욕, 분노, 시기, 식탐, 나태, 색욕’의 마귀들이
우리들의 영혼을 병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나병환자, 중풍병자, 앉은뱅이, 소경, 듣지 못하는 사람, 열병환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이렇게 아픈 사람들은 본인이나, 조상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묶인 이를 풀어주고, 갇힌 이에게 자유를 주고, 절망 중에 있는 이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파타(열려라)’입니다.
셋째, 아는 것은 ‘믿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은 알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서 아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지성과 이성은 무한하신 하느님을 알기에는 너무나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칼은 요리사가 사용하면 음식을 만드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강도가 칼을 사용하면 사람을 해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과거에 살던 분들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과학과 기술은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주고, 삶을 윤택하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이 아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앎’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앎’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생명을 죽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없는 ‘앎’으로 인종차별을 하였고, 전쟁과 폭력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은 하느님을 잘 안다는 율법학자와 대사제
그리고 바리사이들에 의해서 십자가의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는 것을 믿음으로 승화시키지 않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을 비난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미가 비록 젖먹이를 잊을지라도 나는 너희를 잊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믿어 주십니다. 비록 우리가 하느님을 멀리하고,
죄를 지었을지라도 우리를 믿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믿음과 사랑으로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을 끝까지 믿어 주셨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과 평화’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과거의 기억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현재의 문제 해결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기억을 넘어, 문제 해결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주는 믿음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 (7, 28)
여러분은 어떤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많은 사람은 자신들의 앎을 기준으로 해서 생각하고 말하면서 살아갑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이제 나이 들어가면서 예전과 조금 다른 기준을 가지고 살아보려고 합니다.
살다 보니 제가 뭘 조금은 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는데
참으로 제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새삼 더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껏 아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왔다면
앞으로 삶은 모르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살아가려고 합니다.
지나온 제 삶이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사랑에 제 전 존재와 제 삶을
봉헌하며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과 하느님의 뜻마저도 모르면서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살아왔다고 느껴집니다.
한 번도 갈멜의 산 정상에 오르지 못한 채, 오름과 내림을 반복하면서도
마치 정상에 도달한 사람처럼 저 자신과 사람들을
속이고 기만하며 살아왔다고 느껴지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어쩌면 제가 살고 있는 수도 생활 그리고 수도 생활을 살아오면서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 온 영성 생활도, 앎과 모름의 양적 차이를 비교하자면
모름에 비해서 저의 앎은 너무도 미미하고 적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7,28) 고 말씀하시면서도,
그렇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7,28~29) 고 말씀하시니
더욱더 저의 앎을 의심할 수밖에 없고, 너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그러기에 이젠 주님, 저는 참으로 당신 아버지이며 저의 아버지를 잘 모릅니다, 고 밖에
다른 대답을 할 수 없는 저 자신임을 인정합니다.
나는 무엇을 알고 살아왔으며 또한 무엇을 모르고 살아왔는가,
참으로 앎과 모름이 제 머리와 마음에 뒤섞이면서 혼란스러운 오늘 아침입니다.
지금 순간까지, 배우고 가르치면서 살아왔는데 막상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듣다 보니
정말이지 하느님에 관해서는 아는 게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을 말하면 말할수록,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모름이 명확하게 다가오는 느낌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면서,
‘네. 저는 아버지 하느님을 잘 모릅니다’, 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쩜 제가 지금껏 하느님을 안다고 말해왔던 것은 기실 신학적 지식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지,
사랑의 앎 수준에 도달하고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10,14~15) 는 언급에서 드러나듯이
참으로 안다는 것은 사랑할 때 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참된 앎은 곧 사랑의 앎이며,
사랑의 앎이란 결국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체험할 수 있습니다.
피카소는 노인이 된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열세 살 때 나는 거장처럼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아이처럼 그리는 데 평생이 걸렸다.”
믿음의 앎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른이 된 것이 무미건조해지고, 무덤덤해지고,
소위 철이 들었기에 어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온 삶으로 하느님의 신비를 궁구하기를 체념한 인생이야말로 얼마나 무덤덤한가요.
마음 깊이 쌓아 놓은 실망들, 내려놓지 못하고 간직한 실망들이 믿음이 자라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하여 성숙한 믿음과 사랑의 앎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피카소가 어린이처럼 그리기 위해서 평생이 걸렸다고 이야기한 것은
유치한 상태로 퇴보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새롭게 성숙한 두 번째 천진난만함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이는 곧 유치한 상태로 퇴보한다는 의미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성숙한 상태로 전환된다는 뜻이겠죠.
이는 살면서 온갖 부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향해 묻고 구하고 기도하려 하고,
사랑하려고 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겠죠.
이런 사람은 어린아이의 열린 눈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많은 경험과 배움을 쌓아도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처럼 저 역시도 젊은 날의 불타오른 믿음과 정열적인 사랑만으로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을 알 수 없습니다.
나이 들면서 이제 저는 예전처럼 정열적인 사랑이 아니라
모름 속에서도 의지적 사랑으로 더욱더 집요하고 끈질기게,
제가 제일 잘해왔고 가장 큰 장점인 충실하게 하느님의 사랑 안에 항구히 머물고 싶습니다.
(저는 국민학교 다니면서 우등상은 타보지 못했지만, 개근상은 탔었습니다.)
젊은 날의 하느님에 대한 지식도 경험도 경력도 다 사라지고 맙니다.
예전 피정 지도하러 갔을 때 청주 경로 수녀회(=지금은 수원)의 벽에 걸린 글귀처럼,
‘나이 들면 세상적인 눈은 침침해지지만, 영적인 눈을 밝아질 것’을 믿습니다.
러시아의 짜르 암살모의(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사형선고를 받았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처형 직전 사면을 받아
시베리아에서 유형 생활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유형지에서 그곳에는 읽을 수 있는 책이라고는 성경 한 권뿐이었고
그는 수형 생활 동안 여러 번 성경을 탐독하였는데,
그러던 어느 날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습니다.
그는 1854년에 자기에게 성경을 준 어느 여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군가 내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진리가 아님을 증명하고,
실제로 진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다 해도,
나는 여전히 진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다.』
이 현존 체험 이후 무신론자였던 그의 삶과 문학 세계가 바뀝니다.
그가 1866년에 발표한 그 유명한 소설 「죄와 벌」은 변화된 그의 문학 세계의 특별한 표출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통해서 사랑이신 예수님을 만났고
그 사랑이 그로 하여금 그의 존재와 삶을 변화시킨 힘이 되었으리라 봅니다.
고통과 사랑의 체험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며,
그 힘은 하느님을 사랑으로 알고, 사랑으로 하느님을 살아가는 삶에서 솟아 나온다고 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살기 위해서 우린 먼저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예수님을 통해서 그 사랑을 체험하면서 차츰, 사랑이신 아빠 하느님을 알고
그 사랑 안에서 아빠 하느님을 온전히 인격적으로 만날 뵈올 수 있습니다.
어느 날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요14, 8)라고 청하자,
예수님께서는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14, 9.11)라고
확답해 주셨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거울이며 판박이십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아는 것은 아버지를 아는 것이며,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과 인격적인 사랑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볼 수 없는 아빠 하느님을 만나고
아빠 하느님과 사랑의 앎을 통해서 아빠 하느님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몰라서 못 사는 것이 아니라, 비록 그 앎이 미미할지라도
그것을 살고자 하는 마음이 더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아시듯이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하느님을 알면 좋겠지만
다 알 수 없을뿐더러 그때가 되면 다 알게 될 일이기에
우리의 앎이 걸림돌이 되지 않고 부족하지 않다고 봅니다.
다만 아빠 하느님께서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그것으로
부족하지 않으리라 보고, 이를 깨우쳐 주시고 저희를 매일 아빠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며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시는 예수님과 사랑 안에 항구히 머물도록 합시다.
모르는 것이 허물이 아니라 모르는 것을 알고 예수님의 사랑 안에 살려고 노력하는 삶이
바로 축복임을 감사하며 살아갑시다.
“주님, 저희 또한 당신이 어디서, 누구한테서 오셨는지 알고 있으며,
매일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온전히 아버지를 잘 모릅니다.
이 사순시기를 통해서 당신의 아버지이시며 저희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더 잘 알고,
아빠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체험하면서
언제나 아버지의 손길과 눈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이끌어 주십시오. 아멘.”
박재찬 안셀모 신부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제대로 알아볼까?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예루살렘 주민들이 아는 예수님은 외적이고 습관적이며 피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참된 예수님의 본성도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을 아십니다.
자신을 온전히 비우시고 사랑으로 채우셨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아는 예수님, 책에 나오는 예수님, 남들이 말하는 예수님을 넘어
진정 우리 안에 살아계신 예수님과의 더 깊은 사랑의 일치의 은혜를 청하며
이 미사를 온 정성을 다해 봉헌하도록 합시다.
찬미 예수님!
오늘은 제가 청원자 때 수도원에서 본 영화 이야기로 강론을 시작할까 합니다.
제목은 ‘에마논’입니다. 영화 제목이 왜 ‘에마논’일까요?
그것은 영화 속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입니다.
영화는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물론 영화 설정 자체가 신학적으로는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은 세상 완성의 날이요, 구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은 신학적인 옳고 그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 하더라도
그분을 알아 뵙지 못하고 다시 십자가에 못 박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다만, 한 꼬마 아이가 그분을 알아보게 되는데 그 아이가 이름을 묻자
경찰에게 끌려가는 주인공이 자동차 뒷유리창에 “no name”이라고 적습니다.
그런데 차창 밖에서 보면 이것이 “emanon”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아이는 그를 “에마논”이라고 부르기 시작합니다.
이 영화에서 주고자 한 메시지는 결국 우리의 선입견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도 예루살렘 주민들 역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메시아께서 오실 때에는 그분이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할 터인데,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라고 대답하십니다.
유다인들이 당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결국 하느님 아버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니
유다인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합니다.
자신들은 예수님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하느님이 누구이신지도 알고 있는데
모른다고 하니, 화가 난 것입니다.
자매형제 여러분,
어쩌면 우리도 이렇게 유다인들처럼 내가 아는 예수님을 갇혀,
진정 그분을 알아뵙지 못하는 경우가 있지는 않은지요?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예수님께 화를 내고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원망을 쏟은 적은 없는지요?
유다인들처럼 내가 아는 하느님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그 틀에 다른 이들을 끼워 맞추려 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 충돌이 일어납니다.
물론 그릇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는 이들에게는 식별이 필요하고 교육이 필요하지만,
진정 내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지 않으면
그 식별도 그릇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앞서 소개한 “에마논”이란 영화에서 이름을 묻자,
주인공은 자신을 “no name, 이름이 없다”고 소개합니다.
구약에서도 하느님의 이름을 묻는 대목이 나옵니다.
성경에서 볼 수 있는데 어디죠?
그렇죠, 구약에서 모세가 하느님의 이름을 묻자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탈출 3,14)하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을 “야훼”라고 하는데, 하느님은 절대적이고 필연적 존재이며
모든 있는 피조물의 원천이신 하느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영화에서는 no name이라고 했을까요?
아마 이것은 우리가 인간의 언어로 예수님을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분의 신비를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없는 분,
우리가 알 수 없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일 겁니다.
나아가 우리 곁에 다가오셨지만, 우리가 정해 놓은 것들 때문에
진정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우리의 닫힌 마음을 표현하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삶,
그리고 그분의 죽음의 신비에 동참하고 관상함으로써
그분의 이름을 알지 못해도 그분이 누구인지
온몸과 온 마음으로 신비를 깨닫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달리 말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묵상하고 관상하며
그분처럼 온전히 하느님과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아갈 때
하느님 사랑을 알게 되고 그래서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도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많은 말을 필요로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상상과 우리의 이성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토마스 머튼 신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관상하는 ... 진정한 이유는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갖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불붙기 시작하면
우리의 상상력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에 대한 한정되고 불완전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준에 따른 것입니다.”(새 명상의 씨, 173)
사순시기의 중반을 보내고 있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특별히 이 사순시기에, 우리는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예수님과 생생한 사랑의 관계를 믿음으로 맺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한결같이 사랑하심을 믿고 그분의 뜨거운 사랑이 우리 안에 점점 충만해질 때
우리에게는 더 이상 의심도, 판단도, 편견도, 집착도 없는 온전한 일치 영이 찾아올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일치할 때 우리는 제대로 예수님을 알게 되고
그분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또한 제대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구속이 아니라 온전한 자유로움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의 머리로 다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이름 없으신 그분께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 곁에 다양한 모습으로 다가오셔서 우리를 당신의 더 큰 사랑에로 초대해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사랑으로 응답하며, 그분의 사랑에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데 다른 사람이 조금 나를 힘들게 한다고
그렇게 힘들어할 필요가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나를 이토록 사랑하시는데, 다른 사람이 내 방식대로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원망하고 비난할 필요가 있을까요?
인내하고 기다리며 주님의 더 큰 사랑 안에서
영적인 자유로움으로 충만된 날 되시길 빕니다. 아멘.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우리는 저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에 대한 적대와 증오와 분노는
모두 그분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는 확신에서 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죽이려는 자들 때문에
유다 지역으로 가시지 못하고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시는 정황을 드러내며 시작됩니다.
그러나 초막절이 되자 그분께서는 더 이상 갈릴래아에 머물지 않으시고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시어 “드러내 놓고” 가르치십니다.
본문은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다.”라는 표현으로
예수님께서 단순히 두려움 때문에
“드러나지 않게 남몰래 올라가신” 것이 아님을 밝혀 줍니다.
이렇게 과감하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자,
유다인들은
“최고 의회 의원들이 정말 저 사람을
메시아로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라며 불안해합니다.
이유는, 유다인들의 통념에 따르면
메시아는 “어디에서 오시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데,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 출신이신 것이 알려져 있으니
분명 메시아이실 리가 없고,
그럼에도 산헤드린의 의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할까 보아
안절부절못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라고 인정하시면서
여기에 중요한 사실 하나를 덧붙이십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다.”
곧 당신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신 것은 맞지만,
무엇보다 ‘하느님에게서 오셨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권력과 권한이 막강할수록
자신에게 불편함을 주는 존재를 처리하는 방식은 단순합니다.
제거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독서의 지혜서 본문은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어떠한 최후를 맞게 되실지를 요약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아들에게 가해진 폭력을 ‘눈먼 비극’으로 선언합니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여기는 확신이야말로
눈먼 판단이며, 위험한 폭력일 수 있습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