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nuit / salvatore adamo
백암순대는 아무튼 나의 영원한 최고 음식이다. 고향 일죽에서 가깝기도
하지만 그 옛날 내가 시골 장터에서 어쩌다 한 그릇 사 먹던 바로 그 순대의
맛을 지금도 유감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토요일 약국을 일찍 마치고 백암으로 순댓국을 먹으러 차를 몰았다.
가는 길이 참으로 평화로웠었는데 에스케이 반도체 공장이 신축을 하는
바람에 길이 어지러이 변해 버렸고 야산은 몽땅 베어져 민둥산으로 되고
거기 흙을 퍼 나르는 트럭으로 완전 아수라장이 된 지 오래다.
하여튼 순댓국 한 그릇 먹으러 배를 쫄쫄 쥐어짜며 백암에 도착한 건 오후
2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국밥집 안은 만원이었다.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역시 변함없는 이 맛^
한 끼의 식사가 주는 만족감이란 이런 거구나~~
그래 내친김에 고향이나 가보자^
겨우 아랫동네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 내가 살았던 동네로 걸어 올라갔다.
풀이 자라 발목 위를 덮고 사람이 다니지 않은 듯 길이 나 있지 않았다.
6 가구 중 딱 한 가구 신축해서 사시는 아주머니 집에 당도해 보니 대문은
굳게 잠겨있고 마당엔 사람이 다닌 흔적이 없다.
"엇? 돌아가셨나? "
길을 도로 내려와 아랫동네 마을회관으로 갔다. 안에는 할머니 아주머니 등 몇 분이
티브이 시청에 이런저런 얘기를 도란도란 주고받고 있다.
" 저 말씀 좀 묻겠습니다. 저위 빼나골 기홍이 어머니가 어떻게 되셨나요?"
"누구신데~"
" 아 네에,, 저는 빼나골 살았던 나 **입니다. "
"기홍이 엄마는 오래전에 요양원에 가셨는데~ "
음 그래서 집이 그렇게 변했구나~ 나는 순간 맥이 탁 풀림을 느꼈다.
이제 고향에서 나와 함께 살았던 그리고 그 동네에 처음부터 살고 계시던 분은
아무도 없구나~
몇몇분과 이런저런 얘기 끝에 마침 고향집 맞은편 산비탈에서 복숭아 과수원을 하던
허** 형의 형수님이 ~
윗동네인 우리 집에서 아래 큰 동네로 내려갈 때 초입에
있던 살구꽃이 예쁘게 피던 집이다. 완전 폐허가 되어있다.
" 그 당시 복숭아 과수원에서 잡숴보지 못하신 복숭아가 우리 집에 몇 개
있으니 우리 집으로 가십시다. 아마 형님이 논에 피 뽑으러 안 갔으면 계실
거구만유~ "
* *
[ 60년쯤 전 어느 비가 부슬부슬 오던 6월 어느 밤~
나는 바로 그 건너편 과수원의 복숭아가 그리도 먹고 싶었다.
일전에 복숭아 2개에 5원을 주고 사 먹은 그 맛이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철조망을 넘고 복숭아나무까지 접근하는 데는 성공했는데 아뿔싸~
과수원 개가 짖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급한 대로 아무 복숭아나무 위로
얼른 올라가서 동태를 살폈다. 주인아저씨(허형의 아버님)는 개가 왜
이리 짖는 거야~ 뭐가 있나~ 이러시면서 개를 달래시더니 곧바로 과수원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다.
잔뜩 긴장하고 나무에 올라있던 나는 한숨을 돌리고 복숭아를 찾아봤으나
어두운 밤에 복숭아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면 이미 다 따낸 복숭아
나무를 잘못 찾아 올라갔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들키지 않은 것만 감지덕지, 허겁지겁 나무를 내려와 실비를 맞으며
집으로 향했다.
일생일대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복숭아 서리는 이렇게 소득 없이 끝난 것이다. ]
* *
대충 이 얘기를 들은 형수님이 그때 맛도 못본 복숭아 하나 맛보라고 ~~
거참, 60년 전에 먹고 싶었던 복숭아를 이제사 먹어 본다??
대문 입구에 만들어 놓은 저온 창고에서 복숭아 몇 개를 꺼내 칼로 깎아 건네주신다.
그리고 텃밭에서 맵지 않은 오이고추며 상추며 노각이며 포도까지 줄줄이 따서 비닐
봉지에 담으신다.
"이미 올해는 8.15일을 넘겼으니 내년 8.15일경에 와서 꼭 복숭아를 좀 구입하겠
습니다요~ "
당시의 복숭아 밭은 다 갈아엎었고 그 뒤쪽으로 다시 복숭아나무를 심어서 계속
과수원을 하시고 계신단다.
고향을 떠난 지 대략 60년이 된다. 그 사이 꽤나 여러 번 고향을 찾아본 것도 사실
이나 그냥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지기 일쑤~ 동네 어느 집을 찾아들어간
적도 거의 없고 따라서 뭘 손에 들고 온 적도 없었다. 말하자면 이번에 그 복숭아
한 개, 노각 두 개, 고추 한 움큼, 포도 두 송이는 그래서 내가 60년 고향땅에서 가지
고 와 본 유일한 산물인 셈이다.
나는 고추며 상추 등을 비닐봉지에 넣으시는 모습을 보며 마음이 싸아 해짐을 느꼈다.
그 뭐랄까~
그것은 단순한 고향에 대한 향수 이런 게 아니었다. 어쩌면 고향에 대한 아주 약간의
피해의식? 서운함? 뭔가 모를 아쉬움~ 그런 것들이 늘 마음 한구석에 살짝 남아 있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이 작은 사건으로 인해 내 마음이 많이 풀렸다고나 할까?
고향을 바라보는 인식에 조금 변화가 있을듯한 예감이 들었다는 점이다.
이 텃밭은 내가 어릴 적 친구들과 구슬치기를 하던 큰 마당이었다.
집 앞에 들어선 번듯한 양옥집~
서울 강남에서 내려온 어떤 중년부인이 지은 집인데, 이사 와서 새로
결혼을 했고 부부가 골프를 치러 자주 다니는데 동네 사람들 하고는 거의 내왕이
없단다. 아무 연고도 없는 시골에 이렇게 내려와 사는 사람도 있네~ 그랴!
내년 복숭아 철에 다시와 볼 것을 약속하며 서둘러 인사를 하고 이곳에서 30리
떨어진 장호원 대서리로 향했다.
20여 년 전 가을걷이가 끝나면 동네분들이 마을회관에 여럿 모이셨고, 한약을 지어
택배로 부쳐 드리던 동네이다. 내 고향 동네 바로 옆집에 살던 누이가 사시는 동네이기도
한데 몇 년 전부터 통 연락이 안 되어 이참에 한번 직접 확인을 하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그 누님은 살아 계셨고 허나 온몸이 안 아픈 데가 없어 수술에 수술을 거듭
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근처 동네 가리울~
엄마 생존 당시 겨울에 보따리를 이고 행상을 하시며 가끔씩 여기 [가리울] 동네를
말씀하셨었다.
" 오늘은 가리울 누구네 집에서 점심을 한술 떴지~ "
그 가리울이라는 동네, 인심이 그때만은 못하겠지만 웬지 꼭 한 번은 들러보고
싶었던 곳이다.
동네 입구에서 뭔가를 뿌리고 있는 농부를 만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여쭈었다.
가리울은 옛 가리울이 있고 신 가리울이 있단다. 그리고 그 동네에 가래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이란다.
여기 어드메쯤에 그 옛날 엄마가 점심을 얻어드셨다는 집이 있을게다.
어둑해지는 마을에 들어가 그저 잠시 얼쩡거리며 동네를 둘러보는 것으로
끝내야했다. 생각 같아서는 오래된 어느 집에 들어가 그 옛날 그 일을 기억
하시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 엄마~ 나 가리울에 왔어요~~ ~~~"
점심으로 먹은 백암 순댓국이 아직도 배가 든든한데 일죽 당촌리에 있는 어죽
국수가 생각이 났다.
그러나 찾아간 식당에는 육수가 동이 나서 미안하단 말만 들었다.
에혀!
흡사 영주의 무섬마을과 비슷한 풍광을 보여주는 당촌리 냇가~
여기서 피라미를 잡아 어죽을 끓여줄까? 아니겠지!!
근처에 있는 기와집~
청미재^
아마도 민박을 하는 모양인데 내부를 살짝 들여다보니 정원이
매우 크고 아름답다.
혹 고향에 와서 유숙을 한다면 이 집에서 하고 싶다.
토요일 오후 약국 마치고 다녀본 일정으로는 꽤나 여러 가지를 한 셈이다.
눈 감으면 떠 오르는 고향 마을은 아무리 지금 변한 모습으로 바꿔 보려 해도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 묘한 그런 게 있다.
그래! 그게 바로 고향이다^^
첫댓글 60여년 전 고향이
흔적이라도 남아있다니 놀랍습니다.
사람은 옛사람이 아니라지만
하루가 달리 많은 게 바뀌는 요즘
흔치 않은 일이네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저의 고향은 어디일까? 원적지?
어릴 때 한동안 살았던 곳을 찾아봤더니
어디가 어딘지 알아볼 수도 없게 변했더군요.
그저 뭐 흔적정도는 남아있습니다
제가 살았던 동네는 전부 집이 없어지고 딱 한집만 그자리에
새로 집을 지어 명맥을 유지했었는데,, 총 6 가구였지요.
헌데 고향 가도 어디 들를데가 없다보니 늘 짝사랑신세지요.
고향 전경 곱습니다.
백암 하니 온천 생각나는데 거기가
아니고 충청도 백암인 듯,
고향 전경 잘 보았습니다.
병천 순대는 나도 아는데
백암 순대는 못 들어본것 같은??
홍보가 덜 됐나?
의문이 아직도 됨 ㅎ
백암이 경기도 용인지역입니다.
오래전부터 백암순대는 아주 이름이
나 있었지요. 누구는 병천 순대가 좋다
어디가 좋다 하는데,, 제 경우는 백암이 가장
잘 입에 맞습니다.
수원에서 백암 까지 백암장날이면 순대먹으러
갔었지요.
백암어느곳 이었던가 유명한 보신탕집 이
있어서 그곳에도 자주 들었습니다.
수원 근처 좋은곳 찿아다니면서 살았기에
한국에 살던때가그립기도 했었지요.
고향집 추억은 누구에게나 간직된 소중한
정서이기도 합니다.
노각도 그렇고 가을늦참 오이는 곱게 자라지
못하고
모양새도 고향스럽게 변하지요.
5,10일은 용인장
1,6일은 백암장
백암에 보신탕 집이 있든가요?
저는 뭐 그거 졸업한지 꽤 되어서 이젠
찾지는 않지만 대신 흙염소탕을 몇번 애용했는데,,
보니 중국산 고기를 쓰더군요!
해서 그것도 졸업!!
노각을 가져다 요리해 보니 쓴맛이 아주 많네요^
마론님의 글을보며
마음이
짠해지고 내고향을 찾아 유년시절로 돌아갑니다
그림과글이 자꾸만 어릴때살던 고향으로 돌아가게만드네요
남자어린애들이라면 한번쯤해본 수박 참외서리
마론님은 복숭아 서리를 하셨구만요,ㅎ.
고향분이 전해준 노각과 못난오이와 고추가 가슴을 뭉클하게만드네요
이젠 찾아볼수없는 추억이되겠지요
잘쓰신 글과 고향동네사진에서 한동안 머물다 갑니다
오래된 담을 벗삼아 피어있는 능소화가 아름답지만 서글픔으로 다가오네요
잘보고갑니다 건필하셔요
사진은 폰으로 몇장 찍은걸 조금 손 보아서
올린정도인데~
이번에는 사진보다 글에 중점을 둔 에세이라
생각을 해 봅니다.
밝음이 님은 글을 맥락을 세세하게 파고들어
가슴으로 읽어 들어가셨군요~~
사실 고향이 어떻다 변했다
가 봐도 아는 사람이 없다~ 뭐 이런건 거의 공통 사실일듯
해서 써 봐야 손가락만 아프지 뭐 ~
썰렁한 동네지만 아직은 시골 인심이 살아 있음에 많이
놀랐고 해서 고마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가리울 이란 동네는 전부터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우리 옛집에서 족히 30리는 넘는 거리였는데,, 추운 겨울에
거기까지 보따리를 이고 오고 가셨을 엄마를 생각하니
가슴 한켠이 시려오는건 어쩔수 없는 일이지요^
2개에 5원 ㅎㅎ
호랭이 담배피던 시절 이야기네요
제가 자란 시골풍경과 비슷하고 지금 현재의 모습이 흡사해서
아침부터 고향 생각에 젖습니다
국민학교 전교생이 600명 정도 있었는데 이제는 19명
그 먼길을 오다가 개미허리도 잘라먹고 걸어서 다녔는데
지금은 집앞까지 시에서 부담하는 택시가 오더군요
오손도손 모여 살았던 집들도 쓰러지고 없어지고
지금 한집만 인기척이 있습니다 ~
우리 엄니도 여름이면 그 무거운 토마토를 머리에 이고
이동네 저동네 행상을 다니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이고 도가니야 ~ 도가니야
너무도 생생하게 그 시절을 재현 해 주시는 글
잘 읽고 감동 받았습니다 ~
600명 학생이 이제 19명이라~~
참 난감하넹요~
우린 대략 1000명 이상 이었는데 지금 몇명이나
생존하고 있는지는 들여다 보질 않아 잘 모르지만,
고향은 어디나 거의 비슷한 몰락의? 길을 걷고 있고만요~
여섯집 있던 집이 달랑 한채 남은걸 무척 아쉬워 했는데^
눈이 시리듯 아쉽기만 하던 그 옛날 고향은 이제 가슴속에만
남아 있지만 그럴수록 고향이 있었다는건 행운이고
축복이란 생각도 듭니다.
가리나무님의 멋진 음악을 계속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