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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9일 오늘의 역사
2023년 미국 헬기 2대 훈련 중 충돌·추락...장병 9명 사망
2022년 코로나 확산으로 중국 상하이 시 완전봉쇄조치
2017년 지중해에서 리비아 난민선(47명) 침몰 감비아 소년(16세) 만 살아남음
2017년 10대 2명 초등2년생(8세) 유괴 살인 주검 훼손
2010년 국어학자 이응백 선생 별세
경기도 파주 출신인 이 교수는 1949년 서울대 사범대 국어과를 졸업하고 1974년 서울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7~1988년 서울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지냈다. 또 서울대 부설 한국방송통신대학장, 한국국어교육연구회 회장, 한국수필문학진흥회 회장, 전통문화협의회 회장, 한자교육활성화추진회 회장, 한국어문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이 교수는 1955년 국어교육단체인 국어교육연구회를 결성해 국어교육 이론과 국어문법을 연구해왔으며 중고교와 대학에서 우리식 국어교육에 매진했다.
저서로는 '국어교육사연구(1975)' '자료를 통해 본 한자·한자어의 실태와 그 교육(1988)' '방송과 언어(1988)''아름다운 우리말을 찾아서(2001)' '한자를 아는 것이 국력이다(2004)' 등이 있다. 수필과 시조 창작에도 관심을 보여 시조집 '인연(1992)' '나들이(2002)', 문집 '여적(1983)', 수필집 '기다림(1988)' '우리가 사는 길(1999)' '묵은 것과 새것(2008)' 등을 냈다.
2010년 러시아 모스크바, 지하철 연쇄 폭탄 테러 발생
2010년 3월 29일 아침 러시아 모스크바 한복판 지하철역 두 곳에서 연쇄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 최소 38명이 사망했다.
러시아 비상대책부는 “오전 7시 56분쯤 ‘루뱐카(바구니라는 뜻)’ 역에 진입한 열차의 두 번째 칸에서 폭탄이 터져 열차 안 승객과 플랫폼 시민 25명이 숨지고 39명이 부상했으며, 8시 40분쯤에는 ‘파르크 쿨트리(문화공원)’ 역에서도 폭발이 일어나 최소 12명이 사망하고 23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했지만 이후 사망자는 최소 38명으로, 부상자는 최소 64명으로 다시 집계했다.
루뱐카 역 인근에는 KGB의 후신인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본부가 위치해 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 집무실(크렘린)도 2㎞쯤 떨어져 있다. 파르크 쿨트리역 역시 크렘린에서 5㎞ 이내에 있다.
이날 발생한 두 건의 테러는 모두 여성에 의한 자살폭탄 테러로 밝혀졌으며, 러시아 언론들은 체첸 내 이슬람 분리주의자들의 소행으로 보고 있다.
특히 이번 테러는 수도 모스크바의 한복판, 그것도 크렘린과 FSB 등 러시아 연방 정부의 최고 수뇌부가 밀집한 건물들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러시아 최고 실력자 블라디미르 푸틴(Putin)이 2000년 집권한 이후 모스크바 도심에서의 테러는 2004년을 제외하곤 거의 없었다.
모스크바에서는 2004년 2월 6일 압토자보드스카야와 파벨레츠카야 역 사이에서 일어난 지하철 폭탄 테러로 시민 41명이 사망하고 약 250명이 부상한 적이 있다.
한편,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주장하는 이슬람 세력들은 1994년과 1999년 두 차례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전쟁을 치렀다가 패배했으나 여전히 러시아 정부를 상대로 테러를 감행하고 있다. 특히 2009년 4월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전임 푸틴 정부가 10년간 체첸공화국에서 진행한 반(反)테러작전을 종결하겠다고 선언하면서 테러 공격은 카프카스 일대를 중심으로 활성화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됐었다. 지난해 열차 테러 사건을 저질렀다고 주장해온 체첸 반군 지도자 도쿠 우마로프(Umarov)는 인터넷 웹사이트를 통해 2010년 2월 "러시아 전역에서 테러 활동이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2009년 음악가 모리스 자르 별세
1924년 프랑스 리옹에서 출생한 그는 60년대 할리우드로 터전을 옮겨 존 프랑켄하이머, 앨프리드 히치콕, 존 휴스턴 등의 거장 감독들과 작업하면서 150여편의 영화 음악을 만들었고 '닥터 지바고' '아라비아의 로렌스' '인도로 가는 길' 등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았다
2009년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 별세
양정모 전 국제그룹 회장은 1940년대 부산에 차린 고무신 공장을 각고의 노력을 통해 1980년대 재계 서열 7위의 ’국제그룹’으로 키운 한국 재계의 대표적 ’자수성가형’ 기업인이었다.
부산공업학교를 졸업한 양 전 회장은 1949년 그의 부친과 함께 부산에 국제고무공업사를 설립, ’왕자표 신발’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6.25 전쟁 와중에는 군수품 생산으로 큰 돈을 모았다. 1963년에는 신발류 및 비닐제품 생산업체 진양화학을 세워 1970년대초 신발 수출 붐을 타고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이후 직물가공업체 성창섬유, 국제상선, 신동제지, 동해투자금융 등을 잇따라 창업하고 동서증권, 동우산업, 조광무역, 국제토건, 국제종합엔지니어링, 원풍산업 등을 인수하며 ’재벌’ 반열에 올랐다.
1980년대 중반 당시 국제그룹은 21개 계열사를 거느린 재계 서열 7위권의 막강한 기업집단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985년 전두환 정권 아래 그룹이 해체되면서, 주력 계열사였던 국제종합건설과 동서증권은 극동건설그룹에, 나머지 계열사와 국제그룹 사옥은 한일그룹에 각각 넘어갔다.
이후 양 전 회장은 정부를 상대로 국제그룹 해체가 부당하다며 위헌소송을 벌여 승소했지만, 이 과정에서 정관계 로비자금 유포 사건 등에 휘말리고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결국 그룹 재건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2009년 김연아, 최초 200점 돌파하며 세계선수권 정상
'피켜 퀸' 김연아가 2009년 3월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센터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 2009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프리스케이팅에서 종합점수 200점을 돌파하며 우승하였다
김연아는 프리스케이팅에서 합계 131.59(기술 63.19 연기 68.40)을 얻어 총점 207.71점으로 사상 최초로 200점을 돌파, 세계신기록을 작성하며 우승했다
2004년 아일랜드 `금연법` 공포, 술집 등 공공장소서 금연 위반시 벌금 최고 440만원
아일랜드의 흡연자들이 2004년 3월 29일부터 술집에서조차 담배를 피울 수 없게 됐다. 술집을 포함한 모든 공공장소에서 흡연을 전면 금지하는 내용의, 세계에서 가장 가혹한 금연법이 시행됐기 때문이다. 위반자는 최고 3000유로(약 442만5000원)까지 벌금을 물어야 한다.
그러나 새 금연법은 유흥업소에서 고객이 담배를 피울 경우 업주가 벌금을 물도록 규정했다. 한 흡연자 단체는 술집과 호텔들이 대량 폐업하고, 이로 인해 6만5000여명의 신규 실업자가 생겨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부 비판론자들은 아일랜드인 특유의 느긋한 생활습관을 짓밟고 미국의 청교도적 가치를 수입하는 것이라며 ‘금연 제국주의론’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2003년 여론조사에서 아일랜드 성인 남녀 대부분은 이번 조치를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03년 조계종 전(前) 종정 서암스님 입적
경북 안동에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독립운동으로 집안이 풍비박산나자 15세 때 예천 서악사에서 화산(華山)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김용사 강원을 졸업하고 종비(宗費) 유학생으로 일본대학에서 종교학을 공부했으며, 1942년 김용사 선원을 시작으로 60년 넘게 전국 각지의 선원에서 수행했다.
1946년 계룡산 나한굴에서 단식 정진 중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지는 경험’을 한 그는 불교계의 ‘대표 수좌(首座)’라고 불릴 정도로 한평생 모범적인 선승(禪僧)이었다. 만년에 제자들이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여 올리면 “고목에 비료 주는 것이냐”고 물리쳤고, 전국 각지로 법문을 하러 다닐 때도 “중은 꼿꼿이 앉아서 가는 것이 제일 좋다”며 통일호 열차를 고집했다.
서암 스님은 특히 한국 선불교의 최고 수행도량인 문경 봉암사의 오늘을 만든 인물이었다. 봉암사는 조계종의 유일한 종립선원(宗立禪院)으로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선승들이 엄격한 규율을 지키며 수행에 몰두하는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6·25 이후 폐허가 됐던 봉암사는 1970년대 이후 서암 스님에 의해 ‘수좌들의 고향’으로 자리잡았다.
해이해진 승풍(僧風)을 바로잡은 그는 1979년 조실로 추대되어 봉암사의 상징으로 전국 수행승들의 존경을 받았다. 1991년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을 맡았으며 1993년 성철 스님이 입적하자 종정으로 추대됐다.
그러나 서암 스님은 1994년 서의현 당시 총무원장의 3선 시도로 빚어진 조계종의 분규 때 서 원장을 지지하는 입장에 섰고, 서 원장이 쫓겨나자 탈종(脫宗) 선언과 함께 종정 자리를 내놓았다. 서암 스님은 대규모 사찰들이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국 불교계에서 ‘소수파’였다. 그에게는 이렇다 할 문중과 제자가 없었다. 조계종 눈밖에 있었던 지난 1995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한국 불교는 독화살을 맞고 중환자실에 누운 환자와 같다”며 문중 중심 종단의 운영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2003년 사스(SARS) 첫 확인한 우르바니 박사, 사스로 사망
괴질(SARS)의 존재를 처음 확인한 세계보건기구(WHO) 소속 의사 카를로 우르바니(46·이탈리아) 박사가 29일 이 병으로 사망했다.
WHO 소속 전염병 전문가로 캄보디아·라오스·베트남의 공중보건 업무를 담당해 온 우르바니 박사는 베트남 하노이에서 호흡기 질환 증세를 보이는 미국인 사업가를 치료하다가 괴질의 존재를 확인하고 WHO에 보고했다. 우르바니 박사는 이 환자로부터 괴질에 감염됐으며 태국 방콕으로 후송돼 15일간 치료받다 숨졌다.
이탈리아 안코나 의대를 졸업한 우르바니 박사는 ‘국경없는 의사회’ 이탈리아 지부장을 역임했다
2003년 ‘제주 4·3사건’ 정부 보고서 55년 만에 채택
1948년 발생한 제주 4·3사건을 ‘남로당의 무장봉기와 이에 대한 공권력의 무자비한 과잉 진압에 따른 주민 피해’로 규정한 정부 차원의 보고서가 사건 발생 55년 만에 조건부로 채택됐다.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위원장 고건 국무총리)’는 29일 정부중앙청사에서 회의를 열고 내부 기구인 ‘진상조사보고서 기획단’에서 제출한 4·3 보고서를 수정, 채택했다.
위원회는 이날 회의에서 4·3사건 원인에 대해 ‘남로당 제주도당의 무장 봉기가 있었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하게 주민들이 희생되었다’고 4·3사건을 규정하고,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과 추모사업이 적극 추진돼야 한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했다고 김한욱(金漢昱) 4·3사건처리지원단장이 밝혔다. 또 4·3사건 전체 희생자 수를 2만5000~3만명으로 추정하고, 희생자와 유가족에 대한 적절한 명예회복을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밖에 위원회는 기획단에서 건의한 4·3사건 피해자에 대한 정부의 사과 4·3사건 추모기념일 제정 4·3사건 관련 유가족들에 생계비 지원 등 7개항의 ‘대정부 건의안’을 접수하고 정부차원에서 검토하기로 했다.
한편 지난 21일 ‘보고서 초안이 피해자 사례에 치우쳐 있다’며 사퇴 의사를 밝힌 김점곤 경희대 교수는 회의에 불참했다. 또 회의에 참석했던 한광덕, 이황우 위원 등 군(軍)과 경찰을 대표하는 위원들이 보고서 동의를 거부해 논란이 예상되었다
2001년 인천국제공항 개항
21세기 동북아 허브(중심) 공항을 목표로 건설된 인천국제공항이 2001년 3월 29일 개항했다. 인천공항은 이날 오전 4시 46분 방콕발 아시아나 항공의 첫 착륙과 오전 8시 30분 마닐라행 대한항공의 이륙을 시작으로 한국의 새 관문 역할을 시작했다.
여객기 281편, 화물기 58편 등 모두 339편의 항공편 이·착륙이 이상없이 이뤄졌다. 인천공항을 통해 입·출국한 승객은 4만3000여명에 이르렀다.
수치로 본 인천공항은 단군 이래 최대의 공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각종 진기록들로 가득차 있다. 부지면적 1700만평은 여의도의 18배 크기이며, 45만장의 설계도면을 쌓으면 15층 건물 높이에 이른다. 연건평 15만평 크기의 여객터미널은 여의도 63빌딩의 3.1배이며, 축구장 60개 크기이다. 또 바닥면적 기준으로 국내 최대의 건축물이자 단일 공항 건축물로는 세계 최대다. 관제탑은 세계에서 3번째로 높은 100.4m로 지진이 일어날 경우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복합 내진장치가 설치돼 있다. 인천국제공항고속도로의 영종대교는 2층 왕복 6차선 도로, 1층에 철도와 4차선 도로가 함께 붙어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교량이다.
2001년 한국계 미국인인 전신애씨, 차관보급인 미국 노동부 여성실장에 지명
한국계 미국인인 전신애(58)씨가 2001년 3월 29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의해 차관보급인 미국 노동부 여성실장에 지명됐다. 전씨는 부시 행정부에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는 최고위 행정부 관료가 됐다.
1943년 경남 마산에서 출생한 전씨는 지난 1965년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남편의 권유로 미국의 노스웨스턴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일리노이주 이중언어교육센터에서 일하다 2년 만에 난민교육센터 소장으로 승진했고, 1984년 주지사 선거에서 소수 민족을 대표해 열심히 뛴 공로로 아시아계 담당 주지사 특별보좌관에 임명돼 1989년까지 일했다.
이어 아시아계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일리노이주 정부 각료급인 재정담당국장(1989~1991)과 노동담당국장(1991~1999)을 맡았다. 전씨는 지명 당시 시카고의 ITR사 상무로 일하고 있었으며, 남편은 미국 국립 아르곤연구소 대기공학 연구부장이었다
1999년 제4차 북미 미사일 회담(평양. -30일)
1999년 미국 뉴욕증권거래소 다우존스 사상 처음으로 1만포인트 기록
1995년 한국, OECD 가입 신청
1994년 조계사 폭력사태
조계종의 새 총무원장을 선임하기 위한 종회를 하루 앞둔 1994년 3월 29일 서울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에서 서의현 총무원장 지지파와 서원장의 3선을 저지하려는 반대파간에 난투극 등 유혈충돌이 일어났다.
난투극 끝에 시위현장에서 반집행부측 승려와 학생 등 4백 76명이 연행됐고, 이중 폭력 사태에 적극 가담한 승려 14명이 불구속 입건됐다.
이번 사태는 서 원장과 `범승가종단개혁추진회` 사이의 종단개혁 방법에 대한 시각차로 발생했다. 이를 지켜 본 승가와 재가는 물론 우리 사회 전체가 모두 심각한 충격에 휩싸였다. 이 와중에서 중앙종회는 서의현 조계종 총무원장의 3선을 의결했다. 이로써 조계종 사태는 일단락 됐지만 분쟁의 불씨는 지속됐다.
1991년 고르바초프의 사임을 촉구하는 반정부시위 발생(5만여명)
1988년 맥도널드 서울 압구정동에 1호점 개점, 첫 한국 진출
1983년 미국 미사일요격(ABM)체제 집행위 설치
1980년 루마니아 신내각 발족
1975년 이집트대통령 수에즈 운하 통행재개 발표
1974년 진시황릉 첫 발견
1974년 3월 29일 양쯔파(楊志發)라는 농부가 가뭄에 신음하는 대지 위로 곡괭이를 내려찍었다. 곡괭이는 흙으로 빚은 사람 머리와 부딪치며 책에만 전해오던 진시황릉 발굴의 서곡이 됐다. 황릉을 지키던 흙인형, `병마용(兵馬傭)` 6000여명이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후 370여만명의 인력을 동원하여 장장 37년에 걸쳐 이 능을 완성했다. 진시황 사후 아들 진2세는 그를 안장할 때 이 능을 건축한 공인들이 능의 비밀을 누설할 것이 염려되어 모든 공인들을 전부 능안에 가두었으며, 왕궁내의 모든 미혼의 궁녀들을 진시왕과 함께 생매장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초패왕 항우와 농민 봉기군 황소가 이 무덤을 발굴한 적이 있지만, 그안의 보물을 전부 찾아내지 못했다고 한다. 그후에도 도굴꾼들에 의해 여러번 약탈당하고 심지어 90일동안 화염에 쌓였던 적도 있었다.
1973년 닉슨 미대통령, 베트남 전쟁종결을 선언
최후까지 남아있던 90명의 미군을 태운 C141 수송기가 1973년 3월 29일 오후 5시30분 남베트남 사이공으로부터 일본 요코다 기지로 향했다. 최대 54만을 기록했던 베트남주둔 미군병사가 모두 철수한 것이다. 투입 전비만해도 1380억달러, 사망자수만해도 4만6천명에 달한 미국의 베트남개입은 이로써 막을 내렸다.
북베트남은 `베트남인민의 승리`라는 짧은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대사관, 영사관등의 민간인을 포함한 3500명의 미국인이 남베트남에 남아있자 해방전선측은 위장한 군사요원이라고 비난했다.
닉슨대통령은 이날 TV방송을 통해 전쟁종결을 선언했다.
1967년 프랑스 최초 핵잠수함 진수
1966년 프랑스, 나토 탈퇴
1963년 서울대생 자유수호궐기대회
1963년 아르헨티나 군부 쿠데타
1961년 간첩 임경룡사건 발생
1957년 일본, 대한청구권 포기 및 을사보호조약 무효선언
1951년 국회, 국민방위군의혹사건 폭로
임시수도 부산에서 열린 피난국회가 1천여명에 달하는 희생자를 낸 국민방위군 의혹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진상조사단 구성안을 1951년 3월 29일 통과시켰다.
국민방위군은 6.25전쟁중 중국의 개입으로 상황이 악화되자 국가비상시 예비병력을 양성하고 병력동원을 신속히 하기 위해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남자는 제2국민병에 편입시키고 제2국민병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지방단위로 편입시킨다`는 내용의 국민방위군설치법이 1950년 12월 통과됨에 따라 조직됐다.
이들은 1.4후퇴 당시 간부들의 부정으로 1천여명에 이르는 대원들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 참극을 겪었다. 국회가 진상조사에 나서자 정부는 방위군을 4월 30일 해체하고 부정의 주범인 김윤근 사령관 등 국민방위군 간부 5명을 1951년 8월 총살해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
이로써 국민방위군 사건은 일단락됐지만 부정유출된 자금이 이승만 정부에 유입됐다는 항간의 의혹은 영원히 은폐되고 말았다.
1946년 걸스카우트 발족
1938년 뮌헨회담, 주데텐란트 獨양도 합의
1938년 3월에 오스트리아를 침공·합병한 히틀러가 다시 발톱을 세워 9월 초 체코령 주데텐란트를 요구하자 체코는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에 안전보장을 호소했다. 9월 15일 영국 총리 체임벌린이 독일로 날아가 히틀러와 마주앉았으나 향후 1주일간 무력 침공을 자제하겠다는 언질만 받아냈다. 독일과의 충돌을 피하고 싶었던 체임벌린은 프랑스 총리 달라디에와 이 문제를 협의한 끝에 체코를 독일에 넘기자는 결론을 내렸다. 체코는 “자신들의 평화를 위해 우리를 희생시킨다”고 볼멘소리만 했을 뿐 영·불의 합의를 따라야 했다. 힘 없는 국가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22일의 두 번째 회동에서 히틀러가 주데텐란트를 ‘즉시’ 넘기라는, 전보다 더 강경한 조건을 제시했을 때 체코와 영·불은 더 이상 밀릴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총동원령을 내리고 함대까지 동원하는 등 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최후 통첩을 보내자 언제 그랬느냐는 듯 영·불은 꼬리를 내리며 타협으로 방향을 틀었다.
9월 29일 당사국인 체코를 제외시킨 채 뮌헨에 모인 체임벌린·달라디에·히틀러·무솔리니는 밤샘 협상 끝에 주데텐란트를 독일로 양도한다는 ‘뮌헨협정’에 서명했다. 체코에는 비극의 시작이었지만 체임벌린에게는 전쟁을 예방한 영웅이라는 영국인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그러나 이듬해 3월 히틀러가 체코의 나머지 영토까지 점령함으로써 체임벌린은 평화의 사도에서 굴욕외교의 대명사로 전락했다
1937년 소설가 김유정 사망
늑막염과 폐결핵으로 가난과 병마에 시달려 온 소설가 김유정이 1937년 2월 29일 29세를 일기로 요절했다. 그는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휘문고보를 거쳐 연희전문 문과를 중퇴, 한때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금광에 몰두하기도 했다. 1935년 소설 `소낙비`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같은 해 소설 `노다지`가 조선중앙일보에 각각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사망할 때까지 불과 2년 동안의 작가생활을 통해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남길 만큼 그의 문학적 정열은 남달리 왕성했다. 데뷔작인 `소낙비`를 비롯 그의 작품은 주로 우직하고 가난한 농민이나 무식한 사람들을 통해 수많은 토속어와 직설적인 비속어, 갖가지 비유와 풍부한 어휘 등 특유의 문체를 선보였다.
대부분 농촌을 무대로 한 것인데 `금 따는 콩밭`은 노다지를 찾으려고 콩밭을 파헤치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을 그렸고, `봄봄`은 머슴인 데릴사위와 장인 사이의 희극적인 갈등을 소박하면서도 유머러스한 필치로 그린 그의 대표적인 농촌소설이다. 이외에 `동백꽃` `따라지` 등 30여 편의 단편과 1편의 장편, 그리고 1편의 번역소설을 남겼다.
춘천시 신동면에 김유정역이 있다
1929년 항공우편규칙 공포(4.1 시행)
1927년 월남 이상재 사망
충남 서천군 출생으로 젊어서 일본과 미국을 경험한 근대인이자 세계인이었다. 승지 박정양의 개인비서 수행원으로 10여 년간 지내다 우정국 주사, 워싱턴공사관 서기생, 승정원 우부승지 겸 경영참찬, 학부참사관, 법부참사관, 독립협회 부회장, 조선교육협회 회장, 조선YMCA연합회 회장, 소년척후단(보이스카우트 전신) 총재 등을 역임하면서 민족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924년 9월에 75세의 고령으로 조선일보 사장에 취임한 월남은 `조선 민족 대변기관`이란 기치를 내걸고 민족 신문의 틀을 닦았다. 그가 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조선일보는 우리나라 최초로 조석간을 발행하고 신문만화 '멍텅구리'를 연재했으며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를 채용했다. 그 덕에 조선일보는 재정난과 일제의 거듭된 탄압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 민족진영의 화합을 강조했다. 그래서 조선기자들의 단합과 좌우 민족진영 단합에 힘썼다. 그 결과가 신간회였다. 1927년 2월 15일 300여명이 모인 신간회 창립총회에 월남은 노환으로 참석할 수 없었지만 그는 만장일치로 회장에 추대됐다. 그만큼 좌우익으로부터 그는 존경받는 어른이었다.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창립총회
1912년 탐험가 스코트 남극서 동사
한번도 인간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은 곳, 그 남극점을 향한 인간의 처절한 도전이 시작된 것은 20세기 초였다. 20세기 최고 명승부로 꼽히는 이 치열한 경쟁에 아문센과 스코트라는 걸출한 두 탐험가가 달려들었다.
출발은 영국의 스코트가 빨랐다. 1910년 6월 1일 영국을 출항한 스코트는 탐험선 ‘테라 노바’의 뱃머리를 남극으로 돌렸다. 1904년에 남위 82도 17분에서 발길을 되돌린 적이 있어 스코트로서는 이번 탐험이 두 번째였다. 그의 조국 영국도 첫 북극점 정복을 미국에 빼앗겼던 터였다.
스코트가 호주의 멜버른항에 도착했을 때 한 전보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프람호가 남극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아문센. ” 노르웨이의 아문센이 ‘프람호’를 이끌고 2개월 늦게 탐험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아문센 역시 남극탐험은 두 번째. 대서양에서 북극해를 거쳐 태평양에 이르는 북서항로 항해를 최초로 성공했던 베테랑 탐험가 아문센의 돌연한 등장은 스코트에게는 충격이었고 위협이었다.
탐험의 성패와 생사까지 갈라놓은 것은 스코트의 준비소홀과 아문센의 치밀성이었다. 1911년 10월 20일, 기지를 출발한 아문센의 탐험대 5명이 남극점을 향해 썰매를 몰았다. 52마리의 썰매견이 썰매 4대를 끌었다. 12월 14일, 마침내 관측기 바늘이 90도에서 멈춰섰다.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것이다. 아문센보다 13일 늦게 출발한 스코트는 중도에 판단착오로 썰매를 끄는 말들과 개들을 돌려보내고 사람 넷이서 썰매 하나씩을 끌었다.
1912년 1월 18일, 마침내 스코트도 남극점에 도달했지만 그곳에는 이미 노르웨이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귀로에 있었다. 결국 돌아오는 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1명은 미쳐 죽었고 동상에 걸린 1명은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다. 스코트를 포함한 세 사람은 기지를 18km 남겨두고 부둥켜안은 채 죽음을 맞았다.
1896년 경인철도부설권 제임스 모스에 허가
1894년 동학당 정부에 청원
1891년 화가 스라 사망
1848년 미국의 모피 왕 애스터 사망
1790년 미국의 제10대 대통령(1841-45) 존 타일러 출생
1746년 카를로 보나파르트 출생
1461년 장미전쟁: 토우턴 전투 - 요크가의 왕 에드워드가 앙주의 마거릿을 물리친 후
즉위, 에드워드 4세가 되다.
1437년 갑산성(甲山城) 완공
1430년 오스만 제국 무라트 2세가 비잔틴 제국 도시 테살로니키를 점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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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중간까지 보았는데 좋은 일 보다 안 좋은 일이 많았네요